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한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덤덤하게 말했다.“그래.”“그러면 미연 씨가 사과를 하면 내가 직접 경찰서에 가서 고소를 취하하는 게 어떨까요, 지한 씨?”달래는 듯한 말투였다.“지한 씨...”머뭇거리는 온지유가 난감한 듯 보였다.“할 말 있어?” 강지한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심미연은 남자를 힐끗 쳐다보았다.셔츠가 젖어 가슴에 꽉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 절제되고 섹시했다.심미연은 수년 전 강지한을 처음 봤을 때 믿기지 않는 그의 얼굴에 반해 바로 넘어갔던 걸 떠올렸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자신이 참 한심했다.온지유는 망설이다가 말했다.“미연 씨가 내 번호를 차단해서 연락이 안 돼요.”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내가 데려갈게.”“지한 씨, 미연 씨가 원하지 않으면요?”온지유가 다시 물었다.“잘못했으면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지. 됐어, 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몸조리나 잘해.”“지한 씨, 미연 씨가 원하지 않으면 너무 강요하지 마요.”“내가 이따가 데려갈게”이 말을 들은 온지유는 뜻대로 흘러가자 순순히 강지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강지한의 이 말을 들은 심미연은 마음속으로 막연한 안 좋은 기분이 들었다.온지유가 무슨 말을 했을까.“심미연, 지금 나랑 같이 병원으로 가.”강지한은 휴대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심미연을 향해 걸어가며 강압적인 어투로 말했다.심미연은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야?”온지유가 또 무슨 짓을!강지한이 말했다.“네가 사람을 시켜서 지유를 차로 쳤잖아. 다행히 지유는 다른 데는 괜찮은데 손만 부러졌고 뱃속 아기도 멀쩡해. 나랑 같이 병원에 가서 지유에게 사과하면 지유가 바로 고소 취하할 거야.”이 말을 들은 심미연은 경악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그 여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꾸민 일인데 내가 그런 거라고 모함하고 나한테 사과까지 하라는 거잖아. 어떻게 그런 허술한 연기에 속아?”이노하이브를 인수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이노하이브를 사상 최고치로 끌어올리는
어쨌든 이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모든 증거가 심미연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에 배후는 그녀가 될 수밖에 없었다.온지유가 고소하면 심미연은 법의 심판을 받는다.이제 온지유에게 사과만 하면 될 일인데 뭐가 문제일까.심미연은 이를 악물고 분명하게 말했다.“강지한, 나한테 계속 이렇게 상처를 주면 언젠가 내가 당신한테 너무 상처받아서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강지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떠날 생각이 있었다면 진작에 떠났어야지! 3년이나 기다릴 게 아니라!” 그의 말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심미연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강지한의 말이 맞다. 그녀는 떠나지 못한다.그에게 계속해서 상처받으면서도 그녀는 필사적으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곁에 남아있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전에는 그것이 깊은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자신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강지한의 눈에 그녀의 사랑은 아무 가치도 없었다.“내가 말 바꿀까 봐 걱정되면 지금 당장 사람 시켜서 약 보내줄게. 할머니가 약 받고 사과하러 가도 돼.”강지한은 이미 자신이 많이 양보했으니 심미연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그녀가 멍청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면 지금 전화해. 난 약을 먼저 받아야겠어.”강지한이 이렇게 말하니 심미연은 아무리 억울해도 삭힐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몸이 더 중요했기에 할머니가 고통받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건 불효였다!강지한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고 심미연은 전화를 거는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이 아팠지만 동시에 남몰래 결심했다.통화를 마친 강지한은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겼다.“약 곧 올 테니까 앉아서 기다려.”심미연은 그가 뻗은 손을 피해 한 발짝 물러서서 말했다.“할머니 주치의한테 특효약에 대해 말하고 올게.”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다.강지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그냥 온지유에게 사과하는 건데, 무릎 꿇으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대체 뭐가
