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 입구에서 임정한을 구하러 갔던 두 명의 경호원이 막 아이를 안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사모님.”두 경호원은 엄마를 외치며 울고불고 난리인 임정한을 안고 하예정 앞에 다가오더니 바닥에 내려놓으며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사모님, 얼른 이 아이 가족들한테 전화해서 아이 좀 데려가라고 하세요. 오는 내내 울었어요. 시끄러워 죽겠어요.”“예정 숙모.”임정한은 놀라서 엉엉 울었다.이 아이는 전씨 일가의 경호원도 본 적이 없는데 처음엔 낯선 이가 덥석 채가서 부리나케 달리더니 나중에 또 낯선 이에게 구원받았다. 평상시에 아무리 장난기가 심한 아이라 해도 이제 고작 네 살짜리 어린이였으니 놀랄 만도 했다.하예정은 유일하게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녀를 본 임정한은 재빨리 달려가 다리를 부둥켜안으며 얼른 안아달라고 졸랐다.“괜찮아.”하예정은 임정한을 매우 싫어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쩔 수 없이 다독여주었다.이어서 그녀는 주형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정한이 구했어요. 지금 동물원 입구에 있으니까 얼른 애 데리러 나와요들.”주씨네 가족들은 임정한을 잃어버린 일로 대성통곡하였고 김은희는 한번 기절했다가 누군가가 인중을 눌러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딸을 부둥켜안은 채 목청이 째지게 울었다.주형인과 임수찬은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유괴범이 아이를 안고 어디로 도망쳤는지 도통 알아낼 수가 없었다.하예정의 전화를 받은 주형인은 기쁜 마음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재빨리 누나네 부부에게도 이 소식을 전했다.전태윤과 성기현이 경호팀을 거느리고 동물원에 도착했을 때 주씨네 가족들도 부랴부랴 달려 나왔다.“정한아.”잃어버린 줄 알았던 아들을 되찾은 주서인은 미친 듯이 뛰쳐 가 아이를 와락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임수찬도 아들이 무사한 걸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김은희와 주서인은 임정한을 끌어안고 쉴 새 없이 울어댔다.한참 후에야 주서인은 털썩 무릎을 꿇고 하예정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감격에 겨운 말투로 말했다.“예정 씨, 고마워요. 정한이
하예정이 대답했다.“언니가 꼭 안고 있었고 내가 또 그 사람 발로 걷어차서 우빈이 뺏어가는 걸 아예 포기하고 줄행랑쳤어요.”그녀는 고개 돌려 성소현의 차를 가리키며 말했다.“우빈이는 지금 소현 언니 차에 있어요.”하예정과 전태윤의 대화를 들은 후에야 주씨네 가족들도 우빈이까지 하마터면 봉변당할 뻔했다는 걸 알아챘다.김은희는 또다시 울면서 손자 보러 가겠다고 했다.그제야 하예진은 우빈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우빈아, 우빈아.”김은희는 아이를 와락 끌어안고 손주 녀석이 정말 아무 일 없는지 확인한 후에야 울먹이며 말했다.“다행이야, 넌 괜찮으니 참 다행이야!”“할머니.”주우빈은 할머니께 대답하며 손을 들어 할머니의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었다.김은희는 우빈이를 키운 적이 없지만 이 아이는 유일한 친손주라 이쁘지 않을 수가 없다. 미세한 아이의 행동에 김은희는 감격에 겨워 또다시 아이를 안고 엉엉 울었다.주씨네 가족도 이쪽으로 둘러싸였다.“엄마, 울지 마. 이젠 다 괜찮아졌어.”주형인이 엄마를 위로했다.김은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눈물을 닦고 아들을 훅 밀쳤다.“이게 다 너희 둘 때문이야. 너희가 애들 데리고 동물원에 오자고만 안 했어도 이런 일 없을 거잖아. 우빈이가 예정 씨까지 불러왔으니 망정이지... 네가 우빈의 아빠가 아니고 정한의 외삼촌이 아니었다면 오늘은 아예 작정하고 아이 뺏어가려고 일부러 동물원 데려온 줄로 알겠어!”김은희의 질책에 서현주가 삽시에 낯빛이 창백해졌다.김은희가 그녀를 힐긋 노려보자 그녀는 겨우 변명을 둘러댔다.“어머님, 저도 우빈이랑 친해지려고 그런 건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김은희는 눈빛으로 그녀를 재수 없는 년이라고 욕하는 것만 같았다.아들이 서현주와 결혼하고 나서부터 뭐 하나 되는 일이 없고 어쩌다가 우빈이를 데리고 봄나들이 나왔더니 하마터면 나쁜 놈들에게 아이까지 유괴당할 뻔했다.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밀집한 장소에서 감히 아이를 뺏으려 하다니 거만함이 하늘을 찌를
