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친은 고사하고 그녀의 친척마저 마중 나오지 않았다. 여운초가 사업을 손에 장악한 것을 보고 그녀의 아부를 떨러 간 것은 아닐까? 이제 감옥에서 나왔으니, 여운별은 가문의 사업을 다시 가져올 것이다. 그녀의 아빠가 경영했던 기업을 한낱 장님한테 빼앗길 수는 없다. 게다가 눈조차 보이지 않는 사람이 회사를 관리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어쩌면 민 대표는 그저 여운초를 따르는 척하고 있는 중일 수 있다. 그녀와 그녀의 부모 모두 감옥에 들어가고 또 학교에 다니는 남동생이 있기에 할 수 없이 여운초를 도왔을 것이다. 지금 그녀가 감옥에서 나왔으니 민 대표는 어쩌면 그녀의 편에 돌아설지도 모른다. 민 대표는 그녀의 아빠가 배양한 사람이니 여운초를 진심으로 도울 리가 없다. 여운별은 몇 걸음 걸고 멈춰 섰다. 두 대의 차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그녀의 앞에서 멈췄다. 5, 60대 돼 보이는 낯선 늙은 얼굴이 그녀의 눈 안에 들어왔다. 사실 별로 늙진 않았으나 20대 초반인 여운별과 비기면 늙은 축에 속했다. “둘째 아가씨, 오늘이 출소일인 것을 알고 특별히 마중 왔어요. 샤워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여운별은 제멋대로인 성격에 총명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모르는 사람의 차에 탈 리가 없다. 그녀는 눈앞의 늙은 여인을 자세히 살폈다. 정말로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면목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그녀의 친척도 아닌 것 같았다. “누구세요?” 여운별이 경계하며 물었다. 그녀는 조기 출소하였다. 방금은 그저 절친과 친척이 그녀의 마중을 오지 않았다고 푸념했을 뿐이다. 사실 그 누구도 그녀가 출소한다는 것을 모른다. ‘이 여자가 어떻게 안 거지?’게다가 특별히 마중 온 거라니. ‘누가 보낸 거지? 혹시 엄마가 바깥에 다른 세력을 가지고 있나?’“둘째 아가씨는 제가 누군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제가 아가씨의 복수를 도울 수 있다는 것만 아시면 돼요. 동시에 저도
“신분과 목적을 알려주지 않는 한 전 차에 타지 않을 거예요.” 늙은 여인은 잠시 침묵하다가 웃으며 답했다. “감옥 한번 갔다 오더니 성숙해졌네요. 제 남편은 정씨 성이에요. 전에 아가씨의 아빠와 몇 차례 같이 사업을 했어요.” 정씨? 여운별은 집안의 사업에 대해 잘 모른다. 그녀의 부모님이 어린 그녀와 사업상의 일을 얘기한 적은 극히 드물다. 그저 집에 돈이 많다는 것 정도만 알았다. 부모님은 그녀한테 다른 재벌 집 딸이 가지고 있는 건 다 사줬다. 심지어 그들이 없는 물건도 구해줬다. 가끔 아빠가 집안 사업의 규모가 커지고 있다고 한 적은 있다. 아빠와 사업을 진행한 적 있다면 혹시 아빠와의 친분 때문에 그녀의 마중을 나온 건가? “정 사모님은 제가 오늘 출소하는 것을 어떻게 아셨나요?” 늙은 여인은 여전히 미소 지으며 답했다.“사람을 시켜 몇 번 알아본 끝에야 겨우 아가씨가 오늘 출소한다는 소식을 얻을 수 있었어요. 저희는 여 대표님과 몇 번 같이 사업 하여서 친분이 있어요. 여 대표님이 감옥에 들어가기 전 우리한테 부탁했어요. 그간의 정을 봐서 자신의 아들딸 좀 잘 부탁한다고요.” “동생은 아가씨의 큰 언니와 화목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같이 전 대표의 결혼식에 참가한 뒤 학교로 돌아갔어요.” “아가씨 가문의 불법 사업들은 다 막대한 벌금과 함께 문을 닫았어요. 합법적인 사업들은 큰 아가씨의 손에 들어갔고요.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으니 사실상 한동호 씨가 회사를 관리하고 있어요.” 여씨 가문의 일은 조금만 조사해 보면 알아낼 수 있었다. 늙은 여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여운별도 조금은 알고 있었으나 그녀는 늙은 여인의 말을 듣고도 머뭇거리며 물었다. “절 어디로 데려가실 생각이세요?” “먼저 차에 타도록 하세요. 제가 아가씨를 어디에 팔 것도 아닌데요. 그저 여 대표와의 친분이 생각나서 둘째 아가씨한테 밥 한 끼 제대로 먹이려고요. 그 후에 푹 휴식하고 옷도 깨끗한 것으로 바꿔입어요. 기력 회복하여야 여씨 가문으로 돌아가
아빠와의 친분을 봐서 마중 나왔다는 말은 그저 핑곗거리에 불과하였다. 여운초와 하예정때문에 그녀는 지금 꼴이 말이 아닌 처지에 놓였다. 그녀를 지키려 했던 부모님도 여운초때문에 감옥에 들어갔다. 여운초 그년을 씹어먹어도 분이 삭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절대 자신의 두 원수가 전씨 가문의 첫째와 둘째 사모님이 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다. 그녀의 친남동생인 여천우는 어릴 적부터 여운초와 친하게 지냈다. 오히려 친누나인 여운별과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운초를 괴롭힌다고 항상 여운별을 지적하였다. 여운별은 여천우가 그녀와 손잡지 않을 거란 것을 알았다. 