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석지훈은 이불 커버를 침대에 내려놓더니 갑자기 내 손에서 컵을 가져갔다.그러고는 방을 나갔다.설마 물을 떠다 주려는 건가?나는 서둘러 젖은 이불 밑에서 진통제를 꺼내 가방에 숨겼다. 잠시 후, 그는 따뜻한 물 한 컵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나는 물컵을 받아들고 그의 옆에 서 있었고 남자는 능숙하게 이불 커버를 갈았다. 내가 자연스레 침대에 걸터앉자 그는 손을 뻗어 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한숨 자고 나서 한씨 가문에 가자. 운성은 내일 아침에 돌아가고.”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석지훈은 내 손에서 컵을 가져가고는 방을 나갔다. 나는 침대에 누워 배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피가 조금 배어 나왔을 뿐 큰 문제는 없었다.눕자 몸이 훨씬 편해졌다. 아래층에서 다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민영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석지훈, 시간 좀 있어?”석지훈은 차갑게 대답했다.“없어.”“정말 나와 인연을 끊겠다는 거야?”“가.”석지훈이 말했다.“석지훈, 내가 안 가면 개라도 풀어서 물게 할 거야?”이번에 석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래층은 잠시 조용해졌다. 일어나 발코니로 나가보니 한민영이 별장 입구에 서 있었다. 그녀는 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한민수가 보낸 개들이 제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한민영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석지훈, 난 잘못한 게 없어.”석지훈과 한민영 사이에는 10미터 남짓한 자갈길이 있었고 한민영 앞에는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는 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가 버티고 서 있었다.석지훈이 나지막이 말했다.“조용히 좀 해.”한민영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물었다.“왜?”석지훈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아가 자고 있어.”그 말에 한민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녀가 왜 여기 있어?”석지훈이 되물었다.“밖에 있는 사람들 다 그녀 사람인 거 안 보여?”한민영은 곧바로 대답했다.“안 보여.”이렇게 석지훈에
석나은도 석지훈을 자신의 개인 소유물로 생각했다.그의 주변엔 여자가 많았고 하나같이 그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하지만 그는 능숙하게 상황을 처리했고 누구에게도 헛된 희망을 주지 않았다.나는 석지훈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걱정스럽게 물었다.“한씨 가문은 오빠를 계속 사윗감으로 생각하는데 우리 관계를 알면 어르신께서 오빠한테서 등을 돌리지 않을까요?”석지훈은 태연하게 말했다.“아니. 설령 나한테 등을 돌린다 해도 상관없어. 난 애초에 남 눈치 보면서 살지 않으니까.”석지훈은 사람과 일에 대해 항상 초연한 태도를 보였다.“나 때문에 오빠가 곤란해지는 건 싫어요.”석지훈은 갑자기 달래듯 말했다.“착하지, 조금만 자자.”그는 대화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남자였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잠들지 못하고 그의 체취를 깊이 들이마시며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이렇게만 있어도 충분히 안심이 되었다.석지훈은 피곤했는지 나보다 먼저 잠들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눈썹뼈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그의 눈썹뼈는 정말 아름다웠다.단단하고 하얀 것이 내가 좋아하는 모습이었다.나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그의 눈썹뼈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느낌에 그가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리자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석지훈은 갑자기 손을 뻗어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안 자?”그의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했다.나는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애정 어린 입맞춤을 했다. 석지훈은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껌딱지.”그는 항상 나를 껌딱지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는 정말 매 순간 그에게 붙어 있고 싶었고 그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런 감정은 고현성에게서는 느껴본 적 없는 것으로 내 마음은 온통 그로 가득했다.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좀 더 자요.”석지훈이 눈을 감자 나는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 앉아 나는 휴대폰으로 현정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현정우는 의사를 데리고 별장으로 들어왔다. 치료가 끝나
