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청하는 하예정과 함께 별장을 한 바퀴 산책한 후 낮잠을 자겠다는 핑계로 들어가려 했다.“언니는 들어가서 쉬세요. 전 여기 앉아서 풍경 좀 감상할게요.”하예정은 별장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화려한 집안보다 마당의 풍경이 더 마음에 들었다.아까 산책하다가 담장 옆의 텃밭을 발견했는데 아무래도 이모가 직접 가꾼 텃밭인 듯싶다.이경혜가 지금은 재벌 집 사모님이긴 하지만 어릴 적엔 보육원에서 힘든 가난을 겪으면서 자랐다. 이젠 퇴직하고 회사 일을 신경 쓸 필요도 없으니 직접 채소를 기르는 것도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추워요? 추우면 도우미한테 제 옷 좀 가져다주라고 할게요.”하예정네 자매는 이모 집에서 밥을 먹고 수다나 떨다가 가는 줄 알고 다른 여벌 옷을 챙겨오지 않았다. 며칠 머무르라는 이경혜의 제안에 저녁 무렵에 집으로 돌아가 갈아입을 옷을 챙길 생각이었다.“고마워요, 언니. 안 추워요.”유청하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그럼 전 이만 들어가서 눈 좀 붙일게요. 낮잠 자는 습관이 있어서 이 시간만 되면 졸려요.”하예정의 생활 패턴도 비슷하여 이해는 되었다.유청하가 별장 안으로 들어간 후 하예정은 휴대 전화를 꺼내 카카오톡을 열어 전태윤의 프로필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의 프로필사진이 함께 찍은 결혼반지 사진으로 바뀌어있었다.하예정의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번졌고 그에 대한 불만도 점차 사라졌다. 그에게 영상통화를 걸자 전태윤이 바로 받았다.“예정아.”그의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평소와 달리 맥이 축 처진 목소리에 하예정은 저도 모르게 걱정이 밀려왔다. 아무래도 그녀가 홧김에 술집에 간 바람에 출장 중에도 그녀가 걱정되어 밤새 달려왔다가 다시 돌아가느라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잘 못 잤어요?”“아니, 감기 걸린 것 같아.”한겨울에도 계속 찬물로 샤워하니 몸이 버틸 리가 있나.하예정이 한마디 했다.“옷 많이 입고 밥 제때 먹어요. 난 괜찮아요. 술 몇 잔 마시고 마음속의 답답함을 털어내면 멀쩡해져요.”
그리고 소통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알았어.”전태윤도 조마조마하던 마음을 드디어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감기 걸렸으면 따뜻한 물 많이 마시고 퇴근 후에 병원 가봐요. 아니면 그냥 지금 가요. 괜히 끌다가 더 심해지면 어떡해요. 지금 열은 나요?”전태윤이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짚어보았다.‘진짜 열나네? 어쩐지 머리도 무겁고 윙 하더라니.’하지만 하예정에게는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았다.“열은 안 나. 체온은 정상이야. 나 몸은 건강하니까 걱정하지 마. 이따가 약국에 가서 감기약 사 먹으면 괜찮아져. 이모 집에 가니까 어때? 이모부랑 사촌 오빠, 언니들이 잘해주지?”“태윤 씨 지금 안색이 안 좋아요. 입술도 조금 빨갛고. 정말 열이 안 나요?”하예정이 꼼꼼하게 살폈다.“이모부랑 사촌 오빠들이 잘해줘요. 소현 언니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태윤 씨, 혈연이라는 게 정말 신기해요. 나랑 소현 언니 서로의 존재도 몰랐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엄청 잘 통하더라고요.”전태윤이 씩 웃었다.“나 대신 이모님한테 인사 전해줘. 당분간은 인사드리러 못 가고 구정 휴가 때 시간이 돼. 그때 같이 이모님한테 인사드리러 가자.”그는 성씨 가문에 인사하러 가기 전에 하예정에게 자신의 신분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하예정이 무슨 반응을 하든 모두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할머니의 말씀대로 이건 그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우리 이모도 이해해요. 이모가 내일 파티를 열어서 사람들한테 나랑 언니를 소개하겠대요. 태윤 씨가 옆에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난 그런 자리가 싫거든요. 태윤 씨가 옆에 있었더라면 훨씬 더 마음이 놓였을 거예요. 태윤 씨가 나한테 얼마나 큰 안전감을 주는지 모르죠? 나한테 무슨 어려운 일이 닥치든 항상 방법을 생각해서 해결해줬어요. 태윤 씨는 나만의 슈퍼맨 같아요.”전태윤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그건 내가 운이 좋아서 매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거야. 앞으로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나한테 얘기해. 그리고 파티
