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상을 떠나고 5년 후, 딸 유안이가 구희준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 상대에게 물었다. “우리 엄마 좋아해요?” [구희준, 날 좋아하긴 해?] 내가 살아있을 때 전 일기장에 적힌 문장에 대한 답을 듣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로 조롱 섞인 말이 들렸다. “엄마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어? 이젠 딸까지 이용하네. 참 방탕한 여자야. 이미 네 아빠랑 만나고 있으면서 나랑 다시 만나고 싶대?”
View More구희준은 유안이와 날 함께 묻었고 가끔 우리 묘소에 찾아왔다.하지만 바싹 시든 것처럼 잘 지내는 모습은 아니었다.유안이도 그를 볼 때마다 고개를 기울여 내 반응을 살피곤 했다.나는 그를 탓하고 있었다.왜 살아있을 때 진철호와 했던 약속을 말하지 않아 나 혼자 괴롭게 해서 결국엔 생사의 이별까지 오게 됐을까.왜 하필 그날 유안이를 데리고 집을 보러 가서 유안이가 세상을 다 보기도 전에 이승을 떠나게 했을까.그를 원망하지만 이런 모습은 차마 견딜 수가 없었고 그래서 우릴 보러 오지 않길 바랐다.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니까.신이 내 소원을 들었는지 구희준은 보름 동안 오지 않았고 나는 마음이 편했지만 유안이는 실망했다.이 아이가 아빠의 사랑을 갈망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드디어 구희준이 다시 찾아왔고 이번에는 직접 무릎을 꿇었다.일어나.죽었는데 이런 대접은 못 받겠네.그는 우리 무덤 앞에서 긴 연설을 했다.“연진아, 꿈에서 네가 묘소에 자주 찾아오지 말라고 하더라. 그날 내가 유안이 데려가서 이렇게 만들었다고 원망하는 거 알아. 사고가 생긴 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장인어른, 너, 유안이까지 왜 그렇게 됐을까. 그래서 조사해 봤더니 다 진나경 짓이었어. 세 사람 사고를 꾸민 거야. 난 이미 경찰에 신고했고 걘 평생 감옥에서 살 거야.”진나경, 나와 구희준 사이에 끼어들고 우리 셋까지 해쳤다.구희준, 다 네 탓이야!네가 그 여자랑 스캔들만 나지 않았어도 그 여자가 어떻게 너랑 만나겠다는 희망을 품고 우리 셋을 해쳤겠어?빨리 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난 네가 미워.말하며 그의 얼굴에 눈물이 흘렀고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연진이. 다 내 탓이야. 내가 잘못했어. 무척 괴롭고 고통스럽고 내가 미워죽겠어. 아저씨가 나한테 은혜 갚으라고 했던 얘기 기억나? 그 집 처음부터 파산한 적 없더라. 애초에 진나경이 날 노리고 꾸민 짓이야. 내가 진작 알았더라면... 아니면 조금 더 일찍 너에게 나와 그 집안
구희준은 진철호가 세상을 떠난 직후 기자회견을 열며 기자들에게 고인을 추모하고 자신과 진나경에 대한 허위 소문을 퍼뜨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드디어 해명했다.다만 내가 가장 해명하길 바랐던 시점은 아니었다.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자 마침내 지독한 자본주의자 피가 흐르는 냉혈한이 방식을 바꿨고 이번에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그는 15분 일찍 와서 선생님께 유안이를 교실 밖으로 불러달라고 부탁했다.“아빠랑 같이 가.”유안이는 삐죽거렸다.“아저씨가 내 아빠 되는 건 싫어요. 전에 우리 엄마 욕했잖아요. 나쁜 사람이에요. 이미 엄마 무덤 앞에서 아저씨 좋아하지 말라고 했어요.”구희준은 쭈그리고 앉아 부드럽게 말했다.“내가 잘못했어. 전에 엄마를 오해했어. 미안해. 지성 삼촌이랑 평생 같이 살 거야? 