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인데, 당신 어머니 아버지 뵙고 나면 나는 친정 좀 다녀올게요. 대나무 두어 개 베어 오려고요.”“됐어, 내일 내가 사람 불러서 설치할게.”태윤은 담담히 말했다.전씨 가문 손자며느리가 당당하게 그 먼 시골까지 가서 대나무를 베어 오려 하다니. 고작 빨래를 널기 위해 그녀가 생각해낸 방법이다.“그래요. 그럼 부탁할게요.”“아냐, 내 집 일인데 뭐.”예정은 짧게 대답한 후 자신의 옷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연 후 고개를 돌려 태윤에게 말했다.“당신이 괜찮다면, 씻고 나서 벗은 옷을 나에게 줘요. 내 옷 빨 때 같이 빨아줄게요.”“고맙지만 괜찮아. 내일 세탁기 두 대가 도착할 거야. 방 욕실에 하나씩 세탁기를 설치하려고. 그래야 편하지.”“그것도 좋네요. 당신이 산 세탁기도 얼만지 알려줘요. 내가 반 낼게요.”태윤은 예정에게 이미 체크카드 한 장을 주었다. 생활비로 쓰라고 준 건데, 태윤이 또 세탁기를 사겠다고 하니, 당연히 그에게 모든 돈을 내라고 할 수는 없었다.태윤은 담담히 말했다. “세탁기 두 대 얼마 하지도 않아. 겨우 이백 얼마야. 내가 감당할 수 있어. 더구나 우리 집을 위해서 사는 가구잖아.”태윤은 예정이 자신이 너무 대충 대충 살았다고 생각할까 봐 한마디 더 추가했다. “평소에 난 너무 바쁘잖아. 새벽에 나가서 밤에 들어오니까. 옷도 전부 세탁소로 보냈었어. 그래서 세탁기를 안 산 거야.”사실 그가 대충대충 산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고, 생활하는데 어떤 물건이 필요한지 잘 몰랐을 뿐이다. 지난 30년 동안 그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풍요롭게 살았다. 그래도 간단한 일들은 다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빨래를 손수 하는 일은 그가 정말로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네, 이해해요.”예정도 이런 고위급 회사원들이 너무 바빠서 그럭저럭 참고 살 거나, 하루 종일 집안일 같은 사소한 일들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태윤씨, 일찍 주무세요.”예정은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
“나가자.”태윤은 나가면서 무덤덤히 말했다.예정은 짧게 대답 후 그를 따라나섰다.부부가 같이 걷는데 말 한마디 없다니. 예정은 원래 화젯거리를 찾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태윤의 엄숙한 굳어있는 표정,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에 그만 말하고 싶은 흥미도 사라져버렸다.이런 사람은 학교 선생님을 하면 딱이다. 한 반 학생들쯤이야 거뜬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잠시 후 시장에 도착했다. 예정은 주차장 빈자리를 알려주었다. 차에서 내린 후 예정은 말했다. “아침 먹으러 가죠?”태윤은 말없이 조용히 예정을 따라갔다.처음으로 시장 구경을 하는 부잣집 태윤은 너무나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태윤은 예정에게 잘 맞춰주어 처음 온 티가 나지 않았다.두 사람은 아침으로 국수를 한 그릇씩 먹었다. 예정은 찐만두를 추가했다.이 여자 진짜 잘 먹네. 국수 한 그릇으로 모자라단 말이야?태윤은 느리게 먹었다. 예정은 태윤의 먹는 모습이 아주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먹는 모습을 보면 그녀의 입맛은 더욱더 좋아졌다. 이렇게 많이 먹는 나를 싫어할까 걱정되는 마음만 없었다면, 만둣국 하나랑 찐빵도 하나 더 시켰을 것이다.“배 안 부르면 더 시켜 먹어.”태윤은 예정이 더 먹고 싶어 하는 것을 눈치챘다.‘저 여자 먹성으로는 국수 한 그릇이랑 찐만두로도 부족할 거야.’어제 저녁 행사에서 그녀는 계속 먹기만 했다. 거의 한 시간 넘게 먹기만 한 것 같다. 그렇게 먹고도 청국장을 포장해서 가져온 사람이다.그녀의 날씬한 몸매는 표준 모델 몸매 같았다. 그렇게 잘 먹는데 영양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저는 배불러요. 근데 당신 먹는 것을 보니 또 배가 고파지네요.”태윤은 미간을 찌푸렸다.“하하, 화내지 마요. 내 말은 당신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그런 거니까. 당신 먹는 걸 보니 마치 산해진미 먹는 것 같아서 나도 먹고 싶게 만들잖아요.”태윤은 예정의 두 눈을 쳐다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머리를 숙이고 국수를 먹었다.태윤은 이런 국수를 먹는 것
