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이 전화를 뚝 끊자 오히려 화가 가라앉은 성기현이 싸늘하게 웃었다.“전태윤, 언제 날 형님이라고 부르는지 똑똑히 지켜볼 거야. 내가 너 하나 어쩌지 못할 것 같아?”그에게 물을 가져다주러 온 유청하가 그의 뒷얘기를 듣고 한마디 했다.“이젠 가족이 됐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전태윤 씨가 무슨 이유로 신분을 숨겼든 예정 아가씨의 남편인 사실은 변함이 없어요.”“내가 전태윤이랑 얼마나 오랜 시간 경쟁했었는데요. 지금까지도 그 승부가 가려지지 않았어요. 어쩌다가 전태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갈 기회가 생겼는데 놓쳐서야 하겠어요?”성기현이 물을 받고 두어 모금 마셨다.“내가 지금 전태윤 때문에 얼마나 화가 났는데요. 전태윤이 출장 갔다 돌아오면 그대로 갚아줄 생각이에요. 나한테 밥을 사줄 때 예정이도 불러서 예정이 앞에서도 날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는지 두고 볼 거예요. 여보, 나의 라이벌인 전태윤이 날 형님이라고 부르는 모습만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와요.”“당신 정말 어지간히 화난 게 아니네요.”유청하가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같은 연배인데 전태윤 씨가 기현 씨를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협박이라도 할 셈이에요?”“날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하예정 앞에서 난처하게 할 거예요. 예의 없이 형님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고요.”유청하는 어이가 없었다.왠지 남편과 전태윤이 곧 한바탕 기 싸움을 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성기현에게 모든 비밀을 들킨 전태윤은 처음에는 걱정됐지만 성기현의 전화를 끊은 후 잠시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성기현이 이토록 화를 내는 건 그의 친여동생 때문이지, 하예정을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성소현이 아직 그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기 전까지 성기현은 그의 진짜 정체를 하예정에게 얘기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그뿐만 아니라 어쩌면 갖은 방법으로 그를 도와 계속 숨기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앞으로 성기현 앞에서도 대놓고 하예정과 애정행각을 해도 된다.전태윤은 출장 일정이 끝나고 돌아가서
소정남이 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들어와.”서재 문이 열리고 한 경호원이 초대장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소정남은 누군가 파티에 소지훈을 초대한 걸로 생각했지만 경호원은 곧장 그의 앞으로 다가와 초대장을 그에게 건네며 깍듯하게 말했다.“도련님, 이건 성씨 가문의 큰 도련님이 보낸 초대장입니다. 성씨 가문에서 내일 저녁에 파티하는데 도련님을 초대했어요.”“내 거라고?”소정남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성씨 가문의 파티 초대장을 성기현 씨가 특별히 보냈다고? 그것도 내일 저녁에? 이렇게나 급하게?”다른 가문에서 파티를 열 땐 며칠 전에 미리 초대하거나 심지어 십여 일 전에 초대하는 가문도 있었다. 그래야만 손님들도 준비할 시간이 있으니까.