현정우는 잘생긴 외모에 말이 없을 때는 차가워 보였다. 게다가 경호원이라는 직업은 큰 안정감을 주었다. 키도 190cm에 가까웠고 건장하면서도 군살 없는 몸매는 석지훈 못지않게 완벽해서 이런 남자라면 여자들이 줄을 서서 따라다닐 것이었다.하지만 지금 그는 스스로를 겨우 목숨이나 파는 경호원이라고 낮추며 말 한마디마다 자기비하가 가득했다.그 모습을 보니 내 기분까지 가라앉았다.그는 내 사람인데, 내 사람이 이렇게 스스로를 비참하게 여기는 건 내 탓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느 집 귀한 아가씨이기에 그가 이렇게까지 비참한 감정을 느끼는지 알고 싶었다.나는 다시 물었다.“이름이라도 알려 줄 수 있어요?”현정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아꼈다.“저에게는 너무 높은 분이라 그냥 마음속에 간직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나는 자조적인 그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약속했다.“좋아한다면 내가 중매를 서 줄 수도 있어요. 어쨌든 지금 저는 석씨 가문의 대표이니까. 내가...”현정우는 입술을 깨물더니 부드럽게 내 말을 가로막았다.“가주님, 그녀는 눈부신 별과 같은 사람입니다. 석 대표님 같은 남자가 어울리죠. 저는 그저 바닥의 진흙일 뿐이니 가주님이 나서준다 해도 그녀는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녀와 제 마음은 그저 가슴속에 묻어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요.”현정우가 그렇게 말하니 더 이상 묻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중요한 건 좋아하는 마음이에요. 나도 9년 동안 한 사람을 좋아했었어요... 뭔가를 바라서가 아니라 그 사람은 제게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으니까요.”“네. 저도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나는 약속했다.“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요.”“가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훨씬 뒤에야 나는 현정우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정말 그의 마음속 깊이 묻어둔 너무나 멀고 높은 별이었다.그리고 그 별 때문에 그는 깊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강가에서 잠시 시
[네. 위치 보낼게요.]담현아는 내 휴대폰으로 주소를 보냈다. 에르크 시내에 위치한 곳으로 오후에 석지훈과 함께 쇼핑몰에 갔던 곳 근처였다. 차로 가면 두세 시간은 걸릴 거리였다.솔직히, 요 며칠 나는 계속 이동 중이었다. 길 위에 있거나 길을 떠날 준비를 하거나. 난 이런 이동에 정말 진절머리가 났다.그래서 현정우에게 헬기를 준비시켰다.30분 후, 나는 현정우와 함께 시내에 도착했다. 담현아는 이미 와 있었지만 한민수는 아직이었다. 담현아가 단톡방에 문자를 보내 물어보자 그의 답장이 왔다.[가는 중이야. 차로 한 시간 더 걸릴 듯. 너희 먼저 놀고 있어. 도착하면 연락할게.][OK.]담현아가 답장을 보내자 원태웅이 문자를 보고 물었다.[너희 어디서 노는데?]담현아가 답했다.[저 수아 언니랑 콘서트 보러 왔어요.]담현아는 폰을 집어넣고 나를 콘서트장 안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입구에서 LED 토끼 귀 헤어밴드 두 개를 사서 각자 하나씩 썼다. 나는 신이 나서 말했다.“나는 정재 씨의 음악회밖에 못 가봤어. 이건 내 생애 첫 콘서트야.”고정재 이야기를 꺼내자 담현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나는 그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왜 그래?”“새해 이후로 연락이 없었어요.”고정재는 아마도 한민수가 새해 첫날 담현아를 핀란드에 데려간 일 때문에 여전히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고정재에게 담현아가 일 때문에 갔다고 설명했었다.나는 문득 고정재가 담현아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에게 설명하지 않고 혼자 속앓이를 하게 만든 것에 화가 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정재는 아마 지쳤을 것이다.이 관계에서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부었으니까.나는 담현아에게 물었다.“실망했어?”콘서트장은 현란한 조명과 사람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담현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나도 신경 쓰이나 봐요.”그 말은 고정재의 마음이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라는 뜻이었다.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둘 사이를 어떻게 할 생각이야? 현아야,
