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영은 고개를 돌리더니 농담하면서 고현에게 말을 걸었다.“고현 씨, 저는 당신이 화내는 모습마저도 너무 재미있는걸요.”전호영이 공개적으로 고현에게 구애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고현의 반응은 전호영을 매우 흥미롭게 만들었다. 만약 고현이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면 전호영은 아마 포기했을지도 모른다.전호영은 재미없는 여자가 싫었다.다행히도 고현의 반응이 매우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전호영 씨!”뒤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왔다.전호영과 고현은 모두 멈춰 섰다.두 사람은 들려오는 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은 기세등등하게 들어와서 전호영의 앞에 서서 멈추었다. 그리고 고현을 잡고 있었던 전호영의 손을 손바닥으로 힘껏 내리쳤다.이윤정이었다.이윤정은 전호영이 과감하게 하루 호텔에 현수막을 내걸어 또 구애했다는 소식을 받자마자 바로 현장에 와서 확인하였다.그런데 그때 전호영이 파렴치하게 고현을 억지로 끌고 호텔에 들어가는 걸 보았다.그러나 이윤정의 남신이 전호영의 신분 때문에 감히 전호영에게 마구 대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 이윤정이 화를 참지 못했다.결국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며 자신의 남신을 구하기 시작했다.이윤정은 더 이상 이씨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고현에 대한 사랑을 더는 숨기지 않고 공개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전호영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고현에게 구애했는데 자신이 왜 안 되느냐는 생각일 것이다.이윤정은 무술을 배웠지만 너무 막강한 실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손바닥 힘은 보통 사람에게는 그래도 좀 아플 수도 있겠지만 무술 실력이 있는 전호영에게는 아무런 작용도 일으키지 못했다.하여 이윤정은 고현을 잡고 있었던 전호영의 손을 떼어내지 못했다. 뒤이어 전호영은 경호원까지 불렀다.“이 여자를 당장 쫓아내세요. 오늘 이후로 절대로 이 여자를 하루 호텔로 들여보내지 마세요!”경호원은 바로 와서 이윤정을 제압하려고 했다.이윤정은 경호원들을 피해 또 소리쳤다.“전호영 씨, 감히 저한테 이렇게 행동하셔도 되는
이 소문들은 강성 전체에 퍼지고 말았다.고현을 사모하는 여자들은 모두 이가 갈리도록 전호영을 매우 미워하고 있었다. 모두가 연합하여 전호영을 찾아가려고 했지만 전호영의 배후를 생각하더니 또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건드려서는 안 되는 상대였기 때문이다.전호영은 생글생글 웃는 고양이 같았지만 사실은 호랑이였다. 웃으면서 사람을 먹어버리고는 뼈도 뱉지 않을 타입이다.고현을 사모하는 여자들 모두 전호영에게 덤벼든다 해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호화로운 룸 안에는 십여 명이 앉을 수 있는 크고 둥근 탁자가 놓였지만 현재 전호영과 고현 두 사람만 앉아있었다.큰 테이블 위에도 진수성찬이 아닌 여섯 가지 반찬과 국물 한 그릇만 놓여있었다.그리고 고급술 두 병도 놓여졌다.고씨 가문의 경호원은 옆 룸에서 식사했다. 물론 전호영이 계산한다.약혼녀를 보호하는 사람인데 푸대접하면 안 되였다.“고현 씨, 이 요리들을 드셔보세요. 제가 당신을 위해 직접 만든 요리예요.”전호영은 고현에게 국 한 그릇을 떠주며 말했다.“누구를 위해 요리해 본지도 오랜만이네요.”고현은 썩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영광이네요.”전호영은 직접 만든 요리를 먹을 수 있어서 말이다.“그러니까요. 정말 당신의 영광이에요. 저의 아버지 어머니마저도 제가 만든 요리를 먹을 기회가 거의 없거든요.”“우리 할머니께서 드시고 싶어 하실 때에만 제가 직접 요리를 해드려요. 우리 아홉 형제 모두 요리할 줄 알아요. 다만 우리 할머니께서 강제적으로 시켰을 뿐이죠.”“우리 큰형의 요리 솜씨도 매우 훌륭해요. 과거 신분을 숨기고 우리 형수님의 관심을 끌려고 했을 때도 우리 큰형이 요리를 도맡아 하셨거든요.”고현은 전호영을 빤히 쳐다보았다.“저를 보지 마세요. 저는 여전히 잘생겼어요.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 마음속으로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요.”전호영은 고현이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고현도 자신이 여자라는
