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겸은 그제야 연희가 전혀 단순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난 이 여자가 청순하고 천진난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바보처럼 속고 당할 줄이야. 심지어 그런 여자 때문에 정은이를 잃어버렸어... 만약 서연희만 아니었다면, 나와 정은이는 이렇게 남남처럼 지낼 리가 없잖아?’여기까지 생각하면, 도겸은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고, 연희가 있는 곳이라면 아예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그는 이미 연속 며칠간 회사에서 잤다. 연희는 감히 전화를 걸지 못했기에 서영숙을 통해 끊임없이 도겸을 재촉했다.도겸은 어머니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별장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서연희, 넌 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별장으로 돌아오니 시간은 벌써 저녁 8시가 되었다.문을 열자, 연희는 문 앞에 서서 도겸의 외투를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다.도겸은 몸을 옆으로 피하며 뚜벅뚜벅 거실로 걸어갔다.연희는 텅 빈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고, 섭섭함에 입술을 깨물었다.그녀는 오늘 옅은 색의 느슨한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가슴 앞에 드리우니 온화하고 부드러워 보였다.그러나 도겸은 오히려 그런 연희를 직접 무시하며 서영숙을 향해 걸어갔다.“어머니께서 돌아오라고 하셔서 이렇게 돌아온 거예요.”말을 마치자 바로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거기 서지 못해.”도겸은 멈칫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지금 엄청 피곤해서 좀 쉬고 싶어요.”서영숙은 눈썹을 찌푸리며 도겸의 아무렇지 않은 말투에 불만을 느꼈다.“따라와, 할 말 있으니까.”그녀의 태도가 강경했기에 도겸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결국 따라갔다.두 사람은 서재에 들어갔다. 도겸은 앉아서 자신을 위해 물 한 잔을 따르며 천천히 마셨고, 서영숙의 어두운 표정을 외면했다.“연희 뱃속의 아이가 네 것인데, 넌 신경을 좀 쓸 수 없니?”서영숙은 눈을 부라렸다. 사실 그녀도 아들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완벽한 외모는 모든 사람들을 현혹시켰지만, 도겸은 지극히 무정하고 냉담
정은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서 깨어났다.소파에서 벌떡 일어나서 들어보니, 누군가 자신의 집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게 확실했다.“누구세요?” 정은은 경계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오늘 밤 재석은 실험실에 남아 야근을 했기에, 만약 정말 강도라도 만났다면 정은은 반격할 힘조차 없었다.노크 소리가 잠시 멈췄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정은이 문을 열어주지 않자, 도겸은 계속 두드렸다.“대답을 하지 않으면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을 거예요.”“정은아, 나야...”도겸은 쓴웃음을 지었다.‘어쩜 고집이 이렇게 센 건지.’“무슨 일이야?”정은은 도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들어가서 너랑 얘기 좀 하고 싶어서 그래. 나 절대로 너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을 거야. 만약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면, 문을 열고 있어도 되는데...”“우리 사이에 더 이상 할 말은 없어.”정은은 도겸의 말을 끊으며 문을 전혀 열고 싶지 않았다.후에 도겸이 어떻게 애원하든 정은은 그저 못 들은 척했다.그러나 오늘 유난히 인내심이 있었던 도겸은 정은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도 계속 문을 두드렸다.잠시 후, 정은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밖에서 아직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랐고, 핸드폰을 들었다.“여보세요, 경찰서죠? 지금 누가 계속 제 집에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고 있어요...”그렇게 도겸은 경찰에게 끌려갔다.‘드디어 조용해졌군.’정은은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다음 날 아침, 정은은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한 다음, 옷을 챙기고 실험실로 출발했다.앞으로 며칠 동안 그녀는 돌아오지 않고 실험실에서 밤을 보낼 작정이었다.한 편으로는 도겸이 계속 문을 두드릴까 봐 두려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확실히 진도를 따라가야 했다.정은은 9월 개학하기 전에 이 논문을 완성해야 했다.‘일석이조인 셈이지.’그런데 뜻밖에도 정은이 피하고 싶은 사람은 그녀가 아파트에서 나온 순간 골목에서 뛰쳐