나는 최욱현이 담현아의 말처럼 무섭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새해 때도 그는 소년처럼 우리 집에 눌러앉아서 설을 쇨 정도였으니까. 그때는 딱히 과한 행동도 안 했고 나름 잘 지냈다.하지만 담현아의 걱정하는 모습에 그냥 따라 나가기로 했다. 콘서트장 출구에 다다랐을 때, 우리에게로 한 줄기 빛이 쏟아졌다. 동시에 최욱현의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두 분, 축하드립니다! 무대에 올라와서 저와 함께 게임을 하시겠어요?”스태프가 마이크를 건넸다. 담현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바로 가 봐야 해요. 죄송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할게요.”담현아는 나를 잡아끌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욱현은 그냥 철없는 애야. 그렇게 무서워할 것 없어.”담현아는 동의하며 말했다.“무섭진 않죠. 그냥 미친놈이니까!”담현아는 최욱현에 대해 좋은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궁금해서 웃으며 물었다.“혹시 욱현이한테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한 적이 있어?”그 말에 담현아는 침묵했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한겨울에 담현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난 최욱현이 사람을 죽이는 걸 봤어요. 그것도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수아 언니, 그 녀석은 순진한 척하는 게 특기예요. 그래서 업계 사람들은 다 그를 싫어하죠! 지금까지 프랑스 왕실의 비호가 없었다면 그는 진작에 제멋대로인 성격 때문에 목숨을 잃었을 거예요. 그러니 언니도 그 인간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담현아의 표정을 보니 정말 최욱현을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최욱현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는 말하지 않았다.굳이 설명하자면 같은 어머니를 뒀다는 것뿐이었다.나와 담현아가 헬기를 타려고 할 때, 최욱현이 뒤쫓아 왔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수아야, 어디 가?”담현아는 내 팔을 꽉 잡았다.나는 헬
“사모님, 암 말기입니다...”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의사에게 물었다.“뭐라고요?”의사는 진단서 위에 팔을 올려놓고 또박또박 말했다.“사모님, 2년 전 유산했을 때 자궁 소파술이 제대로 되지 않은 데다가 후에 감염까지 된 바람에 자궁에 암 덩어리가...”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의사의 말을 가로챘다.“그럼 얼마나 남았나요?”“암세포가 퍼져서 길어야 석 달 정도...”그 후로 의사가 더 뭐라 말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고 머리가 윙 했다. 머릿속에 3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는 말만 계속 반복해서 맴돌았다......그날 저녁, 고씨 가문 별장.조금 전 나와 뜨거운 잠자리를 가진 남자가 바로 나의 남편 고현성이다.결혼 3년 동안 그는 매번 별장으로 돌아와 나와 관계를 가진 후 욕실로 들어가서 씻었다. 마치 더러운 뭔가를 만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샤워를 마친 후에는 매정하게 나가버렸다.별장으로 들어와서부터 나갈 때까지 나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오늘도 그는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온 후 양복을 갈아입고 또다시 나가려고 했다.나는 침대에 앉아 고현성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그러자 고현성이 입술을 깨물면서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그의 무관심한 눈빛과 마주한 순간 나는 하고 싶었던 말들이 전부 목구멍에 막혀 결국 이 한마디만 했다.“조심해서 가요.”아래층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아래층의 검은색 마이바흐를 내려다보면서 고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고현성이 전화를 받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나와 고현성은 올해로 결혼한 지 3년 되었다. 고현성과 결혼할 때 그의 마음속에는 다른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그 여자의 목숨으로 고현성을 협박하면서 나와의 결혼을 강요했다.고현성은 반항도 해봤었지만 결국 사랑하는 여자를 포기하고 나와 결혼했다.3년 동안 나를 대하는 고현성의 태도는 늘 차가웠고 잔인하기만 했다. 심지어 나와 잠자리를 할 때도 그 여자의 이름 임지혜를 부르곤 했다
고현성이 살짝 멈칫했다.“또 무슨 수작이야?”창밖에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의 23살 생일까지 두 달도 남지 않았다. 그날은 섣달 그믐날인데 그때까지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매끈한 배를 어루만졌다.“내가 현성 씨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나에 대한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딱 3개월만 연애해요, 우리.”고현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꿈도 꾸지 마.”휴대전화 너머로 온기라곤 전혀 없는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방 안에 가득한 외로움이 날 덮치는 것 같았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심장이 저릿할 정도로 아팠다.