“당신이 방금 이윤정에게 한 행동은 결국 이윤정 씨와 이윤미 씨의 갈등만 커지게 할 뿐이에요.”고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이씨 가문은 지금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사실 가문 내부에서는 이미 평온하지 못할걸요. 당신이 두 사람 사이에 불덩이를 던진 거나 다름없어요.”전호영은 뻔뻔하게 고현에게 구애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교양있는 사람으로서 함부로 사람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아니었다.연회 때 전호영이 연적들과 말싸움을 벌였을 때마저도 욕 한 번 한적 없는 모습을 보고 연적들은 전호영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을 뿐 화를 내지 못했다.하지만 이윤정과 마주친 전호영은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전호영은 살며시 웃으면서 대답했다.“제가 두 사람 사이에 불을 붙이지 않아도 그들도 평온하게 지내지는 못할 거예요. 그날 연회 때 저도 눈치챘어요. 이윤미는 이씨 가문의 사람들에 의해 고립되었다는 것을요. 그들은 모두 이윤정 편에 서 있었죠.”“이 가주는 이윤미라는 친딸을 아끼시지 않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이윤미에게 주어야 할 권력은 다 주셨거든요. 이젠 이윤미가 그 권력들을 잘 잡느냐에 달린 거죠.”“이 가주도 감정상 이윤정을 더 많이 예뻐하겠죠. 자식이 뒤바뀐 줄도 모른 채 친딸처럼 곁에 두고 키워왔으니.”“하지만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한 거죠. 이 가주는 친딸 편에 서 있거든요. 이씨 가문의 가주 자리를 절대로 외부인에게 줄 리가 없거든요.”“이 가주의 아들 며느리들도 곁에서 부추기고 있어요. 가짜 딸과 친딸이 서로 싸워서 둘 다 낭패를 보아 그 가운데서 이익을 챙길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요.”전호영은 하예정이 이경혜에게 다가가 사실을 확인받았다는 것을 전태윤에게서 전해 들었다. 이경혜가 여동생을 데리고 보육원으로 갔을 때는 겨우8세였다.친정 가족에 대한 모든 일을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인 일들은 기억하고 있었다.예를 들어, 이경혜 자매의 어머니는 매우 바빴고 이경혜는 어렸을 때부터 아가씨라고 불리웠고 이모 두 분 계셨다.그러던
“고현 씨, 저는 당신의 이런 모습이 좋아요.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모습이 좋아요.”전호영은 고현을 감상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고현은 여전히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진 데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지면 원인을 찾고 수정하면 바로 이길 수 있죠. 하지만 저는 이기고 지는 것에 개의치 않아요. 사업상의 경쟁으로 원수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요.”이 업계에서 영원한 원수는 없었다.그렇다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고현은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혹시 관성의 이경혜 씨가 전임 이씨 가문의 가주 딸임을 확인한 거예요?”“확인은 안 됐지만 십중팔구 사실일 거예요. 이씨 가문의 장녀가 대단한 거로 봐서 이경혜도 이에 부합되거든요. 듣는 바에 의하면 이경혜 씨는 퇴직하기 전에 관성 업계에서 위세를 떨쳤다고 해요.”“저의 할머니께서도 젊었을 때 이경혜 씨를 며느리로 삼으려다 성씨 가문이 먼저 손 쓰는 바람에 삼지 못했거든요. 당시 이경혜 씨는 성씨 그룹에서 일했으니까요.”고현은 국물 한 그릇을 더 뜨면서 나지막이 물었다.“이경혜 자매는 신체가 어떠세요?”“이경혜 씨는 신체가 매우 튼튼해요. 하지만 그녀의 여동생이자 우리 형수 어머니께서는 16년 전에 이미 돌아가셨어요. 당시 우리 형수는 겨우 10살이었거든요.”고현은 음식을 입에 넣으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전임 이씨 가문의 가주도 참 불쌍하세요. 그렇게 여동생을 아끼고 믿었는데 그 여동생에게 살해당하셨잖아요. 두 자식도 지금 겨우 한 명만 살아계시고요.”“우리 형수님 어머님이야말로 고달픈 분이시죠.”전호영은 또 큰형 장모님의 사연을 고현에게 알려주었다.고현이 말을 이었다.“당신 형수님 사랑 이야기는 제가 이미 알고 있어요. 당신 큰형 결혼 소식을 공개한 후로 큰 파문을 일으켰잖아요. 관성뿐만 아니라 관성의 몇몇 이웃 도시의 업계에서도 덩달아 파문을 일으켰으니까요.”“딸을 둔 수많은 명문가도 당신 큰형을 주시하면서 혼인을 맺고 싶어 했지만 결국 이름 없는 여자를 조용히
전호영은 주형인이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아직 모른다.그는 찌질남의 생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주씨 가문 모든 사람들이 후회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찌질남의 엄마와 큰누나는 여전히 그 찌질남이 하예진 씨와 재혼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하예진 씨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요. 겨우 지옥에서 벗어났는데 다시 제 발로 들어갈 리가 없잖아요. 그들은 하예진 씨가 이혼한 후에 더 잘살고 있는 걸 보고 후회하는 거예요.”