사진 속 낯익은 여자가 유난히 부드러운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강지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온지유는 그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지한 씨, 누가 메시지를 보냈어요? 뭐래요?”방금 메시지를 슬쩍 확인한 그녀는 사진 속 인물을 명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심미연이 다른 사람과 함께 찍은 사진이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강지한에게 보여줬다.심미연이 바람을 피웠다면 강지한은 당연히 이혼할 것이다.곧 온지유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두 사람이 하루라도 빨리 이혼할 수 있도록 부추겨야 한다.강지한은 빠르게 사진을 자기 휴대폰에 전송하고 지워버렸다.“스팸이야. 내가 지웠어.”온지유는 당황하다가 이내 그의 말을 알아듣고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아, 그래요. 고마워요.”강지한은 전화기를 다시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담배가 당기네. 나가서 피고 올게.”온지유는 전화기를 들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다녀와요.”강지한은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온지유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담배를 피우긴, 전화를 걸어 심미연을 욕하려는 거겠지.’그녀는 두 사람이 최대한 많이 다투기를, 차라리 빨리 싸우고 당장이라도 이혼하기를 바랐다.강지한은 병동 밖으로 걸어 나와 육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지한이?”육현성은 온지유와 강지한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온지유가 강지한에게 자신이 보낸 메시지를 보여준 것도 몰랐기에 강지한의 전화를 받고 살짝 당황했다.“심미연 어디서 봤어?” 강지한이 곧바로 묻자 육현성은 당황하다가 정신을 차렸다.“지금 큰형수님과 같이 있어?”“네가 찍은 사진 봤어.”“병원 앞에서.”강지한은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육현성은 전화기에서 들리는 신호음에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무슨 뜻이지?’고민 끝에 그는 황급히 온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현성 오빠, 무슨 일이에요?”“방금 지한이한테 전화가 왔는데 내가 보낸 사진 보여줬어요?”“손이 부
“긴장하지 말고 힘 푸세요. 아니면 검사할 수 없어요.”의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초보 엄마들은 다 그래요. 그래도 배 속의 아기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기는 생각보다 강해서 쉽게 유산되지 않아요.”심미연은 의사의 말에 겨우 안심했다.의사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진찰하고 배를 만지며 몇 가지 질문을 한 뒤 이렇게 말했다.“바지 입고 내려오세요. 약 처방해 드릴게요.”그러고는 장갑을 벗어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손을 씻고 닦은 다음 책상 앞에 앉았다.심미연은 바지를 입고 침대에서 일어나면서도 여전히 배가 아파서 문지르며 의자에 앉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선생님, 제 아기는 괜찮아요?”그때 문 앞에서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연아, 휴대폰을 차에 두고 내렸어.”심미연은 고개를 돌려 문 앞에 서서 휴대전화를 손에 든 채 온화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박유진을 발견했다.“남편분께 드릴 말씀이 있으니 들어오시라고 해요.”의사의 눈은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심미연에게 말을 건넸다.“저 사람은...”심미연이 막 설명하려던 찰나, 박유진이 다가와 전화기를 건네며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였다.“괜찮아.”의사는 박유진에게 진단서를 건네며 심각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부인께서 아직 임신 3개월이 채 안 됐으니까 부부 관계는 절제하시고 도저히 못 참겠으면 하더라도 조심스럽게 해야 해요. 오늘은 작은 출혈이지만 다음엔 유산할 수도 있어요. 임신 초기 3개월은 성관계를 피하는 것이 좋으며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으면 각방을 쓰시는 걸 추천해 드려요. 3개월 지나면 괜찮을 거예요.”의사로서 정력이 넘치는 젊은 부부를 수없이 만났고 잦은 성관계를 가진다는 걸 알지만 임신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임신했다면 배 속의 아기를 생각해야 했다.의사의 말에 심미연은 얼굴이 빨개지며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박유진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여전히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의사에게 말했다.“네,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
