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우리 모두 서로를 이해하자고!”도겸의 안색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적어도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원장의 말을 귀담아들은 게 분명했다.경혜는 한숨을 돌렸지만, 주위의 손가락질하는 사람과 수군거리는 소리에 그녀는 약간 뻘쭘했다.자신의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를 위해 대중 앞에서 발광을 한 데다가, 그 여자는 심지어 자신과 같은 학년, 같은 전공이지만 다른 교수님을 선택한 학생이었다. 이것 만으로도 사람들은 헛된 소문을 퍼뜨리기에 충분했다.세상에는 구경꾼이 가장 많았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사람들은 구경거리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지예는 이 사람들이 정은을 위해 다투고 싸우는 것을 보며 즉시 냉소를 지었다.“정말 정신이 나갔어!”‘난 또 무슨 큰일인가 했더니... 이게 다야? 소정은은 아직 잘 살아 있잖아? 이미 찾은 이상,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동원시킨 거야?’“그러게.”진호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자신이 길을 잃어놓고선 이렇게 민폐를 끼치다니. 한밤중에 사람들 자지도 못하게 이게 뭐야? 소정은은 자신이 무슨 여왕이라도 된 줄 아나 보지? 모두들 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하냐고?”민지가 말했다.“너 그게 무슨 뜻이야? 그래도 같은 학교인데, 우릴 도와주지 않으면 그만이지, 사람들 앞에서 꼭 이렇게 이간질을 해야겠어?”서준도 입을 열었다.“도와주고 싶지 않으면 그냥 가. 우리도 너희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으니까. 신진호, 그렇게 원망을 하고 싶다면, 일찍 돌아가서 씻고 자. 우리도 꼭 네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남의 발목을 붙잡지 말았으면 좋겠어!”“그래! 나도 원래 갈 생각이었어! 한겨울에 누가 여기에 있고 싶은 줄 알아?!”말을 마치자, 진호는 몸을 돌려 가버렸다.지예도 눈을 부라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아, 졸려, 돌아가서 자야지.”다른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졌다.어차피 하늘이 무너지면 원장이 있는 데다가 구경할 만한 것도 없어서 남아도 재미없었다.잠시 후, 현장에는
두 남자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은 기둥에 기대고 있었고 두 볼은 새빨갰으며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지금 두 손으로 자신을 꼭 껴안고 있었다.“정은아? 정은아?! 정신 좀 차려 봐, 응?” 재석은 정은을 깨우려고 했다.그러나 여자는 두 눈을 꼭 감으며 속눈썹까지 파르르 떨고 있었다. 깨어나고 싶어도 깨어나지 못한 듯 매우 불편해 보였다.재석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고, 얼른 정은의 이마를 만져보았다.“더 이상은 안 되겠어요! 정은이의 체온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으니 이러다가 문이 열리기도 전에 기절할지도 몰라요.”현빈도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긴 아무것도 없으니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요?”해열제도 없고, 히터도 없고, 심지어 바람을 피할 변변한 곳도 없었다.재석은 현빈을 힐끗 본 다음 한 손을 내밀더니 허리를 쭉 펴고 섰다.“지금 뭐 하려고요?”재석은 급하게 대답하지 않고 잠시 후에야 손을 거두며 해석했다.“지금 서북풍이 불고 있어요. 정은을 맞은편 그 기둥으로 옮겨요. 비록 바람을 막을 순 없지만 적어도 바람을 등지고 있으니 그리 춥지 않을 거예요.”“좋아요.” 현빈은 바로 재석의 말대로 했다.그리고 저도 모르게 재석을 바라보았다.“그 다음엔요? 나한테 라이터가 있으니 마른 나뭇가지라도 찾으면 불을 피울 수 있을 텐데.”“안돼요.”재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북쪽과 남쪽을 봐요. 모두 스모그 경보기를 설치했으니 섣불리 불을 피우다 경보가 울리면 전 구역에 ‘비’가 내릴 거예요.”‘경보’라는 두 글자를 듣자, 현빈은 골치가 아팠다.“그럼 어떡하라고요?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재석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심 대표님, 지금 내 지시대로 움직이겠어요?”“허.” 현빈은 입가를 실룩거렸다.“지금 그런 거 따질 때에요? 비록 난 교수님이 싫지만, 그래도 사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어요.”재석은 현빈을 잠시 바라보았다.“내 가방에 해열제가 있으니 가서 꺼내요. 그리고