그녀는 아직 어리고 인맥도 없으니, 복수 하려면 하는 수 없이 다른 누군가와 연합하여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정 사모님이 하는 얘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하예정을 대적할 수만 있다면야 상관없다. 적의 적은 친구인 법이다. 그리하여 여운별은 정 사모님의 차에 올라탔다. 정 사모님은 기사가 출발하도록 하였다. 여운별이 물었다. “저의 두 큰고모는 어떻게 되셨는지 아세요? 저 복수할 거예요. 우리 집의 모든 것을 다 가져올 거라고요. 하지만 저 혼자서는 어림도 없어요. 제 친남동생은 절 도우려 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저의 두 큰고모는 아빠와 사이가 좋으니 절 도우려 할 거예요.” 그녀의 두 큰고모의 아들들 모두 여씨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당시 그녀의 아빠가 안배해 준 직무이다. 한 집안 사람이니 그녀를 도와주려 할 것이다. 두 큰고모도 여운초를 탐탁지 않아 했다. 여운초가 사업을 장악한 것을 안 이상 가만히 손 놓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가씨의 두 큰고모도 별로 큰 도움을 주진 못할 거예요. 당시 여 대표가 감옥에 들어가자 아가씨의 사촌 오빠들이 대신 회사를 관리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큰아가씨와 민 대표가 연합하여 그들을 처리했어요.” “그 후 아가씨의 사촌 오빠들은 사직당하고 여씨 기업을 떠났어요. 사촌오빠와 두 큰고모가 큰아가씨를 찾아가서 귀찮게 했어요. 그러자 큰아가씨
반 시간 후 정 사모님은 여운별과 함께 호텔로 갔다. 호텔은 크지 않았고 시설도 고급스럽지 않았다. 여운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속으론 정 사모님이 쪼잔하다고 불평했다. 그녀를 위해 5성급 호텔에 방을 잡지 않았다고 말이다. 정 사모님은 그녀한테 방을 잡아준 뒤 차에서 가져온 백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 “이건 새 옷이에요. 먼저 방으로 돌아가 샤워부터 하세요. 그리고 옷 갈아입고 내려와서 같이 밥 먹으러 가요.” 그녀는 옷과 방 카드를 건네받은 뒤 방으로 올라갔다. 비록 감옥생활을 했었다 해도 어릴 적부터 호화로운 생활을 해왔던 그녀였기에 솔직히 이 호텔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녀는 간단하게 샤워한 후 머리를 감았다. 그 후 정 사모님이 사 온 새 옷으로 바꿔입고 머리를 말렸다. 거울 속 자기 모습을 한참 쳐다본 후에야 그녀는 머리를 묶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살이 많이 빠졌지만 아직 젊었기에 홀쭉해져도 보기 좋은 미인에 속하였다. “여운초, 하예정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녀는 거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다짐했다. “내가 당한 것의 천배를 되갚아줄 거야.”여운별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정 사모님이 1층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내려오자 정 사모님은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한테 다가갔다. “우리 밥 먹으러 가요.” “방금 잡은 방은 묵든지 아니면 취소하든지 편한 대로 하세요.” “정 사모님이 사주신 새 옷 고마워요. 이 방은 취소할게요. 전 제 집인 여가 저택으로 돌아가려고요. 여운초 그 장님이 저를 내쫓기야 하겠어요?”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가서 여운초한테 시비 걸고 싶었다. 정 사모님은 그녀를 스윽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텔에서 나온 뒤 그녀는 정 사모님의 차에 올라탔다. 정 사모님이 여운별을 데리고 간 식당도 고급 레스토랑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페스트 푸드 가게에서 메뉴 몇 가지를 주문하였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정 사모님이 그녀에게 말했다. “고급 레스토랑이 아니라고 제
여운별의 눈가에는 독기가 스쳐 지나갔고 이내 정현숙을 쳐다보며 말했다.“그곳은 나쁜 버릇을 고치는 곳이죠. 저와 협력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제가 정보를 알아 오면 보수는 어떻게 계산해 줄 거예요?”여운별은 직업이 없다.감옥에 들어간 뒤로 그녀의 물건은 모두 부모님께 보내졌지만, 부모님도 감옥에 들어갔다. 아마도 여운별의 휴대폰과 카드, 차 열쇠 등은 모두 여운초에게 있을지도 모른다.여운별은 여운초의 손에서 휴대폰과 같은 물건들은 가질 수 있었지만, 회사 일은 당분간 끼어들지 못할 것이다.여운별은 그룹에 관한 일은 전혀 알지도 못한 데다 한 대표와 전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 여운초의 배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여씨 가문은 또 여운초에 의해 오랫동안 운영되고 있었고 따라서 그룹의 재산 또한 여운초가 짊어지고 있다.