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이 부분을 설명하기가 가장 어려웠다. 몸이 다시 안 좋아져서 의식을 잃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그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나는 매우 서투른 거짓말을 했다.“사진은 순간 포착된 거예요. 미처 그를 밀어낼 틈도 없었어요.”석지훈은 더 이상 그 일을 묻지 않고 갑자기 침묵에 잠겼다.2월의 핀란드는 전통적인 스키 성수기이자 눈이 가장 자주 내리는 계절이었고 이때 밤하늘에는 이미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나는 몸이 약간 추웠다. 석지훈은 내가 떨고 있는 것을 알아채고 소파 위의 담요를 끌어다 나에게 덮어주었다. 나는 그의 이런 세심함에 감동했고 마음은 물처럼 녹아내려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석지훈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처음 너를 칼로 찌른 건 내 의지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가 너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안겨준 건 사실이야. 그건 인정해! 그리고 너와 고현성은 네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그는 결국 너에게 키스했어. 난 남자야. 내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그런 짓을 당하는 걸 보고 아무렇지 않을 수 없어. 그 일은 네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너는 인정해야 해. 그러니 우리 이 일로 저 일을 퉁 치고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자.”석지훈의 뜻은 그냥 두 가지 일 모두 잊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거였다.그는 정말 너무나 쉽게 나를 용서했다.예전에도 그랬다. 그는 한 번도 나를 진심으로 나무란 적이 없었고 내 과거를 존중한다면서 나를 오해하거나 화를 낸 적도 없었다. 그는 정말 관대하고 사심 없는 사람이었다.그런 그였기에 내 마음은 더욱 아팠다.나는 이번 생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석지훈을 한결같이 믿고 다시는 그를 오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도 그를 사랑할 것이다.나는 그의 목을 껴안고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그는 눈빛이 살짝 어두워지며 말했다.“일어나. 버릇없이 굴지 말고.”그는 또다시 어른처럼 나를 훈계하고 있었다.원래는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지만 얌전히 일어났다.
내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석지훈은 나를 꽉 껴안더니 손바닥으로 내 허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나는 그가 뭔가를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자, 내가 옆에 있잖아.”나는 멍하니 대답했다. “네.”오랜만에 느끼는 그의 품이었다. 나는 그의 향기에 취해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뜨니 이미 정오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일어나 보니 밖에는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었다.아래층에 내려가 봤지만 석지훈은 없었다. 다시 위층 서재로 갔지만 그곳에도 없었다. 어디로 간 거지?나는 서재에서 그가 어제 쓴 글씨를 보았다. 마지막에 ‘자경’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설마 이게 그의 호인가?석씨 가문은 명문가였으니 석지훈에게도 당연히 호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몰랐다.자경, 왜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걸까?내가 손가락으로 그 글자를 가볍게 만지고 있을 때, 아래층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급히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한민수가 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를 힘겹게 끌고 오고 있었고 석지훈은 처마 밑에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민수와 그의 개들이 반갑지 않은 모양이었다.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는 아주 건장했고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한민수는 힘겹게 개들을 끌며 웃으면서 말했다.“왜 인상 쓰고 있어? 너희 집 지키라고 경비견을 데려온 거야. 이상한 사람들이 자꾸 집에 들락거리지 않게 말이야.”이상한 사람들...한민수는 누구를 말하는 걸까?석지훈은 거절했다.“너나 데리고 있어.”“안돼. 멀리서부터 데려왔단 말이야.”한민수는 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를 마당의 나무에 묶고 뻔뻔하게 말했다.“여기 묶어둘게. 이따가 사람이 와서 개집을 설치할 거야. 걱정 마, 네가 먹이를 줄 필요 없어. 내가 사람을 시켜서 매일 정기적으로 밥 주고 정기적으로 애견 삽에 데려가서 목욕도 시키도록 할 테니까.”석지훈: “...”그는 한민수에게 대꾸도 않고 집