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아뇨.”박유진은 입술을 다물고 심미연을 돌아보다가 결국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강지한이 무서운 게 아니라 괜히 말했다가 강지한이 심미연을 힘들게 할 것 같았다.지금 심미연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마음 아픈데 더 이상 그녀를 힘들게 할 수는 없었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박유진의 미련 가득한 시선이 심미연에게 향했지만 그대로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박유진이 떠난 후 강지한은 심미연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화가 난 탓인지 그에게선 적대적인 기운이 짙게 풍겼다.심미연은 박유진이 소개해 준 대형 프로젝트에 관해 신하린과 통화 중이었고 어쩔 수 없이 박유진 얘기를 꺼냈다.신하린이 물었다.“이혼하고도 만날 생각은 없는 거야?”다정한 박유진이 강지한보다 몇 배는 나았고 어떤 여자라도 그와 함께라면 행복할 것 같았다.심미연이 미간을 꾹 눌렀다.“나랑 오빠는 안 되는 사이야.”과거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무의식적으로 몸이 떨렸다.몇 년이 지난 후에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두려움을 주체할 수 없었다.신하린은 한숨을 쉬었다.“그렇게 좋은 남자를... 아깝게.”심미연은 피식 웃었다.“오빠는 좋은 사람이지. 하지만 함께하지 않아도 아쉽지는 않아.”강지한도 경성에서 가장 훌륭한 남자였지만 그와 이혼해도 미련 하나 남기지 않는 것처럼 사람이 항상 과거에 머물 수는 없다.아니면 새 삶을 시작할 수가 없으니까.강지한은 이 말을 듣고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익숙한 소리에 심미연은 놀란 듯 고개를 돌렸고 마침 남자의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을 마주한 그녀는 흠칫하며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나 일이 있어서 먼저 끊을게.”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고 천천히 돌아서 강지한과 마주한 그녀는 문득 임신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손에 든 처방전을 등 뒤로 숨겼다.“온지유 보러 간 것 아니야? 왜 여기 있어?”‘일부러 날 찾아온 것 같은데, 온지유가 보내줬다고?’강지한이 피식거렸
그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한 마디를 뱉어냈다.심미연은 처방전을 꺼내 강지한에게 보여주며 조금 전 진료실에서 의사가 당부했던 말을 전하려 했지만 강지한의 말을 듣고 처방전을 가방에 욱여넣고는 고개를 들어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다. 다시 강지한을 바라보는 그녀의 여리고 작은 얼굴에는 완벽한 미소가 지어졌다.“요 며칠 속이 메스껍고 토하고 싶어서 임신한 줄 알고 검사받으러 왔는데 임신이 아니라 위가 안 좋다네. 당분간 약 먹으면 나아질 거래.”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에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미소는 전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강지한은 비웃었다.“위가 안 좋은데 남자가 에스코트까지 해줘?”그는 여전히 박유진의 존재를 신경 쓰고 있었다.심미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질투해?”물론 강지한이 질투할 리가 없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그를 역겹게 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다.“그럴 리가!” 강지한은 차가운 얼굴로 돌아서서 걸어갔고 심미연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심호흡했다.강지한이 억지로 처방전을 꺼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숨길 수 없었을 테니까.생각해 보니 강지한은 온지유의 기분이 좋은지, 배 속의 아이가 괜찮은지 신경 쓰느라 그녀가 어디 아픈지, 무슨 병에 걸렸는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이로 인해 그녀는 임신 사실을 그에게 말하려는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손을 뻗어 배를 문지르며 속삭였다.“아가, 미안해.”결혼한 3년 동안 그녀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국 돌아온 건 이혼이었다. 고통스럽지 않은 게 아니라 고통스러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다음에는 그녀를 사랑하고 가슴에 품어주는 남자를 만나겠지.강지한은 엘리베이터에 들어섰을 때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심미연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어지면서 그녀를 부르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닫힘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에 몸을 기댄 강지한의 머릿속에는 박유진을 바라보는 심미연의 눈빛에 담긴 그리움만 떠올랐다.왠지
“네, 대표님.” 성무진은 정중하게 말했다.“온지유 교통사고 조사 결과 나왔어?” 강지한이 깊은 목소리로 물었다.카트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가 그를 흘깃 쳐다봤다. 어머나! 너무 잘생긴 남자다!“경찰이 아직 조사 중입니다.”“지금 당장 사람 보내 알아보고 30분 안에 전화해.”“대표님께선 온지유 씨의 교통사고가 누군가의 지시에 의한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강지한을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답게 강지한의 한 마디로 그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사람 보내서 알아보는 거야. 결과는 몰라.”당연히 강지한은 문 앞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성무진에게 알아보라고 지시한 거다.육현성이 진실을 알아내려고 하니 그보다 먼저 알아내서 심미연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그 생각이 들자 순간 멈칫했다.심미연이 했든 안 했든 그와 무슨 상관이지?“그러면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보죠.” 성무진은 마음속으로 막연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빨리 움직여!” 