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 씨, 날 싫어하는 건 알지만 난 진심으로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내가 무슨 짓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온지유의 진지한 말투에 심미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요, 그러면 지금 강지한 사무실로 와요. 셋이 함께 얘기하죠.”단지 수작을 부리기 싫어서 가만히 있었던 거다. 아니면 온지유가 지금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 오를 수나 있었겠나.“지한 씨한테 갔다고요? 왜 지한 씨를 찾아갔어요?”온지유가 한층 언성을 높이며 다급하게 말했다.“당연히 내 남편과 부부 사이 친밀한 일을 하려는 거죠. 왜 그렇게 불안해해요?”말을 마치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온지유가 전화를 했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 아니었다.절대 사적으로 그녀와 만나지 않을 거다.전화를 끊은 그녀는 세수하고 손을 닦은 후 화장실을 나섰다.사무실 문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순간 강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냥 육체적 욕구 해결하려고 자는 거예요. 밖에서 만난 여자들보다 깨끗하니까. 그 여자가 이혼을 원하면 어떡하냐고요? 허, 절대 안 되죠. 3년 동안 내가 심전그룹에 얼마나 투자했고 그 여자한테 얼마를 썼는데 이혼하면 내 돈도, 청춘도 다 버리는 거잖아요. 게다가 난 아직 질리지 않았어요. 충분히 갖고 놀다가 질리면 회사 법무팀 통해 소송해서 한 푼도 안 주고 내보낼 거예요.”여기까지 들은 심미연은 더 이상 듣지 못하고 뒤돌아서서 황급히 엘리베이터 입구로 걸어갔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왔고 그 남자가 한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알고 보니...강지한은 단지 육체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그녀와 잠자리를 가졌다.그녀가 밖에 있는 여자들보다 깨끗해서!그리고 아직 충분히 갖고 놀지 못해서 이혼하지 않는 것이고 지겨워지면 그때 소송해서 빈털터리로 쫓아낼 생각이었다.영리한 사업가인 강지한은 그녀를 내쫓기 전에 마지막 남은 가치까지 쥐어짜 내려 했다.그런 남자를 9년이나 사랑했다니.참 우스웠다.그 시각 사무실에서 강지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무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강지한은 고개를 들어 그의 뒤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심미연은?”성무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여자 화장실에 사람 시켜서 찾아봤는데 아무도 없어요!”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지한의 얼굴은 곧바로 굳어졌다.“전화해서 당장 여기로 오라고 해! 안 그러면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성무진은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심미연 대신 식은땀을 흘렸다.도대체 사모님이 무슨 짓을 했길래 대표님이 저렇게 화가 난 걸까.강지한은 극도로 화가 난 표정이었다.“빨리 전화해!”강지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재촉했다.그 시각 심미연은 회사 밑 정원에서 통화 중이었다.할머니의 주치의는 누군가 특효약을 일주일 치 보내왔다며 방금 할머니에게 투여해서 상태가 좋아졌다는 말을 전했다.의사의 말을 들은 심미연은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솟구쳤다.“이따가 할머니 뵈러 갈게요, 의사 선생님 감사합니다.”“저한테 감사할 게 아니라 약을 전해준 분께 감사해야죠!” 의사가 겸손하게 말하자 심미연은 의사가 말하는 ‘약을 전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당연히 알았다.하지만 의사는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할머니의 상태에 대해 한참을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심미연은 의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전화를 끊었다.강지한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성무진의 연락이 와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성 비서님, 무슨 일이세요?”사실 성무진이 왜 전화를 했는지 마음속으로는 알았지만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사모님, 길 잃으셨나요? 제가 모시러 갈게요.”성무진은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직접 묻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말했다.“나 아래층 정원에 있으니까 오세요.”마음속으로는 강지한이 미웠지만 강지한의 뜻을 거스르는 순간 할머니가 쓰던 특효약은 순식간에 모두 회수될 것이기에 할머니가 더 이상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강지한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알겠습니다.”성무진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려 심미연의 말을 강지한에게 전달했다.강지한은 얼굴을 찡그
