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우빈이가 장난감 못 놀게 해. 나, 우빈이 장난감 갖고 싶단 말이야.”임정한은 달려가 주서인의 옷을 잡아당기면서 장난감을 가져다 달라고 떼를 썼다.항상 자기 애만 보배처럼 여기고 다른 애들은 안중에도 없는 주서인이 우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우빈아, 네 장난감 형한테 줘.”“싫어요, 내 거예요!”우빈은 박스를 품에 꼭 껴안고 놓지 않았다.주서인이 우빈을 잡아당기려고 앞으로 다가가자 하예진이 손에 들었던 숟가락으로 그녀의 손목을 탁 내리쳤다. 아파 난 그녀는 바로 손을 움츠렸다.“너 지금 뭐 하는 거야?”하예진이 차갑게 말했다.“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이건 우빈의 장난감이에요. 우빈이가 정한이한테 주고 싶지 않다고 하잖아요. 안 주겠다는데 고모가 빼앗으려고요?”“...”주경진은 어두운 얼굴로 딸을 몇 마디 꾸짖었다. 그녀는 딸이 외손자를 데리고 구석으로 가자 비로소 미안한 말투로 하예진에게 말했다.“예진아, 우빈이가 장난감을 정한에게 주고 싶지 않다면 주지 않아도 돼. 우빈의 장난감이니.”“다들 무슨 일로 오신 거죠?”하예진이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묻자, 주형인이 바로 끼어들어 말했다.“어제 저녁에 아빠 엄마가 말씀하셨잖아, 오늘 우리가 우빈이 데리고 동물원에 호랑이 보러 갈 거라고. 우빈아, 아빠랑 동물원에 놀러 가지 않을래?”우빈이가 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아빠, 엄마도 같이 가요?”주형인이 하예진을 바라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엄마도 같이 가.”“예진아, 오늘 일찍 퇴근해. 여기서 동물원까지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리니, 우리 여기서 뭐 좀 먹고 동물원으로 바로 출발하자. 일찍 가면 애들도 오래 놀 수 있을 거야.”관성의 야생동물원은 규모가 매우 크고 동물들도 많이 있다.주형인이 하예진과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때 주말에 한번 동물원에 갔었는데, 그때 아직 미성년자인 하예정도 데리고 갔었다.원래 아들더러 전 시댁 식구들을 따라 동물원에 가라고 말하려던 하예진은 자기가 따라가지 않으면 아들이 임정한에게
하예정은 전태윤의 롤스로이스에 앉아 가게로 돌아왔다.마침 그녀가 도움을 청한 친구들이 완성된 공예품을 납품하러 오자 그녀는 꼼꼼히 확인한 후 잘 짰다고 칭찬하며 처음 약속대로 돈을 정산했다.“예정아, 우리가 집에서 애를 보면서 여가에 공예품을 짜 돈을 버니 이제는 가족들이 모두 지지해 줘. 우리 시어머니도 더 이상 나에게 눈치를 주지 않아.”“나도. 시어머니가 나를 도와 애를 봐주시겠다고 해서 정말 놀랐어. 예정아, 주문을 더 받아도 괜찮을 것 같아, 우린 모두 완성할 수 있어.”모두 처음에 함께 공예품 짜는 것을 배운 친구들이다. 비록 평소에 왕래가 잦지 않지만, 연락은 유지하고 있었다. 하예정의 지금 신분은 모두가 알고 있어 부러운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하예정이 배분해 준 일을 끝내면 돈을 받을 수 있는데, 이것은 집에서 애를 키우고 있는 주부들에게 매우 유혹적이었다.시댁 식구들은 그녀들이 전씨 가문 사모님을 위해 일하며 수입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대하는 태도가 훨씬 좋아졌다. 하예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작년부터 주문이 밀렸어. 게다가 지난번에 손을 다친 바람에 더 많이 밀렸었는데, 너희들이 도와줘서 다행이야. 내가 재료를 더 가져오고 손님이 주문한 제품 견본도 줄게.”“좋아.”이 말에 모두 너무 기뻤다.준비한 재료를 나누어 주고, 또 그녀들이 차례로 떠나는 것을 지켜본 하예정은 다시 택배를 연락하여 고객들에게 물건을 보냈다.일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한테 전화가 걸려왔다.“언니.”“이모.”전화가 연결되자 엄마의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는 우빈이가 맑은 목소리로 외쳤다.“이모, 우빈이예요.”하예정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이모는 우리 우빈의 목소리를 알아들었어, 이모가 보고 싶었어? 이모가 소현 이모 더러 오는 길에 우빈이 데리러 오라고 말했어.”“이모, 아빠가 나랑 엄마를 데리고 동물원에 놀러 간다고 했어요. 많은 사람이 같이 가요, 이모도 같이 가요.”우빈은 소현 이모가 데리러 온다는 말을 듣고 하
