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하니 아들 녀석은 이혼할 마음을 굳힌 듯싶었다. 서현주와 호텔까지 갔고 하예진에게 외도 현장까지 들켰으니 하예진의 성격상 절대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김은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형인아, 너랑 예진이 결혼하고 나서 줄곧 너만 출근해서 돈 벌었어. 걔는 수입이 아예 없었어. 이혼하게 되면 절차만 밟고 옷이랑 짐 챙겨서 나가라고 해. 다른 물건은 일절 못 가져가!”이미 정해진 이혼이니 최대한 손실을 줄여야 한다.“엄마, 아무것도 못 가져간다는 건 불가능해. 예진이가 원한다면 모를까. 어떻게 맨몸으로 나가겠어. 결혼하고 나서 예진이가 출근은 안 했지만 내 수입도 부부 공동 재산에 속해. 예진이가 이혼 소송 걸면 재산의 절반을 나눠줘야 해. 이 집 대출은 결혼 뒤 내 월급으로 갚고 있지만 내 월급도 혼후 재산이라 예진이 몫이 있어. 이혼하고 걔한테 집을 안 줘도 일정한 금액을 보상해야 해. 내가 계산해봤는데 너무 많이 줄 필요는 없더라고. 인테리어 비용은 예진이가 냈어. 걔가 전에 나한테 한 말이 있거든. 나중에 이혼하면 인테리어 비용은 돌려달라고 했어.”“그 집은 인테리어랑 가전제품까지 포함해서 8400만 원이 들었는데 전부 예진이가 냈어. 그렇지만 나도 전에 똑똑히 얘기했어. 인테리어 비용은 일전 한 푼 돌려줄 수 없다고 말이야. 걔가 원해서 낸 돈이지 내가 협박한 건 아니잖아. 난 절대 돌려주지 않을 거야.”김은희가 말했다.“인테리어 비용을 돌려받는 게 어디 있어? 그건 신경 쓰지 마. 예진이가 무슨 난리를 치든 거들떠보지도 마. 너희 둘 혼후 재산 똑똑히 계산해봤니? 정말 예진이한테 절반 나눠줘야 한다면 대체 얼마를 줘야 해?”“4천만 원 좌우야.”“4천만 원!”김은희가 고함을 질렀다.“안 돼, 형인아. 걔한테 4천만 원 줄 수 없어. 결혼하고 일전 한 푼 벌지 않았는데 무슨 자격으로 네 돈을 4천만 원이나 가져가! 딱 40만 원만 줘. 갖거나 말거나 알아서 하라고 해.”4천만 원은 살을 도려내는 거나 다름없었다.주형인도 하예진에게
“네가 가서 얘기해. 더치페이 취소하고 앞으로 생활비 더 줄 테니까 이혼하지 말자고. 현주랑 함께 있을 때도 최대한 예진이한테 들키지 않도록 해.”“엄마, 나 반드시 이혼할 거야!”주형인이 단호하게 말했다.“현주는 결혼도 안 한 애가 나만 믿고 따라왔어. 나 반드시 현주 책임져야 해. 두 번 다시 현주 가슴 아프게 안 해.”김은희가 한심하다는 듯이 쏘아붙였다.“예진이도 너랑 처음 결혼했어! 왜 예진이는 끝까지 책임 안 져? 지금 딴 여자 때문에 네 와이프 속상하게 하는 건 괜찮고?”“엄만 대체 누구 편이야?”김은희가 입을 삐죽거렸다.서현주는 달콤한 말로 그들의 마음을 살살 녹였지만 함께 살림을 차려 나가는 건 그래도 예진이가 더 나았다. 하예진은 고생을 겪어본 아이라 마음이 강하고 단단하지만 서현주는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과 오빠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고생이라곤 전혀 해보지 못했다.이런 여자는 함께 행복을 누릴 순 있어도 함께 역경을 파헤치기엔 역부족이다.“예진이한테 요 이틀 서로 시간을 갖자고 얘기했어. 모레 다시 찾아가서 이혼을 상의할 거야. 일단 조건부터 의논해보고 합의가 안 되면 그땐 날 고소하라고 하지 뭐. 어차피 난 무조건 이혼할 거야. 진작 예진이한테 질렸어.”주형인은 무언가에 홀린 듯 이혼하지 못해 안달이었다.예진에게 돈을 보상한다고는 하지만 그래봤자 그의 재산 일부에 불과했다.아빠 명의하에 있는 돈이야말로 그의 재산의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 금액은 무려 2억 원이고 하예진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설사 그녀가 안다고 해도 증거가 없으니 제 앞으로 돌릴 순 없다.