하예정도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다.다만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의문점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네.”우빈이는 오늘 마음껏 놀지 못했다. 해양관에서 공연을 볼 때 한참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는데 엄마가 갑자기 꽉 끌어안고 허겁지겁 도망쳤다.전씨 일가의 경호원들은 병사처럼 두 쪽으로 나뉘어 서서 롤스로이스 앞에 길을 터주었고 전태윤은 우빈이를 안은 채 하예정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하예진은 동생을 따라가지 않고 선뜻 경호원 차에 탔다.성소현은 오빠 차에 앉았고 그녀의 차는 경호원이 대신 몰고 갔다.곧이어 두 기업 총수는 경호팀의 호송하에 관성야생동물원을 떠났다.그들이 떠난 후에야 서현주는 한숨을 돌릴 겨를이 생겼다.다들 자신을 의심할까 봐 줄곧 전전긍긍하고 있었다.가는 길에서 하예정이 남편에게 물었다.“태윤 씨, 오늘 일 너무 수상해요. 마치 일부러 꾸며진 거대한 음모 같아요. 먼저 현장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아이를 낚아채 가는 계략인 것 같아요. 정한이는 그때 어른들에게 안겨 있지 않아 놈들이 잡아갔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일반 유괴범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우빈이는 줄곧 언니가 안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감히 뺏어가려 하다니, 내가 볼 때 놈들의 진짜 타깃은 우빈인 것 같아요.”“정한이를 데려간 건 작전을 살짝 바꾸어 목적에 도달하려는 속셈이에요. 내 옆엔 늘 두 명의 경호원이 함께 있어서 놈들이 쉽게 손댈 수 없었어요. 정한이를 채가면 내가 비록 말괄량이 같은 그 아이를 싫어해도 가만있지만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겠죠. 내가 정한이 구하러 두 경호원을 보냈고 우리 신변을 보호하는 사람은 없었어요.”“물론 우리도 다 큰 어른이지만 연약한 세 여자라 놈들이 작정하고 달려들면 우린 반항할 힘이 없어요. 그렇게 되면 놈들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겠죠. 장내가 어수선하다 보니 어떤 부모들은 본인 아이를 제때 안지 못해서 애들이 제멋대로 뛰어다녔어요. 놈들은 그 혼잡한 상황에서도 다른 아이들은 채가지 않았어요.”하예정은 생각이
전태윤이 아내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관성에서 모르는 자가 없다.하예정에게 문제가 생기는 건 그의 목숨을 앗아가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다.“여씨 사모님이 꾸민 일 아닐까요?”하예정은 여씨 사모님부터 생각났다.전태윤은 잠시 침묵한 후 말을 이었다.“그건 아직 단정 짓기 어렵지만 그때 네가 여운별과 갈등을 빚은 이후로 소정남을 시켜서 여 대표 부부를 감시했는데 아무 이상 없었어. 예정아, 이번 일은 조사를 좀 해봐야 배후 세력이 널 겨냥하는 건지 아니면 나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전태윤은 우빈이를 옆에 내려놓고 팔을 벌려 그녀를 품에 껴안았다.“두려울 거 없어. 내가 있는 한 사람들은 네 털끝 하나 못 건드려.”하예정은 고개 들어 그를 쳐다보며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만약 태윤 씨를 겨냥한 거라면... 꼭 조심해야 해요.”“나는 신분 때문에 누군가에게 감시받을 각오가 되어있어. 진작 적응된 일이니 걱정 마. 아무 일 없을 거야.”전씨 일가의 자제들은 비즈니스 업계에 들어서기 전에 철통보호를 받아 외부에서 그들의 이름조차 몰랐다.경계해야 할 건 강도들이다.전태윤과 동생들 일행은 어려서부터 복싱, 주짓수 등 여러 가지 재주를 배웠는데 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외출할 때 경호원들이 항상 따라다니긴 하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자아 보호 능력을 키웠다.하예정은 그의 품에 기댔다.“음모가 아니라 뜻밖의 사고였으면 좋겠어요.”뜻밖의 사고라면 그들이 운이 나빠서 유괴범에게 눈도장을 찍혔다고 설명할 수 있지만 음모라면, 배후 세력은 이번에 실패하고 추후에 성공할 때까지 수없이 계략을 피울 것이다.“오늘 사태가 너무 크게 번져서 음모라 해도 배후 세력은 단기간 안에 감히 더는 손을 쓰지 못할 거야.”주우빈은 이모와 이모부가 한쪽 옆에 내버려두자 손을 벌려 전태윤의 품에 안긴 하예정을 밀쳤다. 하예정이 어리둥절해서 바르게 앉자 우빈이는 재빨리 전태윤의 다리 위에 올라가 앉았다.아
