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희는 아무 말없이 세라가 던져준 자료만 주울 뿐이었다. 그녀는 그 자료들을 열심히 정리하기 시작했다.아무도 트집을 잡지 않는다면 그녀는 이곳에서 계속 일할 생각이 있었다.이 회사에 첫 출근을 하는 오늘, 그녀는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이곳에 왔다. 신세희는 세라가 자신을 난처하게 할 줄 알았다. 세라가 자기보고 저녁에 야근까지 하면서 남은 자료를 다 정리하라고 할 줄 알았다. 하지만 5시 반이 되자마자 세라는 그녀가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우리 회사는 야근 같은 거 안 해요. 자료는 내일 정리해도 되니까 일찍 퇴근해요. 자꾸 밤새면 얼굴도 푸석푸석해지고 못생겨지거든요? 그때 되면 남의 첩이 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니까 어서 퇴근해요!”세라의 말이 듣기 싫었지만 신세희는 그녀의 말에 트집을 잡지 않았다.그녀는 회사에 있는 다른 직원들처럼 가방을 들고 디자인 팀을 나왔다. 프런트에 도착하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엄선희가 눈에 들어왔다.“세희씨.” 엄선희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퇴근한 거예요?” 신세희가 웃으며 말했다.“오늘 하루 어땠어요?” 엄선희가 물었다.“괜찮은 것 같아요.” 신세희가 대답했다.두 사람은 카드를 찍은 후 같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엄선희는 엘리베이터를 나온 후에야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 말 좀 들어봐요. 오늘 우리 층 직원들 내내 민정아에 대해서 의논하고 있었거든요. 세희씨도 알고 있죠? 민정아 그렇게 회사 나가고 난 후로 다시 안 나타난 거.”“민정아, 회사에서 내내 우쭐거리며 제멋대로 날뛰었거든요. 이렇게 망신당한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기쁜 건 기쁜 거고, 만약에 민정아가 계속 여기서 일하게 된다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신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고마워요.”“아, 근데 민정아 형부랑은 진짜 모르는 사이에요?... 조의찬이던가?” 엄선희는 또다시 가십거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선희씨 사촌 오빠는 어떻게 말하던데요?” 이렇게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엄선
신세희의 말투는 무척이나 담담했다. “별로 할 말 없어요.”“…”앞에서 차를 몰던 엄선우도 그만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신세희를 쳐다보았다.사모님 정말 멋있다.이 도시에서 감히 도련님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모님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사모님 말고는 없을 거고.한참 후, 부소경은 눈썹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내가 네 회사에서 일 하는 것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겠어? 네가 알려줘야지.”그는 어쩌다 참을성 있게 이 고집스러운 여자가 자신에게 반항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근데, 이 여자 대단하긴 했다.식당에 그렇게 갇혔는데도 태산처럼 앉아서 조용히 밥을 먹다니.유리의 친엄마다웠다. 이 순간, 부소경은 갑자기 무언가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유리가 교활하고 잔머리가 많은 건, 아빠인 나의 성격을 닮은 것뿐만 아니라 엄마인 신세희의 성격도 닮아서였다.신세희는 엄선우를 쳐다보더니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당신, 이미 나 지켜보라고 회사에 사람 심어놓았잖아요. 엄비서님 사촌 동생 말이에요. 그럼 회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 텐데, 대체 왜 물어보는 거예요?”“억울해요, 사모님!” 신세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앞에서 차를 몰던 엄비서가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그냥 사촌 동생한테 사모님 좀 챙겨주라고 부탁한 것뿐이에요. 제 동생이 사모님에 대해서 물어보긴 했어요. 사모님이 누구 여자친구인지 하는 문제 말이에요. 하지만 그것 말고 다른 건 저한테 말한 적 없어요.”엄선우는 너무 억울했다.구서준의 일은 구서준이 본인 입으로 직접 서울에 있는 작은 숙부 구경민에게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구경민이 그 얘기를 또 부소경에게 알려주었다. 이게 일개 비서인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그의 말에 신세희는 바로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괜찮습니다, 사모님!”신세희는 다시 부소경을 쳐다보았다. “전 구서준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몰라요. 저한테 굳이 굳이 밥을 사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마치 조의찬이 나에게 다가왔던 것처럼.