엄마의 머리카락만 잘렸을 뿐인데, 서현주는 너무 무서웠다. 그들이 친정 식구들의 목숨을 빼앗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테니.그녀는 결혼 후로부터 친정 식구들과 사이가 나빠졌지만, 그래도 자기 혈육들이 아무 관계도 없는 우빈이 때문에 위험을 당하는 건 원치 않았다.오늘은 계획을 실행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날이다.하예정이 우빈에게 물었다.“엄마도 가는 거야?”“네, 엄마도 가요.”“언제 떠나? 이모가 시간 되는지 보자.”“엄마가 30분 후면 출발할 수 있다고 했어요. 이모, 우리 같이 가요, 동물원에 가서 호랑이를 보고 싶어요.”우빈은 지난번에 동물원에 가려다가 후에 이모와 함께 외출하는 바람에 동물원에 가지 못한 일을 줄곧 기억하고 있었다.오늘 기회가 생겼으니 꼭 가고 싶었다.“그래, 이모도 같이 갈게.”하예정은 주 씨 가족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싫었지만, 언니가 걱정되었다.주 씨 가족은 우빈과 감정을 키워서 양육권을 빼앗으려는 것 같았다.온 집안의 사람들이 한 통속인데, 언니가 혼자 가면, 괴롭힘을 당할 것이 뻔하다.비록 큰 재주는 없지만, 전생에 복을 쌓은 덕에 이번 생에 전태윤과 결혼하게 되었으니, 전씨 가문 사모님의 신분으로 주 씨 가족들의 기를 누를 생각이었다.자기가 함께 가면, 주씨 가족들이 무슨 꿍꿍이가 있더라도 너무 건방지게 굴지는 못할 테니.주우빈이 신나서 웃었다.“이모, 빨리 와요. 방금 소현 이모도 왔어요, 나 소현 이모에게도 물어볼래요. 전화 끊을게요.”“그래, 이모도 곧 갈게.”우빈은 전화를 끊고 엄마에게 휴대폰을 돌려주고는 잽싸게 뛰쳐나갔다.성소현이 달려 나오는 우빈을 부르기도 전에 아이가 먼저 달려와 그녀의 다리를 덥석 껴안고는 잘생긴 작은 얼굴을 쳐들고 앙증맞은 목소리로 불렀다.“소현 이모.”우빈의 귀여운 얼굴을 바라보는 성소현은 마음이 사르륵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그녀는 허리를 굽혀 우빈을 껴안고 웃었다.“우리 우빈이, 소현 이모가 보고 싶어서 뛰어온 거야?”“소현 이모, 보고 싶었어요,
하예진으로부터 주씨 가족이 정말 나들이하러 온 것이라고 확인받은 성소현은 그제야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다만 그 미소는 우빈에게 보여주는 거지, 주씨 가족에게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다.그녀는 주씨 가족을 보기만 해도 싫었다.“우빈이가 동물원에 놀러 가고 싶다는데, 이모도 같이 놀러 가야지.”성소현은 조카의 초대에 흔쾌히 응했다.우빈은 아직 엄마, 아빠의 관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마음이 착한 하예진은 전 시댁에 아무리 불만이 많아도 아들 앞에서 주형인에 대해 험담을 하지 않는다.두 사람은 뭐라 해도 친부자 사이이니.아들 앞에서 친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은 아이에게 좋지 않고, 오히려 성장에 영향을 줄 수 있다.30분 후.하예정 자매는 우빈을 데리고 성소현의 차에 앉아 동물원으로 떠났다.뒤에는 하예정의 신변 보호를 하도록 안배한 두 명의 경호원이 경호차를 몰고 묵묵히 따랐고, 주 씨 가족은 두 대의 차에 나눠 타 경호차 뒤를 따랐다.서현주는 가는 내내 주형인에게 불만을 토했다.“우빈이와 친해지려고 그러는데 어머님은 뜬금없이 형님네 가족을 부르고, 우빈인 또 이렇게 많은 사람을 불러오고... 언제 우빈이와 친해지겠어요?”하 씨네 자매가 있으니, 우빈은 당연히 엄마와 이모 곁에 붙어있을 거다.차 뒷좌석에서 서현주의 잔소리를 들은 김은희가 툭 내쏘았다.“내가 네 돈을 쓰자고 형님네 가족을 부른 것도 아닌데, 뭔 말이 이렇게 많아? 싫으면 같이 가지 말든가, 가는 내내 시끄럽게 굴지 말고.”서현주가 고개를 돌렸다.“어머님, 방금 하신 말씀 잊지 마세요. 절대 형님네가 우리 형인 씨 돈을 쓰게 하지 말아요. 지금 형님네는 형인 씨보다 돈이 훨씬 많아요.”“형인의 돈을 쓰는 거지 네 돈을 쓰는 것도 아닌데. 지금 너도 내 아들 돈을 쓰고 있잖아?”아들이 서현주에게 돈을 맡긴 게 김은희는 가장 언짢았다.“형인씨와 나는 부부이고, 형인씨 돈은 내 돈이에요.”“그럼, 네 돈도 형인의 돈인데, 왜 넌 신혼집을 꾸밀 때 돈 안 냈냐? 예전에
하예정은 계속 우빈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사람들로 붐비는 동물원에는 우빈 또래의 어린애들도 매우 많았다.우빈을 따라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한 하예정은 동물원의 풍경을 감상할 마음이 없었다.하예진은 매일 우빈을 데리고 가게에 가고, 일이 끝나면 집에 데리고 가서 쉬느라 아들을 데리고 놀러 갈 시간이 전혀 없었다.지금 밖에 나오니, 우빈의 뛰어다니기 좋아하는 아이의 천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다행히 하예정은 산타 기술을 연마해 본 사람이라 체력이 좋았고 하예진도 다이어트를 하느라 오랫동안 달리기를 견지한 탓에 체력이 좋았다. 하지만 이렇게 돌아다니는 경우가 드문 성소현은 오래 걸으니 발바닥이 아파 났다.주씨 가족은 멀리 떨어져서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우빈은 신이 나서 어린이 놀이터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몇 번이나 놀이기구를 타고 나서야 이모에게 안겨서 동물들을 보러 갔다.동물원이 너무 커서 조류 코너를 둘러보고 나니 밥 먹을 시간이 다 되어서 일행은 식사하러 식당으로 들어갔다.“아빠는요?”“네게 그렇게 빨리 뛰는데 아빠가 어떻게 따라오겠어?”