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정상이었지만, 두 볼에 홍조가 나타나더니 점차 붉어졌고, 지금은 귀까지 빨개졌다.1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재석의 얼굴에 이런 변화가 생기자, 정은은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차 안이 너무 답답해서 그런가 봐.”정은은 재빨리 자신의 차창을 내렸다.“이제 좀 괜찮아요?”“응.”...재석은 정은을 데려다준 다음, 최근에 시작한 실험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단 것을 떠올리며 다시 실험실로 돌아갔다.정은은 소파에 누웠다. 실험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는 기쁨이 지나간 후, 그녀는 온몸이 나른해져 소파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서 차 안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모든 장면이 유난히 선명하게 나타났다. 재석의 뼈마디가 분명한 손이 자신의 머리 위에 떨어졌을 때, 그 부드러운 힘은 정은으로 하여금 자신이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응원을 받고 있다는 착각이 들게 했다...‘착각이 아닐 수도 있겠지? 선배님은 정말 날 응원하고 있어. 하지만... 그뿐이야.’정은은 소파에 누워 있었기에 눈을 살짝 뜨면 바로 천장이 보였다.전의 세입자는 이곳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주방 연기에 그을려 누렇게 변한 흔적도 있었고, 진흙이 튄 흔적도 있었다.정은은 청소를 했지만, 벽지를 붙이든 조명기구로 가리든 그 더러운 흔적들은 여전히 존재하며 지울 수가 없었다.언뜻 보기에는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관찰하거나, 불빛을 밝게 켜면 모든 추악함이 드러날 것이다.남에게 형편없는 자신을 들켜 미움받기보다는 처음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낫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자신의 결점도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이 점을 깨닫자, 정은은 숨을 내쉬며 자신의 가슴을 만졌다.‘그래, 이제 심장도 두근거리지 않아. 정상으로 돌아왔어.’그녀는 일어나서 욕실로 걸어갔다.‘일단 샤워하고 푹 자자. 무슨 일 있으면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고! 내일 말하고 싶지 않으면 모레가 있잖아. 모레, 글피, 그렇게 하루하루 미루면서 날
말을 마치자, 수민이 계속 물어볼까 봐 두려운 듯 정은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아, 배고프다. 레스토랑 예약했죠? 얼른 밥 먹으러 가자.”도심에 샤브샤브 맛집이 하나 있는데, 인기가 많아서 주말에 항상 줄을 엄청 섰다. 수민은 2주전에 미리 예약해서 다행히 대기 필요없다.샤브샤브 가게 근처에 바로 고기 파는 시장이다. 모두 시장에서 직접 재고해 온 것으로, 원재료가 너무 신선하고 깨끗하다.평소에 매운 것 즐겨먹었던 정은은 가끔 담백한 샤브샤브를 먹으니 꽤 맛있다고 생각했다.특히 이 가게의 국물은 소뼈로 끓여냈다.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자, 고기를 넣지 않아도 향기가 퍼졌다.수민은 앉자마자 메뉴를 가져왔다.“이거, 이거, 그리고 이거... 각각 2인분씩 주세요.”그녀는 이번 주에 야근을 하느라 살이 많이 빠졌다. 모처럼 나와서 긴장을 푸는 것이니 당연히 제대로 먹어줘야 했다.‘살이 쪄도 괜찮아. 운동으로 살을 뺄 수 있지만, 절대로 굶을 순 없어!’정은은 한 상 가득 올라온 고기와 야채를 보고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이거 다 먹을 수 있을까?”‘두 사람이 이렇게 많이 시키다니. 낭비가 아닐까?’수민은 눈썹을 치켜세우다 무언가를 떠올렸다.“너한테 말하는 걸 깜박했네. 방금 큰어머니가 나더러 우리 오빠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어. 이번 주에 집에 돌아오라고 말이야. 방금 전화할 때, 오빠는 마침 쉬고 있다고 했고, 나도 오빠를 이곳으로 불렀어. 에헴... 정은아, 내가 제멋대로 결정했다고 날 탓하는 거 아니지?”정은은 국물을 마시다가 이 갑작스러운 소식에 기침을 하더니 사레가 들릴 뻔했다.수민은 정은의 반응이 이렇게 큰 것을 보고 약간 영문을 몰랐다.“너는 우리 오빠는 친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놀라는 거지?”‘두 사람은 이웃인 데다가, 지금은 또 같은 실험실에서 과제를 하고 있으니 매일 붙어 다니는 거랑 다름이 없잖아? 그럼 사이가 엄청 친할 텐데.’그리고 수민이 재석을 부르는 것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정은이 있는 기회