“다들 만약 일반인이라면 무예를 배우든 말든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우빈이가 조금이라도 배워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해.”전태윤은 조카 우빈이를 늘 좋게 보고 있다. 이 아이는 분명 될 놈이라 좀 더 크면 제대로 가르칠 작정이었다.지금은 단지 호신술 정도로만 가르칠 뿐이다.“하긴, 태윤 씨 말대로 해요. 고마워요, 여보.”전태윤은 우빈이를 문무를 두루 겸비한 인재로 배양하고 싶었다. 하예정은 조카 대신 뿌듯함을 느끼며 진심 어린 고마움을 표했다.전태윤은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콧등을 살짝 어루만졌다.“평상시엔 태윤 씨, 태윤 씨 하더니 우빈이한테 전문가 선생님을 찾아준다니까 금세 여보라고 하네. 우빈이가 나보다 더 중요한 거야?”하예정이 웃으며 답했다.“똑같이 중요해요, 아니, 태윤 씨가 더 중요해요. 엄청 소중하죠.”그녀는 일부러 강조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전태윤도 장난치는 그녀의 말투를 잘 알고 있지만 사랑스러운 눈길로 또다시 그녀의 콧등을 어루만졌다.“난 우빈이는 질투 안 해.”“다행이네요. 세 살짜리 아이도 질투하면 앞으로 우리 애가 생기거든 종일 질투만 하다 말겠어요.”“내 아이는 사랑해 주는 것만으로도 바빠. 어떻게 아기를 질투하겠어.”전태윤은 아이가 생기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줄 것만 같았다.물론 생각은 생각일 뿐, 그때 가서 질투할지 말지는 단정 짓기 어렵다.하예정은 실소를 터트렸다.유난히 소유욕이 강한 전태윤이 아기를 질투하지 않을 리가 있을까?시내로 돌아온 후 전태윤은 하예진 자매를 발렌시아 아파트로 바래다주었다. 할머니는 어느새 이 일을 아시고 아파트에서 기다리고 계셨다.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할머니는 얼른 마중 나오며 하예정의 손을 잡은 우빈이를 덥석 안아 올렸다.“다행이야, 참 다행이지 그래...”할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행이란 말만 반복했다.성기현 남매도 잇따라 발렌시아 아파트로 돌아왔다. 성기현과 전태윤은 줄곧 서로 등져있다가 이번 일
두 사람은 이제 막 쇼핑 다녀왔는지 손은경이 한 손으로 윤미라의 팔짱을 끼고 다른 손엔 쇼핑백을 몇 개 들고 있었다.“동명아, 어디 나가려고?”윤미라는 아들을 보자 자연스럽게 물었다.“네, 엄마. 왔어요 은경 씨?”노동명은 간단하게 인사를 마친 후 엄마에게 말했다.“급한 일이 생겨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엄마랑 은경 씨랑 함께할 것 같지 못하니 사무실에서 기다리실래요 아니면 집에 돌아가실래요?”“무슨 일인데 이렇게 급해?”윤미라가 관심 조로 물었다.“있어요, 그런 일.”노동명이 아무리 데면데면한 성격이라 해도 엄마한테 수중의 업무를 뿌리치고 우빈이 보러 간다고 말할 리는 없었다.엄마가 괜히 그와 하예진을 오해하면 안 되니까.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가 하예진을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다.노동명은 진짜 우빈이란 아이가 좋아서 그런 거라고 말했지만 아무도 안 믿었다. 그가 우빈이랑 먼저 친해져서 자연스럽게 새아빠 자리를 차지하는 거로 추측했다.“회사 일이야?”윤미라가 재차 물었다.노동명은 거짓말을 둘러댔다.“네, 엄마. 나 먼저 가요.”“그래, 볼일 봐. 저녁에 집에 와서 밥 먹어. 은경이가 너 입으라고 새 옷 몇 벌 샀어. 집에 와서 밥 먹을 때 사이즈가 맞는지 한번 입어 봐. 밥 먹으러 안 오면 내일부터 은경이더러 매일 너 도시락 싸주라고 할 거야.”윤미라는 제 아들을 아주 잘 알고 있다.지금은 손은경에게 아무 감정이 없어서 그녀가 매일 귀찮게 구는 걸 싫어하지만 이런 식으로 협박하면 무조건 밥 먹으러 집에 돌아올 것이다.“그리고 태윤이네 집에 너무 오래 있지 마. 걔네 한창 달콤한 신혼생활 보내는 중인데 네가 있으면 방해밖에 더 돼? 넌 집 없니? 지낼 곳이 없어? 왜 굳이 태윤이네 집으로 가? 오늘 밤에 당장 집으로 돌아와.”노동명이 말했다.“태윤이랑 예정 씨는 혼인 신고한 지도 반년이 됐어요. 뜨거운 신혼은 진작 지났다고요.”“부부 금실이 좋아서 매일 신혼이면 안 돼? 너 뭐 불만 있어?”“...”“집에 안 돌아
“제가 요즘 결혼 준비도 해야 하고 곧 있으면 결혼 휴가라 대표님 곁에 사람이 비어있으면 안 되잖아요.”비서는 빈틈없이 완벽하게 대답했다.손은경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노동명은 자리를 떠난 후 엄마와 손은경이 비서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을 줄은 몰랐다. 다행히 그의 비서가 빈틈없이 차분하게 대답하여 윤미라의 의심을 사지 않았다.한편 동물원의 돌발상황도 두 사람과 상관없는 일이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우빈이가 발렌시아 아파트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노동명은 곧장 발렌시아 아파트로 향했다.집에 도착하니 전태윤과 성기현은 없었고 몇몇 여자들만 안에 있었다.성소현도 자리에 함께했다.노동명은 하예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가 전화를 받자 노동명이 물었다.“예진아, 우빈이랑 아직도 예정 씨 집에 있어?”“네, 예정이가 밥 다 먹고 우릴 집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했어요. 무슨 일이에요 대표님?”“오늘 일 전해 들었어.”노동명이 차분하고 온화하게 말했다.“뉴스까지 났더라고. 나도 뉴스 보고 알았어. 방금 태윤이한테 전화해서 우빈이 괜찮다는 걸 알았는데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서 아이 보려고 왔어. 