주형인의 부모님은 서로를 마주 봤다. 결국 주경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네가 이미 결정했다니 우리도 더 할 말이 없구나. 예진이한테 제대로 사과하고 이혼 합의 잘 봐. 돈을 좀 나눠주는 것 말곤 다른 물건은 일절 주지 마. 돈도 최대한 적게 줄 수 없을까? 400만 원 정도면 안 되겠니? 4천만 원은 너무 많아.”“그래. 결혼하고 나서 일전 한 푼 안 벌어들이고
주경진이 계속 말을 이었다.“예진이한테 돈을 좀 더 줘도 돼. 너무 모질게 굴지 마. 너한테 여지를 남겨둬야지 않겠어? 앞으로 서로 볼 날이 더 많아. 다만 우빈이는 반드시 우리가 데려와야 해!”주우빈은 주씨 집안의 보물이나 다름없다!“약속할게, 아빠. 우빈이 양육권은 내가 반드시 가져와.”“너희 부부 이혼하기 전까진 네 맹세 믿을 수 없어. 그러니까 우빈이 데려와. 우리가 옆에 두고 있어야만 안심이 돼.”주형인이 막연한 표정으로 물었다.“엄마, 아빠는 우빈이 돌본 적이 없잖아. 무작정 데려와서 애가 적응하지 못하고 울면 어떡해?”김은희가 대답했다.“돌본 적이 없으니까 데려와서 친해지자는 거지. 너 이후에 재혼하면 현주가 우빈이 키워줄 것 같아? 아이는 우리한테 남을 거야. 적어도 우린 우빈의 친할머니, 할아버지잖니. 마음 착한 계모가 몇이나 돼? 게다가 너랑 현주가 아직 젊어서 둘이 또 애 가질 거 아니야? 우빈이는 현주 친자식이 아니니 걔가 절대 우빈이한테 잘해줄 리가 없어.”두 사람은 비록 우빈을 제대로 돌본 적이 없지만 한편으로는 손자가 계모에게 학대 당할까 봐 걱정됐다.요즘 들어 새엄마가 전처의 자식을 학대하는 뉴스가 너무 많아졌고 심지어 어린 애들이 새엄마에게 맞아 죽은 사례들도 있었다.새엄마가 생기면 친아빠라 해도 아이에게 무덤덤해질 테니 주형인이 우빈을 잘 키울 거란 보장은 없다.주우빈은 주씨 집안의 첫 손주라 주경진 부부는 몹시 중히 여겼다.“나랑 네 아빠는 퇴직금도 좀 있고 아직 너무 늙진 않았으니 몸이 닿는 한 우빈이 잘 키울 수 있어. 넌 앞으로 생활비랑 우빈이 교육비만 보내주면 돼.”주형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알았어. 오늘 밤에 집으로 돌아가서 내일 바로 우빈이 데려올게.”주경진 부부는 아들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하예진 자매는 주씨 집안 사람들이 이혼 얘기를 꺼내면 막무가내로 굴 거라고 진작 예상했었다.하예정이 가게에서 눈 좀 붙이다가 깨어보니 어느덧 열한 시가 넘었다.심효진이 한
전태윤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태윤 씨, 오전에 버틸 만 했어요? 힘들면 회의 끝나고 반 차 내서 돌아와 휴식해요.”그녀의 관심 어린 말투에 전태윤은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검은색 회전의자에 기대어 빙글빙글 의자를 돌리며 말했다.“회사 돌아와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지금까지 버텼어. 곧 퇴근이니까 눈 좀 붙이면 돼.”“밥은 안 먹어요?”“피곤하니 입맛 없어. 안 먹을래.”“그럼 안되죠. 오전에도 일하느라 바빴는데 점심까지 안 챙겨 먹으면 위 다 버려요.”전태윤이 나긋나긋하게 대답했다.“먹고 싶지 않은 걸 어떡해.”“퇴근하고 일단 좀 자요. 이따가 내가 도시락 챙겨갈게요. 회사 문 앞에 도착하면 다시 전화할게요.”전태윤은 그녀의 언니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하예정은 절대 그를 끼니를 거르게 할 수 없었다.“그래, 그럼 나 회사에서 눈 좀 붙이고 있을게. 도착하면 전화해. 