먼저 손을 놓은 사람은 분명히 도겸이었다. 그러나 정은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곧 그 그늘에서 벗어날 때, 도겸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끌고 가려 하다니?‘이건 너무 웃기지 않아?’“강도겸, 앞으로 더 이상 날 귀찮게 하지 마. 난 널 증오하고 싶지 않거든.”정은의 단호한 말투와 무정한 눈빛은 마치 칼처럼 도겸의 자신감을 쿡쿡 찔렀다.“정은아... 이러지 마... 응?”그러나 정은은 그저 담담하게 도겸을 바라보기만 했다.“난 이미 모든 문제를 해결했어. 우리 어머니도 이미 동의했단 말이야. 이제 네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우리는 즉시 혼인신고를 할 수 있어!”“난 싫어.”그리고 도겸도 단지 자신을 속이고 있을 뿐,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었다.“정은아...”“난 바빠서 먼저 갈게.”말을 마치고 정은은 도겸을 넘어 학교를 향해 걸어갔다.도겸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으며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그의 곁을 지나갔지만, 도겸은 혼을 잃은 것 같았다. 마치 전 세상이 자신과 무관한 것처럼 멍하니 이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얼마가 지났는지, 도겸은 뻣뻣하게 눈동자를 움직이며 정은이 떠난 방향을 보고 중얼거렸다.“나에게 정말 기회가 없는 거야?”...연희는 그날 밤 도겸과 서영숙이 서재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몰랐다. 처음에 그녀는 편하게 이 집에서 지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남자의 냉담한 태도를 마주칠 때마다 연희는 자신이 수시로 쫓겨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런 불안한 감정은 금새 사라졌다.서영숙은 연희가 강씨 가문의 공신이라고 위로하면서, 두 이모님에게 그녀를 잘 챙겨주며 절대로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심지어 거액을 들여 연희에게 임산부 보양식까지 많이 사주었다.게다가 도겸도 연희가 이 별장에서 지내는 것을 묵인한 것 같았는데, 전처럼 배척하고 싫어하지 않았다.그 후 별장의 가정부들도 이를 눈치채며 연희에 대한 태도가 뒤바뀌었다.어떤 가정부는 이미
실험실에서.조미진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전 교수는 속산이 빠르니까 빨리 이 데이터 좀 계산해줄래? 정말 급해서 그래!”전진욱도 한창 바쁠 때였다.“컴퓨터로 계산해. 나 지금 시간이 없거든...”“에이, 이 데이터 엄청 중요하니까 좀 봐봐. 몇 분밖에 안 걸려!”진욱은 맞은편 실험대에 있는 정은을 가리켰다.“그럼 정은이에게 부탁해. 정은이의 속산 실력도 엄청 강하거든.”지난번에 데이터를 수정할 때, 모두들 정은의 실력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그러나 이수아만이 정은이 황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았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무슨 일인데요 미진 언니? 제가 도와드릴까요?” 정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미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이것 좀 봐줘...”2분 후, 정은이 입을 열었다.“다 됐어요. 이미 메일로 보내드렸어요.”미진은 깜짝 놀랐다.‘이렇게 빨리 완성했다고?!’진욱도 놀라서 하던 일을 그만두며 미진에게 그 데이터를 달라고 말했다.“나도 좀 보자...”미진은 어이가 없었다.“방금 계산해달라고 했는데, 바쁘다며 거절했잖아? 지금 계산을 다 마쳤는데 또다시 계산을 하려 하다니. 이게 뭐 하는 짓이니!”진욱은 미진의 비웃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계산에 전념했다.손태민도 이 상황을 보고 즉시 시간을 재었다.“다 됐어. 얼마나 걸렸는데?”“2분 5초요.”그러고 정은도 겨우 2분밖에 걸리지 않았다.진욱은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정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너 속산을 배운 적 있지?!”“주산법도 속산에 속하나요?”“언제 배웠는데?”“다섯 살? 아니다, 여섯 살인가? 죄송해요,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잊어버렸어요.” 정은은 궁색함 때문에 머리를 긁적였다.진욱은 침을 삼켰다.“그 이후로 배운 적이 없는 거야?”“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정은은 영문을 몰랐다.‘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이 있다더니, 이게 틀린 말이 아니었구나!’태민도 한 번 도전해 보고 싶