태윤은 예정이 고르는 것을 계속 쳐다보았다. 예정이 꽃집 사장과 하나에 만 원짜리 화분을 절반이나 깎으려고 했다. 사장이 예정에게 팔지 않으면 살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만드는 예정의 능력 때문에 매우 신선하게 쳐다봤다.사실 이 부잣집 도령은 물건 살 때 한 번도 가격을 본 적이 없어서 흥정도 해본 적이 없다.자기 아내가 이렇게 값을 잘 깎는 사람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꽃집 사장이 마치 살이라도 베인 듯, 아파하는 표정을 보자 태윤은 크게 웃고 싶었다.돈을 내고 난 후, 예정은 자신이 산 화분을 하나하나 태윤의 차로 옮겨 실었다.태윤은 처음에는 옆에서 보고만 있다가 나중에는 여자에게 화분을 옮기게 두고 자신은 차 옆에 서있는 모습이 보기에 안 좋은 것 같아, 예정이 화분 옮기는 것을 도와주었다. 화분을 다 차에 싣고 나니 태윤의 차는 화분으로 가득 찼다. 다행히 주인이 종이박스 같은 것을 주어 좌석 위에 깔았다. 좌석이 더럽혀질 일은 없었다. “또 뭐 살 거 있어?”태윤은 차에 타며 아내에게 물었다.“차가 이미 꽉 찼잖아요. 다른 물건은 실을 수 없으니까 오늘은 안 살래요. 살림 꾸리는게 하루 이틀 만에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시간 날 때 천천히 사서 꾸밀게요.”예정은 안전벨트를 맨 후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우리 일단 집으로 갈까요? 이따가 언니 집에 좀 다녀와야 해요.”태윤은 말없이 차를 움직였다.“태윤씨.”“응.”“주말에 할머니랑 당신 아버지, 어머니 모두 오신다고 했으니까, 우리 언니 불러도 돼요? 언니랑 형부 불러서 같이 밥 먹으면 어떨까 해서요. 언니랑 형부가 내 부모와 마찬가지인데... 우리 이제 혼인신고도 했으니, 우리 사이의 감정이 있든 없든 집안 어른들끼리 만나서 인사도 하고 그래야죠.”그래야 길에서 마주쳐도 모르고 지나갈 일은 없지않을까?예정의 고향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숙모, 삼촌 모두 계시는데, 이들은 모두 딸이라는 이유로 자매들을 싫어했다. 심지어 부모님 목숨과 바꾼 보상금의 일부도 가져갔다. 부
예정은 이런 고위급 회사원도 특권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카드를 꺼내 태윤에게 건네며 말했다. “꽃 가게 사장이랑 흥정 좀 해요. 절반까지 깎으면 좋고.”태윤은 카드를 밀어내며 말했다.“나도 아직 돈 좀 있어.”예정은 그의 두 눈을 바라보았고,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예정은 언니 집에 가야 했다. 다시 한번 태윤에게 꽃을 살 때 제값 다 주고 사지 말고 깎아야 한다고 강조한 후 전동 오토바이 열쇠를 들고 황급히 나갔다.예정이 몰랐던 것은 그녀가 간 후, 태윤이 핸드폰으로 베란다 영상을 찍어 전 씨 가문 정원관리사 김 씨에게 보내주었다는 사실이다.김 씨는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도련님!”“아저씨 영상 보셨죠? 이 베란다를 작은 정원처럼 만들어주세요. 화분이 얼마나 필요한지 보고 좀 저렴한 걸로 준비하고요. 꽃이 잘 피는 걸로. 꽃이 피면 좀 화려하고 큰 그런 종류로요. 발렌시아 아파트 B동 808호로 가져다주세요.”예정을 따라 꽃을 사러 갔던 태윤은 아내가 꽃송이가 아주 큰 꽃만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꽃잎이 많고 화려한 그런 종류. 꽃 잎이 단순한 건 안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영수증도 꼭 끊어야 해요.”“아, 알겠습니다.”“오늘 저녁이 되기 전에 끝내야 해요.”“네, 알겠습니다.”김씨아저씨는 전씨 가문의 도련님이 시키는 것이라면 다 한다.“화분을 집 베란다까지만 옮겨다 놓으면 돼요. 다른 것은 신경 쓸 필요 없고요.”어떻게 놓을지는 예정이 알아서 할 것이다. 김 씨가 다 한다고 해도 예정이 좋아할 리 없을 테니까.김 씨는 정중하게 지시에 따랐다.태윤은 얼른 전화를 끊었다.이런 사정을 잘 모르는 예정은 늘 하던 것처럼 언니와 조카의 아침을 포장했다. 기분도 들떠있어 조카에게 줄 아동용 전동 오토바이도 하나 샀다.“이모!”예정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조카 주우빈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우빈아! 오늘 일찍 일어났네? 빨리 와서 봐봐, 이모가 너 주려고 사 온 거야.”“와! 차다!”우빈은
“고작 이게 얼마나 한다고 그래. 언니 나도 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고.”예정의 월급은 적진 않아서 언니를 도와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자기가 가진 모든 수입을 쏟아붓진 않을 것이다. 집도 사야 하니까!“우빈이는 아침 먹었어?”예정은 우빈이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체온은 정상이었다.분유 먹었어. 죽을 좀 끓이고 있으니까 다 되면 좀 더 먹여야지. 걱정 마. 굶게 하진 않으니까.”예진은 마음을 다해 아들을 보살폈다.“언니, 남편은 이틀 뒤면 올 수 있대. 이번 주 주말에 시부모님이 오시거든. 언니랑 형부도 그날 우리 집에 가자. 서로 인사도 하고. 언니가 형부한테 말 좀 해줘.”예진은 기뻐하며 말했다. “매부 출장 갔다가 돌아왔어?”“금요일 저녁에 집에 도착할 수 있다던데?”“그래, 그럼. 내가 형부한테 말해볼게.”여동생이 갑작스레 결혼을 해버린 이유를 예진은 사실 잘 알고 있다. 