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예진으로부터 주씨 가족이 정말 나들이하러 온 것이라고 확인받은 성소현은 그제야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다만 그 미소는 우빈에게 보여주는 거지, 주씨 가족에게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다.그녀는 주씨 가족을 보기만 해도 싫었다.“우빈이가 동물원에 놀러 가고 싶다는데, 이모도 같이 놀러 가야지.”성소현은 조카의 초대에 흔쾌히 응했다.우빈은 아직 엄마, 아빠의 관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마음이 착한 하예진은 전 시댁에 아무리 불만이 많아도 아들 앞에서 주형인에 대해 험담을 하지 않는다.두 사람은 뭐라 해도 친부자 사이이니.아들 앞에서 친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은 아이에게 좋지 않고, 오히려 성장에 영향을 줄 수 있다.30분 후.하예정 자매는 우빈을 데리고 성소현의 차에 앉아 동물원으로 떠났다.뒤에는 하예정의 신변 보호를 하도록 안배한 두 명의 경호원이 경호차를 몰고 묵묵히 따랐고, 주 씨 가족은 두 대의 차에 나눠 타 경호차 뒤를 따랐다.서현주는 가는 내내 주형인에게 불만을 토했다.“우빈이와 친해지려고 그러는데 어머님은 뜬금없이 형님네 가족을 부르고, 우빈인 또 이렇게 많은 사람을 불러오고... 언제 우빈이와 친해지겠어요?”하 씨네 자매가 있으니, 우빈은 당연히 엄마와 이모 곁에 붙어있을 거다.차 뒷좌석에서 서현주의 잔소리를 들은 김은희가 툭 내쏘았다.“내가 네 돈을 쓰자고 형님네 가족을 부른 것도 아닌데, 뭔 말이 이렇게 많아? 싫으면 같이 가지 말든가, 가는 내내 시끄럽게 굴지 말고.”서현주가 고개를 돌렸다.“어머님, 방금 하신 말씀 잊지 마세요. 절대 형님네가 우리 형인 씨 돈을 쓰게 하지 말아요. 지금 형님네는 형인 씨보다 돈이 훨씬 많아요.”“형인의 돈을 쓰는 거지 네 돈을 쓰는 것도 아닌데. 지금 너도 내 아들 돈을 쓰고 있잖아?”아들이 서현주에게 돈을 맡긴 게 김은희는 가장 언짢았다.“형인씨와 나는 부부이고, 형인씨 돈은 내 돈이에요.”“그럼, 네 돈도 형인의 돈인데, 왜 넌 신혼집을 꾸밀 때 돈 안 냈냐? 예전에
하예정은 계속 우빈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사람들로 붐비는 동물원에는 우빈 또래의 어린애들도 매우 많았다.우빈을 따라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한 하예정은 동물원의 풍경을 감상할 마음이 없었다.하예진은 매일 우빈을 데리고 가게에 가고, 일이 끝나면 집에 데리고 가서 쉬느라 아들을 데리고 놀러 갈 시간이 전혀 없었다.지금 밖에 나오니, 우빈의 뛰어다니기 좋아하는 아이의 천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다행히 하예정은 산타 기술을 연마해 본 사람이라 체력이 좋았고 하예진도 다이어트를 하느라 오랫동안 달리기를 견지한 탓에 체력이 좋았다. 하지만 이렇게 돌아다니는 경우가 드문 성소현은 오래 걸으니 발바닥이 아파 났다.주씨 가족은 멀리 떨어져서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우빈은 신이 나서 어린이 놀이터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몇 번이나 놀이기구를 타고 나서야 이모에게 안겨서 동물들을 보러 갔다.동물원이 너무 커서 조류 코너를 둘러보고 나니 밥 먹을 시간이 다 되어서 일행은 식사하러 식당으로 들어갔다.“아빠는요?”“네게 그렇게 빨리 뛰는데 아빠가 어떻게 따라오겠어?”그제야 아빠가 생각난 우빈이가 사방을 둘러보니 정말 아빠가 보이지 않았다.“엄마, 아빠에게 전화해요.”하예진은 주형인에게 전화하는 시늉만 하고 나서 아들을 달랬다.“아빠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다른 곳에서 식사하신대. 조금 있으면 다 볼 수 있을 거야.”