“알았어요. 어차피 학생들이 방학이니까 나도 그리 바쁘진 않거든요. 태윤 씨가 말을 듣지 않으면 바로 달려가서 공처가로 만들어버릴 거예요. 동료들 앞에서 망신이나 당하게.”전태윤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네가 그러니까 더 일부러 병원에 안 가고 싶잖아. 네가 바로 달려오게.”“그랬다간 가만 안 둬요!”전태윤은 일부러 겁먹은 척했다.“아이고 무서워라. 내가 어찌 감히 그러겠어.”“됐어요. 그만 얘기하고 얼른 병원 가봐요. 다 큰 어른이 자기 몸도 잘 못 챙기면 어떡해요.”하예정은 한마디 투덜거린 후 영상통화를 끊었다.“예정아.”“언니.”하예정은 가까이 다가오는 언니를 바라보았다.“우빈이 자?”“응. 잠든 거 보고 운동도 할 겸 나왔어. 나 요즘 매일 세 번 뛰고 식단 관리도 시작했어. 열심히 다이어트 해보려고.”하예진이 발걸음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3년여 동안의 결혼 생활을 해보니까 여자는 자기 관리도 해야 하고 경제적으로도 독립해야 하더라고. 남자한테 너무 기대선 안 되고 ‘내가 먹여 살릴게’ 같은 어처구니없는 말은 절대 믿어선 안 돼. 그랬다간 언젠가는 내 꼴이 돼. 남자는 돈이 생기면 나쁘게 변해. 주형인도 사장직에 오른 후부터 변했어. 돈이 많아지니까 그런 거야.”하예정은 다이어트 하려는 언니를 응원했다.“하루에 세 번이나 뛰어? 아침저녁으로 두 번만 뛰어도 돼.”식사할 때도 하예진이 탄수화물을 별로 먹지 않고 얘기를 나눌 때도 디저트엔 손도 대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 전에는 디저트라면 사족을 못 쓰던 언니였는데.“매일 세 번씩 뛰면 다이어트 효과도 더 빨리 나타나겠지.”날씬한 몸매로 돌아오기 위해 하예진은 큰마음을 먹었다. 최대한 토스트 가게를 오픈하기 전에 결혼 전의 몸무게로 돌아와야 했다.그녀는 아직 31살밖에 안 됐고 아직 한창이었다. 이혼 한번 했다고 인생을 포기해선 안 되고 다시 일어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예정아, 언니랑 산책 좀 할까?”하예진의 말에 하예정이 웃음으로 답했다.
성기현은 속으로 전태윤을 몇 마디 욕했다.하예정이 초고속 결혼한 남편의 이름을 얘기했을 때까지만 해도 같은 전태윤인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출장 갔다는 소리에 성기현은 전태윤이 바로 하예정의 남편이라고 완전히 확신했다.“언제 돌아오는데요?”“그렇게 저한테 커피 사주고 싶으세요?”“전태윤 씨, 시치미 좀 그만 떼요. 저 다 알고 있어요. 예정이가 낀 반지랑 태윤 씨 반지가 커플 맞죠? 손만 공개하고 얼굴은 공개하지 않은 아내가 예정이 맞죠?”전태윤은 입을 꾹 다문 채 인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에 성기현은 그가 인정한 것으로 여겼다.“두 사람 언제 혼인신고 했어요? 예정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기 전인가요? 유부남이 됐으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우리 소현이는 그것도 모르고 태윤 씨네 회사 앞에 가서 공개 고백까지 했잖아요! 그 바람에 소현이는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했지만 태윤 씨는 여전히 고상하게 그런 소현이를 바라만 봤어요. 걔가 아무리 대시해도 받아주지 않을 거잖아요. 그리고 저랑 태윤 씨가 라이벌인 것도 뻔히 알면서도 태윤 씨를 좋아한 소현이를 웃었고 스스로 고생을 찾아서 한다고 웃었겠죠. 그나저나 예정이한테는 왜 당신이 최고 재벌가인 전씨 가문의 도련님이란 신분을 숨긴 거예요?”성기현은 성소현이 맨날 전태윤에게 매달렸지만 사실 전태윤은 진작 하예정과 몰래 혼인신고 했다는 것만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었다. 여동생이 저도 모르게 남의 가정에 끼어든 제삼자가 돼버렸다.만약 전태윤이 계속 아무런 정보도 흘리지 않고 결혼반지도 끼지 않았더라면 성소현은 아마 아직도 그에게 미쳐있었을 것이다.“예정이한테는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에요? 예정이랑 소현이가 절친인 거 몰라요? 이젠 사촌 사이가 됐는데 예정의 남편이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전씨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소현이가 알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예정이는 또 뭐라 생각하고 사촌 자매끼리 어떻게 지내야 하냐고요!”“기현 씨.”남편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유청하가 재빨리 다가와 남편에게 귀
전태윤이 전화를 뚝 끊자 오히려 화가 가라앉은 성기현이 싸늘하게 웃었다.“전태윤, 언제 날 형님이라고 부르는지 똑똑히 지켜볼 거야. 내가 너 하나 어쩌지 못할 것 같아?”그에게 물을 가져다주러 온 유청하가 그의 뒷얘기를 듣고 한마디 했다.“이젠 가족이 됐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전태윤 씨가 무슨 이유로 신분을 숨겼든 예정 아가씨의 남편인 사실은 변함이 없어요.”“내가 전태윤이랑 얼마나 오랜 시간 경쟁했었는데요. 지금까지도 그 승부가 가려지지 않았어요. 어쩌다가 전태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갈 기회가 생겼는데 놓쳐서야 하겠어요?”성기현이 물을 받고 두어 모금 마셨다.“내가 지금 전태윤 때문에 얼마나 화가 났는데요. 전태윤이 출장 갔다 돌아오면 그대로 갚아줄 생각이에요. 