지성 삼촌이 결혼하면 어떡해?”사실 나도 이 질문을 피하고 있었다.그동안 양지성이 여자를 만나는 걸 본 적이 없었다.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나.유안이는 생각하다가 말했다.“지성 삼촌은 엄마를 좋아하니까 결혼 안 할 거예요.”이 녀석, 무슨 소리야?왜 그러는 거야!속 좁은 남자 앞에서 그런 말 하면 화낼 게 분명하잖아.그런데 구희준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더 다정하게 말했다.“그럼 일단 아빠 집 보고 아빠랑 같이 살지 말지 결정할래? 아빠 집에는 엄마가 쓰던 물건이 그대로 있고 방에 물건도 하나도 안 바뀌었어.”내가 전에 살던 방이 그대로라고?내 물건은 오래전에 다 버린 줄 알았는데.유안이는 별빛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나도 옛날 물건들이 보고 싶어서인지 말리지 않았다.유안이는 양지성에게 전화를 건 뒤 구희준의 차에 탔고 사랑스러운 아이는 경계심을 내려놓고 먼저 말을 걸기 시작했다.“엄마 상자에 아저씨 사진이 엄청 많은 거 알아요? 그 사진들을 정말 많이 봐서 그때처럼 젊지는 않아도 삼촌 차랑 부딪혔을 때 바로 알아봤어요.”구희준은 웃으며 유안이에게 똑똑하다고 칭찬하다가 한참 후 물었다.“엄마
나는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이게 다라고?그러면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던 걸까.그도 의아한 내 눈빛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내 말 안 믿는 거야? 지금 언론에서 내가 약혼을 준비 중이라고 보도한 것도 사실이 아니야.”내가 말을 가로챘다.“거짓말. 그날 병실에서 그 여자 아버지한테 죽은 뒤에도 진나경 챙겨주겠다고 약속했잖아.”하지만 그의 눈에 놀랍고도 기쁜 기색이 담겼다.“날 보러 왔던 거야?”자꾸만 요점을 피해 가는 남자가 싫었다.나는 다소 어색하게 몸을 돌려 낮은 소리로 말했다.“당신이 유안이랑 만나고 한번 찾아갔는데 그걸 볼 줄은 몰랐어.”구희준은 나에게 다가왔다.“내가 잘 챙겨주겠다고 한 건 어려울 때 돈도 빌려주고, 남자 친구가 필요할 때 소개시켜 주는 것도 되잖아. 굳이 결혼해야 하는 거야?”그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당신...”“나 뭐? 내가 처음부터 진나경을 좋아했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난 항상 널 좋아했어.”드디어 일기장 속 답을 얻었지만 생각만큼 기쁘지는 않았다.그동안 너무 속상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구희준, 네가 항상 좋아했던 게 나였다면, 그럼 그동안 내가 겪은 괴로움은 뭐였어?네가 우리 관계를 공개하지 않아서 공공장소에서 네 손을 잡거나 가까이 다가갈 엄두도 못 냈고 결혼식도 못 한 채 결혼사진만 조용히 찍어서 SNS에 올리지도 못했잖아.마음이 분노로 가득 차자 한심한 내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고 구희준은 내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지만 나를 그대로 뚫고 지나갔다.“연진아,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내가 스누커 대회에서 보여줬던 멋있는 모습을 네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아. 그래서 출전 금지당하고 스누커를 포기하기로 결정한 후엔 나한테 너무 실망할 것 같아서 집에 와서 어떻게 너를 마주해야 할지 두려웠어.”막 임신했을 때를 생각하니 개미 수천 마리가 내 가슴을 갉아 먹는 것 같았다.나는 고통스러워 바닥에 웅크린 채 머리를 부여잡았다.“제발 그만 말해. 이제 다 지나간 일이야. 난 이미 죽었어.