우빈은 엄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사실 주 씨 가족은 이미 그들의 앞에 있었다. 임정한이 어린이 놀이터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까운 주씨네는 이미 아이를 강제로 끌고 앞으로 걸어갔다.주형인과 다투고 나서 화가 난 서현주는 주씨 가족을 따돌리고 혼자 걸었다.생각밖에 주형인이 자기를 달래지 않자, 그녀는 주형인이 이젠 자기를 예뻐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전에 둘이 몰래 만날 때, 주형인은 그녀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주었었다. 혼인신고하여 와이프가 된 후에야 그녀는 자신이 점차 하예진이 예전에 겪었던 모든 것을 차례로 겪고
상대방은 나지막이 미안하다고 말한 후 잽싸게 그녀 손에 쪽지를 쑤셔 넣었다.서현주는 그 쪽지를 꽉 쥐고 있을 뿐 감히 사람들 앞에서 펼쳐볼 엄두가 안 났다.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도로표지판을 보고 근처에 화장실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도로표지판을 따라 화장실을 찾아서 안에 들어간 후 그녀는 황급히 쪽지를 펼쳐봤다.「해양관에서 공연 볼 때 우리가 혼란을 일으키고 그 틈에 아이를 안아갈 겁니다. 당신 임무는 저 사람들을 해양관으로 데려오는 거예요.」서현주는 쪽지를 확인하고 갈기갈기 찢어서 변기 물에 내렸다.오늘 함께 온 사람들도 많고 하예정 옆에 두 명의 경호원까지 따라붙어서 그들이 손을 쓰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뜻밖에도 해양관에서 공연할 때 작전을 수행하겠다고 한다.정말 성공할 수 있을까?서현주도 지금은 주씨네 가족과 함께 있지 않은데 하예정 자매는 더 말할 것도 없다.그녀는 화장실에서 나와 주형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주형인에게 현재 위치를 보내 달라고 말한 뒤 화를 억누르며 주씨네 가족과 합류했다.이어서 남편에게 하예진의 위치도 물어봤는데 본인들 뒤에 있다고 하자 일단 밥부터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 서현주는 기어코 레스토랑 근처에서 하예진 일행을 기다렸다가 다 함께 해양관에 들어가 공연을 보자고 했다.동물원에 놀러 온 사람들은 대부분 해양관에 가서 공연을 본다.하예정 일행도 우빈이를 데리고 해양관으로 갔다.“우빈아.”임정한도 오늘은 신나게 놀았다.“정한 형.”주우빈은 예의 바르게 임정한을 불렀고 임정한은 가까이 다가와 주우빈과 나란히 앉아서 좀 전에 무슨 동물을 구경했는지 재잘재잘 설명했다.어른들은 아예 두 아이를 나란히 앉혔다.임정한이 늘 주우빈을 괴롭힌 탓에 하예정은 일부러 우빈의 옆에 앉았고 하예진은 아들 뒤에서 지켜보았다.전씨 일가의 두 경호원도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앉았는데 공연을 보는 게 아니라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서현주도 딱히 공연을 볼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잔뜩 긴장한 채 주우빈만 자
하예진은 아들을 꼭 껴안았다.서현주는 우빈이가 하예진에게 안긴 채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해양관을 벗어나는 걸 보더니 계획이 실패했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정한아, 정한아!”이때 주서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갑자기 울려 퍼졌다.서현주가 정신 차리고 보니 덩치 큰 사내 한 명이 임정한을 안고 뛰어가는 중이었다.그녀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아이를 잘못 채가다니?