신세희는 차에서 내리더니, 혼자 유리를 데리러 유치원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는 자신과 비슷한 키를 가진 여자아이와 인사를 하고 있었다. “수진아, 잘 가.”수진이라고 불리는 아이는 엄마와 함께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유치원 안으로 들어오는 신세희의 모습을 보자 유리는 그녀를 향해 총알처럼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유리는 그녀를 향해 달려오면서 수진이에게 말했다. “수진아, 이것 봐. 우리 엄마가 나 데리러 왔어.”유리는 성큼성큼 뛰면서 신세희의 앞으로 달려왔고 그들은 수진이와 수진이 엄마랑 나란히 서게 되었다.신세희는 예의 바르게 수진이와 수진이 엄마에게 인사를 했다. “반가워요”수진이도 고개를 들어 신세희를 쳐다보더니 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줌마, 안녕하세요. 저는 유리 친구예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진이는 엄마에 의해 억지로 끌려가게 되었다. 엄마는 아이를 밖으로 끌고 가면서 자신의 딸에게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앞으로 저런 애랑 친구 하지 마. 보아하니 어디 후진 시골 동네에서 온 것 같은데… 옷도 촌스럽게 저게 뭐야! 못 생겨 죽겠네!”“…”“…”한참 뒤, 신세희는 유리의 손을 잡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유리야, 이제 집으로 가자. 우리 보물.”유리는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엄마 사실 엄청 예쁘거든? 우리 유치원 애들중 그 어떤 엄마보다도 더 예뻐. 엄마, 우리한테 예쁜 옷 살 돈이 없는 거야?”“…”유리에게 어떻게 말해줘야 하지?유리는 항상 엄마의 힘든 점을 알아주었다. 유리는 달콤한 목소리로 신세희에게 말했다. “엄마, 나한테 엄마를 수진이 엄마보다 더 예쁘게 만들어줄 방법이 있는데.”신세희는 그 방법이 무엇인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엄마한테만 말해봐. 그 방법이 뭔데?”“비밀!” 아이는 무척이나 신비롭게 말했다.신세희는 유감스럽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정말 뭘 어쩔 수가 없는 아이다. 그녀는 딸을 데리고 부소경의 차 옆으로 다가갔고 엄선우는 이미 차 문을 열고 그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는
사실 신세희가 아침에 집을 나섰을 때 부소경은 이미 그녀의 옷차림이 조금 촌스럽다는 걸 알아차렸다. 점심, 회의를 끝낸 그는 패션팀에게 전화를 걸어 차 두 대 분량의 옷을 구입했다. 따라온 직원만 해도 4명이 넘었다.한번 또 한 번 옮겨지는 옷들을 보자 신세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오히려 유리가 흥분해서는 참새처럼 짹짹대고 있었다. 유리는 엄마의 예쁜 옷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옛날에 곡현에 있었을 때는 이렇게 예쁜 옷 하나도 없었는데… 하지만 지금, 엄마에게는 예쁜 옷이 이렇게나 많다. 앞으로 누가 감히 우리 엄마한테 촌스럽다고 말하는지 한번 두고 보자고!옷 배달해주는 직원들은 모두 떠났다. 신세희는 가득 찬 드레스룸을 보며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기쁨인가?지금 부소경이 그녀에게 대하는 태도는 곡현에서 금방 돌아왔을 때보다 훨씬 더 좋아졌다. 아마 유리 때문이겠지.엄마가 자식 덕을 보는 거니까!이론적으로 지금 신세희는 기쁨과 가족의 따뜻함을 느껴야 했다.지금 그녀와 유리는 부소경의 보살핌을 이렇게 받고 있었다. 하지만 시언이는?시언이는 어디에 있는 거지?밥을 먹은 후, 신세희는 평소처럼 놀이방 밖에서 부소경과 유리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전에 부소경이 집에 꼬박꼬박 들어왔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신세희는 자신과 유리가 집으로 들어오고 난 후부터 부소경이 밤에 외출을 잘 하지 않는 모습을 발견했다.부소경은 매일 밤에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고, 밥을 먹은 후에는 유리와 놀아주었다. 처음에 유리는 부소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유리는 부소경이랑 함께하는 놀이들을 무척이나 좋아했다.신세희는 알 수 있었다. 유리가 부소경을 점점 더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남자는 밖에서 무척이나 차갑고 모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감히 다가갈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딸 앞에서는 그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곤 했다. 유리 앞에만 서면 남자는 무척이나 인내심이 많아졌다.밖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던 신세희도 조
