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래도 태윤이가 나 깍쟁이라고 놀릴까 봐 두려워. 좀 더 비싼 자전거를 사줘야 하는데 고작 이런 것만 해주잖아.”노동명은 우빈이를 제 앞으로 끌어와 박스를 가리키며 말했다.“우빈아, 아저씨가 사준 자전거 어때? 마음에 들어? 우빈이 자전거 타고 싶어?”주우빈은 저녁에 엄마랑 집 아래에서 산책할 때 다른 어린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녔던 장면이 떠올라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네, 아저씨. 나 자전거 좋아해요.”노동명이 웃으며 말했다.“그럼 아저씨가 지금 바로 조립해 줄게. 다 조립하거든 함께 나가서 자전거 타자. 풍차도 사 왔어. 자전거 앞에 달면 우빈이 자전거 탈 때 바람 따라 풍차도 돌아갈 거야. 엄청 예쁘겠다.”우빈의 얼굴에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신난 마음을 감추려야 감출 수가 없었다.하예진은 노동명이 자전거가 2만 원 좌우이고 또 본인과 전태윤의 관계까지 들추어내니 더는 돈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내일부터 노동명이 가게로 아침 먹으러 오면 보름 동안 공짜로 토스트를 해줄 생각이었다.노동명은 박스를 뜯고 우빈이를 위해 자전거를 조립하기 시작했다.하예정이 아래로 내려오다 이 광경을 보더니 가볍게 웃었다.“동명 씨, 회사 안 나가도 돼요?”어젯밤 연회에서 노동명은 손은경과 꽤 친해 보였다. 둘은 나중에 함께 춤도 한 곡 췄고 윤미라는 입이 귀에 걸릴 것만 같았다.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은 전부 눈썰미가 좋아 손은경이 윤미라가 찜한 며느릿감이란 걸 바로 알아챘다.그 뒤로 다들 노동명과 손은경을 부추겼다.하예정은 정말 생각 밖이었다. 전태윤이 집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노동명이 찾아오다니, 게다가 언니와 우빈이가 여기 있다는 걸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어제 너무 달려서 오늘은 집에서 좀 쉬려고요.”노동명은 또다시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우빈이 주려고 어린이용 자전거를 샀는데 태윤이가 우빈이 여기 있다길래 이리로 들고 왔어요.”노동명은 그녀에게 대답하며 함께 따라온 공구 상자에서 설명서와 공구를 꺼내 들고 자전거를 조립했다.우빈이
주형인이 전화기 너머로 말했다.“우빈이 이젠 세 살이야. 내 아들이기도 한데 화동이 어때서? 지금 우빈이랑 어디 있어? 월셋집 도착해서 한참 문 두드렸는데 아무 반응 없길래 전화한 거야. 지금 집 아니지?”서현주는 주형인 옆에서 그와 하예진의 통화 내용을 엿들었다.그날 형님과 대판 싸운 이후로 며칠 쉬었더니 서현주의 얼굴에 난 퍼런 멍 자국이 다 사라졌다.주형인은 또 그녀에게 스킨케어 제품을 두 세트 사주고 주얼리도 큰마음 먹고 한 세트 사준 후에야 겨우 그녀를 달랬다.그는 부모님과 누나에게도 얘기했다. 서현주랑 혼인신고도 했고 그녀도 진심으로 주형인과 잘살아 볼 생각이니 결혼식이 점점 다가오는 지금 제발 좀 서현주를 못살게 굴지 말라고, 인제 그만 신경 쓰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다.한때 하예진과 이혼한 건 부모님과 누나의 책임이 크다며 질책하기도 했다.“다들 내가 또 이혼하길 바라는 거예요? 예진이랑 이혼할 때 치른 대가를 생각해 봐요. 그래도 또 이혼시키고 싶으세요 다들? 나 또 이혼하면 사람들이 두 번 이혼한 남자라고, 내가 벌 받은 거라고 놀려대기만 할 거예요. 