사방에서 바람이 들어올 수 있는 정자에서, 재석과 현빈은 바닥에 앉아 있었고, 정은은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조용히 자고 있었다.현빈은 머리를 살짝 떨구며 눈을 붙이고 있었다. 도겸의 각도에서 보면 마치 정은의 어깨에 기댄 것 같았다.재석도 마찬가지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다만 나름 몸에 힘을 주고 있어 현빈처럼 정은에게 기대지 않았다. 한손으로 머리를 지탱하고 있었지만 어깨는 여전히 정은과 바싹 달라붙었다.딴마음을 품어서가 아니라 정은이 편하게 자게 하기 위해서였다.그래서 잠이 들었어도 어깨에 힘을 주며 이 동작을 유지했다.한밤중에 일어난 현빈은 그런 재석이 안쓰러워 자리를 바꾸자고 했다.“아니에요, 정은이는 가벼우니까요.”‘이 자식도 은근히 뒤끝이 있어!’세 사람은 분명히 옷을 입고 있었고, 지나친 스킨십도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애틋한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정은은 열이 내렸지만 얼굴은 여전히 빨갰다. 그리고 아주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질투에 눈이 먼 남자는 지금 이성을 완전히 잃었다.도겸은 머리가 새하얘지더니 마치 무언가에 맞은 듯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뒤따라 쫓아온 직원과 일찍 일어나 구경하러 나온 학생들도 이 상황을 보고 저도 모르게 멍해졌다.‘이, 이게 무슨 아수라장이야?’‘두 남자... 아니지, 이 강 대표님의 반응을 보면 세 남자가 동시에 한 여자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은데?’민지는 문을 연 순간 바로 달려왔다. 비록 도겸과 같은 시간에 달리기 시작했지만, 체형이 육중하여 빠르게 달릴 수 없었다.심지어 서준까지 그녀를 따라잡더니 앞으로 돌진했다.이때 민지는 구경하는 군중들 사이에서 힘들게 빠져나왔다. 다음 순간, 그녀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뭐야? 하지만 이 세 사람은 다 예쁘고 잘생겼으니 같이 자도 나쁠 건 없잖아?’자신이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민지는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밤새도록 걱정을 한 그녀는 번개와 같은 속도로 정은을 향해 달려갔다.그러나 한 사람이
민지와 서준도 와서 도와주었다.곧 구급차가 도착했다.간호사와 의사는 환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간단하게 검사를 한 후에야 재석, 현빈과 함께 정은을 들것에 옮겼다.간호사가 물었다.“환자 가족분 여기에 계세요? 빨리 타세요!”“제가 갈게요!”“저요!”“저예요!”세 남자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간호사는 눈살을 찌푸렸다.“두 분이면 충분해요. 나머지는 혼자 병원으로 가시면 되고요.”그녀는 재석과 현빈을 가리켰다. 방금 이 두 남자가 가장 먼저 달려왔고, 초조함과 초췌함도 연기 같지가 않았다.‘남은 그 남자는...’차 문이 닫힌 순간, 간호사는 도겸을 힐끗 쳐다보았다. 온몸에서 심한 술냄새가 풍겼을 뿐만 아니라, 눈빛은 마치 수시로 사람을 죽일 것만 같았다.‘그냥 혼자 오라고 해.’구급차에 올라가지 못하자, 도겸은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그러나 도겸은 곧 자신의 스포츠카에 올라타더니 시동을 걸고 뒤쫓아 갔다.처음부터 끝까지 경혜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경혜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차가운 바람은 칼처럼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주위에서 구경을 하던 군중들은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이게 무슨 막장 드라마야?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를 위해 떠났다니?”“이제 버려진 여자가 눈에 점을 찍고 다시 돌아오는 거 아니야?”“드라마 좀 적게 봐.”“그 남자 상장회사의 대표님이야. 심경혜의 집안사정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겠어?”“남자친구가 부자인데, 다른 여자랑 도망가는 게 뭐가 어때서? 밖에서 다른 여자와 아이를 낳아도 난 산후조리까지 다 해줄 거야!”“심경혜 지금 입고 있는 옷과 들고 있는 가방 좀 봐. 강 대표님은 손도 참 크셔. 누가 이런 남자와 헤어지려 하겠어?”지예는 팔짱을 끼고 고소해하며 경혜를 흘겨보았다.“야, 네 남자친구 이미 도망갔는데, 안 쫓아가고 뭐 하니?”경혜는 정신을 차리더니 담담하게 웃었다.“정은이가 기절을 했으니 가보는 것도 당연하지. 게다가 난 도겸 씨를 믿어.