나한테 밥을 사줄 때 예정이도 불러서 예정이 앞에서도 날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는지 두고 볼 거예요. 여보, 나의 라이벌인 전태윤이 날 형님이라고 부르는 모습만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와요.”“당신 정말 어지간히 화난 게 아니네요.”유청하가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같은 연배인데 전태윤 씨가 기현 씨를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협박이라도 할 셈이에요?”“날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하예정 앞에서 난처하게 할 거예요. 예의 없이 형님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고요.”유청하는 어이가 없었다.왠지 남편과 전태윤이 곧 한바탕 기 싸움을 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성기현에게 모든 비밀을 들킨 전태윤은 처음에는 걱정됐지만 성기현의 전화를 끊은 후 잠시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성기현이 이토록 화를 내는 건 그의 친여동생 때문이지, 하예정을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성소현이 아직 그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기 전까지 성기현은 그의 진짜 정체를 하예정에게 얘기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그뿐만 아니라 어쩌면 갖은 방법으로 그를 도와 계속 숨기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앞으로 성기현 앞에서도 대놓고 하예정과 애정행각을 해도 된다.전태윤은 출장 일정이 끝나고 돌아가서
소정남이 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들어와.”서재 문이 열리고 한 경호원이 초대장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소정남은 누군가 파티에 소지훈을 초대한 걸로 생각했지만 경호원은 곧장 그의 앞으로 다가와 초대장을 그에게 건네며 깍듯하게 말했다.“도련님, 이건 성씨 가문의 큰 도련님이 보낸 초대장입니다. 성씨 가문에서 내일 저녁에 파티하는데 도련님을 초대했어요.”“내 거라고?”소정남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성씨 가문의 파티 초대장을 성기현 씨가 특별히 보냈다고? 그것도 내일 저녁에? 이렇게나 급하게?”다른 가문에서 파티를 열 땐 며칠 전에 미리 초대하거나 심지어 십여 일 전에 초대하는 가문도 있었다. 그래야만 손님들도 준비할 시간이 있으니까.성씨 가문에서는 임시로 급하게 파티하는 것 같은데?이경혜가 두 조카를 찾았다는 사실을 떠올린 소정남은 성씨 가문의 이번 파티의 진짜 목적을 대충 짐작했다. 그녀가 두 조카를 관성의 상류 사회에 들이려는 게 아닐까?‘하하, 전태윤 인제 어떡하지?’“성씨 가문 큰 도련님께서 도련님한테 전해달라는 말씀이 있어요.”“뭔데?”“심효진 씨도 초대장 명단에 있답니다.”소정남의 두 눈이 반짝이더니 씩 웃으며 경호원에게 물었다.“성씨 가문에서 보낸 그 사람 갔어?”“아직 밖에서 도련님의 회답을 기다리고 있어요.”소정남은 초대장도 열어보지 않고 경호원에게 말했다.“가서 전해. 나 내일 저녁에 시간 맞춰서 꼭 간다고.”“알겠습니다.”경호원이 공손하게 대답한 후 자리를 떠났다. 소정남은 초대장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왠지 앞으로 성기현 씨를 만나도 함부로 대들지 못할 것 같아.”“심효진 씨랑 성기현 씨는 아무런 관계도 없잖아. 아까 그 말은 전태윤 씨한테 했어야지.”소지훈은 일을 마무리한 후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웃을 듯 말 듯 했다.“내가 왜 아직도 결혼할 생각이 없는지 알겠지?”“그건 형이 인연을 만나지 못해서 그런 거야. 태윤이 봐봐, 예전에는 얼마나 고집이 셌는데 지금은 순순히
쇼핑하면서 옷을 살 때 전 남편과 내연녀를 보면 어떤 기분일까?하예진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오히려 서현주가 가게로 들어와 하예진 자매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주형인의 팔짱을 꽉 꼈다. 마치 그들이 커플이라는 걸 다른 사람이 모르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말이다.“아빠.”하예정에게 안긴 주우빈이 주형인을 보자마자 아빠라고 불렀다. 그러자 가게에 있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주형인을 쳐다보았다.주형인의 옆에 서 있는 젊고 예쁜 서현주와 주우빈이 엄마라고 부르는 하예진을 번갈아 보던 가게 점원이 동정 어린 눈빛으로 하예진을 쳐다보았다.‘쇼핑하다가 남편이 바람피우는 걸 봤나 보네...’“우빈아.”점원의 따가운 눈빛 속에 주형인이 하예정 앞으로 걸어갔고 서현주도 그 뒤를 따랐다.“우빈아, 아빠가 안아보자.”주형인이 주우빈을 안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하예정은 바로 건네지 않고 먼저 주우빈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만약 주우빈이 아빠에게 안기길 원한다면 주형인이 몸을 구부리고 아들을 안으면 되니까.