여운별은 앞으로 여운초에게 돈을 달라고 할 생각을 하더니 괴로워 토할 것만 같았다.정씨 사모님 정현숙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하예정 씨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서 제때 저에게 전달해 주시면 돼요. 하예정은 지금 전씨 가문의 큰 사모님이에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 모두 시선을 끌기 쉬웠기에 이 일은 아가씨에게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하예정 씨의 소식을 알아보는 것 외, 하예정 씨와 관계 있는 전 대표님과 성씨 가문의 사모님 그리고 친언니와 같은 사람들의 모든 일을 알아내는 대로 전부 저한테 알려주세요.”“우리가 보복하려면 반드시 상대방의 모든 일을 똑똑히 알아내야 기회를 노려 한방에 무너뜨릴 수 있어요. 그리고 보수에 관해서 아가씨는 얼마를 원하세요?”여운별은 이내 대답했다.“소문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일단 전 대표님이 발견하게 된다면 제가 위험에 처할 수 있거든요. 그 뜻은 제가 이 일을 목숨 걸고 한다는 뜻이죠.”“사모님은 분명 저를 푸대접하지 않으실 거라고 믿어요. 함께 협력하더라도 서로한테 성의를 보여줘야 하잖아요. 저에게 한 달에 1억 원만 주세요. 이런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도 청해야 하는 일이라 돈을
여운별은 속으로 자신이 여씨 가문의 모든 것을 빼앗는다면 돈이 매우 많아질 텐데 정현숙이 주는 그깟 2억 원이 대수겠냐고 비방했다. 그녀는 하예정을 미워하면서 하예정이 불행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여운별은 그녀가 하예정을 괴롭히고 싶은 사람을 찾으려면 수소문하면 곧 나타날 것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직접 나설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그녀는 이내 대답했다.“제가 증명해 드리죠. 단지 제가 지금 막 나와서 예전의 핸드폰과 은행 카드 모두 여운초 손에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제가 운초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운초도 저한테 돌려주지 않을 거예요. 제가 지금 돈이 좀 필요하거든요.”정현숙은 카드를 꺼내더니 그 카드를 여운별 앞에 놓으며 말을 했다.“그래요. 이 카드 안에 600만 원이 들어있어요. 금방 나왔으니 일단 이 돈으로 먼저 생활하세요.”“식사하시고 여씨 가문으로 아가씨의 모든 것을 돌려받으러 가보세요. 아가씨가 가지고 있던 것을 되돌려 받아야죠. 적어도 휴대폰과 은행 카드는 돌려받아야 할 거 아니에요.”여운별은 은행 카드를 집어 들며 물었다.“비밀번호는요?”“8자 8개요.”여운별은 은행 카드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정현숙은 매우 인색했다. 여운별에게 겨우 600만 원밖에 주지 않았다.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여운별은 감옥에서 금방 나온 터라 일전 한 푼 없었다. 이 600만 원은 그녀의 일시적인 생활 비용을 해결해 줄 수 있다.여씨 가문에 돌아가서 그녀의 모든 것을 되찾게 된다면 돈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여운별은 자신의 집에 실제로 얼마의 자산이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200억대의 재산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요컨대,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돈이 부족해 본 적 없었고 원하는 물건도 마음대로 가졌다.여운초처럼 집에 일하지 않으면 밥도 못 먹을 정도로 하인만도 못한 살림을 하지 않았다.“제 연락처입니다.”정현숙은 또 여운별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주었는데 그 명함 위에는 정현숙의 전화번호만 있을 뿐 다른 글씨
여운별은 이미지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 탁자 위 음식을 모두 먹어치웠다.정현숙은 얼마 먹지 않았다.정현숙은 미소를 지으며 여운별이 허겁지겁 음식을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여운별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만족한 듯 휴지를 꺼내 입을 닦았다.정현숙이 물었다.“혼자 돌아가시겠어요? 제가 사람 시켜 모셔다드릴까요?”“택시 타고 갈 테니 택시 요금 좀 내주세요.”“네, 그럼 택시 타고 가세요.”정현숙은 대답하면서 현금 20만 원을 꺼내 여운별에게 건네며 말했다.“이 돈으로 택시 타세요.”여운별은 그 돈을 건네받았고 잠시 후 일어나면서 정현숙에게 말했다.“밥을 사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 우리가 즐겁게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래요.”