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아.”전태윤은 아무 말 없는 그녀가 걱정돼 조심스럽게 불러보았다.“너 괜찮아?”‘내가 너무 심하게 기절시켰나? 바보 된 건 아니겠지?’“전태윤!”하예정은 정신을 차리고 이를 악물며 고함을 질렀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더니 포효하는 사자처럼 전태윤에게 덮쳐들어 한 손으로 그의 옷깃을 잡고 다른 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잡았다.그리고 분노에 찬 욕설을 퍼부었다.“전태윤 이 나쁜 놈아, 너 진짜 나빠. 어떻게 날 기절시킬 수 있어?!”그녀는 뒷목이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다!‘나쁜 자식, 날 사랑한다면서 기절시켜? 이건 분명 날 더 아프게 만드는 거잖아! 젠장, 이젠 당신이 하는 말 한마디도 안 믿으래. 지난 4개월 동안 네가 지어낸 거짓말 속에서 지내왔어. 너에 대한 믿음이 1도 없어!’“예정아, 예정아.”전태윤은 그녀에게 잡힌 목덜미를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예정이 정말 자신을 기절시키고 도망이라도 칠까 봐 두려웠다.드디어 그녀의 손에서 벗어난 전태윤은 좀 전처럼 터프하게 두 팔을 벌려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하예정은 그의 품에 안겨 꼼짝할 수 없었다.“예정아, 널 기절시켜서 미안해. 하지만 그땐 널 어떻게 남겨둘지 몰라서 그랬어. 날 떠나지 마 제발, 응? 맹세할게, 이젠 더는 널 속이지 않아! 그러니까 제발 날 떠나지 말아줘, 예정아!”전태윤은 그녀가 없는 나날을 감히 상상할 엄두가 안 났다. 그때의 전태윤은 과연 어떤 몰골을 하고 있을까?“이거 놔요, 태윤 씨! 이젠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수가 없어요. 내 앞에서 한 맹세 개나 줘버려요! 내게 수없이 맹세해놓고 번마다 속였잖아요! 내가 말했죠, 수없이 날 속이는 날엔 우리 무조건 이별이라고! 난 이렇게 거짓말에 둘러싸인 삶을 살고 싶지 않아요. 어떤 게 진짜 당신인지 모르겠어요. 어느 말이 진심인지 모르겠다고요. 그러니까 날 그만 놔줘요. 안 그러면 당신 평생 용서 안 할지도 몰라! 감히 날 기절시켜? 기절을... 아파 죽겠네, 나쁜 자식. 항상 날 아프게만 하지. 당
“이게 바로 당신 성격이죠. 무릇 자기중심적이고 모든 걸 지배하는 것에 적응되었어요. 일방적이고 횡포하며 자만하고 심지어 극단적이기까지 하잖아요!”하예정의 말에 야유가 가득 담겨 있었다.전태윤의 성격이 바로 이러했다.초고속 결혼 초기에 그는 이런 모습이었다. 아무리 일반인인 척 해보아도 이미 형성된 성격이라 고칠 수 없었다.하여 부부의 감정이 무르익을 때 두 번 갈등을 빚기도 했다. 냉전을 끝낸 후 전태윤의 거만하고 일방적인 성격도 조금 호전되었다.다만 지금 또다시 본모습을 드러냈다.이런 전태윤과 함께 지내는 건 실로 힘든 일이다.게다가 하예정은 워낙 독립적인 여자다 보니 전태윤과 갈등을 빚을 때 종종 충돌이 더 커진다.전태윤은 분명 하예정의 화를 풀어주고 싶지만 잦은 실수로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 되어 결국 하예정의 분노만 더 커져갔다.“예정아...”전태윤은 괴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풀어주고 살며시 그녀 얼굴을 어루만지며 겨우 말을 이었다.“김진우 찾아가지 마! 내가 힘겹게 그를 관성에서 내쫓았어. 더는 널 찾아오지 못하게 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김진우한테 가지 마.”“진우를 관성에서 내쫓았다고요? 혹시 효진의 고모를 찾아갔어요?”하예정이 질문하더니 곧바로 저 자신을 비웃듯이 말했다.“놀랄 게 뭐야? 당신이 내 뒤에서 한 짓들 난 전혀 모르잖아. 