나는 울고 있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현성 씨, 나랑 이혼하고 싶다면서요? 그럼 이렇게 해요. 나랑 3개월 연애하는 동안에 예뻐해 주고 챙겨줘요. 설령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날 사랑하는 척해요. 만약 3개월 버티면 이혼해 줄게요. 그리고 연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다 현성 씨한테 줄게요. 생각해봐요. 3개월만 버티면 나랑 이혼할 수 있고 수십조 원에 달하는 재산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 그리고 당당하게 임지혜 씨와 결혼할 수도 있고요. 현성 씨한테는 전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에요.”고현성이 덤덤하게 물었다.“너랑 같이 3개월 동안 연기하라고?”3개월 동안 관중은 나 하나뿐이었다. 결국에는 나 자신을 기만하는 거나 다름없었다.나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말했다.“네. 나랑 연애해요.”“허. 역겨운 소리 좀 그만할래?”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고현성은 내가 보는 앞에서 검은색 마이바흐를 몰고 별장을 나가버렸다....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머리가 윙 했고 목이 너무 말라 침을 삼킬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너무 많이 운 모양이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의사의 말대로 약을 먹은 다음 준비한 후 회사로 출근했다.고현성의 아내인 것 외에 나는 선양 그룹의 대표였다. 한창 회사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데 고씨 가문 진화 그룹의 회장 고승철에게서 전화
고현성이 화를 내면서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내가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나가려던 그때 가장 만나기 싫었던 그 사람을 만났다. 바로 고현성이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는 여자 임지혜.나는 임지혜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고 그냥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임지혜가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고씨 가문 사모님 맞죠?”순간 멈칫한 나는 그녀를 흘겨보았다.“왜 그러시죠?”“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좋아요?”임지혜의 도발에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옅은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지만 립스틱은 진한 레드색을 발랐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에도 얇은 롱원피스에 하얀색 코트로 가녀린 몸을 가리고 있었다.‘예쁘긴 하네. 이러니까 현성 씨가 그렇게 좋아하지.’연적끼리 만나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나는 임지혜를 무시하고 그냥 가려 했지만 그녀가 나를 비웃었다.“내 자리를 빼앗아 갔는데 편할 리가 없겠죠. 현성이가 수아 씨를 사랑해요? 귓가에 대고 달콤한 얘기를 해주던가요? 밥도 해준 적 없죠? 특별한 날에 선물 사주던가요? 한 번도 그런 적 없죠? 현성이는 절대 수아 씨한테 해주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그저 선양 그룹 대표라는 이유로 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에요.”임지혜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녀가 한 말들은 전부 고현성이 그녀에게 해줬던 것들이었다.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질투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모님 자리도 지키지 못하게 생겼는데...나는 덤덤하게 웃으며 맞받아쳤다.“그럼 지혜 씨는요? 3년 전에 난 지혜 씨한테 기회를 줬었어요. 지금 인정하든 안 하든 현성 씨 와이프는 나예요. 그리고 지혜 씨 말이 맞아요. 난 선양 그룹 대표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현성 씨한테 결혼을 강요했어요. 근데 당신은...”절대 남에게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내가 아니었다. 상대가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만 건드린다면 그대로 갚아주는 성격이었다.그런데 고현성은 이런 나를 3년이나 모욕했다