“그 첩은 찌질남과 결혼했지만 아이를 하나도 낳지 못했어요. 게다가 임신했었는데 나중에 혼자 넘어져서 유산했어요. 이건 다 업보예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죄를 지었으니 그만한 대가를 받는 거죠.”“원래는 이 말을 안 믿었었는데, 지금 주씨 가문의 꼴을 보니까 믿을 수 있겠네요.”주형인 일가의 상황은 전호영이 직접 목격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죄의 대가를 받은 사례 중 하나였다.이를 들은 고현은 속이 후련해서 말했다.“이혼 잘했어요. 나도 하예진 언니가 아이를 위해 참을까 봐 걱정했어요.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아이에게 온전한 가정을 주기 위해서 참는 아내들이 많잖아요. 그런 결과는 못 보겠어요.”“바람피우는 남자는 이미 아내한테 싫증이 났다는 걸 의미하거든요. 심지어 감정도 없어진 거예요. 울고불고해봤자 남자는 더 싫증이 날 거예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자유를 주는 게 나아요. 하지만 이혼할 때는 반드시 본인의 법적인 권리를 쟁취해야 해요. 찌질남과 허튼계집에게 유리하게 해서는 안 돼요.”“하예진 씨의 아들은 누가 보살펴요?”“우빈의 양육권은 하예진 씨가 가졌어요. 솔직히 말해서 하예진 씨가 이혼할 때 우리 오빠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소송을 해야 했을지도 몰라요. 게다가 재산을 가져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일이에요. 그 찌질남은 하예진 씨 몰래 아버지 명의로 많은 돈을 저축했거든요.”고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렇긴 하죠. 남녀평등을 외친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여성은 여전히 사회에서 많은
전호영은 바로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고현 씨, 안목 좋네요. 우리 전씨 집안 남자들은 다 훌륭해요. 절대 찌질남이 아니에요. 우리를 다 마음에 들어 하는 건 고맙지만 나를 특별히 더 마음에 들어 하면 좋을 텐데요.”고현은 그를 바라보며 갑자기 물었다.“전호영 씨, 혹시 할머님께서 선택하신 아내 후보, 혹시 나에요?”이건 고현이 계속 묻고 싶었던 질문이다.진씨 가문 사람들의 반응이 다 같은 원인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또한 전호영이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바로 알았다는 사실도 매우 이상했다.아무리 전호영의 관찰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고현을 보자마자 여자인 줄 알았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함께한 시간이 길지 않은 데다, 아무리 똑똑해도 전호영이 매의 눈을 가진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고현은 여장남자로 20년 동안 들키지 않고 잘 살아왔다. 그런데 전호영이 어떻게 그녀와 몇 번 만난 것만으로 여자인 것을 알 수 있겠는가?만약 전씨 할머니께서 알아차린 것이라면 가능성은 있었다. 할머니는 젊었을 때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고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일류였다. 지금도 관성 소씨 가문은 종종 할머니께 중요한 조언을 구한다.그렇다면 할머니께서는 언제부터 그녀를 주목하게 되었을까?또 어떻게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전호영은 그녀에게 반찬을 짚어주면서 반문했다.“왜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고현 씨를 좋아해서 다가가 구애하는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집안 어르신들이 아무리 오픈 마인드라도 호영 씨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텐데, 호영 씨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강성시와 관성시 두 도시에서 소문이 났지만, 집안 어르신들이 막지도 않고 방임했잖아요.”“이건 비정상적이에요. 저도 호영 씨 할머니께 연락 드렸는데, 할머니께서는 호영 씨가 말해주지 않았냐고 되물으셨어요. 며칠 동안 그 말의 속뜻을 생각해 봤어요. 그리고 결론을 얻었죠. 할머님께서 선택하신 아내 후보가 나라는 걸요. 맞죠?”전