게다가 종일 이렇게 서현주랑 맞서 싸우며 바람 잘 날 없는데 대체 누가 나한테 시집오려 하겠어요? 다들 내 가족인데 왜 날 위해주지 못할망정 앞길만 망치려고 들어요? 내가 혼자 지내야 만족하시겠어요?”주형인이 이렇게 말한 후 요 이틀 부모님은 조용해지셨고 밥할 때 현주 몫도 해주신다.소란만 피우는 누나 주서인은 아빠에게 쫓겨났고 주형인이 결혼식을 치르기 전까지 관성에 발도 들이지 말라고 했다. 주형인의 결혼식 당일에만 참석하러 오라고 했다.“예진 씨한테 말해요. 우리 우빈이 데리러 간다고요.”서현주가 나지막이 말했다.오늘 아침 조깅할 때 그녀는 또다시 이름 모를 여자로부터 쪽지를 받았는데 빠른 시일 내로 방법을 생각해 하예진의 곁에서 주우빈을 떼어놓으라고 명령했다. 장소는 상관없으니 하예진의 곁에서 떼어놓기만 하면 그들이 알아서 우빈이를 서현주와 주형인의 손에서‘뺏어’가겠다
주형인이 말했다.“우빈의 정장을 산다고 해도 애를 데리고 가서 사야 할 거 아니야. 내가 우빈의 사이즈도 모르는데 덜컥 샀다가 안 맞으면 어떡해?”하예진은 곧장 우빈의 사이즈를 알려줬다.“내가 말한 사이즈대로 사면 무조건 입을 수 있어.”“예진아, 너 지금 나랑 우빈이 못 만나게 가로막는 거야? 이혼할 때 분명히 말했지. 우빈이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볼 수 있다고. 지금 내 아들 보고 싶다는데, 애한테 새 옷 몇 벌 사주고 싶다는데 왜 안된다는 거야?”하예진은 아예 전화를 끊었다.서현주에게 의심이 생겨난 후부터 그녀는 더는 감히 주형인에게 아이를 보낼 엄두가 안 났다.주형인은 서현주가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몰라서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다. 그녀가 우빈이를 결혼식 날 화동으로 쓰겠다고 하니 주형인은 고민 없이 바로 허락했다.그도 굳이 화동을 따로 찾을 필요 없이 제 아들을 세우면 될 거라고 여겼다.우빈이는 말도 잘하고 철도 들었으며 동년배보다 키가 커 화동으로 적합했다.주형인은 심지어 아들이 점점 더 멋지게 변해서 화동을 시키면 아빠인 본인도 면이 설 거라고 여겼다. 게다가 우빈이는 무려 전태윤의 외조카이다.“뭐래요?”서현주가 물었다.주형인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그녀를 쳐다보며 씩씩거렸다.“예진이가 내 전화 껐어. 날 점점 안중에도 안 둬. 내 전화 받고 싶으면 받고 끄고 싶으면 상의도 없이 꺼버려.”서현주는 주형인의 말이 실로 우스웠다.그는 전에 하예진 앞에서 양반처럼 지내서 그녀가 쭉 떠받들어줄 거라고 믿었다.“형인 씨 이젠 예진 씨랑 이혼한 지가 몇 달인데 아직도 적응 못 했어요?”“...”“예진 씨랑 우빈이는 그래서 지금 어디 있대요? 이리로 안 보내면 우리가 직접 가서 우빈이 데려와요.”주형인이 말했다.“예정이네 집이래. 걔 발렌시아 아파트에 사는데 우린 못 들어가. 예진이가 나 우빈이 데리고 정장 맞추러 가는 거 반대해. 우빈이 화동 시키는 건 되지만 아이 정장은 나보고 알아서 사래. 옷 사이즈도 다 알
주형인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우빈이는 내 아들이야. 영원히 내 아들이라고. 예진이가 나 아들 안 보여주면 소송을 다시 걸어서라도 아이 입양권 가져올 거야.”서현주는 주형인이 입양권을 가져오게 내버려둘 리가 없다. 그녀는 재빨리 남편을 다독였다.“형인 씨 지금 콜택시 해서 수입이 불안정해요. 우리 결혼도 코앞이고 결혼식 끝나면 신혼여행도 떠나야 해서 입양권 뺏어오는 데 불리해요.”그녀는 주우빈을 이용하고 싶을 뿐 아이를 키우려는 건 아니다.나중에 둘만의 아이도 생길 텐데 우빈이를 데려오면 그녀의 아이와 함께 아빠 사랑을 다툴 게 뻔하다.“예진 씨가 오늘 일찍 가게 문 닫고 예정 씨네 집으로 갔으니 우리 그럼 내일 좀 더 빨리 하루 토스트로 와서 우빈이 데리고 정장 맞추러 가요. 