심미연은 그를 돌아보며 덤덤하게 물었다.“왜요?”예전에는 강지한을 사랑해서 24시간 내내 그의 곁에 붙어 있기를 바랐던 그녀였지만 조금 전 강지한의 그런 말을 듣고도 어떻게 그의 곁에 있겠나.최대한 멀어지는 게 좋았다.성무진은 그녀의 질문에 당황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강지한이 화가 났다고 말해야 하나.“그쪽 대표님은 안 바쁘대요? 왜 차에 안 타요? 아니면, 우리가 먼저 갈까요?”심미연이 덤덤하게 말했다.“나 일이 있어서 서둘러야 해요.”할머니에게 일주일 치 약이 있으니 일주일은 평온하게 보낼 수 있었다.그것만으로도 기꺼이 온지유에게 사과할 수 있었다.게다가 온지유가 그녀를 해친 것에 대해서 나중에 진실을 밝히고 되돌려주면 그만이다.아무리 늦어도 복수를 하기만 하면 되니까.성무진은 두려움에 차 밖을 내다봤다.다행히 강지한은 못 들은 것 같았다. 아니면 심미연이 또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당연히 강지한은 심미연의 말을 듣고 차갑게 콧방귀를 뀌지 않을 수 없었다.그의 비서에게 그를 놔두고 가자고 하다니, 참 대단한 여자다.허리를 굽혀 차에 앉으려던 그는 심미연을 차갑게 노려보았다.“뒤에 앉아, 물어볼 게 있어!”심미연은 짜증을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이미 사과하라고 했는데 대체 왜 화를 내는 건지.’“심미연, 다시 한번 말할게. 뒤에 와서 앉아.”강지한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심미연은 심호흡을 하고 필사적으로 마음속에 치미는 분노를 삭였다.“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물어봐, 다 들리니까!”그녀는 이제 그에게 거부감을 느꼈다.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성 비서, 전화해서 약 다시 가져오라고 해.”강지한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목소리가 싸늘했다.심미연은 이를 악물고 두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강지한은 정말 나쁜 놈이다!성무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심미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모님, 뒤에 앉으시죠.” 한순간 홧김에 힘들게 얻은 약을 잃을 수는 없었다.심미연의 작은 얼굴이 창백해지
온지유가 사고를 당한 건 그녀가 시킨 일이고, 할아버지가 화를 내며 온지유를 해외로 보내려는 것도 그녀가 일러바친 거다?한마디로 온지유와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지 다 그녀가 했다는 뜻이다.강지한의 마음은 참 변함없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강지한이 화가 난 듯 낮게 으르렁거렸다.“심미연, 제대로 설명해.”심미연은 화를 억누르며 작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강지한, 내가 할아버지한테 전화하지 않았다고 해도 믿지 않을 거면서 무슨 설명을 하라는 거야?”온지유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자 강지한은 머리가 없는 사람처럼 정상적인 생각이 불가능한 듯 보였다.성무진은 황급히 차 칸막이를 올리고 시동을 걸었다.그 역시 강지한이 심미연을 대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강지한을 설득할 수도, 심미연을 도울 수도 없었다.가끔은 정말 심미연이 안쓰러웠다.강지한은 이미 온지유 일 때문에 짜증이 난 상태였는데 심미연이 이런 식으로 대꾸하자 순식간에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심미연의 목을 움켜잡더니 험악하게 말했다.“오늘 온지유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너도 죽어.”목이 잡힌 심미연은 숨쉬기가 힘들었고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눈동자를 크게 뜨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한,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지난 3년 동안 나에게 계속 상처를 줬어! 나도 인간이야, 강철이 아니라 피와 살로 만들어진 인간이라 아프고 괴롭다고! 강지한, 이혼하자는 말 진심이야. 내가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진심이고.”그녀는 천천히, 한 마디 한 마디에 유난히 힘을 주며 말했다.한때는 그와 평생을 함께 할 거라는 환상을 가졌다.그러다 이 결혼 생활에서 아무리 진심을 다 바쳐도 강지한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걸 서서히 깨달았다.과거엔 사랑하지 않아도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려 했는데 이제야 자존심도 버린 사랑은 상대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뚝뚝 맑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찢어지는