그제야 아빠가 생각난 우빈이가 사방을 둘러보니 정말 아빠가 보이지 않았다.“엄마, 아빠에게 전화해요.”하예진은 주형인에게 전화하는 시늉만 하고 나서 아들을 달랬다.“아빠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다른 곳에서 식사하신대. 조금 있으면 다 볼 수 있을 거야.”우빈은 엄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사실 주 씨 가족은 이미 그들의 앞에 있었다. 임정한이 어린이 놀이터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까운 주씨네는 이미 아이를 강제로 끌고 앞으로 걸어갔다.주형인과 다투고 나서 화가 난 서현주는 주씨 가족을 따돌리고 혼자 걸었다.생각밖에 주형인이 자기를 달래지 않자, 그녀는 주형인이 이젠 자기를 예뻐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전에 둘이 몰래 만날 때, 주형인은 그녀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주었었다. 혼인신고하여 와이프가 된 후에야 그녀는 자신이 점차 하예진이 예전에 겪었던 모든 것을 차례로 겪고
상대방은 나지막이 미안하다고 말한 후 잽싸게 그녀 손에 쪽지를 쑤셔 넣었다.서현주는 그 쪽지를 꽉 쥐고 있을 뿐 감히 사람들 앞에서 펼쳐볼 엄두가 안 났다.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도로표지판을 보고 근처에 화장실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도로표지판을 따라 화장실을 찾아서 안에 들어간 후 그녀는 황급히 쪽지를 펼쳐봤다.「해양관에서 공연 볼 때 우리가 혼란을 일으키고 그 틈에 아이를 안아갈 겁니다. 당신 임무는 저 사람들을 해양관으로 데려오는 거예요.」서현주는 쪽지를 확인하고 갈기갈기 찢어서 변기 물에 내렸다.오늘 함께 온 사람들도 많고 하예정 옆에 두 명의 경호원까지 따라붙어서 그들이 손을 쓰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뜻밖에도 해양관에서 공연할 때 작전을 수행하겠다고 한다.정말 성공할 수 있을까?서현주도 지금은 주씨네 가족과 함께 있지 않은데 하예정 자매는 더 말할 것도 없다.그녀는 화장실에서 나와 주형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주형인에게 현재 위치를 보내 달라고 말한 뒤 화를 억누르며 주씨네 가족과 합류했다.이어서 남편에게 하예진의 위치도 물어봤는데 본인들 뒤에 있다고 하자 일단 밥부터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 서현주는 기어코 레스토랑 근처에서 하예진 일행을 기다렸다가 다 함께 해양관에 들어가 공연을 보자고 했다.동물원에 놀러 온 사람들은 대부분 해양관에 가서 공연을 본다.하예정 일행도 우빈이를 데리고 해양관으로 갔다.“우빈아.”임정한도 오늘은 신나게 놀았다.“정한 형.”주우빈은 예의 바르게 임정한을 불렀고 임정한은 가까이 다가와 주우빈과 나란히 앉아서 좀 전에 무슨 동물을 구경했는지 재잘재잘 설명했다.어른들은 아예 두 아이를 나란히 앉혔다.임정한이 늘 주우빈을 괴롭힌 탓에 하예정은 일부러 우빈의 옆에 앉았고 하예진은 아들 뒤에서 지켜보았다.전씨 일가의 두 경호원도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앉았는데 공연을 보는 게 아니라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서현주도 딱히 공연을 볼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잔뜩 긴장한 채 주우빈만 자
하예진은 아들을 꼭 껴안았다.서현주는 우빈이가 하예진에게 안긴 채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해양관을 벗어나는 걸 보더니 계획이 실패했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정한아, 정한아!”이때 주서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갑자기 울려 퍼졌다.서현주가 정신 차리고 보니 덩치 큰 사내 한 명이 임정한을 안고 뛰어가는 중이었다.그녀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아이를 잘못 채가다니?“여보, 형인아, 얼른 저 사람 잡아요. 저 사람이 정한이를 안아갔단 말이에요!”주서인은 싸움 구경을 볼 겨를 없이 정한이를 안아간 남자를 뒤쫓으며 남편과 동생을 불렀다.주씨네 가족들도 정한이가 누군가에게 잡혀간 걸 발견하곤 미친 듯이 쫓아가고 싶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아이 뺏어가요! 누가 우리 아이 훔쳐 갔어요! 바로 저 덩치 큰 남자예요. 저 남자가 내 아들을 안아갔다고요!”안달이 난 주서인은 사색이 되었다.그녀는 인파를 헤쳐 나가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를 뿐이었다.장내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누군가가 아이를 뺏어갔다는 말을 듣더니 어린이와 함께 공연 보러 온 부모들은 재빨리 제 아이를 꼭 안고 해양관 밖으로 뛰쳐나갔다. 결국 장내가 더 혼잡해졌다.