홧김에 주먹으로 벽을 세게 내리치니 하얗던 벽이 순간 피로 물들었다.그는 지금 조수아가 혼자 방에 갇혀 울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임신 후 지금까지 수많은 풍파를 겪으면서도 겨우 버텨왔는데 또다시 이런 시련이 닥치다니.육문주는 마치 가슴에 무수한 칼날이 꽂힌 듯 따끔거렸다.그리고 다시 조수아에게 애원했다.“수아야, 난 여기 문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날 불러. 알겠지?”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들은 조수아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그리고 울먹이면서 다시 그의 말에 답했다.“문
그의 말에 박주영은 냉큼 머리에 꽂은 핀을 뺐다.그러다가 큐빅 아래에 박힌 소형 카메라를 보고 놀란 얼굴로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이건 제가 어제 백화점에서 산 건데 언제 이런 걸 달아둔 걸까요?”이것 때문에 조수아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죄책감에 박주영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육상근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냉큼 다가와 그녀를 위로했다.“절대 당신 탓이 아니에요. 주영 씨, 잘 생각해 봐요. 이 머리핀을 당신 말고 또 누가 손을 댔었는지?”하지만 박주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어제 사자마자 바로 가방
차에 올라타려다가 고개를 들고 별장 창문 쪽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창가 쪽에서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조수아를 발견하고는 당장에라도 올라가서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다.하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그저 가만히 서서 그녀의 모습을 묵묵히 올려다보았다.그렇게 한 사람은 베란다에서, 다른 한 사람은 정원에서 10여분동안 서로를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1분 1초가 두 사람에게는 힘든 순간이었다.조수아는 이제야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는데 육문주를 본 순간 또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그녀도 이 일은 육문주와 아무
당시 육문주는 실명한 상태였고 넘버 11은 말하지 못하는 상태였기에 두 사람은 핸드폰으로 메세지를 주고받으면서 교류했다.이 핸드폰 같은 경우에는 시각장애인 전용이어서 모든 메세지가 음성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번호는 넘버 11 하고만 교류했기에 다른 사람은 이 번호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육문주는 핸드폰에 뜬 메세지를 멍한 얼굴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넘버 99, 제가 보이나요? 저 방금 손을 흔들었는데.]보아하니 눈앞의 이 여자가 바로 그가 지금까지 줄곧 찾아다녔던 그 넘버 11이다.육문주가 다시 그녀 쪽으로
그러다가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에 메세지 하나를 보냈다.[만났는데 역시나 경계심이 너무 깊어 더 다가가기 힘드네요.]문자를 받은 남자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이렇게 쉽게 걸려들면 육문주가 아니지.”옆에 있던 조수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제 생각에는 이제부터 육문주가 강지영의 배경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할 겁니다. 그렇게 쉽게 믿을 사람이 아니니까요.”남자는 차가운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럼 믿게 만들어야지.”육문주는 커피숍에서 나오자마자 차에 올라탄 뒤 진영택에게 당부했다.“가서 이 강
‘근데 왜 나는 아무런 기억도 없지?’조수아에게 물어보려고 방문에 들어서려던 순간 조병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문주가 방금 네가 좋아하는 잔치국수 했는데 네 방에 가져오라고 할게. 둘이 먹으면서 대화 좀 나눠봐.”하지만 조수아는 고개를 저었다.“아빠, 저한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아직 문주 씨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만약 이 일을 잘 처리하지 않으면 아무리 나중에 같이 살게 된다고 해도 우리 사이에는 여전히 벽이 있을 거예요.”그녀의 말에 육문주의 발걸음이 멈춰졌다.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
하지만 가는 곳곳마다 육문주와의 기억이 되살아나 너무 괴로웠다.두 사람은 예전에 여기 그네에 앉아 입맞춤을 나눴고 드넓은 잔디 위에 누워 햇볕을 쬐기도 했다.그리고 밀크와 같이 마당에서 뛰어놀기도 했다.가는 곳마다 육문주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졌다.조수아는 그네에 앉아 밀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밀크야, 나 네 아빠 보고 싶어.”밀크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낑낑거렸다.조수아는 다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그 사람이 임다윤의 친아들이 아니면 얼마나 좋을까?”근데 하늘은 참 무심했다.그렇게
케이스 안에는 한 쌍의 커플링이 들어 있었는데 반지 스타일이 마침 조수아한테 프로포즈하려고 준비했던 반지랑 똑같았다.육문주는 지금의 기분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몰랐다.그는 한껏 의아한 얼굴로 반지를 꺼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그러다가 핸드폰으로 예전에 쥬얼리 샵 매니저가 보내온 사진과 비교해 보았다.역시나 똑같은 반지다.그 말인즉 조수아는 당시 프러포즈를 받았던 반지를 여기에 묻었다.‘근데 왜 여기에 묻어뒀지?’육문주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고 머리도 잘 돌아가지 않았다.분명 아주 간단한 문제인데 솔직히 믿기 싫