동생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만 모른척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심 여동생이 나쁜 놈에게 시집간 건 아닌가 걱정됐었다.매부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도 모른다. 만난 적이 없으니까.언니로써 동생 시댁 식구들을 만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예정은 언니네 집에 잠깐 머물렀다가 출근했다.예진은 동생이 간 후 아들에게 죽을 먹였다. 그 후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산책 겸 쇼핑을 할 생각이었다. 새 옷 몇 벌 사서 사돈댁을 만나는 날 입고 싶었다.평소에 예진은 집에서 아이를 돌보기 때문에 항상 편한 옷만 입었다. 옷도 전부 시장 좌판에서 샀다. 결혼하기 전에는 잘 꾸미고 다녔다. 명품 브랜드는 아니어도 최소한 시장 좌판에서 산 것보다 몇 배는 비싼 옷을 입었다.지금은 결혼도 했고, 애도 낳았고, 직장도 그만뒀고, 수입도 끊겼다. 적금 해 두었던 돈도 집 인테리어하는데 다 쏟아부었다.지금 예진은 철저히 계산해서 돈을 쓴다. 대부분 생활비에 들어가는 돈이고 자신에게 쓰는 건 아주 적다.여동생 시댁 가족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예진은 큰맘
“옷 가게에서 결제한 내역 다 봤어. 너 옷 샀어? 심지어 그렇게 비싸 게 주고? 어떻게 한방에 20만 원이나 쓸 수 있어? 좀 아껴 쓸 수는 없어? 돈 버는 게 그렇게 쉬운 거 같아?”“자동차랑 집 대출급 갚아야지, 우리 부모님 생활비도 드려야지, 우빈이 분유, 기저귀도 다 사야 하지. 전부 돈이잖아! 너는 벌지도 않고 나 혼자 버는데 너는 왜 절약을 몰라? 내 상황을 이해해 줄 순 없는 거야?”예진은 하던 것을 멈추고 남편의 얘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해명했다. “예정이 남편이 금요일에 돌아온데. 그래서 주말에 가족 어른들이 모이기로 했나 봐. 만나서 같이 밥도 먹고. 나는 예정이의 유일한 가족이잖아. 한 번은 사돈 댁에 좋게 보여야 될 것 같아서. 집에 있는 옷들은 전부 몸에 맞지도 않아서 새로 살 수밖에 없었어.”“그리고 당신 꺼도 샀어. 양복 한 벌이랑 넥타이. 여보, 이번 주 주말에 우리 당신 부모님 댁 안 가도 되지?”형인은 다 듣고 난 후 혼자 중얼거렸다. “여보, 뭐라고?”“별거 아냐. 어쨋든 사돈어른들 만나야 하니까 제대로 차려입어야 하는 것 맞지만, 두벌이나 살 필요가 있어? 한 벌이면 되잖아. 그리고 말이야, 너 살이나 좀 얼른 빼. 살 빠지면 옛날에 입던 옷 다 맞을 거 아냐. 옛날 옷들도 아직 다 멀쩡한데 못 입고 버리면 얼마나 아까워.”“솔직히 생각해 봐. 하루 종일 먹고 또 먹고, 돈도 아무렇게나 쓰고, 우리 집이 돼지 키우는 곳도 아니고. 진짜 돼지면 팔아서 돈이라도 되는데, 너는 팔수도 없는 돼지인 건 알아?”주형인은 뚱뚱하게 변해버린 아내의 몸을 보고 참을 수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옛날엔 솔직히 세련되고 똑똑했다. 날씬하고 예뻤던 예진은 온대 간대 없어졌다!형인은 결혼한 지 3년 만에 아내가 저렇게 뚱뚱해질지 몰랐다. 형인의 엄마가 그에게 한 말이 맞았다. 예진이 저렇게 먹기만 하고 돈은 못 버니 패가망신할 거라고.“주 사장님.”주형인의 비서는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달달한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급하
서현주는 상사가 주는 꽃, 선물, 모두 거절하지 않고 독보적으로 상사의 총애를 누렸다. 그녀 역시 대부분은 상사가 원하는대로 다 맞춰주었다. 입에 키스하는 것까지도 괜찮았다. 그러나 최후의 방어선은 지키고 있었다. 그녀가 엄청나게 조신해서가 아니라 그녀는 형인의 애를 태우고 있는 중이다.그녀가 원하는 것은 바람피우는 애인이 아니라 주형인의 아내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주형인은 아내와 사귄 지 오래되었고, 또 대학 동창이기도 하다. 그 예진이라는 사람도 예전에 이 회사 재무 담당자였다. 그런데 서현주가 회사에 들어갔을 때 예진은 이미 사직하고 가정주부가 된 상태였다.현주는 예정을 본 적은 없지만, 회사 동료들에게 예정이 결혼 1년 후 아들 우빈이를 낳았다고 들었다. 그 후 계속 집에서 아이만 돌봤고 살이 너무 쪄서 마치 곰 같다고 했다. 현주는 사실 주형인이 자기 아내가 살이 너무 쪄서 돼지 같다고 욕하는걸 한두 번 들은 게 아니다.현주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 여잔 참 바보 같아. 아무리 결혼했다고 해도 자기 관리는 좀 해야 하는 것 아냐? 그렇게 뚱뚱해졌으니 어느 남자가 좋아하겠어?’솔직히 그녀가 주 사장과 바람난 것을 탓할 것이 아니라 예진은 자기가 몸매 관리를 실패해서 남편의 눈 밖에 난 것이다. 심지어 하루 종일 살림도 안하고 돈도 펑펑 쓰고. 예진이 돈을 적게 쓰면 주 사장이 자기에게 쓸 돈이 더 많아지겠다고 생각했다.하예진 얘기를 꺼내니 주형인은 또 흥분하며 말했다.“걘 진짜 돼지야. 걔만 보면 입맛이 사라져. 아들에게 한부모 가정 만들어주고 싶지 않아서 같이 사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벌써 이혼했지.”예정은 관리를 잘해서 예진보다 훨씬 예쁘다. 자매 둘 다 똑같이 시골 출신인데, 예정의 분위기는 예진보다 훨씬 귀티 난다.당연히, 옛날에는 예진도 꽤 괜찮았다. 지금은 살이 쪄서 변했을 뿐이다.예진은 남편이 여비서랑 바람을 피우고 있는지 모른다. 남편에게 비서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고,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비서의