재석도 차를 몰고 왔고, 두 사람은 또 같은 층에서 지내고 있었기에 정은은 그와 함께 돌아갔다.낡은 아파트 단지에는 차고가 없어서, 재석은 맞은편 백화점에 가서 차를 세운 다음 다시 아파트로 걸어와야 했다.두 사람이 백양나무 숲을 지날 때,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버들개지가 하늘에서 하늘하늘 춤을 추니 마치 흩어진 하얀 눈송이와 같았다.“에취.”정은은 저도 모르게 재채기를 했다.“미안해요, 난... 에취.”연이어 재채기를 하자, 재석은 정은에게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더니 그녀에게 건네주었다.“먼저 코를 가리고 숨을 너무 크게 쉬지 마.”재석이 시킨대로 하자, 정은도 재채기를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집으로 돌아갔다.문 앞에서 작별인사를 한 후, 정은은 재빨리 문을 닫고 몸을 돌려 재채기를 여덟 번이나 했다.겨우 멈췄지만 코가 새빨개졌다.J시는 뭐든 다 좋았지만, 매년 떠도는 버들개지 때문에 정은은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이곳에서 7, 8년 넘게 지냈어도 그녀는 여전히 습관이 되지 않았다.10분 뒤, 정은은 뜨거운 물 한 잔을 들이켜고 나서야 좀 편안해졌다.그녀는 냉장고를 열고 식재료를 꺼내며 내일 실험실로 가져갈 점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음식을 다 포장한 다음 주방을 정리하니 벌써 11시가 다 되었다.정은은 쓰레기통을 바라보았다. 안에는 계란 껍데기와 썩은 채소가 있었기에 그녀는 한숨을 쉬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쓰레기를 버렸다.돌아오는 길, 미처 계단에 들어서지도 않았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응, 선우야, 무슨 일 있어?”[정은 누나, 조심해요! 지금 도겸 형이 누나 집으로 찾아갔는데, 저도 막을 수가 없었어요! 형 오늘 술을 좀 많이 마셨으니 누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정은은 경계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대답하기도 전에 한 검은 그림자가 갑자기 튀어나왔다.“아...”“정은아...”남자는 온몸에 술 냄새를 풍기며, 취한 얼굴이 벌겋게
도겸은 손을 거두어들이며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했다.“미안해, 정은아. 나, 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나,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난 단지 네가 내 곁에서 멀리 도망치는 걸 원하지 않았을 뿐이야...”“내 몸에 손 대지 마!” 정은은 머리를 안으며 아파서 눈물까지 흘리기 직전이었다.이때, 선우가 마침내 도착했다. 현빈도 그와 함께 찾아왔다.“괜찮아?” 현빈은 도겸을 넘어 정은의 곁으로 걸어갔다. 그의 말투는 무척 다급했다.선우의 전화를 받았을 때, 현빈은 마침 비즈니스 연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변이 없는 한, 그는 오늘 저녁 60억에 달하는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그러나 정은에게 무슨 일 생길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현빈은 직접 손님을 내팽개치며 자리를 떠났다.그렇게 미친 듯이 액셀을 밟으며 10분 만에 달려온 그는 마침 골목 어귀에서 선우를 만났다.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은의 집으로 곧장 달려갔다.아니나 다를까, 도겸은 술주정을 부리고 있었다.정은은 도겸의 접근을 원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현빈의 호의를 거절했다.뒤로 물러서자 남자에게서 나는 그 독특한 향기가 좀 옅어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이제 괜찮아요.”현빈은 정은의 어지러운 머리카락에 시선을 돌렸다. ‘두피가 빨개졌는데도 능청스럽게 괜찮다고 말하다니.’그는 마음이 아팠다.“넌 여자야, 그렇게 강인한 척할 필요가 없단 말이야!”정은이 대답하기도 전에, 도겸이 먼저 소리를 질렀다.“심현빈,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내 입이 나한테 달렸으니, 나도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네가 뭘 어쩔 건데?”도겸은 펄쩍펄쩍 날뛰고 있었지만, 그에 비해 현빈은 무척 평온했다. 그러나 현빈의 눈빛은 어둡고 무서웠다.도겸은 차갑게 선우를 바라보았다.“이런 자식을 불렀다니, 이게 무슨 뜻이야? 날 무시하는 거야? 아니면 이 자식이 내 앞에서 내 여자를 꼬시는 것을 지켜보라는 거야?