미진이 물었다.“누가 이길 것 같아?”진욱이 대답했다.“지금 상황으로 보면, 태민이가 우세를 차지하고 있어.”미진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도 진욱의 관점에 찬성했다.5분이 지나자, 정은은 네 번째 문제를 계산한 다음 마지막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태민은 네 번째 문제에서 잠깐 막혔기 때문에 좀 뒤떨어졌다.정은은 역전을 이루었지만 우세는 그리 뚜렷하지 않았다.6분이 됐을 때, 두 사람 모두 마지막 문제에 막혔다....6분 50초, 정은은 답안을 쓴 다음 계산을 끝냈다.태민도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다 됐어요!”그러나 아쉽게도 정은보다 10초나 느렸다.그는 가볍게 숨을 쉬더니 땀을 닦으며 웃었다.“괜찮아요. 속도 말고 정확도를 봐야 하잖아요. 저는 자신 있어요.”그 결과, 정은은 전부 맞았고, 태민은 한 문제 틀렸다.태민은 깜짝 놀랐다.‘와, 내가 졌다니, 말도 안 돼!’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정은아, 넌 속산이 왜 이렇게 강한 거야? 정말 어렸을 때 잠깐밖에 안 배운 거 맞아?”진욱도 묵묵히 지켜보며 속으로 은근히 고개를 끄덕였다.정은은 능력이 강한 것 외에 마음 역시 차분했다. 관건적인 순간, 그녀는 침착하고 태연하게 맞설 수 있었다.이것만 봐도 태민은 질 수밖에 없었다.미진은 웃으며 농담을 했다.“태민아, 이제 패배를 인정하는 거야?”태민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실력이 있는 자가 왕이죠. 제가 졌어요.”‘전 교수님은 실험실의 선배이자 속산의 강자였으니 그렇다 쳐도, 정은이는 이제 막 대학원에 합격한 새내기잖아. 그런데 내가 뜻밖에도 그런 정은이에게 졌다니?’태민은 자신이 질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미진은 위로하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시합인 이상, 승패가 있는 게 정상이지. 다음에 다시 노력해 봐. 그러나 밥은 꼭 오늘 사야 돼.”마지막 말이 중점이었다.“그럼요, 당연히 약속을 지켜야죠! 오늘 밤 제가 밥 살게요! 그나저나 정은아, 넌 마지막 문제를 어떻게 계산해
재석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달려왔기에 손에 교과서를 들고 있었다.미진이 대답했다.“방금 태민과 정은이 속산 시합을 했는데, 진 사람이 저녁을 쏜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어요.”재석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정은은 눈웃음을 머금고 있었고,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마치 모든 간극이 사라진 것처럼. 정은은 이미 진정으로 그들과 친구가 된 것 같았다.재석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그래, 그럼 모두들 오늘 일찍 퇴근하고, 태민이 밥 사기를 기다리자.”“네?” 미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교수님, 저 아직 진 사람이 누군지 말하지 않았는데, 왜 태민에게 한턱 내라고 하시는 거예요?”“태민이 진 거 아니야?”“맞아요...”이 순간, 태민은 엄청난 상처를 받았다!“수아야, 넌?” 미진은 담담하게 물었다.“전 갈 시간 없어요.”...결국 그들은 포장마차에서 먹기로 정했다.비록 미진은 태민에게 제대로 한 끼 사야 한다면서 크게 떠들어댔지만, 레스토랑을 선택할 때 오히려 태민의 사정을 고려했다.태민은 가정 형편이 그리 좋지 않았다. 부모님은 모두 시골 사람이었고, 집의 모든 돈을 다 써서야 그는 박사 과정을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최근에 실험팀에 가입한 후, 태민도 돈을 조금 벌 수 있었지만, 매달 부모님에게 돈을 부쳐야 했기에 사정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포장마차는 비싸지 않고 또 맛이 좋았기에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비록 지난번에 재석이 선택한 레스토랑만큼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분위기가 떠들썩해서 모두들 배불리 먹었다.돌아가는 길에 재석은 앞을 바라보며 능숙하게 운전을 하고 있었고, 정은은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그는 눈빛을 살짝 돌리면 보석처럼 반짝이는 여자아이의 눈빛을 볼 수 있었는데, 흥분의 기색이 역력했다.재석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그렇게 기뻐?”“네, 그럼요. 방금 미진 언니가 먼저 나에게 내일 보자고 인사하신 거 있죠? 전 교수님도 자신이 가장 아끼던 속산 노트를 나에게