“지유가 임신한 몸으로 혼자 있는데 내가 좀 도와주는 게 뭐 어때서”강지한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온지유가 그를 구해줬고 이제 그녀가 어려움에 부닥쳤으니 당연히 도와줘야 마땅했다.그런데 심미연이 그가 온지유를 도와준 것에 대해 속 좁게 따지는 게 못마땅했다.심미연은 그의 무심한 표정을 보며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나랑 이혼만 하면 그 여자를 도와주든지 그 여자랑 결혼하든지 상관 안 할게.”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두 사람을 위해 꺼져주겠다는데 이 바닥에서 그녀처럼 너그러운 사람은 둘도 없으니 강지한은 고마워해야 했다.강지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심미연...”바로 그때 휴대폰 벨이 울렸고 강지한은 말을 삼켰다.심미연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당신 형수님 전화 오셨네, 받아.”그녀는 강지한이 온지유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았다.온지유의 전화라면 둘이 관계를 할 때에도 전화를 받곤 했다.대체 온지유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면 그럴까.“나랑 지유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허튼 생각하지 마.”강지한은 심미연을 노려보았다.‘이 여자 표정은 뭐지?’“그래, 둘은 아무 사이도 아니겠지. 그냥 온지유는 임신만 한 거네. 아빠가 누군지도 모를 잡것을.”그녀도 임신 중이었기에 아이를 위해서라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로 공격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강지한이 거듭해서 선을 넘지 않나.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한의 눈빛이 갑자기 살벌해졌다.“심미연, 한 번만 더 잡것이라고 해. 내가 가만 안 둬.”심미연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당신은 날 가만 둔 적 없어.”온지유에 대해 말만 해도 그는 꼬리가 밟힌 것처럼 발끈했다.하지만 심미연은 최대한 화를 내지 않고 강지한과 싸우지 않기로 했다.임신 중이라 항상 좋은 기분을 유지하지 않으면 배 속의 아기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개를 돌려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강지한은 그녀가 예전과 달라진 것을 느꼈다.정말 그녀의 말대로 더 이상 그를
강지한은 미간을 꾹 누른 채 시선이 옆에 있는 심미연에게로 향했다.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심미연을 편애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이노하이브의 지분도, 강씨 가문의 가보도 툭툭 넘겨주었다.심미연 이 여자는 권모술수도 많고 악랄한데 뭐가 좋다고!“병원에 곧 도착하니까 만나서 얘기해요. 심미연이랑 같이 있어요.”심미연도 함께 있다는 말을 들은 강준형의 말투가 한층 누그러졌다.“그래, 기다리마.”전화를 끊으며 강지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강준형이 갑자기 온지유를 해외로 보낸다는 건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심미연이 뒤에서 허튼수작을 부린 게 밝혀지면 그도 수단 가리지 않고 상대할 생각이었다.곧 차가 병원 앞에 멈춰 섰고 강지한은 손을 뻗어 심미연을 차에서 끌어 내렸다.손목이 아프게 꺾이자 심미연은 얼굴을 찡그렸다.“강지한, 손 놔!”강지한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손 놓으면 도망가게?”그러면서도 손에 힘이 살짝 풀렸다.심미연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할머니 주치의가 전화해서 특효약에 대해 말해줬어. 당신이 약속 지켰으니까 나도 말한 대로 할 거야. 걱정하지 마, 억울하더라도 온지유에게 사과할 거니까.”강지한은 경성에서 손으로 하늘도 가릴 사람이라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는 건 쉬웠다.하지만 그가 진실을 알아내기보다는 온지유의 일방적인 말을 믿고 싶어 하는데 무슨 말을 더 하겠나. 차라리 순순히 온지유에게 사과하면 강지후가 좋게 봐줘서 다음 약을 얻는 게 더 쉬워질 수도 있었다.부부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건지, 마음이 씁쓸했다.강지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할아버지 앞에서 말 제대로 해.”심미연은 그 말의 뜻을 알아듣고 가슴이 아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알아.”강지한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할머니는 그의 손에 있는 약으로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다.강지한은 그녀를 슬쩍 보고는 앞으로 걸어갔다.심미연은 단화를 신고 있었지만 그래도 강지한보다 다리가 짧아서 빠르게 걷는 그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박유진의 물음에 심미연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되물었다.“무슨 증거?”온지유 차 사고에 대한 증거를 말하는 건가?근데 그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고 심지어 신하린 조차 모르고 있을 텐데...“네 형님의 차 사고에 대한 증거 말이야.”순간 심미연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진짜네? 근데 이걸 박유진이 어떻게 알고 있지?“걱정하지 마. 증거들은 모두 합법적인 방식으로 알아낸 거니까.”심미연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박유진은 냉큼 그녀에게 해명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증거들을 모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지금 내가 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이따가 다시 연락하면 안 될까?”