이때 고급 차 여러 대가 천천히 다가왔고, 그중 한대는 롤스로이스였다. 바로 태윤의 차였다. 차들은 길가에 잠시 정차했다. 태윤은 창문을 내려 얼굴에 칼자국 흉터가 있는 남자를 쳐다본 후 큰 소리로 불렀다.“동명아! 너 여기서 뭐 해?”“잠깐 물건 좀 사려고 내렸는데 누가 내 차를 긁어버렸어.”“네 차를 긁은 사람은 어디갔어?”태윤은 본능적으로 말했다. “차 긁고 간 사람 내가 찾아줘?”“아냐, 필요 없어. 이미 번호도 받았어. 수리 다 하고 나면 청구해야지. 어차피 관성에서 이 이동명의 손아귀를 벗어날 순 없으니.”이동명은 차로 돌아가 시동을 켜면서 태윤에게 말했다. “가자.”태윤은 그의 말을 듣고 더 말을 하지 않고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차량 수 대가 빠르게 빠져나갔다.하루가 참 빠르게 지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저녁이 됐다.예정은 학생들이 야자시간이 시작되면 효진과 먹을 저녁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언니의 전화를 받았다.“예정아, 내가 오늘 하루 종일 생각해봤는데, 정말로 다른 방법이 없어서, 너한테 말하는 거야.”“무슨 일인데 그래?”“오전에 쇼핑하고 나오는데 우빈이 유모차 밀고 가다가 벤츠를 살짝 박았어. 그런 차는 조금만 고쳐도 비용이 엄청나게 들잖아. 그래서 계산을 해봤는데, 내 비상금을 다 털어도 모자랄 것 같더라고. 형부한테 말했다가는 진짜 끝장날 것 같아서. 그리고 내가 저지른 일은 내가 해결하라고 할 것이 뻔해. 하나도 안 도와줄 거야.” 언니의 얘기를 다 들은 예정은 마음이 급해졌다.“언니, 진정해. 일단 차 수리비가 얼만데?”“지금은 모르지. 차주가 내 전화번호를 달라고 하더라고. 수리 다 하고 나면 청구하겠다고 그랬어.”“언니, 언니랑 우빈이가 아무 일 없으면 됐어. 차 수리비가 얼마든지 내가 내줄게, 빌려줄 수 있어. 걱정하지 마.”예진은 목이 메는 듯했다.“예정아, 언니가 정말 너한테 도움이 안 된다. 이런 일까지 너에게 부탁하니까 말이야.”“언니,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 너무 힘들어하지
소지훈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제가 무슨 일이든 다 하면 저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뭐해요? 그들에게도 기회를 줘야죠. 제가 낮에 회사로 가서 일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너무 충분한데.”관성에 있을 때면 그는 열흘이나 보름에 한 번 회사에 들아갔다. 그리 회사의 크고 작은 일들은 기본적으로 회사 운영팀에게 맡겼다.소지훈은 특별히 중요한 일이 일어나야만 회사에 한 번 돌아가곤 했다.그처럼 바쁜 사람이 어찌 매일 회사에 돌아올 수 있겠는가!소지훈은 사업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일에도 관여해야 했다.소균성은 일찌감치 은퇴하는 바람에 사실상 소지훈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소씨 가문의 대표가 처리해야 할 업무들을 해결하러 다녔다.“마치 아저씨가 출근하면 남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처럼 말하네요. 그 회사는 아저씨 회사이고 벌어들인 돈도 아저씨 지갑으로 들어갈 뿐 회사 직원들의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만약 저녁에 대접할 일이 있다면 집에 못 들어올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저한테 전화하시면 제가 문을 열어드리면 되는데.”윤미연은 일반적으로 밤 11시쯤에 대문을 잠갔다.밤 11시 이후에 귀가하면 정씨 가족에게 전화해서 문을 열라고 부탁해야 했다.소지훈은 재빨리 대답했다.“정말 접대할 필요 없이 중요한 일은 다 처리했어요. 이렇게 오랫동안 출장을 다녀왔는데 아직 처리하지 못했다면 제 능력 문제라고 봐야죠. 바쁘시죠? 먼저 일 보세요. 퇴근하고 바로 갈게요.”“네. 저도 수업이 있어요. 그럼 저녁에 봐요.”“저녁에 뵙겠습니다.”소지훈은 결국 그가 정윤하를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전화상으로도 말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그녀 앞에서는 더 감히 말하지 못했다.고백하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소지훈이 정윤하에게 구애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알아챌까 봐 장미 한 송이조차 선물하지 못했다.사실, 소지훈은 매일 몇 시간씩 정윤하와 함께 시간을 보냈고 그녀를 존중해주고 세심하게 배려했다.이 또한 그가 정윤하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