“좋아해요.”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럼 네가 이름을 지어줘.”그가 말했다.“정말요? 얘들 데리고 있을 거예요?”내가 기뻐하며 묻자 그가 대답했다.“좋아한다면서?”“난 이름 잘 못 짓는데.”내 말에 석지훈은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으니까.나는 그의 차가운 손을 잡고 궁금한 듯 물었다.“오빠, 사별의 이름을 왜 윤아라고 지었어요?”석지훈이 가볍게 말했다.“네가 처음에 그 이름으로 날 속였잖아. 그 이름은 나에게 의미가 있어. 넌 윤아고 사별이는 작은 윤아고, 둘 다 내 아가야.”진지한 표정으로 이런 달콤한 말을 하다니, 그는 정말 심쿵하게 만드는 남자였다.나는 그를 넋을 잃고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윤민이는요?”그는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냥 아무렇게나 지은 거야.”나: “...”‘앞으로는 윤민이를 더 예뻐해 줘야겠다.’나는 웃으며 발꿈치를 들고 석지훈의 뺨에 입을 맞췄다. 순간 그의 눈빛이 깊어지더니 낮게 잠긴 목소리로 경고했다.“적당히 해.”나는 그때 석지훈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가 오랫동안 금욕했다는 사실을 잊은채 더욱 들이대며 말했다.“오빠는 내 남자인데 뽀뽀하는 게 뭐 어때서요? 난 오빠가 좋은걸.”...침대에서 뒤척이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아래층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발코니로 나가 보니 인부들이 개집을 짓고 있었다. 옆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작은 놀이터도 만들고 있었다.한민수는 정말 공을 많이 들였다. 별장 마당에서 뚝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석지훈은 무릎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무언가를 처리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집 밖으로 나갔다.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는 나를 보고 반갑게 꼬리를 흔들었다. 나는 그들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물었다.“배고파?”그리고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때 인부가 말했다.“배고픈 것 같지는 않은데
나는 석지훈과 한씨 가문의 어르신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그는 나에게 위층으로 올라가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대로 방으로 돌아가 옷장을 열었다. 옷장 안에는 여자 옷이 많이 있었다. 나는 먼저 따뜻한 내복을 입고 그 위에 흰색 스웨터를 입었다. 마지막으로 코트를 걸치고 따뜻한 목도리를 했다.나는 추위를 많이 탔다. 최근에 생긴 일이었다.아마도 몸이 예전보다 약해져서 그런 것 같았다.나는 연한 립스틱을 바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석지훈은 현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신발을 신으며 물었다.“선물 사 갈까요?”석지훈은 대답했다.우리가 별장을 나서며 보니 현정우는 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나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담배를 끄고 달려와 공손한 말투로 불렀다.“가주님, 석 대표님, 나가십니까?”석지훈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차 키 주세요.”현정우는 순순히 차 키를 건넸다.석지훈은 현정우가 가리키는 차를 찾아갔다. 내가 조수석에 앉고 나서야 그는 운전석에 앉았다.현정우와 경호원들은 동행하지 않은 채 나와 석지훈은 단둘이 별장을 떠났다. 그는 나를 에르크 중심가로 데려갔다. 에르크에는 큰 눈이 내리고 있어 길이 미끄러웠다. 석지훈은 안전하게 운전했지만 속도는 느렸다. 시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2~3시였다.선물부터 사러 갈 줄 알았는데 그는 나를 근처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건네주자 난 대충 훑어보고 느끼하지 않은 음식 몇 개와 케이크 두 조각, 요구르트 과일 플래터를 주문했다.그리고 석지훈에게 물었다.“오빠는 뭐 먹고 싶어요?”“스테이크 주세요. 미디엄 레어로.”잠시 멈추더니 종업원에게 말했다.“그리고 딸기 주스 한 잔 주세요. 따뜻하게 데워서 설탕을 좀 넣어 주시고요. 샴페인도 한 병 주세요.”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지고 가자 나는 맞은편에 앉은 석지훈에게 물었다. “오빠, 딸기 주스는 저 마시라고 시킨 거예요?”석지훈은 나를 보며 대답했다.“
나는 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왜요?”그러자 그가 말했다.“한 모금 더 마셔 봐.”시키는 대로 살짝 마시자 그제야 버터처럼 부드러운 크림 향이 샴페인의 톡 쏘는 맛과 어우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제 입맛에 딱이네요.”나는 웃으며 말했다.석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조금만 마셔.”수술한 지 열흘도 채 되지 않아 사실 술은 금물이었다. 그래서 나는 겨우 두 모금만 맛보고 조심스럽게 잔을 그에게 건넸다.“왜? 입에 안 맞아?”그의 눈빛에 의아함이 스쳤다.예전의 석지훈이라면 내가 좋아하는지 묻지도 않았을 텐데, 뭔가 떠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나를 건드리지 않는 건 뭔가 꺼리는 게 있는 걸까? 설마 내가 수술받은 걸 아는 건 아니겠지? 분명 비밀로 하라고 지시했는데.’