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안은 정적이 흘렀고 바깥의 반짝이는 네온사인과 비교하면 서늘한 분위기였다. 서준혁은 손에 초소형 감시 카메라를 쥐고 있었다. 서창범이 자신에게 설치한 마지막 카메라를 제거한 후 남겨둔 것이었다. 그는 왜 신유리 앞에 가져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무의식중에 진실을 입증하려는 증거라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신유리는 전에 서준혁이 거짓말을 잘한다고 했던 적이 있었다. 서준혁은 수치스러운 이야기들을 신유리에게 전부 드러냈을 때 그녀가 가볍게 연기 잘한다고 말할까 봐 두려웠다.신유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너무 혼란스러운 나머지 서준혁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확실히 서준혁은 거짓말을 너무 잘했다. 그러나 그녀가 고개를 들어 서준혁의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치자 순간 슬픔과 두려움이 묻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복잡한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신유리는 다리에 올렸던 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그녀는 속눈썹을 내리며 애써 감정을 가렸다. “서준혁.”그녀가 부드럽게 불렀다. 서준혁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동공은 살짝 흔들렸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응.” “내가 오담윤에게 납치된 날, 사실 난 네가 구하러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신했었지.”“그런데 나중에야 깨달았어. 전에 네가 했던 부정과 거절 때문에 난 이미 네 마음속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인식하게 되었고 그래서 더는 기대하지 않은 것 같아.”신유리는 마음속에 파문이 일기는 했지만 전처럼 생각만 해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롭지는 않았다. 서준혁은 그녀의 말에 입술을 움찔하더니 눈빛은 매우 실망스러워 보였다. 그는 해명하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 널 구하러 가지 않을 수 있겠어…”신유리는 그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네가 왔어.” “사실 옥상에서 널 봤을 때 울고 싶었어.” 신유리는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서준혁, 난 진심으로
서준혁의 목소리는 맑았고 깊은 눈동자로 신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보온병을 쥐고 있는 손가락이 약간 경직된 걸 보면 긴장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유리는 서서히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서준혁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순간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두가 깨어나 그녀를 찾고 있었다. 신유리는 서준혁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져가, 굳이 이런 거 가져올 필요 없어. 나 좀 있다 나가야 하거든, 오늘 친구랑 아침 먹기로 했어.”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덧붙였다. “그리고, 아까 했던 말은 못 들은 거로 할게. 듣고 싶지 않아.” 서준혁은 그녀의 말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고집스레 신유리를 바라보며 손에 든 물건도 도로 가져가지 않았다. 신유리는 그의 눈에 비친 쓸쓸함을 모른 척하고 몸을 돌렸다. 그녀가 들어가기도 전에 자두는 이미 뒤뚱뒤뚱 걸어 나왔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자두는 노란 오리 잠옷을 입고 맨발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신유리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엄마.” 어린아이는 배움이 빨라서 전에 서준혁이 언어 감각을 키워준 덕에 말이 점점 또렷해졌다. “엄마”라고 부르고 나서 자두의 시선은 서준혁에게로 향했다. 서준혁은 그녀를 보더니 눈빛이 금세 부드러워졌다. 눈앞의 아이한테서 그의 피가 절반이나 흐르고 있다는 게 참으로 신기한 느낌이었다.그들 사이에는 절대로 끊을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유대가 있었다. “아빠!” 자두의 달콤하고 맑은 목소리에 서준혁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자두는 뒤뚱뒤뚱 그에게 달려왔다. 서준혁은 급히 몸을 낮춰 자두를 안아 올렸다. 자두는 그의 품에 안겨 작은 고양이처럼 매달렸다. 서준혁은 자두를 품에 안은 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신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두가 피곤한가 봐.” 방금 일어났는데 피곤할 리 없었다. 다만 신유리는
