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리는 몸 둘 바를 몰랐다.그녀는 처음으로 도망가고 싶은 느낌이 들었지만 두 다리가 마치 땅에 박힌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서준혁을 망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서준혁도 그런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이건 또 무슨 상황이죠?”서준혁의 목소리를 들은 주국병은 바로 몸을 돌려 흉악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는 신유리를 본체도 하지 않고 말했다.“빚을 졌으면 당연히 돈을 갚아야지! 네가 그래도 대표인데 돈은 빨리 갚아야 할 거 아니야!”서준혁은 어두운 표정으로 그의 손에 들려있는 삐뚤삐뚤한 글자를 보며 혐오스럽다는 눈빛으로 말했다.“주국병, 이건 네가 새로 찾은 죽는 방법이야?”주국병은 뻔뻔스럽게 목을 길게 빼며 말했다.“다들 와서 보세요. 돈 있으면 다야? 빚을 졌으면 갚아야지! 뭐가 이렇게 당당해?”서준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빚을 졌는데 갚지 않는다고?”주국병은 흉악하게 웃으며 옆에 있는 신유리의 팔을 잡고 서준혁의 앞으로 끌고 왔다.“내 딸이야! 비록 친딸은 아니지만 내 아내의 딸이잖아! 너 이 새끼, 몇 년 동안 내 딸과 잤으면 몸값 정도는 줘야지. 네가 그러고도 남자야? 이렇게 하자. 200만에 하룻밤. 네가 백번 정도는 잤을 테니까 2억만 나에게 줘. 그걸로 청산해 줄게.”주국병이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그의 말이 끝나자 주위는 조용해졌다.신유리도 어안이 벙벙했다. 주국병의 말에 그녀는 몸 파는 여자가 되어버렸다.200만에 하룻밤이라니.서준혁이 그녀와 백 번 잠자리를 가졌으면 2억을 줘야 한다니.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그녀를 연민의 눈길로 바라보거나 좋은 구경거리를 보는 눈길로 쳐다봤다.신유리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입에서 피비린내가 났고 입가의 통증이 머리까지 전달됐다.그녀는 갑자기 어디서 난 힘인지 주국병에게 잡힌 팔을 뿌리치고 그의 뺨을 때렸다.신유리는 너무 화가 나서 똑바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2억5천만이라고?”서준혁의 말투에서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짜증 난다는 눈빛으로 도도하게 주국병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줄게.”신유리는 고개를 번쩍 들고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서준혁의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가늘고 긴 속눈썹이 그의 눈을 가린 탓에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주국병은 너무 기뻤다. 그는 자신의 뒤에 두 명의 건장한 경비원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서준혁 쪽으로 목을 길게 빼며 말했다.“정말이야? 정말 2억5천만 줄 거야?”서준혁은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기뻐하는 주국병을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린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경찰에게 잡혀가기 싫으면 꺼져.”주국병이 여기에 온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이 얼굴의 흉악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시 뻔뻔스러운 모습으로 애원했다.“그럼 잊지 말고 돈 보내.”주국병은 옆에 있는 신유리를 보며 말했다.“그래도 쓸모는 있네. 앞으로 서 대표 잘 모셔.”악의가 담긴 주국병의 마지막 말에 신유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주국병과 실랑이를 할 힘도 없었던 그녀는 그저 서준혁을 바라보며 속으로 2억5천만을 생각하고 있었다.주국병은 10분 동안 소란을 피우다가 돌아갔고 구경하던 사람들도 그제서야 서서히 흩어졌다.양예슬이 안타까운 눈길로 신유리를 바라봤다.“유리 언니, 괜찮아요?”신유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어 그런지 초췌해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고개를 든 양예슬은 서준혁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녀는 신유리와 더 말을 나누고 싶었으나 서준혁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신유리에게 말했다.“유리 언니, 제가 출근 카드를 찍지 않아서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요.”말을 마친 양예슬은 자리를 떠났다.그녀는 떠나가기 전에 작은 소리로 신유리에게 말했다.“유리 언니,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나에게 전화하세요.”아침 동안 소란에 시달린 신유리는 이제야 피곤이 몰려왔다.그녀가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서준혁의 담담한