정현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유쾌하게 일할 수 있기를 바래요.”여운별이 자리를 떠났다.정현숙은 테이블에 앉아 여운별이 택시에 올라타는 것을 보고 나서야 계산대에 가서 계산하고 패스트푸드점에서 나왔다.정현숙의 부하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오른 정현숙은 조수석 남자에게 지시했다.“사람을 시켜 여운별 씨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지켜보라고 하세요. 그리고 기회를 봐서 도와주기도 하고요. 여운초 씨가 여씨 가문을 계속 장악하게 해서는 안 되니까요.”“네.”조수석에 있는 남자는 관리를 아주 잘한 중년 남자였다.그와 동시에 여씨 가문의 별장.로비에서 여운초가 소파에 앉아있었고 정겨울이 그녀의 눈을 검사해 주며 맥도 짚어주었다.옆에 서 있던 전이진은 정겨울에게 방해가 될까 봐 긴장한 채로 아무것도 못 하고 쳐다만 보았다.정겨울은 처방전을 쓰기 시작했을 때, 전이진은 그제야 걱정스레 물었다.“정 선생님, 운초의 눈은 어때요? 회복된 거예요?”정겨울이 처방전을 쓰면서 대답했다.“아직 완치되지 않았어요. 치료를 계속하지 않으면 보일 수는 있겠지만 더 멀리는 보이지 않을 거예요. 근시처럼 멀리 있는 물건들이 희미하게 보일 거라는 의미죠.”“치료를 좀 더 받아야 시력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어
정겨울은 처방전을 다 쓴 뒤 처방을 전이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지난번에 제가 보내온 약이 아직도 있죠? 이 처방전대로 약을 지어서 그 약과 함께 복용하세요. 이 약들을 다 복용하신 뒤 제가 다시 운초 씨에게 맥을 짚어드리죠. 평소에 시간이 있으면 운초 씨를 모시고 바깥의 녹색 풍경을 자주 보러 나가세요.”“감사합니다.”전이진이 감사 인사를 했다.여운초가 매일 마셔야 하는 한약은 전이진이 직접 나가서 잡아 온 것이다. 그리고 약을 지어 온 뒤로 정겨울에게 한 봉지씩 검사하도록 했고 정겨울이 냄새를 맡아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여운초에게 약을 가져다주었다.정겨울은 감탄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환자들에게 치료해주면서 전이진처럼 조심스럽고 세심하며 배려심이 깊은 환자 가족을 처음 만났다고 했다. 정겨울은 두 사람 앞으로의 삶은 분명 행복하고 달콤할 것이라고 여겼다.여운초는 고생 끝에 단맛을 보는 전형적인 인물이었고, 전이진을 만나기 전에는 엄청나게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다.한동호가 몰래 그녀를 도와준다고 해도 겉으로는 그야말로 비참하게 살았다. 어렸을 때 받은 고통과 학대는 정말 말할 것도 없었다.“선생님, 운초의 눈을 씻는 약초가 떨어졌는데 계속해서 씻어야 할까요?”여운초의 눈을 씻는 약초는 정겨울이 직접 재배한 약초로 밖에서 구하기 매우 어려웠다.전이진은 정겨울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지금 상태로 보면 더는 씻을 필요 없이 약만 먹으면 충분해요. 그리고 밖으로 나가셔서 먼 곳을 자주 바라보셔야 해요. 그러면 아마 설 쇠기 전에 정상인의 시력으로 회복할 수 있을 거예요.”“참, 근시는 아니었죠? 원래 근시라면 정상적인 시력을 회복할 수 없어요.”여운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근시가 아니었어요.”정겨울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럼 설이 지나고 정월이 되면 제가 다시 몸조리해 드릴게요. 결혼 날짜는 정했어요?”그들 결혼식 전에 여운초의 몸이 잘 조리될 수 있을 것이다.“정하긴 했지만, 아기를 바로 가질 계획은 없
여천우가 바로 거부했다.“누나, 이건 내가 도울 수 없어. 운초 누나의 일은 나도 어쩔 수 없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돈도 전부 운초 누나가 준 돈이니까. 나도 잠시 운초 누나가 먹여 살려줘야 하는데 내가 어떻게 운초 누나의 생각을 바꿀 수 있겠어?”설령 여천우는 여운초가 여운별의 정지된 카드를 풀게끔 설득할 수 있다고 해도 여천우는 하지 않을 것이다.여천우와 여운초의 의도가 바로 여운별이 함부로 돈을 써서 재산을 탕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여천우는 여운별을 궁지로 몰아넣어 그녀 스스로 돈을 벌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그렇지 않으면 여운별은 아마도 여운초에게 평생 눌리면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어쨌든 여운별과 여운초는 친자매였기 때문에 여천우도 여운별이 잘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너도 운초가 도리를 따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 이상 나와 손을 잡고 운초를 상대해야지, 운초의 말에 속아 넘어가 부모님을 만나면 어떡해? 그것도 부모님 재산을 너의 명의로 바꾸라고 한 것도 운초의 생각이지? 운초가 가르쳐준 거지?”