아직 어린 주우빈은 부모가 이혼한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아빠와의 감정이 그리 깊진 않았지만 딱히 거부하진 않았다. 주형인이 안으려 하자 주우빈도 그에게 안겼다.그 모습에 점원들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혹시라도 다툼이 벌어지면 당장 신고할 생각이었다.하예진은 계속 아무렇지 않은 척 옷을 골랐다. 이 브랜드의 옷을 결혼 전에 몇 벌 산 적이 있었는데 참으로 마음에 들었었다. 하여 이모와 함께 쇼핑하러 나오자마자 습관적으로 이 브랜드의 가게를 선택했다.그런데 아쉽게도 이 브랜드는 뚱뚱한 사람이 입을만한 큰 사이즈가 없었다.“저 사람은 제 전남편이에요.”덤덤한 하예진과 달리 점원들은 뭔가 깨달은 듯 두 눈이 반짝였다.‘어쩐지 남편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 걸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옷을 고른다 했더니, 전 남편이었구나.’“하예진, 너도 옷 사러 왔어? 이 브랜드 옷 싸지 않은데.”주형인이 아들과 함께 노는 모습을 본 서현주는 기분이 아니꼬웠지만 뭐라 얘기할
하예진이 아직 주형인의 아내였을 때 주형인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서현주가 그런 삶을 보내고 있다. 그녀에 대한 주형인의 사랑이 정말 진심인 듯싶다.하예진을 이기고 쉽게 아내 자리를 꿰차고 주형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서현주는 하예진 앞에서 애정행각을 벌여 그녀를 자극하고 싶었다.하지만 하예진은 서현주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하여 자기 옷만 골랐다. 그 모습을 본 서현주가 또다시 빼앗으려 했다.하예정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싸늘하게 말했다.“서현주, 우리 언니가 만만한 게 아니라 귀찮아서 너한테 대꾸하지 않은 거야. 계속 언니를 괴롭혔다간 내가 절대 가만 안 둬!”하예정이 힘껏 밀쳐내자 뒤로 몇 걸음 물러난 서현주는 마침 주형인 옆에서 멈춰 섰다.“주형인, 네 애인 좀 잘 단속해. 날 건드렸다간 아주 쥐어 패버릴 테니까.”화가 난 서현주도 막말을 퍼부었다.“하예정, 네가 이렇게 난폭한 여자라는 걸 네 남편이 알기나 알아? 그러다가 버림받으면 어떡하려고.”하예정이 피식 웃었다.“우리 남편은 달라. 내 거친 모습을 좋아하거든.”서현주는 너무도 화가 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주형인이 주우빈과 노느라 그녀의 편도 들어주지 않자 주형인의 팔을 찰싹 내려치며 욕했다.“형인 씨, 지금 형인 씨의 전 처제가 날 괴롭히는데 가만히 있을 거예요?”주형인은 미쳐 날뛰는 서현주가 혹시라도 주우빈을 다치게 할까 걱정되어 재빨리 주우빈을 내려놓았다. 하예정이 조카에게 손을 흔들었다.“우빈이 이리 와.”주우빈이 하예정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자 하예정은 주우빈을 안으며 주형인에게 말했다.“주형인, 제발 당신 여자 좀 잘 단속해. 난 우리 언니처럼 그렇게 인내심이 있지 않아.”“예정아, 미친 개랑 뭘 따지고 그래.”하예진은 옷을 점원에게 건네고는 여동생의 품에 안겨있는 아들을 안았다.“쟤는 내연녀라면 조강지처와 한바탕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나 보지. 내가 통쾌하게 물러나니까 괜히 저러면서 우월감을 뽐내는 거야. 대
“엄마, 사실 나도 좀 망설여져요.”고현의 말을 들은 진미리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망설일 필요 없어. 너 원래 여자이고 원래 치마 입어도 되는 신분이야. 네가 20년 이상 남자 옷을 입었으니 진작 여자 옷을 입었어야 했어. 호영이도 네가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함께 참석하는 것을 알면 얼마나 기뻐하겠어. 그때 가서 다들 네가 여자라는 걸 알게 될 거고 너희 둘이 게이라고 수군대지도 않을 테고. 사실 사람들이 나한테 네가 그토록 훌륭한데 호영 때문에 삐뚤어진다는 말을 했거든. 네가 정상인데 호영 때문에 게이로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난 사실을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어. 그런데 넌 여자 신분을 되찾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는 늘 참고 있었지. 그리고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어.”진미리 부부도 사실 큰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있었다.다른 사람의 말들은 고진호 부부가 무시하고 멀리하면 그뿐이지만 친척과 친구들이 와서 설득할 때면 그들은 정말 어쩔 수 없었다.진미리는 결국 고현이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딸이 행복하면 그뿐이라면서 딸의 의사를 존중해 주겠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이 때문에 그 친척들은 몇 년 지나면 고현이 후회할 것이라고 화를 내면서 진미리가 고현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고빈도 따라서 게이로 될 것이고 따라서 손주를 안고 싶어 해도 기회가 없을 거라는 심한 말을 내뱉기도 했다.