정윤하가 웃으며 소지훈에게 물었다.“맞아요. 방금 큰 건을 성사시켜 회사에 수십억 이윤을 얻었어요. 제가 저녁에 윤하 씨 가족분들에게 축하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할게요.”정윤하가 말을 이었다.“괜찮아요. 우리 오늘 식자재를 많이 사서 집에 가져가서 요리해 먹으면 마찬가지예요. 호텔에 가서 한 끼를 먹으려면 돈이 많이 들어요. 그리고 우리 엄마께서 또 마음 아파하실 거에요. 호텔에 가서 한 끼 먹을 돈으로 장을 보고 집에 가서 요리해 먹으면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 먹을 수 있다고 늘 말씀하시거든요.”소지훈은 윤미연이 입으로만 잔소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정말 큰 호텔에서 그들에게 식사 한 끼를 대접하면 윤미연은 분명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꾸미고 호텔로 달려갈 것이다.윤미연이 만약 잘 꾸미고 정윤하와 함께 있으면 어쩌면 자매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소지훈이 말을 건넸다.“괜찮아요. 저는 이미 이모님 잔소리에 적응했어요. 돈을 벌면 마땅히 써야죠. 많이 벌어서 화끈하게 써야 자신에게 떳떳하죠.”소지훈이 연성에 방금 왔을 때부터 정씨 가문의 저택으로 들어가 살았다. 처음에는 정씨 가족들은 소지훈이 단지 3일에서 5일일 정도 머물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직도 떠나지 않았다.이미 소지훈을 한집안 식구로 생각한 윤미연은 그가 잘못할 때면 여전히 잔소리를 퍼붓곤 했다.“무슨 일이세요?”정윤하가 소지훈에게 전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오히려 소지훈이 그녀에게 전화를 먼저 걸었다.소지훈은 정윤하가 자신에게 도움 청할 일이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그녀에게 걱정스레 물었다.정윤하는 웃으며 대답했다.“별일은 없고요. 우리 학생들이 아저씨가 언제 시간 나면 놀러 오냐고 물으며 아저씨가 보고 싶대요.”관성에 있을 때, 소지훈은 정윤하와 십여 명의 학생들을 초대하여 놀면서 맛있는 음식을 사주기도 하고, 선물을 사주기도 했다.그리고 연성에 와서도 소지훈은 학생들이 무술을 연마하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들을 대접하기도 했다.학생들은 그를 무척 좋아했기에
소균성은 김연수에게 휴대전화를 건네었지만, 그녀는 휴대전화를 받아보더니 말을 꺼냈다.“이 자식 이미 전화를 끊었어요. 나쁜 놈, 내 전화를 끊다니.”막상 통화를 끊은 광경을 보자 소균성은 또 화가 나 참다못해 욕 몇 마디를 내뱉었다.“이놈 때문에 속이 썩여. 정말! 예전에 맞선 상대를 그렇게 많이 주선해 주었는데도 싫어하더니, 결국 문제가 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잖아. 겨우 누군가 구해줄 희망이 생겼는데도 왜 이렇게 질질 끌고 있나 몰라. 늘 깔끔하게 일 처리하던 애가. 어휴! 고백, 프러포즈, 결혼, 출산, 그렇게 힘들대?”곁에서 지켜만 볼 수 없는 소균성의 마음이 더 조급해 났다.김연수가 말을 이었다.“지훈이가 연애도 경험도 없어서 지금 탐색 중일 거예요. 애가 지금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잖아요. 어쨌든 연성에서 정윤하 씨 곁을 지키고 있으니 다른 남자가 감히 가까이하지는 못할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결혼은 한평생의 큰일인데, 급해한다고 해도 소용없는걸요.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해야만 결혼 생활도 행복한 법이니까요. 우리도 상대방을 강제적으로 우리 집으로 시집오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럼 사돈이 아니라 원수로 되는 거잖아요.”정씨 가문은 소씨 가문과 비교할 수 없지만, 정합 도장은 연성에서 오랫동안 운영했기에 그들이 가르친 제자 중 업계에서 성공한 인물도 있게 되기 마련이다. 만약 쌍방이 서로 원한을 품게 되면 누구도 이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게다가 소씨 가문은 미래의 사돈을 어찌 감히 건드릴 수 있단 말인가!.정윤하는 소지훈이 없으면 재혼할 수 있지만, 소지훈은 정윤하가 없으면 재혼할 수도 없다.“여보, 우리 한 번 연성에 가볼까요?”소균성은 김연수를 쳐다보며 대답했다.“그 자식이 아직 고백도 안 했는데, 우리가 간다고 해도 여행으로 가장할 수밖에 없는데 가도 소용없어. 가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우리가 연성으로 여행을 가는 척하고 사돈 앞에 얼굴을 내밀어 우리 가족이 화목하다는 것을 알게 하면 나중에 우리
