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은 머릿속으로 생각만 했을 뿐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몰래 그런 짓까지 하기에는 도무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뒤척인 끝에 겨우 잠이 들었다.그 시각 어느 한 아파트.주형인이 침대 머리맡에 놓인 담배 한 통에서 한 대를 뽑아 불을 붙이려는데 옆에 있던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나도 한 대 줘봐요.”주형인은 담배를 서현주에게 건넨 후 불까지 붙여주었다.“가끔 한 대씩 피우는 건 괜찮아.”주형인은 골초가 아니라서 고객과 사업을 논하거나 걱정거리가 있을 때 피는 것 외에는 평소에 별로 피지 않았다.하예진은 담배를 피우면 입에서 냄새가 난다면서 담배를 자주 피우는 남자를 싫어했다. 서현주도 담배를 피울 줄 알았다. 하지만 평소에 숙녀인 척해야 해서 주형인의 앞에서는 한 번도 피질 않았다. 이젠 주형인과 마지막 선을 넘었고 주형인도 하예진과 이혼하겠다고 했으니 더는 숨길 필요가 없었다. 앞으로 같이 살다 보면 주형인도 알게 될 테니 말이다.그녀는 담배를 반쯤 피운 후 주형인에게 기대어 다정하게 물었다.“무슨 걱정이 있어요?”“없어.”서현주가 피식 웃더니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가슴팍을 어루만졌다.“뚱뚱한 마누라랑 이혼하기 아쉬워요?”“그럴 리가. 이혼 합의서를 어떻게 쓸까 고민 중이야. 예진이한테 4천만 원을 주겠다고 부모님께 얘기했더니 너무 많다고 하더라고. 우리 누나도 내가 개뿔도 없으면서 너무 많이 준다고 욕했어. 예진이 결혼 후에 일전 한 푼 벌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많이 주지 말래.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지금까지 부부로 살아왔고 잘못도 내가 먼저 저질렀으니까 4천만 원 주고 좋게 좋게 끝낼 생각이야. 그 돈 받으면 예진이도 난리 치지 않을 거야. 혹시라도 걔가 우리 둘 사이 일 까발리기라도 한다면 우리 둘 명성은 한순간에 무너져.”서현주가 담뱃불을 끄며 말했다.“형인 씨 부모님과 누나야말로 형인 씨 가족이고 진심으로 형인 씨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이에요. 그분들의 의견을 잘 고려해봤으면 좋겠어요.”그러더니 또 애교를
서현주는 내키지 않았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다. 어쨌거나 아직은 와이프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기에 뭐라 얘기할 수도 없었다. 괜히 뭐라 했다가 주형인의 반감을 사고 미래의 시대 식구들도 그녀를 아니꼽게 생각할 수 있다.주우빈은 인제 고작 두 살이라 철이 없고 자립 능력도 없다. 그녀의 밑에서 자란다면 앞으로 주우빈을 다스릴 기회가 많을 테니 급할 건 없었다.“문제없어요.”서현주는 이혼 합의서를 주형인에게 건넸다.“내가 두 부 프린트해줄 테니까 내일 예진 씨한테 사인하라고 한 다음 한 부씩 가져요. 그리고 월요일에 이혼 신고하러 가요.”주형인이 웃으며 말했다.“너보다 더 급한 건 나야.”“난 급하지 않아요.”서현주는 웃으며 이혼 합의서를 프린트했다.그날 밤 두 사람은 결혼 후의 행복한 생활을 꿈꾸며 단잠에 빠졌다.이튿날, 잠에서 깬 하예정은 전태윤이 화장대에 놓고 간 쪽지를 확인하고는 바로 휴대 전화를 들어 심효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예정아, 나 아직 눈도 못 떴어.”