“미연 씨, 날 싫어하는 건 알지만 난 진심으로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내가 무슨 짓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온지유의 진지한 말투에 심미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요, 그러면 지금 강지한 사무실로 와요. 셋이 함께 얘기하죠.”단지 수작을 부리기 싫어서 가만히 있었던 거다. 아니면 온지유가 지금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 오를 수나 있었겠나.“지한 씨한테 갔다고요? 왜 지한 씨를 찾아갔어요?”온지유가 한층 언성을 높이며 다급하게 말했다.“당연히 내 남편과 부부 사이 친밀한 일을 하려는 거죠. 왜 그렇게 불안해해요?”말을 마치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온지유가 전화를 했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 아니었다.절대 사적으로 그녀와 만나지 않을 거다.전화를 끊은 그녀는 세수하고 손을 닦은 후 화장실을 나섰다.사무실 문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순간 강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냥 육체적 욕구 해결하려고 자는 거예요. 밖에서 만난 여자들보다 깨끗하니까. 그 여자가 이혼을 원하면 어떡하냐고요? 허, 절대 안 되죠. 3년 동안 내가 심전그룹에 얼마나 투자했고 그 여자한테 얼마를 썼는데 이혼하면 내 돈도, 청춘도 다 버리는 거잖아요. 게다가 난 아직 질리지 않았어요. 충분히 갖고 놀다가 질리면 회사 법무팀 통해 소송해서 한 푼도 안 주고 내보낼 거예요.”여기까지 들은 심미연은 더 이상 듣지 못하고 뒤돌아서서 황급히 엘리베이터 입구로 걸어갔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왔고 그 남자가 한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알고 보니...강지한은 단지 육체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그녀와 잠자리를 가졌다.그녀가 밖에 있는 여자들보다 깨끗해서!그리고 아직 충분히 갖고 놀지 못해서 이혼하지 않는 것이고 지겨워지면 그때 소송해서 빈털터리로 쫓아낼 생각이었다.영리한 사업가인 강지한은 그녀를 내쫓기 전에 마지막 남은 가치까지 쥐어짜 내려 했다.그런 남자를 9년이나 사랑했다니.참 우스웠다.그 시각 사무실에서 강지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무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강지한은 고개를 들어 그의 뒤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심미연은?”성무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여자 화장실에 사람 시켜서 찾아봤는데 아무도 없어요!”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지한의 얼굴은 곧바로 굳어졌다.“전화해서 당장 여기로 오라고 해! 안 그러면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성무진은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심미연 대신 식은땀을 흘렸다.도대체 사모님이 무슨 짓을 했길래 대표님이 저렇게 화가 난 걸까.강지한은 극도로 화가 난 표정이었다.“빨리 전화해!”강지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재촉했다.그 시각 심미연은 회사 밑 정원에서 통화 중이었다.할머니의 주치의는 누군가 특효약을 일주일 치 보내왔다며 방금 할머니에게 투여해서 상태가 좋아졌다는 말을 전했다.의사의 말을 들은 심미연은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솟구쳤다.“이따가 할머니 뵈러 갈게요, 의사 선생님 감사합니다.”“저한테 감사할 게 아니라 약을 전해준 분께 감사해야죠!” 의사가 겸손하게 말하자 심미연은 의사가 말하는 ‘약을 전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당연히 알았다.하지만 의사는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할머니의 상태에 대해 한참을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심미연은 의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전화를 끊었다.강지한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성무진의 연락이 와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성 비서님, 무슨 일이세요?”사실 성무진이 왜 전화를 했는지 마음속으로는 알았지만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사모님, 길 잃으셨나요? 제가 모시러 갈게요.”성무진은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직접 묻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말했다.“나 아래층 정원에 있으니까 오세요.”마음속으로는 강지한이 미웠지만 강지한의 뜻을 거스르는 순간 할머니가 쓰던 특효약은 순식간에 모두 회수될 것이기에 할머니가 더 이상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강지한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알겠습니다.”성무진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려 심미연의 말을 강지한에게 전달했다.강지한은 얼굴을 찡그
