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는 신의가 최근 A시에 자주 나타난다고 들어서 신의에게 조카의 눈을 보일 생각이다. 신의가 아니라 그 신의의 제자라 해도 제발 한 번만 조카의 눈을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신의 사제는 고모의 마지막 동아줄이다.오랜 시간 치료를 받으며 그녀는 사실 아주 조금 보이긴 하지만 여전히 시각장애인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다시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날아갈 것 같고 병 치료에 임할 자신이 생긴다.다만 이 일은 고모 이외의 그 누구에게도 감히 알릴 수 없다.어찌 됐든 그녀는 지금 여전히 시각장애인처럼 앞이 잘 안 보이고 아예 안 보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앞이 안 보이는데 가게 안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여운초가 웃으며 답했다.“아까 들어올 때 그분들 발소리를 들었어요. 발걸음이 묵직한 게 남자 같아서 예정 씨 경호원일 거로 예상했어요.”하예정과 심효진은 서로를 마주 봤다.시각장애인은 청력이 뛰어난다더니 정말 그랬다.하예정은 경호원 두 명을 불러와 여운초의 말대로 하라고 분부했다. 그녀는 경호원이 너무 과격해서 여운초를 다치게 할까 봐 친히 당부했다.“겉보기만 거칠게 하면 돼요. 꼭 자제해요, 운초 씨 다칠라.”여운초는 앞이 보이지 않지만 귀엽고 작은 얼굴이 남자의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하예정은 도련님 대신 그녀를 잘 보살피고 싶은 충동까지 생겨났다.“저희 힘 조절 잘하겠습니다.”두 경호원은 여운초를 서점 밖으로 ‘몰아냈고’ 그녀가 챙겨 온 선물 봉투도 전부 들고 나왔다.곧이어 그녀를 여씨 사모님 차 앞에 끌고 가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한 경호원이 선물 봉투를 그녀에게 내던졌고 다른 한 경호원은 ‘꺼져’라고 괴성을 질렀다!그 경호원은 쓸데없는 말이 많은 편인데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우리 사모님이 아무리 잘해주면 뭐해. 당신 때문에 사모님 차까지 망가졌어! 그럼에도 뻔뻔스럽게 찾아와 용서를 빌어? 파렴치한 것, 당장 꺼져!”두 경호원은 곧장 자리를 떠났다.여씨 사모님은 두 경호원이 떠난 후에야
“빼액...”자동차 경적에 여운초는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이제 곧 하교 시간이라 그런지 경적이 끊기지 않았다.그녀는 아예 무턱대고 오른쪽으로 걸어갔는데 경적이 또 울렸다.잘못 들어선 걸까?흠칫 머뭇거리던 여운초는 몸을 돌려 오던 방향대로 돌아갔다.전이진은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손목을 덥석 잡았다. 여운초는 본능적으로 두어 번 몸부림쳤지만 전이진의 몸에서 나는 산뜻한 향수 냄새를 맡자 금세 동작을 멈췄다.전이진은 그녀를 차에 태우고 바닥에 널브러진 선물 봉투와 지팡이도 모조리 주워서 차에 실었다. 그리고 그녀 옆에 떡하니 앉았다.“띠리링...”이때 전이진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일단 차를 길옆으로 몰고 나갔다. 하굣길의 학생들과 학부모를 가로막으면 안 되니까.그는 차를 세운 후에야 형수님의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저 금방 왔어요.”“네? 금방 왔다고요 도련님? 저기... 내가 이미 문제 다 해결해서 안 오셔도 될 것 같아요. 