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심효진이 두 눈을 비비며 하품했다.“어젯밤에 늦게 잤거든.”그러자 하예정이 히죽 웃었다.“아직 안 깬 것 같아서 문자 보내면 못 볼까 봐 전화한 거야. 태윤 씨가 나한테 쪽지 남겼는데 태윤 씨 동료가 오늘 오전 10시에 소이 카페에서 널 기다리겠다고 했대. 손에 붉은 장미꽃 한 송이를 든 남자를 찾으면 돼.”“네가 얘기 안 했으면 오늘 소개팅이 있는지도 깜빡할 뻔했어.”심효진이 두 눈을 뜨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또 소이 카페야? 알았어. 늦지 않게 갈게.”조퇴하면 되니까 큰 문제는 없었다.“그럼 알람 놓고 조금 더 자. 방해하지 않을게.”“예정아, 너 나랑 같이 안 갈 거야?”심효진은 매번 소개팅할 때마다 하예정과 함께 갔었다. 하예정의 말투가 삽시간에 무거워졌다.“오늘 언니가 주형인이랑 이혼을 상의한다고 했어. 하나밖에 없는 언니인데 내가 가봐야지.”“하긴. 예진 언니 기를 살려줘야지. 더는 주씨 가문 사람들이 괴롭히게 해선
하예정이 잠깐 생각하다가 물었다.“갈 데 어디 있어?”주형인은 그녀의 거처를 알고 있었고 친정에도 믿고 맡길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녀조차 마음이 놓이지 않는데 언니는 오죽하겠는가 말이다.심효진이 그녀에게 제안했다.“소현 씨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해. 성씨 가문의 딸이라 안전 시스템이 잘 갖춰진 별장에서 산단 말이야. 게다가 성씨 그룹의 명성까지 있어서 주씨 가문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와도 성씨 가문에 깽판 치러 못 갈 거야. 그리고 우빈이가 성씨 가문에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해. 소현 씨가 우빈이를 예뻐하니까 우빈이가 거기 있으면 아마 잘 챙겨줄 거야.”심효진의 말에 하예정의 두 눈이 반짝였다.“그래. 내가 왜 소현 씨를 잊었지? 이따가 언니한테 얘기해볼게. 언니가 허락하면 소현 씨한테 우빈이 좀 봐달라고 부탁해봐야겠어.”“소현 씨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하라고 했잖아. 우린 가끔 현실에 고개를 숙일 줄도 알아야 해. 이 불공평한 세상에서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일 처리 하는 게 쉬운 건 사실이야.”심효진은 이 얘기까지는 꺼내지 않았다.‘소현 씨한테 기댈 수 있을 때 망설이지 말고 기대야지.’일리 있는 절친의 말에 하예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통화를 마친 후 하예정은 카톡 대화창을 열었다. 성소현이 어제 이경혜 자매의 어릴 적 사진을 보내왔다. 그때 한창 펜션에서 노는 중이라 하예정은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지금 그 사진을 다시 보니 성소현의 이모가 어릴 적에는 참으로 예쁘고 귀여운 모습이었다. 사진 속의 그녀는 예쁜 치마에 양갈래 머리를 한 채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한참 뚫어져라 들여다보니 왠지 성소현의 이모와 주우빈이 조금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애들은 어릴 적에 다 비슷하게 생겼나?’“따르릉...”다급한 휴대 전화 벨 소리에 하예정은 하던 생각을 멈췄다. 언니의 전화인 걸 확인하고는 황급히 받았다. 그런데 전화를 받자마자 울먹거리는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예정아, 그 사람들이 우빈이를