운명적인 여신과 함께 지내다 보니 소지훈은 그녀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또한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를 놀라게 할까 봐 너무 두려웠다.하늘도 땅도 두렵지 않던 소지훈은 정윤하 앞에서는 그야말로 겁쟁이처럼 모든 것이 두려웠다.“지훈아, 한 가지만 물을게. 나랑 네 엄마가 언제쯤이면 사돈을 뵈러 갈 수 있어? 결혼 예물도 몇 번이나 준비했는지 몰라. 우리가 뭔가 부족한 것이 생각나면 바로바로 보충했거든. 하나라도 빠뜨릴까 봐 걱정하고 있는데.”소균성은 마음이 급하기만 할 따름이다.그의 장남도 나이를 반올림하면 마흔이라 노동명처럼 관성의 노총각으로 되는데 조급해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아버지, 아직 윤하 씨에게 고백하지 않았는데, 무슨 혼사에 관한 얘기를 벌써 꺼내려고 하세요?”“시간이 이렇게 오래도록 지났는데 아직도 고백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된 거야? 윤하 씨가 좋아하는 남자가 있기라도 한 거야? 아니면 네가 감히 고백조차 하지 못했던 거야?”“아버지만 시간이 길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사실 계산해 보면 그리 시간이 길지도 않아요. 제가 연성에 온 지 한 달도 안 됐거든요. 윤하 씨는 아직 저를 친구로밖에 생각 않아요. 지금은 아직 고백할 수 없어요. 시간이 좀 더 필요해요.”소균성은 전화기 너머로 답답한 듯 말을 내뱉었다.“네 담력은 어디로 튄 거야? 너도 무서울 때가 있었어? 남들은 첫눈에 반하면 바로 고백하던데 넌 우리 미래의 며느리랑 알고 지낸 지도 벌써 두세 달 넘어가는데 아직도 고백하지도 못하고 있어? 소지훈! 넌 장가가고 싶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빨리 손주를 안고 싶거든.”소지훈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아버지, 저도 가고 싶죠. 그런데 윤하 씨가 제 감정을 알고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 두려워요. 게다가 윤하 씨 성격이 너무 활발해서 남자들을 친구로 여기거든요. 그리고 저도 그녀보다 나이 차이가 너무 나서...”“나이는 문제가 아니야. 네가 윤하 씨와 고백하지도 않는데 윤하 씨가 어떻게 네 맘을 알겠어? 그러니까 널 남
“고마워요. 숙모님들.”이윤미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연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하예진은 진작 알고 있었다.하예진은 이씨 가문의 많은 사람 중 이윤미와 가장 많이 접촉했기에 이윤미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윤미 또한 하예진 앞에서 아무런 숨김도 없이 진정성있게 대했다.“예정 씨, 그럼 우리 먼저 돌아가 볼게요. 나중에 일이 생기면 다시 연락드리죠. 그리고 우리가 도울 일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하예진은 일어나 스위트룸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 입구까지 데려다주었고 최순자 일행은 다시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착용한 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고 하예진은 그제야 발길을 돌렸다.그녀는 자신의 룸으로 돌아와 탁자 위를 치우고 나서야 룸 안에서 나왔다.문을 잠근 하예진은 강일구에게 물었다.“아무도 안 올라왔죠?”“네.”하예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도 갑시다.”경호원들도 묵묵히 그녀를 따라나섰다.......연성.연성 번화한 거리에 있는 한 새로운 회사는 28층 높이의 오피스 빌딩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관성 소씨 가문의 연성 지사이기 때문에 설립된 지 며칠 안 됐지만 이미 꽤 많은 직원이 있었다.대다수는 소지훈이 각지에서 전근하여 온 직원들이다.소지훈은 정씨 가문의 가족들에게 출장 왔다고 말했지만, 사실 소씨 가문이 연성에서의 사업은 너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소지훈은 정윤하와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즉시 연성에 지사를 설립하고 각지에서 엘리트들을 연성으로로 전근시켜 연성 지사를 신속하게 이 도시에서 정착시키려고 했다.그리고 연성 지사를 연성에서 규모가 가장 큰 회사 중 하나로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소지훈은 28층짜리 사무실 빌딩과 여러 곳의 공장 건물을 사들였는데, 이 행동은 연성의 업계에 큰 돌을 내 던져 평온해 보이는 호수를 마구 휘저은 거나 다름없다.모두가 몰래 소씨 회사의 내막을 알아보았는데 소지훈이 관성 소씨 가문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는 그의 회사와 협력하러 온 업계 거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심지어 어
