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진이 물었다.“누가 이길 것 같아?”진욱이 대답했다.“지금 상황으로 보면, 태민이가 우세를 차지하고 있어.”미진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도 진욱의 관점에 찬성했다.5분이 지나자, 정은은 네 번째 문제를 계산한 다음 마지막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태민은 네 번째 문제에서 잠깐 막혔기 때문에 좀 뒤떨어졌다.정은은 역전을 이루었지만 우세는 그리 뚜렷하지 않았다.6분이 됐을 때, 두 사람 모두 마지막 문제에 막혔다....6분 50초, 정은은 답안을 쓴 다음 계산을 끝냈다.태민도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다 됐어요!”그러나 아쉽게도 정은보다 10초나 느렸다.그는 가볍게 숨을 쉬더니 땀을 닦으며 웃었다.“괜찮아요. 속도 말고 정확도를 봐야 하잖아요. 저는 자신 있어요.”그 결과, 정은은 전부 맞았고, 태민은 한 문제 틀렸다.태민은 깜짝 놀랐다.‘와, 내가 졌다니, 말도 안 돼!’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정은아, 넌 속산이 왜 이렇게 강한 거야? 정말 어렸을 때 잠깐밖에 안 배운 거 맞아?”진욱도 묵묵히 지켜보며 속으로 은근히 고개를 끄덕였다.정은은 능력이 강한 것 외에 마음 역시 차분했다. 관건적인 순간, 그녀는 침착하고 태연하게 맞설 수 있었다.이것만 봐도 태민은 질 수밖에 없었다.미진은 웃으며 농담을 했다.“태민아, 이제 패배를 인정하는 거야?”태민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실력이 있는 자가 왕이죠. 제가 졌어요.”‘전 교수님은 실험실의 선배이자 속산의 강자였으니 그렇다 쳐도, 정은이는 이제 막 대학원에 합격한 새내기잖아. 그런데 내가 뜻밖에도 그런 정은이에게 졌다니?’태민은 자신이 질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미진은 위로하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시합인 이상, 승패가 있는 게 정상이지. 다음에 다시 노력해 봐. 그러나 밥은 꼭 오늘 사야 돼.”마지막 말이 중점이었다.“그럼요, 당연히 약속을 지켜야죠! 오늘 밤 제가 밥 살게요! 그나저나 정은아, 넌 마지막 문제를 어떻게 계산해
재석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달려왔기에 손에 교과서를 들고 있었다.미진이 대답했다.“방금 태민과 정은이 속산 시합을 했는데, 진 사람이 저녁을 쏜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어요.”재석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정은은 눈웃음을 머금고 있었고,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마치 모든 간극이 사라진 것처럼. 정은은 이미 진정으로 그들과 친구가 된 것 같았다.재석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그래, 그럼 모두들 오늘 일찍 퇴근하고, 태민이 밥 사기를 기다리자.”“네?” 미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교수님, 저 아직 진 사람이 누군지 말하지 않았는데, 왜 태민에게 한턱 내라고 하시는 거예요?”“태민이 진 거 아니야?”“맞아요...”이 순간, 태민은 엄청난 상처를 받았다!“수아야, 넌?” 미진은 담담하게 물었다.“전 갈 시간 없어요.”...결국 그들은 포장마차에서 먹기로 정했다.비록 미진은 태민에게 제대로 한 끼 사야 한다면서 크게 떠들어댔지만, 레스토랑을 선택할 때 오히려 태민의 사정을 고려했다.태민은 가정 형편이 그리 좋지 않았다. 부모님은 모두 시골 사람이었고, 집의 모든 돈을 다 써서야 그는 박사 과정을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최근에 실험팀에 가입한 후, 태민도 돈을 조금 벌 수 있었지만, 매달 부모님에게 돈을 부쳐야 했기에 사정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포장마차는 비싸지 않고 또 맛이 좋았기에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비록 지난번에 재석이 선택한 레스토랑만큼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분위기가 떠들썩해서 모두들 배불리 먹었다.돌아가는 길에 재석은 앞을 바라보며 능숙하게 운전을 하고 있었고, 정은은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그는 눈빛을 살짝 돌리면 보석처럼 반짝이는 여자아이의 눈빛을 볼 수 있었는데, 흥분의 기색이 역력했다.재석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그렇게 기뻐?”“네, 그럼요. 방금 미진 언니가 먼저 나에게 내일 보자고 인사하신 거 있죠? 전 교수님도 자신이 가장 아끼던 속산 노트를 나에게