“천우야, 운초는 우리 가문의 재산을 독차지하고 싶을 뿐이야. 내가 어떻게 우리 가문의 재산을 탕진할 수 있겠어? 우리 가문에 사업이 그토록 많은데 우리가 우리 재산을 가져오기만 한다면 돈은 떼처럼 굴러올걸. 우리 남매 3대가 쓰기에도 충분할 거라고.”이때 여천우가 또 반박했다.“운별 누나. 우리 집은 누나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돈이 많지 않아. 일부 재산은 운초 누나 소유이고 또 우리 부모님 장사는 법을 어기는 장사야. 일찍 압류당하고 벌금도 낸 거 몰라? 합법적인 사업은 얼마 되지도 않아.”여운별이 말을 이었다.“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 나도 알아. 우리 집은 돈이 엄청 많다는걸. 엄마가 알려주셨어. 운초 장님이 뭐가 돈이 있다고... 둘째 삼촌이 돌아가시고 나서 여씨 그룹의 장사는 줄곧 우리 부모님께서 하고 계셨는데. 그 재산도 마땅히 우리 것이어야 해. 쓸데없는 소리 말고 한 가지만 물
여천우에게 엄하게 대하고, 어려서부터 독립시킨 것은 모두 그를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였다.후계자가 독립할 능력이 없다면 어떻게 여씨 가문을 이어받을 수 있단 말인가!다만 여천우가 아직 젊어서 추미자 부부가 대놓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여천우도 성인이 되었고 여운별이 출소하자마자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재산을 위해서라도 추미자 부부는 그들의 명의로 된 재산을 아들 여천우에게 넘겨주기로 했다.여천우는 여운별의 기본 생활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고 여운별이 스스로 돈을 벌어 자신을 먹여 살릴 수 있게 되면 더는 여운별에게 생활비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여운별이 시집가게 되면 여천우는 그녀에게 후한 혼수를 줄 것으로 계획했다.여운초도 그깟 재산을 두고 그들과 다투지는 않을 것이다.여운초가 원하는 것은 단지 공평이었다.“엄마와 아빠는 모두 동의하지 않을 거야.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꿈도 꾸지 마!”사실 여운별도 그녀의 부모님이 동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결국, 추미자 부부가 선택한 사람이 그들이 가장 아끼는 친딸 여운별이 아니라 아들 여천우라는 사실을 믿기 싫었을 뿐이다.정녕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여천우에게 물려주려 했는가!여운별에 대한 사랑은 역시 성별을 초월할 수 없었던 건가!추미자 부부는 한 번도 여운별에게 재산을 넘겨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여운별은 이 사실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의 부모님은 그들이 남자를 더 중히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어릴 때부터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었다.그러나 여천우가 원하는 것은 무언가 대가를 치러야만 얻을 수 있었고 심지어 얻지 못할 때도 있었다.여운별은 추미자 부부의 사랑이 완전히 그녀 쪽으로 기울었다고 생각했다.추미자 부부는 여운초를 아끼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가 죽기를 바랐다.여운별은 그녀의 부모님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여천우가 아닌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여천우는 여운별의 무너지는 모습을 보더니 입술을 오므리다가 말을 이었다.“누나, 누나
“여천우, 이 나쁜 놈아! 이제 다 커서 여운초와 연합해 친누나를 괴롭히려고 들어? 난 네가 감옥으로 가서 단지 우리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찾아간 줄로 알았는데, 우리 부모님 재산을 노리고 간 거였어? 엄마 아빠 재산도 내 몫이니까 혼자 차지하려고 하지 마! 부모님이 가장 아끼는 사람은 나야. 우리 부모님은 그들의 명의로 된 재산을 전부 너에게 주지 주지는 않을걸. 그러니까 엄마 아빠 귀찮게 하지 마!”여운별도 면회하러 가서야 여천우가 그날 추미자 부부의 면회를 하러 간 것을 알게 되었다.여천우는 추미자 부부에게 그들이 압류당하지 않은 재산을 여천우 한 사람에게만 물려달라고, 여운별과 여운초에게는 재산을 주지 말자고 제안했다.여운초는 여태웅의 자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재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여운별은 그녀의 부모님이 가장 아끼는 딸로서 자산을 가지지 못 가질 리가 없었다.여운별은 이미 변호사와 만나 여운초에게 소송을 걸어 여운초의 모든 재산을 되찾으려고 계획했다.그러나 남동생 여천우가 독점할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겉모습만 봐서는 안 된다는 말이 이럴 때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평소에는 철이 들고 착한 동생인데 이토록 큰 야망을 품고 있었다니!