도겸은 몸이 비틀거렸다.“그게 무슨 뜻이야?”“내 말을 정말 모르는 거야? 하긴, 넌 네가 엄청 잘 숨겼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정은 씨는 바보가 아니잖아.”도겸은 오히려 그 말을 왜곡했다. 그는 현빈의 옷깃을 잡더니 눈빛이 매서웠다.“너 도대체 정은에게 무슨 말을 한 거야?!”“허, 넌 아직도 너희들이 헤어진 이유를 모르는 것 같군.”“네가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나야 당연히 알지...”“닥쳐!”현빈은 도겸을 뿌리치더니 자신의 옷깃을 정리했다. 그리고 차갑게 도겸을 바라보았다.“지금 네 꼴 좀 봐라, 집이 없는 개와 다름이 없잖아...”이때 선우가 소리를 쳤다.“그만 좀 하세요! 형들 말 좀 작작 하면 죽는 거예요?! 친구들끼리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거냐고요?”도겸과 현빈은 동시에 말했다.“누가 이 자식과 친구라는 거야?!”“난 이런 친구 없어.”선우는 말문이 막혔다.도겸은 현빈을 가리키며 경고했다.“정은에게서 떨어져. 그렇지 않으면...”“그렇지 않으면 어쩔 건데?”“나도 내가 무슨 짓 할지 몰라!”현빈이 말했다.“여기서 나한테 독설을 퍼부어도 소용없어.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정은 씨에게 고백을 할 거야. 하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실은 바로--”그는 또박또박 말했다.“네가 이미 정은 씨를 잃게 되었다는 거지! 돌이킬 수도 없고, 만회할 수도 없어. 만약 정은 씨의 혐오를 더 사고 싶지 않다면, 자각 좀 해. 더 이상 매달리지 말고. 그렇지 않으면 정은 씨를 점점 더 멀리 밀어낼 뿐이야.”현빈은 말을 마치고 도겸을 넘어 선우의 어깨를 두드렸다.“네가 수고 좀 해. 다시는 술주정 부리지 못하게 잘 지켜보고.”말을 마치며 현빈은 성큼성큼 떠났다.선우는 제자리에 서서 넋을 잃은 도겸을 바라보더니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당초 왜 정은 누나를 그렇게 대한 거야?’“선우야...”“도겸 형.” 선우는 얼른 앞으로 가서 도겸을 붙잡았다.“우리 그만 돌아갈까요?
도겸은 들은 체 만 체했다.계단에 도착할 때, 선우는 그제야 쫓아오더니 도겸을 붙잡았다.“형, 그만 떠들고 이제 그만 돌아가요! 어차피 정은 누나도 문을 열어주지 않을 거예요...”“정은에게 줄 게 있어.”선우는 어리둥절해했다.“뭔데요?”도겸은 주머니에서 알레르기를 치료하는 비염 연고 한 통을 꺼냈다.“요즘 알레르기 때문에 재채기를 할 거야. 이걸 정은에게 가져다줘야지...”그 순간, 선우는 갑자기 코끝이 찡했다.‘그렇게 사랑했던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그래.”도겸은 고개를 끄덕였다.“난 정은에게 약을 주러 왔어... 이것만큼은 꼭 정은에게 줘야 해... 꼭...”말하면서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도겸은 눈앞이 어두워지며 몸도 나른해졌다.선우는 얼른 그를 부축하며 차로 끌고 갔다. 그러나 골목 어귀에 주차된 SUV를 바라보며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별장에 도착할 때, 시간은 이미 새벽 1시였다.가정부가 문을 열자, 선우는 얼른 말했다.“좀 부축해줘요! 형은 술에 취했으니까 이따가 해장국 좀 만들어 주세요...”부탁하고 나서야 선우는 차를 몰고 떠났다.연희는 이미 침대에 누웠다. 한창 자고 있을 때, 갑자기 아래층에서 소리가 들려왔다.일어나기 싫었지만 도겸을 위해, 재벌 집안으로 시집가기 위해 연희는 졸음을 참으며 외투를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가서 물 좀 따라줘요. 내가 오빠 부축할 테니까.”연희는 앞으로 다가가더니 도겸을 부착하려 했다.“하지만 작은 사모님, 지금 몸이 불편하시잖아요...”가정부는 임신한 연희에게 무슨 일 생길까 봐 걱정했다.성인 남자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연희는 짜증을 내며 손을 흔들었다.“내 몸은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이모님은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그럼 알겠어요.” 왕미자는 이 말을 잘 듣고 도겸을 그녀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연희는 도겸을 부축하자마자 하마터면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남자는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해서 지금 모든 무게가 그녀에게 떨어졌다.“잠, 잠
