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태윤 씨, 오전에 버틸 만 했어요? 힘들면 회의 끝나고 반 차 내서 돌아와 휴식해요.”그녀의 관심 어린 말투에 전태윤은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검은색 회전의자에 기대어 빙글빙글 의자를 돌리며 말했다.“회사 돌아와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지금까지 버텼어. 곧 퇴근이니까 눈 좀 붙이면 돼.”“밥은 안 먹어요?”“피곤하니 입맛 없어. 안 먹을래.”“그럼 안되죠. 오전에도 일하느라 바빴는데 점심까지 안 챙겨 먹으면 위 다 버려요.”전태윤이 나긋나긋하게 대답했다.“먹고 싶지 않은 걸 어떡해.”“퇴근하고 일단 좀 자요. 이따가 내가 도시락 챙겨갈게요. 회사 문 앞에 도착하면 다시 전화할게요.”전태윤은 그녀의 언니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하예정은 절대 그를 끼니를 거르게 할 수 없었다.“그래, 그럼 나 회사에서 눈 좀 붙이고 있을게. 도착하면 전화해. 운전 조심하고.”“난 가게에서 반나절 자고 나니 정신이 좀 들어요. 내 걱정 말고 태윤 씨 볼일 보고 좀 자요.”말을 마친 하예정이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주방으로 들어가 도시락을 꺼내 깨끗이 씻으며 숙희 아주머니에게 말했다.“아주머니, 태윤 씨 밥 먹으러 안 온대요. 이따가 도시락 보내줘야 할 것 같아요. 다들 먼저 드시고 음식 좀 남겨주세요. 난 돌아와서 먹을게요.”숙희 아주머니가 얼른 대답했다.“음식 다 만들었어요. 언니분 오시거든 함께 드시면 돼요. 아니면 그냥 예정 씨 먼저 드세요. 다녀오노라면 아마 오후 한 시가 다 될 거예요. 그때까지 배고파서 어떡해요.”하예정도 나름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숙희 아주머니에게 전태윤이 먹을 밥과 국, 그리고 요리까지 도시락에 가득 담아달라고 했다.그러고는 재빨리 국 한 그릇과 밥 한 그릇 떠서 부랴부랴 먹었다.대충 배를 채운 후 그녀는 도시락을 들고 아주머니께 말했다.“나 먼저 갈게요. 이따가 가게 바쁠 때 우빈이 돌봐주시면 돼요.”학생들은 모두 자각적이라 딱히 지켜보지 않아도
어르신은 캐리어를 끌고 소파 쪽으로 걸어가더니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태윤아, 나 너랑 예정이네 집으로 들어가서 살 거야.”전태윤의 표정이 확 굳었다.“할머니, 나랑 약속했잖아요...”“내가 방해하려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긴장해? 뭐가 걱정되는 거야?”할머니가 반박하더니 곧바로 당당하게 쏘아붙였다.“네 아빠랑 삼촌이 집에서 날 쫓아냈어. 갈 곳이 없어서 손자를 찾아왔는데 왜 안 돼? 너도 네 아빠랑 삼촌처럼 이 할미를 내쫓으려고? 아이고, 사람이 늙으면 다 싫어하는 법이지. 어딜 가나 내쫓는구려. 아들 키워서 뭔 소용이야, 손자 길러서 뭔 소용이냐고? 착하고 다정한 손녀나 키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전태윤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할머니, 아빠랑 삼촌은 절대 할머니를 내쫓을 리가 없어요.”아무리 손자랑 함께 지내고 싶어도 어떻게 아빠와 삼촌에게 불효의 죄를 뒤집어씌울 수 있냐는 말이다.어르신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다고 며느리가 내쫓았다고 할 순 없잖니? 아들은 내가 낳은 자식이라 아무렇게 말해도 괜찮지만 며느리는 친자식이 아니야. 함부로 며느리에게 먹칠할 순 없지.”전태윤은 말문이 턱 막혔다.“얘기 다 들었어.”전태윤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얘기를 들으셨는데요?”“네 처형이 이혼한다면서. 지금이 바로 네가 점수를 딸 좋은 기회야. 처형을 도와 어려운 일을 해결해주면 예정이도 너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할 거야. 그렇게 되면 나도 곧 증손녀를 안을 수 있겠지. 이 할미가 너무 많은 볼거리를 놓쳤어. 이번엔 누가 뭐래도 놓치지 않아. 반드시 너희 집에 이사 가서 함께 지낼 거다. 네가 허락 안 하면 예정이 찾아가서 이를 거야. 네가 불효자라 이 할미가 갈 곳 없는데도 문전박대한다고 말이야.”전태윤의 표정이 한없이 어두워졌다.“할머니, 너무 막무가내세요.”“너한테 무슨 도리를 따져.”전태윤은 말문이 막혔다.“짐도 다 챙겨왔는데 못 들어가게 하면 너희 집 문 앞에 돗자리 펴야지 어쩌겠어. 예정이가 널 불효자