아니, 여미란과 여미정의 말대로 여운초가 꾸민 짓일 것이다!여운초는 여운별이 정말로 소송을 걸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이 소송 때문에 여운초가 현재 가진 재산 일부를 토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추미자가 그들의 재산을 전부 여천우에게 물려준다면, 여운초와 여천우의 두터운 친분으로 볼 때 그 재산도 여천우의 손에 잠시 머물러 있을 가능성도 아주 크다.여씨 가문의 모든 재산은 결국 여운초의 손에 넘어가고 심지어 여운별이 아무리 소송을 걸어도 이길 수 없는 상황으로 발전될 수도 있다.여운별의 부모님은 현재 살아계시고 또한 부모님의 재산도 그들의 의향대로 지정된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다. 그리고 여운별도 성인이 다 되었기에 그녀의 부모님도 이제 그녀를 키울 책임이 없다
게다가 우빈이도 장점이 있는 어린이였다.그는 독서와 글씨를 쓰는 데 있어서 용정보다 조금 나은 편이다.용정은 숫자를 많이 읽는다지만 잘 쓰지 못했다. 이 또한 전태윤이 우빈을 칭찬할 때 자주 쓰는 말이었다.그러나 우빈은 전태윤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여겼다. 전태윤이 어른일 뿐만 아니라 전씨 그룹의 대표였기 때문에 그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라고 믿었다.우빈은 이렇게 자신을 설득하더니 더는 입을 삐죽 내밀지 않고 용정을 끌어당기며 말했다.“가자, 우리 들어가서 뭐 먹자. 배고파.”“나도 배고프다.”두 녀석은 또 즐겁게 팔짝팔짝 뛰며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여씨 가문.여운별은 별장 입구에 멀찌감치 서 있다가 여천우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한참 후에야 여천우가 집안에서 나왔다.여천우가 나오는 것을 보고 여운별은 어두운 얼굴로 걸어가다가 손을 들어 여천우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짝!여천우는 여운별이 자신을 보자마자 뺨을 때릴 줄은 몰랐다.그는 단지 여운별이 자신이 곧 학교로 돌아갈 것을 알고 특별히 찾으러 온 줄로만 알았지만 만나자마자 뺨을 때릴 줄은 몰랐다.“누나. 왜 때려?”여천우는 맞은 얼굴을 만지며 여운별에게 물었다.여운별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욕설을 퍼부었다.“누나라고 부르지 마. 내가 네 누나가 맞긴 한 거야? 어려서부터 너는 여운초를 좋아하고 나와 가깝게 지내지도 않더니 이제 와서 여운초와 연합해서 나를 상대하려고 해? 여천우! 너 미쳤어? 나야말로 너의 친누나거든! 같은 엄마 배에서 나온 친누나라고. 여운초는 네 사촌 누나일 뿐이야!”여천우도 바로 화를 냈다.“내가 미쳤다고? 누나! 누나는 우리 부모님 밑에서 응석받이로 자라면서 못된 것만 배웠잖아! 내가 미쳤다고? 누나가 미친 거 아니야? 운초 누나는 내 사촌 누나이자 내 친누나야. 운초 누나도 나와 같은 엄마 뱃속에서 나온 친누나야! 영원한 내 친누나라고!”여운별은 화가 나서 또 여천우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여천우가 막을 준비를 하고
우빈이가 툭하면 어린이집에 안 가는 데 익숙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전에 명확하게 일러둬야 한다고 하예정은 생각했다. 이번에는 용정이 모처럼 놀러 왔고 또 용정이 관성에서 친구란 우빈이밖에 없으니, 이번만은 응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우빈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을 약속했다.용정도 따라서 말했다.“아주머니, 다음번에는 제가 여름방학 혹은 겨울방학을 하는 틈을 타서 올 게요. 그러면 누구도 휴가를 내지 않아도 되잖아요.”“이모, 지금 당장 엄마한테 전화해서 얘기하면 안 돼요?”우빈이한테는 지금 휴가를 내는 일이 급선무였다.그래야 시름 놓고 놀 수 있을 것 같았다.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전태윤을 째려보았다. 전태윤은 일부러 하예정의 시선을 피하여 고개를 돌려 딴 곳을 쳐다보는 척했다. 하혜정은 속으로 남편이 우빈이의 일을 자신한테 떠밀었다고 투덜댔다.“알았어.”하예정은 마지못해 하예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예진이 전화를 받자 하예정이 말했다.“언니, 우빈이가 할 얘기 있대.”그러고 나서 휴대폰을 우빈이에게 넘겨주면서 말했다.“우빈아, 네가 직접 엄마하고 얘기해.”우빈이는 전화를 받아쥐고 하예진에게 휴가를 내려는 사유를 자초지종 말했다.하예진도 하예정과 똑같은 말을 하고 나서 우빈이가 하루 휴가를 내서 모처럼 찾아온 친구랑 노는 것에 응낙했다.그러자 우빈이는 휴대폰을 하예정에게 돌려준 후 용정의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뛰면서 기뻐했다. 그러고는 대결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용정에게 말했다.“용정아, 나 요즘 아주 열심히 무술을 연마했어. 우리 한 번 대결해.”용정이 자신만만해서 말했다.“넌 나한테 질 거야. 나한테 져서 화내면 안 돼. 알았지?”지난 여름방학 때 두 사람이 함께 놀 때 우빈이가 항상 져서 기분이 언짢아했었다.용정은 그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모연정이 용정이보고 우빈이는 손님인데 왜 양보하지 않았냐고 핀잔했다.하지만 용정은 어떻게 양보해야 할지 몰랐다. 아직 자연스럽게 져주는 법을 모르