‘정은아... 너무 보고 싶어... 제발 내 곁으로 돌아와, 응?’도겸에게 대답하는 것은 어두컴컴한 거실과 창밖의 휘몰아치는 차가운 바람뿐이었다....이튿날 정은은 아침 일찍 깨어났다. 세수하고 밥을 한 다음, 실험실로 갈 준비를 했다.문을 닫을 때, 그녀는 문 손잡이에 종이봉투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는 알레르기를 치료하는 비염 연고가 들어 있었다.게다가 그녀가 자주 쓰는 그 브랜드였다.정은은 사방을 둘러보았다.‘누가 보낸 거지?’이때 정은의 눈빛은 맞은편 문에 떨어졌다. 그녀는 연고를 보더니 또 종이봉투를 자세히 살펴보았다.문을 두드리며 재석에게 물어보려던 참에 문이 갑자기 열렸다.재석은 엄숙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고, 정은을 보자 얼른 발걸음을 멈추었다.정은은 남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재석은 정색했다.“일단 실험실에 가자. 걸으면서 얘기해.”“네.” 정은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지기 시작했고, 연고에 관해 물어보는 것도 잊어버렸다.도중에 재석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저쪽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그는 안색이 변하더니 말투도 약간 무거워졌다.“응, 알았어. 지금 가고 있으니까 곧 도착할 거야.”전화를 끊자, 재석은 정은이 묻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말했다.“실험실의 컴퓨터에 갑자기 문제가 생겨서 이번 주의 실험 데이터가 전부 사라졌어. 아직 회복되지 않았지만 최악의 경우...”재석은 잠시 멈추었다.“모든 데이터가 분실되면서 실험을 다시 해야 할지도 몰라.”정은은 눈살을 찌푸렸다.“실험실의 데이터는 모두 백업되지 않았나요?”“컴퓨터는 잠시 꺼졌을 뿐인데, 다시 켜보니 백업한 데이터도 30% 정도밖에 안 남았어.”데이터가 유출되지 않도록, 또 컴퓨터를 끊김 없이 사용하기 위해, 그들은 매달 실험실의 데이터를 정리해야 했다.지난 월요일은 마침 월말이어서 방금 데이터를 정리했다.이치대로라면 컴퓨터에 일반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
기술자는 한숨을 내쉬었다.“이번이 벌써 다섯 번이에요. 아직 다 조사하지 못했단 말이에요.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좀 보고 나서야 교수님들을 도와 데이터를 복구할 수 있죠.”태민은 얼른 말했다.“그럼 저도 조용히 있을 테니 얼른 확인해 보세요.”그리고 참지 못하고 재석을 바라보았다. 태민은 그가 이 일로 수아를 탓할까 봐 걱정이었다.생각하다가 태민은 재석에게 다가가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조 교수님, 수아가 컴퓨터를 끌 때 저도 봤어요. 저는 이번 일이 정말 의외의 사고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요. 수아는 이틀 동안 데이터를 입력하기 위해서 잘 쉬지도 않았으니, 일부러 이런 일을 할 리가 없어요...”재석은 미간을 비볐다.“일이 똑똑히 밝혀지기 전에 난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을 거야.”그는 수아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재석은 나쁜 예상과 가상을 하고 싶지 않았고, 그저 사실만 알고 싶었다.태민이 또 무슨 말을 하려 하자, 미진은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하지 말라고 눈짓했다.재석은 억울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지 않을 것이고, 또 나쁜 사람을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태민은 입을 다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0여 분이 지나자, 기술자는 일어나서 재석을 바라보았다.“아마도 바이러스 때문인 것 같네요. 저는 이미 최선을 다해 데이터를 복구했어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남아 있는 백업 외에 다른 데이트는 되찾을 수 없을 것 같네요.”사람들 모두 최악의 상황을 예상했지만, 진정으로 이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무척 무거워졌다.재석은 눈살을 찌푸렸다.“실험실 안에 있을 때, 모두들의 핸드폰은 꺼져 있는 상태였고, USB도 학교에서 통일로 준 것을 사용했는데. 어떻게 갑자기 바이러스에 걸릴 수가 있죠?”기술자는 고개를 저었다.“이 바이러스는 무척 복잡해서요. USB과 핸드폰은 직접 매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런 간접적인 매체들도 있어요. 예를 들면 감시 카메라 시스템, 심지어 문밖의 지문 잠금 해제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