“언니, 소용 있든 없든 신고부터 해야 해.”“알았어. 지금 바로 신고할게.”“언니네 시부모는?”“우빈이를 데려간 다음에 바로 갔어. 아마 형인 씨를 찾으러 갔을 거야. 형인 씨 어젯밤에 집에 안 들어왔어.”하예정이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언니, 일단 신고해. 나랑 태윤 씨가 지금 당장 주형인의 본가랑 주형인의 누나 집에 가볼게. 우빈이를 본가로 데려갔을 가능성이 커.”하예진과 주형인의 이혼 얘기가 오가고 양육권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 주씨 가문에서는 주우빈을 빼앗아갔다. 신고하더라도 그저 중재만 해줄 것이다. 만약 중재가 실패한다면 이혼 소송을 해서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주씨 가문 사람도 주우빈의 가족이긴 하지만 주우빈이 태어난 그날부터 쭉 하예진네 자매가 돌보았다. 하여 주씨 가문 사람과 감정이 깊지 않은 주우빈이 낯선 곳에 가서 엄마와 이모가 보이지 않는다면 두려움에 떨며 엉엉 울 것이다.주씨 가문 사람들이 주우빈을 어떻게 대할지 누가 알겠는가?“언니, 그 사람들이 우빈이를 데려가는 걸 본 사람이 있어?”하예정은 그녀와 전태윤이 찾으러 갔을 때 주우빈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데려가지 않았다고 잡아뗄까 봐 걱정됐다. 오히려 언니가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해서 잃어버렸다고 모함할지도 모른다.“있어. 어머님이 내가 손주를 못 보게 했다면서 손주가 너무 보고 싶어서 이렇게라도 데려가겠다고 했어. 옆에 있던 사람들은 남의 집안 일인 걸 알고 누구도 나서서 말리지 않았어. 아마 증언해주지도 않을 거야.”“당황해하지 말고 침착해, 언니. 일단 신고하고 나랑 태윤 씨가 가볼게. 신고한 다음에 주형인한테 전화해서 이러는 건 우빈이한테 안 좋다고, 우빈이가 놀랄 거라고 얘기해.”하예진이 이를 꽉 깨물었다.“이미 전화했었어. 전화하니까 우빈이가 주씨 가문의 손자라면서 어머님 아버님이 손주를 보고 싶어 하신대. 내가 출근하느라 우빈이 돌볼 시간이 없다면서 앞으로 어머님 아버님한테 우빈이를 맡기겠다고 했어. 예정아, 내가 일단 신고부터 할게.
전태윤과 하예정은 다급하게 집을 나섰고 전태윤은 가면서 전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직 이른 시간이라 전이진은 일어나지도 않았다. 벨 소리가 한참 울리고 나서야 전이진이 전화를 받았다.“형, 무슨 일이야?”전이진은 눈을 뜨고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이내 다시 눈을 감고 전화를 받았다. 주말에는 보통 별다른 일이 없어 점심이 돼서야 일어나곤 했다.“이진아, 애들한테 연락해. 아홉째 빼고 전부... 예정아, 처형네 시댁으로 가려면 고속도로 타야 해? 어느 진입로야?”“타야 해요. 고속도로 타면 40분 정도면 갈 수 있어요. XX 고속도로예요.”전태윤은 휴대 전화 너머의 동생에게 말했다.“너희들 전부 XX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나랑 너희 형수님 기다려. 급한 일이 생겨서 너희들 도움이 필요해.”전태윤이 모든 형제들을 불러 모으라고 했다. 아홉째는 아직 미성년자라 굳이 부를 필요가 없었다.전이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형, 무슨 일인데 그래?”‘대체 무슨 일이길래 형제들까지 불러 모으라는 거지?’“너희 형수님 언니가 이혼을 준비하는 중인데 아직 합의하기도 전에 남자 쪽에서 먼저 아이를 데려갔어. 