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안은 정적이 흘렀고 바깥의 반짝이는 네온사인과 비교하면 서늘한 분위기였다. 서준혁은 손에 초소형 감시 카메라를 쥐고 있었다. 서창범이 자신에게 설치한 마지막 카메라를 제거한 후 남겨둔 것이었다. 그는 왜 신유리 앞에 가져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무의식중에 진실을 입증하려는 증거라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신유리는 전에 서준혁이 거짓말을 잘한다고 했던 적이 있었다. 서준혁은 수치스러운 이야기들을 신유리에게 전부 드러냈을 때 그녀가 가볍게 연기 잘한다고 말할까 봐 두려웠다.신유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너무 혼란스러운 나머지 서준혁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확실히 서준혁은 거짓말을 너무 잘했다. 그러나 그녀가 고개를 들어 서준혁의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치자 순간 슬픔과 두려움이 묻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복잡한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신유리는 다리에 올렸던 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그녀는 속눈썹을 내리며 애써 감정을 가렸다. “서준혁.”그녀가 부드럽게 불렀다. 서준혁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동공은 살짝 흔들렸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응.” “내가 오담윤에게 납치된 날, 사실 난 네가 구하러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신했었지.”“그런데 나중에야 깨달았어. 전에 네가 했던 부정과 거절 때문에 난 이미 네 마음속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인식하게 되었고 그래서 더는 기대하지 않은 것 같아.”신유리는 마음속에 파문이 일기는 했지만 전처럼 생각만 해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롭지는 않았다. 서준혁은 그녀의 말에 입술을 움찔하더니 눈빛은 매우 실망스러워 보였다. 그는 해명하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 널 구하러 가지 않을 수 있겠어…”신유리는 그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네가 왔어.” “사실 옥상에서 널 봤을 때 울고 싶었어.” 신유리는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서준혁, 난 진심으로
서준혁의 목소리는 맑았고 깊은 눈동자로 신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보온병을 쥐고 있는 손가락이 약간 경직된 걸 보면 긴장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유리는 서서히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서준혁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순간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두가 깨어나 그녀를 찾고 있었다. 신유리는 서준혁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져가, 굳이 이런 거 가져올 필요 없어. 나 좀 있다 나가야 하거든, 오늘 친구랑 아침 먹기로 했어.”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덧붙였다. “그리고, 아까 했던 말은 못 들은 거로 할게. 듣고 싶지 않아.” 서준혁은 그녀의 말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고집스레 신유리를 바라보며 손에 든 물건도 도로 가져가지 않았다. 신유리는 그의 눈에 비친 쓸쓸함을 모른 척하고 몸을 돌렸다. 그녀가 들어가기도 전에 자두는 이미 뒤뚱뒤뚱 걸어 나왔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자두는 노란 오리 잠옷을 입고 맨발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신유리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엄마.” 어린아이는 배움이 빨라서 전에 서준혁이 언어 감각을 키워준 덕에 말이 점점 또렷해졌다. “엄마”라고 부르고 나서 자두의 시선은 서준혁에게로 향했다. 서준혁은 그녀를 보더니 눈빛이 금세 부드러워졌다. 눈앞의 아이한테서 그의 피가 절반이나 흐르고 있다는 게 참으로 신기한 느낌이었다.그들 사이에는 절대로 끊을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유대가 있었다. “아빠!” 자두의 달콤하고 맑은 목소리에 서준혁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자두는 뒤뚱뒤뚱 그에게 달려왔다. 서준혁은 급히 몸을 낮춰 자두를 안아 올렸다. 자두는 그의 품에 안겨 작은 고양이처럼 매달렸다. 서준혁은 자두를 품에 안은 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신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두가 피곤한가 봐.” 방금 일어났는데 피곤할 리 없었다. 다만 신유리는