그녀는 일어나서 웃음을 거두고 다시 엄숙한 태도로 냉정하게 전호영을 향해 경고했다.“내 비밀이 새어나간다면 당신과 끝장을 볼 거예요.”전호영은 그녀의 경고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내가 어떻게 고현 씨 비밀을 노출하겠어요? 다른 사람들이 고현 씨가 여자라는 걸 알면 모두 고현 씨를 좋아할 텐데, 내가 왜 스스로 연적을 만들겠어요?”“지금도 내 경쟁자가 가득한데. 더 이상 경쟁자가 생기길 원하지 않아요. 난 너무 불쌍한 남자인 것 같아요. 여자 경쟁자가 잔뜩 있다니!”고현이 냉정하게 말했다.“자업자득이죠.”그녀는 의자를 밀고 일어나서 돌아섰다.고현이 전호영에게 구애하라고 명령한 것도 아니고.전호영도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대신 큰 소리로 말했다.“저녁에 집에 와서 생선구이 먹는 거 잊지 말아요, 미래의 처남도 데리고 와요.”“... 누가 처남이에요? 전호영 씨, 부탁인데 좀 선을 지켜줄래요?”“고현 씨는 당연히 내 처남이 아니죠. 남들 앞에서는 선을 지킬 테지만, 고현 씨 앞에서는 그럴 필요 없잖아요?”고현은 표정이 어두워져서 방을 나갔다.그녀의 경호팀은 이미 배불리 먹고 마신 후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녀가 나오자 경호팀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도련님”“가자!”고현은 침착하게 걸음을 내디뎠다.경호팀의 호칭에 고현은 현실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지금 그녀는 여전히 남장을 한 고씨 가문 도련님이었다. 오직 전호영과 단둘이 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여자임을 느낄 수 있었다....이씨 그룹.이윤정은 이 대표의 맞은편에 앉아 눈이 퉁퉁 부어오른 채로 계속 울고 있었다.“엄마는 전호영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지만, 이번에는 전호영이 나를 먼저 괴롭혔어요. 전호영이 날 하루 호텔에서 쫓아냈다고요! 엄마, 저 대신 복수 좀 해줘요.”이 대표도 이미 상황을 알고 있었다.점심에 일어난 일은 이미 강성에 퍼졌고 강성 연예 뉴스의 헤드라인에 올랐다.“고씨 가문 도련님이 널 좋아하지 않으니, 다시는 고씨 가문 도련님 앞에 얼
이 대표는 눈에 차가운 기운이 스쳤다.그냥 스쳐 지나가면서 말한 것인데, 그걸 믿다니.이윤미는 어쨌든 그녀의 친딸이다.이윤정은 비록 죄가 없지만 그 아버지의 죄를 갚아야 하니...이 대표는 차가운 기운을 거두고 온화한 목소리로 이윤정을 위로했다.“알겠어, 울지 마. 하지만 저 사람은 전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이야. 그가 네 체면을 봐주지 않는 것은 아주 정상적인 일 아니니?”“울지 마, 더 울면 화장이 지워지겠어. 이따가 휴게실에 가서 화장을 고쳐.”이 대표는 한숨을 쉬며 다시 말했다.“윤정아, 우리 이씨 가문은 강성에서도 물론 명문 가문이지만 최고 재벌 가문은 아니야. 우리가 우러러봐야 하는 고씨 가문은 또 관성의 전씨 가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전씨 가문 같은 최고 상류층의 재벌 가문은 많지 않아.”“그래서 전호영을 건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네가 엄마 말을 무시하고 굳이 전호영을 건드렸구나. 다른 사람이었다면 내가 너 대신 화를 풀어줄 수 있겠지만, 전호영이라면 엄마도 그 사람에게 예를 갖춰야 해. 어떻게 너 대신 화를 풀어주겠니? 더구나 이번 일은 네가 먼저 손을 댄 거잖아. 네가 전호영을 때리지 않았다면 그가 사람을 시켜 너를 내쫓았겠니?”이윤정은 입을 내밀며 말했다.“저는 단지 그가 고현 씨를 강제로 호텔로 데려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어요.”“고현 씨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는데 네가 왜 나선 거니? 고현 씨가 진정으로 전호영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 거야. 왜 고현 씨가 전호영에게 관심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니?”이윤정은 흥분된 표정으로 말했다.“엄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고현 씨는 남자예요. 그가 어떻게 전호영에게 관심이 있을 수 있겠어요? 분명 전호영이 너무 뻔뻔해서 그래요. 그는 동성애자라서 누가 마음에 들면 쫓아다니고 얽히며 자기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고려하지 않아요.”“고현 씨는 그를 매우 싫어해요. 우리 강성의 아가씨들도 전호영을 매우 싫어해요. 전씨 가문에서 어떻게 그
“우리 가게에는 유아용 교재가 없어서요. 다른 문구 방에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하예정의 서점은 중학교 앞에 위치해 주 고객층이 중학생이었고 유치원용 책은 들여놓지 않았다.“아, 그렇군요. 그럼 잠시 후 다른 문구 방에 가봐야겠어요.”젊은 여자는 책값을 지불하고 책을 들고 나가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가게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하예정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아마도 전태윤과 함께 행사에 참석했을 때 스치듯 본 적이 있을지 몰랐지만 깊이 알지는 못해 기억나지 않는 것이라 여겼다.‘잠시 후 태윤 씨한테 물어봐야겠다. 어떤 가문일까? 장남은 결혼했고 작은아들은 중학생이고 막내딸은 유치원이라니...’젊은 여자는 스물한두 살쯤으로 보였고 남편도 젊을 가능성이 컸다. 