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우는 즉시 의자 위에 올라가 반짝이는 큰 눈으로 송군휘를 쳐다보더니 작은 손을 내밀어 눈앞에 흔들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정말 제가 안 보이세요?”할아버지라는 말을 들은 송군휘는 더욱 슬피 울며 어둠 속에서 천우의 손을 천천히 찾아 입을 맞추며 말했다.“이렇게 천우를 만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구나.”천우는 아빠가 실명했을 때와 똑같은 송군휘의 모습을 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어른들이 하는 말을 전부 듣고 있던 천우는 비록 각막 기증이 뭔지는 정확하게 몰랐지만, 대체적인 내용은 이해하고 있었다.아빠의 눈
송군휘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나는 수아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더는 수아의 삶에 나타나서 지난 일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도 않고.”“지난 일은 이미 다 지나갔잖아요. 수아도 시시콜콜 따질 사람이 아니고요. 저희 여기서 며칠 머물러야 하니까 먼저 몸조리 잘하세요. 그리고 일이 다 마무리되는 대로 함께 돌아가요. 수아 배 속에 있는 아이들 보고 싶지 않으세요?”송군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왜 안 보고 싶겠어. 꿈에서라도 보고 싶어. 배 속에 아이들은 괜찮대?”“네. 다 건강하대요. 벌써 6개월이에요. 남
곽서연은 샤워를 한 뒤 잠옷으로 갈아입고 계단을 내려갔다.인기척을 들은 박서준이 뒤돌아보니 부엌 입구에 예쁘장한 소녀가 서 있었다.도자기 인형같이 하얀 피부에 연한 가지색 잠옷을 입은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박서준은 곽서연한테 손짓하며 말했다.“식탁에 앉아서 기다려. 금방 돼.”곽서연은 다가가며 물었다.“내가 도울 건 없어요?”“없어. 어디 데이기라도 하면 내가 네 삼촌한테 뭐라 그래.”“저 그렇게 허약하지 않거든요. 접시 같은 건 나를 수 있어요.”말을 마친 곽서연이 주방에 들어서자, 정교하게 잘려있는 과일과
육문주은 담담하게 말했다.“나 먼저 올라가서 수아랑 통화 좀 할게. 천우야, 너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배 아파.”국수 한 가락을 잡아 입에 넣던 천우는 육문주의 말에 깜짝 놀라 허겁지겁 먹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게 마지막이야.”입가에 소스를 묻힌 천우의 모습이 어리바리하면서도 귀엽게 느껴진 곽서연은 티슈로 천우의 입을 닦아주더니 웃으며 말했다.“너의 아빠 올라가셨어. 이거 먹어. 누나는 배불러서 그만 먹을래.”천우는 반짝이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서연 누나, 나한테 음료수 한 모금만 먹게 해준다면 내가
천우의 말에 화가난 박서준은 천우의 반들반들한 아랫배를 깨물더니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안 하는 게 낫겠다. 그래야 내가 더 오래 살 수 있을 거 같은데.”천우는 박서준이 깨물자 깔깔 웃으며 말했다.“둘째 삼촌, 간지러워요. 살려주세요.”“아직도 산소 호흡기를 뗄 거야?”“아니요. 안 그럴게요.”두 사람이 티격태격하고 있는데 육문주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바닥에 누워있는 두 사람을 보고 즉시 물었다.“내 아들을 바닥에 재운 거야?”박서준은 화가 나서 육문주를 노려보며 말했다.“바닥? 형 아들이 한 짓을 좀 보
왕궁은 여왕의 결혼 상대를 선택하기 위해 특별히 비공식 연회를 열었다.초청을 받고 온 사람들은 모두 M 국 왕공이나 귀족들이었다.아들이 있는 사람들은 아들을 데리고 오고 아들이 없는 사람들은 구경하기 위해 왔다.여왕과의 혼인이라는 건 대단한 영광이기도 하고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기회이기도 했다.육연희와 육문주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집사가 와서 상황을 보고했다.“여왕 폐하, 손님들이 다 도착하였으니 인젠 나가셔야 합니다.”“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아직 한 사람이 안 왔어요.”육연희가 말을 마치기 바쁘게 박서준이 성큼성큼
육연희는 몇 년 전 술집에서 배우진의 첫 모습을 봤던 것처럼 한동안 설레어 본 적도 없던 마음이 떨리기 시작했다.남자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육연희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남자를 따라갔다.남자는 육연희를 향해 고개를 숙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여왕 폐하, 저는 윌리엄 가문의 막내아들 윌리엄 요한이라고 해요. 저는 특별한 재능은 없지만, 노래를 잘 불러요. 여왕 폐하와 함께 삶을 즐길 기회를 주세요.”남자의 말에 육연희의 심장은 무언가에 찔리는 것처럼 욱신거렸다.자기를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삶을 즐
육연희는 가면을 쓰고 있는 윌리엄 요한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차가운 가면의 뒤편에서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야만 나타나는 뜨거운 눈빛이 느껴졌다.윌리엄 요한이 오늘 육연희한테 첫눈에 반한 게 아니라면, 예전부터 자기를 좋아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육연희는 담담한 표정으로 윌리엄 요한을 바라보며 물었다.“우리 오늘 처음 만난 게 확실한가요?”육연희의 물음에 윌리엄 요한이 웃자 뜨거운 그의 숨결이 육연희의 얼굴로 흩어졌다.윌리엄 요한은 육연희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궁금해? 그러면 빨리 날
말을 마친 송학진이 기름이 번지르르한 손으로 천우를 만지려 하자 깜짝 놀란 천우는 도망치며 말했다.“도와주세요. 노총각이 화났다고 나한테 복수한대요.”두 사람이 즐겁게 장난치는 것을 보고 있는 아림의 까맣고 큰 눈에는 부러움이 어려 있었다.아림은 송학진과 이렇게 장난치며 놀 수 있는 천우가 부러웠고 자기도 그렇게 놀고 싶었지만, 송학진은 손님이니까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차서윤의 말이 떠올라 조용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아림은 송학진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들어 송학진을 바라보고 말했다.“