심미연은 그를 돌아보며 덤덤하게 물었다.“왜요?”예전에는 강지한을 사랑해서 24시간 내내 그의 곁에 붙어 있기를 바랐던 그녀였지만 조금 전 강지한의 그런 말을 듣고도 어떻게 그의 곁에 있겠나.최대한 멀어지는 게 좋았다.성무진은 그녀의 질문에 당황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강지한이 화가 났다고 말해야 하나.“그쪽 대표님은 안 바쁘대요? 왜 차에 안 타요? 아니면, 우리가 먼저 갈까요?”심미연이 덤덤하게 말했다.“나 일이 있어서 서둘러야 해요.”할머니에게 일주일 치 약이 있으니 일주일은 평온하게 보낼 수 있었다.그것만으로도 기꺼이 온지유에게 사과할 수 있었다.게다가 온지유가 그녀를 해친 것에 대해서 나중에 진실을 밝히고 되돌려주면 그만이다.아무리 늦어도 복수를 하기만 하면 되니까.성무진은 두려움에 차 밖을 내다봤다.다행히 강지한은 못 들은 것 같았다. 아니면 심미연이 또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당연히 강지한은 심미연의 말을 듣고 차갑게 콧방귀를 뀌지 않을 수 없었다.그의 비서에게 그를 놔두고 가자고 하다니, 참 대단한 여자다.허리를 굽혀 차에 앉으려던 그는 심미연을 차갑게 노려보았다.“뒤에 앉아, 물어볼 게 있어!”심미연은 짜증을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이미 사과하라고 했는데 대체 왜 화를 내는 건지.’“심미연, 다시 한번 말할게. 뒤에 와서 앉아.”강지한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심미연은 심호흡을 하고 필사적으로 마음속에 치미는 분노를 삭였다.“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물어봐, 다 들리니까!”그녀는 이제 그에게 거부감을 느꼈다.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성 비서, 전화해서 약 다시 가져오라고 해.”강지한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목소리가 싸늘했다.심미연은 이를 악물고 두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강지한은 정말 나쁜 놈이다!성무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심미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모님, 뒤에 앉으시죠.” 한순간 홧김에 힘들게 얻은 약을 잃을 수는 없었다.심미연의 작은 얼굴이 창백해지
온지유가 사고를 당한 건 그녀가 시킨 일이고, 할아버지가 화를 내며 온지유를 해외로 보내려는 것도 그녀가 일러바친 거다?한마디로 온지유와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지 다 그녀가 했다는 뜻이다.강지한의 마음은 참 변함없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강지한이 화가 난 듯 낮게 으르렁거렸다.“심미연, 제대로 설명해.”심미연은 화를 억누르며 작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강지한, 내가 할아버지한테 전화하지 않았다고 해도 믿지 않을 거면서 무슨 설명을 하라는 거야?”온지유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자 강지한은 머리가 없는 사람처럼 정상적인 생각이 불가능한 듯 보였다.성무진은 황급히 차 칸막이를 올리고 시동을 걸었다.그 역시 강지한이 심미연을 대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강지한을 설득할 수도, 심미연을 도울 수도 없었다.가끔은 정말 심미연이 안쓰러웠다.강지한은 이미 온지유 일 때문에 짜증이 난 상태였는데 심미연이 이런 식으로 대꾸하자 순식간에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심미연의 목을 움켜잡더니 험악하게 말했다.“오늘 온지유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너도 죽어.”목이 잡힌 심미연은 숨쉬기가 힘들었고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눈동자를 크게 뜨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한,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지난 3년 동안 나에게 계속 상처를 줬어! 나도 인간이야, 강철이 아니라 피와 살로 만들어진 인간이라 아프고 괴롭다고! 강지한, 이혼하자는 말 진심이야. 내가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진심이고.”그녀는 천천히, 한 마디 한 마디에 유난히 힘을 주며 말했다.한때는 그와 평생을 함께 할 거라는 환상을 가졌다.그러다 이 결혼 생활에서 아무리 진심을 다 바쳐도 강지한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걸 서서히 깨달았다.과거엔 사랑하지 않아도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려 했는데 이제야 자존심도 버린 사랑은 상대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뚝뚝 맑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찢어지는
“지유가 임신한 몸으로 혼자 있는데 내가 좀 도와주는 게 뭐 어때서”강지한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온지유가 그를 구해줬고 이제 그녀가 어려움에 부닥쳤으니 당연히 도와줘야 마땅했다.그런데 심미연이 그가 온지유를 도와준 것에 대해 속 좁게 따지는 게 못마땅했다.심미연은 그의 무심한 표정을 보며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나랑 이혼만 하면 그 여자를 도와주든지 그 여자랑 결혼하든지 상관 안 할게.”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두 사람을 위해 꺼져주겠다는데 이 바닥에서 그녀처럼 너그러운 사람은 둘도 없으니 강지한은 고마워해야 했다.강지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심미연...”바로 그때 휴대폰 벨이 울렸고 강지한은 말을 삼켰다.심미연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당신 형수님 전화 오셨네, 받아.”