나 지금 발렌시아 아파트 입구야. 마중 나올 수 있어?”하예진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뉴스까지 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듯싶었다. 그 당시 혼잡한 상황에서 아이까지 유괴당하는 사태가 벌어지니 뉴스에 날 법도 했다.노동명이 우빈이라고 예측한 것도 아마 성기현과 전태윤 두 기업 총수가 동시에 나타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기 때문이다.“알았어요.”노동명이 우빈이가 걱정돼 친히 아이를 보러 왔다는데 하예진은 그를 문전박대할 리가 없었다.“몇 분만 기다리세요, 지금 바로 나갈게요.”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동생에게 말했다.“예정아, 너희 집 키랑 출입문 카드 좀 줘. 내가 나가서 노 대표님 모셔 와야겠어. 우빈이 보러 왔대.”하예정은 집 키와 출입문 카드를 언니에게 건넸다.하예진이 나간 후 성소현이 말했다.“예정아, 노 대표님 진짜 우빈이 많이 관심하
“에헴...”할머니가 마른기침하자 노동명은 곧바로 시선을 옮겼다.“동명아, 우빈이 나쁜 놈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 너 때문에 놀라겠어. 어서 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것 좀 봐.”“아저씨, 나 좀 풀어줘요.”우빈이가 또다시 요구했다.녀석은 잔뜩 화나서 얼굴이 빨개졌다.아저씨의 힘이 워낙 세다 보니 아이는 도저히 그의 품에서 벗어나질 못했다.노동명은 황급히 그를 내려주곤 잇따라 쪼그리고 앉아 아이의 어깨를 꽉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우빈이 무사하면 됐어. 아무 일 없어서 참 다행이야.”우빈이는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노동명을 빤히 쳐다봤다.동명 아저씨는 사실 그에게 참 잘해준다.우빈이는 아저씨의 진심이 느껴졌다. 장난치며 그를 즐겁게 해주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을 좋아해 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우빈이는 작은 손을 들어 노동명의 얼굴에 난 칼자국을 가볍게 어루만지더니 무서운 듯 바로 손을 거두어들였다. 노동명이 아픈 내색이 없자 아이는 다시 작은 손을 꺼내 칼자국을 쓰다듬었다.“아저씨 아파요?”“이젠 안 아파.”그해 다쳤을 땐 엄청 고통스럽고 피로 얼굴을 물들여서 윤미라를 바닥에 주저앉게 했다. 아들이 극심한 상처로 죽는 건 아닌지 두려움에 휩싸였다.엄마인 윤미라뿐만 아니라 모든 이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몸이 편찮은 그의 할머니는 상처 입은 그의 모습에 하마터면 숨넘어갈 뻔했다. 비록 그 후에 얼굴만 다친 거라고 알게 되었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아 병세가 더 위독해지셨고 얼마 못 가 숨을 거두었다.노동명은 그제야 후회가 밀려와 모든 일을 접고 그 바닥에서 깨끗이 손 씻은 후 새출발 하기로 했다.칼자국은 줄곧 함께했다. 그건 노동명의 젊은 시절 패기이고 그의 반항으로 할머니를 일찍 여읜 죄의 대가이다.의사가 말하길 몸조리를 잘하고 건강을 신경 쓰면 할머니는 3년에서 5년은 더 살 수 있다고 했다...할머니는 죽기 직전까지 여전히 이 손자가 제일 걱정됐다.손자의 얼굴에 난 칼자국을 쓰다듬으며 뭐라 말
“우리 가게에는 유아용 교재가 없어서요. 다른 문구 방에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하예정의 서점은 중학교 앞에 위치해 주 고객층이 중학생이었고 유치원용 책은 들여놓지 않았다.“아, 그렇군요. 그럼 잠시 후 다른 문구 방에 가봐야겠어요.”젊은 여자는 책값을 지불하고 책을 들고 나가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가게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하예정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아마도 전태윤과 함께 행사에 참석했을 때 스치듯 본 적이 있을지 몰랐지만 깊이 알지는 못해 기억나지 않는 것이라 여겼다.‘잠시 후 태윤 씨한테 물어봐야겠다. 어떤 가문일까? 장남은 결혼했고 작은아들은 중학생이고 막내딸은 유치원이라니...’젊은 여자는 스물한두 살쯤으로 보였고 남편도 젊을 가능성이 컸다. 하예정은 임신 전 상류층 모임에 자주 참석했지만 어느 집안 자제가 그렇게 일찍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그녀가 아는 젊은 여자들은 대체로 그보다 나이가 많았기에 방금 본 여자가 속한 가문은 아직 명문으로 자리 잡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여자의 차는 근처에 주차된 흰색 BMW7 시리즈였다. 차 앞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가 가까이 다가가자 두 남자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표했다. 그녀의 경호원과 운전기사인 듯했다.“출발하죠.”여자는 차에 올라 운전사에게 지시했다. 차가 멀리 떠난 후, 그녀는 가게 쪽을 돌아보았다. 하예정이 더 이상 자신을 보지 못할 거리라고 판단한 순간, 여자는 얼굴을 만지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젊은 여자는 바로 여씨 가문의 둘째 딸, 여운별이었다. 그녀는 현재 용태호의 스폰녀로 지내고 있었지만 사교계에서는 용씨 가문 사모님을 사칭하며 활동 중이었다. 이는 용태호가 모든 의심을 피하기 위해 마련한 조치였다.여운별은 용태호가 준 인피가면 덕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녀의 임무는 하예정에게 접근해 친구가 된 후 용정이라는