돌아가세요.”“문제를 해결했다고요?”“네, 그러니까 가서 볼일 보세요.”전이진은 어리둥절해졌다. 형수님이 불쑥 전화 와서 아주 성급한 말투로 지금 당장 서점으로 오라고 했는데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형에게 말했더니 형도 오직 그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서 빨리 가보라고 부추겼다.전이진은 결국 퇴근 시간도 채 되기 전에 급히 달려왔다.오자마자 형수님은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한다.전이진은 왠지 형수님에게 낚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생각은 이렇게 해도 감히 입밖에 내뱉을 순 없으니 그는 얌전히 대답했다.“그래요, 이미 다 해결됐다니 저 그럼 갈게요.”“네, 헛걸음하셨네요 저 때문에. 저녁에 태윤 씨랑 말해서 내일 도련님 반차 쓰게 해 줄게요. 푹 쉬어요.”전이진이 웃으며 말했다.“형수님, 주실 거면 통쾌하게 하루 휴가 주시던가요. 형한테 반차만 받다니 그게 뭐예요.”하예정도 웃으며 답했다.“알았어요. 그럼 하루 휴가 줄게요. 저녁에
저녁 무렵, 학부모들이 자녀들 하교 마중을 나왔다. 그 시간대를 바삐 돌아친 후 하예정은 언니네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심효진은 소정남과 함께 데이트해서 저녁에 서점 문을 닫았다.하예정은 과일 두 팩을 사서 언니네로 들고 갔다.두 자매는 예전처럼 사이가 좋았다. 하예정이 전씨 일가 사모님이 됐다고 다른 변화가 생긴 건 아니다.하예정은 언니네 월셋집 열쇠가 있어 바로 문 열고 들어갔는데 안에 여자아이가, 아니, 정확히 말해서 주우빈인데 우빈이가 글쎄 예쁜 원피스를 입고 방 안에서 신나게 뛰어다녔다.“우빈아?”하예정이 안으로 들어오며 조카를 향해 활짝 웃었다.“왜 치마 입었어?”“이모.”아이는 쪼르르 달려와 제 치마를 자랑했다.“이모, 내가 입은 치마 예뻐요?”하예정은 과일 두 팩을 식탁에 올려놓고 조카를 번쩍 들어 올렸다.“예쁘지. 우빈이 치마 입으니까 공주님 같네. 하지만 우빈이는 남자아이라서 치마 입으면 안 돼요.”“나도 알아요. 남자아이는 힘든 일을 해야 해서 치마 입으면 불편해요. 여자아이는 가벼운 일을 해서 치마 입을 수 있어요. 남녀차별이란 뜻이죠.”녀석은 기억력이 좋아서 전태윤이 했던 말을 다 기억하고 있다.이때 하예진이 주방에서 나왔다. 그녀는 음식을 다 만들어놓고 동생이 와서 밥 먹기만을 기다렸다.“입고 나가진 않을 거래. 그냥 집에서 한번 입어보는 거래. 이 치마가 너무 예쁘다면서.”하예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한사코 입어보겠다고 해서 결국 갈아입혔더니 저렇게 방안을 돌아다니면서 신이 난 거야. 어린 녀석도 예쁜 건 안다니까. 효진이는 왜 같이 안 왔어?”하예정은 조카를 안고 다가오며 언니가 만든 음식을 쭉 훑어보았는데 그녀가 좋아하는 해산물이 있었다.“효진이는 데이트하러 나갔어. 정남 씨랑 한창 열애 중이라 둘이 데이트하러 나가면 태윤 씨도 밤늦게까지 야근하고 돌아온다니까.”“제부는 대기업 대표라 안 그래도 일이 많고 시간이 금이야. 너한테 그 많은 시간을 퍼부은 것도 소중히 여겨. 너희 부부만 평생 알콩달