몇몇 착한 사람들은 주서인을 도와 아이를 구해오려고도 했다.그 남자는 임정한을 안고 미친 듯이 질주했고 누군가가 일부러 그에게 길을 내주며 더 빨리 해양관을 벗어나게 한 것만 같았다.“예진아, 예정 씨, 저 사람이 정한이를 뺏어갔어. 얼른 우리 정한이 구해줘.”주서인은 인파들 속에서 겨우 비집고 나와 하예진 자매를 보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지난날의 갈등이 얼마나 깊었던, 이런 일에 부딪힌 이상 하예정은 유괴범이 임정한을 훔쳐 가도록 가만둘 수 없었다.다만 그녀는 직접 임정한을 구하러 간 게 아니라 경호원들에게 그 남자를 쫓아가 임정한을 데려오라고 시켰다.두 경호원이 임정한을 채간 남자를 쫓으러 갔을 때 하예진은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품에 안긴 주우빈을 앗아가려고 하는 걸 느꼈다.그녀는 재빨
그녀가 만약 조금이라도 힘을 풀었다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아들을 빼앗겼을 것이다.성소현의 차에 탄 후에도 하예진은 감히 손을 내려놓지 못한 채 주우빈을 꼭 껴안고 사색이 되었다.하예정도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성소현은 큰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빠, 우리 집 모든 경호원들 지금 바로 관성야생동물원으로 오라고 해. 큰일 났어. 유괴범이 아이를 뺏어가는데 우빈이도 하마터면 뺏길 뻔했어. 얼른 이리로 우릴 데리러 와줘. 나 지금 운전할 엄두도 안 나. 가는 길에 또 누가 길을 막고 아이를 뺏어갈까 봐 두려워.”성소현은 처음 이런 혼잡하고 위험한 일에 부딪혔다.평소엔 거만하고 무서운 것 없는 사람처럼 보여도 방금 주우빈을 하마터면 놓칠 뻔했을 때 그녀는 식겁하여 다리에 힘이 풀렸다.만약 우빈이를 잃어버렸다면 그 당시 상황이 혼란스럽고 사람도 많아서 유괴범을 쫓아가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우빈이는...여기까지 생각한 성소현은 사색이 되었고 손발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도저히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어 사고가 날까 봐 핸들을 잡지 못했다.“뭐? 우빈이는 괜찮아? 지금 바로 경호원 데리고 갈게.”성기현도 주우빈이 하마터면 유괴될 뻔했단 말을 듣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는 이따가 중요한 회의가 있는 것도 막론하고 사무실을 뛰쳐나와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어서 동물원으로 총출동하라고 명령했다.한편 암암리에 하예정을 보호하던 두 명의 경호원은 진작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하예정도 마음을 가라앉힌 후 제일 먼저 남편에게 전화했다.성기현이 경호팀과 함께 동물원으로 향할 때 전태윤도 경호팀을 거느리고 동물원으로 출발했다.“우빈아.”하예정은 우빈의 등을 토닥이며 언니의 마음도 달랬다.“언니, 괜찮아. 응?”그녀는 방심하다가 하마터면 조카 우빈이를 위험에 처하게 할 뻔했다.“내가 힘이 세지 않았더라면 우빈이를 진작 빼앗겼을 거야. 그 사람도 엄청 세게 잡아당겼단 말이야.”하예진은 쉴 새 없이 되뇌었다.다이어트하느라 줄곧 운동하고 가게
“우리 가게에는 유아용 교재가 없어서요. 다른 문구 방에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하예정의 서점은 중학교 앞에 위치해 주 고객층이 중학생이었고 유치원용 책은 들여놓지 않았다.“아, 그렇군요. 그럼 잠시 후 다른 문구 방에 가봐야겠어요.”젊은 여자는 책값을 지불하고 책을 들고 나가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가게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하예정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아마도 전태윤과 함께 행사에 참석했을 때 스치듯 본 적이 있을지 몰랐지만 깊이 알지는 못해 기억나지 않는 것이라 여겼다.‘잠시 후 태윤 씨한테 물어봐야겠다. 어떤 가문일까? 장남은 결혼했고 작은아들은 중학생이고 막내딸은 유치원이라니...’젊은 여자는 스물한두 살쯤으로 보였고 남편도 젊을 가능성이 컸다. 하예정은 임신 전 상류층 모임에 자주 참석했지만 어느 집안 자제가 그렇게 일찍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그녀가 아는 젊은 여자들은 대체로 그보다 나이가 많았기에 방금 본 여자가 속한 가문은 아직 명문으로 자리 잡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여자의 차는 근처에 주차된 흰색 BMW7 시리즈였다. 차 앞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가 가까이 다가가자 두 남자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표했다. 그녀의 경호원과 운전기사인 듯했다.“출발하죠.”여자는 차에 올라 운전사에게 지시했다. 차가 멀리 떠난 후, 그녀는 가게 쪽을 돌아보았다. 하예정이 더 이상 자신을 보지 못할 거리라고 판단한 순간, 여자는 얼굴을 만지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젊은 여자는 바로 여씨 가문의 둘째 딸, 여운별이었다. 그녀는 현재 용태호의 스폰녀로 지내고 있었지만 사교계에서는 용씨 가문 사모님을 사칭하며 활동 중이었다. 이는 용태호가 모든 의심을 피하기 위해 마련한 조치였다.여운별은 용태호가 준 인피가면 덕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녀의 임무는 하예정에게 접근해 친구가 된 후 용정이라는