그녀는 강지한이 온지유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았다.온지유의 전화라면 둘이 관계를 할 때에도 전화를 받곤 했다.대체 온지유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면 그럴까.“나랑 지유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허튼 생각하지 마.”강지한은 심미연을 노려보았다.‘이 여자 표정은 뭐지?’“그래, 둘은 아무 사이도 아니겠지. 그냥 온지유는 임신만 한 거네. 아빠가 누군지도 모를 잡것을.”그녀도 임신 중이었기에 아이를 위해서라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로 공격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강지한이 거듭해서 선을 넘지 않나.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한의 눈빛이 갑자기 살벌해졌다.“심미연, 한 번만 더 잡것이라고 해. 내가 가만 안 둬.”심미연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당신은 날 가만 둔 적 없어.”온지유에 대해 말만 해도 그는 꼬리가 밟힌 것처럼 발끈했다.하지만 심미연은 최대한 화를 내지 않고 강지한과 싸우지 않기로 했다.임신 중이라 항상 좋은 기분을 유지하지 않으면 배 속의 아기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개를 돌려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강지한은 그녀가 예전과 달라진 것을 느꼈다.정말 그녀의 말대로 더 이상 그를
강지한은 미간을 꾹 누른 채 시선이 옆에 있는 심미연에게로 향했다.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심미연을 편애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이노하이브의 지분도, 강씨 가문의 가보도 툭툭 넘겨주었다.심미연 이 여자는 권모술수도 많고 악랄한데 뭐가 좋다고!“병원에 곧 도착하니까 만나서 얘기해요. 심미연이랑 같이 있어요.”심미연도 함께 있다는 말을 들은 강준형의 말투가 한층 누그러졌다.“그래, 기다리마.”전화를 끊으며 강지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강준형이 갑자기 온지유를 해외로 보낸다는 건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심미연이 뒤에서 허튼수작을 부린 게 밝혀지면 그도 수단 가리지 않고 상대할 생각이었다.곧 차가 병원 앞에 멈춰 섰고 강지한은 손을 뻗어 심미연을 차에서 끌어 내렸다.손목이 아프게 꺾이자 심미연은 얼굴을 찡그렸다.“강지한, 손 놔!”강지한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손 놓으면 도망가게?”그러면서도 손에 힘이 살짝 풀렸다.심미연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할머니 주치의가 전화해서 특효약에 대해 말해줬어. 당신이 약속 지켰으니까 나도 말한 대로 할 거야. 걱정하지 마, 억울하더라도 온지유에게 사과할 거니까.”강지한은 경성에서 손으로 하늘도 가릴 사람이라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는 건 쉬웠다.하지만 그가 진실을 알아내기보다는 온지유의 일방적인 말을 믿고 싶어 하는데 무슨 말을 더 하겠나. 차라리 순순히 온지유에게 사과하면 강지후가 좋게 봐줘서 다음 약을 얻는 게 더 쉬워질 수도 있었다.부부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건지, 마음이 씁쓸했다.강지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할아버지 앞에서 말 제대로 해.”심미연은 그 말의 뜻을 알아듣고 가슴이 아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알아.”강지한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할머니는 그의 손에 있는 약으로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다.강지한은 그녀를 슬쩍 보고는 앞으로 걸어갔다.심미연은 단화를 신고 있었지만 그래도 강지한보다 다리가 짧아서 빠르게 걷는 그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강지한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얼굴의 선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심미연은 분명 병실에 와서 강상미를 만났지만 의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정말 독한 여자야.’“시간도 늦었고 나도 집에 가서 쉬어야겠어. 먼저 간다.” 이진영은 담배를 끄고 일어나 곧장 밖으로 나갔다. 강지한은 술을 따라 마시며 심미연에 관한 생각에 잠겼다. ‘심미연은 언제 의술을 배운 거지?’ ‘이 3년 동안 이 여자는 도대체 뭘 했던 걸까?’이진영이 차에 올라타자 기사가 물었다. “도련님, 집으로 가시겠습니까?” 이진영은 미간을 문지르며 신하린의 분노 어린 눈빛을 떠올렸다. 순간 마음 속이 답답해졌다. “병원으로 가자.”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엔진을 돌렸다.신하린의 병실 앞에 도착한 이진영은 누군가에게 가로막혔다. 이진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들어가서 잠깐 보고 올게요.” “신 대표님이 명령하셨습니다. 심미연 대표님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결론은 한 마디였다. 그들은 명령을 따랐기에 규칙을 어길 수 없었다.이진영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여기는 내 병원인데 병실도 맘대로 들어가지 못하다니. 이게 말이 되나?’ “돌아가 주세요.” 경호원이 좋은 말로 타일렀다. 