노동명은 1조 원 자산가라 물건 살 때 가장 좋은 거로, 가장 비싼 거로 산다. 가격을 흥정하지 않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하예진은 끝내 속마음을 말하지 않았다.노동명의 소비 습관이 어떻든 그녀와 상관없으니까, 그녀는 단지 노동명의 세입자일 뿐이다.“이모, 난 언제쯤 여동생 생겨요?”주우빈이 천진난만하게 물었다.하예정은 웃으며 조카에게 음식을 집어줬다.“이모도 몰라. 임신했다 해도 남동생이면 어떡해?”그녀는 전에 전태윤과도 토론한 적이 있다. 전씨 일가는 왜 죄다 아들만 낳는 것인지, 집안 풍수가 딸을 낳기 불리한 풍수인지 심각하게 의논해 보았다.우빈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이모, 난 여동생 원해요. 남동생 싫어요.”“남동생은 왜 싫어?”“남동생이면 나처럼 치마 못 입잖아요.”하예정은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하예진이 소식하고 고기도 안 먹자 그녀는 언니에게 잔소리해 댔다.“언니, 매일 꼭두새벽에 나갔다가 날이 어두워져서야 집에 오는데 그렇게 힘들게 일하면서 밥은 든든하게 챙겨 먹어야지. 이젠 다이어트 그만해.”“저녁엔 최대한 고기를 안 먹어. 이따가 나가서 달리기도 해야 해. 폭식하면 몇 바퀴 더 달아야 하거든.”이혼 전과 비기면 하예진은 살이 엄청 많이 빠졌지만 하예정처럼 늘 모델 몸매를 유지하는 사람과 비하면 그녀는 여전히 뚱뚱했다.하예정은 언니의 고집을 못 꺾고 결국 포기했다.“난 이렇게 먹는 데 습관 됐어. 다이어트 영양사가 준 식단대로 밥 먹고 매일 운동량도 충분해. 오랜 시간 견지해서 겨우 지금의 효과를 얻었는데 중도 포기하면 안 되지.”하예진은 동생의 몸매를 부러운 눈길로 쳐다봤다.“난 앞으로도 쭉 체중 관리할 거야. 너처럼 표준적인 모델 몸매를 유지할래. 더는 폭식해서 백 킬로 뚱보로 돌아가지 않아.”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어떻게 폭식으로 백 킬로까지 찍었는지 참 한심할 따름이었다.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종일 귀찮게 굴고 부부 사이도 점점 안 좋아져 기분이 상하고 입맛이 없어야 할 텐데 그녀는 여전히
전태윤을 본 우빈이는 신나서 바로 그에게 안기려 했다. 전태윤은 손에 든 물건을 얼른 내려놓고 아이를 안았다.하예정은 허리 숙여 그가 사 온 과일 두 팩과 우유 한 박스를 들어주며 물었다.“왜 왔어요? 약속 있다고 했잖아요? 나도 과일 두 팩 사 왔는데 태윤 씨도 사 왔네요. 심지어 우리 둘 똑같은 과일로 사 온 거 알아요?”전태윤은 우빈이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부부가 마음이 통해서 그런 거지. 바이어가 잠시 일이 생겨 못 오니 오늘 밤 일정도 취소됐어. 그래서 얼른 처형네 댁에 와서 밥 한 끼 얻어먹으려고 했지.”사랑하는 아내가 처형네 집에 있다고 한다.이게 바로 하예정에게 경호원을 붙인 좋은 점이다. 평소 굳이 그녀에게 행적을 묻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자유를 줄 수 있으면서도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을 때면 전화 한 통에 바로 찾을 수 있다.“처형.”전태윤은 하예진에게 인사했다.하예진은 제부가 온 걸 보더니 수저를 내려놓고 얼른 마중 갔다. 동생이 물건을 한가득 들고 들어오자 하예진이 말했다.“두 사람은 앞으로 우리 집 올 때 뭐 자꾸 사 오지 말아요. 내가 다 알아서 사니까. 이따가 갈 때 과일 두 팩 가져가요. 나랑 우빈이는 이렇게 많이 못 먹어요.”“예정이도 사 올 줄은 몰랐어요.”전태윤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하예진은 속으로 사랑의 힘이 참 대단하다고 한탄했다.제부는 처형인 하예진을 처음 본 순간부터 깍듯이 대하긴 했지만 줄곧 차가운 태도였는데 이젠 전보다 훨씬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다.사랑으로 못 녹일 건 아무것도 없나 보다.“우리 막 저녁 먹고 있었어요. 손 씻고 와서 함께 먹어요.”하예진은 주방에 들어가 전태윤의 수저도 챙겨 왔고 맛있는 음식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하예정은 말문이 막혔다.전태윤만 오면 자신은 마치 주워온 동생처럼 언니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다.자리에 앉은 지 2분도 안 돼 초인종이 또 울렸다.주우빈은 또다시 문 열러 갔다. 이번엔 머리를 써서 작은 걸상을 들고 갔고 어른들은