“전에 누가 ‘난 질투 같은 거 유치해서 안 해!’ 라고 했는데 태윤이 넌 그게 누군지 알아?”전태윤은 낯빛이 어두워지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가 아무 말도 잇지 못하자 어르신은 드디어 화제를 돌렸다.“성소현은 계속 널 기다리고 있어?”“그 사람은 더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아요.”성소현은 요 이틀 더는 회사에 찾아와 전태윤을 기다리지 않았다.그리고 하예정에게도 분명히 말해두었다. 전태윤에게 여자친구가 있거나 결혼을 했다면 절대 그에게 집착하지 않겠다고 말이다.이 얘기를 전해 들은 전태윤은 성소현을 다시 보게 되었다.제 사랑을 좇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가정을 파괴하진 않았다. 교만하고 제멋대로인 성소현은 이 방면에서 많은 사람보다 나았다.“성소현은 너랑 예정이 사이를 알고 있어?”“아니요. 그저 제 왼손 좀 보여주니까 알아서 물러서던데요.”어르신이 혀를 끌끌 찼다.“네 왼손이 뭐라고 한번 보여줬을 뿐인데 알아서 물러서겠니? 한심한 녀석.”전태윤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금반지를 꺼내 조용히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고 할머니께 흔들어 보였다.할머니는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할머니, 이진이 불러올 테니 함께 식사하러 가요. 캐리어도 챙기고요. 식사 다하시거든 이진이더러 예정이 가게로 할머니 모셔드리라고 할게요.”어르신이 뭐라 말하려 할 때 전태윤이 한마디 더 보탰다.“할머니, 이진이도 이젠 어린 나이가 아니에요. 종일 저만 지켜보지 마세요. 적어도 저는 결혼해서 와이프가 있는데 이진이는 아직 싱글이잖아요. 인제 그만 목표 바꾸세요. 이진이도 맨날 할머니가 저만 편애한다고 뭐라 하잖아요.”어르신이 입을 삐죽거렸다.“내가 아직 마음에 드는 상대를 고르지 못했잖니.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거든 네 그 동생들,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할 줄 알아. 이진이 부를 필요 없다. 내가 알아서 찾아갈게.”말을 마친 어르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캐리어를 끌고 문밖을 나서려 했다.전태윤은 여전히 동생에게 알려 어르신을 모시고 가라고 했다
전이진은 할머니를 모시고 로비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나란히 호텔로 식사하러 갔다.문밖을 나서자마자 눈치 빠른 전이진이 바로 하예정을 발견했다.“할머니, 태윤 형이 왜 나더러 할머니 모시고 식사하러 가라고 했는지 드디어 알았어요.”그는 회사 문 앞을 가리키며 할머니께 말했다.“형수님이 오셨어요. 도시락까지 들고 온 걸 보니 태윤 형한테 주는 건가 봐요.”‘어쩐지 태윤 형이 성급하게 나더러 할머니 모셔가라고 하더라니, 할머니가 방해꾼이 될까 봐 그런 거였어.’어르신은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정말 예정이네. 얼른 태윤이한테 전화해서 사무실 바꾸라고 해. 네 사무실로 가면 되겠다. 절대 예정이한테 들켜선 안 돼.”전이진은 알겠다고 말한 후 곧바로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가 알리지 않아도 전태윤은 진작 하예정이 올 걸 알고 있었다.그의 서랍 속에 망원경이 있어 할머니를 보내자마자 망원경을 들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하예정의 차가 들어온 걸 확인한 후 그는 망원경을 제자리에 넣어놓고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전이진은 할머니를 모시고 직접 운전했다.그는 회사 입구에서 차를 세우고 도어를 내리며 하예정에게 인사했다.“할머니, 이진 씨.”하예정이 웃으며 다가와 물었다.“할머니가 여긴 어쩐 일이세요?”어르신은 일부러 표정을 찡그리며 대답했다.“한두 마디로 얘기하기 힘들 것 같구나. 예정아, 우리 먼저 밥 먹으러 갈게. 나 너무 배고파. 저녁에 다시 얘기해.”“무슨 일이신데요? 알겠어요, 할머니. 얼른 가서 식사하세요.”“형수님, 저 할머니 모시고 밥 먹으러 가요. 태윤 형은 아직 사무실에 있어요. 전화하시면 바로 마중 나올 거예요.”말을 마친 전이진은 할머니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멀리 운전해서 나간 후 그가 웃으며 말했다.“나 매일 이 차 타고 출근하는 거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혹여나 형수님이 회사로 찾아왔다가 내가 고급 외제차 타는 거 보시면 바로 나부터 의심할 거 아니에요. 그때 되면 태윤 형이 날 아작낼