처음에는 정상이었지만, 두 볼에 홍조가 나타나더니 점차 붉어졌고, 지금은 귀까지 빨개졌다.1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재석의 얼굴에 이런 변화가 생기자, 정은은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차 안이 너무 답답해서 그런가 봐.”정은은 재빨리 자신의 차창을 내렸다.“이제 좀 괜찮아요?”“응.”...재석은 정은을 데려다준 다음, 최근에 시작한 실험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단 것을 떠올리며 다시 실험실로 돌아갔다.정은은 소파에 누웠다. 실험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는 기쁨이 지나간 후, 그녀는 온몸이 나른해져 소파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서 차 안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모든 장면이 유난히 선명하게 나타났다. 재석의 뼈마디가 분명한 손이 자신의 머리 위에 떨어졌을 때, 그 부드러운 힘은 정은으로 하여금 자신이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응원을 받고 있다는 착각이 들게 했다...‘착각이 아닐 수도 있겠지? 선배님은 정말 날 응원하고 있어. 하지만... 그뿐이야.’정은은 소파에 누워 있었기에 눈을 살짝 뜨면 바로 천장이 보였다.전의 세입자는 이곳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주방 연기에 그을려 누렇게 변한 흔적도 있었고, 진흙이 튄 흔적도 있었다.정은은 청소를 했지만, 벽지를 붙이든 조명기구로 가리든 그 더러운 흔적들은 여전히 존재하며 지울 수가 없었다.언뜻 보기에는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관찰하거나, 불빛을 밝게 켜면 모든 추악함이 드러날 것이다.남에게 형편없는 자신을 들켜 미움받기보다는 처음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낫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자신의 결점도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이 점을 깨닫자, 정은은 숨을 내쉬며 자신의 가슴을 만졌다.‘그래, 이제 심장도 두근거리지 않아. 정상으로 돌아왔어.’그녀는 일어나서 욕실로 걸어갔다.‘일단 샤워하고 푹 자자. 무슨 일 있으면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고! 내일 말하고 싶지 않으면 모레가 있잖아. 모레, 글피, 그렇게 하루하루 미루면서 날
말을 마치자, 수민이 계속 물어볼까 봐 두려운 듯 정은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아, 배고프다. 레스토랑 예약했죠? 얼른 밥 먹으러 가자.”도심에 샤브샤브 맛집이 하나 있는데, 인기가 많아서 주말에 항상 줄을 엄청 섰다. 수민은 2주전에 미리 예약해서 다행히 대기 필요없다.샤브샤브 가게 근처에 바로 고기 파는 시장이다. 모두 시장에서 직접 재고해 온 것으로, 원재료가 너무 신선하고 깨끗하다.평소에 매운 것 즐겨먹었던 정은은 가끔 담백한 샤브샤브를 먹으니 꽤 맛있다고 생각했다.특히 이 가게의 국물은 소뼈로 끓여냈다.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자, 고기를 넣지 않아도 향기가 퍼졌다.수민은 앉자마자 메뉴를 가져왔다.“이거, 이거, 그리고 이거... 각각 2인분씩 주세요.”그녀는 이번 주에 야근을 하느라 살이 많이 빠졌다. 모처럼 나와서 긴장을 푸는 것이니 당연히 제대로 먹어줘야 했다.‘살이 쪄도 괜찮아. 운동으로 살을 뺄 수 있지만, 절대로 굶을 순 없어!’정은은 한 상 가득 올라온 고기와 야채를 보고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이거 다 먹을 수 있을까?”‘두 사람이 이렇게 많이 시키다니. 낭비가 아닐까?’수민은 눈썹을 치켜세우다 무언가를 떠올렸다.“너한테 말하는 걸 깜박했네. 방금 큰어머니가 나더러 우리 오빠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어. 이번 주에 집에 돌아오라고 말이야. 방금 전화할 때, 오빠는 마침 쉬고 있다고 했고, 나도 오빠를 이곳으로 불렀어. 에헴... 정은아, 내가 제멋대로 결정했다고 날 탓하는 거 아니지?”정은은 국물을 마시다가 이 갑작스러운 소식에 기침을 하더니 사레가 들릴 뻔했다.수민은 정은의 반응이 이렇게 큰 것을 보고 약간 영문을 몰랐다.“너는 우리 오빠는 친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놀라는 거지?”‘두 사람은 이웃인 데다가, 지금은 또 같은 실험실에서 과제를 하고 있으니 매일 붙어 다니는 거랑 다름이 없잖아? 그럼 사이가 엄청 친할 텐데.’그리고 수민이 재석을 부르는 것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정은이 있는 기회