처음에는 정상이었지만, 두 볼에 홍조가 나타나더니 점차 붉어졌고, 지금은 귀까지 빨개졌다.1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재석의 얼굴에 이런 변화가 생기자, 정은은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차 안이 너무 답답해서 그런가 봐.”정은은 재빨리 자신의 차창을 내렸다.“이제 좀 괜찮아요?”“응.”...재석은 정은을 데려다준 다음, 최근에 시작한 실험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단 것을 떠올리며 다시 실험실로 돌아갔다.정은은 소파에 누웠다. 실험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는 기쁨이 지나간 후, 그녀는 온몸이 나른해져 소파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서 차 안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모든 장면이 유난히 선명하게 나타났다. 재석의 뼈마디가 분명한 손이 자신의 머리 위에 떨어졌을 때, 그 부드러운 힘은 정은으로 하여금 자신이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응원을 받고 있다는 착각이 들게 했다...‘착각이 아닐 수도 있겠지? 선배님은 정말 날 응원하고 있어. 하지만... 그뿐이야.’정은은 소파에 누워 있었기에 눈을 살짝 뜨면 바로 천장이 보였다.전의 세입자는 이곳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주방 연기에 그을려 누렇게 변한 흔적도 있었고, 진흙이 튄 흔적도 있었다.정은은 청소를 했지만, 벽지를 붙이든 조명기구로 가리든 그 더러운 흔적들은 여전히 존재하며 지울 수가 없었다.언뜻 보기에는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관찰하거나, 불빛을 밝게 켜면 모든 추악함이 드러날 것이다.남에게 형편없는 자신을 들켜 미움받기보다는 처음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낫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자신의 결점도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이 점을 깨닫자, 정은은 숨을 내쉬며 자신의 가슴을 만졌다.‘그래, 이제 심장도 두근거리지 않아. 정상으로 돌아왔어.’그녀는 일어나서 욕실로 걸어갔다.‘일단 샤워하고 푹 자자. 무슨 일 있으면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고! 내일 말하고 싶지 않으면 모레가 있잖아. 모레, 글피, 그렇게 하루하루 미루면서 날
말을 마치자, 수민이 계속 물어볼까 봐 두려운 듯 정은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아, 배고프다. 레스토랑 예약했죠? 얼른 밥 먹으러 가자.”도심에 샤브샤브 맛집이 하나 있는데, 인기가 많아서 주말에 항상 줄을 엄청 섰다. 수민은 2주전에 미리 예약해서 다행히 대기 필요없다.샤브샤브 가게 근처에 바로 고기 파는 시장이다. 모두 시장에서 직접 재고해 온 것으로, 원재료가 너무 신선하고 깨끗하다.평소에 매운 것 즐겨먹었던 정은은 가끔 담백한 샤브샤브를 먹으니 꽤 맛있다고 생각했다.특히 이 가게의 국물은 소뼈로 끓여냈다.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자, 고기를 넣지 않아도 향기가 퍼졌다.수민은 앉자마자 메뉴를 가져왔다.“이거, 이거, 그리고 이거... 각각 2인분씩 주세요.”그녀는 이번 주에 야근을 하느라 살이 많이 빠졌다. 모처럼 나와서 긴장을 푸는 것이니 당연히 제대로 먹어줘야 했다.‘살이 쪄도 괜찮아. 운동으로 살을 뺄 수 있지만, 절대로 굶을 순 없어!’정은은 한 상 가득 올라온 고기와 야채를 보고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이거 다 먹을 수 있을까?”‘두 사람이 이렇게 많이 시키다니. 낭비가 아닐까?’수민은 눈썹을 치켜세우다 무언가를 떠올렸다.“너한테 말하는 걸 깜박했네. 방금 큰어머니가 나더러 우리 오빠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어. 이번 주에 집에 돌아오라고 말이야. 방금 전화할 때, 오빠는 마침 쉬고 있다고 했고, 나도 오빠를 이곳으로 불렀어. 에헴... 정은아, 내가 제멋대로 결정했다고 날 탓하는 거 아니지?”정은은 국물을 마시다가 이 갑작스러운 소식에 기침을 하더니 사레가 들릴 뻔했다.수민은 정은의 반응이 이렇게 큰 것을 보고 약간 영문을 몰랐다.“너는 우리 오빠는 친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놀라는 거지?”‘두 사람은 이웃인 데다가, 지금은 또 같은 실험실에서 과제를 하고 있으니 매일 붙어 다니는 거랑 다름이 없잖아? 그럼 사이가 엄청 친할 텐데.’그리고 수민이 재석을 부르는 것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정은이 있는 기회
첫 번째로 초청장을 처음 받은 사람은 하정남이었다.택배로 부쳤기 때문에 민지는 이틀 전에 초청장을 자신의 고향으로 보냈다.택배원의 전화를 받았을 때, 하정남은 어리둥절해졌다.‘집사람리 또 인터넷 쇼핑을 한 거야? 그런데 왜 내 전화를 남겼지? 설마... 에르메스를 샀는데 착불로 부친 건 아니겠지?!’“이 사람이 정말!”옆에서 쑥뜸을 하고 있던 민지 어머니는 영문을 몰랐다.하정남은 쿵쿵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택배를 받고, 또 쿵쿵거리며 위층으로 뛰어올라갔다.보낸 사람을 보니, 뜻밖에도 그의 딸이었다.하정남은 희색이 만면했다.“누구 택배예요?” 민지 어머니는 쑥을 들고 물었다.온 거실에 쑥 냄새가 가득했다.하정남은 맨손으로 택배를 뜯었다.“우리 민지.”“응?” 임수인은 얼른 다가왔다.“민지가 뭘 보냈어요? 왜 서류봉투죠? 계산서 아니에요?”하정남은 멈칫했다.“설마, 그럴 리가? 얼마 전에 금방 3천만 원 줬는데!”