서준혁은 굳이 지금 그네를 만들겠다고 했고 신유리는 막지 않았다. 그녀는 자두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주방으로 가서 요리를 시작했다. 신유리는 사실 요리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서준혁이 도우미를 돌려보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오픈형 주방이라 조금만 눈을 돌려도 한눈에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서준혁은 마당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마 더운 모양인지 셔츠 단추 세 개를 풀었더니 가슴 근육과 쇄골이 어렴풋이 보였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신유리는 서준혁의 모습이 낯설었다. 기억 속의 서준혁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가 가장 절망적이던 시절의 고고한 청년이든 나중에 냉혹하고 무정했던 서준혁이든 지금의 그와는 너무 달랐다. 신유리는 약간 멍해지며 자신의 감정을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늘 서준혁과 함께 가정을 꾸리는 것을 바랐다. 상상 속 장면은 아마 지금과 비슷했다. 집 앞에 넓은 마당이 있었고 둘은 귀여운 아이가 있었으며 강아지 한 마리나 고양이 한 마리도 키웠을 것이다. 마당에 그네를 하나 설치하거나 꽃이 피지 않는 나무를 심고 여름이면 그늘 아래에서 더위를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소원이 이루어졌음에도 신유리는 크게 기쁘지 않았다. 그녀가 점심을 차렸지만 서준혁은 아직 작업이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테이블 위의 음식들을 보며 잠시 말없이 서 있더니 자두를 문 앞에 내려놓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네 보러 가고 싶어?” 자두는 바로 서준혁을 향해 달려갔고 신유리는 문 앞에 서서 바라보았다. 해가 중천이라 엄청 더웠다. 서준혁은 자두가 오자마자 바로 도구를 내려놓았고 옷이 더러워져 자두가 닿을까 봐 겁이 나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자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과 놀아주는 줄 알고 서준혁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서준혁은 자두가 다칠까 봐 급히 쪼그리고 앉아 확인했지만 그 틈을 타 자두는 서준혁의 팔을 껴안으며 놓아주지 않았다. 땅에는 온통 진흙이었고 자두는 순식간에 얼룩
이 레스토랑은 임아중의 친구가 투자한 곳이다. 그녀는 신유리를 데리고 곧장 룸으로 들어갔다. 임아중은 아직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그저 조금 불쾌했는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무슨 태도죠? 매니저 불러오세요.”송지음은 실수로 와인을 테이블 위에 쏟았다. 새하얀 식탁보는 순식간에 와인으로 붉게 물들었다. 임아중이 벨을 누르려고 하자 송지음의 얼굴은 순간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표정이 뭐죠? 당신을 괴롭히기라도 했어요?” 송지음은 몸이 경직된 채 신유리를 한 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임아중이 한 번 더 말을 꺼내려는 순간 신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매니저보고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달라고 하세요. 지음 씨는 서비스업과 잘 맞지 않는 것 같네요.” 신유리는 지음 씨라는 세 글자에 송지음이 멍해진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송지음을 바라보며 말했다. “화인 그룹에 있을 때부터 멍청하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여전하네요.” 송지음이 엎었던 와인은 하마터면 자두에게 쏟아질 뻔했다. 그래서 임아중이 크게 화를 냈던 것이다. 신유리는 자두의 손을 닦아주며 송지음에게 물었다. “하지만 정말 의외네. 머리 쓸 필요 없는 일조차도 못하다니.” 둘은 서로 증오하는 사이였고 신유리가 아무리 침착하더라도 송지음을 보면 화를 참을 수 없었다.신유리는 덤덤한 표정으로 마치 아주 평범한 일을 이야기하듯 말을 했지만 오히려 그 덤덤함이 송지음을 더 괴롭게 만들었다. 오래전부터 송지음은 신유리 앞에서 열등감을 느껴왔다. 송지음은 문득 자신이 한때도 웨이터로서 신유리 앞에 섰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그때는 신유리의 행복을 엿보며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미 인생에 시달려 자신과 신유리 사이의 격차를 똑똑히 깨달았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몇 년 동안 열심히 위로 올라가려