주국병은 돈을 받고 나서야 며칠 동안 잠잠했고 나타나지 않았다.요즘 신유리의 마음속에는 서준혁의 돈 생각뿐이었다. 주국병과 이연지는 완전히 한통속이었고 그녀도 더 이상 껌딱지마냥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들과 엮이고 싶지 않아 계속 그들을 찾아가지 않았다.게다가 찾아간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사채업자 쪽은 더 가능성이 없었다.“유리 언니, 무슨 일 있어요? 요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서요.”갑자기 들려오는 곡연의 목소리에 신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곡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그냥 생각 좀 했어.”“언니 외할아버지 일 때문에 그래요? 별일 없을 거예요. 전에 아는 이모한테 물어봤는데 이런 수술은 보름 동안 거부감이 없으면 잘 쉬기만 하면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했어요.”신유리는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그날 저녁까지 성북에 있다가 별장으로 돌아갔다.아무래도 그쪽은 안전하지 않았기에 이신은 신유리가 다시 그쪽으로 돌아가 사는 것을 반대했다.부서 쪽에서는 버닝스타와 미래가 협력하는 것을 보고도 버닝스타와 계약했다. 그래서 이신은 최근 기획안을 수정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주전공이 아닌 신유리는 회사에서 지원 부서를 맡았다.곡연은 오늘 신유리를 따라 물건을 사러 나왔다. 곡연은 양손 가득 물건을 들고 신유리의 곁에 바짝 붙어서는 그녀를 떠보았다.“유리 언니,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이신한테 말해보세요. 많이 도움이 될 거예요.” “비록 이제 이씨 가문과 아무 상관이 없다 하더라도 그는 꽤 능력 있는 사람이에요. 아니면 우리를 데리고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예요.”신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나도 알아, 도움이 필요할 때 꼭 말할게.” “사실 이진 정도면 괜찮죠. 잘생겼지, 학력도 높지, 월급도 많고 게다가 성격도 좋아요. 유리 언니, 언니도 사실...”곡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유리는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곡연아.”곡연은
신유리는 눈초리를 치켜올리더니 말했다.“나 이제 그들이랑 아무 관계 없어. 네 마음대로 해.”서준혁은 무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마치 그의 깊은 눈동자에 감정이 북받치는 듯 USB를 손에 들고 멈칫하더니 잠시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신유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물었다.“또 다른 일 있어?”화인 그룹이든 서준혁이든 신유리는 모두 거북스러웠다.서준혁은 멈칫하더니 눈썹을 치켜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전에 말했었지. 높은 곳까지 올라가려면 누구에게도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그의 새까만 눈동자에 신유리가 알아볼 수 없는 정서가 묻어있었다.“하지만 넌 줄곧 배우지 못했어.”신유리의 얼굴에 한 줄기 의혹이 스쳐 갔고 그녀는 서준혁의 탄식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갑자기 지나가 버려서 어쩔 수 없는 느낌이었다.그러나 아마 잘못 들었을 가능성이 더 컸다. 신유리는 입술을 깨물고 사무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왔다 갔다 두 탕이나 뛰고 신유리는 그제야 별장으로 돌아갔다. 마침 이신은 바베큐를 준비하고 있었고 곡연은 그녀를 보자 콜라 한 병을 든 채 인사했다.“마침 잘 왔어. 언제 돌아오는지 물어보려고 전화하려 했는데.”신유리는 약간 멀미가 나고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너희들 먼저 먹어.”신유리는 말을 마치고 위층으로 올라갔고 곡연은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옆에서 나지막하고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좀 쉬게 놔둬.”곡연은 고개를 돌려 이신을 봤더니 그의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없자 참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주의를 기울였다.“보스, 유리 언니 최근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아 보여. 좀 관심이라도 해줘.”말이 끝나기 바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언니가 다른 사람의 여자 친구가 된 후에 후회하지 말고.”이신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잠시 망설이더니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신유리는 비몽사몽한 상태였다.서준혁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귓가에 맴돌았고