태윤 씨는 날 가족으로 생각하긴 했나요? 가족이라니, 내가 무슨 자격으로 당신 가족이 되겠어요? 여자는 이래요, 시댁에서는 남 취급당하고 친정에 가면 손님 취급당하죠. 내가 어찌 감히 당신 가족이 되길 바라겠어요... 당신은 나 몰래 그렇게 많은 짓을 꾸몄고 4개월씩이나 속여왔어요. 나를 아예 남남으로 본 거죠!”하예정은 말하면서 속상한 듯 눈시울이 빨개졌지만 애써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버텼다.전태윤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그의 가식적인 위로를 받고 싶지 않았다.“예정아, 넌 내 가족이야. 나랑 평생 함께할 아내란 말이야. 내가 미안해. 네 마음을 아프게 했어. 날 향한
하예정이 방문을 나섰다.전태윤은 감히 아무 말도 못 한 채 묵묵히 그녀를 따라갔다.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전태윤도 조심스럽게 뒤따라갔다.그녀가 밖에 나가자 전태윤도 함께 따라 나갔다.그는 어느덧 하예정의 그림자가 돼버렸다.하예정이 별장 입구에 다다라 대문을 열려고 했지만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전태윤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키 내놔요!”장씨 아저씨와 경호팀들, 그리고 도우미들까지 저 멀리서 따라오며 아무도 감히 선뜻 나서지 못했다.사모님이 대노하시는데 누가 감히 나서서 타이르겠는가!사모님의 말투는 한없이 차가웠고 한편 그들의 도련님은 어느덧 사모님의 그림자가 돼버렸다.전태윤은 키를 꺼냈지만 하예정에게 건넨 게 아니라 한 꾸러미 키를 힘껏 밖에 내던졌다.그는 키 뭉치를 저 멀리 버리고 텅 빈 두 손을 들어 하예정에게 보여줬다.“난 키 없어.”하예정은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당장이라도 그의 멱살을 잡고 한바탕 두들겨 패고 싶었다.하예정은 또다시 장씨 아저씨 일행에게 시선을 돌렸다.이에 장씨 아저씨가 황급히 말했다.“사모님, 저 보실 필요 없어요. 저도 키 없어요.”있어도 사모님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다른 사람들도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저희도 키 없어요, 저희 보지 마세요, 사모님.”‘제발 저희 좀 놔주세요!’하예정도 다 알고 있다. 전태윤이 그녀를 집 밖에 내보내려 하지 않는 한 저들은 키가 있어도 그녀를 도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하예정은 높은 담벼락을 올려다보았다.문이 너무 높아 담벼락을 넘는 건 무리수였다.담벼락은 대충 봐도 2미터 높이가 되었다.별장 정원의 담벼락은 전부 그 정도로 높았다!물론 이 또한 전태윤다운 인테리어였다. 그는 남들이 훔쳐보는 걸 싫어하니까.담벼락이 높으면 외부의 감시를 차단하고 그의 사생활을 잘 보호할 수 있다.하예정은 주먹다짐을 할 줄 알지만 경공을 습득한 건 아니다. 2미터 높이가 되는 담벼락을 그녀는 도무지 뛰어넘을 수 없었다.하예정은 몸을 돌려
하예정은 분노가 극에 달했지만 밖에 나갈 수 없어 결국 방에 돌아가 문을 잠갔다. 그녀는 하예진이나 친구들한테 도움을 청하려고 휴대폰을 꺼냈지만 배터리가 다 돼서 꺼진 상태였다.“날 죽이려고 작정했네!”하예정이 방문을 잠그고 있는 동안 전태윤도 더는 그녀를 집착하지 않았다.그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도와줄 상대를 찾고 있었다.전태윤은 습관적으로 소정남에게 전화를 걸었다.소정남은 이제 막 심효진을 서점에 데려다주었다.심효진은 충전기를 꺼내 스쿠터를 충전했다.“정남 씨, 태윤 씨가 예정이를 어떻게 했는지 여쭤봐 봐요.”심효진은 전태윤이 강제적으로 하예정을 끌고 간 게 마음에 걸렸다.소정남이 알겠다며 답했다.