마지막 한 입을 남겨두고 있을 때 갑자기 문 앞에서 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외삼촌, 지금 간접 키스를 하는 거예요?”천우의 말에 포크를 쥔 손을 멈칫하던 차서윤은 그제야 송학진과 같은 포크를 사용했음을 알아차리고 마음속으로 자신을 호되게 꾸짖었다.‘네 것 내 것 없이 물건을 같이 쓰는 이 습관 언제면 고칠 거야.’대학 다닐 때도 차서윤은 친구들과 라면 하나를 같이 나눠 먹거나 음료 하나를 같이 나눠 마시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늘 그렇게 지내왔다.차서윤은 바로 손을 움츠리고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미안해요. 아림
차서윤은 지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고 있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사람의 뇌는 언제나 둔해지는 법이다. 그녀는 볼을 부풀리며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화난 듯한 표정으로 송학진의 목에 앞치마를 묶으며 말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건 대표님이 때려서 그래요.” 그녀의 말에 송학진은 갑자기 몇 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차서윤은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 성격이 활발하고 일 처리는 빨랐지만 입이 자주 앞서서 늘 그와 반대로 하려 했었다. 그가 커피에 설탕을 넣지 말라고 하면
그가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모습에 송학진은 화가 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그는 천우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이렇게 큰 소리로 말하기야? 네 삼촌이 아직도 싱글이라는 걸 다들 알아야겠냐?” “뭐가 겁나요. 저는 삼촌의 아내를 찾아주는 중이에요.” 두 사람이 말싸움하는 모습을 보며 차서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녀는 천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가자. 오늘은 아줌마가 프랑스 요리 사줄게.” 그러고는 천우의 손을 잡고 밖으로 가려고 했지만 천우가 갑자기 말했다. “근데 저는 프랑스 요리 별
그 메시지를 받은 송학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리고 간단히 답장을 보냈다. [언제든지 괜찮아. 차 비서가 정해.] [오늘 저녁 괜찮을까요? 제가 아림이랑 천우 데리고 대표님이 좋아하는 그 레스토랑에 갈게요.] [그래. 좀 이따 보자.] 간단한 문자를 보며 ‘차 비서'라는 익숙한 말에 차서윤은 마음속에 물결이 일렁였다. 몇 년 전의 몇 장면이 떠올랐다. “차 비서, 커피에 왜 설탕을 넣은 거야?” “인생이 이미 너무 쓰니까요. 그걸 더 쓰게 만들 이유가 없잖아요.” 송학진은 커피를 한입에 다 마
차서윤은 싸늘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한마디만 더 욕해봐. 출발하기 전에 이미 예약 전송 설정을 해뒀어. 지금이라도 바로 메일 보낼 수 있어. 누가 이 업계에서 사라지게 될지 한 번 볼까.” 그 말을 들은 이장우는 조금 겁이 났다. 그는 줄곧 차서윤이 그저 만만한 상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자신도 모르게 증거를 남겨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를 악물며 거부하려던 순간 그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송 대표님, 죄송합니다. 이 여자가 좀 말을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러면 아림이 아버지시군요. 어쩐지 가족분들 모두가 그렇게 잘생기셨더라고요.” 천우는 고개를 들어 송학진을 향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외삼촌, 이건 제가 한 말이 아니에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거예요!” 송학진은 웃으며 천우의 머리를 가볍게 톡 치고는 별다른 설명 없이 말했다. “자, 이제 동생 손잡고 얼른 들어가.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말썽부리지 말고. 알았지?” 천우는 바로 아림의 손을 꼭 잡고 의젓하게 오빠다운 말투로 말했다. “동생아, 이제부터 오빠가 널 지켜줄게
차서윤은 이 제안을 거절하고 싶었다. 송학진에게 아무런 부담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송학진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송 대표님, 좋은 제안 감사하지만 저는 가지 않겠어요. 이장우 쪽에서 일하는 건 그만두고 제 능력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일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단지 송 대표님께 부담드리고 싶지 않아요.”송학진은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차서윤, 정상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너의 전 직장 상사였고 지금 더 좋은 기회를 제시하는 건데 왜 거절하는 거야?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일이
그 말을 들은 송학진은 눈이 촉촉해졌다. 그는 이 작은 아이가 그런 장면을 목격하고 그로 인해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지난 3년 동안 차서윤과 그녀의 딸이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아림을 꼭 끌어안고 큰 손으로 아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오늘 밤은 아저씨가 같이 있어 줄게.” 그는 아림을 다른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며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눈 감고 자. 아저씨는 계속 여기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