“여보, 형인아, 얼른 저 사람 잡아요. 저 사람이 정한이를 안아갔단 말이에요!”주서인은 싸움 구경을 볼 겨를 없이 정한이를 안아간 남자를 뒤쫓으며 남편과 동생을 불렀다.주씨네 가족들도 정한이가 누군가에게 잡혀간 걸 발견하곤 미친 듯이 쫓아가고 싶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아이 뺏어가요! 누가 우리 아이 훔쳐 갔어요! 바로 저 덩치 큰 남자예요. 저 남자가 내 아들을 안아갔다고요!”안달이 난 주서인은 사색이 되었다.그녀는 인파를 헤쳐 나가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를 뿐이었다.장내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누군가가 아이를 뺏어갔다는 말을 듣더니 어린이와 함께 공연 보러 온 부모들은 재빨리 제 아이를 꼭 안고 해양관 밖으로 뛰쳐나갔다. 결국 장내가 더 혼잡해졌다.몇몇 착한 사람들은 주서인을 도와 아이를 구해오려고도 했다.그 남자는 임정한을 안고 미친 듯이 질주했고 누군가가 일부러 그에게 길을 내주며 더 빨리 해양관을 벗어나게 한 것만 같았다.“예진아, 예정 씨, 저 사람이 정한이를 뺏어갔어. 얼른 우리 정한이 구해줘.”주서인은 인파들 속에서 겨우 비집고 나와 하예진 자매를 보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지난날의 갈등이 얼마나 깊었던, 이런 일에 부딪힌 이상 하예정은 유괴범이 임정한을 훔쳐 가도록 가만둘 수 없었다.다만 그녀는 직접 임정한을 구하러 간 게 아니라 경호원들에게 그 남자를 쫓아가 임정한을 데려오라고 시켰다.두 경호원이 임정한을 채간 남자를 쫓으러 갔을 때 하예진은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품에 안긴 주우빈을 앗아가려고 하는 걸 느꼈다.그녀는 재빨
그녀가 만약 조금이라도 힘을 풀었다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아들을 빼앗겼을 것이다.성소현의 차에 탄 후에도 하예진은 감히 손을 내려놓지 못한 채 주우빈을 꼭 껴안고 사색이 되었다.하예정도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성소현은 큰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빠, 우리 집 모든 경호원들 지금 바로 관성야생동물원으로 오라고 해. 큰일 났어. 유괴범이 아이를 뺏어가는데 우빈이도 하마터면 뺏길 뻔했어. 얼른 이리로 우릴 데리러 와줘. 나 지금 운전할 엄두도 안 나. 가는 길에 또 누가 길을 막고 아이를 뺏어갈까 봐 두려워.”성소현은 처음 이런 혼잡하고 위험한 일에 부딪혔다.평소엔 거만하고 무서운 것 없는 사람처럼 보여도 방금 주우빈을 하마터면 놓칠 뻔했을 때 그녀는 식겁하여 다리에 힘이 풀렸다.만약 우빈이를 잃어버렸다면 그 당시 상황이 혼란스럽고 사람도 많아서 유괴범을 쫓아가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우빈이는...여기까지 생각한 성소현은 사색이 되었고 손발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도저히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어 사고가 날까 봐 핸들을 잡지 못했다.“뭐? 우빈이는 괜찮아? 지금 바로 경호원 데리고 갈게.”성기현도 주우빈이 하마터면 유괴될 뻔했단 말을 듣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는 이따가 중요한 회의가 있는 것도 막론하고 사무실을 뛰쳐나와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어서 동물원으로 총출동하라고 명령했다.한편 암암리에 하예정을 보호하던 두 명의 경호원은 진작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하예정도 마음을 가라앉힌 후 제일 먼저 남편에게 전화했다.성기현이 경호팀과 함께 동물원으로 향할 때 전태윤도 경호팀을 거느리고 동물원으로 출발했다.“우빈아.”하예정은 우빈의 등을 토닥이며 언니의 마음도 달랬다.“언니, 괜찮아. 응?”그녀는 방심하다가 하마터면 조카 우빈이를 위험에 처하게 할 뻔했다.“내가 힘이 세지 않았더라면 우빈이를 진작 빼앗겼을 거야. 그 사람도 엄청 세게 잡아당겼단 말이야.”하예진은 쉴 새 없이 되뇌었다.다이어트하느라 줄곧 운동하고 가게