그는 육현성보다 먼저 결과를 알아내기 위해 서둘러야 했다.성무진은 알았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강지한은 닫힌 병동 문을 힐끗 쳐다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1층 약국에서 약을 받기 위해 줄을 서던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강지한의 모습을 보고는 그에게 들킬까 봐 황급히 고개를 낮춰 자신의 존재를 감췄다.강지한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주차장으로 향했다.심미연은 멀리서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심미연 씨, 약 받아 가세요.”목소리를 들은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거두며 약을 받기 위해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약국 의사는 포장지 상단에 적힌 대로 복용하라는 말 한마디를 건넸고 심미연은 알았다고 대답한 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약을 챙겨 자리를 떴다.병원 정문을 나오던 그녀는 아까 자신을 병원까지 데려다준 사람이 박유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급히 휴대폰을 꺼내 택시를 불렀다.강지한은 차를 몰고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푹 쉬어.”그렇게 말한 뒤 강지한은 전화를 끊었다.전화기를 내려놓은 그는 서류를 집어 들고 살펴보기 시작했다.하지만 반나절이 지나도록 서류 하나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온지유의 병실 밖에서 들었던 두 사람의 대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문 두드리는 소리가 그의 생각을 방해했고 그는 손에 든 문서를 내려다보며 외쳤다.“들어와.”성무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대표님.”강지한은 그를 올려다봤다.“트럭 운전기사가 누가 시켜서 한 짓이랍니다.”성무진은 이쯤에서 감히 더 이상 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가 아는 사모님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상대는 그녀가 시켰다고 주장하며 계좌 이체 기록까지 제시했다.확실한 증거에 사모님의 억울함을 풀려면 도움을 받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강지한은 성무진의 표정을 보고 바로 알아챘다.심미연이다!심미연은 택시를 타고 로펌으로 돌아오던 중 경찰서에서 살인 교사 혐의로 수사에 협조해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경찰서 사람들과 꽤 친분이 있던 그녀는 무슨 일이냐며 물었고 경찰서 측에서 조용히 사실을 알려주고는 그녀에게 반드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굴며 와서 수사에 협조하라고 했다.심미연은 의자에 앉을 틈도 없이 서둘러 다시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사라지자 백현지는 곧바로 임현에게 달려가 소식을 알렸다.“임현 씨, 아까 미연 씨 무슨 전화 받았어요? 표정이 살벌하던데.”흥미로운 표정이었다.임현은 서류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궁금하면 직접 물어봐요. 나도 모르는데 나한테 물어보면 내가 어떻게 알아요.”알아도 알려줄 리가 없었다.심미연 일인데 왜 뒤에서 함부로 떠들겠나.“이제 리우에 새로운 대표님이 오시고 팀장도 낙하산으로 들어와서 사사건건 심미연 씨를 압박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여기 있을지는 모르죠. 비서로서 빨리 다른 계획을 세워야 하지 않겠어요? 왜 계속 미연 씨만 싸고돌아요?”백현지는 경멸에 찬 말투와 표정을 보였다.임현은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웃었다.“그렇게 멀리 내다보시
회사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심미연은 발걸음을 멈췄다.“안녕하세요, 누구를 찾으시나요?”“그쪽 대표님 만나러 왔는데요.” 심미연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려고 노력했다.“약속 잡으셨나요?”프런트 직원은 그녀를 들러붙으려는 다른 여자들과 같은 사람으로 보고 말투가 차가워지며 다소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이 말을 들은 심미연은 오늘 강지한에게 직접 전화를 걸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여자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바로 휴대폰을 꺼내 강지한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처음 걸었을 때 전화가 끊기자 그녀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또 끊어버렸다.심미연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콧방귀를 뀌며 성무진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성무진은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사모님, 안녕하세요!”“저 지금 회사 1층 로비에 있는데 데리러 와요.”그리고는 성무진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위층에서 성무진은 전화를 받은 후 사무실로 달려가 보고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아래층에 있는데 제가 모시러 갈까요?”강지한은 미간을 문지르며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올라오라고 해!”아래층에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전화한 건가?감히 회사까지 찾아오다니, 분명 온지유 교통사고 때문일 거다.‘참 대담해, 그런 짓을 하고도 감히 찾아왔다니!’