나는 최욱현이 담현아의 말처럼 무섭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새해 때도 그는 소년처럼 우리 집에 눌러앉아서 설을 쇨 정도였으니까. 그때는 딱히 과한 행동도 안 했고 나름 잘 지냈다.하지만 담현아의 걱정하는 모습에 그냥 따라 나가기로 했다. 콘서트장 출구에 다다랐을 때, 우리에게로 한 줄기 빛이 쏟아졌다. 동시에 최욱현의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두 분, 축하드립니다! 무대에 올라와서 저와 함께 게임을 하시겠어요?”스태프가 마이크를 건넸다. 담현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바로 가 봐야 해요. 죄송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할게요.”담현아는 나를 잡아끌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욱현은 그냥 철없는 애야. 그렇게 무서워할 것 없어.”담현아는 동의하며 말했다.“무섭진 않죠. 그냥 미친놈이니까!”담현아는 최욱현에 대해 좋은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궁금해서 웃으며 물었다.“혹시 욱현이한테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한 적이 있어?”그 말에 담현아는 침묵했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한겨울에 담현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난 최욱현이 사람을 죽이는 걸 봤어요. 그것도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수아 언니, 그 녀석은 순진한 척하는 게 특기예요. 그래서 업계 사람들은 다 그를 싫어하죠! 지금까지 프랑스 왕실의 비호가 없었다면 그는 진작에 제멋대로인 성격 때문에 목숨을 잃었을 거예요. 그러니 언니도 그 인간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담현아의 표정을 보니 정말 최욱현을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최욱현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는 말하지 않았다.굳이 설명하자면 같은 어머니를 뒀다는 것뿐이었다.나와 담현아가 헬기를 타려고 할 때, 최욱현이 뒤쫓아 왔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수아야, 어디 가?”담현아는 내 팔을 꽉 잡았다.나는 헬
[네. 위치 보낼게요.]담현아는 내 휴대폰으로 주소를 보냈다. 에르크 시내에 위치한 곳으로 오후에 석지훈과 함께 쇼핑몰에 갔던 곳 근처였다. 차로 가면 두세 시간은 걸릴 거리였다.솔직히, 요 며칠 나는 계속 이동 중이었다. 길 위에 있거나 길을 떠날 준비를 하거나. 난 이런 이동에 정말 진절머리가 났다.그래서 현정우에게 헬기를 준비시켰다.30분 후, 나는 현정우와 함께 시내에 도착했다. 담현아는 이미 와 있었지만 한민수는 아직이었다. 담현아가 단톡방에 문자를 보내 물어보자 그의 답장이 왔다.[가는 중이야. 차로 한 시간 더 걸릴 듯. 너희 먼저 놀고 있어. 도착하면 연락할게.][OK.]담현아가 답장을 보내자 원태웅이 문자를 보고 물었다.[너희 어디서 노는데?]담현아가 답했다.[저 수아 언니랑 콘서트 보러 왔어요.]담현아는 폰을 집어넣고 나를 콘서트장 안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입구에서 LED 토끼 귀 헤어밴드 두 개를 사서 각자 하나씩 썼다. 나는 신이 나서 말했다.“나는 정재 씨의 음악회밖에 못 가봤어. 이건 내 생애 첫 콘서트야.”고정재 이야기를 꺼내자 담현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나는 그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왜 그래?”“새해 이후로 연락이 없었어요.”고정재는 아마도 한민수가 새해 첫날 담현아를 핀란드에 데려간 일 때문에 여전히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고정재에게 담현아가 일 때문에 갔다고 설명했었다.나는 문득 고정재가 담현아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에게 설명하지 않고 혼자 속앓이를 하게 만든 것에 화가 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정재는 아마 지쳤을 것이다.이 관계에서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부었으니까.나는 담현아에게 물었다.“실망했어?”콘서트장은 현란한 조명과 사람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담현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나도 신경 쓰이나 봐요.”그 말은 고정재의 마음이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라는 뜻이었다.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둘 사이를 어떻게 할 생각이야? 현아야,
현정우는 잘생긴 외모에 말이 없을 때는 차가워 보였다. 게다가 경호원이라는 직업은 큰 안정감을 주었다. 키도 190cm에 가까웠고 건장하면서도 군살 없는 몸매는 석지훈 못지않게 완벽해서 이런 남자라면 여자들이 줄을 서서 따라다닐 것이었다.하지만 지금 그는 스스로를 겨우 목숨이나 파는 경호원이라고 낮추며 말 한마디마다 자기비하가 가득했다.그 모습을 보니 내 기분까지 가라앉았다.그는 내 사람인데, 내 사람이 이렇게 스스로를 비참하게 여기는 건 내 탓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느 집 귀한 아가씨이기에 그가 이렇게까지 비참한 감정을 느끼는지 알고 싶었다.나는 다시 물었다.“이름이라도 알려 줄 수 있어요?”현정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아꼈다.“저에게는 너무 높은 분이라 그냥 마음속에 간직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나는 자조적인 그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약속했다.“좋아한다면 내가 중매를 서 줄 수도 있어요. 어쨌든 지금 저는 석씨 가문의 대표이니까. 내가...”현정우는 입술을 깨물더니 부드럽게 내 말을 가로막았다.“가주님, 그녀는 눈부신 별과 같은 사람입니다. 석 대표님 같은 남자가 어울리죠. 저는 그저 바닥의 진흙일 뿐이니 가주님이 나서준다 해도 그녀는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녀와 제 마음은 그저 가슴속에 묻어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요.”