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내리는 가랑비 때문에 육문주의 옷은 어느새 흠뻑 젖게 되었다.하지만 그는 아무런 기색도 없이 단풍나무 아래에서 한참 동안 서 있었다.조수아는 한지혜와 하루 종일 수다 떨며 놀았더니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조수아는 갑자기 송학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빠, 엄마 묘지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엄마 보러 가고 싶어요.”송학진은 몇 초간 생각하다가 다시 답했다.“넌 지금 임신 중인데 묘지에 음기가 너무 심해 배 속의 아이한테 안 좋아. 엄마가 보고 싶으면 집으로 와. 어차피 여기에 엄마 방이 따
고였던 웅덩이의 물들이 사방으로 튀면서 값비싼 바지를 적셨다.육문주는 지금껏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조수아를 안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그녀의 청춘 시절로 다시 되돌아가 이제야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고 조수아에 대한 깊은 사랑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그는 빗물인지 땀인지 흠뻑 젖은 얼굴로 그녀에게 달려갔다.그리고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의 이름을 겨우 불렀다.“수아야.”조수아는 빨개진 눈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져주며 울먹거렸다.“문주 씨, 보고 싶었어.”그녀의 이 말 한마디에 육문주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그대로 조수아를 품에
그의 노골적인 말에 조수아는 냉큼 품에서 벗어나더니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오빠도 있는데 부끄럽지 않아?”육문주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옆에서 쭉 지켜보고 있던 송학진에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저놈이 지금 안경을 안 써서 아마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거야.”아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송학진은 육문주의 비아냥거림에 순간 화가 치밀어 단번에 욕설을 퍼부었다.“아예 내가 눈이 멀었다고 말하지 그래? 아무리 시력이 낮아도 고작 0.5밖에 안 되는데 네 면상 정도는 알아볼 수 있거든.”육문주는 조수아의 어깨를 감
필체가 너무 눈에 익었다.어릴 적 주영 이모가 그녀와 박서준에게 글씨를 가르쳐줬는데 그때 봤던 필체와 똑같았다.조수아는 사진 뒤를 가리키며 그에게 물었다.“이건 누가 쓴 거야?”육문주는 그제야 그 글씨를 발견하고 자세히 읽어보았다.[형제이자 친구로서 고난과 슬픔을 같이 나눠야 한다.]정갈한 필체에 무언의 파워가 느껴졌다.그리고 글씨로만 봐도 그 사람의 청아함과 성격을 알 것 같았다.다만 지금 이 사람한테서 과거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육문주는 아까보다 많이 어두워진 얼굴로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조수아는 그의 말투에서 섭섭함과 억울함을 느낄 수 있었고 쓸쓸한 눈빛도 이제야 눈치챘다.그녀는 살짝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비 온 뒤에야 무지개를 볼 수 있듯이 그런 고난과 역경을 겪어왔으니까 지금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잖아.”“문주 씨, 우리 과거의 일들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두 우리 감정의 디딤돌이라고 생각해. 그것들이 하나씩 쌓이면서 이제 서로가 서로한테 대체 불가인 사람으로 되었잖아. 안 그래?”그녀는 다정한 눈빛과 부드러운 손길로 육문주의 턱을 쓰다듬었다. 지금의
육문주는 마음이 들끓기 시작했다.어릴 때 혼약을 맺은 육문주와 조수아는 주변 요소로 인해 오랜 기간 떨어지게 되었지만 운명이 그들을 다시 만나게 했다.돌고 돌아 육문주는 조수아의 남편이 되었고 여느 가족처럼 아이도 생겼다.육문주는 조수아와 키스를 하면서 지난 기억을 되돌아보았다. 그가 추억에 젖어 감정이 벅차오를 때쯤, 문밖에서 송학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육문주는 그제야 조수아를 놓아주고 살짝 빨개진 눈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면 제대로 하자.”그러자 조수아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항상 상냥하고 털털하던 박주영이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 처음이었다.박주영의 머릿속에는 온통 임다윤의 죄를 입증하고 육문주와 조수아가 안전해지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그 두 사람이 위험에 빠질 때마다 박주영은 박서준을 걱정하는 마음과 맞먹게 자책감에 빠졌다.빅주영의 뜻이 견고한 것을 발견한 박경준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돌려 박서준을 바라보았다.“나는 절대 반대야. 네 어머니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주영이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가만히 볼 수 없어.”박서준은 복잡한 마음으로 박경준을 바라봤다.“삼촌이 걱정하는 마음 이해
박주영은 집주인처럼 익숙하게 거실 제일 뒤편의 캐비닛에서 구급상자를 꺼냈다.그녀는 구급상자를 뒤적이다 손쉽게 화상약을 찾아냈다.화상약을 찾은 박주영은 자연스럽게 뚜껑을 열어 약을 면봉에 짜 상처 부위에 살살 발랐다.사람들은 집안 구조를 익숙해하는 듯한 박주영에게 놀랐지만 누구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그들은 조용히 그녀의 행동을 관찰했다.치료를 마치고 나서야 박주영의 어두웠던 표정이 풀렸다.박주영은 고개 들어 부드러운 눈길로 육상근을 바라보았다.“너무 심하게 데이지는 않아서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국을 쏟은