성무진은 곧바로 프런트에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미연이 위층으로 올라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살기 가득한 그녀의 표정을 보며 성무진은 심장이 철렁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챘다.‘사모님은 대체 뭐 하려는 걸까?’“성 비서님 나가 있으세요. 그쪽 대표님과 할 얘기가 있어요.”심미연은 이 일이 자신과 강지한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했고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성무진은 강지한에게 의견을 구하는 듯 그를 돌아보았다.“가서 물 한 잔 가져와.” 강지한이 명령하자 성무진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그는 곧 물 한 잔을 따라와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서둘러 다시 자리를 떴다.심미연이 강지한
심미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컵에 담긴 물을 강지한의 얼굴에 뿌렸다.“당신이랑 그래도 3년 동안 부부로서 매일 밤 같은 침대에서 잤으니까 여기 오기 전에는 내가 어떤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도 당신이 내 결백을 믿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네. 이번 일 사실대로 밝히고 싶으면 뒤에서 수작 부리지 마. 내가 꼭 진실을 밝혀줄 테니까.”지금 강지한을 찾으러 여기 올 게 아니라 바로 병원으로 가서 온지유를 한바탕 두들겨 팼어야 했다.강지한은 손을 뻗어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내고는 검은 눈동자로 심미연을 바라보며 비웃었다.“그렇게 자신 있는데 왜 나한테 와서 큰소리야?”이 여자가 무슨 배짱으로 그에게 물을 뿌리는 걸까.그와 시선을 마주한 심미연은 진작 마음이 산산조각 났다.이번에야말로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이 일이 밝혀지면 그와 온지유의 소원대로 반드시 강지한과 이혼할 거다.한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갑자기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며 정적을 깨뜨렸고 강지한이 휴대전화를 꺼내자 심미연은 화면에 뜬 온지유 이름에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심미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오붓하게 통화해.’강지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잃을 것 같은 막연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불렀다.“심미연!”심미연의 발걸음이 살짝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사람 시켜서 교통사고에 대해 조사할 거야.”그가 당황했다.심미연에게 뭘 해명할 생각도 없었고 그녀가 화를 내거나 속상해하는 것은 더더욱 신경 쓰지 않았다. 다 큰 성인인데 그녀의 감정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으니까.하지만 이번엔 심미연의 감정이 조금 신경 쓰였다.“전화 받고 얘기해.”3년 동안 심미연은 한가지 규칙을 발견했다. 강지한과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풀릴 기세가 보이면 온지유는 전화를 걸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둥, 몸이 안 좋다는 둥 온갖 핑계를 댔고 강지한은 매번 철석같이 믿으며 심미연을 혼자 버려둔 채 온지유에게 달려갔다
남자는 곧 답장했다.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언제 시간이 되는지 물어본 후에 알려 주겠다고 말이다.한유나는 휴대전화를 쥐고 손끝으로 화면 글씨를 쓰다듬으며 안심했다.질문을 하는 대로 바로 대답하는 이것이 아마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이진영은 힘겹게 신하린을 차에 태우고 운전석에 앉자마자 한유나의 문자를 받았다. 그는 백미러 속 여자의 얼굴을 힐끗 한 번 보고 문자를 빠르게 편집해 답장했다.그와 한유나의 관계가 좋을수록, 안정적일수록 차 뒷좌석의 여자도 안전해진다.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녀와 결혼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지만 그녀를 평생 곁에 묶어두고 싶었다.굳이 그녀를 묶어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아마 그는 그녀의 마음속에 박유진만 있는 것을 못마땅해서였을 것이다.문자를 보낸 후 그는 어머니의 번호를 눌렀다."진영아, 늦은 시간에 전화한 건 무슨 일 있는 거야?" 어머니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엄마, 나 오늘 한유나 씨랑 만났는데 서로 느낌이 괜찮았어요. 아빠랑 시간을 내서 유나 씨 부모님이랑 같이 밥 먹으면서 관계를 정하는 게 어때요?”이진영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듯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지금 바로 네 아빠와 상의해 보고 이따가 답장할게.”길게 내뱉는 방혜자의 목소리에 희열이 역력했다.그녀는 정말 꿈에서라도 이진영과 한유나를 맺어주고 싶었다.“알았어요.”이진영은 응낙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방혜자는 당사자보다 더 조급해져 반드시 빨리 결정하리라 마음먹었다.그는 결혼식에 나오기만 하면 되고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다.전화를 끊자마자 뒷자리에 누운 여자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긴 머리카락이 그 작은 얼굴을 가리고 있어 어둠 속에서 조금 무서웠다.“이진영, 개자식! 지질남!”여자는 목청을 돋우어 욕했는데 술을 마신 그녀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이진영의 안색이 갑자기 보기 흉하게 변했다.그는 그녀 외에 다른 여자를 건드린 적이 없는데 쓰레기라니.“이진영, 안아줘...”