성씨 가문에서는 임시로 급하게 파티하는 것 같은데?이경혜가 두 조카를 찾았다는 사실을 떠올린 소정남은 성씨 가문의 이번 파티의 진짜 목적을 대충 짐작했다. 그녀가 두 조카를 관성의 상류 사회에 들이려는 게 아닐까?‘하하, 전태윤 인제 어떡하지?’“성씨 가문 큰 도련님께서 도련님한테 전해달라는 말씀이 있어요.”“뭔데?”“심효진 씨도 초대장 명단에 있답니다.”소정남의 두 눈이 반짝이더니 씩 웃으며 경호원에게 물었다.“성씨 가문에서 보낸 그 사람 갔어?”“아직 밖에서 도련님의 회답을 기다리고 있어요.”소정남은 초대장도 열어보지 않고 경호원에게 말했다.“가서 전해. 나 내일 저녁에 시간 맞춰서 꼭 간다고.”“알겠습니다.”경호원이 공손하게 대답한 후 자리를 떠났다. 소정남은 초대장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왠지 앞으로 성기현 씨를 만나도 함부로 대들지 못할 것 같아.”“심효진 씨랑 성기현 씨는 아무런 관계도 없잖아. 아까 그 말은 전태윤 씨한테 했어야지.”소지훈은 일을 마무리한 후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웃을 듯 말 듯 했다.“내가 왜 아직도 결혼할 생각이 없는지 알겠지?”“그건 형이 인연을 만나지 못해서 그런 거야. 태윤이 봐봐, 예전에는 얼마나 고집이 셌는데 지금은 순순히
쇼핑하면서 옷을 살 때 전 남편과 내연녀를 보면 어떤 기분일까?하예진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오히려 서현주가 가게로 들어와 하예진 자매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주형인의 팔짱을 꽉 꼈다. 마치 그들이 커플이라는 걸 다른 사람이 모르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말이다.“아빠.”하예정에게 안긴 주우빈이 주형인을 보자마자 아빠라고 불렀다. 그러자 가게에 있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주형인을 쳐다보았다.주형인의 옆에 서 있는 젊고 예쁜 서현주와 주우빈이 엄마라고 부르는 하예진을 번갈아 보던 가게 점원이 동정 어린 눈빛으로 하예진을 쳐다보았다.‘쇼핑하다가 남편이 바람피우는 걸 봤나 보네...’“우빈아.”점원의 따가운 눈빛 속에 주형인이 하예정 앞으로 걸어갔고 서현주도 그 뒤를 따랐다.“우빈아, 아빠가 안아보자.”주형인이 주우빈을 안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하예정은 바로 건네지 않고 먼저 주우빈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만약 주우빈이 아빠에게 안기길 원한다면 주형인이 몸을 구부리고 아들을 안으면 되니까.아직 어린 주우빈은 부모가 이혼한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아빠와의 감정이 그리 깊진 않았지만 딱히 거부하진 않았다. 주형인이 안으려 하자 주우빈도 그에게 안겼다.그 모습에 점원들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혹시라도 다툼이 벌어지면 당장 신고할 생각이었다.하예진은 계속 아무렇지 않은 척 옷을 골랐다. 이 브랜드의 옷을 결혼 전에 몇 벌 산 적이 있었는데 참으로 마음에 들었었다. 하여 이모와 함께 쇼핑하러 나오자마자 습관적으로 이 브랜드의 가게를 선택했다.그런데 아쉽게도 이 브랜드는 뚱뚱한 사람이 입을만한 큰 사이즈가 없었다.“저 사람은 제 전남편이에요.”덤덤한 하예진과 달리 점원들은 뭔가 깨달은 듯 두 눈이 반짝였다.‘어쩐지 남편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 걸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옷을 고른다 했더니, 전 남편이었구나.’“하예진, 너도 옷 사러 왔어? 이 브랜드 옷 싸지 않은데.”주형인이 아들과 함께 노는 모습을 본 서현주는 기분이 아니꼬웠지만 뭐라 얘기할