한편으론 은근히 고소하기도 했다. 이런 걸 두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하는 거겠지."좋아." 놀이방 쪽에서 부소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만들어 줄 거야?"신유리가 신나서 물었다."아니."부소경이 단호하게 말했다."......""계속 못된 아빠라고 불러. 난 도와주지 않을 거야."부소경의 말투는 온화했지만 반박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확고함이 배어 있었다.화가 잔뜩 난 신유리가 입을 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안 할 거야, 놀고 싶지 않아. 됐지? 흥."네다섯 살 난 아이는 한 가지 일에만 줄곧 집중하지 못하는 법이었다. 아직 한참 어린 탓에 예전에도 이렇게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그럴 때마다 서시언은 항상 아이를 감싸주었다. 아이가 서시언에게 애교를 부리며 도와달라고 하면 서시언은 늘 이렇게 달랬다. "그래그래, 우리 유리가 어려워하는 건 당연히 삼촌이 도와줘야지. 공주님이 힘들다는데 어쩌겠어. 내가 다 해줄게요~"서시언은 아이에게 지나칠 정도로 사랑을 듬뿍 주었으며 한 번도 엄격하게 군 적 없었다. 그래서 아이는 삼촌에게 부리던 애교가 부소경에게도 먹힐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밖에 부소경은 얼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안 돼. 오늘 꼭 완성해야 해, 끝나면 그때 자는 거야.""...싫어! 엄마한테 도와달라고 할 거야.""그건 무효야.""나쁜 악당!""그렇게 불러. 하지만 이건 꼭 조립을 끝내야 해."부소경은 정색하며 조금도 아이를 봐주지 않았다.신세희는 어쩐지 조금 감동했다. 이게 바로 관대함과 엄격함을 겸비한 아버지의 모습이 아닐까. 그는 딸아이를 사랑하지만 절대 오냐오냐하진 않았다. 잘 먹히던 애교가 못된 아빠에게 통하지 않자 아이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너무 어렵단 말이야. 모르겠어.""어렵지만 내가 조금씩 힌트를 줄게. 하지만 오늘 내로 네가 직접 조립해야 해. 아니면 못 잘 줄 알아!"그는 신유리가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한 말투로 말했다. 아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
신세희도 어느새 아이가 장난감 조립에 빠져 스스로 완성해나가는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아이가 성취감을 느끼니 그녀도 덩달아 격려되는 것만 같았다.신유리는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인생 첫 로봇을 조립해냈다. 잔뜩 신난 아이는 두 번째 로봇도 조립하려 들었다.옆에 있던 부소경이 짐짓 미간을 찌푸리며 주의를 주었다."방금 거보다 더 어려울 텐데." 부소경조차도 아이가 성공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아직 어리니 쉬운 것부터 차근차근 해나가는 게 좋았다.그러나 신유리는 승부욕이 강한 아이였다. 아이가 똑같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흥! 날 우습게 보지마, 이 못된 아빠야. 이것도 잘 할 수 있다고. 우리 내기해!""안 될걸?"부소경이 피식 코웃음 쳤다.서른이 넘은, 평생을 냉혹하게 살아온 남자가 자기 딸과 아이처럼 장난쳤다.그조차 지금 자기가 얼마나 무해한지 알지 못했다.지켜보고 있던 신세희도 과연 딸아이가 훨씬 더 어려운 로봇을 잘 조립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딸아이를 응원하느라 꼭 쥔 손에 땀이 맺혔다.만약 30분 전의 신유리였다면 난도가 상승한 로봇을 금방 포기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부소경이 잠재력을 깨워주니 아이는 낑낑거리며 몇 번이나 다시 시도하며 포기하지 않았다. 더구나 힌트도 거절했다.그러다 네 번째 시도만에 드디어 스스로 해내고 말았다. 하나를 보고 열을 깨우친 아이는 로봇이 변신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이리저리 조립하며 다른 모양을 만들어내기까지 했다.세상에!마치 위대한 걸 발견하기라도 한 듯 신유리는 흥분해서 팔짝팔짝 뛰었다.잔뜩 신이 난 아이가 부소경을 불러댔다."못된 아빠, 아빠가 졌어, 졌다고! 내가 이겼어!" 한바탕 춤을 추고 난 뒤 신유리는 부소경의 품을 파고들었다. 말랑한 손이 스위치를 돌리듯 부소경의 코를 비틀었다. "못된 아빠가 졌어!"아이는 아버지의 코를 비틀며 잔뜩 거드름을 피웠다.밖에 있던 신세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아이를 말렸다."신유리..."