이는 진미리를 화나게 했지만 그렇다고 또 어쩔 수도 없었다.“엄마가 좀 이따가 드레스 몇 벌 골라줄게. 네 취향대로 골라봐. 액세서리는 새것으로 살래? 엄마가 몇 벌 골라줄까? 하이힐도 몇 켤게 사줄게. 다 신어 봐.”고현이 대답했다.“엄마가 결정해 주시면 돼요. 제가 내일 오후에 쉬니 집으로 돌아가서 드레스와 하이힐을 신어 볼게요. 하이힐을 신어 본 경험이 없으니 걷는 연습도 해야겠어요. 아니면 추태를 보일지도 모르니까요.”진미리가 웃으며 대답했다.“하긴, 걷는 연습을 좀 해야겠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하이힐을 신고 몇 걸음도
전호영은 눈치채지 못했다. 고현도 일부러 그에게 명백하게 알려주지 않았다.내일 저녁에 그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강성 전체 사람들도 분명 충격받을 것이다.고현은 이미 전호영에 대한 감정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변이 없다면 2년 안에 전호영에게 시집갈 것이다.그녀는 전호영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는 그가 동성애라자라는 누명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전호영은 게이가 아니라 정상적인 남자였다.고현이 모든 사람을 속인 것이다.고현은 전호영을 위해 정정당당하게 여자로 되고 싶어 했다.그 또한 기뻐할 것이다.고현의 형상이 너무 남자다웠기 때문에 그녀가 아무리 여성 옷을 입고 연회에 참석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녀가 전호영의 마음을 사기 위해 여자 행세를 하는 것으로 여길 것이라는 점을 고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전호영도 그녀를 기쁘게 하려고 여자로 분장한 적 있다.당시 고씨 그룹 직원들은 여자 분장을 한 전호영이 매우 눈에 익다고 생각했다.전호영의 자매인 줄 알았지만 전씨 가문에는 딸이 없고 전호영에게도 자매가 없었다는 것을 반응한 사람들은 그제야 전호영이 분장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날 그 사실은 고씨 그룹에서 아주 큰 가십거리로 소문이 자자했다.전호영과 통화를 마친 고현은 진미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진미리가 전화를 받았지만 고현은 주저하며 말을 하지 않았다.“현아, 왜 그래?”고현이 여전히 말을 하지 않자 진미리는 놀라워하며 고현에게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았다.고현은 어려서부터 철이 들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했다.“엄마, 시간 있어요? ”“있지. 난 언제나 시간 있지. 왜? 내가 뭐 도울 거라도 있어? 말해봐. 내가 다 해줄게.”고현이 먼저 도움을 청하는 일이라면 분명 큰일일 것이다.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낸 진미리는 관심 있게 물었다.“생리 왔어? 배 아파?”고현은 때때로 생리통을 앓곤 한다.진미리는 한동안 몰래 고현에게 한약을 지어주면서 그녀를 돌보았다.“아니요. 엄마. 저 내일 저녁 연회
“호영 씨.”고현이 기분이 좋은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휴대폰 너머에 있던 전호영도 덩달아 신이 나서 웃었다.“현이 씨, 뭐 좋은 일이 있나요? 제 이름을 부르면서까지 웃음기가 묻어나네요. 현이 씨를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이런 경우가 흔치 않은데.”고현이 전호영에게 감정이 있다고는 하나 성격이 워낙 무뚝뚝하다 보니 전호영을 대하는 태도는 항상 차가웠다.“제가 기분이 나빴으면 좋겠어요?”“그럴 리가요. 당연히 현이 씨가 날마다 즐겁고 행복하면 좋죠. 그렇지만 현이 씨는 짊어진 짐이 너무 무겁다 보니 하루 종일 웃지도 않잖아요. 시시덕거리는 고빈을 볼 때마다 테이프로 그의 주둥이를 틀어막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그가 사랑했던 여자는 고씨 그룹을 위해 매일 쉬지 않고 일하지만, 고빈은 틈만 나면 여자들을 만나느라 바빴다.그렇다고 해서 고빈이 결혼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현이 웃으며 말했다.“얼른 가서 그 입 틀어막지 않고 뭐 해요? 솔직히 말해서 아무 근심 걱정 없는 그의 모습을 볼 때면 가끔 부럽기는 해요.”자신이 맏이기 때문에 동생을 대신해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그녀의 머릿속에 꽉 박혀있었다.줄곧 남장하고 있었지만, 여자로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있다고는 하지만 동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만으로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전호영이 나타난 후부터 고현은 점차 동생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물론 동생에게 말했던 것처럼 고씨 그룹이 언젠가는 동생의 손에 넘어갈 것을 생각하고 가끔 동생에게 일을 맡기곤 했었지만.