하예진이 아직 주형인의 아내였을 때 주형인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서현주가 그런 삶을 보내고 있다. 그녀에 대한 주형인의 사랑이 정말 진심인 듯싶다.하예진을 이기고 쉽게 아내 자리를 꿰차고 주형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서현주는 하예진 앞에서 애정행각을 벌여 그녀를 자극하고 싶었다.하지만 하예진은 서현주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하여 자기 옷만 골랐다. 그 모습을 본 서현주가 또다시 빼앗으려 했다.하예정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싸늘하게 말했다.“서현주, 우리 언니가 만만한 게 아니라 귀찮아서 너한테 대꾸하지 않은 거야. 계속 언니를 괴롭혔다간 내가 절대 가만 안 둬!”하예정이 힘껏 밀쳐내자 뒤로 몇 걸음 물러난 서현주는 마침 주형인 옆에서 멈춰 섰다.“주형인, 네 애인 좀 잘 단속해. 날 건드렸다간 아주 쥐어 패버릴 테니까.”화가 난 서현주도 막말을 퍼부었다.“하예정, 네가 이렇게 난폭한 여자라는 걸 네 남편이 알기나 알아? 그러다가 버림받으면 어떡하려고.”하예정이 피식 웃었다.“우리 남편은 달라. 내 거친 모습을 좋아하거든.”서현주는 너무도 화가 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주형인이 주우빈과 노느라 그녀의 편도 들어주지 않자 주형인의 팔을 찰싹 내려치며 욕했다.“형인 씨, 지금 형인 씨의 전 처제가 날 괴롭히는데 가만히 있을 거예요?”주형인은 미쳐 날뛰는 서현주가 혹시라도 주우빈을 다치게 할까 걱정되어 재빨리 주우빈을 내려놓았다. 하예정이 조카에게 손을 흔들었다.“우빈이 이리 와.”주우빈이 하예정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자 하예정은 주우빈을 안으며 주형인에게 말했다.“주형인, 제발 당신 여자 좀 잘 단속해. 난 우리 언니처럼 그렇게 인내심이 있지 않아.”“예정아, 미친 개랑 뭘 따지고 그래.”하예진은 옷을 점원에게 건네고는 여동생의 품에 안겨있는 아들을 안았다.“쟤는 내연녀라면 조강지처와 한바탕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나 보지. 내가 통쾌하게 물러나니까 괜히 저러면서 우월감을 뽐내는 거야. 대
“이모...”이경혜는 하예진에게 더 말하지 말라고 손짓한 뒤 차가운 시선으로 서현주를 쳐다봤다.서현주가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사, 사모님.”이경혜는 고개를 홱 돌리고 딸에게 말했다.“소현아, 우리 집 경호원들에게 전화해서 차고에 있는 고급 차들을 전부 몰아오라고 해. 예진이한테 돌아가면서 태워야겠어. 2억 대부터 시작하는 차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사모님, 오해예요, 오해.”주형인이 상황수습에 나섰다.“사모님, 저희 옷 안 살게요. 지금 바로 나갈게요.”주형인은 회사 일에 영향을 미칠까 봐 감히 이경혜와 강경하게 맞서지 못했다.그는 서현주의 손에 쥔 옷을 점원에게 건네고는 황급히 서현주를 잡아당기며 밖으로 도망쳤다.서현주도 이경혜 앞에서는 감히 날뛰지 못했다. 가게 밖에 나선 후 그녀는 주형인의 손을 뿌리치고 씩씩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서현주는 걸어가며 주형인을 원망했다.“오빠 방금 뭐예요? 죽은 사람인가요? 내가 그 두 자매에게 모질게 괴롭힘당하는데 찍소리도 안 하고 있어요 왜?! 아들만 꼭 안고 다른 건 나 몰라라죠? 아들이 그리 귀하면 다시 소송 걸어서 양육권 뺏어오지 그래요? 돈 많은 이모가 한 명 생겨난 것뿐이잖아요! 성씨 일가가 재벌이지 하예진이 재벌인 것도 아닌데 날뛰어봤자 어디까지 날뛰겠어요? 그리고 하예정도 짜증 나. 오빠 방금 나 대신 하예정 짓밟았어야 했어요. 남 일에 참견하고 말이야. 