심미연도 알다시피 지금 당장 모든 증거를 강지한 쪽으로 돌려도 이 일을 자신이 했다고 믿지 않을 것이고 그저 그녀가 증거를 위조했다고만 여길 것이다.강지한도 당연히 그녀를 보호해 줄 것이다. “그래. 그럼 네 전화 기다릴게.”박유진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심미연은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문득 박유진이 알아낸 증거가 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박유진이 뭐라고 했기에 이렇게 혼이 빠진 상태야.”강지한의 싸늘한 목소리에 심미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나랑 유진이는 거의 친남매 사이란걸 알잖아. 근데도 그렇게 질투하고 싶으면 말리지는 않을게.” 심미연을 믿는 사람은 그녀가 굳이 해명하지 않아도 다 믿어줄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해명해도 듣지 않는다. 하여 쓸데없이 구구절절 해명할 필요가 없다.“이 강지한의 여자라면 파멸할지언정 다른 남자에게 절대 양보하지 않아!”강지한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박유진이 돌아온 뒤로부터 심미연은 이틀이 멀다 하고 이혼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다.참나...그의 말대로 그가 얻지 못하는 여자일지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심미연은 사실 이 말을 처음 듣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들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것
심미연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네!”강준형은 그제야 시름 놓고 밖으로 나갔다.강지한이 어떻게 행동하든, 그는 심미연이 기분 좋으면 된다고 생각했다.온지유는 강준형이 병실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재빨리 강지한에게 눈치 줬다.“지한 씨도 나가 있어. 나랑 미연 씨가 조용히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 강지한이 뭐라고 말하려던 순간 심미연이 말을 끊었다.“아니, 나가지 말고 여기에 증인으로 있어!”심보가 고약한 온지유가 자신이 사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강지한을 시켜 또다시 찾아와 난리 칠 것 같았다. 강지한은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이 여자가 대체 무슨 꿍꿍이지?심미연은 머리를 뒤로 깔끔하게 넘긴 뒤 사뿐사뿐 온지유의 침대 쪽으로 다가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미안해.”사실 여기에 오기 전까지 이 세 글자를 입 밖에 꺼내기 매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뱉고 나니 별것 아닌 것 같았다.그저 감정 없이 내뱉으면 되는 것이었다.온지유는 고개를 들고 한껏 창백한 얼굴과 아직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물었다.“미연 씨, 왜 그런 일을 벌인 거야? 내가 그렇게 미웠어?”심미연이 여기까지 와서 사과했다는 건 분명 그 일을 자신이 했다고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온지유가 이렇게 물어보는 건 당연했다.심미연은 허리를 다시 곧게 세우더니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되물었다.“사과했으니 이제 가도 되지?”사과만 하러 왔기에 굳이 다른 물음에 대답할 필요까지 없다고 생각했다.또한 온지유의 이 두 가지 질문을 한 목적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나중에 증거를 손에 넣고 나서 다시 온지유한테 따지리라 다짐했다.온지유는 한치의 죄책감도 없이 덤덤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다.대체 뭘 믿고 이리도 뻔뻔하고 당당한 걸까?“미연 씨, 요즘 지한 씨가 자주 나한테 와있어서 미연 씨가 많이 섭섭하다는 걸 잘 알고 있어. 근데 내가 임신하면서 몸도 안 좋고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
어쨌든 그녀는 심미연을 믿었다. 믿지 못한 건 자신이었다. “자, 이제 앉아서 다시 얘기해 봅시다.” 심미연은 커피잔을 들고 숟가락으로 천천히 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네.”임현은 의자 하나를 끌어당겨 심미연의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은 다시 본격적으로 논의에 들어갔다. 한참이 지난 후 논의를 마친 두 사람은 임현이 자료를 정리한 뒤 사무실을 나섰다. 심미연이 경성을 떠난 지 거의 4년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법정에서 익숙한 사람들을 만나면 모두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임현은 심미연의 두터운 인맥을 보며 자신이 처음 법정에 섰을 때의 긴장된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때는 손끝까지 떨릴 정도로 너무 긴장했었다.심미연은 임현을 자리에 앉혔다. 곧 재판이 시작되었다. 법정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양측 변호사들이 날카로운 언어로 치열하게 맞섰다. 두 차례의 격렬한 변론 끝에 결국 판결이 내려졌다. 두 명의 피고는 고의로 타인의 생명을 빼앗은 행위로 고의 살인죄가 성립된다고 판시되었다. 