재석도 차를 몰고 왔고, 두 사람은 또 같은 층에서 지내고 있었기에 정은은 그와 함께 돌아갔다.낡은 아파트 단지에는 차고가 없어서, 재석은 맞은편 백화점에 가서 차를 세운 다음 다시 아파트로 걸어와야 했다.두 사람이 백양나무 숲을 지날 때,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버들개지가 하늘에서 하늘하늘 춤을 추니 마치 흩어진 하얀 눈송이와 같았다.“에취.”정은은 저도 모르게 재채기를 했다.“미안해요, 난... 에취.”연이어 재채기를 하자, 재석은 정은에게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더니 그녀에게 건네주었다.“먼저 코를 가리고 숨을 너무 크게 쉬지 마.”재석이 시킨대로 하자, 정은도 재채기를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집으로 돌아갔다.문 앞에서 작별인사를 한 후, 정은은 재빨리 문을 닫고 몸을 돌려 재채기를 여덟 번이나 했다.겨우 멈췄지만 코가 새빨개졌다.J시는 뭐든 다 좋았지만, 매년 떠도는 버들개지 때문에 정은은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이곳에서 7, 8년 넘게 지냈어도 그녀는 여전히 습관이 되지 않았다.10분 뒤, 정은은 뜨거운 물 한 잔을 들이켜고 나서야 좀 편안해졌다.그녀는 냉장고를 열고 식재료를 꺼내며 내일 실험실로 가져갈 점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음식을 다 포장한 다음 주방을 정리하니 벌써 11시가 다 되었다.정은은 쓰레기통을 바라보았다. 안에는 계란 껍데기와 썩은 채소가 있었기에 그녀는 한숨을 쉬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쓰레기를 버렸다.돌아오는 길, 미처 계단에 들어서지도 않았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응, 선우야, 무슨 일 있어?”[정은 누나, 조심해요! 지금 도겸 형이 누나 집으로 찾아갔는데, 저도 막을 수가 없었어요! 형 오늘 술을 좀 많이 마셨으니 누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정은은 경계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대답하기도 전에 한 검은 그림자가 갑자기 튀어나왔다.“아...”“정은아...”남자는 온몸에 술 냄새를 풍기며, 취한 얼굴이 벌겋게
도겸은 손을 거두어들이며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했다.“미안해, 정은아. 나, 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나,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난 단지 네가 내 곁에서 멀리 도망치는 걸 원하지 않았을 뿐이야...”“내 몸에 손 대지 마!” 정은은 머리를 안으며 아파서 눈물까지 흘리기 직전이었다.이때, 선우가 마침내 도착했다. 현빈도 그와 함께 찾아왔다.“괜찮아?” 현빈은 도겸을 넘어 정은의 곁으로 걸어갔다. 그의 말투는 무척 다급했다.선우의 전화를 받았을 때, 현빈은 마침 비즈니스 연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변이 없는 한, 그는 오늘 저녁 60억에 달하는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그러나 정은에게 무슨 일 생길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현빈은 직접 손님을 내팽개치며 자리를 떠났다.그렇게 미친 듯이 액셀을 밟으며 10분 만에 달려온 그는 마침 골목 어귀에서 선우를 만났다.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은의 집으로 곧장 달려갔다.아니나 다를까, 도겸은 술주정을 부리고 있었다.정은은 도겸의 접근을 원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현빈의 호의를 거절했다.뒤로 물러서자 남자에게서 나는 그 독특한 향기가 좀 옅어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이제 괜찮아요.”현빈은 정은의 어지러운 머리카락에 시선을 돌렸다. ‘두피가 빨개졌는데도 능청스럽게 괜찮다고 말하다니.’그는 마음이 아팠다.“넌 여자야, 그렇게 강인한 척할 필요가 없단 말이야!”정은이 대답하기도 전에, 도겸이 먼저 소리를 질렀다.“심현빈,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내 입이 나한테 달렸으니, 나도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네가 뭘 어쩔 건데?”도겸은 펄쩍펄쩍 날뛰고 있었지만, 그에 비해 현빈은 무척 평온했다. 그러나 현빈의 눈빛은 어둡고 무서웠다.도겸은 차갑게 선우를 바라보았다.“이런 자식을 불렀다니, 이게 무슨 뜻이야? 날 무시하는 거야? 아니면 이 자식이 내 앞에서 내 여자를 꼬시는 것을 지켜보라는 거야?