하예정 남편이 누구예요?”서현주는 하예정의 남편이 누구인지 알아내서 여자를 보내 그녀의 남편을 꼬시게 할 작정이었다. 하예정도 남편에게 배신당한 기분이 어떤 것인지, 버림받은 기분이 어떤 것인지 톡톡히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서현주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두 자매가 워낙 돈독한 사이잖아? 이혼도 함께 해야지!’주형인은 그녀를 쫓아가 어깨를 다잡으며 달래주었다.“화 풀어, 나랑 함께 쥬얼리 보러 가자. 결혼반지 골라봐봐. 네가 좋아하는 거로 사줄게. 예정이가 산타를 배워서 실력이 어마어마해. 내가 사내대장부이긴 하지만
“내가 준 2억으로 집을 마련하느라 아마 다 썼을 거야. 이젠 직장도 잃었으니 제 이모가 키워주지 않는 한 절대 우리보다 행복할 순 없어.”그의 말을 들은 서현주는 역시나 기분이 좋았다.“2억으로 관성 시 중심에 집을 사려면 선입금도 모자랄걸요. 내가 아는 여동생이 얼마 전에 가장 번화한 지역에 두 번째 집을 마련했는데 학교 부근이라 25평에 글쎄 10억이었다니까요. 나 진짜 깜짝 놀랐잖아요.”주형인을 낚아채지 못했다면 서현주의 수입으로도 관성 시 중심에서 집을 살 수 없다.주형인도 현재 집값이 하늘을 치솟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그도 다행히 미리 샀으니 망정이지 지금 사려면 아마 좋은 지역도 못 고르고 학교 근처는 아예 넘볼 수도 없다.“내가 알아봤는데 이경혜 씨는 워낙 강인한 여자이다 보니 나약하고 무능한 사람을 제일 싫어한대. 예진이가 자립하지 못하면 이경혜 씨도 도와주지 않을 거야. 돈은 더더욱 안 줄 테니까 너도 이모 한 분 나타났다고 너무 질투하진 마. 제 부모도 무조건 자식한테 돈을 준다는 보장이 없는데 감정이 없는 이모가 웬 말이야.”주형인이 한바탕 어르고 달래니 서현주도 기분이 좋아져 그와 함께 쥬얼리 가게로 들어갔다.두 사람은 누군가가 뒤에서 줄곧 그들을 따라오며 둘의 대화를 고스란히 녹음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쓰레기 남녀를 우연히 마주치면 기분 나쁜 건 당연한 일이다.그 둘을 만난 뒤로 하예진은 줄곧 들러리 역할이었다.서현주의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해보았지만 실은 전남편과 내연녀가 함께 있는 모습에 가슴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결혼 뒤 집안일에만 전념하며 살아온 저 자신이 너무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했다.여자는 꼭 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하예진은 주형인이 힘겹게 번 돈을 아까워하며 평소 집에 꼭 필요한 생활용품만 사고 저를 위해 새 옷과 화장품을 전혀 구매하지 않았다. 쇼핑을 해도 대부분 주형인과 우빈의 것만 샀다.하지만 이렇게 남편을 위해줬건만 정작 남편이란 자는 서현주에게 돈을 펑펑 써댔다.내 남
하예정은 먼저 메모지를 꺼내 들었다.메모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이 두 개는 녹음 펜이에요. 아무도 없을 때 들어보세요, 소정남.」알고 보니 소정남이 사람을 시켜 보내온 물건이었다.녹음 펜?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아무도 없을 때 들어보란 걸까?하예정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소정남이 그녀 홀로 들으라고 했으니 그녀도 결국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에 돌아간 후에 듣기로 했다.“뭐야 예정아? 누가 보낸 물건이야?”이경혜가 관심 조로 물었다.하예정은 메모지를 봉투에 다시 넣으며 답했다.“제가 쓸 펜이에요. 숙희 아주머니가 사람 시켜서 보냈어요.”