“저도 마음이 놓이네요. 엄마, 윤하가 아직 소 대표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은 거 맞죠? 제가 대신 받아주고 싶네요. 소씨네 식구들 성격이 다들 시원시원해서 우리 윤하한테 잘 맞는 거 같아요. 윤하도 덜렁덜렁 거리는게 저 집안과 바이브가 맞아요.”윤하 어머니는 혁진에게 말했다. “네 동생 일생의 큰 일이야. 우리가 잘 체크해주고 나머지는 윤하한테 맡겨야지. 지훈한테 시집가는 사람도 윤하도 한평생 같이 살 사람도 윤하 자신이니까 걔가 좋아야 되지. 그리고 윤하 다음은 너랑 혁주야. 너희 둘도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엄마, 저 쌀 씻으러 갈게요.” 윤하 어머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결혼 잔소리를 했고 혁진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런 혁진을 보고 어머니는 몇 마디 나무랐다.연성의 겨울은 눈 내린 광경을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관성은 아직도 최고 기온이 25도나 되는 여름이어서 길거리에는 반팔티를 입고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하예정은 서점에서 남편이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 두 사람은 관성 호텔에 가서 점심을 먹을 계획이었다.그녀는 이제 더 이상 공예품을 만들지 않았다. 온라인 쇼핑몰도 전에 그녀를 도왔던 아기엄마한테 양도했다.지금은 서점에서 일하고 있고 학생들이 수업이 끝나면 조금 바빠질 뿐, 다른 시간에는 아주 한가해서 옆 가게 탐방도 자주 하곤 했다. 비록 경호원들이 뒤따르지는 않지만 행여나 무슨 일이 생길까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심효진은 소설을 좋아해서 그녀가 서점을 지키고 있을 때는 하루 종일 앉아 소설을 읽곤 했다.하예정은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고전 작품 한 권을 골라 읽었지만 자꾸만 하품이 나와 결국 읽기를 포기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를 지나 책장 앞에 다가가 먼지털이로 책우의 먼지를 털기 시작했다. 사실 먼지가 별로 없었지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할 일을 찾아야 했다.그때, 밖으로부터 또깍또깍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처음 보는 젊은 부인이 서점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에르메스 백을 들고 있었고
혁진은 거실에서 지훈이 부모님이랑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지훈이 아버지는 성격이 아주 호탕한 분이셨다. 혁진이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두 사람은 말이 잘 통했다.지훈이 마침 아침밥을 들고나오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을 기세였다.지훈이 어머니는 그런 남편을 몇 번이나 눈치를 주었다.이 양반이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까먹은 거 아니야?여기는 윤하네 집, 예비 사돈댁이라고. 혁진은 예비 며느리 친오빠고, 두 사람이 형제를 맺으면 나중에 아들더러 어떻게 처신하라는 거야. 아주 그냥 엉망진창이네.“아버지, 어머니, 윤하 씨 어머님께서 아침을 준비해 주셨어요. 따뜻할 때 드세요. 저희는 이미 먹었어요.”지훈은 부모님을 주방으로 불렀다. “점심은 여기서 먹어요. 조금 있다가 윤하 씨랑 제가 장 봐 올게요.”지훈이 어머님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좋아, 나도 나가서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싶어. 지훈이 아버지, 당신도 같이 가요. 짐도 들어줄 겸.”남편의 의견을 물어보는 듯했지만 사실상 답정너였다. 집에 두고 갔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장 보고 돌아올 땐 이미 혁진이랑 형제를 맺었을지도 모른다.“그래요.”지훈이 아버지는 흔쾌히 대답했다.윤하 어머니는 주방에서 나오며 민망한 듯 말했다. “두 분께서 오시는 줄을 몰라서 제대로 준비 못 했어요. 점심에는 뭘 드시고 싶으세요? 말만 하세요, 제가 다 할 수 있어요. 가족이라 생각하고 편히 말씀하세요. 내외할 것 없어요.”지훈이 어머니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 저희 안 그래요. 이제는 가족이나 마찬가진데요. 저희는 뭐든 잘 먹어요. 아무거나 다 돼요.”“사돈, 윤하는 정말 훌륭한 아가씨예요. 저희 지훈이랑은 비교가 안 돼요. 지훈이 때문에 저희 두 사람 속 많이 태웠어요.”지훈이 어머니는 실수도 사돈이라고 불렀지만 윤하 어머니는 개의치 않았다. “과찬이세요. 저희 윤하도 속 썩일 때가 많았어요. 지훈이야말로 성숙하고 성격도 온화하고 너그럽고 유망한 청년이죠. 저희 윤하보다 훨씬 나은 걸