현정우가 그렇게 말하니 더 이상 묻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중요한 건 좋아하는 마음이에요. 나도 9년 동안 한 사람을 좋아했었어요... 뭔가를 바라서가 아니라 그 사람은 제게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으니까요.”“네. 저도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나는 약속했다.“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요.”“가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훨씬 뒤에야 나는 현정우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정말 그의 마음속 깊이 묻어둔 너무나 멀고 높은 별이었다.그리고 그 별 때문에 그는 깊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강가에서 잠시 시
석나은도 석지훈을 자신의 개인 소유물로 생각했다.그의 주변엔 여자가 많았고 하나같이 그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하지만 그는 능숙하게 상황을 처리했고 누구에게도 헛된 희망을 주지 않았다.나는 석지훈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걱정스럽게 물었다.“한씨 가문은 오빠를 계속 사윗감으로 생각하는데 우리 관계를 알면 어르신께서 오빠한테서 등을 돌리지 않을까요?”석지훈은 태연하게 말했다.“아니. 설령 나한테 등을 돌린다 해도 상관없어. 난 애초에 남 눈치 보면서 살지 않으니까.”석지훈은 사람과 일에 대해 항상 초연한 태도를 보였다.“나 때문에 오빠가 곤란해지는 건 싫어요.”석지훈은 갑자기 달래듯 말했다.“착하지, 조금만 자자.”그는 대화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남자였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잠들지 못하고 그의 체취를 깊이 들이마시며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이렇게만 있어도 충분히 안심이 되었다.석지훈은 피곤했는지 나보다 먼저 잠들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눈썹뼈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그의 눈썹뼈는 정말 아름다웠다.단단하고 하얀 것이 내가 좋아하는 모습이었다.나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그의 눈썹뼈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느낌에 그가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리자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석지훈은 갑자기 손을 뻗어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안 자?”그의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했다.나는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애정 어린 입맞춤을 했다. 석지훈은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껌딱지.”그는 항상 나를 껌딱지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는 정말 매 순간 그에게 붙어 있고 싶었고 그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런 감정은 고현성에게서는 느껴본 적 없는 것으로 내 마음은 온통 그로 가득했다.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좀 더 자요.”석지훈이 눈을 감자 나는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 앉아 나는 휴대폰으로 현정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현정우는 의사를 데리고 별장으로 들어왔다. 치료가 끝나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석지훈은 이불 커버를 침대에 내려놓더니 갑자기 내 손에서 컵을 가져갔다.그러고는 방을 나갔다.설마 물을 떠다 주려는 건가?나는 서둘러 젖은 이불 밑에서 진통제를 꺼내 가방에 숨겼다. 잠시 후, 그는 따뜻한 물 한 컵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나는 물컵을 받아들고 그의 옆에 서 있었고 남자는 능숙하게 이불 커버를 갈았다. 내가 자연스레 침대에 걸터앉자 그는 손을 뻗어 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한숨 자고 나서 한씨 가문에 가자. 운성은 내일 아침에 돌아가고.”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석지훈은 내 손에서 컵을 가져가고는 방을 나갔다. 나는 침대에 누워 배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피가 조금 배어 나왔을 뿐 큰 문제는 없었다.눕자 몸이 훨씬 편해졌다. 아래층에서 다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민영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석지훈, 시간 좀 있어?”석지훈은 차갑게 대답했다.“없어.”“정말 나와 인연을 끊겠다는 거야?”“가.”석지훈이 말했다.“석지훈, 내가 안 가면 개라도 풀어서 물게 할 거야?”이번에 석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래층은 잠시 조용해졌다. 