임현은 그 판결을 듣고 나서 긴장 속에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심미연은 자료를 정리한 후 일어나 가방을 챙기며 밖으로 향했다. “변호사님, 잠깐만요.” 임현이 급히 뒤따랐다. 두 사람이 법정을 나서자 갑자기 한 남자가 옆에서 달려들며 돌진해왔다. “네가 내 아들을 평생 감옥에 처넣었어. 이 악랄한 년, 죽여버릴 거야.” 심미연은 순간적으로 임현을 밀쳐내며 몸을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남자가 쥐고 있던 칼이 그녀의 팔을 스치며 옷을 찢고 그 아래 피부를 깊게 긁으며 길고 선명한 상처를 남겼다. 순식간에 피가 쏟아져 팔을 적셨다.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발을 들어 남자를 향해 힘껏 차며 그를 밀어냈다. 남자는 균형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고 손에서 칼이 떨어지며 큰 소리로 굴러갔다. “변호사님, 다치셨어요.” 임현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걱정스러
심미연은 그의 반응이 다소 과하게 느껴졌다. 아마 그도 스스로 너무 놀랐다는 걸 눈치챘는지 급히 감정을 누르고는 심미연에게 물었다. “신 대표님...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왜 입원하신 거죠?” 며칠째 신하린과 연락이 닿지 않길래 출장이라도 간 줄 았았는데 설마 병원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미연의 시선이 도진혁의 얼굴에 멈췄다. 한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심미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교통사고가 났어요. 다리가 부러져서 당분간 병원에 있어야 해요.” 도진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지금은 괜찮으세요?” ‘다리가 부러졌다니...’‘엄청 아팠을 텐데... 얼마나 힘들었을까.’그런데도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겉으론 괜찮아 보였어요. 그래도... 속은 많이 힘들 거예요.” 심미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도진혁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평소와는 달랐다. 순간적인 반응, 흔들리는 눈빛. 뭔가 이상했다. ‘혹시 하린이를 좋아하는 거야?’ “병원에 가서 직접 봐야겠어요.” 도진혁은 말을 끝내자마자 서류를 안고 황급히 돌아섰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문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심미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노트북을 꺼내 도진혁의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몇 번의 클릭 끝에 검색 결과가 뜨자 손이 멈췄다. 도진혁, 진성 최고 재벌가의 아들.심미연은 놀라움에 숨이 턱 막혔다. 그가 서류를 정리하거나 일을 처리할 때 유난히 능숙했던 이유가 그제야 이해됐다. ‘그런데 이런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 어떻게 하린이의 비서 자리에 만족할 수 있지?’심미연은 갑자기 예전 이야기가 떠올랐다. 은성이 막 설립된 초기에 신하린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정말 능력 있는 비서를 뽑았어. 뭐든지 잘하고 서류 처리도 완벽하게 해.’ 그때 신하린이 말한 대로 도진혁은 은성을 하나하나 키워가며 함께한 인물이었다. 그가 회사에
심미연이 교장 선생님과 대화를 마친 후 대문을 나서자 마이바흐 한 대가 일부러 그녀의 차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는 다가가 차 창문을 두드렸다. 창문이 내려가며 강지한의 냉담한 얼굴이 드러났다.“차 좀 옮겨.” 심미연은 차분히 예의 있게 말했다. “타. 내가 데려다줄게.” 강지한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단호하게 들렸다. 심미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대답했다. “차로 왔어. 혼자 갈 수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말해.”심미연은 어젯밤 일이 있고 나면 강지한이 한동안 잠잠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또 다시 나타나다니. ‘정말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네.’“언제 아들 데리고 나랑 같이 살 거야?” 강지한은 그녀의 얼굴을 바로 눈앞에서 마주하며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걸 느꼈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강지한, 너 제정신이야?” 심미연은 그와 대화하는 게 힘들었다.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도 전혀 듣지 않으니 점점 지치기만 했다. “제정신이지. 너랑 태하가 돌아와서 나랑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게 뭐가 이상해?” 강지한은 이게 아버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아이가 다른 사람을 아빠라고 부르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내가 말했잖아. 태하는 내 아들이야. 너랑은 아무 상관 없어.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혼했어. 같이 사는 건 절대 안 돼.” 