하예정은 임신 전 상류층 모임에 자주 참석했지만 어느 집안 자제가 그렇게 일찍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그녀가 아는 젊은 여자들은 대체로 그보다 나이가 많았기에 방금 본 여자가 속한 가문은 아직 명문으로 자리 잡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여자의 차는 근처에 주차된 흰색 BMW7 시리즈였다. 차 앞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가 가까이 다가가자 두 남자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표했다. 그녀의 경호원과 운전기사인 듯했다.“출발하죠.”여자는 차에 올라 운전사에게 지시했다. 차가 멀리 떠난 후, 그녀는 가게 쪽을 돌아보았다. 하예정이 더 이상 자신을 보지 못할 거리라고 판단한 순간, 여자는 얼굴을 만지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젊은 여자는 바로 여씨 가문의 둘째 딸, 여운별이었다. 그녀는 현재 용태호의 스폰녀로 지내고 있었지만 사교계에서는 용씨 가문 사모님을 사칭하며 활동 중이었다. 이는 용태호가 모든 의심을 피하기 위해 마련한 조치였다.여운별은 용태호가 준 인피가면 덕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녀의 임무는 하예정에게 접근해 친구가 된 후 용정이라는
“저도 마음이 놓이네요. 엄마, 윤하가 아직 소 대표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은 거 맞죠? 제가 대신 받아주고 싶네요. 소씨네 식구들 성격이 다들 시원시원해서 우리 윤하한테 잘 맞는 거 같아요. 윤하도 덜렁덜렁 거리는게 저 집안과 바이브가 맞아요.”윤하 어머니는 혁진에게 말했다. “네 동생 일생의 큰 일이야. 우리가 잘 체크해주고 나머지는 윤하한테 맡겨야지. 지훈한테 시집가는 사람도 윤하도 한평생 같이 살 사람도 윤하 자신이니까 걔가 좋아야 되지. 그리고 윤하 다음은 너랑 혁주야. 너희 둘도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엄마, 저 쌀 씻으러 갈게요.” 윤하 어머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결혼 잔소리를 했고 혁진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런 혁진을 보고 어머니는 몇 마디 나무랐다.연성의 겨울은 눈 내린 광경을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관성은 아직도 최고 기온이 25도나 되는 여름이어서 길거리에는 반팔티를 입고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하예정은 서점에서 남편이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 두 사람은 관성 호텔에 가서 점심을 먹을 계획이었다.그녀는 이제 더 이상 공예품을 만들지 않았다. 온라인 쇼핑몰도 전에 그녀를 도왔던 아기엄마한테 양도했다.지금은 서점에서 일하고 있고 학생들이 수업이 끝나면 조금 바빠질 뿐, 다른 시간에는 아주 한가해서 옆 가게 탐방도 자주 하곤 했다. 비록 경호원들이 뒤따르지는 않지만 행여나 무슨 일이 생길까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심효진은 소설을 좋아해서 그녀가 서점을 지키고 있을 때는 하루 종일 앉아 소설을 읽곤 했다.하예정은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고전 작품 한 권을 골라 읽었지만 자꾸만 하품이 나와 결국 읽기를 포기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를 지나 책장 앞에 다가가 먼지털이로 책우의 먼지를 털기 시작했다. 사실 먼지가 별로 없었지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할 일을 찾아야 했다.그때, 밖으로부터 또깍또깍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처음 보는 젊은 부인이 서점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에르메스 백을 들고 있었고
혁진은 거실에서 지훈이 부모님이랑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지훈이 아버지는 성격이 아주 호탕한 분이셨다. 혁진이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두 사람은 말이 잘 통했다.지훈이 마침 아침밥을 들고나오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을 기세였다.지훈이 어머니는 그런 남편을 몇 번이나 눈치를 주었다.이 양반이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까먹은 거 아니야?여기는 윤하네 집, 예비 사돈댁이라고. 혁진은 예비 며느리 친오빠고, 두 사람이 형제를 맺으면 나중에 아들더러 어떻게 처신하라는 거야. 아주 그냥 엉망진창이네.“아버지, 어머니, 윤하 씨 어머님께서 아침을 준비해 주셨어요. 따뜻할 때 드세요. 저희는 이미 먹었어요.”지훈은 부모님을 주방으로 불렀다. “점심은 여기서 먹어요. 조금 있다가 윤하 씨랑 제가 장 봐 올게요.”지훈이 어머님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좋아, 나도 나가서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싶어. 지훈이 아버지, 당신도 같이 가요. 