[진짜 안 따라 나오는 거야? 손태민, 너 나한테 진심이긴 해? 마음 있긴 해?!]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제야 태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어디야?”[정문 앞 카페. 시간 줄게, 5분 안에 와.]“그래.”태민은 짧게 하고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태민이 카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통화한 지 15분이 지나 있었다.수아는 두 팔을 꼬며 차갑게 말했다.“뭐야, 이게? 5분이랬잖아. 내가 기다리는 거 제일 싫어하는 거 알잖아.” “미안...태민은 고개를 숙였다. 눈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사과했다.그런 태민의 모습에 수아는 괜히 짜증이 났다. ‘조재석이랑 비교하면... 능력도, 집안도, 얼굴도, 도대체 뭐 하나 나은 게 없어.’하지만 그녀는 아직 태민이 필요했다. 그 생각에 억지로 화를 눌러가며, 입꼬리를 올려 웃는 척했다.“너... 교수님한테 한 번만 말해줄 수 있어? 이번 해고, 다시 생각해 보라고 좀 부탁해 줘.” 그 말에, 태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예전엔 본 적 없는 눈빛으로 수아를 바라봤다.‘저 눈빛은... 뭐야...?’수아는 이유 모를 불안감에 딱 2초 만에 시선을 피했다.“도와줄 거야, 말 거야? 싫으면 됐어. 그냥 안 해도 돼.”예전 같았으면, 수아가 이렇게 말만 해도 태민은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엔... 침묵이 조금 길었다.“그래...”드디어 태민이 대답했다. 수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곧이어 태민이 덧붙인 말이 그녀를 멈칫하게 했다.“근데, 조건이 있어.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 조 교수님이 너를 그렇게까지 내친 이유...”“그건... 지금 꼭 해야 하는 말이 아니잖아...”“나는 꼭 들어야겠어.”수아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상하게 낯선 태민의 태도에 그녀는 자신이 제압당하는 느낌을 받았다.“손태민, 지금 뭐 하는 거야? 날 협박하는 거야?”“진짜 날 사랑하긴 해? 그 정도 일도 못 해줘?”그 비난과 몰아붙임 속에서
수아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곧장 재석 앞까지 걸어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눈은 흔들림 없이 그를 향해 있었다.“조 교수님, 왜 절 해고하신 거예요?” “일주일 병가 낸 게 문제였어요? 아니면 프로젝트에서 뭐 잘못된 거라도 있었나요?”재석은 조용히 수아를 응시하다가, 문득 작게 웃었다.“이수아 선생님, 경찰이 못 밝혀낸다고 해서,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봐요? 자세히 얘기해줘요? 모두 들을 수 있게?”그 말에, 수아 마음속 마지막 희망 하나가 차갑게 꺼져버렸다.‘알고 있었어...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거야.’‘그럼에도 지금까지 아무 말 안 하다가, 오늘...’그녀는 마치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것처럼 숨이 턱 막히고, 머리가 멍해졌다. 그리고 속에 쌓여 있던 분노는 어디로 갔는지, 기운 빠진 사람처럼 그저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미진은 그 모습을 보고, 뭔가 말하려다 말았다. 하지만 재석의 깊고 차가운 눈빛이 자신을 스치자, 그제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아...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구나.’ 순간,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곱씹던 미진의 머릿속에 말도 안 되는 추측 하나가 떠올랐다.그리고 미진의 시선은, 동정에서 충격으로 바뀌었다.진욱은 이미 눈치챘다. 그래서 처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오직 태민만이 아직 그 정답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다가가 수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수아야...”“꺼져! 건들지 마!!”수아는 그대로 태민의 손을 뿌리치고, 실험실을 박차고 나갔다. 허둥지둥, 마치 도망치듯.‘왜... 왜 조미진랑 전진욱이... 그런 눈으로 날 본 거야...?’ ‘설마... 그 사람들도... 눈치챈 건가?’모든 사람에게서 밀려난 채, 홀로 남겨진 태민은 허공을 향한 두 손을 내려다보며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왜, 다들 나만 빼고 알고 있는 거야...’재석은 말없이 돌아서며 실험대로 향했다.