이 얘길 꺼내자, 임수인은 화를 냈다.“3천만 원을 달라했다고 바로 줘요? 앞으로 국고를 달라고 한다면, 그것까지 훔쳐서 줄 거예요?! 평소에 내가 가방을 몇 개 사면 반년 동안 잔소리를 하다니. 지난달에 내가 차를 바꾸겠다고 해도 허락하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민지가 말 한마디만 하면 바로 줘요? 민지도 내가 낳은 딸이잖아요!”“이 돈 가지고 뭘 했는지 누가 알겠어요? 남들과 나쁜 짓을 배우는 것도 두렵지 않나 봐요!”“민지가 말했잖아, 실험실을 짓겠다고!”임수인은 콧방귀를 뀌었다.“실험실이요? 당신은 그걸 믿는 거예요! 전국 최고의 대학교에서 실험실 한 칸을 못 내주는 거예요 뭐예요? 왜 민지가 자신의 돈을 써서 새것을 지어야 하냐고요? 맨날 돈을 많이 줘서 무슨 사고라도 쳤겠죠!”“어제 뉴스를 봤는데, 재벌 2세의 대학생들이 매년 클럽에 가서 수십억을 쓴다잖아요. 이상한 남자와 엮이면 어떡하려고. 당신은 민지에게 이렇게 많은 돈을 줬으니, 나중에 남자에게 속으면 어쩌려고요?”“하긴, 내가 당신에게 아들을
1개월 23일에 걸쳐 20억 원 이상의 예산이 투입된 첨단 지능형 시스템과 두 단계의 생물안전등급 체계를 갖춘 실험실이 마침내 이번 겨울 세 번째 눈이 멈춘 후 완공되었다. 인훈은 자신의 팀을 데리고 실험실 지능시스템의 마지막 테스트를 진행했다.이와 함께 현빈의 명의로 된 과학기술회사가 해외를 통해 구매한 각종 실험기기도 속속 도착했다.민지와 서준은 요 며칠 바빠서 죽을 지경이었다.인훈과 스마트 시스템 조작 방법을 익혀야 하는 것 외에, 기기를 점검하고 공간을 배치해야 했다.실험대며 정수기며 모두 두 사람이 직접 안착시켰다.수업, 식사,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은 거의 여기에서 보냈다.서준네.“서준아, 또 나가려고?”“네, 할머니!”“오늘은 토요일이잖아? 수업도 없는데 왜 자꾸 밖으로 뛰쳐나가는 거야? 너 여자친구 사귀었어?!” 할머니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아니에요!”“그럼 뭐 하러 가는 건데?”“중요한 일이 하나 있어요! 할머니, 저 먼저 갈게요.”말을 마친 후, 서준은 가방을 들고 목도리를 두르며 성큼성큼 집을 나섰다.할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어린아이한테 무슨 큰일이 있겠어?”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차를 마시던 할아버지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서준이 실험실로 달려갈 때, 민지도 택시를 탔다.“기사님, 교외로 가주세요, 감사합니다!”“그곳은 공사장인데, 아가씨 혼자 뭐 하러 가려고?”민지는 표정이 숙연해지더니 또박또박 말이었다.“엄청 중요한 일이에요.”도중에 그녀는 하정남의 전화를 받았다.“네, 아빠.”[넌 내가 보고 싶지도 않니? 난 보고 싶어 죽겠는데?]“나도 아빠 보고 싶어요. 쪽쪽!”민지가 뽀뽀를 하자, 하정남은 기분이 좋아졌다.그러나 입으로는 여전히 원망했다.[보고 싶으면서도 나한테 연락도 없고! 흥! 누구를 속이는 거야?]“아빠, 나 요즘 바빠서 그래요. 정신없이 바빴단 말이에요!”[뭐가 바빠? 아빠한테 말 할 수 있어?]“곧 알게 될 거예요! 정말이에요!”[나한테도
현장에서 안색이 가장 안 좋은 사람은 그래도 송지혜였다.‘스스로 실험실을 세우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송지혜는 멍해졌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으며 마지막에는 냉소를 지었다.‘혼자 실험실을 짓겠다고? 말이 쉽지, 그게 정말 마음대로 될 것 같아?’ ‘돈을 얼마나 써야 하는지는 차치하고라도, 땅과 심사비준만 해도 까다로워서 소정은은 절대로 따낼 수 없어.’예전에 학교가 오미선의 편을 들어줬을 때, 송지혜도 나름 고생을 했다.학생도 없지, 자원도 없지, 학교도 송지혜를 철저히 외면하며 무시했다.가장 힘들 때 송지혜는 억울함을 참으며 심지어 학교를 떠나 스스로 실험실을 지으려 했다.그때 가서 성적을 내면, 학교도 다시 찾아와서 그녀에게 부탁할 것이다.그러나 송지혜는 가장 억울할 때만 이런 생각을 했을 뿐, 전혀 실천을 하지 않았다.너무 어려우니까.밖에서 아무 공터 하나 찾아 벽돌로 쌓으면 바로 실험실을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국가와 사회가 인정하는 실험실은 부지선정에 엄격한 요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건축에도 명확한 규정이 있으며, 또 관련 부문의 심사비준을 거쳐야 한다.“풉...”“이모... 앗! 교수님, 왜 웃으세요?” 지예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그 사람들이 주제넘은 생각을 해서 말이야. 평소에 이런 장난을 쳐도 그만이지만, 뜻밖에도 대학원에 신고를 했다니. 큰소리 치다가 자빠질지도 몰라.”“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예는 조심스럽게 떠보았다.“허, 넌 스스로 실험실을 짓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신고 고지서일 뿐, 다 지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놀랄 필요가 있겠어?”신고는 신고였고, 짓는데 시간이 얼마 필요한지, 어떻게 지을지, 마지막에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모두 미지수였다.‘놀랄 게 뭐가 있다고?’“이런 방식으로 자존심을 세우려 하는 것 좀 봐. 정말 웃기고 불쌍해.”“그들이 실험실을 짓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세요?”송지혜는 턱을 살짝 들고 냉소를 지었다.“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지예는 바로 웃음을