마음속에 의문이 가득 차 이따 현정우한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에요. 그냥 마시고 싶지 않아서요.”어설픈 변명이었지만 내가 싫다고 하니 석지훈도 더 이상 술을 권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 후, 그는 나를 쇼핑몰로 데려갔다.석지훈은 와인 두 병을 고르더니 망설임 없이 계산대로 향했다.“더 안 사도 돼요?”내가 묻자 남자는 간단히 대답했다.“됐어.”그리고는 나한테 물어봤다.“갖고 싶은 거 있어?”“없어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옷이나 화장품, 액세서리는 부족한 적이 없었으니 딱히 갖고 싶은 것도 없었고 이제는 그런 것들에 별로 감흥이 없었다.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건 뭐든 살 수 있었으니까.내 말에 석지훈은 나의 가는 허리를 감싸 안고 쇼핑몰을 나섰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배에 있는 수술 자국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나는 통증을 참으며 간신히 차에 올라탔다. 창백해진 내 얼굴을 본 석지훈은 손을 뻗어 이마를 짚었다.“어디 아파?”“좀 피곤하네요.”내가 대답했다.지금 당장 진통제가 먹고 싶었다.석지훈은 한 씨 저택으로 가지 않고 차를 몰고 곧장 별장으로 데려왔다. 난 궁금해서 물었다.“어르신을 뵈러 가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석지훈은 이불 커버를 침대에 내려놓더니 갑자기 내 손에서 컵을 가져갔다.그러고는 방을 나갔다.설마 물을 떠다 주려는 건가?나는 서둘러 젖은 이불 밑에서 진통제를 꺼내 가방에 숨겼다. 잠시 후, 그는 따뜻한 물 한 컵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나는 물컵을 받아들고 그의 옆에 서 있었고 남자는 능숙하게 이불 커버를 갈았다. 내가 자연스레 침대에 걸터앉자 그는 손을 뻗어 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한숨 자고 나서 한씨 가문에 가자. 운성은 내일 아침에 돌아가고.”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석지훈은 내 손에서 컵을 가져가고는 방을 나갔다. 나는 침대에 누워 배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피가 조금 배어 나왔을 뿐 큰 문제는 없었다.눕자 몸이 훨씬 편해졌다. 아래층에서 다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민영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석지훈, 시간 좀 있어?”석지훈은 차갑게 대답했다.“없어.”“정말 나와 인연을 끊겠다는 거야?”“가.”석지훈이 말했다.“석지훈, 내가 안 가면 개라도 풀어서 물게 할 거야?”이번에 석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래층은 잠시 조용해졌다. 일어나 발코니로 나가보니 한민영이 별장 입구에 서 있었다. 그녀는 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한민수가 보낸 개들이 제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한민영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석지훈, 난 잘못한 게 없어.”석지훈과 한민영 사이에는 10미터 남짓한 자갈길이 있었고 한민영 앞에는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는 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가 버티고 서 있었다.석지훈이 나지막이 말했다.“조용히 좀 해.”한민영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물었다.“왜?”석지훈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아가 자고 있어.”그 말에 한민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녀가 왜 여기 있어?”석지훈이 되물었다.“밖에 있는 사람들 다 그녀 사람인 거 안 보여?”한민영은 곧바로 대답했다.“안 보여.”이렇게 석지훈에
석나은도 석지훈을 자신의 개인 소유물로 생각했다.그의 주변엔 여자가 많았고 하나같이 그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하지만 그는 능숙하게 상황을 처리했고 누구에게도 헛된 희망을 주지 않았다.나는 석지훈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걱정스럽게 물었다.“한씨 가문은 오빠를 계속 사윗감으로 생각하는데 우리 관계를 알면 어르신께서 오빠한테서 등을 돌리지 않을까요?”석지훈은 태연하게 말했다.“아니. 설령 나한테 등을 돌린다 해도 상관없어. 난 애초에 남 눈치 보면서 살지 않으니까.”석지훈은 사람과 일에 대해 항상 초연한 태도를 보였다.“나 때문에 오빠가 곤란해지는 건 싫어요.”석지훈은 갑자기 달래듯 말했다.“착하지, 조금만 자자.”그는 대화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남자였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잠들지 못하고 그의 체취를 깊이 들이마시며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이렇게만 있어도 충분히 안심이 되었다.석지훈은 피곤했는지 나보다 먼저 잠들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눈썹뼈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그의 눈썹뼈는 정말 아름다웠다.단단하고 하얀 것이 내가 좋아하는 모습이었다.