일어나 발코니로 나가보니 한민영이 별장 입구에 서 있었다. 그녀는 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한민수가 보낸 개들이 제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한민영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석지훈, 난 잘못한 게 없어.”석지훈과 한민영 사이에는 10미터 남짓한 자갈길이 있었고 한민영 앞에는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는 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가 버티고 서 있었다.석지훈이 나지막이 말했다.“조용히 좀 해.”한민영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물었다.“왜?”석지훈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아가 자고 있어.”그 말에 한민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녀가 왜 여기 있어?”석지훈이 되물었다.“밖에 있는 사람들 다 그녀 사람인 거 안 보여?”한민영은 곧바로 대답했다.“안 보여.”이렇게 석지훈에
나는 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왜요?”그러자 그가 말했다.“한 모금 더 마셔 봐.”시키는 대로 살짝 마시자 그제야 버터처럼 부드러운 크림 향이 샴페인의 톡 쏘는 맛과 어우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제 입맛에 딱이네요.”나는 웃으며 말했다.석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조금만 마셔.”수술한 지 열흘도 채 되지 않아 사실 술은 금물이었다. 그래서 나는 겨우 두 모금만 맛보고 조심스럽게 잔을 그에게 건넸다.“왜? 입에 안 맞아?”그의 눈빛에 의아함이 스쳤다.예전의 석지훈이라면 내가 좋아하는지 묻지도 않았을 텐데, 뭔가 떠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나를 건드리지 않는 건 뭔가 꺼리는 게 있는 걸까? 설마 내가 수술받은 걸 아는 건 아니겠지? 분명 비밀로 하라고 지시했는데.’마음속에 의문이 가득 차 이따 현정우한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에요. 그냥 마시고 싶지 않아서요.”어설픈 변명이었지만 내가 싫다고 하니 석지훈도 더 이상 술을 권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 후, 그는 나를 쇼핑몰로 데려갔다.석지훈은 와인 두 병을 고르더니 망설임 없이 계산대로 향했다.“더 안 사도 돼요?”내가 묻자 남자는 간단히 대답했다.“됐어.”그리고는 나한테 물어봤다.“갖고 싶은 거 있어?”“없어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옷이나 화장품, 액세서리는 부족한 적이 없었으니 딱히 갖고 싶은 것도 없었고 이제는 그런 것들에 별로 감흥이 없었다.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건 뭐든 살 수 있었으니까.내 말에 석지훈은 나의 가는 허리를 감싸 안고 쇼핑몰을 나섰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배에 있는 수술 자국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나는 통증을 참으며 간신히 차에 올라탔다. 창백해진 내 얼굴을 본 석지훈은 손을 뻗어 이마를 짚었다.“어디 아파?”“좀 피곤하네요.”내가 대답했다.지금 당장 진통제가 먹고 싶었다.석지훈은 한 씨 저택으로 가지 않고 차를 몰고 곧장 별장으로 데려왔다. 난 궁금해서 물었다.“어르신을 뵈러 가
나는 석지훈과 한씨 가문의 어르신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그는 나에게 위층으로 올라가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대로 방으로 돌아가 옷장을 열었다. 옷장 안에는 여자 옷이 많이 있었다. 나는 먼저 따뜻한 내복을 입고 그 위에 흰색 스웨터를 입었다. 마지막으로 코트를 걸치고 따뜻한 목도리를 했다.나는 추위를 많이 탔다. 최근에 생긴 일이었다.아마도 몸이 예전보다 약해져서 그런 것 같았다.나는 연한 립스틱을 바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석지훈은 현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신발을 신으며 물었다.“선물 사 갈까요?”석지훈은 대답했다.우리가 별장을 나서며 보니 현정우는 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나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담배를 끄고 달려와 공손한 말투로 불렀다.“가주님, 석 대표님, 나가십니까?”석지훈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차 키 주세요.”현정우는 순순히 차 키를 건넸다.석지훈은 현정우가 가리키는 차를 찾아갔다. 내가 조수석에 앉고 나서야 그는 운전석에 앉았다.현정우와 경호원들은 동행하지 않은 채 나와 석지훈은 단둘이 별장을 떠났다. 그는 나를 에르크 중심가로 데려갔다. 에르크에는 큰 눈이 내리고 있어 길이 미끄러웠다. 석지훈은 안전하게 운전했지만 속도는 느렸다. 시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2~3시였다.선물부터 사러 갈 줄 알았는데 그는 나를 근처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건네주자 난 대충 훑어보고 느끼하지 않은 음식 몇 개와 케이크 두 조각, 요구르트 과일 플래터를 주문했다.그리고 석지훈에게 물었다.“오빠는 뭐 먹고 싶어요?”“스테이크 주세요. 미디엄 레어로.”잠시 멈추더니 종업원에게 말했다.“그리고 딸기 주스 한 잔 주세요. 따뜻하게 데워서 설탕을 좀 넣어 주시고요. 샴페인도 한 병 주세요.”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지고 가자 나는 맞은편에 앉은 석지훈에게 물었다. “오빠, 딸기 주스는 저 마시라고 시킨 거예요?”석지훈은 나를 보며 대답했다.“