“이씨 가문을 잘 꾸려나가려면 젊은 세대에게 의존해야죠. 우리 가문의 젊은 세대들도 능력만 있으면 모두 중히 여겨야 하는 거죠. 숙모님들, 맞죠?”이씨 가문의 셋째 삼촌 이지후는 야망이 있지만 이제 분투할 정력이 없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다만 그들의 후손의 앞날일 뿐이다.하예진이 방금 한 말은 승낙한 거나 다름없다.하예진이 방금 한 말은 이씨 가문의 가주 자리가 하예진 쪽으로 돌아간다면, 가문의 젊은 세대들은 능력만 있다면 모두 적당한 자리에서 빛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라는 의미이다.하예진은 자신이 사람을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준 셈이다.두 사모님이 눈을 마주치며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씨 가문의 넷째 숙모 김연희가 입을 열었다.“맞아요. 역시 전임 가주의 후손답네요. 전임 가주가 이씨 가문을 다스릴 때 우리 이씨 가문은 강성에서 그 누구도 얕볼 수 없는 존재였죠.”그러나 요즘은 사람들이 이씨 가문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전임 가주 이은숙이 여전히 이씨 가문을 운영했을 때 김연희와 최순자는 아직 이씨 가문으로 시집오지 않았다. 당시 그녀들의 나이는 6세에서 12세 사이였고 가문의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그러나 그녀들의 남편들은 어느 정도 기억에 남을 것이다. 적어도 학창시절에 이씨 가문 사람이라고 하면 아무도 괴롭히지 못했다.그 후, 가문의 어르신들 이야기를 통해 자주 듣게 되었다.전임 가주 이은숙의 인간 됨됨이나 일 처리 방면에서는 매우 훌륭했지만 늦게 결혼하고 늦게 아이 낳은 탓으로 급격히 건강이 나빠져 하루가 멀다고 병으로 앓게 되어 이은화에게 기회가 주어지게 된 것이다.“그리고 두 숙모분께서도 안전에 대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이씨 가문에서 떠벌리며 다니지 않는 한 강성에서의 안전은 제가 보장해 드릴 수 있어요.”자기 분수를 지키면서 무슨 일을 하든 너무 날뛰지 않고 눈에 띄게 행동하지 않으면 죽지는 않을 것이다.그러나 만약 그들이 너무 눈에 띄게 행동한다면 하예진이 보호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감히 협력하지
몇 분 후, 방에서 하예진을 기다리고 있던 전호영은 예진이 도착하자 바로 나와서 문을 열었다.“예진 누나.”“고마워요, 호영 씨.”“우리 사이에 무슨, 천천히 얘기 나눠요, 저는 일 보러 나가볼게요.”방을 나온 전호영은 하예진을 방으로 들여보내고는 일구를 포함한 경호원들에게 아무도 못 들어가게 단단히 지키고 있으라고 지시했다.펜트하우스가 출입이 통제되긴 하나 경각심을 높여서 나쁠 것은 없었다.일구와 다른 경호원들은 전호영의 말에 깍듯이 응했고 전호영은 자리를 떴다.하예진이 방으로 들어가자 두 숙모님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그녀들을 위한 과자와 과일들이 놓여 있었고 따뜻한 물도 준비해져 있었다.“예진 씨.”하예진이 들어오자 두 숙모는 소파에서 일어나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고 인사했다. 하예진 라인에 서기로 했으니 두 사람은 이제 본모습을 보일 때가 된 것이다.두 분은 나이가 있는 분들이셨지만 보양을 잘한 덕분에 겉보기에는 훨씬 젊어 보였다.“두 분 앉아계세요.”하예진은 차를 내와 찻잔에 부으면서 말했다. “차를 마시면 정신도 맑아지고 좋더라고요.”“우린 이제 나이가 들어서 차를 별로 안 마셔요. 차를 마시면 저녁에 잠이 안 오더라고요.”셋째 숙모가 웃으면서 답했다.하예진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간식을 권했지만 두 분은 사양했다.“두 분께서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다고요?”하예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두 분과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니 다룰 얘깃거리도 별로 없었다.“예진 씨가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라고 우리 그이가 그러더군요. 우리 두 집안이 기꺼이 힘을 합쳐 도와드리겠다고 전해달라고 했어요.”셋째 숙모가 입을 열자 넷째 숙모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속으로는 하예진 앞에서 이 가주에 대해 불평하고 싶었지만 집을 나설 때 남편이 그러지 말라고 그녀에게 신신당부했기에 꾹 참고 있었다. 그저 두 집안의 의사를 전달하고 다른 말은 하지 말라고 얘기했다.하예진은 관성의 대표로 이곳에 왔기 때문에