이미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송학진한테 차서윤의 말은 마치 휘발유처럼 그를 더욱 불타오르게 했다.송학진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선물?”차서윤은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말했다.“먼저 씻어요. 조금 후면 알게 될 거예요.”송학진은 차서윤의 코를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여보, 내가 뭘 원하는지 잘 알잖아. 저쪽 칸에서 씻을 테니까 자기가 여기서 씻어. 씻고 나왔을 때 선물이 날 실망하게 하지 않길 바랄게.”“그럴 일 없어요.”차서윤은 송학진을 방에서 밀어내고 물건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송학진
“외삼촌이 그럴 리가 없어요. 외숙모와 아림이도 나 때문에 만난 거잖아요. 만약 유치원에서 내가 아림의 치마를 적시지 않았다면 외삼촌이 외숙모를 만날 일이 있었을까요?”천우의 말을 잠깐 생각해보던 육문주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만약 천우가 아니었다면 송학진은 어쩌면 아직도 솔로였을 수도 있었다.갑자기 뿌듯해진 육문주는 잔을 들고 자리에 있는 형제들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너희들 우리 아들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천우가 아니었으면 우리 이 축하주를 언제 마셨을지도 모를 일이야.”곽명원은 웃으며 말했다.“천우가 아니었
박서준은 웃으며 말했다.“배은망덕한 건 아닌 것 같네. 보살펴준 보람이 있어. 왔던 김에 가족들이랑 며칠 시간 좀 보내다 갈 거야.”박서준의 말에 곽서연은 즉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정말요? 그럼 우리 그동안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예요?”박서준은 곽서연을 흘려보며 말했다.“삼촌이랑 헤어지는 게 그렇게 싫어?”“네. 매일 매일 삼촌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왜 이렇게 달라붙는 거야? 천우보다 더하네?”곽서연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삼촌은 내가 달라붙는 게 싫어요?”박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싫다고 그러면 또 울
곽서연과 박서준이 동시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곽명원이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박서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형네 집 공주님께서 발을 삐끗해서 울고 계시잖아.”곽명원은 별생각 없이 곽서연 곁으로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그녀의 발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마구잡이로 잡고 돌리는 턱에 아파 난 곽서연은 바로 소리를 질렀다.“아! 삼촌 살살 좀 해요.”곽서연은 참을 수 없는 아픔에 고여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곽명원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아프다고? 어릴 때처럼 아픈 척하
송학진의 차가운 태도에 화가 난 강한나는 눈시울을 붉히고 입술을 깨물며 경호원을 바라보고 말했다.“내 발로 나갈 테니까 비켜요.”말을 마친 강한나는 도도한 걸음으로 이곳을 떠났다. 많은 사람이 뒤에서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다.모든 것이 끝나고 송학진은 차서윤을 데리고 방으로 돌아와 예복을 갈아입었다.송학진은 차서윤의 붉어진 눈을 보더니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서윤아, 이제 내가 있으니까 누구도 감히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송학진은 차서윤이 이십여 년간 저런 아버지 밑에서 보내다 겨우 그
차경훈은 한순간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차서윤이 모든 증거를 모으고 있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차경훈은 울며 빌었다.“서윤아, 아빠가 그때는 정신이 없었어. 앞으로 안 그럴 테니까 고소만 하지 말아줘. 제발 부탁이야.”차서윤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고소뿐만 아니라 부녀지간의 관계까지 끊을 거니까 앞으로 다시는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마세요. 더는 꿈에서조차 보기 싫으니까. 우리 이젠 죽을 때까지 연락하지 말죠.”차서윤의 말에 경호원은 차경훈을 강제로 현장에서 끌고 나갔다.차서윤의 완강한 태도에 겁을
그 말을 들은 차서윤의 눈에서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송학진의 볼에 입맞춤하고 눈물을 머금은 채 결심을 내렸다.“감사해요. 근데 저는 학진 씨가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 마음속의 흉터를 모든 사람에게 공개해야 한다 해도 학진 씨를 위해서 뭐든 할 거예요.”말을 마친 차서윤은 신부 들러리로부터 핸드폰을 가지고 송학진에게 건네줬다.“제 핸드폰과 스크린을 연결해 주세요.”그 말은 들은 송학진은 차서윤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이렇게 행복한 순간에 그녀에게 무수한 악몽을 남겨준 악마 같은 남자를 보자 차서윤은 지금 자신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분노와 슬픔이 있었고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감옥에 있어야 할 차경훈이 왜 멀쩡하게 결혼식장에 나타난 것일까.송학진이 재빨리 다가와서 그녀를 품에 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해 줬다.“괜찮아. 내가 사람을 불러서 저 사람을 감옥으로 돌려보낼게.”그가 매니저에게 눈치를 보내자 매니저는 사람을 불러와서 송학진을 제압했다. 경호원들에게 잡힌 차경훈은 그들의 손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네가 안고 자고 싶다면 될 일이야? 네가 그러다가 이모부한테 쫓겨 나오면 내 잘못 아니다.”둘째와 셋째는 아빠와 천우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고 신바람이 나서 쉴 새 없이 옹알이했다.육문주는 셋째를 끌어안고 볼 뽀뽀를 하며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그래도 딸이 좋아. 역시 우리 보배 딸이 제일이야. 너희 오빠 한번 봐봐. 고작 3살밖에 안 됐는데 아빠 엄마는 안중에도 없고 와이프를 입에 붙이고 살잖아.”셋째는 아빠의 따뜻한 품에서 웃음꽃을 피우고 입을 비죽이며 뭐라 말했다. 아기의 귀여운 모습에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