도겸은 몸이 비틀거렸다.“그게 무슨 뜻이야?”“내 말을 정말 모르는 거야? 하긴, 넌 네가 엄청 잘 숨겼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정은 씨는 바보가 아니잖아.”도겸은 오히려 그 말을 왜곡했다. 그는 현빈의 옷깃을 잡더니 눈빛이 매서웠다.“너 도대체 정은에게 무슨 말을 한 거야?!”“허, 넌 아직도 너희들이 헤어진 이유를 모르는 것 같군.”“네가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나야 당연히 알지...”“닥쳐!”현빈은 도겸을 뿌리치더니 자신의 옷깃을 정리했다. 그리고 차갑게 도겸을 바라보았다.“지금 네 꼴 좀 봐라, 집이 없는 개와 다름이 없잖아...”이때 선우가 소리를 쳤다.“그만 좀 하세요! 형들 말 좀 작작 하면 죽는 거예요?! 친구들끼리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거냐고요?”도겸과 현빈은 동시에 말했다.“누가 이 자식과 친구라는 거야?!”“난 이런 친구 없어.”선우는 말문이 막혔다.도겸은 현빈을 가리키며 경고했다.“정은에게서 떨어져. 그렇지 않으면...”“그렇지 않으면 어쩔 건데?”“나도 내가 무슨 짓 할지 몰라!”현빈이 말했다.“여기서 나한테 독설을 퍼부어도 소용없어.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정은 씨에게 고백을 할 거야. 하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실은 바로--”그는 또박또박 말했다.“네가 이미 정은 씨를 잃게 되었다는 거지! 돌이킬 수도 없고, 만회할 수도 없어. 만약 정은 씨의 혐오를 더 사고 싶지 않다면, 자각 좀 해. 더 이상 매달리지 말고. 그렇지 않으면 정은 씨를 점점 더 멀리 밀어낼 뿐이야.”현빈은 말을 마치고 도겸을 넘어 선우의 어깨를 두드렸다.“네가 수고 좀 해. 다시는 술주정 부리지 못하게 잘 지켜보고.”말을 마치며 현빈은 성큼성큼 떠났다.선우는 제자리에 서서 넋을 잃은 도겸을 바라보더니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당초 왜 정은 누나를 그렇게 대한 거야?’“선우야...”“도겸 형.” 선우는 얼른 앞으로 가서 도겸을 붙잡았다.“우리 그만 돌아갈까요?
도겸은 들은 체 만 체했다.계단에 도착할 때, 선우는 그제야 쫓아오더니 도겸을 붙잡았다.“형, 그만 떠들고 이제 그만 돌아가요! 어차피 정은 누나도 문을 열어주지 않을 거예요...”“정은에게 줄 게 있어.”선우는 어리둥절해했다.“뭔데요?”도겸은 주머니에서 알레르기를 치료하는 비염 연고 한 통을 꺼냈다.“요즘 알레르기 때문에 재채기를 할 거야. 이걸 정은에게 가져다줘야지...”그 순간, 선우는 갑자기 코끝이 찡했다.‘그렇게 사랑했던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그래.”도겸은 고개를 끄덕였다.“난 정은에게 약을 주러 왔어... 이것만큼은 꼭 정은에게 줘야 해... 꼭...”말하면서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도겸은 눈앞이 어두워지며 몸도 나른해졌다.선우는 얼른 그를 부축하며 차로 끌고 갔다. 그러나 골목 어귀에 주차된 SUV를 바라보며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별장에 도착할 때, 시간은 이미 새벽 1시였다.가정부가 문을 열자, 선우는 얼른 말했다.“좀 부축해줘요! 형은 술에 취했으니까 이따가 해장국 좀 만들어 주세요...”부탁하고 나서야 선우는 차를 몰고 떠났다.연희는 이미 침대에 누웠다. 한창 자고 있을 때, 갑자기 아래층에서 소리가 들려왔다.일어나기 싫었지만 도겸을 위해, 재벌 집안으로 시집가기 위해 연희는 졸음을 참으며 외투를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가서 물 좀 따라줘요. 내가 오빠 부축할 테니까.”연희는 앞으로 다가가더니 도겸을 부착하려 했다.“하지만 작은 사모님, 지금 몸이 불편하시잖아요...”가정부는 임신한 연희에게 무슨 일 생길까 봐 걱정했다.성인 남자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연희는 짜증을 내며 손을 흔들었다.“내 몸은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이모님은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그럼 알겠어요.” 왕미자는 이 말을 잘 듣고 도겸을 그녀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연희는 도겸을 부축하자마자 하마터면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남자는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해서 지금 모든 무게가 그녀에게 떨어졌다.“잠, 잠