한유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이씨 가문과 한씨 가문이 조건이 맞으니 제가 이진영 씨와 선을 본 것도 당연해요.”그녀는 이진영과 선을 보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과도 선을 봐야 한다.오늘 저녁에 이진영과 지내보니 이진영이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그녀는 만족했다.육현성은 조용히 술을 마셨다.한유나의 말이 맞았다. 그들 같은 집안에서 태어나면 결혼은 가문끼리 조건이 맞아야 한다.온씨 가문은 이미 초라해졌고 온지유는 과부라는 신분까지 있다...그와 온지유는 함께 있을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서 좀 괴로웠다.한유나는 그가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여 얼떨결에 말했다.“술로 근심을 풀기보다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해요.”무슨 일이든 해결 방법이 있으니 당장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걱정할 필요 없다.육현성은 고개를 들어 컵 속의 술을 다 마시고는 웃으며 말했다.“문제가 좀 있는데 답이 없어요. 하지만 저도 이미 포기했어요.”온지유와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었으니 묵묵히 지켜보는 수밖에.“이미 해결책을 찾았나 봐요.”잘 모르는 사이라 한유나는 계속 물을 이유가 없었다.그때 박인우이 돌아왔다.“지한이는 찾았어?”육현성이 물었다.“못 찾았어요. 하지만... 전화했더니 졸려서 벌써 집에 가서 잔대요.”박인우가 사실대로 말했다.그는 항상 어딘가 이상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디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도 그만 헤어지죠. 네가 한유나 씨를 집에 데려다줘.”육현성이 술잔을 놓고 일어서자 한유나도 따라 일어섰다.“제가 전화해서 기사에게 데리러 오라고 할 테니 데려다줄 필요 없요.”“그건 안 돼요. 진영 형이 떠날 때 집까지 바래다주라고 당부했어요. 가요, 제가 데려다줄게요.”박인우가 다가가 가방을 들어주고 외투를 건넸다.이진영이 분부한 일을 그는 당연히 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일이 힘들어질 것이다.“평소 연구소에서 밤늦게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실례할게요. 미안해요.”이진영은 태도가 좋고 표정도 온화해서 오히려 한유나가 함부로 추측하기 미안하게 했다.“급한 일이면 어서 가보세요.”“진영 형,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유나 누나를 안전하게 집에 데려다줄게요.”박인우는 이진영이 그를 믿지 않을까 봐 가슴을 치며 다짐했다.“한유나 씨, 괜찮겠어요?”이진영은 서둘러 떠났지만 내색하지 않고 온화한 표정으로 한유나에 물었다.남자가 너무 부드러웠는지 한유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어서 가 봐요.”이진영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살짝 만지고 말했다.“참 착해요.”한유나는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어서 가요.”그들은 오늘 처음 만났는데 이 남자의 행동이 너무 다정하게 느껴졌다.하지만 그녀는 뜻밖에도 싫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조금 마음에 들었다.“그럼 나 먼저 갈게요. 더들 즐겁게 마셔! 이 술은 내가 살게!”이진영은 호기롭게 말하고 갔다.한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렸다잠시 후에 그녀는 돌아가서 엄마에게 부탁해 사람을 찾아 알아보라고 했다.그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그녀는 아직 사랑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한유나 씨, 계속 마셔요.”육현성은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고는 잔을 들어 그녀와 부딪쳐 고개를 들어 단숨에 마셨다.엄마는 그에게 이진영의 여동생과 접촉해서 그들과 어울리게 하려고 했다. 원래는 이따가 이진영과 이 일을 이야기해서 이진영의 태도를 보려 했는데 이진영이 떠났으니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둘이 술을 마시는 동안 박인우는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육현성은 술에 취해 손목을 들어 시간을 보다가 박인우에게 물었다.“강지한이 어디 갔어?”박인우는 어리둥절해 하며 말했다.“방금 진영 형이랑 같이 나간 거 아니었어요? 설마 진영 형 집에 따라갔나?”이진영이 집에 일이 있다고 하니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했다.육서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강지한을 잘 알고 있었다. 설령