난 지금 구희준과 아무 상관도 없는데 남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그래서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떠나 유안이에게 돌아왔다.처음부터 내가 지키고 싶었던 건 오직 유안이뿐이었다.그런데 며칠 후 구희준이 유안이를 데려가겠다고 했다.구희준이라는 사람의 성격으로 봤을 때 자기 자식이 밖에 떠도는 걸 지켜보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진나경이 유안이를 학대할까 봐 두려웠다.살아생전 인터넷에서 한 글을 봤었다.‘아버지는 아이에게 별 감정이 없다. 아이를 좋아하는 건 단지 아이 엄마를 좋아하기 때문에 아이까지 감싸는 것이다.’하지만 구희준은 날 좋아하지 않는데 유안이를 좋아할까?...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의 꿈으로 들어갔다.평소 이미지에 신경을 많이 쓰는 그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어서 나는 다소 적응이 되지 않았다.“연진아, 넌 그렇게 오랜 세월 떠나 있으면서 어떻게 내 꿈에 한 번도 오지 않아. 왜 이렇게 잔인해?”그러는 당신도 몇 년 동안 날 찾지 않았잖아. 내가 죽은 것도 몰랐으면서.그만. 나는 유안이를 데려가는 걸 포기하도록 권유하러 온 거다.“유안이 양지성 곁에서 데려가지 마.”구희준은 고통스러운 듯 물었다. “왜? 임신했을 때도 나한테 말 안 했고 내 아이 낳을 때도 말 안 했잖아. 이젠 나랑 아이가 만나는 것도 막는 거야?”“유안이는 당신과 지내는 것에 적응 못 해. 어차피 진나경과 결혼하면 두 사람 아이도 생기잖아. 이젠 자녀 정책도 있어서 셋 정도는 낳지 않겠어?”구희준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연진아, 무슨 소리야? 나보고 다른 사람하고 애를 낳으라고?”다른 사람은 무슨, 소꿉친구 진나경인데.봐, 남자는 다 이래. 원하는 걸 얻고 나면 쉽게 질려하지.“내가 수없이 말하지 않았어? 나 진나경이랑 아무 사이 아니야. 무슨 관계가 있었다면 내가 왜 너랑 결혼하겠어?”못 믿겠다.내가 스캔들 해명하라고 한두 번 얘기한 것도 아닌데 단지 그 여자 마음 상하게할까 봐서 하기 싫었던 거겠지.내가
난 그때 목에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이혼해...”“그래.”우는 건 아기에게 좋지 않다며 속으로 끝없이 되뇌면서 그의 앞에서 울지 않기 위해 애썼다.하지만 그가 문을 박차고 나가는 순간 나는 무너져 내렸고 울다가 지칠 때쯤 양지성이 나를 아빠 집에 데려다줬다.그 후 구희준과 이혼하고 나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그랬다. 그는 나를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다.그래서 유안이 존재도 몰랐던 거다.나는 양지성의 말을 들으며 지난 기억에 잠겨있었다.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너무 아팠다.구희준도 그 말을 듣고 아프겠지. 아니면 왜 저렇게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겠나.양지성은 비웃었다.“애초에 당신이 나랑 연진이가 바람피웠다는 오해를 하는데도 내가 왜 해명 안 했는지 알아요? 당신은 연진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언론은 하루 종일 당신과 진나경이 사랑에 빠졌다고 보도했고 연진이는 당신 비밀 아내였어요. 구희준 씨, 그거 알아요? 당신과 이혼하고 나서 연진이 자주 서럽게 울었어요. 걔가 울고 강아지가 눈물을 핥아주는 모습을 아버지와 내가 한두 번 본 게 아니에요. 그때 배도 불러 있었고요.”강아지 백구는 폭발 사고로 나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당신은 감정이 없어요, 구희준 씨. 다음 생이 있다면 연진이가 당신을 모르거나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마침 내 생각도 같았다.구희준, 다음 생에는 절대 너랑 결혼하고 싶지 않아.나는 올곧은 시선으로 구희준을 응시했다.내 바람대로 그의 얼굴에서 슬픔과 죄책감의 표정을 포착했는데 바로 다음 순간 진나경의 전화가 왔다.“희준아, 우리 아빠가 위독해. 자꾸 네 이름을 불러. 올 수 있겠어?”전화를 끊은 구희준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마치 조금 전 진실이 전부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그저 대충 슬퍼하는 척 맞춰준 것 같았다.고개를 숙인 나는 우울한 감정이 온몸으로 퍼져갔다.왜 슬퍼해, 늘 이랬잖아.슬퍼하지 마. 그는 날 좋아하지 않아....하지만 내 영혼