“지금 바로 전화해서 두 사람 어떻게 됐는지 물어볼게요.”말은 이렇게 해도 소정남은 진작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는 전태윤을 너무 잘 알고 있다.이번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전태윤은 아마 하예정에게 버림받을 것이다.한순간의 거짓말은 짜릿해도 아내를 잃는 슬픔은 죽는 것만 못할 텐데, 아무튼 모든 게 자업자득인 것을.애초에 그가 신분을 숨기고 하예정의 성품을 지켜보겠다고 할 때 모두가 이해했다. 하지만 그 후로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었지만 전태윤은 줄곧 우유부단하고 온갖 걱정에 휩싸여 여태껏 지체했다.이러니 하예정이 화를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소정남이 전화를 걸려고 할 때 마침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심효진에게 말했다.“태윤이가 전화 왔네요.”“얼른 받아요.”심효진이 조급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대신해서 전화를 받고 싶을 지경이었다.소정남이 전화를 받자 그녀는 바짝 다가와 귀를 쫑긋 세우고 전태윤의 목소리를 들었다.“정남아, 도와줘.”전태윤이 지친 말투로 말했다.“예정이가 엄청 화났어. 나 달래지 못하겠어, 어떡해 이젠? 정남아, 나 인제 어떡하냐고? 날 떠난대, 분명 날 떠날 거야. 예정이 성격 내가 잘 알아. 날 뻥 차버려서 궁지로 몰아넣을 게 뻔해. 아까는 또 내가 전씨 그룹 도련님인
심효진이 말했다.“예정이는 태윤 씨보다 내가 더 잘 알아요. 감히 장담하는데 걔 절대 그런 짓 안 해요. 그러니까 얼른 돌아오게 놔줘요.”“효진 씨는 예정이가 아니잖아요. 효진 씨 장담 나 못 믿어요.”심효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지금 전태윤은 무슨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심효진이 아무리 떠들어봤자 소용없을 노릇이다.소정남이 재빨리 휴대폰을 가져가며 심효진을 달랬다.“효진 씨가 이해해요. 태윤이 지금 완전히 미쳤어요. 이런 감정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서툰 것도 당연해요. 효진 씨가 화내봤자 몸만 상해요.”심효진은 입을 벌렸지만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평소 전태윤은 성숙하고 듬직해 보였는데, 비록 정색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대인관계나 업무 처리가 매우 원만했는데 하예정을 감금하고 문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다니!“태윤아, 예정 씨 지금 좀 어때?”소정남이 관심하며 물었다.“네가 예정 씨를 어떻게 했냐고?”“나 아무것도 안 했어. 자꾸 나가고 싶어 하니까 문 잠그고 열쇠를 버렸어. 사다리를 찾아서 담벼락을 뛰어넘으려 하는 걸 내가 아예 사다리를 버렸어. 그리고 지금 화내며 방에 돌아가 문을 잠가버렸어. 정남아, 나 대체 어떻게 해야 해? 넌 지금 나보다 정신이 맑을 거 아니야? 네가 좀 말해봐, 나 어떻게 해야 하지? 뇌가 정지한 거 같아. 뭘 어떻게 하면 될지 모르겠어. 마음만 복잡하고 자꾸 횡설수설하기만 해.”전태윤은 한번 사랑하면 깊이 사랑하는 스타일이다.하예정은 이미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여자가 되었다.그는 하예정을 잃는 고통을 감당할 수가 없다.왜 여태껏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 했냐고? 그녀를 잃을까 봐!예준성이 특별한 날을 골라 하예정의 기분이 좋을 때 다른 방식으로 진지하게 고백해보라고 했고 그는 곧이곧대로 실천에 옮겼다.하지만 폭풍우는 여전히 휘몰아쳤다.전태윤은 폭풍우에 쫄딱 맞았고 눈앞이 캄캄하여 방향조차 잡을 수 없었다.30년 인생에서 이런 무기력함은 처음 겪어보았다.그는 항상 자신감에 차 있었