“신하린? 무슨 일이야?”이진영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들려오자 심미연이 입술을 깨물고 말을 하려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왜? 네 여자가 조사 중이야?”“신하린, 말을 해!”이진영은 강지한을 힐끗 쳐다보더니 여자가 놀랄세라 말투를 부드럽게 했다.심미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신하린이 술에 취했는데 지금 시간이 있으면 구연궁으로 데리러 와요.”이진영은 곁에 있는 무뚝뚝한 얼굴을 한 남자를 힐끗 쳐다보고 대답했다.“알았어요. 금방 갈게요.”심미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혼자 오면 돼요. 강지한이 따라오지 못하게 해요. 보고 싶지 않으니.”외할머니의 죽음을 겪으면서 강지한에 대한 애정이 사라진 그녀는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고 그의 변명 따위 더는 듣기 싫었다.해명해도 가슴에 자국이 남는 일이 있는데, 지나간 일에 얽매이기보다는 마음을 추스르고 배 속의 아기를 잘 돌봐야 한다.이진영은 누군가에게 강요당해 억지로 스피커폰을 켰는데 심미연의 말은 그대로 누군가의 귀에 들어갔다.누군가가 곧 얼굴을 붉혔다.이 여자는 이진영에게 데리고 오지 말라고 특별히 부탁했다.그녀는 얼마나 그가 보고 싶지 않은 걸까.이진영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움을 느끼며 얼른 대답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고개를 돌렸을 때 강지한의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쳤지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슬픔 가득한 모습 좀 봐.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차인 줄 알겠어.”“심미연이 이혼하재.”강지한은 차가운 얼굴로 그 말을 할 때 마음속에 짜증이 났다.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출장중이었는데 먼저 전화해서 이 일을 알려주지 않았으니 이일은 그의 잘못만은 아니었다.그러나 심미연은 이 기회를 빌려 그와 이혼하려고 했다.결혼 3년 만에 처음으로 심미연이 이혼 얘기를 꺼낸 것은 두 달 전이었다.그는 그녀가 단지 투정 부리는 거로 생각했다.오늘 밤 문 앞에서 그녀가 캐리어를 끌고 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심미연은 처음 이혼을 제의했을 때부터 그
그 뒤를 이어 육현성이 캐주얼한 차림이지만 온화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감추지 못한 채 들어왔다.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어 자기도 모르게 사람들과의 거리를 좁히는 듯했다.박인우는 갓 취직한 직장인의 모습으로 주변 사물에 대한 호기심과 평가로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룸에 들어선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시선이 한유나로 쏠렸다.한유나는 테이블에 단정히 앉아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를 간단하게 묶었는데 잔머리 몇 가닥을 뺨에 늘어뜨려 부드러움과 우아함을 더했다. 탐구하는 듯한 그들의 시선에 미소로 화답하는 한유나의 여유와 대범함이 호감을 자아냈다.인사와 자기소개를 주고받자 화기애애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바뀌었다.이진영은 한유나와의 관계, 그리고 앞으로 부부가 될 가능성이 큰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했다.한유나 역시 이 감정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거침없이 언급하며 미래에 대한 기대와 태연함을 드러냈다.그녀의 솔직함에 이진영은 부끄러웠다.그의 표정을 살피던 강지한은 친구로서 어깨를 툭툭 치며 함께 화장실에 가자고 손짓했다.은밀하고 조금 비좁은 공간에서 강지한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후 한 모금 깊이 들이마시고 연기를 내뿜으며 엄숙하지만 관심 어린 어투로 물었다.“진영아, 넌 항상 신하린과 함께 있지 않았어? 왜 갑자기 한유나와 이런 관계가 생겼어?”그의 눈빛에는 의심과 걱정이 섞여 있었는데 이진영의 감정 세계에 관심이 많은 게 분명했다. 이진영은 복잡한 얼굴로 강지한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어 자신의 마음가짐과 현재 상황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짧지만 깊어 오랜 우정의 깊은 호흡을 드러냈다.그 시각 경궁.신하린은 기분이 좋아 술을 많이 마시는 바람에 얼굴이 붉어지고 눈동자에 희미하고 억척스러운 빛이 반짝이며 알코올이 주는 짧은 즐거움과 끝없는 근심이 뒤섞인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쓰레기! 개자식!”취해서 약간 쉰 듯한 목소리였지만 말끝마다 또박또박 감정적으로 모든 불만과