“저도 마음이 놓이네요. 엄마, 윤하가 아직 소 대표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은 거 맞죠? 제가 대신 받아주고 싶네요. 소씨네 식구들 성격이 다들 시원시원해서 우리 윤하한테 잘 맞는 거 같아요. 윤하도 덜렁덜렁 거리는게 저 집안과 바이브가 맞아요.”윤하 어머니는 혁진에게 말했다. “네 동생 일생의 큰 일이야. 우리가 잘 체크해주고 나머지는 윤하한테 맡겨야지. 지훈한테 시집가는 사람도 윤하도 한평생 같이 살 사람도 윤하 자신이니까 걔가 좋아야 되지. 그리고 윤하 다음은 너랑 혁주야. 너희 둘도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엄마, 저 쌀 씻으러 갈게요.” 윤하 어머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결혼 잔소리를 했고 혁진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런 혁진을 보고 어머니는 몇 마디 나무랐다.연성의 겨울은 눈 내린 광경을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관성은 아직도 최고 기온이 25도나 되는 여름이어서 길거리에는 반팔티를 입고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하예정은 서점에서 남편이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 두 사람은 관성 호텔에 가서 점심을 먹을 계획이었다.그녀는 이제 더 이상 공예품을 만들지 않았다. 온라인 쇼핑몰도 전에 그녀를 도왔던 아기엄마한테 양도했다.지금은 서점에서 일하고 있고 학생들이 수업이 끝나면 조금 바빠질 뿐, 다른 시간에는 아주 한가해서 옆 가게 탐방도 자주 하곤 했다. 비록 경호원들이 뒤따르지는 않지만 행여나 무슨 일이 생길까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심효진은 소설을 좋아해서 그녀가 서점을 지키고 있을 때는 하루 종일 앉아 소설을 읽곤 했다.하예정은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고전 작품 한 권을 골라 읽었지만 자꾸만 하품이 나와 결국 읽기를 포기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를 지나 책장 앞에 다가가 먼지털이로 책우의 먼지를 털기 시작했다. 사실 먼지가 별로 없었지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할 일을 찾아야 했다.그때, 밖으로부터 또깍또깍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처음 보는 젊은 부인이 서점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에르메스 백을 들고 있었고
혁진은 거실에서 지훈이 부모님이랑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지훈이 아버지는 성격이 아주 호탕한 분이셨다. 혁진이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두 사람은 말이 잘 통했다.지훈이 마침 아침밥을 들고나오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을 기세였다.지훈이 어머니는 그런 남편을 몇 번이나 눈치를 주었다.이 양반이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까먹은 거 아니야?여기는 윤하네 집, 예비 사돈댁이라고. 혁진은 예비 며느리 친오빠고, 두 사람이 형제를 맺으면 나중에 아들더러 어떻게 처신하라는 거야. 아주 그냥 엉망진창이네.“아버지, 어머니, 윤하 씨 어머님께서 아침을 준비해 주셨어요. 따뜻할 때 드세요. 저희는 이미 먹었어요.”지훈은 부모님을 주방으로 불렀다. “점심은 여기서 먹어요. 조금 있다가 윤하 씨랑 제가 장 봐 올게요.”지훈이 어머님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좋아, 나도 나가서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싶어. 지훈이 아버지, 당신도 같이 가요. 짐도 들어줄 겸.”남편의 의견을 물어보는 듯했지만 사실상 답정너였다. 집에 두고 갔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장 보고 돌아올 땐 이미 혁진이랑 형제를 맺었을지도 모른다.“그래요.”지훈이 아버지는 흔쾌히 대답했다.윤하 어머니는 주방에서 나오며 민망한 듯 말했다. “두 분께서 오시는 줄을 몰라서 제대로 준비 못 했어요. 점심에는 뭘 드시고 싶으세요? 말만 하세요, 제가 다 할 수 있어요. 가족이라 생각하고 편히 말씀하세요. 내외할 것 없어요.”지훈이 어머니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 저희 안 그래요. 이제는 가족이나 마찬가진데요. 저희는 뭐든 잘 먹어요. 아무거나 다 돼요.”“사돈, 윤하는 정말 훌륭한 아가씨예요. 저희 지훈이랑은 비교가 안 돼요. 지훈이 때문에 저희 두 사람 속 많이 태웠어요.”지훈이 어머니는 실수도 사돈이라고 불렀지만 윤하 어머니는 개의치 않았다. “과찬이세요. 저희 윤하도 속 썩일 때가 많았어요. 지훈이야말로 성숙하고 성격도 온화하고 너그럽고 유망한 청년이죠. 저희 윤하보다 훨씬 나은 걸