“태윤아, 일단 나부터 진정해야겠어. 내가 생각을 마치면 그때 다시 연락할게. 단 너 절대 예정 씨 다치게 하는 일 없어야 해! 안 그러면 너희 두 사람 정말 이별할지도 몰라.”소정남은 전태윤의 말을 듣고 울화가 차올라 얼른 전화를 끊고 싶었다. 일단 저 자신부터 마음을 가라앉히고 심효진 앞에서 험한 말을 하는 나쁜 이미지를 남기지 말아야 했으니까.전태윤의 처참한 처지를 보고 있자니 소정남은 애초에 심효진을 속이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진심으로 그녀를 대하고 절대 전태윤처럼 거짓말을 숨 쉬듯이 내뱉지 않기를 너무 잘한 듯싶었다.소정남은 전태윤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를 꺼버렸다.“왜 그냥 끊어요? 나 태윤 씨 더 설득해보려 했단 말이에요. 계속 저렇게 나가면 예정이가 점점 더 크게 화낼 거예요. 나중에 한 맺힐까 두려워요.”소정남이 말했다.“효진 씨가 제대로 듣지 못해서 그래요. 나 진짜 한심해서 미쳐버리겠어요. 태윤이 때문에 내가 다 돌아버리겠다고요. 일단 진정 좀 해야겠어요. 효진 씨, 난 왜 하필 이렇게 감정에 서툰 상사를 만나게 된 걸까요? 나 너무 가여워!”소정남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줄곧 전태윤을 도와 어떤 문제든 해결했지만 단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다.하지만 감정 문제로 도움을 청했을 때 소정남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가장 큰 문제는 전태윤이 일방적으로 살아온 게 습관이 되었는데 겨우 호전됐다가 지금 또다시 완전히 드러나고 말았다.“단언컨대 두 사람 갈등이 몇 개월은 지속할 거예요. 그 사이에 절대 원래처럼 돌아가지 못할 거예요.”심효진도 그의 말에 공감했다.“내가 아는 예정이는 분명 이혼 얘기를 꺼낼 거예요. 하지만 걔는 절대 이 문제를 회피할 사람이 아니에요. 이건 내가 장담해요. 예정이는 반드시 태윤 씨랑 마주 앉아 이혼 문제를 논의할 거예요.”어쩌면 하예정은 지금 이미 이혼합의서를 작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심효진의 말을 들은 소정남이 대답했다.“효진 씨, 부디 예정 씨를 잘 타일러요. 예정 씨가
“잃는 게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제 드디어 거짓말을 한 대가를 치를 준비가 돼서 그런 거예요.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생긴 거죠. 다만 지금 잠시 두려움에 휩싸여 마음이 혼란스러워서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 같아요.”심효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우리는 당사자가 아니라서 이해가 되지만 절대 예정의 서러움과 분노를 체감할 수 없어요. 아무튼 난 예정이를 설득하지 않을 거예요. 설득한다고 해도 나중에 다시 할래요. 지금은 애가 서러워 죽을 지경인데 내가 왜 태윤 씨를 도와야 하죠? 그러면 예정이만 더 속상할 거라고요! 남편한테 감쪽같이 속은 건 예정인데 우리가 화풀이해주지 못할뿐더러 태윤 씨를 용서하게 설득하라고요? 그런 일은 나 절대 못 해요. 정말이지 능력만 된다면 내가 대신 태윤 씨를 한바탕 두들겨 패고 싶다니까요. 성기현 대표님은 어떤 생각인지 모르겠네요. 아마 사촌오빠로서 태윤 씨를 두들겨 패고 싶을 걸요. 그럼 나도 화가 조금은 풀릴 것 같아요.”소정남은 말을 잇지 못했다.전태윤은 본인 노력으로 너무 많은 사람을 건드렸다.“어머, 소현 씨 어떡해요? 