서준혁은 굳이 지금 그네를 만들겠다고 했고 신유리는 막지 않았다. 그녀는 자두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주방으로 가서 요리를 시작했다. 신유리는 사실 요리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서준혁이 도우미를 돌려보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오픈형 주방이라 조금만 눈을 돌려도 한눈에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서준혁은 마당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마 더운 모양인지 셔츠 단추 세 개를 풀었더니 가슴 근육과 쇄골이 어렴풋이 보였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신유리는 서준혁의 모습이 낯설었다. 기억 속의 서준혁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가 가장 절망적이던 시절의 고고한 청년이든 나중에 냉혹하고 무정했던 서준혁이든 지금의 그와는 너무 달랐다. 신유리는 약간 멍해지며 자신의 감정을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늘 서준혁과 함께 가정을 꾸리는 것을 바랐다. 상상 속 장면은 아마 지금과 비슷했다. 집 앞에 넓은 마당이 있었고 둘은 귀여운 아이가 있었으며 강아지 한 마리나 고양이 한 마리도 키웠을 것이다. 마당에 그네를 하나 설치하거나 꽃이 피지 않는 나무를 심고 여름이면 그늘 아래에서 더위를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소원이 이루어졌음에도 신유리는 크게 기쁘지 않았다. 그녀가 점심을 차렸지만 서준혁은 아직 작업이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테이블 위의 음식들을 보며 잠시 말없이 서 있더니 자두를 문 앞에 내려놓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네 보러 가고 싶어?” 자두는 바로 서준혁을 향해 달려갔고 신유리는 문 앞에 서서 바라보았다. 해가 중천이라 엄청 더웠다. 서준혁은 자두가 오자마자 바로 도구를 내려놓았고 옷이 더러워져 자두가 닿을까 봐 겁이 나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자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과 놀아주는 줄 알고 서준혁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서준혁은 자두가 다칠까 봐 급히 쪼그리고 앉아 확인했지만 그 틈을 타 자두는 서준혁의 팔을 껴안으며 놓아주지 않았다. 땅에는 온통 진흙이었고 자두는 순식간에 얼룩
이 레스토랑은 임아중의 친구가 투자한 곳이다. 그녀는 신유리를 데리고 곧장 룸으로 들어갔다. 임아중은 아직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그저 조금 불쾌했는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무슨 태도죠? 매니저 불러오세요.”송지음은 실수로 와인을 테이블 위에 쏟았다. 새하얀 식탁보는 순식간에 와인으로 붉게 물들었다. 임아중이 벨을 누르려고 하자 송지음의 얼굴은 순간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표정이 뭐죠? 당신을 괴롭히기라도 했어요?” 송지음은 몸이 경직된 채 신유리를 한 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임아중이 한 번 더 말을 꺼내려는 순간 신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매니저보고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달라고 하세요. 지음 씨는 서비스업과 잘 맞지 않는 것 같네요.” 신유리는 지음 씨라는 세 글자에 송지음이 멍해진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송지음을 바라보며 말했다. “화인 그룹에 있을 때부터 멍청하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여전하네요.” 송지음이 엎었던 와인은 하마터면 자두에게 쏟아질 뻔했다. 그래서 임아중이 크게 화를 냈던 것이다. 신유리는 자두의 손을 닦아주며 송지음에게 물었다. “하지만 정말 의외네. 머리 쓸 필요 없는 일조차도 못하다니.” 둘은 서로 증오하는 사이였고 신유리가 아무리 침착하더라도 송지음을 보면 화를 참을 수 없었다.신유리는 덤덤한 표정으로 마치 아주 평범한 일을 이야기하듯 말을 했지만 오히려 그 덤덤함이 송지음을 더 괴롭게 만들었다. 오래전부터 송지음은 신유리 앞에서 열등감을 느껴왔다. 송지음은 문득 자신이 한때도 웨이터로서 신유리 앞에 섰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그때는 신유리의 행복을 엿보며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미 인생에 시달려 자신과 신유리 사이의 격차를 똑똑히 깨달았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몇 년 동안 열심히 위로 올라가려
