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석지훈은 나를 꽉 껴안더니 손바닥으로 내 허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나는 그가 뭔가를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자, 내가 옆에 있잖아.”나는 멍하니 대답했다. “네.”오랜만에 느끼는 그의 품이었다. 나는 그의 향기에 취해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뜨니 이미 정오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일어나 보니 밖에는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었다.아래층에 내려가 봤지만 석지훈은 없었다. 다시 위층 서재로 갔지만 그곳에도 없었다. 어디로 간 거지?나는 서재에서 그가 어제 쓴 글씨를 보았다. 마지막에 ‘자경’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설마 이게 그의 호인가?석씨 가문은 명문가였으니 석지훈에게도 당연히 호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몰랐다.자경, 왜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걸까?내가 손가락으로 그 글자를 가볍게 만지고 있을 때, 아래층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급히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한민수가 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를 힘겹게 끌고 오고 있었고 석지훈은 처마 밑에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민수와 그의 개들이 반갑지 않은 모양이었다.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는 아주 건장했고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한민수는 힘겹게 개들을 끌며 웃으면서 말했다.“왜 인상 쓰고 있어? 너희 집 지키라고 경비견을 데려온 거야. 이상한 사람들이 자꾸 집에 들락거리지 않게 말이야.”이상한 사람들...한민수는 누구를 말하는 걸까?석지훈은 거절했다.“너나 데리고 있어.”“안돼. 멀리서부터 데려왔단 말이야.”한민수는 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를 마당의 나무에 묶고 뻔뻔하게 말했다.“여기 묶어둘게. 이따가 사람이 와서 개집을 설치할 거야. 걱정 마, 네가 먹이를 줄 필요 없어. 내가 사람을 시켜서 매일 정기적으로 밥 주고 정기적으로 애견 삽에 데려가서 목욕도 시키도록 할 테니까.”석지훈: “...”그는 한민수에게 대꾸도 않고 집
“좋아해요.”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럼 네가 이름을 지어줘.”그가 말했다.“정말요? 얘들 데리고 있을 거예요?”내가 기뻐하며 묻자 그가 대답했다.“좋아한다면서?”“난 이름 잘 못 짓는데.”내 말에 석지훈은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으니까.나는 그의 차가운 손을 잡고 궁금한 듯 물었다.“오빠, 사별의 이름을 왜 윤아라고 지었어요?”석지훈이 가볍게 말했다.“네가 처음에 그 이름으로 날 속였잖아. 그 이름은 나에게 의미가 있어. 넌 윤아고 사별이는 작은 윤아고, 둘 다 내 아가야.”진지한 표정으로 이런 달콤한 말을 하다니, 그는 정말 심쿵하게 만드는 남자였다.나는 그를 넋을 잃고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윤민이는요?”그는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냥 아무렇게나 지은 거야.”나: “...”‘앞으로는 윤민이를 더 예뻐해 줘야겠다.’나는 웃으며 발꿈치를 들고 석지훈의 뺨에 입을 맞췄다. 순간 그의 눈빛이 깊어지더니 낮게 잠긴 목소리로 경고했다.“적당히 해.”나는 그때 석지훈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가 오랫동안 금욕했다는 사실을 잊은채 더욱 들이대며 말했다.“오빠는 내 남자인데 뽀뽀하는 게 뭐 어때서요? 난 오빠가 좋은걸.”...침대에서 뒤척이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아래층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발코니로 나가 보니 인부들이 개집을 짓고 있었다. 옆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작은 놀이터도 만들고 있었다.한민수는 정말 공을 많이 들였다. 별장 마당에서 뚝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석지훈은 무릎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무언가를 처리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집 밖으로 나갔다.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는 나를 보고 반갑게 꼬리를 흔들었다. 나는 그들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물었다.“배고파?”그리고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때 인부가 말했다.“배고픈 것 같지는 않은데