이신이 막 방으로 급히 뛰어왔을 때 신유리는 창백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손을 든 채 전화 받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핸드폰은 이미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핸드폰 화면은 여전히 켜진 상태였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홍도의 가족분께서는 빠른 시간 내로 제일 병원으로 오셔서 환자의 시신에 관한 일을 인계해 주셔야겠습니다.”이신은 급히 고개를 들어 신유리를 바라보았다. 신유리는 멍해 있었다. 그녀는 이신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한참을 땅에 떨어진 핸드폰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쪼그려 앉더니 핸드폰을 줍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잘못 거신 거 아니에요? 어제까지만 해도 외할아버지꼐서는 아무 일도 없으셨어요.”“실례지만 신유리 씨 아닌가요? 성남시 제일병원에 남겨주신 연락처가 바로 이겁니다.”전화 너머의 말이 끊겼지만 신유리는 미처 반응을 못한듯 핸대폰을 들고 땅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망연자실해 있었다. “여보세요? 신유리 씨 맞습니까?”전화 너머로 다시 소리가 울려오자 신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이신은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추기려 했지만 그녀는 혼자 흔들리는 몸을 가누며 일어서더니 이내 걸음을 옮겼다. 신유리의 머리속은 텅 빈 채 아까 전화 너머의 목소리만 끊임없이 그녀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이홍도의 시신?’‘이홍도가 누구지?’‘...외할아버지?’‘그런데 외할아버지께서는 괜찮으셨잖아. 어떻게 갑자기... 시신이라니?’신유리는 흐리멍덩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주위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신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더니 잠긴 목소리로 외쳤다.“유리야!”신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무슨 일 있어? 난 지금 바로 병원으로 가봐야 하는데. 외할아버지께서 날 기다리고 있대. 무슨 일 있으면 내가 돌아와서 다시 얘기하면 안 돼? 미안해, 진짜 미안해.”그녀는 말에 조리가 없어서 그 두 마디만 반복할 뿐이었다.이신은 눈살을 찌푸리며 신유리의 손목을 잡아
“서 대표님.”이석민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더니 손에 핸드폰을 쥔 채 테이블 뒤편의 서준혁을 보며 말했다. “제일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입니다. 지난달에 연락했던 공익 건강검진 활동 때문에 그쪽에서 이번에도 계속 진행할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서준혁은 원래 계약서를 보고 있었는데 이석민의 말에 전화를 넘겨받았다. 화인 그룹은 이미지메이킹을 위해 최근에 공익 활동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가 전화를 건네받자마자 전화너머에서 한바탕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서 대표님, 죄송합니다. 저희 쪽에서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시끄러웠습니다.”서준혁은 별로 개의치 않고 대답했고 전화 너머로 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병원과 환자 사이의 갈등이 적지 않은데 가족 간의 갈등은 처음 봐서 경찰에 신고할 정도입니다.”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말하자면 이 환자는 처음에 대표님의 외삼촌께서 집도하셨습니다. 원래 어르신께서 회복이 잘 되셨는데 결국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준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제 말은, 이 환자는 대표님의 외삼촌께서 집도하셨습니다. 바로 개두술이 필요한 노인입니다.”“그다음 말.”전화를 끊을 때까지 서준혁의 얼굴은 끔찍할 정도로 차가웠다. 어두운 눈동자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기세가 솟구쳐 올랐다. 그 시각 제일 병원.주국병과 이연지가 한바탕 말다툼을 벌이다가 병원의 경호원이 올라와 강제로 두 사람을 사무실로 데려갔다. 밖의 소리가 점차 조용해지자 신유리는 외할아버지의 침대 옆에 엎드려 눈을 감은 할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분명 평소의 잠든 모습과 다름없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침대 옆에 툭 늘어진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끊임없이 어루만졌다. 피부의 온도는 점점 흘러가 버렸고 그 마지막 온기조차 다 흩어져버려 신유리가 아무리 쓰다듬어도 여전히 생기 없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노크 소리가 다시 울렸을 때 신유리