송지음은 술 취한 몇 명의 남자와 마주친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런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알 리가 없는 송지음은 자신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고소를 해서 잘리게 하겠다는 상대의 협박에 발을 동동 굴렀다. 식당의 규칙이 엄격하고 이런 상황을 맞닥뜨린 적이 없지만 송지음은 일자리를 잃기가 싫어 남자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가만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순간, 옆에서 차가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서준혁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송지음은 아직까지도 그때 빠르게 뛰던 심장소리를 잊지못했고 뒤에서 힐끔힐끔 서준혁의 잘생긴 얼굴을 훔쳐보았었다. 그녀는 당시 서준혁과 자신이 꼭 운명일 것이라 믿어버렸다. 나중에는 서준혁이 밥을 먹으러 올 때마다 동료와 일하는 시간을 바꿔가며 직접 서준혁에게 서빙을 해줬다. 송지음은 신유리처럼 우아하고 아름답지는 못해도 자신의 얼굴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오직 그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서 더 들이댔다. 그녀도 학교에서는 인기가 많아 따라다니는 남자들이 많았지만 송지음은 서준혁에게만 집착했다. 송지음은 신유리가 보일 때마다 못 본 척 무시했고 그녀와 서준혁이 다정하게 있는 모습도 외면했다. 결국 머나먼 나중이 돼서야 송지음은 서준혁이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다는 “비밀”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외적인 모습을 신유리처럼 꾸며 서준혁을 막아섰다. 그녀는 전에 자신을 구해준 것이 고마워 기꺼이 서준혁을 도와주겠다는 핑계로 나섰지만 서준혁은 의아해하며 송지음에게 물었었다. “누구세요?” 서준혁은 송지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고 그녀가 자신의 앞에 몇 번이나 더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송지음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고 자신만만하던 그녀는 서준혁의 차가운 태도에 무너졌다. 원래 모든 일이 끝이 난 줄 알고 망연자실하던 송지음에게 한 달 뒤, 서준혁의 비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었다. 그제 서야 송지음은 서준혁이라는 사람이 화인 그룹 대표라는 사실을 알았고 잔뜩 긴장한 채 서준혁을 만나러 떠났다.
자두는 시차를 별로 못 느낀 건지 아니면 비행기에서도, 호텔로 돌아오는 차에서도 자고 있은 탓인지 신유리와는 달리 아주 정신이 맑아보였다. 신유리의 벨소리가 울리자 자두는 얼른 신경을 집중했다. 그녀가 전화를 받자 서준혁은 베란다에 있는지 어두운 배경 속에 서있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왜 전화했어? 무슨 일 있어?” 신유리는 그의 얼굴을 보며 뜸을 들이다 먼저 물었다. “응. 일 있지.” 서준혁이 대답했다. 신유리는 서준혁을 가만히 쳐다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려줬다. “너랑 자두가 좀 많이 보고 싶어서.” 그녀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 옆에 있던 자두가 신유리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어린 아이는 지금 되게 똑똑해 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빠르게 다가가 신유리의 핸드폰을 보며 얼른 건네받으려고 애를 썼다. 신유리도 마침 서준혁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핸드폰을 아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나 샤워하러 갈 거야. 애 좀 봐줘.” 서준혁은 신유리의 얼굴을 옅은 미소를 띤 채 보다가 대답했다. “알겠어.” 신유리가 몸을 돌려 샤워실로 향하는 길에 뒤에서는 자두와 서준혁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고 부녀 사이는 아주 화목하고 다정해보였다.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자두는 이미 침대에 누워 잠에 들어 있었지만 침대 맡에 놓인 핸드폰 화면은 여전히 밝았다. 신유리가 딱 끊으려고 하는 순간 서준혁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끊지마.” 그녀는 잠들어 있는 자두를 슬쩍 보고는 핸드폰을 챙겨 베란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유리가 있는 곳은 날이 아주 밝고 화창해 젖은 머리를 말리기 좋았다. “나 엄청 힘들게 재웠단 말이야.” 서준혁이 말했다. “어떻게 재웠는데?” “영어말로 된 책을 좀 읊어줬지.” 서준혁은 신유리를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또 다시 입을 뗐다. “너도 지금 먼저 좀 자둬. 시차 적응하기 아주 힘이 들 거니까. 지금 안 자면 자두가 깨면 피곤해서 못 살 거야.” 신유리는