원래부터 지훈을 마음에 들어 하던 윤하 어머니는 지훈의 특별한 사정을 알고 나서 더욱 자신의 사윗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윤하와 결혼을 하게 되면 지훈은 그녀를 더욱 소중히 아낄 것이 분명했기에 윤하 어머니는 딸이 멀리 관성에 시집가서 마음고생할 거라는 걱정이 사라졌다.윤하와 어머니는 주방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지훈이 부모님을 대접할 아침을 준비했다.지훈도 주방으로 들어와 일손을 도왔다.“지훈 씨, 안 도와줘도 돼요. 가서 부모님이랑 얘기 나눠요.”윤하는 지훈을 밀어냈다.“부모님이 저더러 도와주라고 해서 들어왔는데 저를 또 저쪽으로 보내시면 어떻해요? 누구 장단에 맞춰야 해요? 아차! 아버님이랑 큰형님이 안 보이시는데 아직 주무시나요? 아니면 도장에 일찍 나가셨어요?”지훈은 그 두 사람이 보이지 않자 물어보았다. 아까는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두 사람 볼일이 있어서 아침 일찍 공항에 갔어. 이쯤 되면 아마 비행기에 올랐을 거야.”윤하 어머니가 대답했다.지훈은 별생각 없었다. 고백도 했고 부모님도 인사하러 오셨고 지금은 그저 윤하의 답변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사실 지훈도 내심 많이 긴장됐다.그도 윤하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옷도 사주고 고백 후에 도망치지도 않았기에 희망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윤하가 명확히 대답하기 전까지는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거절할 수도 있기에 두려웠다.윤하가 설령 거절한다고 해도 지훈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할 것이다.질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가 선택한 사람이라면 평생 그 한 사람한테만 마음을 줄 그런 사람이었다. “어머님, 준비 많이 하시지 마세요. 두 분 간단히 요기하면 돼요. 제가 이따가 두 분 호텔로 모셔다드릴 거예요. 거기서 식사하시면 돼요.”“귀한 손님들이 멀리서 오셨는데 점심은 내가 대접해야지. 외식할까 아니면 집에서 먹을까?”윤하 어머니는 물었다.“집에서 먹으면 윤하랑 혁진이는 오늘 도장 나가지 말고 장 좀 봐줘
윤하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윤하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 불감증?”“지훈 씨가 질병이 있는데 불감증이래요. 근데 나한테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이건 치료가 잘되지 않는 병이고요. 운명인가 보죠 뭐.”“오래 살고 볼 일이네. 이런 병은 또 처음 들어봤어. 그럼 네가 지훈이 한테 시집가면 걔가 변심할 걱정도 없고 바람피울 걱정도 없는 거잖아.”윤하는 대답했다. “뭐 그런 셈이죠. 지훈 씨가 그러는데 다른 여자들이랑 있을 때에는 진짜 아무 반응이 없대요. 부모님이 사정을 알고 나서 계속 선을 보게 했는데 지훈 씨가 안 나갔어요. 또 부모님이 젊은 여자들 사진도 많이 보여줬대요. 혹시나 병이 좀 나아질지 해서요. 그런데 아무 효과가 없는 거죠.”윤하는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을 모두 엄마에게 털어놨다.“지훈 씨 부모님이 마음이 급하셔서 지훈 씨가 어떤 여성분에게 눈길을 한 번 더 줬다 하면 혹시나 그 분한테 반응이 있는 걸까 하고 생각할 정도라고 하더라고요.”윤하 어머니는 들을수록 의아했다. “그럼 걔는 어떻게 너한테만은 다르다고 확신하는 거야? 너희 둘이 무슨 일 있었어?”윤하 어머니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윤하야, 지훈이가 너한테 진심이든 아니든 결혼하기 전까지는 순결을 지켜야 해. 여자는 자신을 아껴야지. 내가 책이랑 동영상에서 많이 봤는데 어떤 여자애들이 결혼하기 전에 임신하는 바람에 시댁에서 업신여겨 예물을 적게 주거나 아예 안 주는 집안도 있대. 이런 집에 시집가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을 거야.”“엄마가 옛날 사람이라서 요즘 젊은이의 사상을 못 따라는 게 아니라 딸 가진 엄마로서 내 딸이 시댁에서 업신여김을 당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야. 그러니 절대 결혼 전에 사고 치지 마. 약혼했다고 해도 안돼. 혼인 신고를 해야 법적으로 부부가 되는 거야. 그때가 되면 결혼식을 올리든 안 올리든 엄마도 관여하지 않을 거야.”윤하 어머니는 윤하가 충동적인 행동을 할까 봐 걱정했다. 윤하는 나이도 어리고 연애 경험이 적은 것에 비해 지훈은 비록 여자