서준혁의 표정은 결코 좋지 않았다. 그는 신유리를 주시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신유리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마치 한구의 시신마냥 감정도 생각도 없었다. 방금 들어가 경찰에게 주국병을 고소한다고 해도 순서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고 약간의 시간과 에너지조차도 그 누구와 공유할 수 없었다. 서준혁도 물러서지 않았고 신유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침묵을 지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이신이 입을 열었다. “서 대표님, 실례합니다. 길을 막고 계시네요.”서준혁은 어두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다시 신유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신유리가 먼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며 너무 작아서 날아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몇 년 동안 줄곧 일하느라 바쁘다고 한 번도 할아버지와 함께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낸 적이 없어. 마지막 시간인데, 좀 조용히 할 수 없어?”서준혁은 양미간을 찌푸렸고 신유리는 이신을 보며 말했다. “이쪽의 일은 네가 좀 도와서 봐줄 수 있어?”이신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신유리에게 걸쳐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신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외할아버지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 싶었다. 노인들은 흔히 사람이 떠난 후 영혼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신유리는 외할아버지가 자신을 찾지 못해 조급해하지 않도록 그녀가 마땅히 외할아버지의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떠나자 이신의 얼굴의 온화함이 흩어졌다. 그는 서준혁을 보며 말했다. “서 대표님께서는 그만 일 보러 가셔도 될 것 같네요. 유리는 제가 돌볼게요.”서준혁은 피식하더니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이 정도로 한가한 줄 이정이 알면 기꺼이 할 일을 찾아줄 텐데요.”이신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의 몸에서 늘 드러나던 나른했던 기운은 적잖게 가다듬어졌다. “서 대표님이야말로 이렇게 한가해서 쓸데없이 참견할 여유까지 있으시다면 먼저 자신
주국병 그 사람은 행여나 신유리가 정말로 돈을 주지 않을가봐 외할아버지를 몰래 데리고 나가는 이런 파렴치한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이렇게 하면 신유리에게서 계속 돈을 받아낼 수 잇다는 생각으로 말이다.곡연이 이 일을 신유리에게 전해주면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정말이지 멍청하고 추악한 사람이네요, 나중에 어떤 인과응보를 받을 줄 알고 이러는 건지.”말을 듣고 있는 신유리의 낯빛은 새하얗게 변해있었다.이유는 아주 교활하고 멍청해 웃기기까지 하였지만 하필이면 이런 우둔한 생각들이 외할아버지를 해하였다.이연지와 주국병은 아직까지도 파출소에 있었고 이신과 연우진은 신유리와 함께 그들을 며칠 동안 지키고 있었다.며칠간 신유리는 눈에 확연히 알릴정도로 말라있었다. 원래도 마른 그녀의 몸매가 지금은 거의 뼈밖에 남지 않아 옷을 입어도 공간이 넉넉했다.“유리야, 지금 많이 힘든 거 잘 알아. 하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안 먹으면 어떡해.”말을 하는 연우진의 손엔 보온병 하나가 들려있었는데 신유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걱정근심이 가득해보였다.“집에서 직접 끓인 국이야, 조금이라도 마셔.”“거기다가 둬, 좀 잇다 마실게.”신유리가 천천히 대답했다.그녀는 좀 잇다 먹겠다는 핑계로 며칠을 지내왔고 둔 음식들에 거의 손도 대지 않았었다.연우진이 말을 하려는 찰나 그의 핸드폰이 울렸고 힐끔 쳐다보고는 벨소리를 꺼버렸다.곧이어 연우진이 들고 있던 보온병을 이신에게 건네주더니 말했다.“먹는 거 보고계세요, 전화 좀 받고 오겠습니다.”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급급히 자리를 떠버렸고 남겨진 이신은 보온병에 담겨진 국을 절반 부어 신유리 앞까지 갖다 주었다.살짝 올라간 눈초리에는 말 못할 애매한 감정이 담겨있는 듯 했고 이신은 먼저 입을 뗐다.“이러면 할아버지가 많이 속상해하실겁니다.”그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신유리는 국이 담겨진 병을 건네받았다.하지만 바로 마시지 않고 잠겨있는 목소리로 이신에게 물었다.“할아버지는... 지금 날 보실 수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