나는 석지훈과 한씨 가문의 어르신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그는 나에게 위층으로 올라가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대로 방으로 돌아가 옷장을 열었다. 옷장 안에는 여자 옷이 많이 있었다. 나는 먼저 따뜻한 내복을 입고 그 위에 흰색 스웨터를 입었다. 마지막으로 코트를 걸치고 따뜻한 목도리를 했다.나는 추위를 많이 탔다. 최근에 생긴 일이었다.아마도 몸이 예전보다 약해져서 그런 것 같았다.나는 연한 립스틱을 바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석지훈은 현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신발을 신으며 물었다.“선물 사 갈까요?”석지훈은 대답했다.우리가 별장을 나서며 보니 현정우는 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나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담배를 끄고 달려와 공손한 말투로 불렀다.“가주님, 석 대표님, 나가십니까?”석지훈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차 키 주세요.”현정우는 순순히 차 키를 건넸다.석지훈은 현정우가 가리키는 차를 찾아갔다. 내가 조수석에 앉고 나서야 그는 운전석에 앉았다.현정우와 경호원들은 동행하지 않은 채 나와 석지훈은 단둘이 별장을 떠났다. 그는 나를 에르크 중심가로 데려갔다. 에르크에는 큰 눈이 내리고 있어 길이 미끄러웠다. 석지훈은 안전하게 운전했지만 속도는 느렸다. 시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2~3시였다.선물부터 사러 갈 줄 알았는데 그는 나를 근처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건네주자 난 대충 훑어보고 느끼하지 않은 음식 몇 개와 케이크 두 조각, 요구르트 과일 플래터를 주문했다.그리고 석지훈에게 물었다.“오빠는 뭐 먹고 싶어요?”“스테이크 주세요. 미디엄 레어로.”잠시 멈추더니 종업원에게 말했다.“그리고 딸기 주스 한 잔 주세요. 따뜻하게 데워서 설탕을 좀 넣어 주시고요. 샴페인도 한 병 주세요.”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지고 가자 나는 맞은편에 앉은 석지훈에게 물었다. “오빠, 딸기 주스는 저 마시라고 시킨 거예요?”석지훈은 나를 보며 대답했다.“
나는 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왜요?”그러자 그가 말했다.“한 모금 더 마셔 봐.”시키는 대로 살짝 마시자 그제야 버터처럼 부드러운 크림 향이 샴페인의 톡 쏘는 맛과 어우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제 입맛에 딱이네요.”나는 웃으며 말했다.석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조금만 마셔.”수술한 지 열흘도 채 되지 않아 사실 술은 금물이었다. 그래서 나는 겨우 두 모금만 맛보고 조심스럽게 잔을 그에게 건넸다.“왜? 입에 안 맞아?”그의 눈빛에 의아함이 스쳤다.예전의 석지훈이라면 내가 좋아하는지 묻지도 않았을 텐데, 뭔가 떠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나를 건드리지 않는 건 뭔가 꺼리는 게 있는 걸까? 설마 내가 수술받은 걸 아는 건 아니겠지? 분명 비밀로 하라고 지시했는데.’마음속에 의문이 가득 차 이따 현정우한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에요. 그냥 마시고 싶지 않아서요.”어설픈 변명이었지만 내가 싫다고 하니 석지훈도 더 이상 술을 권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 후, 그는 나를 쇼핑몰로 데려갔다.석지훈은 와인 두 병을 고르더니 망설임 없이 계산대로 향했다.“더 안 사도 돼요?”내가 묻자 남자는 간단히 대답했다.“됐어.”그리고는 나한테 물어봤다.“갖고 싶은 거 있어?”“없어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옷이나 화장품, 액세서리는 부족한 적이 없었으니 딱히 갖고 싶은 것도 없었고 이제는 그런 것들에 별로 감흥이 없었다.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건 뭐든 살 수 있었으니까.내 말에 석지훈은 나의 가는 허리를 감싸 안고 쇼핑몰을 나섰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배에 있는 수술 자국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나는 통증을 참으며 간신히 차에 올라탔다. 창백해진 내 얼굴을 본 석지훈은 손을 뻗어 이마를 짚었다.“어디 아파?”“좀 피곤하네요.”내가 대답했다.지금 당장 진통제가 먹고 싶었다.석지훈은 한 씨 저택으로 가지 않고 차를 몰고 곧장 별장으로 데려왔다. 난 궁금해서 물었다.“어르신을 뵈러 가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석지훈은 이불 커버를 침대에 내려놓더니 갑자기 내 손에서 컵을 가져갔다.그러고는 방을 나갔다.설마 물을 떠다 주려는 건가?나는 서둘러 젖은 이불 밑에서 진통제를 꺼내 가방에 숨겼다. 잠시 후, 그는 따뜻한 물 한 컵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나는 물컵을 받아들고 그의 옆에 서 있었고 남자는 능숙하게 이불 커버를 갈았다. 내가 자연스레 침대에 걸터앉자 그는 손을 뻗어 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한숨 자고 나서 한씨 가문에 가자. 운성은 내일 아침에 돌아가고.”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석지훈은 내 손에서 컵을 가져가고는 방을 나갔다. 나는 침대에 누워 배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피가 조금 배어 나왔을 뿐 큰 문제는 없었다.눕자 몸이 훨씬 편해졌다. 아래층에서 다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민영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석지훈, 시간 좀 있어?”석지훈은 차갑게 대답했다.