부소경은 부씨 집안을 정복하고 이 도시를 정복하여 이 땅 위의 왕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그는 딸바보였다. 사람이란 참 신기했다.유리가 이렇게 즐거워했던 적이 드물었기에 신세희는 차마 두 사람을 방해할 수 없었다. 9시 30분이 될 무렵, 졸음을 버티지 못한 유리가 꾸벅거리자 신세희는 아이를 씻긴 뒤 귀여운 피카츄 잠옷을 입혀 공주 침대에 눕혔다. 그런데 신유리가 중얼거렸다."엄마, 나 아빠…, 아니 악당이 이야기 들려줬으면 좋겠어.""……" 그녀가 말리기도 전에 부소경이 다가왔다.부소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신세희가 들려주었던 잔잔한 이야기와는 달랐다.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는 강직함과 부드러움이 섞여 있었는데 주인공이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하는 이야기였다. 생생한 이야기에 아이도 잔뜩 몰입했다. 이야기는 절정을 향해 달려갔고 그제야 부소경은 자장가를 속삭이듯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아이를 재웠다.부소경이 정성을 다해 아이를 보살피는 것을 본 신세희는 마음이 평온해졌다.그녀는 일단 샤워하기로 했다.그녀도 이젠 어엿한 직장인이었기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만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다.세면실에 도착한 그녀는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하루 새 텅 비었던 세면실에 스킨케어 제품, 마스크팩, 색조화장품들이 잔뜩 비치되어 있었다. 그녀도 들어본 적 있는 성분이 순한 유명 브랜드 제품들이었다. 굳이 광고를 많이 하지 않아도 화장품 자체의 품질만으로 사랑을 받으며 여태 이어져 온 브랜드였다. 예전에 그 작은 도시에서 지낼 때 강정운이 그녀에게 격려차 이런 화장품 세트를 준 적 있었다. 간단한 3종 세트일 뿐인데도 이백만 원을 웃돌았다.그때 신세희 덕분에 프로젝트를 무사히 완성했다며 상으로 준 것이었는데 처음엔 그저 괜찮은 브랜드인 줄만 알았다. 그녀는 유명 쇼핑몰에 가서 저렴한 화장품으로 교환하려고 했었다. 그러다 이백만 원짜리 화장품인 걸 알게 되었고 사용하기 아까웠던 그녀는 돈으로 환불했다.현재 세면실에 갖춰진 건 그 3종 세트
다음 날.신세희는 커튼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드는 아침 햇살에 눈을 떴다. 부소경은 이미 옆자리에 없었다. 그는 시간을 잘 준수하는 사람이었다.반면 신세희는 몸이 피곤하면 다음 날 아침 침대에서 늑장을 부리는 타입이었다.어젯밤은 특히 배로 피곤했다.아직도 다리가 휘청거려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던 그녀는 내딛는 첫걸음 만에 벽을 짚어야 했다.세면실에서 나온 부소경이 그녀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보고 얼른 다가갔다."왜 그래?"신세희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울컥한 그녀가 불만을 터뜨렸다."왜 그러냐고? 다 당신 때문이잖아요. 당신이 뭘 했는지 정말 몰라서 그래요?""...…"한바탕 짜증을 내던 신세희는 흠칫했다. 서먹하고 심지어는 원수지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방금 내뱉은 말은 마치 신혼부부 사이에 앙탈을 부리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신세희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그녀는 부소경을 무시한 채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주방으로 갔다.두 사람은 말없이 식사에 집중했다.옷을 갈아입으러 드레스룸에 가니 부소경과 신유리 부녀가 문밖까지 쫓아왔다."엄마, 예쁘게 입어야 해."신유리가 애늙은이 같은 어조로 말했다. 신세희가 딸을 바라보며 왜 그러냐고 물었다."엄마가 예쁘게 입어야 내가 유치원에서 체면이 서지."신세희는 어제저녁 평범한 옷을 입고 딸을 데리러 갔을 때 학부모가 자기를 비웃어 덩달아 유리의 자존심까지 구겨졌던 일이 떠올랐다.신세희는 고민하며 드레스룸을 서성거렸다.옷이 너무 많아서 눈앞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결국 그녀는 아이보리 바탕의 잔잔한 도트 무늬 블라우스를 골랐다.슬림핏의 블라우스는 카라 앞부분에 리본으로 포인트를 주었고 가슴 부위에 자잘한 주름이 잡혀 있어 여성스러우면서도 귀여웠다. 신세희는 그 위에 검은색 세미 정장 재킷을 걸쳤고 하의로는 짙은 색상의 슬랙스를 매칭했는데 다리가 훨씬 더 길어 보였다.힐까지 신으니 다섯 살 난 신유리는 연신 감탄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부소경도 딸아이와 똑같은 표정을 지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