나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그의 눈썹뼈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느낌에 그가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리자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석지훈은 갑자기 손을 뻗어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안 자?”그의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했다.나는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애정 어린 입맞춤을 했다. 석지훈은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껌딱지.”그는 항상 나를 껌딱지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는 정말 매 순간 그에게 붙어 있고 싶었고 그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런 감정은 고현성에게서는 느껴본 적 없는 것으로 내 마음은 온통 그로 가득했다.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좀 더 자요.”석지훈이 눈을 감자 나는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 앉아 나는 휴대폰으로 현정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현정우는 의사를 데리고 별장으로 들어왔다. 치료가 끝나
현정우는 잘생긴 외모에 말이 없을 때는 차가워 보였다. 게다가 경호원이라는 직업은 큰 안정감을 주었다. 키도 190cm에 가까웠고 건장하면서도 군살 없는 몸매는 석지훈 못지않게 완벽해서 이런 남자라면 여자들이 줄을 서서 따라다닐 것이었다.하지만 지금 그는 스스로를 겨우 목숨이나 파는 경호원이라고 낮추며 말 한마디마다 자기비하가 가득했다.그 모습을 보니 내 기분까지 가라앉았다.그는 내 사람인데, 내 사람이 이렇게 스스로를 비참하게 여기는 건 내 탓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느 집 귀한 아가씨이기에 그가 이렇게까지 비참한 감정을 느끼는지 알고 싶었다.나는 다시 물었다.“이름이라도 알려 줄 수 있어요?”현정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아꼈다.“저에게는 너무 높은 분이라 그냥 마음속에 간직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나는 자조적인 그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약속했다.“좋아한다면 내가 중매를 서 줄 수도 있어요. 어쨌든 지금 저는 석씨 가문의 대표이니까. 내가...”현정우는 입술을 깨물더니 부드럽게 내 말을 가로막았다.“가주님, 그녀는 눈부신 별과 같은 사람입니다. 석 대표님 같은 남자가 어울리죠. 저는 그저 바닥의 진흙일 뿐이니 가주님이 나서준다 해도 그녀는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녀와 제 마음은 그저 가슴속에 묻어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요.”현정우가 그렇게 말하니 더 이상 묻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중요한 건 좋아하는 마음이에요. 나도 9년 동안 한 사람을 좋아했었어요... 뭔가를 바라서가 아니라 그 사람은 제게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으니까요.”“네. 저도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나는 약속했다.“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요.”“가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훨씬 뒤에야 나는 현정우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정말 그의 마음속 깊이 묻어둔 너무나 멀고 높은 별이었다.그리고 그 별 때문에 그는 깊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강가에서 잠시 시
오늘 밤의 일은 정말 불쾌하게 끝났다. 담현아가 그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그녀는 진심으로 최희연을 친구로 여겼다.별장에 거의 도착했을 때 함승윤이 메시지를 보내왔다.“가주님, 죄송합니다. 아까 샤워 중이라 보내신 메시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석씨 가문에서 분명 가능할 겁니다. 가주님께서 무엇을 하고 싶으신지 알려주세요.”나는 최희연을 위해 복수를 하고 싶었다.주민솔이 저지른 일을 그에게 자세히 설명하자 그는 빠르게 답장을 보내왔다.“알겠습니다. 가주님의 뜻에 따라 처리하겠습니다.”석씨 가문과 고정재가 동시에 주민솔을 상대했다. 비록 진유겸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 보니 형벌까지 내릴 수는 없겠지만 그가 양어머니와 관련된 일을 마치고 나서 주민솔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이미 늦었을 것이다. 그동안 그녀는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며 고통을 겪을 것이다.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했다.“희연이 너무 안타까워.”마치 예전의 나와 다를 바가 없었다.하지만 어떤 일은 스스로 받아들여야 했다.게다가 오늘 그녀의 상태를 보니 꽤 괜찮아 보였다. 진유겸이 그녀의 얼굴 흉터를 보았을 때 잠시 당황한 것 외에는 늘 차분함을 유지했다. 심지어 진유겸 앞에서 주민솔을 고발하기까지 했다. 예전의 그녀라면 아마 진유겸을 위해 한발 물러섰을 것이다.석지훈은 깊은 생각에 빠진 나를 보더니 물었다.“둘의 이혼 때문에 그래? 사실 진유겸은 나름의 사정이 있어.”