“없어.”“정말 나와 인연을 끊겠다는 거야?”“가.”석지훈이 말했다.“석지훈, 내가 안 가면 개라도 풀어서 물게 할 거야?”이번에 석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래층은 잠시 조용해졌다. 일어나 발코니로 나가보니 한민영이 별장 입구에 서 있었다. 그녀는 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한민수가 보낸 개들이 제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한민영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석지훈, 난 잘못한 게 없어.”석지훈과 한민영 사이에는 10미터 남짓한 자갈길이 있었고 한민영 앞에는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는 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가 버티고 서 있었다.석지훈이 나지막이 말했다.“조용히 좀 해.”한민영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물었다.“왜?”석지훈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아가 자고 있어.”그 말에 한민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녀가 왜 여기 있어?”석지훈이 되물었다.“밖에 있는 사람들 다 그녀 사람인 거 안 보여?”한민영은 곧바로 대답했다.“안 보여.”이렇게 석지훈에
석나은도 석지훈을 자신의 개인 소유물로 생각했다.그의 주변엔 여자가 많았고 하나같이 그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하지만 그는 능숙하게 상황을 처리했고 누구에게도 헛된 희망을 주지 않았다.나는 석지훈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걱정스럽게 물었다.“한씨 가문은 오빠를 계속 사윗감으로 생각하는데 우리 관계를 알면 어르신께서 오빠한테서 등을 돌리지 않을까요?”석지훈은 태연하게 말했다.“아니. 설령 나한테 등을 돌린다 해도 상관없어. 난 애초에 남 눈치 보면서 살지 않으니까.”석지훈은 사람과 일에 대해 항상 초연한 태도를 보였다.“나 때문에 오빠가 곤란해지는 건 싫어요.”석지훈은 갑자기 달래듯 말했다.“착하지, 조금만 자자.”그는 대화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남자였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잠들지 못하고 그의 체취를 깊이 들이마시며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이렇게만 있어도 충분히 안심이 되었다.석지훈은 피곤했는지 나보다 먼저 잠들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눈썹뼈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그의 눈썹뼈는 정말 아름다웠다.단단하고 하얀 것이 내가 좋아하는 모습이었다.나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그의 눈썹뼈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느낌에 그가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리자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석지훈은 갑자기 손을 뻗어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안 자?”그의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했다.나는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애정 어린 입맞춤을 했다. 석지훈은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껌딱지.”그는 항상 나를 껌딱지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는 정말 매 순간 그에게 붙어 있고 싶었고 그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런 감정은 고현성에게서는 느껴본 적 없는 것으로 내 마음은 온통 그로 가득했다.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좀 더 자요.”석지훈이 눈을 감자 나는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 앉아 나는 휴대폰으로 현정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현정우는 의사를 데리고 별장으로 들어왔다. 치료가 끝나
현정우는 잘생긴 외모에 말이 없을 때는 차가워 보였다. 게다가 경호원이라는 직업은 큰 안정감을 주었다. 키도 190cm에 가까웠고 건장하면서도 군살 없는 몸매는 석지훈 못지않게 완벽해서 이런 남자라면 여자들이 줄을 서서 따라다닐 것이었다.하지만 지금 그는 스스로를 겨우 목숨이나 파는 경호원이라고 낮추며 말 한마디마다 자기비하가 가득했다.그 모습을 보니 내 기분까지 가라앉았다.그는 내 사람인데, 내 사람이 이렇게 스스로를 비참하게 여기는 건 내 탓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느 집 귀한 아가씨이기에 그가 이렇게까지 비참한 감정을 느끼는지 알고 싶었다.나는 다시 물었다.“이름이라도 알려 줄 수 있어요?”현정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아꼈다.“저에게는 너무 높은 분이라 그냥 마음속에 간직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나는 자조적인 그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약속했다.“좋아한다면 내가 중매를 서 줄 수도 있어요. 어쨌든 지금 저는 석씨 가문의 대표이니까. 