평생을 이렇게 버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기대하고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전호영이 딱 그런 존재였다.“나중 가면 현이 씨 동생이 현이 씨를 부러워할 것이니 동생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어요. 현이 씨가 회사 일을 조금씩 그에게 맡긴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아니면 저처럼 호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이윤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고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온 후, 이윤미가 자신의 비서에게 말했다.“먼저 회사에 가 있어요. 요즘 가주가 시간 없다고 하니 제가 집안일 처리하러 집에 가야겠어요.”그녀의 어머니는 여전히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고 있었다.이씨 가문에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그녀의 비서 외에 회사 사람들은 다 모르고 있었다.이윤미만 회사에 나오고 가주와 그녀의 오빠들은 회사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만 회사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이 대표가 비록 능력이 부족한 이 부대표를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해도 어찌 됐든 자기 친딸이니 무슨 일을 저지른다 해도 이 대표가 뒷수습을 다 할 것으로 회사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거렸다.이윤미가 이 대표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을 막으려는 사람들은 온갖 망발을 늘어놓으며 그녀를 헐뜯기에 바빴다.그렇지만 이윤미는 가만있지 않았다.중요한 직위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설치고 다니는 사람들을 그녀는 직접 해고하여 이씨 그룹에서 쫓아냈다.그리고 직위가 높은 사람들은 강등시키거나 급여를 깎았다.게다가 해고된 사람들이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블랙리스트에 올린 탓에 그들은 복지와 소득 면에서 이씨 그룹에 한참 미치지도 못하는 작은 회사만 전전해야 했다.조금의 손해를 볼지언정 이윤미는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이씨 그룹에서 쫓겨난 직원들을 보며 다른 직원들은 공포감을 느꼈다.모두가 부를 추구하고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 수 없었다.누가 대표직에 오르든지 간에 모두 이씨 가문의 출신일 것이니 승급을 못 할 바에는 이씨 가문의 암투에 직원들은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어차피 대우는 변하지 않으니 오히려 정직하게 일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몰랐다.그렇게 한다면 해고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사에게 더 주목받을 수도 있었다.“알았어요.”택시비를 보상해 주겠다며 말한 뒤 이윤미는 비서를 택시에 앉혀 보내고 자신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
그들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고 대표님, 저는 회사의 프로젝트 협력에 대해 논의하러 왔어요. 방안을 가져왔으니 한번 보도록 하세요.”이윤미는 말하면서 자신 비서의 손에서 서류를 건네받은 뒤 두 손으로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서류를 받아 들고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한참 후에 다 훑어본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녀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꺼냈다.“윤미 씨의 방안이 괜찮아 보이지만 이씨 그룹의 실력이 부족해서 별로 협력하고 싶지 않네요.”고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협력업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윤미의 개인 회사와 협력하려 했던 것은 그냥 단순히 이윤미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했던 것이었다.하예진의 회사도 설립되고 나면 고씨 그룹과 협력할 예정이었다.이윤미가 호탕하게 웃었다.“고 대표님, 우리 이씨 그룹이 귀사에 비해 조금 못하단 걸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이씨 그룹도 강성에서 백 년을 이어온 명문가라서 뿌리가 깊어요. 저도 일부 프로젝트를 책임졌으니 어느 정도 발언권이 있어요. 