이진영은 몸을 움직여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영롱한 술잔의 가장자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있었는데 그 동작 속에는 끝없는 이야기와 못다 한 정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한유나의 마음속에 좋지 않은 생각이 스쳤다.이어 남자의 목소리가 가볍게 귓전에 들려왔다.“우리 같은 가정에서 태어나면 결혼의 선택은 종종 개인적인 감정의 경계를 넘어 가족의 책임과 기대 때문에 꽁꽁 묶인다는 것을 한유나 씨도 알잖아요. 그래서 내 마음 깊은 곳에 사랑하는 여자가 숨겨져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결혼이 양가 부모님을 만족시킬 수 있고 한유나 씨와 나 사이에는 적어도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에요.”그는 이 말을 할 때 눈빛을 알 수 없는 곳에 두었는데 마치 그곳을 꿰뚫고 누군가를 보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런 눈빛이 한유나의 마음을 이유 없이 옥죄게 했다.그녀는 사실 이진영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대면했을 때 그녀는 마음이 유난히 아팠다.“한유나 씨, 이 문제는 내가 직접 대답할 수 없어요.”이진영은 시선을 거두며 술 한 잔을 마셨다.신하린에 대한 소유욕도 있고 침대 위에서의 느낌도 좋아하지만 신하린과의 관계를 여자친구로 생각하지 않고 기껏해야 침대 동반자라고 할 수 있었다.서로 환심을 사며 몸의 위로를 찾는 그런 관계 말이다.한유나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매운맛이 위까지 올라와 마음이 너무 아팠다.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겉으로 보이는 평온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가볍게 웃었다.“그렇다면 제 이해를 말할게요. 이진영 씨에게 여자가 있지만 여자친구가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우리가 결혼한다면 이진영 씨는 그녀와 연락을 끊어야 해요.”그녀는 자신과 이진영이 아마도 이 가족의 혼인에 있어서 세심하게 배치된 두 개의 바둑알처럼 자신의 방향과 귀착점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 인식이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현실을 직시하고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남은 인생이
한유나는 이진영의 뒤를 따라 걸어가며 코끝에 전해지는 남자의 은은한 재스민 향을 맡았다.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이진영이 도대체 어떤 남자인지 상상하게 되었다.“앉으세요.”소리를 듣고서야 한유나는 정신을 차렸다.어느덧 두 사람은 룸에 들어섰다.“왜요? 제가 잘생겼어요? 왜 계속 이렇게 쳐다봐요?”이진영이 웃으며 조롱하는 걸 보니 두 사람은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처럼 느껴졌다.분명히 두 사람은 오늘에야 처음 만났는데 말이다.한유나는 허리를 숙이고 자리에 앉아 고개를 돌려 남자에게 감사를 표했다.이진영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자 종업원이 술과 간식을 배달해 왔다.이진영은 잔을 들고 술을 따랐다.그를 바라보는 한유나의 표정은 담담해 보였지만 마음속에는 이미 호감이 조금 생겼다.얼굴도 잘생기고 상냥한 그런 남자는 아마 모든 여자가 좋아할 것이다.“마실 수 있으면 조금 마시고 아니면 음료수를 다시 주문할게요.”이진영은 술을 다 따르고 방금 그 일이 생각난 듯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미안해요. 아까는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한유나는 손을 뻗어 술 한 잔을 들고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조금 마실 수 있으니 음료는 주문 안 해도 돼요.”이진영은 잔을 들며 말했다.“이 술은 사과의 의미로 마실게요.”한유나는 그의 진지한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이 사람이 책임감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다.적어도 그는 그녀에게 진지하게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다.다른 남자였으면 벌써 핑계를 대고 빠져나갔을 텐데 말이다.이진영은 그녀가 어리둥절해 하는 것을 보고 그녀와 함께 마신다는 말도 없이 한 잔을 단숨에 해치웠다.한유나도 그의 모습을 보고 술잔을 비우고 티슈를 꺼내 입을 닦으며 이진영과 눈을 마주쳤다.“이진영 씨, 나랑 같이 있기로 했으면 이제부터 심각한 질문을 할 거예요.”이진영은 다시 술병을 들고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내가 총각인지 묻고 싶은 거라면 진지하게 말해줄게요. 아니에요.”한유나가 무엇을 물어볼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그가