그는 사건의 전말을 다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이내 궁금해서 물었다.“유겸 씨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희연이를 잠깐 사랑했던 거예요?”창밖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는 창문을 닫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주민솔은 어린 시절부터 진유겸 곁에 있었어. 아마 열다섯 살 때, 진유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주었어. 그 당시 유겸은 아무런 권력도 없어서 그저 주민솔이 그 남자들에게 농락당하는 걸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그 일이 있고 주민솔은 죽을 뻔했어. 정신 상태가
그녀를 사랑하냐고?고정재는 이 질문을 수천 번도 더 생각해 봤다.그는 평생 덤덤하게 살아왔고 결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처음 연수아를 만나고 나서 그녀의 변함없는 확신에 감동하며 마음속에 서서히 좋아하는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그리고 그녀에게 한평생까지 약속했다.그러나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엄현히 달랐다.그는 눈앞에 있는 이 아이를 사랑한다.그녀는 그의 마음이 향하는 곳이었다.비록 그녀의 성격이 그보다 더 차갑다 해도 상관없었다.고정재는 몇 해 전 설날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단호하게 그를 거절했고 올해 설날에 다시 그의 마음을 고백하려던 찰나, 그녀는 다른 남자랑 함께 핀란드로 떠나버렸다.다른 남자와 함께 새해를 보낸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고정재는 차마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마음속은 온통 슬픔과 무력감 그리고 그녀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했다.이 아이는 결코 그를 생각한 적이 없었다.그가 절망에 빠져있을 때 마침 연수아에게서 문자를 받았다.그녀가 단지 일 때문에 핀란드에 간 것임을 알게 되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에게 설명하지 않은 그녀를 원망했다.지난 2년 동안 그의 일방적인 감정이었다.그 생각에 고정재는 억울함을 느꼈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그는 이 추격전에서 결국 졌다고 생각했지만 담현아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물었다.“저랑 결혼할래요?”그는 그녀와 남은 생을 함께하고 싶었다.그는 간절히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다.그는 서둘러 서류를 챙기고 아일랜드로 향했다. 결혼 등록소에서 그 아이를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한겨울에 그녀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긴 머리를 휘날리며 그야말로 너무 아름다웠다.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현아야.”그는 그녀보다 14살이나 더 많았다.사실 그는 나이가 많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너무 어리다 보니 고정재가 나이가 많아 보였다.담현아는 고개를 돌리며 차가운 바
나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얇은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걸친 채 훤칠한 기럭지를 자랑하는 고정재를 보았다.그는 담현아를 사모님이라고 불렀다.아마 한민영에게 들으라고 한 말인 것 같았다. 그는 점점 자신의 소유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남자들은 원래 이렇게 질투심이 강한 존재였나?담현아는 몸을 살짝 굳힌 채 돌아서며 말했다.“아저씨.”고정재는 멍한 표정의 한민수를 지나 담현아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부드럽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담현아는 고정재를 매우 의지했다. 마치 딴사람이 된 것마냥 차분한 목소리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설명했다.그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물었다.“다친 데는 없어?”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냥 희연 언니가 너무 억울해요.”그녀는 고의로 진유겸이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그러나 진유겸은 여전히 주민솔을 품에 꼭 안은 채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고정재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이곳 상황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했다.“네, 사건 접수해주세요. 그 어떤 실수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전화를 끊은 뒤 담현아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경찰서에서 새로 팀을 조성해서 사건을 조사할 거야. 우린 집에 가자. 멍든 곳부터 처리해야지.”그는 이미 그녀의 몸에 생긴 멍을 눈치챘다.그녀의 사소한 디테일 하나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순간 그가 나한테 했던 말이 떠올랐다.“세상을 돌아다니며 권력을 알아가라.”고정재는 대단한 인물이었다.그녀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고정재가 먼저 돌아선 뒤 그녀는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저 먼저 돌아갈게요.”“응, 나머지 일은 내가 맡아서 할게.” 내가 말했다.담현아는 고정재와 함께 경찰서를 떠났다.한편, 주민솔의 정신 상태는 꽤 좋아진 듯했다. 그때 진유겸의 전화가 갑작스럽게 울렸고 그는 주민솔을 맡긴 뒤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경찰서에는 이제 우리 몇 명만 남았다.나는 한숨을 내쉬며 최희연에게 물었다.“이제