5년 전, 구희준은 토너먼트 결승전에서 패배하며 우승의 기회를 놓쳤지만 승부조작 사실이 언론에 폭로되면서 2년간 출전 금지 처분을 받았다.그리고 그가 가짜 경기에 임했다는 증거는 내 목소리가 담긴 녹음 파일이었다.당시 나는 임신 사실을 막 알게 됐고 구희준이 밤에 뒤에서 날 안아주고 있을 때 임신 사실을 말하기 전에 진나경과의 스캔들을 정리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거절했고 우리는 격렬한 언쟁을 벌였다.“난 정말 그 여자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 왜 내 말을 안 믿어?”“정말 그 여자랑 아무것도 없으면 내일 결승전에서 지고 우승하지 마.”“주연진, 꼭 그래야 내 말을 믿겠다는 거지?”그렇게 말한 뒤 구희준은 침대에서 일어나 자리를 털고 가버렸고 너무 슬펐지만 배 속에 있는 아기에게 영향을 미칠까 봐 감히 울지도 못했다.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이불에 머리를 파묻고 흐느꼈다.너무 슬프고 괴로웠다.너무 슬퍼서 울고 싶다는 신체적 반응을 주체할 수 없었다.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구희준은 정말로 시합에서 크게 패했고 우리가 뒤에 나눈 대화들이 어느새 녹음되어 인터넷에 퍼졌다.구희준의 승부조작 소식은 인터넷에 도배되었고 협회에서는 구희준에게 징계를 내렸다. 당시 그는 스누커 대회에서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었는데 구씨 집안에서는 그가 선수 생활을 포기하고 가업을 이어받길 원했다.어쨌든 내가 한 말은 그가 스누커를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고 우리 사이의 균열은 점점 더 커졌다.그동안 그는 짙고 어두운 기운에 둘러싸인 채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대했고 그런 그에게 난 임신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2년간의 출전 금지령에 불만을 품은 그는 홧김에 스누커를 포기하고 구신그룹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재계에 뛰어들었다.하긴, 태생이 오만한 그가 어떻게 굽히고 들어가겠나....나도 더 이상 심판을 계속하지 않았다.국내로 돌아온 후 그는 하루하루 사업하느라 바빠서 밤에 돌아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한 번은 밤늦게 그 여자와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찍
무서웠다.이 꿈같은 연애가 불꽃놀이처럼 화려하기만 하고 나 혼자서만 끝나지 않도록 계속 불꽃을 들고 있는 바보 역할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나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했다.혼인신고 후에도 구희준은 여전히 자신과 진나경의 소식으로 도배되는 걸 내버려두었고 나는 줄곧 비밀스러운 결혼 생활을 보내며 전전긍긍한 채 조금만 일이 생겨도 혼자 화장실에 숨어서 남몰래 울었다.울고 난 뒤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구희준 앞에서 웃으며 그가 먹고 싶다는 음식을 만들어주었다.아버지와 남사친 양지성이 모두 나서서 나를 말렸지만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구희준에겐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훈련에 매진할 때면 내가 만들어주는, 그가 제일 좋아하는 찜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아무도 내가 만든 음식을 대체할 수 없다고 했으니까.나는 그 말이 ‘아무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려 무척 기뻤다.아무도 그의 마음속에서 나를 대신할 수 없다고 했는데...허, 내가 뭐라고.고통스러운 기억을 나는 억지로 멈췄다. 이대로 계속 떠올리면 울보 귀신이 될 것 같았다.비록 자리에 있는 양지성, 유안이, 미워하는 구희준은 내가 우는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너무 창피했다.