신유리가 다가가 문을 열자 보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서준혁이었다. 그는 손에 핸드폰을 들고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려는 듯 다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문이 열리자 보이는 신유리의 얼굴에 조금 넋이 나가있던 서준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문 두드렸는데 아무도 안 열어주고 전화도 안 받아서 호텔 카운터에 전화 하려고 했어.” 신유리는 서준혁의 눈빛에 가득 담겨있는 걱정과 근심을 알아차렸다. 전에 오담윤의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해외에 있을 때 서준혁은 신유리 혼자 어디로 향하는 일이 거의 없도록 만들었고 대부분 그녀의 뒤를 함께 따라나섰었다. 신유리는 서준혁의 말에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늦잠 잤을 뿐이야. 핸드폰은 내가 어제 꺼버리는 바람에.” 서준혁은 한 눈에 봐도 급히 달려온 모양이었고 새까만 눈동자로 신유리를 바라보며 말을 꺼낼까를 망설이고 있었다. “원래 전날에 진즉 왔어야 됐는데 업무를 채 처리 못해서, 그래서 어젯밤에 돌아왔어.” 신유리는 서준혁과 달리 냉정한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급하게 온 건데?” “어제 송지음 만났다고 했잖아. 내가 물으려고 했는데 네가 전화를 끊어버려서, 혹시 오해할 까봐 바로 왔어. 무슨 문제 있으면 나한테 직접 물어, 다른 사람한테 묻지 말고.” 서준혁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난 너를 속이지는 않을 테니까.” 그의 말에도 신유리는 여전히 방 문 앞을 막고 서서 서준혁을 들여보낼 생각이 없어보였다. “물어볼거 없어. 너도 이것 때문에 특별히 찾아 안 와도 되고.” 신유리는 금방 눈을 뜬 탓에 목이 잠겨 있어 딱히 큰 위협감이 없었다. 말을 마친 그녀가 문을 다시 닫으려 하는 순간, 서준혁이 바로 막아버렸다. 그는 신유리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내가 너한테 설명을 해주고 싶어서 그래, 너 오해할 까봐.” “뭐 딱히 오해할 만 한건 없었어.” 신유리가 말을 마치자 그녀의 귀에는 서준혁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나 감기 걸린 것 같아.”
서준혁은 조용히 신유리가 움직이기를 기다렸고 그녀는 이내 사무실 책상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사무실을 수없이 왔던 신유리기에 책상이 있는 곳을 둘러볼 필요도 없었고 마치 버튼을 누른 것 마냥 바로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는 두 장의 계약서가 놓아져 있었는데 그 내용을 확인한 신유리는 동공이 흔들리더니 고개를 돌려 서준혁을 쳐다보았다. 그 두 장의 계약서중 하나는 화인 지사 주식 증여서, 다른 하나는 서준혁의 개인 재산 증여서였다. 계약서에는 모두 서준혁의 이름이 사인이 되어 있었고 옆에는 사인을 위한 필이 하나가 준비돼있었는데 서준혁이 말을 안 해도 누구의 사인을 기다리는지 알 것 같았다. “한참 생각해봤어. 내가 너한테 줄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를.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보다 더 현실적인 것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아무리 감정으로 호소를 한다 한들 너한테는 가식적으로 보일게 뻔해. 나조차도 내가 거짓 된다고 생각할 거고, 그래서.” 그는 뚜벅뚜벅 신유리에게로 다가오더니 말을 이어갔다. “전에 그 쓰레기 같던 나를 대신해 지금의 내가 사과할게, 그래서 지금 난 내가 놓인 처지가 참 쌤통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너도 네가 물러날 길은 만들어놔야지?” 신유리는 무슨 대답을 하려고 입을 뻥긋거렸지만 마음과 달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서준혁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면 당연히 거짓말이고 화인 본사와 화인 지사는 진즉에 두 개로 갈라졌으니 서준혁의 뜻은 바로 화인 지사를 신유리에게 넘긴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 모두를 다 걸고 말이다. 신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가만히 있다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난 이런거 필요 없어.” 그녀는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져 잠시 눈을 감고 있다 다시 말했다. “물러설 길? 서준혁, 너 지금 너무 이기적인거 알아? 누가 이딴거 가지고 싶대? 내가 너랑 만나겠다고 했냐고. 넌 한 번도 네 자신을 바꾼 적 없어. 네가 나한테 뭘 주고 싶으면 나는 네가 주는걸 꼭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