내가...”현정우는 입술을 깨물더니 부드럽게 내 말을 가로막았다.“가주님, 그녀는 눈부신 별과 같은 사람입니다. 석 대표님 같은 남자가 어울리죠. 저는 그저 바닥의 진흙일 뿐이니 가주님이 나서준다 해도 그녀는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녀와 제 마음은 그저 가슴속에 묻어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요.”현정우가 그렇게 말하니 더 이상 묻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중요한 건 좋아하는 마음이에요. 나도 9년 동안 한 사람을 좋아했었어요... 뭔가를 바라서가 아니라 그 사람은 제게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으니까요.”“네. 저도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나는 약속했다.“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요.”“가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훨씬 뒤에야 나는 현정우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정말 그의 마음속 깊이 묻어둔 너무나 멀고 높은 별이었다.그리고 그 별 때문에 그는 깊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강가에서 잠시 시
[네. 위치 보낼게요.]담현아는 내 휴대폰으로 주소를 보냈다. 에르크 시내에 위치한 곳으로 오후에 석지훈과 함께 쇼핑몰에 갔던 곳 근처였다. 차로 가면 두세 시간은 걸릴 거리였다.솔직히, 요 며칠 나는 계속 이동 중이었다. 길 위에 있거나 길을 떠날 준비를 하거나. 난 이런 이동에 정말 진절머리가 났다.그래서 현정우에게 헬기를 준비시켰다.30분 후, 나는 현정우와 함께 시내에 도착했다. 담현아는 이미 와 있었지만 한민수는 아직이었다. 담현아가 단톡방에 문자를 보내 물어보자 그의 답장이 왔다.[가는 중이야. 차로 한 시간 더 걸릴 듯. 너희 먼저 놀고 있어. 도착하면 연락할게.][OK.]담현아가 답장을 보내자 원태웅이 문자를 보고 물었다.[너희 어디서 노는데?]담현아가 답했다.[저 수아 언니랑 콘서트 보러 왔어요.]담현아는 폰을 집어넣고 나를 콘서트장 안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입구에서 LED 토끼 귀 헤어밴드 두 개를 사서 각자 하나씩 썼다. 나는 신이 나서 말했다.“나는 정재 씨의 음악회밖에 못 가봤어. 이건 내 생애 첫 콘서트야.”고정재 이야기를 꺼내자 담현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나는 그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왜 그래?”“새해 이후로 연락이 없었어요.”고정재는 아마도 한민수가 새해 첫날 담현아를 핀란드에 데려간 일 때문에 여전히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고정재에게 담현아가 일 때문에 갔다고 설명했었다.나는 문득 고정재가 담현아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에게 설명하지 않고 혼자 속앓이를 하게 만든 것에 화가 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정재는 아마 지쳤을 것이다.이 관계에서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부었으니까.나는 담현아에게 물었다.“실망했어?”콘서트장은 현란한 조명과 사람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담현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나도 신경 쓰이나 봐요.”그 말은 고정재의 마음이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라는 뜻이었다.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둘 사이를 어떻게 할 생각이야? 현아야,
최욱현은 내 전화를 끊어버렸다. 굳이 그의 화를 돋워서 불필요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이불 속으로 몸을 움츠리며 들어갔다. 석지훈은 그런 나를 보더니 다정하게 말했다.“네가 고양이야? 근데 누구야? 무슨 일 있어?”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욱현이에요. 윤민이를 운성시까지 데려다줬어요.”최욱현을 언급하자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욱현 씨가 너를 가족처럼 여기는 것 같아. 그러니까 평소에 너무 멀리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항상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성격이다 보니 멀리할수록 오히려 네가 더 위험할 수 있어.”나는 놀라서 물었다.“예전에는 욱현이랑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했잖아요.”그는 몸을 느긋하게 소파에 기댄 채 한참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윤승민은 눈치채고 얼른 경호원들과 함께 떠났다. “어쨌든 위험한 사람은 맞아. 성격이 변덕스럽고 결과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행동하잖아. 예전에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했던 건 너한테 이토록 집착할 줄 몰랐기 때문이야. 근데 이제는... 너의 어머니랑 가까운 사람이잖아. 만약 네 어머니가 떠나면 곁에 아무도 없을 테니까 너를 유일한 가족으로 여기겠지.”나는 몸을 곧게 펴고 망원경을 통해 저 멀리 내다보았다. 