운전 조심하고.”“난 가게에서 반나절 자고 나니 정신이 좀 들어요. 내 걱정 말고 태윤 씨 볼일 보고 좀 자요.”말을 마친 하예정이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주방으로 들어가 도시락을 꺼내 깨끗이 씻으며 숙희 아주머니에게 말했다.“아주머니, 태윤 씨 밥 먹으러 안 온대요. 이따가 도시락 보내줘야 할 것 같아요. 다들 먼저 드시고 음식 좀 남겨주세요. 난 돌아와서 먹을게요.”숙희 아주머니가 얼른 대답했다.“음식 다 만들었어요. 언니분 오시거든 함께 드시면 돼요. 아니면 그냥 예정 씨 먼저 드세요. 다녀오노라면 아마 오후 한 시가 다 될 거예요. 그때까지 배고파서 어떡해요.”하예정도 나름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숙희 아주머니에게 전태윤이 먹을 밥과 국, 그리고 요리까지 도시락에 가득 담아달라고 했다.그러고는 재빨리 국 한 그릇과 밥 한 그릇 떠서 부랴부랴 먹었다.대충 배를 채운 후 그녀는 도시락을 들고 아주머니께 말했다.“나 먼저 갈게요. 이따가 가게 바쁠 때 우빈이 돌봐주시면 돼요.”학생들은 모두 자각적이라 딱히 지켜보지 않아도
어르신은 캐리어를 끌고 소파 쪽으로 걸어가더니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태윤아, 나 너랑 예정이네 집으로 들어가서 살 거야.”전태윤의 표정이 확 굳었다.“할머니, 나랑 약속했잖아요...”“내가 방해하려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긴장해? 뭐가 걱정되는 거야?”할머니가 반박하더니 곧바로 당당하게 쏘아붙였다.“네 아빠랑 삼촌이 집에서 날 쫓아냈어. 갈 곳이 없어서 손자를 찾아왔는데 왜 안 돼? 너도 네 아빠랑 삼촌처럼 이 할미를 내쫓으려고? 아이고, 사람이 늙으면 다 싫어하는 법이지. 어딜 가나 내쫓는구려. 아들 키워서 뭔 소용이야, 손자 길러서 뭔 소용이냐고? 착하고 다정한 손녀나 키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전태윤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할머니, 아빠랑 삼촌은 절대 할머니를 내쫓을 리가 없어요.”아무리 손자랑 함께 지내고 싶어도 어떻게 아빠와 삼촌에게 불효의 죄를 뒤집어씌울 수 있냐는 말이다.어르신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다고 며느리가 내쫓았다고 할 순 없잖니? 아들은 내가 낳은 자식이라 아무렇게 말해도 괜찮지만 며느리는 친자식이 아니야. 함부로 며느리에게 먹칠할 순 없지.”전태윤은 말문이 턱 막혔다.“얘기 다 들었어.”전태윤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얘기를 들으셨는데요?”“네 처형이 이혼한다면서. 지금이 바로 네가 점수를 딸 좋은 기회야. 처형을 도와 어려운 일을 해결해주면 예정이도 너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할 거야. 그렇게 되면 나도 곧 증손녀를 안을 수 있겠지. 이 할미가 너무 많은 볼거리를 놓쳤어. 이번엔 누가 뭐래도 놓치지 않아. 반드시 너희 집에 이사 가서 함께 지낼 거다. 네가 허락 안 하면 예정이 찾아가서 이를 거야. 네가 불효자라 이 할미가 갈 곳 없는데도 문전박대한다고 말이야.”전태윤의 표정이 한없이 어두워졌다.“할머니, 너무 막무가내세요.”“너한테 무슨 도리를 따져.”전태윤은 말문이 막혔다.“짐도 다 챙겨왔는데 못 들어가게 하면 너희 집 문 앞에 돗자리 펴야지 어쩌겠어. 예정이가 널 불효자