세정은 자신의 친오빠가 정은을 쫓아간 것을 보며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난 친동생이잖아! 날 집으로 데려다줄 수도 있는데... 또 그 소정은을 위해서 날 무시하다니. 그 여자와 난 정말 잘 안 맞아!’...병원 구급실에서.의사는 정은의 기본 상황을 물어본 후, 즉시 전신 검사를 안배했다.현빈이 말할 때 재석은 옆에서 보충했다. 열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몇 시에 열이 내렸는지, 몇 시에 땀이 났는지 등 디테일을 전부 상세하게 설명했다.의사조차도 그런 재석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검사가 끝나자, 정은은 병실로 밀려났고 그사이 한번 깨어났다.재석은 즉시 앞으로 다가갔다.“정은아, 내 말 들려?”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괜찮아, 지금 병원에 있으니까 졸리면 안심하고 자.”말이 끝나자 정은은 다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현빈은 한발 늦어서 정은과 말을 하지 못했다.“왜 나한테 정은이 깨어났다고 말하지 않은 거예요?” 그는 재석을 바라보았다.“그럴 책임이 없으니까요.”게다가 재석은 정은과 이야기하느라 바빴으니 또 어찌 현빈이 생각나겠는가?현빈은 말문이 막혔다.재석은 곧장 주치의를 향해 걸어갔다.“의사 선생님, 정은이의 상태는 좀 어떤가요?”“방금 이미 환자분에게 전면적인 검사를 했는데, 일부 검사 보고서는 좀 늦게 나올 거예요. 그러나 현재로 볼 때, 환자분은 열이 이미 내려갔어요.”“비록 발목이 심하게 삐었지만 다행히 뼈를 다치지 않았으니 약을 먹고 휴양하기만 하면 돼요. 적게 걷고 평소에 침대에 누워 있으면 빨리 나아질 거예요. 다른 주의할 만한 점은 아직 없어요.”“감사합니다.”“두 분 중 한 분이 간호사를 따라 병원비부터...”“제가 갈게요!”재석과 현빈이 입을 열기도 전에 도겸은 성큼성큼 걸어와 의료비 지급명세서를 받았다.현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여자친구를 달래지 않고 왜 여기에 온 건데?”도겸은 냉소를 지었다.“왜? 난 여기에 올 수 없어?”“정은이는 널 보고 싶지 않을 텐데
핸드폰 비밀번호와 은행카드 비밀번호.재석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고, 하는 말은 그의 뒷모습처럼 사람을 화나게 했다.“정은이가 알려준 거예요.”현빈과 도겸은 묵묵히 이를 갈았다....정은이 깨어났을 때, 이미 아침이 되었다.햇빛도 없고 비도 오지 않았으며 찬바람이 벌거벗은 나뭇가지를 무정하게 때리고 있었다.그녀는 일어나서 앉았다. 병원에 속하는 소독수 냄새가 자극적이고 고약해서 정은은 코를 비볐다.그리고 정은은 자신의 다친 발목을 바라보았다. 이미 꽁꽁 싸맨 발목은 그 상태를 확인할 수 없었다. 가볍게 움직이자, 다행히도 조금 아프지만 전처럼 심하진 않았다.보온병을 들고 들어온 수민은 정은이 일어난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너 왜 일어났니?! 빨리 누워 있어!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단 말이야.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침대에 누워야 한다고! 내가 회사에서 우리 오빠 전화 받았을 때 정말 깜짝 놀랐어. 별일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수민은 요즘 아주 바빴다. 두 사람은 이미 한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하나는 일하느라 바쁘고 다른 하나는 학술 연구에 바빴으니 한담할 시간도 거의 없었다.그러나 자신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사람이 바로 절친인 게 아니라, 자신이 필요할 때 가장 먼저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절친이었다.예를 들면 지금.“수민아, 나 얼마나 잤어?”“꼬박 하루, 지금은 아침이야.”정은은 입술을 움직이며 말을 하려다 멈추었다.수민은 그녀가 무엇을 묻고 싶은지 알고 있었다.“내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네 병상 옆에 남자 세 명이나 지키고 있는 거 봤거든. 우리 오빠는 그래도 괜찮지만, 심현빈과 강도겸은 틈만 나면 기싸움을 해서 정말 눈에 거슬렸어, 그래서 모두 쫓아냈지 뭐야!”“아, 맞다. 그리고 네 동창이라는 애들 두 명 왔었어. 하나는 민지, 다른 하나는 서준이라고. 두 사람도 아주 오래 기다렸는데, 너무 피곤한 것 같아서 먼저 돌아가서 쉬라고 했어.”“내 핸드폰은? 우리 엄마 아빠한테 전화 온 적 없어? 내가 받지 않