귓가에 석지훈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윤아야, 피할 수 없으면 차라리 마주하는 게 나아.”망원경을 통해 보이는 건 오직 빛나는 별들뿐이었다. “알겠어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아요.”최욱현은 가족을 원했다. 나는 그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나를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석지훈은 나를 향해 다정하게 물었다.“뭐가 보여?”“별이요. 하늘에 별이 가득해요.”별들은 까만 밤하늘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그는 다시 물었다.“핀란드와 비교하면 어때?”핀란드는 석지훈이 유일하게 고향으로 여기는 곳이다.하지만 그는 나와 함께 운성시에 정착했다.“다 아름다워요.”“응, 핀란드는 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들었어. 시간 되면 F국으로 뵈러가자.”“네, 그래요.”나는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 싶었다.밤은 점점 깊어졌고 아이스랜드의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꽉 채우고 있었다.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오늘은 오로라를 볼 수 있을까요?”“별일 없으면 무조건 볼 수 있을 거야.”캠핑카 옆에는 흰색 천문 망원경이 준비되어 있었고 소파도 하나 놓여 있었다. 대개 두 사람이 누울 정도의 크기였고 위에는 하얀 담요가 놓여 있었다. 나는 포근해 보이는 모습에 얼른 다가가 소파에 앉았다.“윤 비서님이 준비한 거예요?”뒤에 서 있던 윤승민이 웃으며 말했다.“아가씨가 추울까 봐 준비해 뒀어요.”“참 배려 깊으신 분이네요.”나는 신발을 벗고 소파에 누웠다. 그는 윤승민에게서 새 양말 한 켤레를 건네받아 나한테 신겨줬다. 갑자기 마음도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윤아야, 아직도 추워?”이토록 세심하게 챙겨주는데 추울 리가.“감사해요, 둘째 오빠.”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별것도 아닌 걸 뭐.”뭔가 말하려던 찰나, 최욱현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석지훈의 기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그는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왔다.나는 일어나서 신발을 신고 옆으로 걸어갔다. 전화를 받자 최욱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아이는 비서한테 보냈어. 넌 언제 돌아올 거야?”“며칠 더 있다가.”“그럼 운성시에서 기다릴게.”나는 반문했다.“날 기다려서 뭐 해?”“얼굴 한 번 보고 가려고.”나는 별로 그와 만나고 싶지 않아 단번에 거절했다.“어머니가 기다릴 거야.”그는 내 말 뜻을 알아차리고는 싸늘한 말투로 물었다.“날 만나고 싶지 않은 거야?”“아니야, 그냥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어.”그는 또 내 전화를 먼저 끊어버렸다....운성시.여기는 연수아가 어릴 때부터 자란 곳이다. 그래서 최욱현은 이곳에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비록 연수아는 그를 오빠로 인정하
“네 인생.”내 인생에 감회가 있을 게 뭐가 있지?나는 그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내 어깨를 문지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비록 넌 석씨 가문의 자녀로, 어릴 때부터 권력과 부를 누렸지만 사실 네 인생은 고난이 많았잖아. 어쩌면 세상의 모든 고통을 거의 다 겪은 것 같아. 세상은 너한테 잔인하면서도 자상하네.”세상이 잔인한 건 내가 고난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고 세상이 자상한 건 내가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그러니 세상에 완벽한 건 없었다.무언가를 얻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하지만 나는 이제 지난 과거를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 그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면 그만이다.“괜찮아요, 원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에요. 난 지금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에요. 특히 우리 아이들이 결혼하는 모습까지 보고 싶어요. 가끔은 윤민이가 오빠 성격을 닮지 않을까 싶어요. 오빠를 닮길 바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어요.”그는 목구멍 깊숙이에서 한 마디를 내뱉었다.“응?”그의 쌀쌀한 성격 탓에 만약 석윤민이 그를 닮는다면 여자 친구가 고생을 많이 할 것 같았다. 적어도 그의 마음을 얻는 게 쉽지 않을 거다. 나 역시 석지훈의 마음을 얻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나는 대충 대답했다.“별거 아니에요.”내가 말을 꺼내지 않자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너한테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었어.”1년 전, 우리는 캠핑하러 나웨이에 갔다. 천문 망원경까지 샀었다. 그때 오로라를 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하지만 그날 밤, 우리는 결국 오로라를 보지 못했다. 나는 그때 조금 실망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렸다. 그러나 석지훈은 그 일을 계속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이다.그리고 지금 우리는 아이스랜드에 있었고 4월은 오로라를 보기 가장 좋은 시기였다.차는 북쪽을 향해 계속 달렸다. 길은 멀었고 나는 몸이 나른해져서 그의 품에 기댄