이런 상황에 신고해봤자 별 쓸모가 없거든. 그래서 우리가 직접 우빈이 찾으러 가야 해.”전씨 가문 사람과 하예진네 가족이 함께 식사한 적이 있었는데 전이진은 주우빈에 대한 인상이 깊었다. 주우빈의 아빠가 주우빈을 데려갔다는 소리에 전이진은 잠이 확 깨면서 침대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형, 형수님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해. 지금 당장 애들 부를게.”“지금 당장 XX 고속도로로 오라고 해. 우리 같이 주형인의 본가로 가보자. 아마 우빈이를 본가로 데려갔을 거야.”“알았어.”통화를 마친 전이진은 가족 단톡방에서 동생들을 부르려고 했으나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이라 깨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 일일이 직접 전화를 걸어 알렸다.마침 주말이라 전씨 가문의 도련님들은 전부 관성에 있었다.큰 형수님이 조카를 빼앗겼다는 소리에 도련님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집을 뛰쳐나와
광명 아파트에 도착한 두 사람은 곧장 하예진의 집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고 수많은 이웃들이 하예진의 집 문 앞에 모여들어 구경하고 있었다.“주형인 이 나쁜 자식아, 당장 내 아들 돌려줘. 당신네 집안사람들은 정말 못돼먹었어! 평소에는 우빈이를 장난감 취급하면서 데리고 놀다가 애가 울면 나 몰라라 하잖아.”“우빈이 벌써 29개월이에요.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사람이 애한테 옷 한 벌, 장난감 하나라도 사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인제 와서 우빈이 보고 싶다고요? 우빈이 보고 싶다고 할 때 제가 언제 못 만나게 하던가요?”시부모와 형님은 하예진이 주형인을 때리지 못하게 그녀를 꽉 잡았다. 하예진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발버둥 치며 욕설을 퍼부었다.조금 전에 이미 시댁 식구와 한바탕 싸웠는지 머리가 잔뜩 헝클어졌고 목소리도 갈라졌지만 여전히 그들을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퍽퍽!”주서인은 가차 없이 하예진의 뺨을 두 대 내리치고는 욕설을 퍼부었다.“우빈이는 주씨 가문의 손자야. 내 동생이랑 이혼하면 우빈이는 당연히 우리가 데려와야지. 우리가 우리 주씨 가문의 손자를 데려가는 건 자유야. 더 시끄럽게 울었다간 혓바닥을 잘라버릴 줄 알아.”형님에게 뺨을 맞은 하예진은 더욱 미친 듯이 날뛰며 벗어나려 했다. 주경진과 김은희가 그런 하예진을 통제하기 버거워하자 주서인이 냉큼 그들을 도왔다.할머니와 숙희 아주머니가 인파를 뚫고 문 앞에 도착한 순간 마침 그 장면을 목격했다. 할머니는 너무도 화난 나머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숙희 아주머니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할머니는 젊었을 적 정보통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분이었다. 비록 퇴직한 후 더는 손을 쓴 적이 없지만 몸이 강경하여 주먹과 발을 휘두르면 일반인보다 훨씬 강했다.그녀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무릎으로 하예진의 가슴팍을 누르고 있는 주서인을 발로 걷어차더니 주경진과 김은희도 연거푸 걷어찼다. 그 바람에 세 사람 모두 순식간에 바닥에 넘어졌다.