결국, 실험실에서 재석이 누군가를 내보내는 데는 한마디면 충분했다.하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그 누군가가 이런 방식으로 떠나게 될 줄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미진은 잠시 멍해졌다.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갑자기‘계약 종료’라는 통보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수아가 병가 중이긴 한데... 설마 그 병이 심각해진 건가?’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수아 상태가 안 좋아진 건가요?”하지만 그렇다 해도 ‘계약 종료’는 너무 가혹했다. 재석은 단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사람을 냉정하게 잘라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진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혹시 자세한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재석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수아가 맡고 있던 프로젝트는 태민이 인계할 거야. 오늘 중으로 인수인계 마무리해.” 이름이 불리는 순간, 태민은 마치 누가 뒤통수를 내리친 듯 멍해졌다. ‘뭐...? 내가?’그는 머릿속이 새하얘졌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귀도 막힌 것처럼 주위 소음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온 신경이 ‘수아가 잘렸다’는 그 사실에 꽂혀 있었다.그때, 옆에 앉아 있던 미진이 책상 아래로 태민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태민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고, 멍하니 재석을 바라봤다. “교수님, 왜죠?”재석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또 그 눈빛이었다. 무표정하면서도 단호하고, 어떤 설명도 허락하지 않는.그리고 결국, 재석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회의실엔 놀람과 당혹, 멍한 표정들이 뒤섞인 채로 몇 초간 정적만 흘렀다.오전 내내 실험실 분위기는 무겁기 짝이 없었다. 태민은 여러 번 핸드폰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수아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만약 모른다면...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지...?’재석은 끝내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지만, 태민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교수님이 저런 결정을 내릴 정도라면...
그날 아침, 별다른 것 없는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다.잠에서 깨자마자, 태민은 습관처럼 핸드폰을 확인했다. 혹시 수아에게서 연락이 와 있진 않을까...부재중 전화, 메시지 알림은 있었지만... 전부 다른 사람이었다.‘오늘도 아니야.’실망감이 스르르 밀려왔다. 태민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씻고, 옷을 챙겨 입고, 평소처럼 집을 나섰다....막 실험실에 도착하자, 태민이 그토록 기다리던 이름이 핸드폰 화면에 떴다.수아에서 온 전화였다.“수아야?! 드디어... 너 왜 그동안 연락 안 했어? 나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 나...”[손태민, 진짜 왜 이렇게 집착하냐?!]단 한 마디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태민의 정신이 멍해졌다.[계속 전화하고, 계속 메시지 보내는 게 그렇게 재밌어? 내가 안 받고, 안 보는 거면 알아서 눈치껏 그만해야지! 왜 자꾸 연락하는데? 얼마나 더 해야 만족할 건데? 진짜 짜증 나!]“수아야...”태민은 당황해 목소리가 떨렸다.“나는 그냥... 네가 너무 연락이 없으니까,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걱정돼서 그랬어...”[걱정?]전화기 너머로, 조소 섞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내가 뭘 어쨌다고 걱정을 해? 너 진짜... 왜 그렇게 남 일에 다 끼어들고 싶어 하는 거야? 다 간섭하고, 다 챙기고.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태민은 눈앞이 흐려졌다.‘난 그냥 좋아하니까... 그게 다였는데.’“난 그냥, 너한테 잘해주고 싶었어...”[됐어, 잘하고 못하고는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제발, 더 이상 전화도 하지 말고, 메시지도 보내지 마. 지금은... 그냥 혼자 있고 싶어.]뚝-태민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태민아? 앞 좀 보고 다녀!”실험실 입구. 미진의 다급한 목소리에, 태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쓰레기통을 걷어찰 뻔했다.“아, 죄송해요...”그는 황급히 쓰레기통을 세워놓고 어색하게 웃었다.“자, 가자.”미진이 그를 불렀다.“어디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