재석은 멈칫했다.진욱은 호들갑을 떨었다.“내가 맞혔구나! 이야, 조 교수, 너한테도 이런 날이 있다니!”“정은이 때문이지?”재석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그게 무슨 헛소리야?”“쯧쯧, 나한테 거짓말 하지 마. 조 교수는 남을 속일 수 있어도, 평소 늘 함께 지낸 날 속일 수 없잖아?”“꺼져, 누가 너와 함께 지냈단 거야?”“헤헤, 넌 당연히 나와 함께 하고 싶지 않겠지, 왜냐하면 넌 정은이를 좋아하니까.”재석은 눈빛이 싸늘해졌다.“이런 농담 함부로 하지 마. 난 남자라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정은이는 달라. 여자아이는 항상 이런 일에서 더 손해를 보니까. 정은이 아직 학생이니 너 이상한 소리하고 다니지 마.”“이것 좀 봐, 지금 정은이를 이렇게 보호하고 있는데도 발뺌하고 있다니?”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안심해, 나도 이 정도는 잘 알고 있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하지 말아야 할지 다 안다고. 내가 어떻게 정은이를 해칠 수 있겠어?”재석은 한숨을 돌렸다.“알면 됐어.”“이제 솔직하게 말해도 되겠지?”“그런 거 없어.”“정은이 요즘 널 무시한 거야? 너 설마 정은이를 화나게 했니?”재석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런 적 없는 것 같은데?”오늘 아침에도 웃으며 자신에게 인사했으니, 삐진 것 같지 않았다.“그럼... 갑자기 너와 거리를 둔 거야?”“그것도 아니야...”재석은 고개를 저었다.“사실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어.”“아! 알았다! 너랑 갈등이 없다면, 다른 사람과 무슨 일이 생긴 거지! 그래서 네가 이렇게 우울하고, 슬프고, 의심하고...”“닥쳐.”“네네!” 진욱은 손가락을 튕겼다.“바로 이 반응이야! 내가 또 알아맞혔군!”“그리고 그 사람은 분명히 남자일 거야! 심지어 모든 면이 아주 훌륭한 남자. 그래서 네가 위기감을 느끼게 된 거지!”재석은 할 말을 잃었다.“조 교수.” 진욱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너도 이제 정신 좀 차려. 정은이를 좋아한다면 대담하게 고백을 해
휴일이 또다시 찾아오자, 현빈은 아침 일찍 차를 몰고 정은을 데리러 왔다.오늘은 이원에 가는 날이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지금 정은이 쉴 때 와서 자신들과 함께 있어주기를 바랐다.이번에는 미리 약속을 잡았기에, 일어나자마자 두 노인은 현빈에게 얼른 출발하라고 재촉했다.정은도 당연히 기뻤다. 두 노인은 친절하고 자상했으며, 그녀를 아주 다정하게 대했으니, 정은은 또 어떻게 두 사람의 호의를 거절할 수 있겠는가?그래서 알람이 울리자마자 얼른 일어나서 세수를 했다.또 설탕이 적고 먹기에 편한 간식을 만들어 두 노인에게 가져다주려 했다.8시, 현빈은 제시간에 위층으로 올라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서 슬리퍼를 갈아신은 후,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나 아직 아침을 먹지 않았는데.”정은은 의혹을 느꼈다.“먹을 거 있어?”“네.”저번에는 샌드위치, 이번에는 표고버섯과 고기로 만든 만두였다.현빈이 물었다.“네가 직접 만든 거야?”“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왜요? 맛 없어요?”“아니... 너무 맛있어서.”정은은 참지 못하고 웃기 시작했다.칭찬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녀도 예외는 아니었다.나갈 때, 현빈은 자연스럽게 물건을 들어줬다.문을 연 순간, 정은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얼른 입을 열었다.“잠깐만 기다려요.”현빈은 제자리에 서서 정은이 베란다로 달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화분을 안으로 옮긴 뒤 또 베란다 문을 꼭 닫고 나서야 안심하고 떠났다.“자, 갑시다.”현빈은 고개를 끄덕였다.바로 이때, 재석이 맞은편에서 나왔는데, 세 사람은 서로 인사를 했다.“선배님, 좋은 아침이에요!”현빈은 웃으며 말했다.“어떻게 매번 우리 두 집이 동시에 문을 여는 거죠? 너무 공교롭지 않아요?”‘우리 두 집?’재석은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그는 정은의 표정을 살펴보았는데, 현빈이 아침 일찍 그녀의 집에 나타난 것을 이미 받아들인 것 같았다.‘예전에 정은이는 분명히 심현빈을
“그래요? 그런데 왜 음료수와 같은 맛이죠? 새콤달콤하고 심지어 복숭아향까지 나잖아요.” 경혜의 볼은 이미 홍조를 띠고 있었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이런 게 싫어요?”도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경혜도 개의치 않고 자신에게 한 잔 더 따랐다.환경이 바뀐 데다가 또 음악이 분위기를 더해주었는지, 남자는 많이 편해졌고, 기분도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그래서 경혜가 입을 열자, 도겸도 그녀를 무시하지 않았다.드디어 ‘모노드라마’가 아니었다.바로 이때, 떠들썩한 음악소리는 더욱 커졌고, 불빛도 현란해졌다. 댄스풀에 있던 남녀는 음악리듬에 따라 춤을 추며 마음껏 몸을 흔들었다.경혜는 눈앞이 밝아지더니 이런 분위기에 젖어 뜻밖에도 주동적으로 도겸의 손을 잡았다.“우리도 춤추러 가요. 네?!”그녀는 취한 듯 표정이 약간 망연했지만, 두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지금 기대에 찬 눈빛으로 도겸을 간절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도겸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여 경혜에 의해 댄스풀로 끌려갔다.경혜는 춤을 출 줄 몰라 그저 음악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그녀의 서투른 춤사위에 도겸은 좀 우습다고 느꼈다.