심미연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강지한이 차를 옮길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걸 보자 그녀는 더 이상 말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두 차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 운전석에 앉은 후 바로 엔진을 켰다. 그리고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아 차 앞부분이 마이바흐 운전석 문을 향해 돌진했다. 차는 크게 흔들렸고 마이바흐의 차문은 한쪽이 심하게 움푹 들어갔다.강지한은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여자는 운전석에 앉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에게
신하린은 심미연과 눈을 마주치고는 웃으며 심태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유치원 잘 다녀와.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이모가 태하 많이 보고 싶을 거야.”신하린의 다정한 목소리에 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정작 심태하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더니 서운함에 눈가까지 벌겋게 물들었다. 결국 발을 쾅 구르며 토라진 채 나가버렸다. “태하 많이 화난 거 아니야?” 신하린이 걱정스럽게 묻자 심미연은 피식 웃었다. “당연히 화났지. 너는 태하가 마지막 희망처럼 붙잡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네가 그렇게 단칼에 잘라버렸잖아. 그래도 걱정 마. 태하는 금방 풀려. 살살 달래주면 금방 넘어가.” “그럼 다행이다. 얼른 가서 달래줘.” 신하린은 한심을 내쉬며 안심했다. “아침 먹고 좀 쉬어. 이따가 도진혁 씨 불러서 오라고 할게.” 심미연은 손을 흔들며 병실을 나섰고 문이 조용히 닫히자 병실엔 다시 고요함만 남았다. 간호사 스테이션 앞. 심태하는 간호사들과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우리 반에 진짜 뚱뚱한 친구가 있는데 다들 그 애를 뚱땡이라고 불러요.” “우리 반에는 진짜 예쁜 여자애도 있어요. 반에 있는 남자애들이 다 그 친구를 좋아해요. 어떤 남자애들은 몰래 초콜릿도 줘요.” “그 여자애가 저한테 초콜릿을 줬는데 우리 엄마가 어린이는 초콜릿 먹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초콜릿을 선생님한테 줬어요. 그리고 선생님한테 너무 예쁘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저한테 착한 아이라고 칭찬해줬어요.” 심미연은 그 모습을 보고 잠시 말을 잃었다. ‘이 꼬맹이가 유치원에 간 지 겨우 이틀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이렇게 인기가 많아졌다고?’ “우리 엄마 왔어요. 예쁜 누나들, 안녕히 계세요. 우리 이모 잘 부탁드려요.” 심태하는 통통한 손을 들어 올리며 앙증맞게 손을 흔들었다. 심미연이 막 걸어가자 심태하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잡고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너무 예뻐요.” 심미연은 고개를 숙여 그를
그때 그녀는 교장실에서 급히 나와 서둘러 걷다가 도진혁의 자전거와 부딪히며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도진혁은 자건거를 급히 세우고 그녀를 재빨리 안아 의무실로 데려갔다. 그녀는 괜찮다고 반복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도진혁은 그런 그녀를 끝까지 놓지 않고 회사까지 데려다주었다. 그 후 도진혁이 회사에 처음 출근했을 때 그녀는 그가 바로 그날 자신을 넘어뜨린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도진혁은 그녀의 곁에 남게 되었고 지금까지 함께했다. 몇 년간 함께 지내면서 그녀는 그때의 결정을 정말 잘한 것이라고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그럼 도진혁 씨한테 경인대로 가서 그 사람처럼 뛰어난 인재 몇 명을 더 찾아오게 해. 우리 회사의 발전에 그들이 꼭 필요해.” 심미연은 도진혁에 대해 매우 만족했다. 어차피 그녀는 몇 명을 곁에 두고 배우게 하려던 계획이었기에 도진혁이 학교에서 사람을 구하면 훨씬 믿음이 갈 것 같았다. “그럼 내가 도진혁한테 말해둘게.” 심미연의 기분이 좋아지자 신하린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알았어. 그럼 도진혁 씨한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몇 명 더 데려오게 해.” 심미연은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 신하린은 의족을 착용하더라도 예전처럼 무리해서 일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서 회사에는 몇몇 도움이 될 사람들을 두어야 했다. 신하린은 심미연의 말을 듣고 그녀의 의도를 어렴풋이 깨달은 뒤 회사에 관한 얘기를 잠시 나누었다.간병인이 아침을 준비해 가져오자 심미연은 그제야 자신이 죽을 사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머리를 한 대 톡 치며 말했다. “내 정신 좀 봐. 죽을 사왔는데 말하다 보니 깜빡했네.” 그렇게 말하며 작은 테이블을 펼쳤다. “정담 죽이네.” 신하린은 그 냄새를 들이마시며 말했다. 그녀는 제대로 된 아침을 먹은 지 오랜된 것 같았다. “맞아. 예전에 네가 좋아하던 걸로 기억해.” 심미연은 숟가락을 들어 신하린에게 건넸다. “먼저 먹어.”신하린은 숟가락을 들고 간병인에게 말했다.