백두강이 입을 열었다.“각 팀 다 보고했겠지? 다른 신고할 사항은 없는 건가?”관례에 따라 각 팀은 보고가 끝난 후, 대학원 회의에서 신고 사항을 발표해야 했다.물론 작은 일은 보고할 필요가 없었는데, 인사 변동, 제명과 같은 큰일만 보고하면 됐다.공평과 공정을 표시하기 위해 감찰팀 대표가 대중 앞에서 신고서를 낭독해야 했다.평소에 이 코너는 생략하면 됐다.신고할 내용이 없으니까.백두강은 오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무대에 앉아 있던 감찰팀 대표가 일어설 줄이야.“한 가지가 있습니다.”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백두강조차도 놀라서 눈썹을 찌푸렸다.“구체적인 사항은 소정은의 연구팀이 교외에 자체로 실험실을 건설할 것을 신청한 것에 관한 고지서입니다. 저희측은 이미 접수했으며 관련 수속을 심사하고 있고, 진도를 제때에 대학원측 및 학교측에 보고할 것입니다.”이 말은 마치 돌이 호수에 떨어진 것처럼 파문을 일으켰다.“자체로 실험실을 건설한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나 잘못 들은 거 아니죠?”“누가 실험실을 짓는 거지? 학교 측이 연합하여 설립한 연구 작업실인가? 그래도 실험실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중점 못 들었어? 이건 고지서지 신청서가 아니야. 다시 말해서, 소정은의 팀은 이미 실행을 하기 시작했단 거야. 이번 신고도 절차에 따라 학교에 고지하는 의무를 이행했을 뿐이라고.”“헐... 그동안 들은 소식들 어쩜 이렇게 신기한 거지? 전에 어떤 사람이 혼자 돈을 내서 CPRT 한 대를 샀다고 하던데, 지금 뜻밖에도 혼자 실험실을 지으려는 사람이 있다니?! 실험실이 무슨 농사야? 짓고 싶으면 짓게?”“음... CPRT를 구매한 사람과 자체 실험실을 건설하려는 사람이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뭐?!”...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그리고 송지혜 팀은 이미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진호는 망연자실하게 말했다.“방, 방금 뭐라고 했어?”지예는 중얼거렸다.“그럴 리가...”서정조차도 두 눈을
정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험실 시정은 사실이고 진도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그래서 따질 필요가 없었다.그녀가 다시 앉자, 마침 강서정이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서정은 참지 못하고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소정은, 너도 이렇게 당하는 날이 있다니.”“인생에는 항상 기복이 있는 법이지. 사람이라면 다 운이 나쁠 때가 있는 거 아니겠어? 그러나 너희들도 조심해, 앞으로 무슨 일이 들이닥칠지 모르니까.”“뻔뻔하긴!”정은은 앞을 쳐다보며 얼굴에 노기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서정은 정은의 담담한 모습을 보며 엄청 화가 났다.“넌 송 교수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젊었을 때의 오 교수님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그 교수님은 이미 늙으셔서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넌 그런 교수님의 학생이 되었으니, 세력도 없고 그저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겠지.”“당초에 내가 너와 그렇게 싸우며 오미선 교수님의 학생이 되고 싶었는데, 결국 네가 이겼고, 내가 졌잖아. 그러나 지금 일이 또 이렇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 그래서 한 번 이겼다고 해서 평생 이긴 것은 아니야. 졌다고 해서 앞으로 줄곧 지는 것도 아니고. 너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 서정은 득의양양하게 말했다.‘대학원 시험에서 일등을 하면 또 뭐가 어때서? 면접 시험을 잘 봤다고 또 뭐가 달라지는데? 스스로 돈을 내서 CPTR을 샀지만, 결국 실험실을 사용할 수 없는 지경으로 전락했잖아?’“소정은, 넌 우리 오빠와 헤어진 후에 어째서 상황이 점점 더 나빠졌니? 대학원에 붙으면 아주 잘난 거라 생각했던 거야? 우리 오빠가 널 안중에 둘 줄 알았어? 우리 엄마가 너라는 며느리를 놓친 것을 후회하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냐고? 꿈이나 깨!”정은은 웃으며 눈가에 웃음기가 가득했고, 엄청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네 말의 뜻인 즉... 내가 대학원 시험에서 확실히 성공을 거둔 거잖아. 네 오빠는 확실히 내 성적에 놀랐고, 네 어머니도 나란 며느리를 놓친 것을 후회하고 계시지, 맞지?”“너..