짐도 들어줄 겸.”남편의 의견을 물어보는 듯했지만 사실상 답정너였다. 집에 두고 갔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장 보고 돌아올 땐 이미 혁진이랑 형제를 맺었을지도 모른다.“그래요.”지훈이 아버지는 흔쾌히 대답했다.윤하 어머니는 주방에서 나오며 민망한 듯 말했다. “두 분께서 오시는 줄을 몰라서 제대로 준비 못 했어요. 점심에는 뭘 드시고 싶으세요? 말만 하세요, 제가 다 할 수 있어요. 가족이라 생각하고 편히 말씀하세요. 내외할 것 없어요.”지훈이 어머니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 저희 안 그래요. 이제는 가족이나 마찬가진데요. 저희는 뭐든 잘 먹어요. 아무거나 다 돼요.”“사돈, 윤하는 정말 훌륭한 아가씨예요. 저희 지훈이랑은 비교가 안 돼요. 지훈이 때문에 저희 두 사람 속 많이 태웠어요.”지훈이 어머니는 실수도 사돈이라고 불렀지만 윤하 어머니는 개의치 않았다. “과찬이세요. 저희 윤하도 속 썩일 때가 많았어요. 지훈이야말로 성숙하고 성격도 온화하고 너그럽고 유망한 청년이죠. 저희 윤하보다 훨씬 나은 걸
원래부터 지훈을 마음에 들어 하던 윤하 어머니는 지훈의 특별한 사정을 알고 나서 더욱 자신의 사윗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윤하와 결혼을 하게 되면 지훈은 그녀를 더욱 소중히 아낄 것이 분명했기에 윤하 어머니는 딸이 멀리 관성에 시집가서 마음고생할 거라는 걱정이 사라졌다.윤하와 어머니는 주방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지훈이 부모님을 대접할 아침을 준비했다.지훈도 주방으로 들어와 일손을 도왔다.“지훈 씨, 안 도와줘도 돼요. 가서 부모님이랑 얘기 나눠요.”윤하는 지훈을 밀어냈다.“부모님이 저더러 도와주라고 해서 들어왔는데 저를 또 저쪽으로 보내시면 어떻해요? 누구 장단에 맞춰야 해요? 아차! 아버님이랑 큰형님이 안 보이시는데 아직 주무시나요? 아니면 도장에 일찍 나가셨어요?”지훈은 그 두 사람이 보이지 않자 물어보았다. 아까는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두 사람 볼일이 있어서 아침 일찍 공항에 갔어. 이쯤 되면 아마 비행기에 올랐을 거야.”윤하 어머니가 대답했다.지훈은 별생각 없었다. 고백도 했고 부모님도 인사하러 오셨고 지금은 그저 윤하의 답변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사실 지훈도 내심 많이 긴장됐다.그도 윤하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옷도 사주고 고백 후에 도망치지도 않았기에 희망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윤하가 명확히 대답하기 전까지는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거절할 수도 있기에 두려웠다.윤하가 설령 거절한다고 해도 지훈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할 것이다.질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가 선택한 사람이라면 평생 그 한 사람한테만 마음을 줄 그런 사람이었다. “어머님, 준비 많이 하시지 마세요. 두 분 간단히 요기하면 돼요. 제가 이따가 두 분 호텔로 모셔다드릴 거예요. 거기서 식사하시면 돼요.”“귀한 손님들이 멀리서 오셨는데 점심은 내가 대접해야지. 외식할까 아니면 집에서 먹을까?”윤하 어머니는 물었다.“집에서 먹으면 윤하랑 혁진이는 오늘 도장 나가지 말고 장 좀 봐줘
윤하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윤하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 불감증?”“지훈 씨가 질병이 있는데 불감증이래요. 근데 나한테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이건 치료가 잘되지 않는 병이고요. 운명인가 보죠 뭐.”“오래 살고 볼 일이네. 이런 병은 또 처음 들어봤어. 그럼 네가 지훈이 한테 시집가면 걔가 변심할 걱정도 없고 바람피울 걱정도 없는 거잖아.”윤하는 대답했다. “뭐 그런 셈이죠. 지훈 씨가 그러는데 다른 여자들이랑 있을 때에는 진짜 아무 반응이 없대요. 부모님이 사정을 알고 나서 계속 선을 보게 했는데 지훈 씨가 안 나갔어요. 또 부모님이 젊은 여자들 사진도 많이 보여줬대요. 혹시나 병이 좀 나아질지 해서요. 그런데 아무 효과가 없는 거죠.”윤하는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을 모두 엄마에게 털어놨다.“지훈 씨 부모님이 마음이 급하셔서 지훈 씨가 어떤 여성분에게 눈길을 한 번 더 줬다 하면 혹시나 그 분한테 반응이 있는 걸까 하고 생각할 정도라고 하더라고요.”윤하 어머니는 들을수록 의아했다. “그럼 걔는 어떻게 너한테만은 다르다고 확신하는 거야? 너희 둘이 무슨 일 있었어?”윤하 어머니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윤하야, 지훈이가 너한테 진심이든 아니든 결혼하기 전까지는 순결을 지켜야 해. 여자는 자신을 아껴야지. 내가 책이랑 동영상에서 많이 봤는데 어떤 여자애들이 결혼하기 전에 임신하는 바람에 시댁에서 업신여겨 예물을 적게 주거나 아예 안 주는 집안도 있대. 이런 집에 시집가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을 거야.”“엄마가 옛날 사람이라서 요즘 젊은이의 사상을 못 따라는 게 아니라 딸 가진 엄마로서 내 딸이 시댁에서 업신여김을 당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야. 그러니 절대 결혼 전에 사고 치지 마. 약혼했다고 해도 안돼. 혼인 신고를 해야 법적으로 부부가 되는 거야. 그때가 되면 결혼식을 올리든 안 올리든 엄마도 관여하지 않을 거야.”윤하 어머니는 윤하가 충동적인 행동을 할까 봐 걱정했다. 윤하는 나이도 어리고 연애 경험이 적은 것에 비해 지훈은 비록 여자