“왜 웃어요?” 경혜는 우울해졌다.남자의 웃음은 더욱 환해졌다.그녀는 화가 났다.“안 되겠어요, 나 혼자 이렇게 웃길 순 없으니까 도겸 씨도 같이 춰요!”알코올의 자극을 받은 경혜는 대담하게 도겸의 손을 잡고 마음대로 흔들었다.남자가 반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며 경계는 점차 대담하게 도겸의 손을 들고 빙글빙글 돌았다.도겸은 비록 나른해서 흥이 나지 않았지만, 경혜를 막지 않았다.경혜는 처음에는 좀 불안했지만, 나중에는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칠 때까지 음악의 세계에 완전히 빠져든 것 같았다.불빛이 희미하며 음악이 떠들썩했다.어느새 경혜와 도겸의 몸이 맞닿았고, 남자의 몸에서 은은한 술 향기가 전해왔다. 그 사이, 경혜는 더 취한 것 같았다.고개를 들자 경혜의 심장은 갑자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도겸의 눈
“그럼 마음대로 시킬게요!”“음.”“사장님, 이거랑 이거...”경혜는 많은 음식을 주문했는데, 딱 봐도 이곳의 단골손님이었다.“나만 믿어요, 여긴 정말 맛있으니까요. 고급 레스토랑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여자는 극구 추천을 하면서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도겸은 가끔 응답했지만, 태도가 미적지근했다.그을리고 타는 바비큐 냄새에 목이 간지러웠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도 그를 불편하게 했다. 올라온 바비큐는 한 번만 봐도 입맛을 전부 잃을 정도였다.‘전에 정은이랑 처음 연애할 때도 포장마차에 와서 자주 먹었는데... 사람이 틀리니 입맛도 없는 것 같아.’경혜는 고기 하나 들고 웃으며 도겸에게 건네주었다.“이것 좀 먹어봐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예요.”도겸은 받지 않았다.그녀는 잠시 멈칫했다.“이런 거 못 먹는 거예요? 미안해요, 내가 생각이 짧았네요.”경혜는 얼른 꼬치구이를 내려놓더니 다급하고 궁색하게 입을 열었다.“그럼 우리 장소를 바꿀까요? 도겸 씨가 정해요.”“아니야, 나 요즘 위장병이 도져서 입맛이 없어, 너 먹어.”“그렇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이렇게 많이 시켰다니...”도겸은 이미 인내심을 잃었다.“남은 건 그냥 버려.”결국 경혜는 몇 개밖에 먹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버렸다.계산을 마친 뒤, 사장이 와서 테이블을 치웠는데, 이 상황을 보고 혀를 찼다.“요즘 젊은이들도 참, 먹을 수 없으면 이렇게 많이 주문하지 말든가. 돈이 있다고 음식을 함부로 낭비하다니... 쯧쯧...”도겸은 차로 경혜를 학교로 데려다 주었는데, 도중에 표정이 담담하고 말도 많지 않았다.가끔 경혜가 무엇을 물었을 때만 겨우 대답을 했다.후에 경혜 자신도 침묵했다.주동적으로 화제를 이끄는 사람이 없자, 차 안의 분위기가 다소 어색했다.도겸은 앞을 바라보며 전혀 아무렇지 않는 것 같았다.경혜는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바깥의 풍경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잠시 멍을 때렸다.한 술집을 지나자, 경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시
“도겸 씨, 왜 그래요?” 경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도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더니, 질문과 답답함을 억눌렀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동안 연기를 해왔으니 지금도 계속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면, 정은은 또 도겸을 피할 것이고, 이렇게 가끔 만나서 인사를 건네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이다.경혜는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정은의 말을 들은 후부터, 남자는 정신이 반쯤 나갔다는 것을.정은은 고개를 돌려 민지와 서준을 보았다.“시간도 늦었으니 우리 이제 돌아갈까?”“네!” 민지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곧 9시가 다 되어 가네요. 빨리 가요. 너무 추워요...”말하면서 손을 비비며 입김을 불었다.그녀는 사실 도겸이 매우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한겨울, 영하의 온도에 스포츠카를 운전하며 멋을 부릴 수 있다니.‘사람을 기다린다고 해도 그냥 차에 들어가서 기다리면 되잖아? 굳이 차에 기대서 멋을 부릴 필요가 있을까? 안 추워? 쯧쯧... 이런 재벌 집 도련님들은 도대체 매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우리 먼저 갈게. 넌 네 남자친구와 천천히 데이트해. 안녕.”민지는 도겸의 정곡을 쿡쿡 찔렀다.정은이 택시에 탄 것을 지켜보다가 차가 사라질 때에야 도겸은 시선을 거두었고, 동시에 경혜의 허리를 안고 있던 손도 거두었다.경혜는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비록 마음속은 이미 씁쓸할 정도로 괴로웠지만, 여전히 웃음을 유지했다.아파도 웃어야 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경혜가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처음에 두 사람의 거래가 바로 도겸이 돈을 내고 경혜가 여자친구인 척 연기하는 것이었다.그러니 그녀는 도겸 앞에서 질투하는 감정을 조금도 감히 드러내지 못했다.경혜는 도겸이 정은을 속인 것처럼 도겸을 속여야 했다.정말 아이러니하고 우스운 일이었다.정은이 떠나자, 도겸도 계속 여기에 남을 필요가 없었다.그는 차를 타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난 특별히 화