하루 미룬다고 달라질 건 없어요.”주형인이 씩씩거렸다.“하예정만 아니면 우리 둘 다 직업을 잃지도 않았어. 예진이가 이혼할 때 나누어 가진 2억 원을 금방이면 벌 수 있을 거로 여겼는데 이혼하자마자 우리 둘 다 직장에서 잘렸잖아. 이젠 일자리 찾기도 힘들어.”그래서 그는 콜택시를 하면서 돈을 벌고 있다.현재 수입은 전에 매니저 일을 할 때와 비교할 바가 못 된다.전에 한 달 월급이 보통 사람들의 연봉 수준이었는데 지금은...그의 가족들은 모든 게 하예진과 이혼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에 연봉도 오르고 매니저로 승진해 사장님의 신임을 얻은 건 하예진이 남편을 승승장구하게 해주는 복이 있다고 했다.서현주는 남편에게 승승장구도 못 시켜줄뿐더러 재수가 바닥을 쳐서 그녀와 결혼한 뒤로 일자리도 잃고 수입도 끊겨서 모아뒀던 적금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한다고 한다. 게다가 하루하루가 바람 잘 날이 없다.하예진은 전에 자신의 적금을 깨서 신혼집 인테리어를 했고 진심으로 가정에 헌신했다.반면 서현주는 제 돈 아까워 일전 한 푼 꺼내지도 않아서 집안의 모든 지출은 주형인이 부담하고 있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너무 피해를 본다고 하신다.하지만 이 모든 걸 초래한 사람이 바로 하
서현주는 오늘 낯선 여자의 미션을 완성할 수 없어 상대가 친정 식구들을 해치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그래서 주형인과 함께 친정으로 내려가 볼 생각이었다.그녀의 친정도 시골에 있다.주형인은 처가에 가는 걸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매번 다녀올 때마다 장모님은 몸이 여기저기 쑤시고 집에 이것저것 부족한 게 많다고 하시니 듣노라면 어쩔 수 없이 지갑을 열어 장모님께 용돈을 드려야 했다.그리 많이 주는 건 아니지만 갈 때마다 이러니 주형인은 기분이 썩 달갑지 않았다. 왠지 처가는 그를 현금인출기로만 여기는 것 같았다.다행히 서현주가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함께 잘살아 볼 생각이라 장모님이 거액의 예물 값을 요구할 때 확고하게 그의 편을 들어주며 몰래 호적을 훔쳐 와 주형인과 혼인신고를 했다. 그 뒤로 장모님은 더 이상 예물 값을 많이 요구할 수 없어 몇백만 원으로 낮췄다.비록 몇억 대에서 몇백만 원으로 낮추긴 했지만 관성 시골 사람들에게 몇백만 원의 예물 값도 높은 축이다. 일반인들은 부자가 아니니 재벌가와 비교할 수가 없다.한편 서현주네 가족은 예물 값을 받은 후 분명히 말해뒀다. 결혼식 날 서현주네 가족들 뷔페값은 주형인네 가족들이 물어야 한다고, 만약 안 물면 뷔페를 취소하고 한 무리 친척들을 데리고 주형인의 집으로 찾아가서 술상을 벌이겠다고 했다.주형인은 부모님과 상의한 후 서현주네 가족들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결혼식 날 두 집안의 식비는 전부 신랑 쪽에서 부담하기로 했다.예식장은 고급 호텔로 감히 정하지 못하고 수수한 레스토랑으로 정했다. 고급 호텔은 비용을 감당할 수 없으니.서현주네 집에선 딸에게 예단을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 신혼집 이불 세트 몇 개가 전부였다.서현주가 예단이 초라하게 느껴지면 남편 돈으로 알아서 예단을 준비하거나 혹은 그녀의 지갑을 열어 직접 준비하라고 했다.주 씨네든 서 씨네든 다들 서현주가 적금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주 씨네 가족은 서현주가 적금을 깨서 신혼집 리모델링을 하길 원했고 서 씨네 가족은 그녀가