하지만 그때 병실 안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이진영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급하게 말했다. “분명 무슨 일이 생겼어요. 들어가게 해줘요.” 경호원은 그를 막으려 했지만 그때 또 한 번 병실 안에서 큰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경호원도 놀라서 급하게 병실 문을 열었다.이진영은 병실로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신하린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피로 뒤덮여 있었다. 조명 아래서 그 모습은 다소 섬뜩하게 보였다.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급히 다가가 신하린을 침대에 눕히고 몸에 상처가 없는지 확인했다. 그러면서 옆에 멍하니 서 있던 경호원에게는 급히 소치쳤다. “의사
“너희 아버지가 최근에 한석훈과 많이 가까워졌다고 들었어. 내가 알기로 한석훈과의 관계가 간단하지 않다더라.” 강지한은 박시훈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이진영에게 전했다. 이진영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 “알고 있어.” 사실 지난 4년 동안 그는 한석훈의 배후 세력을 조사해왔고 조사할수록 그 배후는 점점 더 복잡하고 충격적인 사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 너와 한유나 씨 사이의 일은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야?” 이진영은 조용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말했다. “혼약을 해제할 생각이야.” 그는 이미 한유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한유나는 최근 들어 그를 피하는 듯했다. 그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구아정은 어떻게 할 거야?” 강지한이 다시 물었다. “네 첫사랑이라고 했지?”“어릴 때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했던 사람이야. 그런데 갑자기 사라졌고 그 뒤로 그냥 끝났어.” 이진영은 무의식적으로 신하린의 얼굴을 떠올렸다.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사실 지금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신하린이었다.이제 그녀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확실히 느꼈다. 그녀의 다리가 이렇게 된 지금 그녀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고 그로 인해 그녀를 돌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채 지내고 있었다.“구아정, 그 여자에 대해 조사해본 적 있어?” 강지한이 상기시키듯 말했다.“조사 중이야.” 이진영은 숨기지 않고 답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나타났으니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르겠어.”구아정은 분명 그를 찾으러 온 거였다.‘왜일까?’“신하린 씨의 일은 잘 해결됐나?” 강지한은 그녀에게서 도움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에 물었다.“하린이 오른쪽 다리가 절단됐어.” 이진영은 말하면서도 짜증이 치밀었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깊게 한 모금 흡입했다. 연기가 흩어질 때 그는 다시 한 번 신하린의 분노 어린 눈빛을 떠올렸다. 그녀는 분명 자신을 증오하고 있을 것이다.“언제 그런 일이 있었지?” 강지한은 잠시
문소영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만약 나를 살려주지 않으면 우리가 두 명의 아들을 뒀다는 사실을 세상에 공개할 거야. 그럼 당신도 명예를 잃고 끝장날 거라고.” 그녀는 지금 이 남자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우리가 두 아들을 뒀다고? 증거 없이는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남자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하며 눈빛은 강렬하게 빛났다. “당시 내 임신 검진서도 여전히 남아 있고 병원에 가면 내 출산 기록도 확인할 수 있어. 그 아이들의 혈액형은 당신이랑 똑같아.” 문소영은 그동안 이 모든 것을 철저히 보관해 왔다.“문소영, 나를 망치려고 하는 거야?” 남자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나는 당신이 더 높이 올라가기를 바래.” 문소영은 감정을 정리한 채 차분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더 높이 올라갈수록 나에게 유리해.” “내가 원칙을 깨고 너를 돕기를 바란다면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 남자는 술잔을 비운 후 탁자 위에 쿵 하고 내려놓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문소영은 그가 떠나는 모습을 그저 조용히 지켜보며 부르지 않았다. 오늘은 그에게 경고만 준 것뿐이다. 그의 반응은 충분히 예상한 대로였다.잠시 후 문소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모님, 지시하신 대로 사람을 공해에 던졌습니다.] [좋아. 그럼 이제 해외로 잠시 숨어 있어. 여기 상황이 정리 될 때까지 기다려. 그때 다시 돌아오면 된다.] 문소영의 얼굴엔 차가운 표정이 가득했다. 그들이 돌아올 때쯤 심서연의 죽음은 이미 잠잠해지고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는 누구도 이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문소영은 전화를 끊고 술을 따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이진영은 술을 많이 마셨고 잠간 밖으로 나왔다. 그때 한 남자의 뒷모습이 아버지를 닮은 듯해 순간적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잠시 멈칫하며 발걸음