지훈은 그저 그들에게 손주를 안겨주는 도구로 몰락할지도 모른다.“고구마가 이렇게나 많아요? 그럼 군고구마 만들어 먹어요. 밖에서 사면 한 개에 삼천 원 정도 하잖아요, 너무 비싸요.”윤하는 역시나 고구마를 보고 기뻐했다.윤하는 차 문이 열려있는 쪽으로 걸어가서 안을 들여다보고는 혀를 내둘렀다.”이게 전부 다 고구마예요?”고구마인지 곤약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도 물건들을 나르기 시작했다.곧 혁진이 도와주러 나왔다.그렇게 세 젊은이는 몇 번을 왕복해서 겨우 차 안에 가득했던 농산품들을 거실로 옮겨갔다. 값비싼 삼과 제비집도 그중 어느 안에 들어있었다.지훈은 부모님이 정말로 농산품만 갖고 온 줄 알았다.소씨 집안에서 가지고 온 선물들을 윤하 어머니께서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번 방문에서 아주 중요한 포인트었다.지훈이 부모님이 방문한 탓에 윤하와 혁진은 도장으로 가지 않고 집에서 접대를 도왔다. 소씨 가주 내외가 아침을 못 드신 걸 알고 윤하 어머니는 윤하와 함께 주방으로 들어가 아침 준비를 했다.윤하는 그 틈을 타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아버지랑 큰오빠는 이렇게 일찍 도장으로 나갔어요? 두 사람한테 전화했었는데 둘 다 안 받던데요.”윤하 어머니는 밖을 한번 힐끗 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아버지랑 혁주가 관성에 갔어. 지훈이 집안에 대해 좀 알아보려고. 근데 지훈이 부모님이 여기로 오실 줄 누가 알았겠니?”“저 아직도 고민 중인데 둘이서 벌써 관성에 갔다고요?”“그러니까 네가 고민이 끝나기 전에 미리 알아보는거지. 네가 시집살이 안 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시름 놓고 너희 둘을 미뤄줄 거 아니야.”윤하 어머니는 계속해서 말했다. “지훈이 부모님을 보니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 두 분이 너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소씨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처음 집에 인사 온다고 농산품들을 가지고 온 것 봐. 다 우리를 생각해서 그런 거잖아. 우리한테 맞춰주려고 한다는 것은 그만큼 너를 중요시한다는 거야. 그
사실 지훈도 부모님 몰래 일을 꾸몄으나 두 분이 보통 눈치가 빠른 사람이 아니라서 지훈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다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을 했다.집 문 앞에서 지켜보던 윤하 어머니는 딸과 함께 들어오는 두 사람의 얼굴이 지훈이랑 아주 비슷한 걸 보고 누군지 바로 알아챘다.그러고는 얼른 문을 활짝 열었다.지훈 어머니는 윤하 어머니를 보자마자 하마터면 사돈이라고 부를뻔했지만 너무 이른 감이 있어 당황하실까 봐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되려 삼켰다.윤하 어머니는 지훈의 부모님이 오실 줄은 생각 못 했다.아들과 남편이 방금전에 관성으로 출발했는데 두 분이 집에 찾아오시니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관성에서 두 사람에 대해 알아볼 때 마주치거나 들킬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정씨 집안 식구들은 지훈이 마음에 들었다. 지훈이 집안 사람들까지 인품이 좋으신 분이라면 멀기는 멀어도 윤하를 소씨 집안으로 시집 보낼 의향이 있었다.다만 걸리는 점이 있다면 바로 지훈의 질병이었다. 어젯밤, 두 형제는 지훈에게 이게 관해 물어보지 않았고 윤하도 가족들한테 말하지 않았다. 그저 윤하가 지훈을 대하는 태도에서 아마 큰 문제는 아닐 것이라고 윤하 어머니는 짐작했다.전에 질병이 있었다가 이제는 다 완치됐을 가능성도 있었다.두 집안 어르신이 만나고 나서 윤하 어머니는 지훈의 부모님 두 분 다 성격이 좋으시고 친근하신 걸 느꼈다.사돈 될 분들한테 부담이 될까 봐 일부러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왔다. 행여나 너무 부유해 보여 정씨 집안에서 윤하를 시집 안 보내겠다고 하면 아들이 손해 보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지훈의 부모님은 정씨 집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고 두 가문이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다.엄밀히 말하면 오히려 정씨 집안이 손해 보는 셈이었다. 지훈은 이제 중년이 다 된 아저씨이고 윤하는 아직 꽃다운 어린 아가씨이기 때문이다.지훈의 부모님은 소씨 집안 가주라는 기세 없이 자세를 낮추어 얘기했다.윤하 어머니와 혁진은 두 분을 대접하고 있고 윤하는 지훈을 도와 짐 나르러 갔