진유겸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죽고 싶어?”담현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럼 당신도 끝장날걸!”진유겸은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입 닥쳐.”담현아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최희연이 급하게 그녀를 붙잡자 조용해졌다. 더는 진유겸을 자극하지 않았고 최희연의 마스크를 찾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최희연은 말없이 마스크를 다시 썼다.사실 지금 가장 힘든 사람은 최희연이었다.진유겸이 주민솔에게 더 애틋하게 대할수록 최희연이 더욱 안쓰러워 보였다.마치 과거의 모든 일이 신기루 같아지며 진유겸이 그녀를 사랑했던 기간이 아주 짧게 느껴졌다.20분 뒤 경찰은 떨리는 손으로 우리를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나는 가는 길에 고정재에게 메시지 한 통을 보냈다.[지금 현아가 경찰서에 있어요.]그는 담현아의 남편이었다. 당연히 그녀를 보호해야 했다.경찰서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석지훈에게 차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원래 그와 상관없는 일이었고 최희연을 위해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서였기에 그를 이 일에 얽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는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럼 문 앞에서 기다릴게. 걱정 마, 한민수가 있으면 안전할 거야.”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담현아와 함께 경찰서로 들어갔다.경찰은 간단하게 진술을 기록했고 깊게 캐묻지는 않았다.그러자 담현아는 자백하며 사실을 폭로했다.“그리고 저 여자가 고의로 살인을 했어요. 피해자가 현장에서 고소하면 바로 구속할 수 있죠?”법률상 가능한 일이었다.경찰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피해자가 누구인가요?”담현아는 최희연을 가리키며 말했다.“이분이요.”그 말을 들은 진유겸은 시선을 즉시 최희연에게 고정했다.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너도 그렇게 생각해?”그는 최희연에게 고소하고 싶은지 물었다.처음부터 그는 이 일을 누가 저질렀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걸 숨겼다.이를 눈치챈 최희연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경찰에게 말했다.“네, 고소하겠습니다.”순간 진유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지만
솔이는 최희연에게 화살을 돌렸다.나는 최희연을 오래전부터 알아 왔고 그녀는 절대 억울하게 당하며 참고만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가 갑자기 마스크를 벗자 사람들은 흉터로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모두 숨을 들이쉬었다.오직 담현아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어떻게 된 거예요?”최희연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목소리로 어느 재벌 딸에게 말했다.“네가 보고 싶은 건 내 얼굴 아니야? 망가진 얼굴 하나쯤이야, 그게 뭐 어때서? 난 열등감도 없고 슬프지도 않아. 그렇다고 우울하지도 않고. 뭘 비웃고 싶은 거야? 내가 못생겨서? 못생겼으면 또 어때? 그때 네 언니가 사람을 시켜 폭탄을 설치한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알고 보니 솔이가 한 짓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악랄할 줄이야.나는 한때 그녀가 생각보다 엄청 털털하다고 생각했었다.지금은 확실히 아니었다.나는 가슴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최희연을 위해 반드시 복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담현아가 바로 주민솔을 발로 걷어찼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반응할 틈도 없이 바닥에 세게 나뒹굴었다. 순간 그녀의 비명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담현아는 곧 그녀 위에 올라타더니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였다.주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며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나와 최희연도 급히 싸움에 끼어들었다.