고 대표님이 저와 협력한다면 서로 윈윈할 수 있을 거예요. 당연히 대표님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을 거고요.”이윤미와 그녀의 비서는 협상에 진전이 없을 거란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고현에게 잘 보이려고 최선을 다했다.이씨 그룹을 아무리 추켜세워도 고현이 마음을 바꾸지 않자, 이윤미가 말했다.“고 대표님, 협력하지 않더라도 저와의 인연은 끊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비록 우리 이씨 그룹이 대표님의 눈에 들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협력할 기회가 생길지도 몰라요.”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게 될 거예요.”이씨 가문이 권력에서 물러난다면 가능성이 있었다.이씨 그룹의 권력을 쥐고 있는 이씨 가문이 고씨 그룹과의 협력을 이용해 힘을 키우는 것이 두려워 고현은 협력하기 싫었던 것이었다.만약 이씨 그룹의 세력이 커진다면 하예진의 앞날이 더욱 험난해질 것 같았다.이윤미가 웃으며 말했다.“우리 이씨 그룹이 열심히 노력해서 하루빨
고빈은 몇 걸음 걷다가 고개를 돌려 이윤미를 쳐다보았다.한동안 보지 못해서 그런지 몰라도 자신감 넘치는 아우라를 발산하는 이윤미가 전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조금 전에 멈칫했던 것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애초부터 이런 모습이었다면 누나가 내게 소개해 줬을 때 거절하지 않았을 텐데.”고빈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물론 그녀에게 대시한다 해도 너무 늦지는 않았지만 이씨 가문과 엮이는 것이 싫어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이씨 가문에 이윤미 같은 인재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이씨 가문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강인한 성격을 만들 수 있었다.그뿐만 아니라 상대를 방심하게 하여 허를 찌르는 데 능숙했다.고빈이 좋아하는 스타일은 이윤미처럼 가식이 많고 거짓말을 잘하는 여자가 아니라 순수한 여자였다.‘이윤미 같은 여자는 형에게 적합해. 둘이 함께 사람들의 뒤통수를 치면 누구도 당해내지 못해. 형이 이윤미를 높게 평가한 것을 감안할 때 둘이 충분히 한 쌍의 커플로 발전할 수 있어.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놀아나겠지. 아니구나. 난 형이 없잖아! 강성의 사람들은 내게 형이 없고 누나만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야 해.’자신과 인사하는 것만으로 고빈이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할 줄을 이윤미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이윤미가 비서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서자, 고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었다.“윤미 씨, 뭐 드실래요? 비서에게 준비하라고 말할게요.”“따뜻한 물 한 잔이면 됩니다. 밤에 잠 못 잘까 봐 커피는 감히 마시지 못하겠네요.”고현은 두 사람을 소파에 앉으라고 말한 뒤 따뜻한 물을 따라주라고 자기 비서에게 지시했다.자리에 도로 앉은 고현이 커피잔을 들며 말했다.“저는 아침과 오후에 한 잔씩 마셔요. 습관 돼서 그런지 밤에 잠을 자는 데 별 지장은 없어요.”그녀는 보통 카페인이 효력이 사라진 자정이 되어서야 자는지라 걱정거리가 없는 한 수면에 큰 영향
“그러면 지금 바로 할머니께 전화할게. 퇴근 후 집에서 샤부샤부 먹겠으니, 집사에게 말하라고 말이야. 사람 좀 있어야 분위기도 나니까 이진 부부도 부를게. ”그러자 하예정이 말했다.“제가 할머니께 전화할 테니 당신은 가서 일 보세요. 아니면 오늘 밤 관성에 있는 사람 중 시간 있는 사람들을 와서 밥 먹으라고 가족 단톡방에 말 보낼게요. 하긴 사람이 많으면 시끌벅적하고 좋긴 하죠.”전태윤이 웃었다.“다들 바쁘니까 오지 못할 거야. 이진 부부만 불러.”“당신 말한 대로 할 테니 얼른 가서 일 보라니까요. 수중의 일부터 빨리 처리해야 나중에 그나마 수월해질 건데.”오랜만에 회사로 출근한 전태윤은 야근하지 않고 퇴근 시간에 맞춰 아내와 함께 집으로 가려 했다.아내의 거듭된 재촉에 전태윤은 마지못해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일을 시작했다.하예정은 할머니에게 전화하여 저녁에 전이진 부부를 불러 샤부샤부를 먹겠다고 말하자,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할머니는 당연히 기뻐하며 바로 승낙했다.강성, 이윤미가 타고 있던 차량이 고씨 그룹으로 향하고 있었다.차가 멈추자, 먼저 차에서 내린 이윤미의 비서는 뒷좌석의 차 문을 열어 이윤미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이윤미는 자신의 비서와 함께 사무실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수십 층에 불과한 이씨 그룹의 청사와 달리 중심상업지역에 자리 잡은 고씨 그룹의 청사는 강성의 모든 대기업 중 가장 높은 층수를 자랑했다.