민지가 대답했다.“잘 아는 편도 아니야. 하지만 재운이는 사람이 꽤 착하잖아. 지난번에 식물 기지에서도 남들이 수수방관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나서서 우릴 도와주었고. 난 다 기억하고 있다고!”“기억력이 좋아서 좋겠다.”“뭐?”“넌 남을 칭찬할 때, 항상 ‘좋은 사람’이란 말을 쓰더라? 그게 무슨 칭찬이지?”“아니... 너 뭐 잘못 먹었어?”맞은편의 도겸은 차 옆에 기대어 손목 시계를 확인했다.마치 사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경혜도 그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고 곧 나왔다.종종걸음으로 달려왔기에, 경혜의 볼이 빨갰고 숨이 가빴다.도겸을 만나기 위해 그녀는 일부러 통통해 보이는 패딩을 입지 않고, 몸매가 돋보이는 코트로 갈아입었다.뿐만 아니라, 경혜는 평소에 머리를 묶지 않았는데, 오늘은 머리를 걷어 올려 똥머리로 묶은 뒤, 진주 머리핀을 장식했다. 시원시원하고 대범해 보이며, 귀엽고 깜찍했다.“오래 기다렸어요? 미안해요. 나올 때 스카프를 잊어버려서 다시 기숙사에 돌아갔거든요.”도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얼굴에 아무런 정서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는 것 같았다.눈길도 자꾸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경혜는 주위를 힐끗 훑어보더니, 정은을 본 순간에야 깨달았다.그렇지 않으면 도겸은 늦은 밤에 그녀에게 전화를 할 리가 없었다.‘그곳도 학교 앞에서 만나자니? 내가 보고 싶어서 찾아올 리가. 허... 지금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먼저 시작하지.’경혜는 주먹을 꽉 쥐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다가 곧 다시 환한 웃음을 지으며 정은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공교롭게 여기서 만나네, 정은아.”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여기에 나만 있는 게 아니잖아.”경혜는 멈칫하더니 마치 그제야 서준과 민지를 본 것 같았다.“너희들도 있었구나, 정말 반가워.”민지가 말했다.“이렇게 말하니 마치 우리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 같잖아? 나와 서준이는 바로 정은 언니 옆에 서 있는데, 그런데도 보이지 않은 거야?”“미안해, 정말,
민지는 세입자들에게서 인간성을 엿볼 수 있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쟁과 갈등에도 익숙해졌다.외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서준이 말했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는 절대적으로 심플한 일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고, 또 다른 요소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사상처럼, 세계는 전체이고, 개체 간에 서로 영향을 미치는 거지...”민지는 머리가 아팠다.“넌 생물 대신 철학을 연구해야 했어.”“네 닭다리나 먹어!”“흥, 원래 먹으려 했어! 그리고, 이건 네가 허락한 거야!”‘아싸, 이제 실컷 먹을 수 있겠어.’서준은 말문이 막혔다....다 먹고 정은은 계산을 했다.세 사람은 직접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산책을 하며 소화했다.“우리 같은 방향에 살아서 다행이야. 그리 멀지도 않고. 조금 있다가 학교 앞에서 택시 잡고 돌아갈까? 어차피 너도 가는 길이니 우릴 태워다 줄 수 있잖아! 헤헤!”“너 돈 많잖아? 왜 택시비가 아까운 거야?”전에 수억 원짜리 차를 선물로 준다고 한 사람이, 지금은 몇 천원 안 되는 택시비를 절약하려 했다.“돈 많으면 왜? 내 돈도 다 돈이야! 우리 아빠는 어릴 때부터 나에게 돈을 벌 줄 알고 돈을 절약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어. 절약할 수 있으면 절약하고, 쓸 수 있지만 낭비해서는 안 돼!”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거봐, 정은 언니도 실험실을 짓는 데 그렇게 많은 돈을 썼지만, 혼자 아파트에서 살고 있잖아. 이게 뭔 줄 알아?”정은과 서준은 동시에 민지를 바라보았다.그녀는 가슴을 펴며 말했다.“돈을 알뜰히 쓰는 거야. 전부 써야 할 곳에 썼으니까!”“그래, 내가 잘못했어. 오늘 정말 좋은 가르침을 받았네.”“흥! 쮼, 넌 아직 너무 어려서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아!”“내가 어리다고?”이때 서준은 갑자기 멈추었다.민지도 웃음을 거두었다.“왜 그래?” 정은은 두 사람이 주시하는 방향을 바라보며 참지 못