하예진은 아무 말 없었고 하예정이 입을 열었다.“두 분 우빈이 키워본 적도 없는데 이렇게 데려갔다가 아이가 적응 못 하고 울면 어떡해요? 아이 보고 싶으면 매일 낮에 이리로 보러 와요. 함께 놀다 가시면 되잖아요.”주경진이 뻔뻔스럽게 말했다.“예정 씨, 우리가 우빈이 키워본 적 없어서 지금이라도 보상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두 노인네가 집에서 할 일도 없고 마침 예진이를 도와서 우빈이를 돌보면 예진이도 가게 일에 전념할 수 있잖아요.”그는 또 품에 안긴 어린 녀석에게 물었다.“우빈아,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갈래?”아이가 되물었다.“엄마도 가요?”주경진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엄마는 못 가. 그렇지만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우빈의 아빠 있어. 우빈아, 우리랑 함께 집에 돌아가자. 그럼 너희 엄마도 이렇게 힘들지 않을 거야.”주우빈은 몸부림치며 바닥에 내려와 식탁 앞으로 달려가더니 제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나 밥 먹을래요. 엄마 안 가면 나도 안 가요. 난 엄마 옆에 있을래요!”“...”“다들 식사는 하고 오셨겠죠? 따로 음식 준비 안 할게요. 소파에 앉아서 TV 좀 보세요. 우리 밥 다 먹고 다시 얘기해요.”하예진은 전 시부모님께 각자 온수 한 잔 따른 후 TV도 켜주고 식탁에 돌아가 동생네 부부랑 함께 저녁을 먹었다.주경진이 아첨하듯 웃으며 말했다.“그래, 우린 TV 보고 있을게. 맛있게들 먹어.”노부부는 식탁에 놓인 과일 네 팩을 보더니 하예정 부부가 사 온 걸 바로 알아챘다.김은희는 군침이 돌아 나지막이 말했다.“예정이가 전부터 제 언니한테 먹을 것들을 자주 사주더니 이젠 돈이 생겨서 사 오는 과일도 급이 달라졌네요.”전부 비싼 과일들이었다.주서인이 보면 바로 두세 팩 챙겨서 집으로 가져가려고 할 것이다.전에 하예정이 언니네 집에 과일을 사가면 주서인이 올 때마다 하예진 몰래 과일을 엄청 많이 챙겨갔다.주형인은 그런 누나가 도둑과 다름없다고 했다. 친정에 오면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전부 채가니까.전에는 친누나라
김은희의 말로는 본인들이 고향 집으로 돌아가면 아들은 완전히 서현주에게 통제될 거라고 한다.게다가 두 사람은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다. 서현주는 신혼집 장식을 마친 후에 결혼식을 올려야 면이 선다고 했다.지금 월세방에 지내면서 결혼식을 올리면 친정 식구들이 와도 지낼 곳이 없다.주경진 부부가 우빈이를 돌보면 지루하지도 않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정을 쌓아갈 수 있다.어쨌거나 우빈이는 주씨 가문의 대를 이을 유일한 후대이고 서현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하예진은 채식만 먹어 곧장 저녁을 다 먹었다. 그녀는 전 시부모님이 나지막이 얘기 나누는 걸 보더니 가까이 다가가 동생네 부부가 사 온 과일 네 팩을 들어서 주방으로 가져갔다.몇 분 후.