송지음은 술 취한 몇 명의 남자와 마주친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런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알 리가 없는 송지음은 자신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고소를 해서 잘리게 하겠다는 상대의 협박에 발을 동동 굴렀다. 식당의 규칙이 엄격하고 이런 상황을 맞닥뜨린 적이 없지만 송지음은 일자리를 잃기가 싫어 남자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가만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순간, 옆에서 차가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서준혁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송지음은 아직까지도 그때 빠르게 뛰던 심장소리를 잊지못했고 뒤에서 힐끔힐끔 서준혁의 잘생긴 얼굴을 훔쳐보았었다. 그녀는 당시 서준혁과 자신이 꼭 운명일 것이라 믿어버렸다. 나중에는 서준혁이 밥을 먹으러 올 때마다 동료와 일하는 시간을 바꿔가며 직접 서준혁에게 서빙을 해줬다. 송지음은 신유리처럼 우아하고 아름답지는 못해도 자신의 얼굴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오직 그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서 더 들이댔다. 그녀도 학교에서는 인기가 많아 따라다니는 남자들이 많았지만 송지음은 서준혁에게만 집착했다. 송지음은 신유리가 보일 때마다 못 본 척 무시했고 그녀와 서준혁이 다정하게 있는 모습도 외면했다. 결국 머나먼 나중이 돼서야 송지음은 서준혁이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다는 “비밀”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외적인 모습을 신유리처럼 꾸며 서준혁을 막아섰다. 그녀는 전에 자신을 구해준 것이 고마워 기꺼이 서준혁을 도와주겠다는 핑계로 나섰지만 서준혁은 의아해하며 송지음에게 물었었다. “누구세요?” 서준혁은 송지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고 그녀가 자신의 앞에 몇 번이나 더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송지음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고 자신만만하던 그녀는 서준혁의 차가운 태도에 무너졌다. 원래 모든 일이 끝이 난 줄 알고 망연자실하던 송지음에게 한 달 뒤, 서준혁의 비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었다. 그제 서야 송지음은 서준혁이라는 사람이 화인 그룹 대표라는 사실을 알았고 잔뜩 긴장한 채 서준혁을 만나러 떠났다.
자두는 시차를 별로 못 느낀 건지 아니면 비행기에서도, 호텔로 돌아오는 차에서도 자고 있은 탓인지 신유리와는 달리 아주 정신이 맑아보였다. 신유리의 벨소리가 울리자 자두는 얼른 신경을 집중했다. 그녀가 전화를 받자 서준혁은 베란다에 있는지 어두운 배경 속에 서있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왜 전화했어? 무슨 일 있어?” 신유리는 그의 얼굴을 보며 뜸을 들이다 먼저 물었다. “응. 일 있지.” 서준혁이 대답했다. 신유리는 서준혁을 가만히 쳐다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려줬다. “너랑 자두가 좀 많이 보고 싶어서.” 그녀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 옆에 있던 자두가 신유리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어린 아이는 지금 되게 똑똑해 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빠르게 다가가 신유리의 핸드폰을 보며 얼른 건네받으려고 애를 썼다. 신유리도 마침 서준혁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핸드폰을 아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나 샤워하러 갈 거야. 애 좀 봐줘.” 서준혁은 신유리의 얼굴을 옅은 미소를 띤 채 보다가 대답했다. “알겠어.” 신유리가 몸을 돌려 샤워실로 향하는 길에 뒤에서는 자두와 서준혁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고 부녀 사이는 아주 화목하고 다정해보였다.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자두는 이미 침대에 누워 잠에 들어 있었지만 침대 맡에 놓인 핸드폰 화면은 여전히 밝았다. 신유리가 딱 끊으려고 하는 순간 서준혁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끊지마.” 그녀는 잠들어 있는 자두를 슬쩍 보고는 핸드폰을 챙겨 베란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유리가 있는 곳은 날이 아주 밝고 화창해 젖은 머리를 말리기 좋았다. “나 엄청 힘들게 재웠단 말이야.” 서준혁이 말했다. “어떻게 재웠는데?” “영어말로 된 책을 좀 읊어줬지.” 서준혁은 신유리를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또 다시 입을 뗐다. “너도 지금 먼저 좀 자둬. 시차 적응하기 아주 힘이 들 거니까. 지금 안 자면 자두가 깨면 피곤해서 못 살 거야.” 신유리는