생각하던 중 휴대폰 벨이 울렸다.이진영이 눈썹을 찡그렸다.‘설마 신하린 이 여자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음식을 들고 와서 같이 밥을 먹자는 건가? 흥! 그러면 태도가 좋은 걸 봐서 그렇게 심하게 굴지 말아야지.’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손을 뻗어 휴대폰을 꺼냈다.하지만 화면에는 강지한이라는 이름이 떴다.‘왜 강지한이 갑자기 전화한 거지? 무슨 일이 있는 건가?’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술 마시러 나와.”강지한의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야, 왜 갑자기?”이진영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강지한이 기분 나쁜 건가? 오죽하면 나를 찾아 술을 마시려는 거지?’“말이 너무 많아. 늘 가던 곳으로 와.”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다.이진영은 휴대전화를 접고 젓가락을 들어 탁자 위의 야채 요리를 다 먹은 후에야 집을 나섰다.차를 몰고 클럽에 도착하자 그는 그 여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듯했다.그는 미간을 비비고 나서야 여자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한유나 씨.”그는 주동적으로 말을 꺼냈지만 표정은 냉담했다.“어제 저를 바람맞혔어요.”여자는 긴 머리를 쓸어넘겼는데 분위기가 싸늘했다.“어제 급한 일로 출장을 가서 전화하는 걸 깜빡했어요. 미안해요.”이진영의 제대로 설명했다.한유나는 명문가 아가씨이고 연구소에서 일하는데 많은 남자 마음속의 여신이었다. 그래서 아마 감히 그녀를 바람맞힌 사람이 그가 처음일 것이다.한유나는 정말 화를 내 마땅했다.“사과는 말로만 하는 게 아니에요.”한유나는 청초한 얼굴에 하는 일까지 좋아 사람들에게 늘 깔끔한 여자라는 느낌을 줬다.“친구랑 같이 왔어요? 초대해서 같이 술 한잔할까요?”이진영은 까칠함을 거두며 온화하게 말했다.“이진영 씨, 물어볼 게 있어요.”평생의 큰일에 관해 한유나도 이진영과 함께 있는 것이 사랑 때문일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속마음을 분명히 묻고 싶었다.손님 대하듯 서로 존경하는 것이 매일 싸우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이진영은 웃
강지한은 차를 잡고 있던 손이 마치 보이지 않는 힘으로 갑자기 움켜잡힌 듯 그의 마음까지도 얼어붙게 했다. 창밖의 밤은 깊고 먹물처럼 어두웠으며 실내의 조명은 흐릿하게만 그를 비추고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지금 그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이 일을 심미연에게도 말한 걸까?’‘그렇지 않다면 심미연은 왜 이렇게 단호하게 이혼을 결심한 걸까?”강준형이 입을 열었다. “내가 이미 경고했잖아. 그 애 일에 너무 개입하지 말라고! 근데 넌 내 말을 그냥 흘려들었지!” 강준형의 목소리는 낮고 강렬했으며 그 한마디 한마디가 강지한의 가슴을 거듭 내리치며 파고들었다. 강지한은 잘 알고 있었다. 강준형이 진성과 온지유에 대해 언급한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고 분명 예전부터 사람을 시켜서 조사를 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아는 일이면 심미연도 다 알고 있는 걸까?’강지한은 아무 말 없이 고요히 침묵을 지켰다. “온지유는 겉으로 보기엔 여린 듯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 강준형의 말에는 약간의 무력함과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나는 젊은 후배의 일을 이렇게 뒤에서 평가하는 게 본의는 아니었지만 네가 그저 이 늪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심지어 미연이까지 잃었다는 걸 보고는 그냥 지켜볼 수가 없더라. 혹시 넌 생각해 본 적 있어? 그 애의 착한 모습이 어쩌면 그저 교묘하게 짜놓은 덫일지도 모른다는 걸. 그 목표는 바로 너고”강준형은 그 말을 하던 중 가볍게 한숨을 쉬었고 그 한숨은 마치 세월을 넘는 깊은 한숨처럼 약간의 세월의 흔적과 슬픔이 섞여 있었다. “강지한, 그거 알아?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은 대부분 가장 부드러운 미소 뒤에 숨겨져 있어.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그걸 미리 읽을 수는 없단다.” 그 순간 공기가 마치 얼어붙은 듯했고 밖에서 가끔 들려오는 밤바람의 속삭임만이 이 공허함을 채우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강지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심미연의 외할머니가 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