그녀는 과일 그릇에 과일 한 종류만 담아서 나왔고 나머지 과일은 씻지도 않았다.하예정과 성소현이 조카 우빈에게 사 온 간식거리도 몇 움큼 집어서 과일 그릇에 담고는 두 분 앞에 놓인 탁자에 내려놓았다.“예진아, 가게 장사 잘되지?”김은희는 스스럼없이 과일을 먹으며 하예진에게 물었다.“그럭저럭요.”“너도 평소에 바쁘면 우빈이 돌볼 시간 없잖아. 그냥 아이는 우리가 데려갈게. 우리가 그래도 우빈의 친할아버지, 할머니잖니. 설마 우빈이 해치기라도 하겠어? 우리도 꼭 우빈이 잘 보살필 테니까 걱정들 말아.”하예진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형인 씨한테도 이미 말했어요. 우빈이만 원한다면 데려가서 며칠 지낼 수 있지만 아이가 원치 않으면 더 강요하지 말라고요. 나랑 애 아빠가 이혼한 후 다들 우빈이 보러 왔을 때 나 단 한 번도 가로막은 적 없어요. 지금처럼 지내는 게 안 좋나요?”금방 이혼했을 때 하예진은 전 시댁과 아예 연락을 끊고 싶었지만 김은희가 수소문하고 뒤를 밟아서 그녀의 현재 거처를 알아냈다. 게다가 더 어이없는 건 전 시댁 식구들이 후회된다며 하루가 멀다 하게 그녀를 찾아왔다.“방금 우빈이도 말했듯이 안 가겠다잖아요.”하예진은 아들이 주씨네 집안에 들어가 지내는 걸
하예정 부부도 식사를 마치고 전태윤이 먼저 말을 꺼냈다.“예정아, 우빈이 데리고 나가서 앉아있어. 내가 설거지할게.”집에서도 그가 설거지해서 하예정은 이미 습관 됐다. 전태윤은 그녀와 우빈이를 소파에 앉아있으라고 했고 하예정도 고분고분하게 우빈이를 안고 언니 곁으로 다가갔다.자리에 앉자마자 세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언니랑 언니네 전 시부모가 빤히 쳐다보자 그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언니, 다들 왜 이렇게 날 봐요? 내 얼굴에 밥풀이라도 묻었어요?”그녀는 손을 들어 얼굴을 어루만졌지만 밥풀은 없었다.“예정 씨, 지금 설마 전태윤 씨한테 설거지를 맡긴 거예요?”김은희가 물었다.“남자가 밖에서 종일 일하느라 힘들 텐데 집에 돌아오면 아내가 돼서 제 남편을 잘 보살펴줘야 가족이 화목하고 집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도 생기죠.”하예정은 그제야 세 사람이 왜 자신을 그렇게 쳐다본 건지 알아챘다.“우리 언니도 전에 당신들 아들을 정성껏 돌봐줬는데 가족의 화목함이라곤 못 느꼈나 봐요? 밖에서 여자나 만나고 집에 돌아오는 것도 싫어했잖아요.”김은희는 목이 멨다.하예정은 우빈이를 옆에 앉히고는 아이를 교육하기 시작했다.“우빈아, 넌 앞으로 꼭 이모부 따라 배워야 해. 그래야만 훌륭한 남자가 될 수 있어.”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우리 남편 할머니는 남편한테 집안일을 시켜야 한댔어요. 집은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곳인데 왜 아내가 모든 집안일을 책임져야 하죠? 아내는 공짜 가정부가 되어서 온 가족을 보살펴야 하는 의무라도 있어요? 우리 부부는 함께 집안일해요. 어느 한 명 양반으로 지내는 게 아니라.”“...”주형인의 부모는 말문이 막혔다.명색이 전씨 그룹 대표인 전태윤이 설거지를 하고 집안일을 하다니.여자의 입장에서 하예정은 정말 행복하기 그지없고 질투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한참 후 김은희가 주우빈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우빈아, 할머니 안아줄까?”“싫어요.”주우빈은 머리를 홱 돌리며 거부하더니 이모의 다리에 기어 올라가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