“지금 날 호구로 보는 거야? 내가 돈이 엄청 많다고 생각하나 보지. 내 처지를 봐. 콜택시나 하고 있다고!”주형인은 하예진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후 내내 기분이 잡쳐 있었다.그 바람에 서현주네 가족만 쉴 새 없이 원망했다.그녀도 부모님이 갖은 수법으로 돈을 요구하고 있다는 걸 잘 안다. 전에 그녀가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가 친히 한 말이니까. 서현주는 월급의 절반을 집에 바칠 뿐 엄마가 더 많이 요구해도 돈이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뒤로 그녀의 엄마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하지만 주형인이 이토록 푸념하니 서현주도 기분이 언짢았다. 어쨌거나 부모 형제이고 한 가족인데 이런 식으로 말을 들으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우리 엄마, 아빠 그만 원망해요. 날 낳고 키워주신 분들이에요. 힘겹게 딸 키워서 당신한테 시집보냈다고요. 당신은 사위요. 사위는 절반 아들이라는데 병원비 좀 대주면 덧나요?”“당신 부모님은 돈 달라고 한 적 없어요? 그리고 그 인간쓰레기 같은 당신 누나, 파렴치함의 끝을 보이죠! 나 진짜 살다 살다 그렇게 뻔뻔스러운 형님은 처음 봐요. 시집간 지 십여 년이 됐는데 아직도 친정집 일에 간섭하다니!”“당신 부모님도 그래. 당신 누나랑 같은 편이잖아. 내 말 똑똑히 들어요 형인 씨. 내가 하도 형인 씨 사랑하니까 당신네 가족들 참아주는 거예요. 딴 여자라면 진작 도망갔다고요!”주형인은 차 시동을 걸었다가 그녀가 가족을 맹비난하자 또다시 브레이크를 밟고 반박에 나섰다.“우리 부모님이 나한테 생활비 받는 게 뭐 어때서? 너만 낳고 키워준 부모가 있고 난 없냐? 우리 엄마, 아빠는 나 키우느라 고생 안 했어? 사위도 절반은 아들이라고? 그래서 너희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고? 그러는 넌 이미 주 씨네 집안으로 시집왔어. 우리 집안 며느리란 말이야. 너도 우리 부모님께 효도해야지, 안 그래? 누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나 보고 어떡하라고? 그럼 누나랑 연 끊고 살아? 내겐 하나뿐인 누난데!”서현주가 말했다.“당신 지금 누나
서현주는 참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파묻은 채 엉엉 울었다.한참 울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티슈를 꺼내 눈물, 콧물을 닦고 앞으로 걸어갔다.아직은 이혼할 타이밍이 아니다.덜컥 이혼해버리면 이름 모를 여자가 내린 임무를 완수할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큰일이다!친정집 식구들은 어떡하라고?주형인은 그녀가 하예진한테서 뺏어온 남자인데 이렇게 끝내버리면 다들 그녀가 벌 받은 거라고 엄청 놀릴 것이다.서현주는 이를 악물고 속으로 되뇌었다.‘절대 머리 숙일 순 없어. 물러서지 마. 주 씨네 가족을 반드시 제대로 다스려야 해. 난 두 번째 하예진이 될 수 없다고!’주형인 부부가 대판 싸운 일을 하예진은 아예 몰랐다. 그녀는 단지 주형인의 말투가 꼴 보기 싫어 단호하게 전화를 끊었을 뿐이다.전남편 따위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진심으로 우빈에게 옷을 사주고 싶다면 그녀가 아이의 사이즈까지 알려줬는데 왜 맞는 옷을 사지 못할까?어쨌거나 하예진은 그들 부부에게 우빈이를 절대 맡기지 않을 것이다.만약 그녀가 시간이 되면 함께 따라갈 순 있다.