동물원 입구에서 임정한을 구하러 갔던 두 명의 경호원이 막 아이를 안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사모님.”두 경호원은 엄마를 외치며 울고불고 난리인 임정한을 안고 하예정 앞에 다가오더니 바닥에 내려놓으며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사모님, 얼른 이 아이 가족들한테 전화해서 아이 좀 데려가라고 하세요. 오는 내내 울었어요. 시끄러워 죽겠어요.”“예정 숙모.”임정한은 놀라서 엉엉 울었다.이 아이는 전씨 일가의 경호원도 본 적이 없는데 처음엔 낯선 이가 덥석 채가서 부리나케 달리더니 나중에 또 낯선 이에게 구원받았다. 평상시에 아무리 장난기가 심한 아이라 해도 이제 고작 네 살짜리 어린이였으니 놀랄 만도 했다.하예정은 유일하게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녀를 본 임정한은 재빨리 달려가 다리를 부둥켜안으며 얼른 안아달라고 졸랐다.“괜찮아.”하예정은 임정한을 매우 싫어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쩔 수 없이 다독여주었다.이어서 그녀는 주형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정한이 구했어요. 지금 동물원 입구에 있으니까 얼른 애 데리러 나와요들.”주씨네 가족들은 임정한을 잃어버린 일로 대성통곡하였고 김은희는 한번 기절했다가 누군가가 인중을 눌러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딸을 부둥켜안은 채 목청이 째지게 울었다.주형인과 임수찬은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유괴범이 아이를 안고 어디로 도망쳤는지 도통 알아낼 수가 없었다.하예정의 전화를 받은 주형인은 기쁜 마음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재빨리 누나네 부부에게도 이 소식을 전했다.전태윤과 성기현이 경호팀을 거느리고 동물원에 도착했을 때 주씨네 가족들도 부랴부랴 달려 나왔다.“정한아.”잃어버린 줄 알았던 아들을 되찾은 주서인은 미친 듯이 뛰쳐 가 아이를 와락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임수찬도 아들이 무사한 걸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김은희와 주서인은 임정한을 끌어안고 쉴 새 없이 울어댔다.한참 후에야 주서인은 털썩 무릎을 꿇고 하예정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감격에 겨운 말투로 말했다.“예정 씨, 고마워요. 정한이
하예정이 대답했다.“언니가 꼭 안고 있었고 내가 또 그 사람 발로 걷어차서 우빈이 뺏어가는 걸 아예 포기하고 줄행랑쳤어요.”그녀는 고개 돌려 성소현의 차를 가리키며 말했다.“우빈이는 지금 소현 언니 차에 있어요.”하예정과 전태윤의 대화를 들은 후에야 주씨네 가족들도 우빈이까지 하마터면 봉변당할 뻔했다는 걸 알아챘다.김은희는 또다시 울면서 손자 보러 가겠다고 했다.그제야 하예진은 우빈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우빈아, 우빈아.”김은희는 아이를 와락 끌어안고 손주 녀석이 정말 아무 일 없는지 확인한 후에야 울먹이며 말했다.“다행이야, 넌 괜찮으니 참 다행이야!”“할머니.”주우빈은 할머니께 대답하며 손을 들어 할머니의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었다.김은희는 우빈이를 키운 적이 없지만 이 아이는 유일한 친손주라 이쁘지 않을 수가 없다. 미세한 아이의 행동에 김은희는 감격에 겨워 또다시 아이를 안고 엉엉 울었다.