원래부터 지훈을 마음에 들어 하던 윤하 어머니는 지훈의 특별한 사정을 알고 나서 더욱 자신의 사윗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윤하와 결혼을 하게 되면 지훈은 그녀를 더욱 소중히 아낄 것이 분명했기에 윤하 어머니는 딸이 멀리 관성에 시집가서 마음고생할 거라는 걱정이 사라졌다.윤하와 어머니는 주방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지훈이 부모님을 대접할 아침을 준비했다.지훈도 주방으로 들어와 일손을 도왔다.“지훈 씨, 안 도와줘도 돼요. 가서 부모님이랑 얘기 나눠요.”윤하는 지훈을 밀어냈다.“부모님이 저더러 도와주라고 해서 들어왔는데 저를 또 저쪽으로 보내시면 어떻해요? 누구 장단에 맞춰야 해요? 아차! 아버님이랑 큰형님이 안 보이시는데 아직 주무시나요? 아니면 도장에 일찍 나가셨어요?”지훈은 그 두 사람이 보이지 않자 물어보았다. 아까는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두 사람 볼일이 있어서 아침 일찍 공항에 갔어. 이쯤 되면 아마 비행기에 올랐을 거야.”윤하 어머니가 대답했다.지훈은 별생각 없었다. 고백도 했고 부모님도 인사하러 오셨고 지금은 그저 윤하의 답변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사실 지훈도 내심 많이 긴장됐다.그도 윤하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옷도 사주고 고백 후에 도망치지도 않았기에 희망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윤하가 명확히 대답하기 전까지는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거절할 수도 있기에 두려웠다.윤하가 설령 거절한다고 해도 지훈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할 것이다.질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가 선택한 사람이라면 평생 그 한 사람한테만 마음을 줄 그런 사람이었다. “어머님, 준비 많이 하시지 마세요. 두 분 간단히 요기하면 돼요. 제가 이따가 두 분 호텔로 모셔다드릴 거예요. 거기서 식사하시면 돼요.”“귀한 손님들이 멀리서 오셨는데 점심은 내가 대접해야지. 외식할까 아니면 집에서 먹을까?”윤하 어머니는 물었다.“집에서 먹으면 윤하랑 혁진이는 오늘 도장 나가지 말고 장 좀 봐줘
윤하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윤하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 불감증?”“지훈 씨가 질병이 있는데 불감증이래요. 근데 나한테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이건 치료가 잘되지 않는 병이고요. 운명인가 보죠 뭐.”“오래 살고 볼 일이네. 이런 병은 또 처음 들어봤어. 그럼 네가 지훈이 한테 시집가면 걔가 변심할 걱정도 없고 바람피울 걱정도 없는 거잖아.”윤하는 대답했다. “뭐 그런 셈이죠. 지훈 씨가 그러는데 다른 여자들이랑 있을 때에는 진짜 아무 반응이 없대요. 부모님이 사정을 알고 나서 계속 선을 보게 했는데 지훈 씨가 안 나갔어요. 또 부모님이 젊은 여자들 사진도 많이 보여줬대요. 혹시나 병이 좀 나아질지 해서요. 그런데 아무 효과가 없는 거죠.”윤하는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을 모두 엄마에게 털어놨다.“지훈 씨 부모님이 마음이 급하셔서 지훈 씨가 어떤 여성분에게 눈길을 한 번 더 줬다 하면 혹시나 그 분한테 반응이 있는 걸까 하고 생각할 정도라고 하더라고요.”윤하 어머니는 들을수록 의아했다. “그럼 걔는 어떻게 너한테만은 다르다고 확신하는 거야? 너희 둘이 무슨 일 있었어?”윤하 어머니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윤하야, 지훈이가 너한테 진심이든 아니든 결혼하기 전까지는 순결을 지켜야 해. 여자는 자신을 아껴야지. 내가 책이랑 동영상에서 많이 봤는데 어떤 여자애들이 결혼하기 전에 임신하는 바람에 시댁에서 업신여겨 예물을 적게 주거나 아예 안 주는 집안도 있대. 이런 집에 시집가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을 거야.”“엄마가 옛날 사람이라서 요즘 젊은이의 사상을 못 따라는 게 아니라 딸 가진 엄마로서 내 딸이 시댁에서 업신여김을 당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야. 그러니 절대 결혼 전에 사고 치지 마. 약혼했다고 해도 안돼. 혼인 신고를 해야 법적으로 부부가 되는 거야. 그때가 되면 결혼식을 올리든 안 올리든 엄마도 관여하지 않을 거야.”윤하 어머니는 윤하가 충동적인 행동을 할까 봐 걱정했다. 윤하는 나이도 어리고 연애 경험이 적은 것에 비해 지훈은 비록 여자