동물원 사건이 아직도 거대한 트라우마로 남아 그녀의 머릿속을 맴돈다. 생각만 하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지경이다.감히 그 뒷일을 상상할 엄두조차 안 난다.하예정이 배불리 먹은 후 노동명도 우빈의 자전거를 다 조립했다. 아이는 신나서 당장 나가 자전거를 탈 기세였다.노동명은 아이와 함께 마당으로 나가 자전거를 태워줬고 하예진도 따라 나갔다.하예정이 마당에 나왔을 때 우빈이는 벌써 자전거 타는 법을 다 배우고 콘크리트 바닥에서 쌩쌩 달렸다. 노동명이 사준 풍차를 자전거 앞머리에 꽂아두니 바람 따라 뱅글뱅글 돌아갔다.실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온 마당에 주우빈의 즐거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하예진은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찍었다.이때 노동명이 다가와 그녀와 나란히 섰다.“자전거가 클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딱 맞네. 조금만 더 컸더라면 우빈이가 페달에 발이 안 닿아서 못 탔을 거야.”“고마워요, 대
“대표님?”노동명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빤히 쳐다보자 하예진이 의아한 듯 그를 불렀다.노동명은 정신을 가다듬고 웃으며 답했다.“매일 봐서 아무 느낌 없다가 방금 보니 살 엄청 빠졌네. 얼굴도 예쁘고, 손은경 씨 못지않아.”노동명은 문득 저 자신이 멍청해 보였다. 어떻게 하예진을 손은경에 비할 수 있지?하예진이 웃으며 말했다.“칭찬 고마워요 대표님. 저는 그저 평범한 얼굴이에요. 손은경 씨야말로 미인이죠.”“예진아, 은경 씨는... 우리 엄마 친한 친구 딸이야. 관성에 출장 왔다가 우리 집에서 지내는 거야. 엄마가 딸처럼 예뻐하셔.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엔 아들만 넷이라 딸이 없는 게 엄마의 평생 한이야. 그래서 여자아이를 유난히 더 좋아해.”“전씨 할머니가 증손녀를 간절히 바라시는 만큼 우리 엄마도 여자아이를 원하셔. 두 분 실은 똑같아. 손은경 씨는 나보다 조금 어려. 어릴 때 봤는데 그다지 인상이 없어. 우리 집에서 지내는 한 손님이니 나도 가끔 함께해주는 거야. 아니, 함께하는 것도 아니지. 난 그저 엄마랑 함께 연회에 참석했고 엄마가 손은경 씨를 데려와서 춤 한 곡 같이 춘 거야.”노동명은 본능적으로 어젯밤에 손은경과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털어놨다.하예진이 그와 손은경을 커플로 부추기는 게 싫었나 보다.사실 하예진은 노동명과 손은경이 연회에 참석한 것도 몰랐고 함께 춤춘 건 더 몰랐다.하예정이 아직 언니에게 안 알렸고 알릴 기회도 없었으니까.눈 뜨자마자 언니가 왜 또 과음했냐며 나무랐고 그 뒤론 아래층에 내려가서 연회에 대해 얘기할 시간이 없었다.노동명의 말을 들은 후 하예진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사모님께서 손은경 씨를 무척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대표님 말을 들으니까 은경 씨랑 두 분 꽤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두 분 잘해봐요. 손은경 씨는 성격도 좋으시고 워낙 야무져서 사업에 성공할 여강자 스타일인 것 같아요.”노동명과도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았다.노동명이 솔직하게 말했다.“그건 그래. 손은경 씨는 여강자 스타일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