“전에 누가 ‘난 질투 같은 거 유치해서 안 해!’ 라고 했는데 태윤이 넌 그게 누군지 알아?”전태윤은 낯빛이 어두워지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가 아무 말도 잇지 못하자 어르신은 드디어 화제를 돌렸다.“성소현은 계속 널 기다리고 있어?”“그 사람은 더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아요.”성소현은 요 이틀 더는 회사에 찾아와 전태윤을 기다리지 않았다.그리고 하예정에게도 분명히 말해두었다. 전태윤에게 여자친구가 있거나 결혼을 했다면 절대 그에게 집착하지 않겠다고 말이다.이 얘기를 전해 들은 전태윤은 성소현을 다시 보게 되었다.제 사랑을 좇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가정을 파괴하진 않았다. 교만하고 제멋대로인 성소현은 이 방면에서 많은 사람보다 나았다.“성소현은 너랑 예정이 사이를 알고 있어?”“아니요. 그저 제 왼손 좀 보여주니까 알아서 물러서던데요.”어르신이 혀를 끌끌 찼다.“네 왼손이 뭐라고 한번 보여줬을 뿐인데 알아서 물러서겠니? 한심한 녀석.”전태윤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금반지를 꺼내 조용히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고 할머니께 흔들어 보였다.할머니는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할머니, 이진이 불러올 테니 함께 식사하러 가요. 캐리어도 챙기고요. 식사 다하시거든 이진이더러 예정이 가게로 할머니 모셔드리라고 할게요.”어르신이 뭐라 말하려 할 때 전태윤이 한마디 더 보탰다.“할머니, 이진이도 이젠 어린 나이가 아니에요. 종일 저만 지켜보지 마세요. 적어도 저는 결혼해서 와이프가 있는데 이진이는 아직 싱글이잖아요. 인제 그만 목표 바꾸세요. 이진이도 맨날 할머니가 저만 편애한다고 뭐라 하잖아요.”어르신이 입을 삐죽거렸다.“내가 아직 마음에 드는 상대를 고르지 못했잖니.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거든 네 그 동생들,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할 줄 알아. 이진이 부를 필요 없다. 내가 알아서 찾아갈게.”말을 마친 어르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캐리어를 끌고 문밖을 나서려 했다.전태윤은 여전히 동생에게 알려 어르신을 모시고 가라고 했다
전이진은 할머니를 모시고 로비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나란히 호텔로 식사하러 갔다.문밖을 나서자마자 눈치 빠른 전이진이 바로 하예정을 발견했다.“할머니, 태윤 형이 왜 나더러 할머니 모시고 식사하러 가라고 했는지 드디어 알았어요.”그는 회사 문 앞을 가리키며 할머니께 말했다.“형수님이 오셨어요. 도시락까지 들고 온 걸 보니 태윤 형한테 주는 건가 봐요.”‘어쩐지 태윤 형이 성급하게 나더러 할머니 모셔가라고 하더라니, 할머니가 방해꾼이 될까 봐 그런 거였어.’어르신은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정말 예정이네. 얼른 태윤이한테 전화해서 사무실 바꾸라고 해. 네 사무실로 가면 되겠다. 절대 예정이한테 들켜선 안 돼.”전이진은 알겠다고 말한 후 곧바로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가 알리지 않아도 전태윤은 진작 하예정이 올 걸 알고 있었다.그의 서랍 속에 망원경이 있어 할머니를 보내자마자 망원경을 들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하예정의 차가 들어온 걸 확인한 후 그는 망원경을 제자리에 넣어놓고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전이진은 할머니를 모시고 직접 운전했다.그는 회사 입구에서 차를 세우고 도어를 내리며 하예정에게 인사했다.