윤승민은 뜸을 들이며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그는 석지훈의 비서로서 분명히 알 텐데 나한테 숨기고 있었다. 그로 인해 내 호기심은 더 커졌다.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예요?”윤승민은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조금만 기다려주세요.”비록 급하지는 않았지만 너무 궁금한 마음에 계속해서 그를 귀찮게 했다.“대체 어디로 가는 건데요?”그는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안 알려주면 지훈 씨한테 이를 거예요.”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말하면 더 빨리 죽겠어요. 제가 대표님의 행방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나는 그가 그렇게 충실할 리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만 포기하기로 했다. 문을 나서는 순간 최욱현이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윤민이는 잘 돌아갔어?”“응, 어머니가 윤민이랑 헤어지기 아쉬워하셔서 며칠 더 있다가 왔어. 근데 어머니도 윤민이를 곁에 계속 두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은지 얼른 나한테 데려가라고 재촉하더라. 방금 운성시에 도착했어. 넌 어디야? 찾으러 갈게.”“나 지금 아이스랜드야. 윤민이는 우리 엄마, 아빠한테 보내줘.”그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네 엄마, 아빠라니?”“응, 양 부모님.”그때 나는 오두막과 가까운 도로에 고급 세단 한 대가 멈춰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뒤에는 작은 승용차 몇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그들은 모두 석지훈의 경호원들이었다.차 문이 열려 있었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기다란 다리가 시선을 끌었다.심지어 나를 안은 채 그 기다란 다리로 걸어가는 모습조차 상상할 수 있었다.전화 너머로 최욱현의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부모님이라니?”나는 의아해서 물었다.“왜?”그는 거침없이 말했다.“네 엄마는 우리 어머니 한 명뿐이야.”“...”나는 그가 이런 것까지 신경을 쓸 줄은 몰랐다.어떻게 대답할지 몰라서 이내 대화를 돌렸다.“나 지금 국내에 없으니까 아이는 내 비서한테 맡겨줘.”그는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윤 비서는 약간 멍해 있는 나를 보
진유겸은 이런 상황에서도 최희연을 협박하고 있었다.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녀에게 물었다.“이제 어떡해?”그녀는 덤덤하게 말했다.“유겸 씨는 항상 내 약점을 알고 있어. 내가 마음이 약하다는 것도, 하지만 더 이상 굴복하고 싶지 않아.”그리고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계속해서 말했다.“내가 알아서 할게. 예전처럼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는 걸 확실히 알려줘야지. 됐어, 우리는 밥 먹으러 가자.”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팔짱을 꼈다. 그녀가 혼자 해결하고 싶어 하는 게 느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만약 그녀가 나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왕자현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마음속에 지키고 싶은 자존심이 있었다.최희연은 내 어깨에 떨어진 눈송이를 털어내며 말했다.“저녁 먹고 자현 씨는 시내로 가야 해, 나도 따라가려고. 너랑 지훈 씨는 여기 남아서 쉬어. 내일 아침에 오두막으로 돌아갈 거니까 그때 구경시켜 줄게... 아니다, 지훈 씨가 있으니 나랑 놀기 어렵겠네.”“얼른 가. 우리 신경 쓰지 말고.”“나 빨리 갔으면 좋겠지?” 그녀가 말했다.“그럴 리 없잖아.”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거실에서 두 남자는 체스를 두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누가 더 잘하세요?”왕자현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수아 씨도 체스를 둘 줄 아세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이거 어려운 거 아니잖아요. 아빠가 종종 삼촌이랑 체스를 두셨거든요. 그래서 곁에서 좀 봐왔어요.”그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분은 약간 부족하시네요.”약간 부족하다는 건 왕자현보다는 체스 실력이 낮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듣고 석지훈은 바로 체스판을 밀어버렸다.왕자현은 다소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화났어요?”나는 왕자현이 일부러 화를 돋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석지훈은 싸늘한 눈빛으로 왕자현을 쳐다보았고 그는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최희연은 분위기를 풀어주며 말했다.“얼른 밥 먹어요.”나는 배 불리