하루 호텔은 안전 레벨이 아주 높은 곳으로 그곳에 가면 숙모님들이 마음을 좀 더 내려 놓을 수가 있었다.이에 하예진도 동의를 표하였다.“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방을 예약 해놓을게요.”그녀는 뒤돌아서서 휴대폰을 꺼내어 전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루 호텔에서 제일 안전한 방이 어느 방이에요? 누가 엿듣거나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곳으로 빌리려고요.”전호영은 일 초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그야 무조건 펜트하우스에 있는 스위트룸이죠. 지금 제가 묵고 있어요, 누나가 필요하다면 제가 빌려드릴게요.”“고마워요, 이씨네 숙모님 두 분이 먼저 가실 거예요, 믿을만한 사람을 시켜서 조용히 두 분을 방까지 모셔드리도록 해줘요. 카메라에 찍히지 않게 주의해 주시고요.”전호영이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안배할게요. 두 분 호텔로 이동하시게 하세요, 거의 도착할 때 저희 쪽에 연락 주시면 돼요.”그러고는 하예진에게 번호 하나를 알려주었다.“누나, 조금 있다가 이 번호로 연락 주시면 돼요, 펜트하우스까지 에스코트해 줄 거예요. 저도 조금 있다가 바로 돌아갈게요.”현재 그 방은 전호영이 지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방문을 열 수가 없었기에 호영이 호텔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부탁드릴게요.”“별말씀을요.”하예진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 하던 일 계속 해요, 제가 두 분께 말해놓을게요. 여기서 호텔까지 가려면 약 20분 정도 걸릴거에요. 저는 30분 뒤쯤에 도착할 것 같아요.”“알겠어요.”통화를 마친 예진은 두 숙모한테 다가가 말했다.“제가 이미 말해놓았으니 두 분께서 지금 그쪽으로 출발하시면 되세요. 거의 도착할 즈음 이 번호에 전화하시면 그쪽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그분들이 두 분을 방까지 에스코트해 주실 거예요.”하예진은 전호영이 알려주었던 번호를 셋째 숙모한테 말해주었다.“먼저 가 계시면 돼요. 저는 십 분 뒤에 바로 출발할게요.”“그래요.”두 분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나서 지체없이 바로 출발했다.
“그 분들이랑은 어떻게 되는 사이신지?”하예진이 물었다.두 사람은 자신들의 남편 정체를 말한 후 하예진의 반응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녀가 침묵하자 두 사람은 하예진이 자신의 남편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조수석에 앉아 있던 여자가 서둘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넷째 숙모고 이분이 셋째에요.”하예진은 그녀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오실 때 뒤따르는 사람이 없었나요?”“없어요, 뒤처리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 예진씨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하예진은 미소를 지었다. “저야 아무 걱정이 없지만 두 분께서 저를 찾아온 일이 이 가주님의 귀에 들어가 두 분께서 불리해질까 봐 걱정이에요.”하예진은 원래부터 이씨 집안을 노리고 있었으니 이씨 가족 사람들과 접촉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오히려 아무 접촉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씨 집안 사람들이 그녀를 먼저 찾아왔다면 이 가주가 그 사실을 알고 응징할 수도 있기에 그 후과를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두 사람의 눈빛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보였지만 이내 다시 물었다.“예진 씨, 잠깐 따로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좋아요, 저는 아무 때나 괜찮아요. 어디서 얘기할까요? 장소를 알려주시면 제가 곧 갈게요. 함께 이동하면 눈에 뜨일 수 있으니까 따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하예진의 말에 그 두 사람의 안위를 걱정해 주는 마음이 담겨 있어 두 사람은 마음이 놓였다.두 사람의 남편들은 집에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며칠 동안 마음을 졸이며 지냈다. 이 가주는 그들을 비롯한 직계가 아닌 가족들에게 아주 인색하고 발전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능력이 출중한 사람은 오히려 이 가주의 억압을 받아 두각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두 가족은 몰래 모여 이틀 동안이나 상의를 했고 결국에는 하예진 라인에 서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하예진이 이길 것이라고 배팅을 한 것이다. 만약 하예진이 이긴다면 그들이 하예진을 처음부터 지지해 온 사람들로서 앞으로의 발전이 나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