“난 이미 먹었어요.”하예정은 곧바로 대답하더니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그럼 내가 옆에 있어 줄게요. 태윤 씨 다 먹으면 돌아갈게요.”전태윤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우리 사무실로 가.”하예정은 또다시 붐비는 인파를 바라보며 떠보듯이 물었다.“난 태윤 씨 회사 직원도 아닌데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어요?”“나랑 함께 들어가면 돼.”그가 손을 내밀자 하예정은 머뭇거리다가 살며시 손을 잡았다.전태윤은 그녀의 손을 잡고 몰래 웃음을 훔쳤다. 물론 하예정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전태윤은 한 손에 그녀가 준 도시락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갔다. 다들 놀라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대표님.”“대표님.”다들 전태윤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하예정에게도 인사치레로 머리를 살짝 끄덕이며 그녀의 정체를 추측하기에 바빴다.대표님께서 손까지 잡았으니 대표님이 좋아하는 사람일 게 틀림없었다.그나저나 전 대표한테 언제 여자친구가 생겼었지?그야말로 철통 보안이었다. 오늘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다들 전 대표한테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믿지 않을 것이다. 어쩐지 성소현도 더는 전 대표를 찾아오지 않더라니,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아채고 그런 듯싶었다.성소현은 비록 교만하고 제멋대로지만 그녀도 나름대로 재벌 출신이라 딴사람과 한 남자를 빼앗으려 하진 않는다.누군가가 휴대폰으로 전태윤과 하예정을 찍으려 하자 옆에 있던 사람이 황급히 말렸다.“죽고 싶어 환장했어? 감히 대표님을 도촬하려 해?”그 사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정면을 찍은 것도 아니고 뒷모습만 찍겠다잖아. 우리 대표님이 드디어 연애하시는데 이런 빅 뉴스가 어디 있어. 카카오 스토리에 올리고 싶단 말이야.”“뒷모습도 안돼. 대표님께서 공개하지 않은 이상 절대 촬영해서도 안 되고 다른 사람들한테 알려서도 안 돼.”그 사람은 잠시 생각하더니 사색이 되어 재빨리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말려준 사람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전 대표의
전태윤은 도시락 뚜껑을 열면서 말했다.“우리 회사에서 출근해보면 알아. 여긴 대표, 부대표가 엄청 많아. 다들 책임진 구역이 다르거든. 아무튼 회사에서 내 위치는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아.”하예정이 혀를 쏙 내밀었다.“내가 이 회사에 들어올 실력이 없어서 참 다행이네요. 입사했더라면 그 많은 대표님을 어떻게 다 기억하겠어요.”전태윤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넌 지금 이대로가 좋아. 자유롭지, 수입도 낮은 편이 아니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너 같은 자영업자를 부러워하는지 알아?”“난 누군가에게 속박당하는 느낌이 싫어서 졸업하자마자 효진이랑 함께 가게를 꾸렸어요. 효진의 집에서 도와줬으니 망정이지 우리 하마터면 경영권을 못 가져올 뻔했다니까요.”학교 근처에서 가게를 꾸리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저 파키라는 내 온라인 스토어에서 샀어요?”하예정은 전이진의 책상에 놓인 파키라를 바라보며 물었다.전태윤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전이진의 파키라가 너무 눈에 거슬렸다. 왜냐하면 둘째가 일전 한 푼 안 쓰고 얻어왔으니까.“아까 큰 칸 사무실 지나오면서 못 발견했어? 다들 책상에 파키라나 머니 트리 공예품을 하나씩 놓았어. 혹은 뭐 럭키 캣도 있고, 아무튼 전부 다 네 온라인 스토어에서 구매한 거야.”하예정은 문득 성취감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이게 다 태윤 씨랑 이진 씨 덕분이에요. 소현 씨 공로도 크고요. 카카오 스토리에 올려서 홍보도 해주었고 소현 씨 오빠한테도 내 공예품을 사서 사무실에 놓으라고 했어요. 매출을 올려주겠다고 엄청 신경 써줬죠. 지금은 온라인 스토어 매출이 서점을 훌쩍 뛰어넘었다니까요.”친구가 많으면 길이 많이 트이는 법이고 성소현처럼 전폭적으로 도와주는 친구가 있으면 나아갈 길이 탄탄대로가 될 것이다.전태윤은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와이프의 공예품이 라이벌의 사무실에까지 놓이다니.그도 아직은 성씨 그룹에 성공적으로 투입되지 못했는데 와이프가 그보다 유능하여 먼저 성씨 그룹에 침입해 들어갔다.‘역시