석지훈은 내 말에 대꾸하지 않았고 여전히 차가운 태도를 유지했다. 아마도 내가 왕자현을 칭찬한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그는 내가 왕자현의 외모에 반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석지훈은 내가 늘 그의 미모에 유혹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의 팔에 매달렸다. 그는 차갑게 나를 보며 물었다.“왜?”나는 일부러 물었다.“나한테 화났어요?”그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아니.”또 아니란다.나는 다시 물었다.“혹시 질투하는 거예요?”그는 차갑게 말했다.“아니.”“내 마음속에는 오빠가 제일 잘생겼어요!”나는 발끝을 세워 석지훈의 턱에 입을 맞춘 후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 쥐고 그의 눈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설명했다.“내 마음속에선 오빠가 제일 멋있어요! 아무도 오빠랑 비교할 수 없어요! 그리고 오빠가 잘생기지 않았더라도 난 오빠를 좋아했을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건 오빠라는 사람이지 오빠의 외모가 아니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석지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거짓말.”그가 이렇게 대답한다는 것은 화가 풀렸다는 의미였다.나는 다시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그런데 중심을 잃고 몸이 살짝 기울어지자 석지훈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왕자현의 저택의 따뜻한 방에서...최희연이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온몸에 피로를 느끼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때 석지훈은 방을 나가 왕자현을 만나러 갔다.왕자현이 그에게 문자를 보냈기 때문이다.[석지훈, 거실에서 얘기 좀 해.]나는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나는 자현 씨의 아내이니 조만간 그와 관계를 갖게 될 거야. 이건 피할 수 없는 일이잖아. 나 처녀막 수술을 하고 싶어.”나는 입술을 깨물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최희연이 먼저 말했다.“내가 이러는 건 뭔가를 숨기려는 게 아니야. 그는 내가 처녀가 아니라는 것도, 내가 낙태를 했다는 것도, 그리고 내가 두 남자를 만났다는 것도
석지훈은 갑자기 나를 놓아주고 침대 옆에 가서 앉았다. 다리 한쪽을 의자에 올리고 팔꿈치를 무릎에 괴는 모습이 평소와 달리 건들거렸다.게다가 검은 코트 차림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나는 그가 화가 났고 내가 달래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아니면 내가 그에게 사과해야 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나는 일부러 그의 비위를 맞추지 않았다.오히려 그를 놀리고 싶었다.나는 그의 옆에 가서 신발을 벗고 침대에 올라갔다. 방은 매우 따뜻했다. 바깥은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방안은 봄처럼 따스했다. 나는 조용히 패딩을 벗었다.안에는 스웨터를 입고 있었지만 나는 벗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석지훈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정말 잘생겼어?”석지훈은 아직도 그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잘생기지 않았어요? 왕자현 씨는 분위기가 끝내주잖아요. 정말 멋있어 보이던데!”석지훈: “...”침대 옆에 앉아 있던 남자의 얼굴은 매우 어두웠다. 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 내 발목을 잡고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는 내 입술에 키스했다.“잠시 밖에 나갔다 올게.”‘밖에 나갔다 온다고? 이건 너무하잖아!’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오빠.”그는 곁눈질로 나를 차갑게 쳐다보더니 흘끗 보고는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나: “...”그는 고의로 나를 벌주는 것이었다석지훈은 질투하는 것도 모자라서 복수까지 하는 것이었다.나는 침대에서 뒹굴며 그가 언제 방으로 돌아올지 생각했다.하지만 문 앞에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실망감이 점점 커져서 나는 옷을 챙겨 입고 석지훈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그가 왕자현의 거실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거실에는 값비싸 보이는 피아노가 한 대 놓여있었다.왕자현도 거기에 있었고 차를 끓이고 있었다.내가 들어가자 두 남자는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석지훈은 미간을 찌