지훈은 그저 그들에게 손주를 안겨주는 도구로 몰락할지도 모른다.“고구마가 이렇게나 많아요? 그럼 군고구마 만들어 먹어요. 밖에서 사면 한 개에 삼천 원 정도 하잖아요, 너무 비싸요.”윤하는 역시나 고구마를 보고 기뻐했다.윤하는 차 문이 열려있는 쪽으로 걸어가서 안을 들여다보고는 혀를 내둘렀다.”이게 전부 다 고구마예요?”고구마인지 곤약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도 물건들을 나르기 시작했다.곧 혁진이 도와주러 나왔다.그렇게 세 젊은이는 몇 번을 왕복해서 겨우 차 안에 가득했던 농산품들을 거실로 옮겨갔다. 값비싼 삼과 제비집도 그중 어느 안에 들어있었다.지훈은 부모님이 정말로 농산품만 갖고 온 줄 알았다.소씨 집안에서 가지고 온 선물들을 윤하 어머니께서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번 방문에서 아주 중요한 포인트었다.지훈이 부모님이 방문한 탓에 윤하와 혁진은 도장으로 가지 않고 집에서 접대를 도왔다. 소씨 가주 내외가 아침을 못 드신 걸 알고 윤하 어머니는 윤하와 함께 주방으로 들어가 아침 준비를 했다.윤하는 그 틈을 타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아버지랑 큰오빠는 이렇게 일찍 도장으로 나갔어요? 두 사람한테 전화했었는데 둘 다 안 받던데요.”윤하 어머니는 밖을 한번 힐끗 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아버지랑 혁주가 관성에 갔어. 지훈이 집안에 대해 좀 알아보려고. 근데 지훈이 부모님이 여기로 오실 줄 누가 알았겠니?”“저 아직도 고민 중인데 둘이서 벌써 관성에 갔다고요?”“그러니까 네가 고민이 끝나기 전에 미리 알아보는거지. 네가 시집살이 안 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시름 놓고 너희 둘을 미뤄줄 거 아니야.”윤하 어머니는 계속해서 말했다. “지훈이 부모님을 보니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 두 분이 너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소씨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처음 집에 인사 온다고 농산품들을 가지고 온 것 봐. 다 우리를 생각해서 그런 거잖아. 우리한테 맞춰주려고 한다는 것은 그만큼 너를 중요시한다는 거야. 그
사실 지훈도 부모님 몰래 일을 꾸몄으나 두 분이 보통 눈치가 빠른 사람이 아니라서 지훈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다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을 했다.집 문 앞에서 지켜보던 윤하 어머니는 딸과 함께 들어오는 두 사람의 얼굴이 지훈이랑 아주 비슷한 걸 보고 누군지 바로 알아챘다.그러고는 얼른 문을 활짝 열었다.지훈 어머니는 윤하 어머니를 보자마자 하마터면 사돈이라고 부를뻔했지만 너무 이른 감이 있어 당황하실까 봐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되려 삼켰다.윤하 어머니는 지훈의 부모님이 오실 줄은 생각 못 했다.아들과 남편이 방금전에 관성으로 출발했는데 두 분이 집에 찾아오시니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관성에서 두 사람에 대해 알아볼 때 마주치거나 들킬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정씨 집안 식구들은 지훈이 마음에 들었다. 지훈이 집안 사람들까지 인품이 좋으신 분이라면 멀기는 멀어도 윤하를 소씨 집안으로 시집 보낼 의향이 있었다.다만 걸리는 점이 있다면 바로 지훈의 질병이었다. 어젯밤, 두 형제는 지훈에게 이게 관해 물어보지 않았고 윤하도 가족들한테 말하지 않았다. 그저 윤하가 지훈을 대하는 태도에서 아마 큰 문제는 아닐 것이라고 윤하 어머니는 짐작했다.전에 질병이 있었다가 이제는 다 완치됐을 가능성도 있었다.두 집안 어르신이 만나고 나서 윤하 어머니는 지훈의 부모님 두 분 다 성격이 좋으시고 친근하신 걸 느꼈다.사돈 될 분들한테 부담이 될까 봐 일부러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왔다. 행여나 너무 부유해 보여 정씨 집안에서 윤하를 시집 안 보내겠다고 하면 아들이 손해 보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지훈의 부모님은 정씨 집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고 두 가문이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다.엄밀히 말하면 오히려 정씨 집안이 손해 보는 셈이었다. 지훈은 이제 중년이 다 된 아저씨이고 윤하는 아직 꽃다운 어린 아가씨이기 때문이다.지훈의 부모님은 소씨 집안 가주라는 기세 없이 자세를 낮추어 얘기했다.윤하 어머니와 혁진은 두 분을 대접하고 있고 윤하는 지훈을 도와 짐 나르러 갔