지훈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윤하 씨는 언제든지 예뻐요. 긴장하지 말아요, 저희 부모님 그렇게 어려운 분들 아니세요.”“긴장 안 했거든요. 처음 뵈는 자리니까 잘 꾸미지 않더라도 예의는 갖춰야 하니까요. 제가 문 열게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하는 지훈보다 먼저 뛰어가 문을 열었다.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문 앞에 서 있었다.윤하가 문을 열자 차에 앉아 계시던 분이 창문을 내리고 바로 차에서 내렸다.중년 여성분이셨는데 지훈과 많이 닮아서 누가 봐도 소지훈 어머니인 것을 알 수가 있었다.윤하는 내심 지훈의 어머니의 미모에 감탄하고 있었다. 관리를 아주 잘하셔서 겉보기에는 어머니가 아니라 누나같이 보일 정도였다.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으면 전혀 모자같이 보이지 않았다.지훈 어머니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걸어오며 물었다. “아가씨가 윤하 씨구나. 사진 본 적이 있어요. 나는 소지훈 엄마 되는 사람이에요.”“어머님, 안녕하세요.”윤하는 예의를 갖춰 인사를 했다. 지훈도 윤하를 따라 인사 한마디 건넸다.지훈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윤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번 훑어보고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예쁘고 아들이랑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지훈 어머니는 첫눈에 바로 윤하가 마음에 들었다.자기 아들을 구해준 유일한 여자애라고 생각해서 사진을 볼 때부터 이미 마음에 들었고 흡족해하셨다.지훈이 아버지도 차에서 내렸다.“윤하 씨, 안녕하세요, 저는 지훈이 애비되는 사람입니다.”지훈이 아버지는 평소에는 근엄하고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로 말하시지만 그 순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윤하는 아버님께도 인사를 건네고 두 분을 집안으로 모셨다. “아버님, 어머님, 빨리 집 안으로 들어가요, 밖이 추워요.”“좋아요.”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지훈의 아버지는 차 키를 아들에게 던져주고는 말했다.” 차 안에 있는 물건들 집으로 옮겨와.”“두 분 편히 오시면 돼요, 뭘 들고 오시지 마
지훈의 아버지는 시계를 보시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일찍 오긴 한 것 같아. 여름이면 이쯤 되면 꽤 많은 사람들이 일어났을 텐데. 차에서 조금 기다리다가 노크하러 갈까?”지훈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먼저 아들한테 전화를 걸어 일어나라고 해야겠어요.”그는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윤하와 입술이 닿는 그 순간, 고막을 찌르는 전화벨 소리가 울려 지훈은 단꿈에서 깨어났다. 지훈은 키스의 여운에 입술을 문지르다 정신이 번쩍 들어 그제야 자신이 꿈꾸었음을 알았다. 윤하는 지훈의 고백을 외면하지 않았지만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침 일찍부터 눈치 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달콤한 꿈이 산산조각 나자 지훈은 순간 화가 났다.핸드폰을 집어 든 지훈은 발신인을 확인하지 않고 쌀쌀한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 왜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전화를 거세요? 큰 일이 아니라면……”“아니면 어쩔 건데? 내가 누구냐고? 네 엄마야, 나 지금 윤하네 집 앞이야. 빨리 나와 문 열어. 아니면 내가 들어가서 혼쭐을 내줄 거니까.”지훈도 한 성깔 하는데 지훈의 어머니는 그보다도 한 수 위였다. 말 몇 마디로 바로 지훈을 수그러들게 했다.지훈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놀라서 물었다. “뭐라고요? 지금 집 앞이라고요? 아버지도 같이 있어요?”두 분이 오신다고는 했지만 진짜로 오실 줄 몰랐고 또 이렇게 일찍 올지도 몰랐다.“아버지도 옆에 계셔. 대문이 아직 안 열려있는 것을 보아하니 다들 아직 일어나지 않았나 보지? 아들, 우리가 너무 일찍 온 거 아니야?”지훈은 침대에서 굴러 내려오며 대답했다. “당연한 말씀을, 이 추운 날씨에 이렇게 일찍 오신 거예요? 아버지가 오신다고 하시더니 진짜로 오실 줄은 몰랐어요. 아직 이르다고 말했잖아요, 윤하 씨가 엄마아빠를 만나면 부담스러워할 거예요. 잠깐만 기다려봐요, 제가 내려가서 문 열어줄게요.”입으로는 툴툴거렸지만 정작 부모님들이 밖에서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지훈은 엄마에게 당부 몇 마디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