[한 잠 자고 일어났을 때 위치 정보가 사라진 걸 알게 되었어요. 여러 번 시도했지만 도저히 위치를 찾을 수 없었고 결국 동생분의 핸드폰에 접근해 통화 기록을 확인했죠.][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었던 사람은 강씨 사모님이었어요.] 심미연은 눈을 반쯤 감고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심서연은 무슨 일로 문소영을 찾았을까?’ ‘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 친한 관계였나?’[보스, 지금 심서연 씨가 소식이 끊긴 상태인데 계속 추적할까요?] [네. 추적하세요.] 심미연은 뭔가 이상하다는 직감을 느꼈다. ‘심서연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알겠습니다. 바로 사람을 찾아서 추적하겠습니다. 그럼 신하린 씨 교통사고는 어떻게 할까요?] [제가 일이 끝나면 그 사람 정보를 다시 확인하고 진짜 신원을 정확히 파악해볼게요.] [네. 알겠습니다.]심미연은 전화를 끊고 벽에 기대 섰다.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때 병실 안에서 심태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빨리 와요!” 심미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급히 생각을 정리한 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엄마, 빨리 와서 이모 다리 어디 갔는지 찾아봐요.” 심태하가 그녀를 보고 급하게 달려왔다.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고개를 들어 심미연을 애타게 바라봤다. 심미연은 허리를 굽혀 그를 부드럽게 안아 올리며 심태하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조용히 말했다. “이모는 사고로 다리를 잃었어. 이제 의족으로 대신해야 해. 그러니까 이모 앞에서 다리가 없다고 말하면 안 돼.”심태하는 눈가가 갑자기 붉어지며 목소리가 떨렸다. “이모는 다리를 잃었어. 이모는 얼마나 아팠을까...” ‘그래서 이모가 요즘 그렇게 기운도 없고 얼굴이 안 좋았던 거구나.’ ‘다리를 잃은 거였어.’어린 아이는 마음이 먹먹하고 아픈 감정이 밀려왔다. “태하가 불어주면 이모가 안 아플 거야.” 신하린은 웃으며 말했다. 마음속에 슬픔이 밀려왔지만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간병인은 이미 출근해 신하린의 손을 조심스럽게 닦고 있었다. 심태하는 병실 문을 열자마자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이모, 나 왔어요!” 짧은 다리로 종종걸음치며 병상으로 달려가자 신하린의 얼굴에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간병인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침 준비해 주세요.” 간병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을 나섰다.심태하는 침대 곁으로 뛰어가 두 눈을 반짝이며 침대에 누워 있는 신하린을 바라봤다. “이모, 저 보고 싶었어요?” 부드럽고 귀여운 목소리에 신하린은 기분 좋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엄청엄청 보고 싶었지.” 심태하는 까치발을 들고 침대에 올라가려고 애썼지만 키가 닿지 않자 포기하고 조그만 얼굴을 숙여 신하린의 손등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저도 엄청 보고 싶었어요.”심미연은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 한구석이 시리게 아려왔다. 손에 든 죽을 옆의 서랍장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혹여 자신의 감정이 신하린에게 전해질까 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마침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심미연은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서둘러 말했다. “전화 좀 받고 올게.” 짧은 말만 남긴 채 병실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신하린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깨에 담긴 쓸쓸함이 선명하게 느껴져 마음 한쪽이 시큰해졌다.지금 심미연이 자신을 보고 얼마나 마음 아파할지 신하린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심미연이 조금이라도 덜 걱정하도록 신하린은 아픈 내색 하나 없이 묵묵히 치료에 임했다. 하루라도 빨리 회복해서 병원을 나가고 싶었다. 그래야 심미연이 더는 자신 때문에 속상해하지 않을 테니까.심미연은 병실을 나온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 [보스, 신하린 씨 사고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냈습니다.] 심미연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누구예요?] [한유나 씨 아버지입니다.]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그날 밤 경비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이