이미 귀신이 됐는데도 그가 한 못된 짓에 울면 그런 내가 너무 한심해 보였다.그러면 한심한 귀신이 되겠지.양지성의 눈에는 여전히 싸늘한 기운이 몰아쳤고 퉁명스럽게 말했다.“궁금한 게 있으면 내일 날 찾아와요. 유안이가 들으면 안 되는 것도 있으니까.”알려주지 마, 말하지 말라고.나는 너무 불안해서 양지성의 팔을 밀었지만 그대로 통과되고 말았다.이미 죽은 지 오래됐는데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다음 날, 양지성은 유안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당구장 문을 열었다.나는 홀린 듯이 처음으로 유안이 곁을 떠나 양지성을 따라 당구장으로 향했다.구희준이 양지성의 말을 듣고 무슨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이 당구장은 아버지의 노고가 담겨있고 아버지가
나는 머리를 감싸며 터질 듯한 두통과 고통에 눈물을 흘렸다.말하지 마, 말하지 마.그 말을 하자마자 우리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이 알아서 떠오르며 내 가슴도 욱신거렸다.양지성의 말처럼 구희준은 죄책감이라곤 없는 사람이었다.당시 구희준은 프로 스누커 선수였고 갑자기 등장해 센세이션을 일으킨 ‘천재 스누커 선수’로 불렸다.반면 나는 스누커 심판이었는데 쉽게 말해 선수가 공을 친 후 홈 라운드에 공을 돌려주는 역할이었다.7년 전 그 경기에서 내가 허리를 숙여 공을 놓고 있는데 한 외국인 선수가 뒤에서 내 엉덩이를 향해 몸을 흔들어댔고 많은 관중 앞에서 벌어진 직장 내 성희롱이었다.경기장 전체가 소란스러웠고 나는 당황스럽고 화가 났지만 성격이 여리고 한낱 심판이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런데 갑자기 구희준이 그 자리에서 외국인 선수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며 자기 나라 사람을 괴롭혔다고 혼을 냈다.마치 구세주가 등장한 것 같아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아니, 사실 구희준 때문에 내 심장은 오래전부터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아버지가 은퇴한 스누커 선수였고 어렸을 때부터 내 삶은 스포츠와 떼려야 뗄 수 없었기 때문에 언론에서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 구희준을 모를 리 없었다.언론이 주목하기 훨씬 전부터 그를 눈여겨봤고 그가 주목받기 시작했을 때부터 묵묵히 지켜봐 왔다.그가 크고 작은 대회에서 트로피를 거머쥔 사진을 모두 인화해서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다시 말해 나는 그를 좋아했다.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큰 벽이 있었다. 그는 세계 최고의 스누커 선수일 뿐 아니라 국내 구신그룹의 후계자이기도 했기에 돈과 권력을 다 쥐고 있었지만 나는 그저 작은 심판에 불과했고 예쁘장하게 생겨서 언론에 ‘가장 아름다운 스누커 여자 심판’으로 불렸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그래서 그날 밤 선수를 두들겨 패고 나서 그가 나를 여자 화장실 밖 좁은 구석에 몰아넣었을 때 나는 기쁘면서도 당황스러웠다.그는 내 턱을 잡고 강제로 고개를 들게 한 뒤
“엄마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지? 날 바보 만드는 걸 제일 잘하는 여자야.”...이 희극은 선생님이 화장실 문을 열고 전화를 가져가서 끊는 것으로 끝났다.저녁 수업이 끝날 때까지 유안이는 내내 침울한 표정으로 넋이 나가 있었고 나도 덩달아 조마조마했다.저녁 무렵 양지성이 유안이를 데리러 왔고 문을 나서는 순간 구희준이 앞을 막았다.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유안이가 시선을 들어 눈앞에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구희준은 양지성을 차갑게 쳐다봤다. “주연진이 죽었어?” 양지성도 좋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대했다.“당신하고는 오래전에 이혼했고 곧 약혼할 사람이 뭘 그렇게 신경 쓰세요?”약혼이라는 말을 듣자 유안이의 몸은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고 양복을 입고 있는 눈앞의 남자를 더욱 화가 난 눈으로 노려보았다.