이경혜는 알겠다며 대답한 후 더 묻지 않았다.호기심이 발동한 하예정은 저녁을 다 먹고 언니가 우빈이를 목욕시키려 할 때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두 자매의 방은 나란히 있었다.이경혜가 친히 마련해주었다. 두 자매가 낯선 곳에서도 서로 기댈 수 있게 방을 나란히 정해주었다.하예정은 방에 돌아가 문을 잠그고 얼른 검은 봉투 속의 녹음 펜 두 대를 꺼냈다.그녀는 소파에 앉아 녹음 펜 작동 버튼을 눌렀다.서현주와 주형인의 대화 내용을 들은 후에야 그녀는 알아챘다. 이는 오늘 오후 우연히 마주친 두 인간쓰레기 남녀가 옷가게에서 나간 후 나눴던 대화였다.‘소정남 씨가 그 둘의 대화 내용까지 녹음하다니, 너무 대단한 거 아니야?’소정남이 알았다면 바로 대답했을 것이다.‘아이고, 과찬이십니다, 전태윤 대표님의 부인분께 이런 칭찬을 듣다니요!’소정남은 단지 가십거리에 관심이 많아 부하직원에게 분부하여 주형인이 바람을 피운 증거를 수집하라고 했는데 아쉽게도 명백한 증거를 얻지 못해 부하가 줄곧 주형인의 뒤를 밟다가 이 대화를 녹음했다.“천사 같은 미모에 화끈한 S 라인의 여자를 보내서 전태윤을 유혹하게 해야겠어요...”하예정은 서현주가 주형인에게 하는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태윤 씨가 유혹에 넘어가면 태윤 씨가 아니지.”이 남자는 어떠한 유혹에도 끄떡없다.하예정이 술에 취해 그녀의 옷을
전태윤은 겨우 미소 지으며 말했다.“우리 와이프께서 지금 날 걱정하는 거야? 나 입맛 없어.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지금 이렇게 필사적으로 일하는 것도 빨리 끝내고 돌아가서 당신이랑 함께 있고 싶어서야.”“빨리 돌아오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그래도 제 몸은 챙겨야죠. 지금 호텔이에요 아니면 다른 곳에 있어요? 입맛 없으면 담백하게 죽이라도 끓여 먹어요. 태윤 씨, 일단 휴대폰 좀 들어봐요. 당신 컨디션 좀 체크해야겠어요.”전태윤은 꿈쩍하지 않았다.이에 하예정이 버럭 화를 냈다.“태윤 씨, 셋 셀 동안 얼굴 안 보여주면 나 더는 당신 안 봐요.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답장 안 할 거예요. 하나...”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화면에 불쑥 전태윤의 얼굴이 나타났다.그는 무척 괴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줄곧 차갑고 카리스마 넘치던 얼굴이 열이 올라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예정은 깜짝 놀라서 그에게 물었다.“병원 안 가봤어요? 지금 고열인 게 분명해요. 태윤 씨 진짜 나 화나서 죽는 꼴 보고 싶어요?!”전태윤은 손으로 이마를 짚고 애써 버티며 대답했다.“약 먹었어. 약국에서 감기약을 사 왔는데 효과가 별로네... 아마 내 증상에 맞는 약이 아니라서 그런가 봐.”“지금도 회사예요?”“그래. 다만 사무실이 아니고 오피스텔에 있어. 회사에서 우리 본사 직원들이 출장왔을 때 머무를 오피스텔을 몇 채 소유하고 있거든.”그가 있는 오피스텔에 서재가 하나 있다. 전태윤은 서재의 책상 앞에 앉아서 감기약을 먹었다. 약을 먹으면 금세 좋아질 거로 여겼는데 몇 시간이 지나니 열이 더 올랐다.전태윤은 점점 더 괴로워졌다.늘 건강하기만 하던 그가, 평소에 감기라곤 걸려본 적 없던 그가 요즘 몸을 차갑게 굴었더니 병세가 이토록 심각해질 줄이야.본인 체질을 너무 과대평가한 듯싶었다.쉽게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소용없었다.“지금, 당장, 병원 가요. 회사에서 마련해준 차를 운전하지 말고 택시 타고 가요!”하예정이 명령했다.“내 말 들었어요? 지금 당장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