문소영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말없이 있었다. 수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TV 뉴스에서 그의 모습을 보며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미칠 듯했다. 문소영은 자신이 더 이상 그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 믿어왔다. 남자는 그녀의 침묵을 감지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문소영은 깊은 생각을 떨쳐내고 몸을 곧게 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필요해서 왔어. 우리 아들에 관한 일이야.” 남자는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우리가 아들이 있다고? 그럴 리가...” “쌍둥이였어. 작은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납치됐고 큰 아이는 강지성. 몇 년 전에 사고로 죽었어.” 문소영은 눈물을 훔치며 말을 급히 이어갔다.이건 그녀가 삼십 년 넘게 숨겨온 비밀이었다. 그녀는 이 생에서 절대 말할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순간 이렇게 쉽게 입 밖으로 내뱉게 되었다. 문소영의 말은 마치 폭탄처럼 남자의 가슴 속에 떨어졌고 남자는 동공이 급격히 축소되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절대 상상할 수 없었다. 문소영과 자신이 쌍둥이 아들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사실 처음 내가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바로 당신에게 말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집에서 강제로 나를 강우석과 결혼시키려 했고 나는 그걸 원하지 않았어. 그러자 부모님은 나를 감금하고 내 핸드폰도 압수했어. 외부와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었어.” 문소영은 말하면서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 그녀는 부모님의 강요로 강씨 가문에 보내졌었다. 강우석과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우석은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강우석은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고 그 상대가 바로 강지한의 어머니였다. 7개월 후 그녀는 쌍둥이를 낳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후 그 중 한 명이 사라졌다. 그녀는 30년 동안 그 아이를 훔쳐간 사람을 찾으려 했지만 끝내 그 사람이 누구
“문소영 씨...” 심서연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문소영은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밖으로 끌고 나갔다. “어디 가는 거예요?”심서연은 문소영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를 느끼며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를 저승에 보내줄 거야. 안 돼?” 문소영은 비웃듯이 그녀를 한 번 쳐다보았다. “심서연, 내가 너를 위해 모든 길을 다 만들어줬는데 결과는 이게 뭐야!”그 당시 심미연의 딸을 훔친 건 심서연을 강지한의 곁에 두기 위함이었다. 원래는 심서연을 이용해 강지한에게서 유용한 정보를 끌어내려고 했으나 3년이 넘도록 이 멍청한 여자는 강지한의 침대조차 올라가지 못했다. ‘쓸모없는 것.’“이건 내 잘못이 아니잖아요.” 심서연은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다.그 3년 동안 그녀는 심미연을 따라 하며 살아왔다.그리고 강상미도 열심히 키웠다.하지만 강지한은 냉정하게도 그녀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았다. 문소영은 더 이상 말을 아끼지 않고 그녀를 거칠게 끌고 내려갔다. 곧 사람들이 다가왔다. “대표님.” 심서연은 그 남자를 보며 점점 더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이 여자 데려가서 교훈을 좀 줘.” 문소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문소영 씨, 당신은 나한테 이러면 안 돼요.” 심서연은 비명을 지르며 후회가 밀려왔다. 처음엔 문소영의 약점을 쥐고 있으면 그녀가 자신에게 손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깨달았다. 문소영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시끄러워. 입 다물어.” 문소영은 냉정하게 그녀를 호통쳤다. 심서연은 원래 입을 다물 생각이 없었지만 순간 누군가 그녀의 입에 더러운 양말을 밀어넣었다. 심서연은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하며 고통스러워했다. 그 후 그녀는 사람들에게 힘껏 끌려가 차에 강제로 밀어넣어졌다.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창 밖으로 보이는 문소영을 응시했다. 문소영에게서 느껴지는 그 무시무시한 살기가 가슴 속 깊이까지 전해져 왔다.