이틀 뒤에 돌아온다고 했는데 오자마자 예정의 남편이 전씨 그룹 도련님이란 걸 알게 되면 과연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어요! 한때 미치도록 좋아했던 도련님이 정작 예정이랑 초고속 결혼을 한 남편이라니, 이게 말이 돼요?”심효진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찔거렸다.“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이래? 소설 속 전개가 현실에서 일어나다니. 이래서 소설은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는 거였네.”소정남이 재빨리 물었다.“대체 어느 소설에서 이런 전개가 나오나요? 남자 주인공은 결국 어떻게 여자 주인공의 용서를 구했대요? 태윤이한테 추천해서 배우라고 해야겠어요.”심효진이 솔직하게 대답했다.“연재소설이라 작가가 아직 거기까지 쓰지 못해서 나도 결말은 몰라요. 여자 주인공이 과연 어떻게 남자 주인공을 용서했을까요?”소정남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막막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날 봐도 소용없어요. 내가 쓴 것도 아닌데 답안을 얻을
홀로 방에 갇힌 하예정은 뭘 하고 있을까?그녀는 방에서 펜과 종이를 찾더니 소파에 앉아 열심히 이혼합의서를 작성했다.결혼 후 부부는 따로 집을 구매하지 않아 딱히 재산분할을 할 게 없었다.전태윤은 전에 이혼하게 되면 발렌시아 아파트와 SUV를 하예정에게 주겠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하예정은 전혀 갖고 싶지 않았다.그건 전부 전태윤이 그녀를 속이려고 일부러 구한 집이니까!차도 갖고 싶지 않았다.하예정이 지금 몰고 다니는 차는 전태윤이 사준 차이기에 이혼할 때 일전 한 푼 빚지지 않고 모조리 돌려줄 것이다.그와 재산분할을 하지 않고 그에게 4개월 청춘을 손해 본 배상금도 받지 않을 것이다. 각자 명의 하의 재산은 각자 가져갈 것이니 서로 빚진 것도 없다. 전태윤이 이혼 서류에 사인만 해주면 된다.한편 전태윤이 도리어 그녀에게 청춘 손해배상금을 물으라면 그녀도 조금은 줄 의향이 있다. 어쨌거나 상대는 전씨 그룹 도련님인데 초라한 자신과 함께 살아줬으니 고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예정은 당연히 그에게 배상금을 조금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요구하면 그녀도 거부할 것이다.그녀의 능력 범위 내에서만 돈을 줄 수 있다.“똑똑.”이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예정아, 나 문 좀 열어줄 수 있어?”상대는 다름 아닌 전태윤이었다.하예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지금 전태윤의 얼굴만 봐도 분노가 차오르니까.“예정아, 방에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안 갑갑해? 나와서 나랑 함께 정원 산책해. 우리 집 앞마당에 꽃이 엄청 많이 피었어. 내려와서 예쁜 꽃구경 하자. 널 위해 일부러 사람들을 시켜서 가꾼 거야.”하예정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고 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예정아, 배고프지? 내가 사람들 시켜서 너 좋아하는 요리를 많이 만들어오라고 했으니 문만 조금 열면 감칠맛 나는 음식 향이 퍼질 거야. 너도 분명 배고플 거잖아.”전태윤은 또 맛있는 음식들로 그녀가 문을 열게끔 달래보았다.방안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그가 계속 말했다.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