12월 말, J시는 겨울에 들어선 후 두 번째 눈을 맞이했다.이번 눈은 첫눈보다 더 많이 내렸고, 이틀 연속 내렸기에 J시 전체가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이른 아침, 정은은 미안함을 안고 재석의 집 문을 두드렸다.“선배님...” 정은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재석은 잠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여전히 헝클어져 있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가슴이 조여졌다.“무슨 일이야?!”“그런 거 아니에요!” 시간이 확실히 이르고 너무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에 정은은 더욱 미안해지더니 또 좀 부끄러워했다.“나 때문에 깬 거죠?”“아니야, 원래 일어날 시간이거든.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지난번에 그 눈놀이 도구 말인데요... 아직 있어요?”재석은 멍해졌다.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눈은 확실히 그쳤다.“이렇게 일찍 내려가서 눈놀이를 할 거야?” 재석은 생각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정은은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네! 일찍 내려가야 밟힌 흔적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깨끗하잖아요.”재석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꼭 어린아이 같아.”“눈놀이에 어른과 아이가 있나요? 놀고 싶으면 노는 거죠.”“잠깐만 기다려.”말이 끝나자 재석은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통 하나를 들고 나왔다.안에는 전에 둔 오리, 공룡, 곰돌이 그리고 삽 등이 있었다.“고마워요 선배님! 나 지금 바로 내려갈게요!” 정은은 통을 받고 몸을 돌려 재빨리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갔다.10분 뒤, 단정하게 차려입은 재석이 아래층에 나타났다.정은은 한 무리의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 하얀 패딩, 크고 빨간 모자, 주위의 눈과 하얗게 어우러지는 동시에 오직 그 빨간색만 선명하고 눈부셨다.“선배님! 이리 와요.”정은이 재석을 향해 웃었다.재석은 손을 흔들었다.“너희들끼리 놀아.”정은은 가볍게 흥얼거리며 몸을 돌려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무엇을 파헤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벌떡 일어서서 무언가를 세게 던졌다.손바닥만 한 눈덩이가 재석을 향해 날
인훈은 말을 하지 못했다.정은이 입을 열었다.“심 대표님, 이제 손 놓아도 돼요.”현빈은 웃으며 마치 그제야 알아차린 듯, 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어깨를 꽉 껴안았다.섬세하고 얇은 어깨는 패딩을 사이에 두고도 여전히 뼈를 만질 수 있었다.여자의 몸에서 나는 은은하고 그윽한 향기도 현빈의 콧구멍으로 파고들었다.현빈은 온몸이 오그라들었다.그러나 다음 순간, 정은은 몸을 돌려 현빈에게서 유연하게 벗어났다.현빈은 반응이 빨랐는데, 정은이 도망가는 것을 보고 긴 팔을 뻗어 다시 그녀를 잡아당겼다.한 사람은 달리고 다른 한 사람은 따라갔다.하나는 도망가고 다른 하나는 쫓아갔다.정은은 화가 났다.“심현빈 씨! 작작 좀 하면 안 돼요?!”남자는 눈가에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좋아, 드디어 날 심 대표님이라고 부르지 않네.”...두 사람이 밀당을 하는 사이, 재석은 멀지 않은 가로등 아래에 서 있었고, 손에 종이주머니를 들고 있었다.불빛 때문인지, 그의 반쪽 얼굴이 그늘 속에 숨어 있어서 지금 표정을 분명하게 볼 수 없었다.“선배님?” 정은은 바로 재석을 발견했다.가만히 서 있던 남자가 걸음을 들어 다가오더니 정은의 목에 있는 남자 목도리에 시선이 떨어졌다.인훈은 자신의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것이 아니었다.현빈은 코트에 양복을 입고 있었지만, 목도리를 하지 않았다.“조 교수님!” 인훈은 웃으며 인사를 했다.“여기서 만났다니, 정말 공교롭네요!”“공교롭긴요. 일부러 찾아온 거예요.”“네?”재석은 주머니에 든 목도리를 꺼내 앞으로 다가갔고, 정은의 목에 있는 남자 목도리를 벗긴 다음 현빈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정은 자신의 목도리를 둘러주었다.“방금 이웃 대학교 문 앞에서 네 두 친구를 만났는데, 너에게 목도리를 돌려주려고 했던 거야. 나도 마침 오는 길이라 대신 너한테 주겠다고 했어. 두 사람 야식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거든.”“고마워요, 선배님! 또 귀찮게 했네요.”정은은 목도리 안으로 움츠러