모두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한 발 물러서며 심서연과 거리를 뒀다.심서연은 눈알을 굴려 주변 사람들을 훑어보고는 속으로 비웃었다. 바로 병실 문을 밀고 들어가려는 순간 경호원 한 명이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꽉 붙잡았다.“못 들어갑니다.”이런 인품을 가진 사람은 더더욱 아이 곁에 둘 수 없었다.“사람 살려. 성추행이에요.” 심서연은 목청껏 소리를 질렀지만 경호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재빠르게 외투를 벗어 그녀의 몸에 덮었다. 이어서 거침없이 그녀의 몸을 어깨에 둘러메고는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여기가 12층이 아니었다면 창문 밖으로 내던져버렸을지도 몰랐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심서연을 바닥에 내팽개치듯 내려놓았다. “내가 여자한테 손대지 않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었으면 당신 손발부터 분질렀어요. 그러니까 지금 좋게 말할 때 당장 돌아가세요.” 남자의 기세에 압도당한 심서연은 겁에 질려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병원 안으로 사라졌다.그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심서연은 겨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남자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속으로 강지한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저 냉혈한 자식.’ ‘진짜로 딸을 보지도 못하게 막다니.’ ‘아무리 그래도 당시 내가 직접 아이를 안겨준 사람이었는데.’땅바닥이 너무 차가워서 심서연은 이내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꺼내어 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나 병실에 못 들어갔어. 애를 데리고 나올 방법이 없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냉정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멍청한 것.] 심서연은 속이 상해 울먹거렸다. [내가 어떻게 알아? 강지한이 이렇게 매몰찰 줄...] [너 박유진 약혼녀 아니었어? 박유진 찾아가.] [뭐? 왜 박유진이야?] 그녀는 이미 박유진에게 마음이 떠났고 이제 와서 다시 함께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찾으라고 하면 그냥 찾으러 가.]
‘우리 딸이 아직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이때 병실에서. 강지한이 딸을 재우자마자 핸드폰이 진동하며 울렸다. 번호가 성무진의 것임을 확인한 후 그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아가씨와의 친자 확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두 분 사이에는 혈연 관계가 없습니다.] 성무진은 왜 강지한이 갑자기 친자 확인을 하려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원래도 주운 아이였기 때문에 이 결과는 전혀 놀랍지 않았다.[친자 확인 할 때 쭉 지켜봤어?] 강지한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상미와 심태하의 얼굴이 똑같은데 어떻게 혈연 관계가 없을 수 있지?’ [인하 병원에서 했습니다.] ‘이노하이브 산하 병원이라 그런 실수는 없을 거 같은데.’성무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알겠다.] 강지한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다시 한 번 친자 확인을 하려는 계획을 마음속에 세웠다.[대표님.] 성무진은 강지한의 표정을 볼 수 없어서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불안해져서 조심스럽게 한 마디 했다. [말해.] [바렐 그룹과의 합작 계약이 전부 취소되었는데 이제 어떻게 할까요?]이렇게 많은 합작이 한 번에 취소되었으니 각 부서 모두 불안하지 않을 리 없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처리할게.] 원래 성무진은 회사 직원들의 불안한 정서에 대해 말하려 했지만 강지한이 이렇게 말하자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다음 기회에 말해야겠다.’성무진과의 전화를 끊고 강지한은 이진영의 번호를 눌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 급한 일 있어?] 이진영의 목소리에서 피로가 묻어났다. [한 잔 하러 가자.] [좋아. 어디서 마셔?] 두 사람은 장소를 정하고 강지한은 전화를 끊었다.병실로 돌아온 그는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든 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디서 봐도 자기와 똑같이 닮은 얼굴이었다. ‘어떻게 상미가 내 딸이 아닐 수 있지?’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태하야, 아빠 말 좀 들어봐.” 