“희연아, 남편 정말 잘 얻었네!”최희연은 농담처럼 물었다.“부럽지?”나는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하얀 도포를 입은 절세 미남이라, 정말 너무 완벽해. 모든 여자들의 이상형이잖아. 쯧, 진짜 부럽다!”“칭찬도 잘한다!”내가 왕자현을 이렇게 칭찬한 건 최희연이 그에게 관심을 좀 더 가졌으면 해서였다. 왕자현은 그녀가 기댈 만한 남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리고 왕자현은 이런 칭찬을 받을 만했다.내가 통나무집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왕자현은 연주를 멈추고 나를 보며 웃었다.“연수아 씨.”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저를 아세요?”“네. 희연이 절친이잖아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일어서더니 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내 옆을 보고 웃었다.“석 대표님도 와 계시는데.”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갔다.문 옆 복도에서 석지훈이 두 손을 등 뒤로 모으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위치는 마침 왕자현과 마주 보고 있었는데 마침 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나는 방금 전까지 그가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게다가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이 어두워 보였다.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지훈 씨, 왔어요.”그는 시선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내가 이제껏 본 적 없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가 나를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작게 “응.” 하고 대답했다. 왕자현과 최희연의 앞에서 내 체면을 세워준 것이다.왕자현이 말했다.“연수아 씨, 희연이가 그러는데 두 분 여기서 며칠 묵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방금 손님방을 하나 정리해 두었어요. 뒤편에 있으니 사람을 시켜 안내해 드리죠.”왕자현은 사람을 시켜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석지훈은 앞서 걸었고 나는 1미터쯤 뒤에서 따라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에게 거칠게 밀쳐져 문틀에 부딪혔다.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나는 당황하며 물었다.“왜 그래요?”석지훈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나는 그가 이런 모습인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내가 그에게
석지훈이 떠나고 30분쯤 지났을까, 내가 휴대폰을 내려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최희연이 온천 회관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내 몸에 남은 흔적을 보고는 일부러 놀리듯 물었다.“방금 온천 옆에서 남자 바지랑 셔츠를 봤는데 어떤 차가운 남자 옷 같더라! 쯧쯧, 내가 눈치 없이 온 거 아니야?”나는 일어나 최희연이 보는 앞에서 옷을 입으며 되받아쳤다.“너랑 왕자현 씨는...”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최희연은 황급히 말을 막았다.“아무 말도 하지 마. 나랑 자현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결혼하고 나서 지금까지 그런 쪽으로는 아무 말도 안 했고 포옹이나 손잡는 것도 한 번도 없었어. 그는 항상 부드럽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 그리고 내 얼굴은... 어쨌든 그는 석지훈과 달라!”나는 웃으며 물었다.“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다 네가 말한 거잖아. 근데 왜 갑자기 지훈 씨를 그 사람이랑 비교하는 건데? 솔직히 말해 봐. 만약 그가 너를 원한다면, 넌 그에게 응할 거야?”내 질문을 들은 최희연은 잠시 멍해졌다.“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그가 원한다면 거절하지는 않을 거야. 그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사람이고 나는 왕씨 가문의 하나뿐인 안주인이니까.”나는 그녀 앞에서 한 바퀴 돌며 일부러 물었다.“희연아, 너에게 그는 그저 이용 가치가 있는 관계일 뿐이야?”최희연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 그래. 이용이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그는 내 마음을 알면서도 기꺼이 받아들였어. 아마도 은혜를 갚기 위해서겠지!”나는 호기심에 다시 물었다.“무슨 은혜?”“내가 예전에 그를 구해준 적이 있어. 그가 운 좋게 나에게 구출된 게 아니라 내가 운 좋게 그를 구해준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그는 내 삶에 나타난 지 겨우 5년밖에 안 됐지만 난 왠지 모르게 그를 전적으로 믿어. 세상에서 날 배신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이야. 이런 믿음은 정말 이상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인연이라는 게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