가로등 아래에서, 정은 그들은 걸으면서 계속 말을 했다.찬바람이 쌩쌩 불자, 내쉬는 숨결은 순식간에 안개가 되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정은아, 밀크티 마실래? 오빠가 쏠게.”인훈은 흰 이빨을 드러냈다.정은이 말을 하려고 할 때, 갑자기 한 남자가 그녀 앞에 와서 멈추었다.세 사람의 의혹을 맞이하며 그 사람은 마술사처럼 뒤에서 장미꽃 한 다발을 꺼내 정은에 건네주었다.“안, 안녕! 난 이 학교 대학원 3학년의 학생이야. 그, 그동안 널 주목해 왔어... 이 꽃은 너에게 줄게.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그, 그리고, 우리 서로 연락처를 교환할 수 있을까? 널 처음 봤을 때 난 너에게 첫눈에 반했거든. 매우 갑작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 나 자신도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하지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어. 나에게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이 늦은 시간에, 그것도 학교 밖에서 이런 일에 부딪쳤다니.정은은 가게에서 나올 때, 오늘 마침내 ‘우연히’ 도겸과 경혜를 만나지 못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지만, 뜻밖에도 남의 고백을 받았다니.인훈은 반응하여 가장 먼저 현빈의 표정을 살폈다.‘이야, 완전 열받은 표정이네. 어쩔 수 없지, 우리 정은이가 이렇게 인기가 많은 것도 당연하잖아? 밥을 먹으러 나오다가 고백까지 받다니. 헤헤...’정은은 앞에 있는 꽃을 보며 한순간 침묵했다.“꽃은 정말 예뻐요...”남자는 바로 웃으며 눈에서 빛이 났다.“그럼 받...”“하지만 난 받을 수 없어요, 미안해요.”“왜, 왜?”“우선, 나는 그쪽을 모르고, 우리도 친한 사이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아무 이유없이 나에게 꽃을 주다니, 난 그 꽃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자격 같은 거 필요 없어.”남자는 다급히 설명하려 했다.“이거 그냥 너에게 주는 거야.”“그럼 더 받으면 안 되죠. 장미는 사랑을 대표하고, 오늘 내가 이 꽃을 받으면 그게 무슨 뜻인지 누구나 다 알잖아요. 미안해요.”“이게 아니라, 내가 너에게 꽃을 선물한 것
“다 심 대표님의 그 두 공사팀 덕분이야...”원래 그들은 기초 토목 건설을 책임졌지만, 인훈은 곧 자신이 상대방의 실력을 얕잡아 봤다는 것을 발견했다.기초 토목 건설을 제외하고, 이 사람들은 인테리어, 자재 감식까지 훌륭했다.그래서 토지 건설이 완료된 후, 인훈은 당분간 공사팀을 돌려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이어서 공사팀으로 하여금 내부 인테리어와 스마트 배치 제어까지 완성하게 했다.“심 대표님, 무슨 문제 없죠?”정은은 이 말을 듣고 인훈과 함께 현빈을 바라보았다.현빈은 정은의 눈빛을 마주하며 살짝 웃었다.“당연히 없죠.”정은이 입을 열기만 하면, 현빈은 더 많은 사람을 불러올 수 있었다.“고마워요, 심 대표님!”“현빈 오빠라 불러.”‘또 시작이네.’인훈이 말했다.“헤헤... 현빈 형 고마워요.”현빈은 깜짝 놀랐다.다 먹자, 인훈은 계산하려고 했다.현빈은 이미 먼저 일어나 계산대로 걸어갔다.“사장님, 계산이요.”“심 대표님, 식사 끝나셨어요? 오늘 꽃등심 맛은 어때요?”현빈은 고개를 돌려 정은을 보았다.“맛 어때?”사장님은 빙그레 웃으며 정은을 바라보았다.정은은 사실대로 말했다.“맛있어요.”“그럼 됐어요! 최근 이 요리가 얼마나 잘 팔리는지, 저희 예전의 간판 메뉴보다 더 잘 팔리고 있어요. 장사도 많이 좋아졌고요. 말하자면 심 대표님의 소중한 제안 덕분이기도 하죠.”현빈은 돈을 지불하고 핸드폰을 거뒀다.“정은이 덕분이죠.”사장님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애매한 눈빛으로 정은과 현빈을 바라보았다.“그럼요! 다 고맙죠!”문을 나서자, 찬바람은 옷 안으로 파고들어갔다.정은은 재빨리 패딩 지퍼를 당겼지만 여전히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다음 순간, 현빈은 자신의 목도리를 벗어 그녀의 목에 둘렀다.정은은 멈칫하더니 얼른 벗으려 했다.“아니에요, 지퍼를 높게 당기면 바람을 막을 수 있어요...”그러나 현빈은 듣지 않았다.“그냥 두르고 있어.”...이웃 대학교 문 앞에서, 민지와 서준은 실험실에서 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