‘화내지 마, 유안아. 괜찮아, 엄마는 더 이상 그 사람과 아무 상관 없어.’그 순간 아직 유치원에 남아있던 아이들이 몇 명 나왔고 아이들은 유안이를 보며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야, 말괄량이. 엄마 아빠도 없는데 오늘은 삼촌 둘이나 데리러 왔네?”“삼촌 두 명이 네 새 아빠가 되려고 줄을 서 있는 거야?”“왜 울어, 평소에는 그렇게 시끄럽고 못되게 굴지 않았어?”“네 엄마는 죽어서 울어도 집에 가서 눈물 닦아줄 엄마 없잖아.”양지성은 유안이를 품에 안았고 유안이는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구었다.초조하게 발을 구르던 나는 저 못된 아이들을 때려주고 싶었다.그런데 갑자기 큰 손이 마지막 말을 하던 남자아이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마치 저승에서 온 귀신이라도 된 듯 으스스한 기운이 감돌던 구희준은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앞으로 유안이 괴롭히면 너희 부모님 직장을 잃게 할 뿐만 아니라 너희 혀도 다 잘라버릴 거야.”그렇게 말한 후 그는 살벌하게 아이들을 한 명씩 내려다보았고 아이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유안이를 괴롭히던 아이들을 쫓아낸 구희준은 아이들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다소 우습다는 표정으로 양지성을 돌아보았다.“주연진
세상에 홀로 남겨진 딸 유안이가 걱정되어 난 죽은 후에도 아이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딸이 한 살일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3개월 후 나는 반려견 백구를 데리고 치료하러 갔다가 동물병원의 고압 산소 치료기가 폭발해 사망했다.내가 세상을 떠난 후 남사친 양지성이 유안이를 입양했고 유안이는 5살 때 양지성이 유치원에서 데리고 집으로 가다가 추돌 사고를 당했다.유안이는 양지성을 따라 차에서 내린 뒤 추돌한 차 주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내 유품에서 수없이 봤던 사진 속 그 사람이었다.내 전남편, 구희준.순간 나는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고 두 사람이 알아보지 않길 바랐다.구희준은 다가와 양지성을 보는 순간 한쪽 입꼬리를 올렸고 그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아는 미소였다. 분노가 섞인 도발이었다.그러다 양지성의 몸 아래쪽으로 시선을 옮겼고 양지성이 유안이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에 입꼬리가 한층 더 올라가며 조롱이 섞여 있었다.“주연진이랑 당신 딸인가?”유안이는 생김새가 나와 쏙 닮았기에 구희준이 이렇게 말할 법도 했다.하지만 사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우스꽝스럽고도 억울하며 가슴이 뻐근하게 아팠다.역시 다시는 그를 보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면 죽어도 편히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양지성은 짜증스럽게 페인트가 다 벗겨진 차를 돌아보았다.“각자 처리하죠. 책임 안 물을 테니까.”그 순간 구희준의 첫사랑 진나경이 차에서 내려 당당하게 걸어왔고 그녀는 유안이를 보는 순간 멈칫하며 두 눈에 번뜩이는 당황스러움이 내 눈에 포착됐다.참 가증스러운 모습이었다.진나경은 구희준의 팔짱을 꼈고 구희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옆을 바라보면서도 떨쳐내지 않았다.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떨쳐낼 리가 있겠나.유안이가 잠든 후 양지성은 가끔 쇼츠를 봤고 나도 옆에 함께 있었다.매번 구희준과 첫사랑 진나경의 소식이 나올 때마다 그는 멈춰서 끝까지 보곤 했기에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얼마나 애틋한지 잘 알았다.최근 보도에 따르면 두 사람이 약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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