심미연은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박유진과 언젠가는 결혼할 것이라는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박유진은 심미연이 멍하니 있는 걸 보며 잠시 마음이 조금 씁쓸했지만 여전히 미소를 띠고 말을 이어갔다. “농담이야. 결혼 강요하려던 건 아니었어. 이렇게 하자. 오후에 시간이 되면 같이 보러 가자. 마음에 들면 내일 바로 이사도 가능해. 어때?”그는 심미연의 마음속에 강지한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확실히 알고 있었던 건 심미연이 그와 함께 평생을 살아갈 만큼 감정이 깊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심미연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오빠...” 심미연은 박유진이 억지로 웃고 있다는 걸 느꼈고 그 모습에 마음속 깊은 죄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박유진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지금은 오빠한테 결혼을 약속할 수 없어.” 그녀는 아직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박유진을 평생 고통 속에 두고 싶지 않았다. “알아. 미안하다고 하지 않아도 돼.” 박유진은 그녀의 손을 잡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추며 말했다. “내가 너무 서둘렀어.”심미연은 계속해서 자신에게 마음의 병이 있다고 말하며 그와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박유진은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진성에 있을 때였다면 이렇게 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경성에 돌아온 후 강지한이 언제든지 심미연과 심태하를 빼앗아 갈 것만 같아 점점 더 초조해졌다.“나 의사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치료 받을 거야.” 심미연은 그에게 어떤 약속도 할 수 없었지만 계속해서 자신이 노력하고 있다는 걸 확신시키려 애썼다. 매번 의사 말을 순순히 따르며 치료를 받으려고 했지만 그녀의 상태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심미연은 이제 더 이상
어린 아이를 조심스럽게 품에서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심미연은 세수를 하고 간단히 준비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박유진은 이미 아침을 준비해 놓고 거실을 정리하고 있었다.“일찍 일어났네? 조금 더 자.” 박유진은 청소기를 끄고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오늘 할 일이 많아서 더 이상 못 자. 정신없이 바쁠 거야.” 심미연은 그에게 다가가 허리를 감싸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먼저 아침 먹어. 나는 위층 가서 태하 깨울게.” 박유진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알겠어. 오빠가 태하 깨워줘.” 심미연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살짝 비벼댔다.박유진과 함께하는 시간은 평온하고 따뜻했다. 그저 이런 일상이 이어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아침 먹어. 난 위층 가서 좀 보고 올게.” 박유진은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꼬집으며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심미연은 그의 귀 끝이 살짝 붉어진 걸 보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식탁으로 향했다. 박유진은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깊은 숨을 내쉬며 위층으로 올라갔다.심미연의 방에 들어서자 침대 위에 엎드려 자고 있는 심태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박유진의 마음은 저절로 따뜻해졌다. 심미연과 심태하를 돌보는 건 그에게 큰 행복이자 기쁨이었다.심미연은 식탁에 앉아 보온병을 열었다. 따뜻한 우유와 갓 구운 빵의 고소한 향기가 퍼졌다. 빵은 부드럽고 입 안에서 살살 녹으며 그 맛이 정말 좋았다. 박유진은 예전엔 찐빵이나 만두 같은 것만 만들 줄 알았고 빵과 케이크는 나중에 배우게 된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녀와 심태하에게 모든 걸 쏟아부었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심미연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무거웠다. 아침을 먹으면서도 심미연은 복잡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아침을 마치고 거실로 나가자 박유진이 심태하를 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