신유리가 다가가 문을 열자 보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서준혁이었다. 그는 손에 핸드폰을 들고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려는 듯 다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문이 열리자 보이는 신유리의 얼굴에 조금 넋이 나가있던 서준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문 두드렸는데 아무도 안 열어주고 전화도 안 받아서 호텔 카운터에 전화 하려고 했어.” 신유리는 서준혁의 눈빛에 가득 담겨있는 걱정과 근심을 알아차렸다. 전에 오담윤의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해외에 있을 때 서준혁은 신유리 혼자 어디로 향하는 일이 거의 없도록 만들었고 대부분 그녀의 뒤를 함께 따라나섰었다. 신유리는 서준혁의 말에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늦잠 잤을 뿐이야. 핸드폰은 내가 어제 꺼버리는 바람에.” 서준혁은 한 눈에 봐도 급히 달려온 모양이었고 새까만 눈동자로 신유리를 바라보며 말을 꺼낼까를 망설이고 있었다. “원래 전날에 진즉 왔어야 됐는데 업무를 채 처리 못해서, 그래서 어젯밤에 돌아왔어.” 신유리는 서준혁과 달리 냉정한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급하게 온 건데?” “어제 송지음 만났다고 했잖아. 내가 물으려고 했는데 네가 전화를 끊어버려서, 혹시 오해할 까봐 바로 왔어. 무슨 문제 있으면 나한테 직접 물어, 다른 사람한테 묻지 말고.” 서준혁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난 너를 속이지는 않을 테니까.” 그의 말에도 신유리는 여전히 방 문 앞을 막고 서서 서준혁을 들여보낼 생각이 없어보였다. “물어볼거 없어. 너도 이것 때문에 특별히 찾아 안 와도 되고.” 신유리는 금방 눈을 뜬 탓에 목이 잠겨 있어 딱히 큰 위협감이 없었다. 말을 마친 그녀가 문을 다시 닫으려 하는 순간, 서준혁이 바로 막아버렸다. 그는 신유리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내가 너한테 설명을 해주고 싶어서 그래, 너 오해할 까봐.” “뭐 딱히 오해할 만 한건 없었어.” 신유리가 말을 마치자 그녀의 귀에는 서준혁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나 감기 걸린 것 같아.”
서준혁은 조용히 신유리가 움직이기를 기다렸고 그녀는 이내 사무실 책상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사무실을 수없이 왔던 신유리기에 책상이 있는 곳을 둘러볼 필요도 없었고 마치 버튼을 누른 것 마냥 바로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는 두 장의 계약서가 놓아져 있었는데 그 내용을 확인한 신유리는 동공이 흔들리더니 고개를 돌려 서준혁을 쳐다보았다. 그 두 장의 계약서중 하나는 화인 지사 주식 증여서, 다른 하나는 서준혁의 개인 재산 증여서였다. 계약서에는 모두 서준혁의 이름이 사인이 되어 있었고 옆에는 사인을 위한 필이 하나가 준비돼있었는데 서준혁이 말을 안 해도 누구의 사인을 기다리는지 알 것 같았다. “한참 생각해봤어. 내가 너한테 줄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를.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보다 더 현실적인 것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아무리 감정으로 호소를 한다 한들 너한테는 가식적으로 보일게 뻔해. 나조차도 내가 거짓 된다고 생각할 거고, 그래서.” 그는 뚜벅뚜벅 신유리에게로 다가오더니 말을 이어갔다. “전에 그 쓰레기 같던 나를 대신해 지금의 내가 사과할게, 그래서 지금 난 내가 놓인 처지가 참 쌤통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너도 네가 물러날 길은 만들어놔야지?” 신유리는 무슨 대답을 하려고 입을 뻥긋거렸지만 마음과 달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서준혁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면 당연히 거짓말이고 화인 본사와 화인 지사는 진즉에 두 개로 갈라졌으니 서준혁의 뜻은 바로 화인 지사를 신유리에게 넘긴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 모두를 다 걸고 말이다. 신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가만히 있다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난 이런거 필요 없어.” 그녀는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져 잠시 눈을 감고 있다 다시 말했다. “물러설 길? 서준혁, 너 지금 너무 이기적인거 알아? 누가 이딴거 가지고 싶대? 내가 너랑 만나겠다고 했냐고. 넌 한 번도 네 자신을 바꾼 적 없어. 네가 나한테 뭘 주고 싶으면 나는 네가 주는걸 꼭 받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