“너, 너희 둘 지금 뭐 하는 거야?”동건은 대야를 든 채로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치 바보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수민과 정은은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왜 이제야 왔어? 대야를 하나 사는데 한 시간이나 걸리다니.”수민은 동건에게서 대야를 빼앗아왔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정은을 볼 때, 다시 환한 미소를 지었다.“뜨거운 물 받아왔으니까 이따가 닦아줄게. 그럼 많이 편해질 거야.”“고마워, 수민아! 사랑해!”“그럼 다음엔 피하지 말고 나랑 뽀뽀하자, 응?”“안 돼, 나 하루 종일 누워 있었잖아. 얼굴도 안 씻고 머리도 안 빗었으니 어떻게 여신님의 뽀뽀를 받아들일 수 있겠어?”“괜찮아, 난 상관없거든.”대야를 빼앗기고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동건은 어이가 없었다.“어? 이 로고...”수민은 대야를 바라보더니 깜짝 놀랐다.“너 설마... 에르메스 매장에 가서 산 거야?”“맞아!” 동건은 턱을 살짝 들더니 콧방귀를 뀌었다.“어때? 내 안목 괜찮지?”수민은 말문이 막혔다.“너 그게 무슨 표정이야?”“너 정말 머리가 없는 사람이구나? 병원 밖의 편의점에서 몇천 원이면 대야 하나를 살 수 있는데, 넌 에르메스에 가서 이걸 사다니?”“그게 뭐가 어때서?”“바가지를 쓴 거와 다름이 없잖아? 돈 많아서 아주 좋겠어.”동건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했다.“됐어, 그냥 쓸 수밖에 없겠군.” 수민은 싫어하는 감정을 드러냈다.‘예쁘기만 하고 실속이 없는 것... 천 원짜리 플라스틱 대야보다 못하잖아, 쯧쯧...’“야, 조수민, 네가 사오라고 했잖아! 사왔는데도 계속 트집을 잡을 거야! 이 몸이 언제 심부름하는 거 봤어? 너 그래도...”“이제 입 다물어도 될까, 고동건 도련님?” 수민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동건은 바로 입을 다물더니 찍소리도 내지 않았다.정은은 눈을 깜박이며 두 사람을 살펴보았다.‘음,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수민이 입을 열었다.“거기 서서 뭐해?”“어? 그럼 뭐 하라는 거야?”“나가
동건의 손은 수민의 스웨터를 파고들어가 손쉽게 속옷 단추를 풀었다.“수민아... 수민아...”키스를 하면서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로 수민의 이름을 불렀다.목소리는 부드럽지만 기세가 사나워 마치 그녀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수민은 엄청난 힘을 써서야 동건을 밀어냈는데, 얼굴은 새빨개졌고 숨을 약간 헐떡였다.“대낮에 이게 무슨 짓이야? 꺼져.”남자는 여전히 그 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좀 더 키스하자...”말하면서 또 뻔뻔스럽게 달라붙었다.“요 며칠 너 병원에서 정은 씨 돌보았잖아. 나 정말 네가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내가 보고 싶었다고?” 수민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도도하게 말했다.“뭐가 빠진 것 같은데?”“헤헤, 맞아, 너랑 자고 싶었어, 왜?”말하면서 긴 팔을 뻗더니 마치 억지를 부리는 코알라처럼 수민을 끌어안았다.수민은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동건의 모습에 이미 습관되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여자를 수도 없이 만나 본 고동건 도련님이 왜 동물처럼 툭하면 발정기에 들어서는 거지?”동건은 안색이 어두워졌다.“지금 누굴 욕하는 거야?”“너.”동건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앞으로 이런 질문 좀 하지 마. 한 번 모욕을 당했는데도 또 한 번 모욕을 자초하다니, 그럴 필요가 없잖아?”“조수민! 너 계속 내가 듣기 싫은 말만 할 거야?! 그래, 나한테도 다 방법이 있어!”“야, 너... 으윽!”동건은 웃음을 짓더니 다시 수민의 입술에 키스했다.이 키스는 유난히 길었다.중간에 수민은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고,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러나 동건은 한사코 손을 놓지 않았는데, 수민은 그의 입술을 깨물어서야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다.“너 개띠야?” 동건은 아파서 줄곧 숨을 헐떡였다.수민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그녀는 신선한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며, 빨갛게 달아오른 두 얼굴은 마치 잘 익은 사과와 같았다. 두 눈은 촉촉했고 입술은 또 약간 부었다.눈빛은 앞유리를 뚫고 지나 앞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한쪽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