전태윤이 말하면서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예준성도 뒤를 따라 천천히 달렸다.“다행히 평소에 우리 두 집이 서로 가깝게 지냈고 또 앞으로 친척이 될 사이니 말이죠. 그렇지 않고야 제가 미안해서 어찌 이렇게 이른 아침에 찾아와서 폐를 끼치겠어요.”별장 구역은 아주 조용했다. 가끔 조깅하는 사람들이 한두 명씩 보였다.“용정이 모처럼 왔는데 한시 급히 친구와 놀려고 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용정의 무술 실력이 아주 많이 는 거 같아요. 아까 차에서 뛰어 내리는 동작과 달리는 속도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우리 우빈이는 아무리 용을 써도 용정을 못 따라잡아요.”“사람마다 다 장점과 약점이 있어요. 용정의 약점은 식탐이 많아요. 매번 집에만 돌아오면 준영이를 얼려서 먹고 싶은 음식을 다 해달라 해요. 번마다 배를 두드리면서 먹어요.”“연정 씨는 애가 하도 많이 먹길래 배에 탈이라도 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다행히도 매일 무술을 연습하느라 많은 열량을 뺐지요. 그렇지 않으면 진작 뚱보가 되었을 겁니다.”“애들은 다 그래요. 크면 저절로 다 낫는 법입니다. 우리 할머니가 그러시는데 저도 어린 시절에 먹길 엄청나게 좋아했대요. 하지만 커서 난 식탐 많은 사람으로 취급받은 적 없어요.”커서는 혼자 통제할 수 있으니 제멋대로 먹지 않았을 뿐이었다.예준성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제발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식탐 때문에 손해 볼 수도 있어요.”두 어른과 두 어린이는 반 시간 남짓이 달린 후 방향을 바꿔서 집으로 달렸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할 무렵에 하예정은 이미 일어나 마당에서 산책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빈이의 웃음소리를 듣고 대문 입구로 마중 나갔다.“이모!”두 꼬맹이가 먼저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하예정을 본 우빈이는 깡충거리면서 뛰어갔다.용정도 우빈이 뒤를 따라 뛰어갔다.“아주머니.”“용정아, 네가 어떻게 왔니?”하예정은 용정을 보고 반색하며 맞았다.비록 마당에 세워진 예준하의 차를 보긴 했지만
전태윤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이러니 두 사람이 친구로 될 수 있는 거네요. 두 사람이 같은 부류의 사람이니 말이죠. 저도 꼭두새벽에 우빈이의 문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나 함께 조깅하러 나가는 중입니다.”“같이 나가는 건 어때요? 같이 산책해요.”전태윤이 예준성 부자한테 함께 산책하러 가자고 제안했다.예준성이 웃으면서 대답했다.“그럽시다. 어차피 저도 이제 더 잘 수도 없는데요.” 예준성은 용정을 보면서 말했다.“우빈이 데리고 앞에서 놀아야 해. 너무 멀리 가면 안 돼. 알았지?”“우빈이더러 용정을 잘 데리고 놀라고 해야죠. 당신들은 멀리서 온 손님이니 응당히 우리가 주인답게 잘 대접해 드려야죠.”두 아이는 진작 손잡고 앞으로 뛰어 가버렸다.예준성은 두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용정은 낯 갈이도 잘 안 하고 처음 만난 사람과도 금방 친숙해져요. 기억력도 참 좋아요. 한 번 다녀갔던 길은 절대 안 잊어요. 길옆에 있는 화초까지 똑똑히 기억할 수 있어요. 걔는 식물 종류도 저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요.”“용정의 스승이 누군지 몰라서 그래요? 의술이 최고인 정 선생님이잖아요.”정겨울은 바빠서 직접 용정을 가르치는 시간이 많지 않지만, 용정이 신의와 함께 지내면서 많은 약재의 이름을 기억했다.용정의 기억력이 비상하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용정은 성격이 참 좋아요.”“그건 모르고 하는 얘깁니다. 성격이 좋을 땐 좋아도 녀석이 횡포한 면도 있어요. 금방 집에 데리고 왔을 때는 먹고 자고, 자고 먹고 말도 잘 안 하기에 똑똑하지 못한 먹보인가 했어요.”“정말 잘못 봤어요.”예준성이 겉으로는 양아들의 단점을 말하는 것 같지만 두 눈은 애틋한 눈빛으로 가득 찼다. 용정은 예준성을 약간 어려워하기에 여태 감히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고 아저씨라고만 불렀고 모연정을 엄마라고 불렀다. 하지만 자신이 모연정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모연정을 모 엄마라고 불렀다.전태윤이 웃으면서 말했다.“운이 좋은 줄 아세요.