“좋아해요.”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럼 네가 이름을 지어줘.”그가 말했다.“정말요? 얘들 데리고 있을 거예요?”내가 기뻐하며 묻자 그가 대답했다.“좋아한다면서?”“난 이름 잘 못 짓는데.”내 말에 석지훈은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으니까.나는 그의 차가운 손을 잡고 궁금한 듯 물었다.“오빠, 사별의 이름을 왜 윤아라고 지었어요?”석지훈이 가볍게 말했다.“네가 처음에 그 이름으로 날 속였잖아. 그 이름은 나에게 의미가 있어. 넌 윤아고 사별이는 작은 윤아고, 둘 다 내 아가야.”진지한 표정으로 이런 달콤한 말을 하다니, 그는 정말 심쿵하게 만드는 남자였다.나는 그를 넋을 잃고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윤민이는요?”그는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냥 아무렇게나 지은 거야.”나: “...”‘앞으로는 윤민이를 더 예뻐해 줘야겠다.’나는 웃으며 발꿈치를 들고 석지훈의 뺨에 입을 맞췄다. 순간 그의 눈빛이 깊어지더니 낮게 잠긴 목소리로 경고했다.“적당히 해.”나는 그때 석지훈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가 오랫동안 금욕했다는 사실을 잊은채 더욱 들이대며 말했다.“오빠는 내 남자인데 뽀뽀하는 게 뭐 어때서요? 난 오빠가 좋은걸.”...침대에서 뒤척이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아래층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발코니로 나가 보니 인부들이 개집을 짓고 있었다. 옆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작은 놀이터도 만들고 있었다.한민수는 정말 공을 많이 들였다. 별장 마당에서 뚝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석지훈은 무릎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무언가를 처리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집 밖으로 나갔다.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는 나를 보고 반갑게 꼬리를 흔들었다. 나는 그들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물었다.“배고파?”그리고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때 인부가 말했다.“배고픈 것 같지는 않은데
내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석지훈은 나를 꽉 껴안더니 손바닥으로 내 허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나는 그가 뭔가를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자, 내가 옆에 있잖아.”나는 멍하니 대답했다. “네.”오랜만에 느끼는 그의 품이었다. 나는 그의 향기에 취해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뜨니 이미 정오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일어나 보니 밖에는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었다.아래층에 내려가 봤지만 석지훈은 없었다. 다시 위층 서재로 갔지만 그곳에도 없었다. 어디로 간 거지?나는 서재에서 그가 어제 쓴 글씨를 보았다. 마지막에 ‘자경’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설마 이게 그의 호인가?석씨 가문은 명문가였으니 석지훈에게도 당연히 호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몰랐다.자경, 왜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걸까?내가 손가락으로 그 글자를 가볍게 만지고 있을 때, 아래층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급히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한민수가 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를 힘겹게 끌고 오고 있었고 석지훈은 처마 밑에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민수와 그의 개들이 반갑지 않은 모양이었다.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는 아주 건장했고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한민수는 힘겹게 개들을 끌며 웃으면서 말했다.“왜 인상 쓰고 있어? 너희 집 지키라고 경비견을 데려온 거야. 이상한 사람들이 자꾸 집에 들락거리지 않게 말이야.”이상한 사람들...한민수는 누구를 말하는 걸까?석지훈은 거절했다.“너나 데리고 있어.”“안돼. 멀리서부터 데려왔단 말이야.”한민수는 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를 마당의 나무에 묶고 뻔뻔하게 말했다.“여기 묶어둘게. 이따가 사람이 와서 개집을 설치할 거야. 걱정 마, 네가 먹이를 줄 필요 없어. 내가 사람을 시켜서 매일 정기적으로 밥 주고 정기적으로 애견 삽에 데려가서 목욕도 시키도록 할 테니까.”석지훈: “...”그는 한민수에게 대꾸도 않고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