방 안에서는 여덟아홉 명이 뒤엉켜 싸우며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한민수는 더 이상 구경만 하지 않고 담현아를 지켰다. 그러나 담현아는 그녀를 그냥 놔두지 않은 채 팔을 물어뜯었다.순간 그녀의 팔에서 피가 철철 흘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 듯했다.밖에 있던 두 남자는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듣더니 이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진유겸은 얼른 담현아를 주민솔한테서 떼어내고는 최희연도 한쪽으로 밀쳐버렸다.갑자기 나타난 진유겸 때문에 최희연은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바닥에 떨어진 마스크를 찾았다.나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파 이내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곧 담현아도 내 옆으로 끌어들였
그중 가장 가난한 사람은 최희연이었는데 그녀의 표정을 보니 돈을 잃은 것 같지는 않았다. 담현아도 그녀가 돈을 잃게 두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나는 계속 놀았고 계속 돈을 잃었다. 하지만 석지훈은 룸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그는 이렇게 나에게 자리를 맡기고 가 버렸다.이때 갑자기 옆 테이블에서 소란이 일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 재벌가 아가씨가 최희연을 비웃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얼굴 좀 보여 줘 봐.”나는 불쾌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재벌가 아가씨가 대답했다.“그냥 최희연 씨의 얼굴 좀 보고 싶은데 계속 가리고 있으니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잖아.”최희연은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풍겼고 재벌가 아가씨의 말을 듣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상대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했다.나는 문득 깨달았다. 나의 이 친구는 온갖 고난을 겪은 후 짧은 시간 안에 강하고 흔들림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나는 웃으며 물었다.“네가 그럴 자격이 있어?”그때 담현아가 패를 탁 내려놓으며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에게 물었다.“도대체 놀 거야 말 거야? 돈도 없고 머리도 없는 재벌가 아가씨 주제에. 너랑 게임 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아?”담현아의 말에 그 재벌가 아가씨는 자극을 받았는지 울먹거리며 솔이를 바라보았다.“솔이 언니, 내가 심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쟤네 다 날 괴롭혀요.”솔이는 나와 담현아를 번갈아 보고는 최희연을 지나쳐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진유겸은 차갑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놀 거면 놀고 안 놀 거면 빨리 꺼져.”솔이는 다급하게 소리쳤다.“유겸아. 내 친구한테 왜 그래? 일부러 나랑 싸우자는 거지?!”이 세상에서 석지훈에게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한민영이었다면, 진유겸에게는 솔이가 있었다.하지만 솔이는 그럴 만도 했다.진유겸은 그녀의 약혼자였고 곧 결혼할 사이였으니까.그는 당연히 자기 여자 편을 들어줘야 했다.진유겸은 미간을 찌
진유겸은 더 이상 말을 섞기 귀찮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솔이가 더 이상 최희연을 괴롭히지 않자 나도 조용히 있었다. 룸 안은 갑자기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때 예유진이 카드놀이를 하자고 제안했는데 마침 세 테이블을 채울 수 있는 인원이었다.예유진은 도박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지난번 모임도 그가 주최했었다.담현아, 솔이, 최희연 그리고 재벌가 아가씨가 한 테이블에 앉았고 석지훈, 예유진, 진유겸 그리고 한민수가 한 테이블을 차지했다. 나는 놀고 싶지 않아서 석지훈의 옆에 앉았고 담유미 역시 놀고 싶지 않아 예유진의 옆에 앉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테이블에서 카드놀이를 시작했다.담현아는 머리가 좋아서 패를 다 기억하는 것 같았다. 그녀와 최희연이 같은 테이블이니 최희연이 괴롭힘을 당할 걱정은 아예 없었다.석지훈은 두 판을 치고 나서 전화를 받았다.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네가 대신 좀 놀고 있어.”나는 테이블에 앉아 한민수에게 말했다.“좀 봐줘요.”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어차피 지훈이 돈인데 많이 잃어도 괜찮아요. 부자의 돈을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 주는 거라고 생각하세요.”나는 거절했다.“지훈 씨 돈이면 내 돈이죠.”그 말을 들은 예유진은 나를 놀렸다.“형수님, 너무 쫀쫀한 거 아니에요?”예유진은 나를 형수님이라고 부른 첫 번째 사람이었다.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나를 형수님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기분 좋게 말했다.“그럼 내가 나중에 몰래 패 좀 넘겨줄게요.”옆에 있던 한민수가 콧방귀를 뀌었다.“형수님 소리 한 번 들었다고 그렇게 좋아하다니. 내가 형수님이라고 몇 번 더 불러 주면 나 돈 따게 해 줄 거예요?”“민수 씨가 왜 나한테 형수님이라고 불러요?”그는 석지훈을 형이라고 부르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자신을 낮추는 태도를 보였다.그가 원한다면 나야 좋았다. 나는 동의하며 말했다.“그래요. 그럼 형수님이라고 몇