이미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송학진한테 차서윤의 말은 마치 휘발유처럼 그를 더욱 불타오르게 했다.송학진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선물?”차서윤은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말했다.“먼저 씻어요. 조금 후면 알게 될 거예요.”송학진은 차서윤의 코를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여보, 내가 뭘 원하는지 잘 알잖아. 저쪽 칸에서 씻을 테니까 자기가 여기서 씻어. 씻고 나왔을 때 선물이 날 실망하게 하지 않길 바랄게.”“그럴 일 없어요.”차서윤은 송학진을 방에서 밀어내고 물건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송학진
“외삼촌이 그럴 리가 없어요. 외숙모와 아림이도 나 때문에 만난 거잖아요. 만약 유치원에서 내가 아림의 치마를 적시지 않았다면 외삼촌이 외숙모를 만날 일이 있었을까요?”천우의 말을 잠깐 생각해보던 육문주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만약 천우가 아니었다면 송학진은 어쩌면 아직도 솔로였을 수도 있었다.갑자기 뿌듯해진 육문주는 잔을 들고 자리에 있는 형제들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너희들 우리 아들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천우가 아니었으면 우리 이 축하주를 언제 마셨을지도 모를 일이야.”곽명원은 웃으며 말했다.“천우가 아니었
박서준은 웃으며 말했다.“배은망덕한 건 아닌 것 같네. 보살펴준 보람이 있어. 왔던 김에 가족들이랑 며칠 시간 좀 보내다 갈 거야.”박서준의 말에 곽서연은 즉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정말요? 그럼 우리 그동안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예요?”박서준은 곽서연을 흘려보며 말했다.“삼촌이랑 헤어지는 게 그렇게 싫어?”“네. 매일 매일 삼촌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왜 이렇게 달라붙는 거야? 천우보다 더하네?”곽서연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삼촌은 내가 달라붙는 게 싫어요?”박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싫다고 그러면 또 울
곽서연과 박서준이 동시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곽명원이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박서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형네 집 공주님께서 발을 삐끗해서 울고 계시잖아.”곽명원은 별생각 없이 곽서연 곁으로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그녀의 발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마구잡이로 잡고 돌리는 턱에 아파 난 곽서연은 바로 소리를 질렀다.“아! 삼촌 살살 좀 해요.”곽서연은 참을 수 없는 아픔에 고여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곽명원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아프다고? 어릴 때처럼 아픈 척하
송학진의 차가운 태도에 화가 난 강한나는 눈시울을 붉히고 입술을 깨물며 경호원을 바라보고 말했다.“내 발로 나갈 테니까 비켜요.”말을 마친 강한나는 도도한 걸음으로 이곳을 떠났다. 많은 사람이 뒤에서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다.모든 것이 끝나고 송학진은 차서윤을 데리고 방으로 돌아와 예복을 갈아입었다.송학진은 차서윤의 붉어진 눈을 보더니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서윤아, 이제 내가 있으니까 누구도 감히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송학진은 차서윤이 이십여 년간 저런 아버지 밑에서 보내다 겨우 그
차경훈은 한순간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차서윤이 모든 증거를 모으고 있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차경훈은 울며 빌었다.“서윤아, 아빠가 그때는 정신이 없었어. 앞으로 안 그럴 테니까 고소만 하지 말아줘. 제발 부탁이야.”차서윤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고소뿐만 아니라 부녀지간의 관계까지 끊을 거니까 앞으로 다시는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마세요. 더는 꿈에서조차 보기 싫으니까. 우리 이젠 죽을 때까지 연락하지 말죠.”차서윤의 말에 경호원은 차경훈을 강제로 현장에서 끌고 나갔다.차서윤의 완강한 태도에 겁을
그 말을 들은 차서윤의 눈에서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송학진의 볼에 입맞춤하고 눈물을 머금은 채 결심을 내렸다.“감사해요. 근데 저는 학진 씨가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 마음속의 흉터를 모든 사람에게 공개해야 한다 해도 학진 씨를 위해서 뭐든 할 거예요.”말을 마친 차서윤은 신부 들러리로부터 핸드폰을 가지고 송학진에게 건네줬다.“제 핸드폰과 스크린을 연결해 주세요.”그 말은 들은 송학진은 차서윤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이렇게 행복한 순간에 그녀에게 무수한 악몽을 남겨준 악마 같은 남자를 보자 차서윤은 지금 자신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분노와 슬픔이 있었고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감옥에 있어야 할 차경훈이 왜 멀쩡하게 결혼식장에 나타난 것일까.송학진이 재빨리 다가와서 그녀를 품에 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해 줬다.“괜찮아. 내가 사람을 불러서 저 사람을 감옥으로 돌려보낼게.”그가 매니저에게 눈치를 보내자 매니저는 사람을 불러와서 송학진을 제압했다. 경호원들에게 잡힌 차경훈은 그들의 손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네가 안고 자고 싶다면 될 일이야? 네가 그러다가 이모부한테 쫓겨 나오면 내 잘못 아니다.”둘째와 셋째는 아빠와 천우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고 신바람이 나서 쉴 새 없이 옹알이했다.육문주는 셋째를 끌어안고 볼 뽀뽀를 하며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그래도 딸이 좋아. 역시 우리 보배 딸이 제일이야. 너희 오빠 한번 봐봐. 고작 3살밖에 안 됐는데 아빠 엄마는 안중에도 없고 와이프를 입에 붙이고 살잖아.”셋째는 아빠의 따뜻한 품에서 웃음꽃을 피우고 입을 비죽이며 뭐라 말했다. 아기의 귀여운 모습에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