“나랑 있으면 더 귀찮아하실 거야. 항상 내가 말주변이 없다고 불만이셨거든. 할머니는 나보다 널 더 좋아해.”하예정이 곧바로 대답했다.“그럼 우리 함께 할머니 모시고 기분 풀어드려요.”전태윤은 드디어 낚였다는 표정으로 바로 대답했다.“좋아. 서교 쪽에 펜션이 하나 있는데 내일 우리 할머니 모시고 거기로 가자.”모레는 처형과 주형인이 합의 이혼 하는 날이라 처가댁 식구로서 그들은 반드시 뒷받침해주러 가야 한다.하여 아내와 데이트할 시간은 내일 단 하루밖에 없다.펜션도 전씨 일가의 산업 중 하나지만 대외적으로 운영 중이라 매년 그곳에서 휴가를 보내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다.“거기 엄청 예쁘고 놀거리도 많다고 들었어요. 나도 아직 못 가봐서 잘 몰라요.”하예정이 휴대폰을 꺼내 들고 펜션 이미지를 검색해 보더니 내일이 오기를 기대하기 시작했다.혼자서 먹으면 입맛이 없다던 전씨 일가 도련님은 몇 분도 안 되는 사이에 하예정이 보내온 음식을 말끔히 먹어치웠다.그가 도시락통을 씻으려 하자 하예정이 재빨리 말렸다.“내가 할게요. 오전에 힘들었겠는데 푹 쉬어요. 이 사무실 너무 아늑하네요. 상사님 소파에 누워서 눈 좀 붙여요. 태윤 씨 책상에서 엎드려 자는 것보다 훨씬 편할 거예요.”그녀의 걱정어린 말투에 전태윤의 마음이 흐뭇해졌다.그도 확실히 피곤이 밀려와 하예정이 설거지할 때 소파에 기대 잠들었다.하예정이 나오자 그는 이미 깊이 잠들었다. 그녀는 살금살금 다가가 잠자는 전태윤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잘생긴 사람은 자는 모습도 너무 멋있었다.하예정은 도시락통을 내려놓고 그의 옆에 앉아 계속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차갑고 도도한 이 남자는 갓 혼인 신고했을 때 그녀와 말도 섞고 싶지 않아 했었다.그랬던 그가 언제부터인지 한없이 자상해지고 말도 점점 늘어났으며 서로 조금씩 믿음이 쌓였다.감정은 키워나가야 한다는 말을 하예정은 드디어 믿게 되었다.그녀와 전태윤의 감정이 얼마나 깊어졌다고 단정 지을 순 없으나 혼인신고를 할 때보단 확실히 단
다만 화장대 위에 있던 계약서가 사라졌다. 계약서 뒷면에 그림을 그렸던 것 같은데...어머!하예정은 곤히 잠든 전태윤을 노려봤다. 그가 무심코 그녀의 그림을 버렸는데 이는 둘 사이의 계약서, 아니, 그녀만의 계약서를 버린 거나 다름없다. 정작 전태윤 본인의 계약서는 보물처럼 고이 모셔두고 있을 것이다.하예정은 가볍게 그의 얼굴을 찔렀다. 그가 아무 반응 없자 그녀는 또다시 살짝 찌르며 중얼거렸다.“내 계약서는 무심결에 버려놓고 정작 당신 계약서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네요.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 난 아무런 보장이 없잖아요.”‘이참에 태윤 씨 계약서도 훔쳐 와서 망가뜨릴까? 그럼 서로 공평해지잖아. 누구에게도 계약서가 없으니 서로 구속할 수 없어. 그래야 나도 마음이 놓일 것 같아.’다만 그녀는 전태윤의 방에 들어갈 기회조차 없었다. 순간 하예정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의 계약서를 훔쳐 와서 망가뜨릴 수 있을까?만취시킬까?기절시킬까?아니면 유혹해볼까?하예정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결국 다 포기하고 천천히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아직도 한참 더 기다려야 전태윤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로 여겼는데 뜻밖에도 그날 밤에 괜찮은 기회가 차려졌다.할머니는 갑자기 찾아오셨는데 전이진과 함께 호텔에서 식사를 마친 후 바로 하예정의 가게로 간 게 아니라 호텔에서 휴식하다가 밤 9시가 다 돼서야 전이진을 불러와 발렌시아 아파트로 보내 달라고 했다.밤 10시, 어르신은 캐리어를 끌고 전태윤의 집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누구세요, 잠시만요.”숙희 아주머니가 재빨리 달려가 문을 열었다.할머니를 본 숙희 아주머니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어르신, 여긴 어쩐 일이세요?”“태윤이랑 예정이 안에 없어?”“지금 돌아오는 중이에요. 아직 도착하지 못했어요. 제가 먼저 돌아왔어요.”매일 저녁 하예정이 퇴근하고 돌아와 주우빈을 데려가기에 숙희 아주머니는 가게에 더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숙희 아주머니는 어르신의 캐리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