석지훈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구석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사람이 들어와도 고개도 들지 않았다.나는 갑자기 그를 놀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다가가서 뺨에 뽀뽀했다. 그는 재빨리 반응하며 나를 밀쳤고 나는 바닥에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나는 너무 창피했다. 석지훈은 그제야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차가웠고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듯 어두웠다.나인 것을 알아보자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다급한 모습에 나를 비웃던 사람들은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한민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옆에서 말했다.“지훈은 여자가 가까이 오는 걸 싫어해요. 수아 씨가 누군지 몰랐으니까 그런 거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가까이 가면 크게 혼나요.”담현아가 있었지만 그는 예전처럼 반갑게 그녀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마치 담현아를 자신의 세계에서 배제한 것 같았다.그럴 만도 했다. 담현아는 이제 고정재의 아내였고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100년짜리 혼인 신고를 했으니 한민수가 마음이 있어도 소용없었다.그의 마음은 분명 괴롭고 답답할 것이다.어린 여자를 2년이나 쫓아다녔는데 아무 성과도 없이, 결국 다른 사람이 채가서 결혼까지 해버렸으니 말이다.사실 룸 안 분위기는 꽤 어색했다. 진유겸과 최희연 그리고 솔이, 한민수와 담현아, 나와 담유미까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처음부터 솔이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아니었다.담현아는 최희연을 데리고 한민수의 옆에 앉혔고 석지훈은 내 엉덩이를 계속 문질러 주고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이 행동을 보지 못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오빠 눈빛이 나를 죽일 것 같았어요. 그리고 엉덩방아도 세게 찧어서 너무 아파요.”그가 방금 밀치는 바람에 배에 난 상처가 욱신거렸다.제발 상처가 터지지 않았기를.석지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너인 줄 몰랐어.”“그래
나는 저 여자를 본 적이 있었다.고씨 가문 20주년 기념 파티에서 만났던 그 아가씨 같았다. 당시 나는 그녀의 몸을 발로 차기까지 했었는데.그렇게 당했으면서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건가?이번엔 아예 담현아에게 뺨을 맞았다. 내가 놀란 것은 물론이고 그 아가씨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담현아를 바라보며 화를 꾹 참고 말했다.“왜 날 때려?”담현아는 손목을 풀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입을 함부로 놀리래? 최 참새? 네 꼴을 봐. 까투리 같은 주제에 어떻게 남을 욕해?”그 아가씨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담현아에게 말했다.“현아야, 까투리랑 뭘 그렇게 따져?”“못생긴 게 꼴값 떨잖아요.”담현아가 말했다.그 아가씨의 얼굴은 보기 흉할 정도로 창백했다가 파랗게 질렸다가 검게 변했다. 그때 2층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이슬아, 아직도 아래에 있었어? 어머, 최희연 씨도 있었네? 위에 올라와서 놀래요?”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워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오늘은 원수들만 만나는 날인가 보다.2층에서 부르는 사람은 솔이었다.일단은 솔이라고 부르겠다.이름을 다 알지 못하니까.그런데 그녀는 정말 대단했다. 최희연이 저렇게 온몸을 가리고 있는데도 알아봤기 때문이다. 마치 최희연과 아주 친한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나는 최희연과 친한데도 어제 가까이 가서야 알아봤는데 2층에서 저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알아본 거지...아무래도 평소에 최희연을 많이 관찰한 모양이었다.솔이는 진유겸을 역겹다고 말했던 여자였다. 쿨하게 뒤돌아설 줄 알았던 그녀는 단순한 여우가 아니었다. 어쩌면 여우보다 더 높은 단계의 불여우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완벽한 연기는 나조차도 감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최희연에게 물었다.“갈래?”불여우의 수법을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이다.최희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관심 없어.”담현아는 눈치가 빨라서 이상한 낌새를 금방 알아챘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