주씨네 가족도 이쪽으로 둘러싸였다.“엄마, 울지 마. 이젠 다 괜찮아졌어.”주형인이 엄마를 위로했다.김은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눈물을 닦고 아들을 훅 밀쳤다.“이게 다 너희 둘 때문이야. 너희가 애들 데리고 동물원에 오자고만 안 했어도 이런 일 없을 거잖아. 우빈이가 예정 씨까지 불러왔으니 망정이지... 네가 우빈의 아빠가 아니고 정한의 외삼촌이 아니었다면 오늘은 아예 작정하고 아이 뺏어가려고 일부러 동물원 데려온 줄로 알겠어!”김은희의 질책에 서현주가 삽시에 낯빛이 창백해졌다.김은희가 그녀를 힐긋 노려보자 그녀는 겨우 변명을 둘러댔다.“어머님, 저도 우빈이랑 친해지려고 그런 건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김은희는 눈빛으로 그녀를 재수 없는 년이라고 욕하는 것만 같았다.아들이 서현주와 결혼하고 나서부터 뭐 하나 되는 일이 없고 어쩌다가 우빈이를 데리고 봄나들이 나왔더니 하마터면 나쁜 놈들에게 아이까지 유괴당할 뻔했다.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밀집한 장소에서 감히 아이를 뺏으려 하다니 거만함이 하늘을 찌를
하예정도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다.다만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의문점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네.”우빈이는 오늘 마음껏 놀지 못했다. 해양관에서 공연을 볼 때 한참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는데 엄마가 갑자기 꽉 끌어안고 허겁지겁 도망쳤다.전씨 일가의 경호원들은 병사처럼 두 쪽으로 나뉘어 서서 롤스로이스 앞에 길을 터주었고 전태윤은 우빈이를 안은 채 하예정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하예진은 동생을 따라가지 않고 선뜻 경호원 차에 탔다.성소현은 오빠 차에 앉았고 그녀의 차는 경호원이 대신 몰고 갔다.곧이어 두 기업 총수는 경호팀의 호송하에 관성야생동물원을 떠났다.그들이 떠난 후에야 서현주는 한숨을 돌릴 겨를이 생겼다.다들 자신을 의심할까 봐 줄곧 전전긍긍하고 있었다.가는 길에서 하예정이 남편에게 물었다.“태윤 씨, 오늘 일 너무 수상해요. 마치 일부러 꾸며진 거대한 음모 같아요. 먼저 현장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아이를 낚아채 가는 계략인 것 같아요. 정한이는 그때 어른들에게 안겨 있지 않아 놈들이 잡아갔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일반 유괴범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우빈이는 줄곧 언니가 안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감히 뺏어가려 하다니, 내가 볼 때 놈들의 진짜 타깃은 우빈인 것 같아요.”“정한이를 데려간 건 작전을 살짝 바꾸어 목적에 도달하려는 속셈이에요. 내 옆엔 늘 두 명의 경호원이 함께 있어서 놈들이 쉽게 손댈 수 없었어요. 정한이를 채가면 내가 비록 말괄량이 같은 그 아이를 싫어해도 가만있지만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겠죠. 내가 정한이 구하러 두 경호원을 보냈고 우리 신변을 보호하는 사람은 없었어요.”“물론 우리도 다 큰 어른이지만 연약한 세 여자라 놈들이 작정하고 달려들면 우린 반항할 힘이 없어요. 그렇게 되면 놈들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겠죠. 장내가 어수선하다 보니 어떤 부모들은 본인 아이를 제때 안지 못해서 애들이 제멋대로 뛰어다녔어요. 놈들은 그 혼잡한 상황에서도 다른 아이들은 채가지 않았어요.”하예정은 생각이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