“알았어요. 제가 지금 태윤 씨 집 앞에 있어요. 집사가 문 열려고 나오네요. 그러면 만나서 얘기해요.”말을 마친 예준성은 전화를 끊었다.전태윤은 멍하니 서 있었다.전태윤이 어리둥절하여 머리를 숙여 우빈이를 쳐다보니 마침 우빈이도 머리를 들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이모부, 왜 그래요? 무슨 일 생겼나요?”전태윤은 꼬맹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누군가 우빈이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또 아침 일찍 찾아왔단다.”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혹시 예준하와 성소현의 혼사에 문제가 생겨 예준성이 자신더러 로비스트 되어 달라고 부탁하러 온 건 아닐지 생각했다. 하예정은 그럴 재주가 있지만, 자신은 로비스트로 될 재주가 없다고 생각했다.이윽고 예준성이 동생이 평소에 타고 다니던 차를 운전해서 대문을 지나 마당에 세웠다.예준성이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뒷좌석의 차 문이 열리면서 작고 탄탄한 몸매를 가진 어린애가 차에서 날렵하게 뛰어내리더니 전태윤이 서 있는 곳으로 쏜살같이 뛰어왔다.“우빈아, 우빈아, 내가 왔어!”전태윤이 눈여겨보니 용정이었다.“용정!”용정을 알아본 우빈이는 잡고 있던 전태윤의 손을 뿌리치고 용정이 뛰어오는 방향을 향해 깡충깡충 뛰어갔다.두 꼬맹이는 만나자마자 반갑다는 듯 어른들처럼 상대방한테 커다란 포옹을 해주었다.여름방학 때 작별한 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두 아이의 키는 눈에 띄게 컸다.용정은 매일 많은 시간을 들여서 무술을 연마했기에 키가 우빈이보다 훨씬 더 컸으며 신체도 우빈이보다 퍽 탄탄해 보였다.방금 용정이가 차에서 뛰어 내리는 동작을 통하여 전태윤은 용정의 무술 실력이 또 늘었다는 것을 알았다. 현재 용정의 무술 솜씨는 우빈이 셋을 합쳐도 못 당할 것이었다. 이 아이는 무술 배우는 방면에서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용정아, 네가 어떻게 왔어?”친구를 만난 우빈이는 기뻐하면서 물었다.“나는 할아버지 따라서 모 엄마와 아저씨 보러 왔어. 사공이 유치원에 일주일 동안 휴가를 신청해
이날 저녁은 별일 없이 지나갔다.돌아오는 날은 일요일이었다.휴식날인데 우빈이는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우빈이는 일어난 후 곧장 하예정이 자는 방으로 달려가서 문을 두드렸다. 전태윤이 안에서 방문을 열어주었다.“이모부, 이모 일어났어요? 들어가서 이모랑 같이 놀래요.”전태윤은 숨을 깊게 들이쉰 후 꼬맹이와 화내지 말자고 스스로 가슴을 달래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우빈아,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좀 더 자지? 평소에 어린이집 가야 하는 날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더니 쉬는 날만 되면 아주 일찍 일어나더라.”우빈이가 입을 뾰족이 내밀면서 말했다.“이모부, 나는 한 번 깨어나면 더는 못 자요. 나랑 놀아 주는 사람이 없어 너무 심심해요. 이모 찾아와서 노는 수밖에 없어요.”현재 우빈이는 시 중심에 자리 잡은 전태윤의 개인 별장에서 지내고 있다. 서원 리조트에 있을 때는 그나마 함께 놀아 주는 어린이들이 있었기에 이모를 귀찮게 굴지 않았다.전태윤은 하는 수 없이 두 팔로 우빈이를 부쩍 들어 품에 안으면서 말했다.“이모는 아직도 자고 있어. 이모부가 우빈이랑 같이 놀아 줄게. 뭐 놀까?”“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집에서 장난감 가지고 놀면 좋지 않을까?”우빈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싫어요. 혼자 놀면 재미가 없어요. 이모부는 장난감도 안 놀 거잖아요.”전태윤은 웃으면서 말했다.“그래, 알았어. 이모부랑 같이 아침 조깅하러 나갈까? 이모부가 가서 운동복을 갈아입고 나올 테니 얌전하게 기다려야 해?”그는 우빈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서 내려놓으면서 목소리를 낮추어 신신당부했다.“침실에 들어가서 이모를 깨우면 안 돼. 알았지? 이모부가 얼른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우빈이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전태윤은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서 먼저 운동복 바지부터 바꿔 입고 우빈이가 그사이에 침실에 들어가서 하예정을 깨울까 봐 걱정되어 웃옷을 입으면서 밖으로 나왔다.우빈이가 조용하게 제 자리에 서서 기다리는 것을 보고야 전태윤은 안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