지훈은 그저 그들에게 손주를 안겨주는 도구로 몰락할지도 모른다.“고구마가 이렇게나 많아요? 그럼 군고구마 만들어 먹어요. 밖에서 사면 한 개에 삼천 원 정도 하잖아요, 너무 비싸요.”윤하는 역시나 고구마를 보고 기뻐했다.윤하는 차 문이 열려있는 쪽으로 걸어가서 안을 들여다보고는 혀를 내둘렀다.”이게 전부 다 고구마예요?”고구마인지 곤약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도 물건들을 나르기 시작했다.곧 혁진이 도와주러 나왔다.그렇게 세 젊은이는 몇 번을 왕복해서 겨우 차 안에 가득했던 농산품들을 거실로 옮겨갔다. 값비싼 삼과 제비집도 그중 어느 안에 들어있었다.지훈은 부모님이 정말로 농산품만 갖고 온 줄 알았다.소씨 집안에서 가지고 온 선물들을 윤하 어머니께서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번 방문에서 아주 중요한 포인트었다.지훈이 부모님이 방문한 탓에 윤하와 혁진은 도장으로 가지 않고 집에서 접대를 도왔다. 소씨 가주 내외가 아침을 못 드신 걸 알고 윤하 어머니는 윤하와 함께 주방으로 들어가 아침 준비를 했다.윤하는 그 틈을 타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아버지랑 큰오빠는 이렇게 일찍 도장으로 나갔어요? 두 사람한테 전화했었는데 둘 다 안 받던데요.”윤하 어머니는 밖을 한번 힐끗 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아버지랑 혁주가 관성에 갔어. 지훈이 집안에 대해 좀 알아보려고. 근데 지훈이 부모님이 여기로 오실 줄 누가 알았겠니?”“저 아직도 고민 중인데 둘이서 벌써 관성에 갔다고요?”“그러니까 네가 고민이 끝나기 전에 미리 알아보는거지. 네가 시집살이 안 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시름 놓고 너희 둘을 미뤄줄 거 아니야.”윤하 어머니는 계속해서 말했다. “지훈이 부모님을 보니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 두 분이 너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소씨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처음 집에 인사 온다고 농산품들을 가지고 온 것 봐. 다 우리를 생각해서 그런 거잖아. 우리한테 맞춰주려고 한다는 것은 그만큼 너를 중요시한다는 거야. 그
사실 지훈도 부모님 몰래 일을 꾸몄으나 두 분이 보통 눈치가 빠른 사람이 아니라서 지훈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다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을 했다.집 문 앞에서 지켜보던 윤하 어머니는 딸과 함께 들어오는 두 사람의 얼굴이 지훈이랑 아주 비슷한 걸 보고 누군지 바로 알아챘다.그러고는 얼른 문을 활짝 열었다.지훈 어머니는 윤하 어머니를 보자마자 하마터면 사돈이라고 부를뻔했지만 너무 이른 감이 있어 당황하실까 봐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되려 삼켰다.윤하 어머니는 지훈의 부모님이 오실 줄은 생각 못 했다.아들과 남편이 방금전에 관성으로 출발했는데 두 분이 집에 찾아오시니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관성에서 두 사람에 대해 알아볼 때 마주치거나 들킬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정씨 집안 식구들은 지훈이 마음에 들었다. 지훈이 집안 사람들까지 인품이 좋으신 분이라면 멀기는 멀어도 윤하를 소씨 집안으로 시집 보낼 의향이 있었다.다만 걸리는 점이 있다면 바로 지훈의 질병이었다. 어젯밤, 두 형제는 지훈에게 이게 관해 물어보지 않았고 윤하도 가족들한테 말하지 않았다. 그저 윤하가 지훈을 대하는 태도에서 아마 큰 문제는 아닐 것이라고 윤하 어머니는 짐작했다.전에 질병이 있었다가 이제는 다 완치됐을 가능성도 있었다.두 집안 어르신이 만나고 나서 윤하 어머니는 지훈의 부모님 두 분 다 성격이 좋으시고 친근하신 걸 느꼈다.사돈 될 분들한테 부담이 될까 봐 일부러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왔다. 행여나 너무 부유해 보여 정씨 집안에서 윤하를 시집 안 보내겠다고 하면 아들이 손해 보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지훈의 부모님은 정씨 집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고 두 가문이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다.엄밀히 말하면 오히려 정씨 집안이 손해 보는 셈이었다. 지훈은 이제 중년이 다 된 아저씨이고 윤하는 아직 꽃다운 어린 아가씨이기 때문이다.지훈의 부모님은 소씨 집안 가주라는 기세 없이 자세를 낮추어 얘기했다.윤하 어머니와 혁진은 두 분을 대접하고 있고 윤하는 지훈을 도와 짐 나르러 갔