“할머니, 이진 씨.”하예정이 웃으며 다가와 물었다.“할머니가 여긴 어쩐 일이세요?”어르신은 일부러 표정을 찡그리며 대답했다.“한두 마디로 얘기하기 힘들 것 같구나. 예정아, 우리 먼저 밥 먹으러 갈게. 나 너무 배고파. 저녁에 다시 얘기해.”“무슨 일이신데요? 알겠어요, 할머니. 얼른 가서 식사하세요.”“형수님, 저 할머니 모시고 밥 먹으러 가요. 태윤 형은 아직 사무실에 있어요. 전화하시면 바로 마중 나올 거예요.”말을 마친 전이진은 할머니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멀리 운전해서 나간 후 그가 웃으며 말했다.“나 매일 이 차 타고 출근하는 거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혹여나 형수님이 회사로 찾아왔다가 내가 고급 외제차 타는 거 보시면 바로 나부터 의심할 거 아니에요. 그때 되면 태윤 형이 날 아작낼
“난 이미 먹었어요.”하예정은 곧바로 대답하더니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그럼 내가 옆에 있어 줄게요. 태윤 씨 다 먹으면 돌아갈게요.”전태윤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우리 사무실로 가.”하예정은 또다시 붐비는 인파를 바라보며 떠보듯이 물었다.“난 태윤 씨 회사 직원도 아닌데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어요?”“나랑 함께 들어가면 돼.”그가 손을 내밀자 하예정은 머뭇거리다가 살며시 손을 잡았다.전태윤은 그녀의 손을 잡고 몰래 웃음을 훔쳤다. 물론 하예정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전태윤은 한 손에 그녀가 준 도시락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갔다. 다들 놀라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대표님.”“대표님.”다들 전태윤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하예정에게도 인사치레로 머리를 살짝 끄덕이며 그녀의 정체를 추측하기에 바빴다.대표님께서 손까지 잡았으니 대표님이 좋아하는 사람일 게 틀림없었다.그나저나 전 대표한테 언제 여자친구가 생겼었지?그야말로 철통 보안이었다. 오늘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다들 전 대표한테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믿지 않을 것이다. 어쩐지 성소현도 더는 전 대표를 찾아오지 않더라니,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아채고 그런 듯싶었다.성소현은 비록 교만하고 제멋대로지만 그녀도 나름대로 재벌 출신이라 딴사람과 한 남자를 빼앗으려 하진 않는다.누군가가 휴대폰으로 전태윤과 하예정을 찍으려 하자 옆에 있던 사람이 황급히 말렸다.“죽고 싶어 환장했어? 감히 대표님을 도촬하려 해?”그 사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정면을 찍은 것도 아니고 뒷모습만 찍겠다잖아. 우리 대표님이 드디어 연애하시는데 이런 빅 뉴스가 어디 있어. 카카오 스토리에 올리고 싶단 말이야.”“뒷모습도 안돼. 대표님께서 공개하지 않은 이상 절대 촬영해서도 안 되고 다른 사람들한테 알려서도 안 돼.”그 사람은 잠시 생각하더니 사색이 되어 재빨리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말려준 사람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전 대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