지훈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윤하 씨는 언제든지 예뻐요. 긴장하지 말아요, 저희 부모님 그렇게 어려운 분들 아니세요.”“긴장 안 했거든요. 처음 뵈는 자리니까 잘 꾸미지 않더라도 예의는 갖춰야 하니까요. 제가 문 열게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하는 지훈보다 먼저 뛰어가 문을 열었다.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문 앞에 서 있었다.윤하가 문을 열자 차에 앉아 계시던 분이 창문을 내리고 바로 차에서 내렸다.중년 여성분이셨는데 지훈과 많이 닮아서 누가 봐도 소지훈 어머니인 것을 알 수가 있었다.윤하는 내심 지훈의 어머니의 미모에 감탄하고 있었다. 관리를 아주 잘하셔서 겉보기에는 어머니가 아니라 누나같이 보일 정도였다.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으면 전혀 모자같이 보이지 않았다.지훈 어머니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걸어오며 물었다. “아가씨가 윤하 씨구나. 사진 본 적이 있어요. 나는 소지훈 엄마 되는 사람이에요.”“어머님, 안녕하세요.”윤하는 예의를 갖춰 인사를 했다. 지훈도 윤하를 따라 인사 한마디 건넸다.지훈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윤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번 훑어보고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예쁘고 아들이랑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지훈 어머니는 첫눈에 바로 윤하가 마음에 들었다.자기 아들을 구해준 유일한 여자애라고 생각해서 사진을 볼 때부터 이미 마음에 들었고 흡족해하셨다.지훈이 아버지도 차에서 내렸다.“윤하 씨, 안녕하세요, 저는 지훈이 애비되는 사람입니다.”지훈이 아버지는 평소에는 근엄하고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로 말하시지만 그 순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윤하는 아버님께도 인사를 건네고 두 분을 집안으로 모셨다. “아버님, 어머님, 빨리 집 안으로 들어가요, 밖이 추워요.”“좋아요.”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지훈의 아버지는 차 키를 아들에게 던져주고는 말했다.” 차 안에 있는 물건들 집으로 옮겨와.”“두 분 편히 오시면 돼요, 뭘 들고 오시지 마
지훈의 아버지는 시계를 보시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일찍 오긴 한 것 같아. 여름이면 이쯤 되면 꽤 많은 사람들이 일어났을 텐데. 차에서 조금 기다리다가 노크하러 갈까?”지훈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먼저 아들한테 전화를 걸어 일어나라고 해야겠어요.”그는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윤하와 입술이 닿는 그 순간, 고막을 찌르는 전화벨 소리가 울려 지훈은 단꿈에서 깨어났다. 지훈은 키스의 여운에 입술을 문지르다 정신이 번쩍 들어 그제야 자신이 꿈꾸었음을 알았다. 윤하는 지훈의 고백을 외면하지 않았지만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침 일찍부터 눈치 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달콤한 꿈이 산산조각 나자 지훈은 순간 화가 났다.핸드폰을 집어 든 지훈은 발신인을 확인하지 않고 쌀쌀한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 왜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전화를 거세요? 큰 일이 아니라면……”“아니면 어쩔 건데? 내가 누구냐고? 네 엄마야, 나 지금 윤하네 집 앞이야. 빨리 나와 문 열어. 아니면 내가 들어가서 혼쭐을 내줄 거니까.”지훈도 한 성깔 하는데 지훈의 어머니는 그보다도 한 수 위였다. 말 몇 마디로 바로 지훈을 수그러들게 했다.지훈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놀라서 물었다. “뭐라고요? 지금 집 앞이라고요? 아버지도 같이 있어요?”두 분이 오신다고는 했지만 진짜로 오실 줄 몰랐고 또 이렇게 일찍 올지도 몰랐다.“아버지도 옆에 계셔. 대문이 아직 안 열려있는 것을 보아하니 다들 아직 일어나지 않았나 보지? 아들, 우리가 너무 일찍 온 거 아니야?”지훈은 침대에서 굴러 내려오며 대답했다. “당연한 말씀을, 이 추운 날씨에 이렇게 일찍 오신 거예요? 아버지가 오신다고 하시더니 진짜로 오실 줄은 몰랐어요. 아직 이르다고 말했잖아요, 윤하 씨가 엄마아빠를 만나면 부담스러워할 거예요. 잠깐만 기다려봐요, 제가 내려가서 문 열어줄게요.”입으로는 툴툴거렸지만 정작 부모님들이 밖에서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지훈은 엄마에게 당부 몇 마디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