그 닭다리를 다 먹은 뒤, 민지는 만족스럽게 트림을 했다.“아! 너무 행복해! 흑흑... 난 소원이 이것밖에 없어. 맛있는 것만 먹을 수 있으면 되니까. 물론 미식가로 되면 더 좋고.”민지의 생각은 아주 간단했다. 그녀는 학술을 좋아하는 동시에 미식도 좋아했다. 이 두 사물을 결합하면 바로 민지가 가장하고 싶은 일이었다.“정은 언니는요?” 민지는 갑자기 정은을 쳐다보았다.“언니는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갑자기 이상과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자 정은은 멍해졌다.생각하다 천천히 대답했다.“지금 하고 있는 일이 바로 내 꿈이야.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면...'정은은 잠시 멈추었다.“오 교수님과 같은 연구학자.”“그런데...”민지는 갈등을 드러냈다.“교수님은 확실히 위대하시지만 때로는 난 교수님이 너무 외롭다고 생각해요.”오미선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과학 연구에 바쳤다.이런 추구가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혼자 병원에 외롭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민지는 가슴이 아팠다.“예전에 난 교수님께 물어본 적이 있어. 이 선택을 후회하시냐고. 교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셨는지 아니?”민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얼른 말해요, 언니!”서준도 정색을 했다.“사람의 일생은 원만하기 어려우며, 항상 우왕좌왕한다고 말씀하셨어. 그것은 우리의 정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야. 그러나 만약 제한된 정력을 끝없는 과학 연구에 투입할 수 있다면, 교수님에게 있어서 이건 또 다른 의미의 행복이기도 하지.”비록 개인의 행복을 잃었지만, 오미선은 전심전력으로 연구에 몰두했다.“그런데... 이건 너무 극단적인 선택 아닌가요?” 민지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정은은 감탄했다.“아마도. 하지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또한 선택도 다르잖아. 자신의 생각을 따라 확고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만 하면, 후회도 아쉬움도 없는 삶을 살 수 있어.”“그럼 정은 언니는 결혼할 거예요?”정은은 민지가
민지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내일 2킬로미터 더 달려야 한다는 말을 뒤로 했다.그리고 정은을 안고 애완동물처럼 깡충깡충 뛰었다.“사랑해요, 정은 언니, 내가 그 가게의 닭볶음탕을 먹고 싶어한 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또 어떻게 알았어요?”정은은 민지가 자신을 안도록 내버려두더니 웃으며 말했다.“네가 전에 한 번 말했잖아, 그래도 기억해뒀지. 그리고 나도 그 닭볶음탕이 도대체 얼마나 맛있는지 궁금하네.”“날 믿어요, 절대로 언니를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까. 그 가게는 맛이 아주 좋아요!”맛있는 음식을 발견하는 것은 아마도 먹방들의 타고난 능력일 것이다. 민지가 추천한 것이라면, 대부분 엄청 맛있는 음식이었다.이 레스토랑의 주방장은 아주 정통적인 닭볶음탕을 만들었다.또 J시 사람의 입맛을 결합하여 간단하게 개량했기에 엄청 고소하고 맛있었다.닭고기가 부드러우며 매콤한 향기까지 곁들이니, 생각만 해도 민지는 이미 침을 삼키기 시작했다.요 며칠, 조깅의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해 서준은 민지의 식단을 엄격히 통제했다. 매일 그 싱겁고 무미건조한 음식들만 먹으니 민지는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비록 저녁에 집에 돌아가면 몰래 간식을 훔쳐 먹었지만, 간식이 어떻게 맛있는 요리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정은 언니, 완전 사랑해요.”마침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자, 민지는 감동에 눈물을 글썽였다.“야, 내가 언제 널 학대했어?”“그럼 조깅 취소해.”“그래, 그럼 너도 마음의 준비를 해. 내년 건강검진 보고서에 ‘지방간’이라는 결과가 또 나올 테니까.”‘됐어, 건강을 위해서라도 말을 말자. 난 그래도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사람이니까.’서준은 민지의 다이어트를 돕기 위해 매일 날이 밝기도 전에 찾아와서 문을 두드려 그녀를 불렀다.사실 민지는 가끔 서준의 얼어붙은 볼과 코를 보고, 또 아직 이불 속에 틀어박혀 쿨쿨 자는 자신을 생각하면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다.‘이건 죽을 죄야! 한겨울에 누가 더 자고 싶지 않겠어?’‘우리 아빠도 서준처럼 매일 일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