박유진은 심태하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파 목소리가 자연스레 떨렸다. “동생은 다른 세계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야. 너무 힘들어하지 마. 알겠지?” 말을 하며 그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하게 흘러나왔다.심미연은 그의 품에서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괜찮아. 이제 울지 마. 오늘 밤은 엄마랑 같이 자자.” 심태하는 두 살부터 혼자 자던 아이였지만 그래도 겨우 세 살밖에 되지 않았다. 방금 그런 꿈을 꾸었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네.” 심태하는 눈물을 닦으며 엄마 품에 얼굴을 비볐다. 엄마가 있으니까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심미연은 박유진을 바라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 그럼 먼저 방에 가 있어. 난 태하 데리고 잘게.” 박유진은 그녀를 안고 한 번 더 꽉 안아주었다. “알았어. 잘 자.” 그렇게 말하며 심미연과 심태하의 얼굴에 각각 입맞춤을 했다. 비록 마음은 살짝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잠간의 즐거움을 위해 아이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일은 절대 할 수 없었다.박유진이 방을 나간 후 심미연은 심태하를 안고 침대에 누웠다.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침실의 불을 모두 끄자 순간적으로 어두운 세상이 펼쳐졌다. “엄마, 무서워요.” 심태하는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엄마 있잖아. 걱정하지 말고 자자.” 심태하는 눈을 감았지만 그 순간 바로 전에 꿈이 눈에 나타났다. 여동생은 온몸에 피를 흘리며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눈은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정말 아름다웠다. 하지만 바로 여동생은 사라져 버렸다. 심태하의 감정이 갑자기 격해졌다.“안 돼. 가지 마.” 어둠 속에서 심태하의 낮은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렸다.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그를 더 꽉 안았다. “걱정하지 마. 엄마 여기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귀 뒤로 넘긴 후 그녀는 겨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아직 눈앞에 있는 사람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몸이 툭 밀려 들어와 문 뒤로 기대어졌다. 남자는 막 샤워를 끝낸 듯 몸에서 은은한 바디워시 향이 퍼져 나왔다. 그 향은 정말로 기분 좋게 느껴졌다. 심미연의 심장은 저절로 조금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미연아, 준비됐어?”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낮고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등을 곧게 펴며 말했다. “나... 심리 상담 예약했어. 내일 오후에 가보려고.” 그녀도 빨리 자신을 치료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박유진은 마치 머리에 차가운 물 한 통을 끼얹은 것처럼 느껴졌다. 몸 속의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심미연이 아직 괜찮지 않다면 그는 물론 그녀의 감정을 무시하고 강제로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오빠, 미안해.” 심미연은 발끝을 들어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나 치료 잘 받을게. 믿어줘. 금방 나을 거야.” 박유진은 그녀를 꼭 안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기다릴게.” 그런데 두 사람의 입술이 막 맞닿을 순간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엄마, 빨리 문 열어줘요. 저예요.” 심태하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박유진은 어쩔 수 없이 손을 풀며 살짝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문 열자. 애가 무슨 일인지 한번 보자.” 밖에 아이가 있으니 자신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오빠, 미안해.” 심미연은 그를 안아주고 나서 팔을 풀었다. 그녀는 정말 박유진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느꼈다. “아니야. 더 이상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 또 미안하다고 하면 화낼 거야.” 박유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문 열어 봐.”심미연은 급히 문을 열었다. 작은 몸뚱이가 곧바로 달려들어왔다. “엄마, 너무 무서워요.” 목소리엔 울음이 섞여 있었고 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