지훈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윤하 씨는 언제든지 예뻐요. 긴장하지 말아요, 저희 부모님 그렇게 어려운 분들 아니세요.”“긴장 안 했거든요. 처음 뵈는 자리니까 잘 꾸미지 않더라도 예의는 갖춰야 하니까요. 제가 문 열게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하는 지훈보다 먼저 뛰어가 문을 열었다.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문 앞에 서 있었다.윤하가 문을 열자 차에 앉아 계시던 분이 창문을 내리고 바로 차에서 내렸다.중년 여성분이셨는데 지훈과 많이 닮아서 누가 봐도 소지훈 어머니인 것을 알 수가 있었다.윤하는 내심 지훈의 어머니의 미모에 감탄하고 있었다. 관리를 아주 잘하셔서 겉보기에는 어머니가 아니라 누나같이 보일 정도였다.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으면 전혀 모자같이 보이지 않았다.지훈 어머니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걸어오며 물었다. “아가씨가 윤하 씨구나. 사진 본 적이 있어요. 나는 소지훈 엄마 되는 사람이에요.”“어머님, 안녕하세요.”윤하는 예의를 갖춰 인사를 했다. 지훈도 윤하를 따라 인사 한마디 건넸다.지훈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윤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번 훑어보고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예쁘고 아들이랑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지훈 어머니는 첫눈에 바로 윤하가 마음에 들었다.자기 아들을 구해준 유일한 여자애라고 생각해서 사진을 볼 때부터 이미 마음에 들었고 흡족해하셨다.지훈이 아버지도 차에서 내렸다.“윤하 씨, 안녕하세요, 저는 지훈이 애비되는 사람입니다.”지훈이 아버지는 평소에는 근엄하고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로 말하시지만 그 순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윤하는 아버님께도 인사를 건네고 두 분을 집안으로 모셨다. “아버님, 어머님, 빨리 집 안으로 들어가요, 밖이 추워요.”“좋아요.”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지훈의 아버지는 차 키를 아들에게 던져주고는 말했다.” 차 안에 있는 물건들 집으로 옮겨와.”“두 분 편히 오시면 돼요, 뭘 들고 오시지 마
지훈의 아버지는 시계를 보시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일찍 오긴 한 것 같아. 여름이면 이쯤 되면 꽤 많은 사람들이 일어났을 텐데. 차에서 조금 기다리다가 노크하러 갈까?”지훈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먼저 아들한테 전화를 걸어 일어나라고 해야겠어요.”그는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윤하와 입술이 닿는 그 순간, 고막을 찌르는 전화벨 소리가 울려 지훈은 단꿈에서 깨어났다. 지훈은 키스의 여운에 입술을 문지르다 정신이 번쩍 들어 그제야 자신이 꿈꾸었음을 알았다. 윤하는 지훈의 고백을 외면하지 않았지만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침 일찍부터 눈치 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달콤한 꿈이 산산조각 나자 지훈은 순간 화가 났다.핸드폰을 집어 든 지훈은 발신인을 확인하지 않고 쌀쌀한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 왜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전화를 거세요? 큰 일이 아니라면……”“아니면 어쩔 건데? 내가 누구냐고? 네 엄마야, 나 지금 윤하네 집 앞이야. 빨리 나와 문 열어. 아니면 내가 들어가서 혼쭐을 내줄 거니까.”지훈도 한 성깔 하는데 지훈의 어머니는 그보다도 한 수 위였다. 말 몇 마디로 바로 지훈을 수그러들게 했다.지훈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놀라서 물었다. “뭐라고요? 지금 집 앞이라고요? 아버지도 같이 있어요?”두 분이 오신다고는 했지만 진짜로 오실 줄 몰랐고 또 이렇게 일찍 올지도 몰랐다.“아버지도 옆에 계셔. 대문이 아직 안 열려있는 것을 보아하니 다들 아직 일어나지 않았나 보지? 아들, 우리가 너무 일찍 온 거 아니야?”지훈은 침대에서 굴러 내려오며 대답했다. “당연한 말씀을, 이 추운 날씨에 이렇게 일찍 오신 거예요? 아버지가 오신다고 하시더니 진짜로 오실 줄은 몰랐어요. 아직 이르다고 말했잖아요, 윤하 씨가 엄마아빠를 만나면 부담스러워할 거예요. 잠깐만 기다려봐요, 제가 내려가서 문 열어줄게요.”입으로는 툴툴거렸지만 정작 부모님들이 밖에서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지훈은 엄마에게 당부 몇 마디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