이미 오기 전에 고현에게 전화하여 프로젝트 협력에 관해 이야기할 시간이 있는지 물어본 후, 이윤미가 자신의 비서를 데리고 찾아온 것이었다.고현이 자신의 계획을 꿰뚫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윤미는 그래도 이씨 가문 딸의 신분으로 협력에 대해 논의하려고 했다.만약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 다시 사적으로 회사 대표의 신분으로 얘기해 볼 속셈이었다.고현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윤미는 잘 알고 있었다.그녀와 척을 지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윤미의 앞날에 먹구름이 낄 것이 뻔했다.이윤미가 여러
전태윤의 뒷부분 말을 들은 소정남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말하지 않으면 내가 얼마나 바쁘고 피곤한지 넌 모를걸. 약속 지켜. 네가 회사로 돌아오면 날 며칠 쉬게 하겠다고 약속했잖아. 네가 잊을 수 있으니 내가 계속 일깨워 주었을 뿐이야. 그리고 내년에 우리 효진이가 아이를 낳을 때 나에게 출산 휴가를 두 달 주기로 약속한 것도 잊지 마.”전태윤은 그를 꾸지람했다.“네가 아기를 낳는 것도 아닌데. 출산 휴가는 한 달이면 돼. 네 아내의 산후조리만 잘 돌보다가 바로 출근해. 게다가 너의 집에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산후조리가 끝나면 굳이 네가 나서지 않아도 될걸. 내가 두 개월 휴가를 주는 것도 너무 길다고 생각하는데 적게 줬다고 생각하다니.”소정남은 바로 반박했다.“예정 씨가 아기를 낳을 때 네가 매일 회사에 돌아와서 평소처럼 일할 수 있고 예정 씨의 산후조리를 돌보지 않는다면 내가 출산 휴가를 한 달만 낼게. 내가 아기를 낳는 것은 아니지만 난 남편으로서 효진이가 날 가장 필요로 할 때 내가 반드시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상황을 보면서 회사가 바쁘지 않으면 내가 3개월 휴가 줄게, 됐지?”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면 전태윤도 하예정이 출산하면 그녀의 옆에서 도와주고 싶었을 것이다.산후조리 때 특별히 잘 보살펴야 한다.소정남은 재빨리 말했다.“예정 씨, 들으셨죠? 태윤이가 저에게 출산 휴가 3개월을 주겠다고 약속했어요.”하예정은 웃으며 대답했다.“들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증인으로 되어드릴게요. 태윤 씨가 반드시 약속 지킬 거예요.”심효진의 임신 기간이 하예정보다 길었기에 내년 5월쯤에 아기가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이제 새해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소정남도 그의 상사와 내년 출산 휴가를 미리 상의하고 있었다.소정남은 그제야 시름을 놓으며 일어나 전태윤에게 말했다.“그럼 난 먼저 돌아가서 일할게. 오늘 업무를 전부 처리해 놓아야 내일 휴가를 잘 보낼 수 있을 테니까.”이틀간의 휴가를 얻은 소정남은
“준하 씨와 소현 언니가 바래다주러 가셨어요.”소정남이 말했다.“온 지 이틀도 안 됐는데 벌써 가셨어요? 제가 음식 대접할 시간도 없었네요.”하예정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시간 있을 때 A시에 가서 식사 초대하면 되죠. 준하 씨가 이번에 관성으로 온 이유는 단지 용정이가 우빈이와 함께 놀게 하려는 것뿐이에요.”소정남은 전씨 가문의 대표 부인 앞에서 그의 고통을 호소했다.“제가 시간이 전혀 없었어요. 태윤이가 결혼 휴가를 내서 오늘에야 출근했는데... 제가 너무 바빠서 물 한 잔 마실 시간도 없었어요. 제가 태윤에게 말할 틈이 없었는데 내일 제가 휴가를 내야겠어요. 좀 이따가 태윤이가 동의하지 않으면 예정 씨가 저를 도와주셔야 해요. 제가 한 달 동안 푹 쉬지 못했거든요. 내일 휴가를 내는 것도 휴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효진이와 함께 임신 검사받으러 가기 위해서예요.”하예정이 흔쾌히 대답했다.“좋아요. 태윤 씨가 정남 씨의 휴가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제가 도와서 말씀드릴게요. 요즘 정말 수고 많으세요. 필요하시면 제가 태윤 씨에게 휴가 이틀 내주라고 설득할게요. 차라리 휴가 낼 필요 없이 내일 효진이와 함께 검사받으러 가세요.”전태윤 부부가 결혼식 후 편안한 신혼여행을 보내게 되었다. 비록 관성을 떠나지 않았지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소정남이 전태윤의 업무량을 분담한 덕이다.이제 전태윤이 회사로 돌아왔으니 적절한 시기에 가장 바삐 돌아쳤던 소정남을 쉬게 해야 했다.소정남이 대답했다.“이틀 쉴 수 있다면 더없이 좋죠. 날씨도 추워졌는데 효진이가 샤브샤브를 먹고 싶어 하더라고요. 제가 줄곧 데리고 나갈 시간이 없었어요. 집에서 먹을 수는 있지만, 저의 사촌 누나가 자꾸 잔소리를 늘어놓으셔서 먹는다고 해도 효진이가 불편해해서 늘 나가서 먹고 싶다고 했거든요. 내일 함께 검사를 받고 저녁에 샤브샤브 먹으러 가야겠어요. 효진이가 임신한 뒤로 뭐 먹고 싶을 때마다 즉시 입에 넣고 싶어 하던데 예정 씨도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