주경진과 김은희가 딸을 도와주려고 하면 할머니는 가차 없이 그들을 걷어찼다.주씨 가문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곧 팔순이 다 되어가는 할머니가 이토록 용맹하다니.할머니의 도움 덕에 하예진은 주서인과 마음껏 치고받았다. 주서인은 평소 입만 모질뿐 아예 하예진의 상대가 안 되었다. 게다가 하예진이 체구도 있어 주서인을 깔고 앉으면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하예진이 손을 멈췄을 때 주서인의 꼴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형인아, 이런 천한 년이랑 살아서 뭐 해. 당장 이혼해, 당장. 이 집은 네 것이니까 맨몸으로 쫓아내!”주서인은 지금까지 이런 굴욕을 당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 앞에서 반격도 못 하고 얻어맞기만 하다니.헝클어진 머리에 얼굴이 시퍼렇고 코가 부은 하예진도 온몸이 쑤셨다. 그녀는 주서인을 힘껏 짓누르며 몸을 일으켰다.“서인아.”주경진과 김은희는 재빨리 달려가 딸을 부축했다. 잔뜩 얻어맞은 딸의 모습에 두 사람은 마음이 아팠다.그때 할머니가 숙희 아주머니에게 분부했다.“숙희야, 이웃들한테 저 사람들이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 똑똑히 얘기해줘. 우리가 세력을 믿고 남을 괴롭힌다고 생각하겠어. 지금 열세에 처한 건 우리야. 저쪽은 남자 둘에 여자 둘이고 우린 연약한 여자 셋이야. 게다가 난 나이도 많아 지팡이 없인 걷지도 못해. 괴롭히는 쪽은 저쪽이야.”구경하던 사람들은 멍하니 넋을 놓았다.‘할머니, 방금 할머니가 혼자서 넷을 해결했거든요?’할머니가 연세를 들이밀며 주형인을 협박했던 것처럼 쓰러지기라도 해서 주씨 가문에 책임을 묻는다면 주씨 가문은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숙희 아주머니는 하예정과 함께 며칠 지내면서 하예진네 부부의 일을 다 알고 있었다. 하예진이 불륜 현장을 잡으러 간 그날 밤에도 주우빈을 돌본 건 그녀였다. 하여 숙희 아주머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전부 얘기했다.주형인이 아내를 때렸다는 사실은 아파트 사람들이 전부 다 알고 있었다. 주형인이 하예진을 폭행했을 때 하예진이 칼을 들고 주형인을 쫓아다
자유를 얻은 주서인은 이를 갈며 할머니를 노려보았다.‘저 할망구만 아니었으면 예진한테 얻어맞지 않았을 텐데.’할머니는 하예진을 끌고 소파에 앉더니 주서인을 힐끗 째려보았다.“정말 네 덕에 사람의 인성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됐어. 넌 입도 뻥긋하지 마. 안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내가 돼지 새끼랑 싸우는 줄 알아.”주서인은 너무도 화가 나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누나.”주형인이 누나를 말렸다. 아무래도 조금 전 할머니가 한 얘기를 듣지 못한 모양이다.“누나, 저분은 전태윤 씨 할머니야.”머릿속에 전태윤의 차가운 얼굴과 사나운 눈매가 문득 떠오른 주서인은 순간 움찔하더니 기세가 한결 꺾였다.“전씨 할머니...”그때 김은희가 말했다.“이건 우리 형인이랑 예진이 일이에요. 제삼자는 끼어들지 말아요. 알겠어요?”“내가 언제 끼어들었어요? 내가 끼어드는 거 봤어요?”할머니가 되물었다. 할머니는 집안에 들어온 후 발길질 몇 번 한 게 다였다. 할머니의 말에 김은희는 말문이 막혀버렸다.“오히려 과하게 간섭한 건 시어머니인 당신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 딸 말이에요. 시집도 간 여자가 동생네 가정사에 간섭하는 게 말이 돼요? 평소에도 이간질 많이 했죠? 대체 딸을 어떻게 가르친 거예요? 혹시 사돈댁에 복수라도 하려고 저런 딸을 그 집에 시집 보낸 거예요?”김은희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우린 우빈이 할머니 할아버지예요. 우린 그냥 우빈이 보고 싶어서 한동안 같이 지내려고 데려온 거라고요. 그런데 예진이는 우리를 유괴범 취급하면서 경찰에 신고까지 했어요.”주경진이 입을 열었다. 하예진이 신고한 후 인근 지구대에서 다녀갔다. 집안싸움인 걸 확인한 경찰은 간단하게 중재한 후 그냥 가버렸다. 경찰은 하예진을 도와 주우빈을 되찾아올 수 없었다.“예진이한테 얘기하지도 않고 데려갔다는 게 말이 돼요? 애가 울든 말든 신경 쓰지도 않고 그냥 안고 갔잖아요. 그건 대놓고 뺏은 거죠. 유괴범 취급한 것도 체면을 살려준 건 줄 알아요.”주경진은 입을 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