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계란 원래 가십이 넘쳐나는 곳이라 사람들은 저마다 제 멋대로 추측을 했다.한편 곽동현은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건지 어벙벙한 표정이었다.강현수와 임유진은 대체 무슨 사이인 걸까?강현수의 방금 그 모습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에 처한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사랑하는 사람?!곽동현은 무의식 속에 떠오른 단어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사랑하는 사람이라니. 허구한 날 여자친구를 바꾸는 강현수가, 눈앞에서 사람 하나 죽어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을 것처럼 냉정한 남자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강현수이 보안실에 도착했을 때 그가 원하는 CCTV 영상이 벌써 준비되어 있었다.영상을 보니 소지혜는 화장실앞에서 확실히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남자와 30초가량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소지혜가 세트장으로 들어간 다음 검은색 티셔츠 남자는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그때 임유진의 모습이 보이고 남자는 화장실에서 나와 임유진과 곽동현의 뒤를 따라갔다.정황상 이남자가 뭔짓을 한 게 틀림없어 보였다.강현수가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행적을 따라가려는데 임유진과 곽동현 그리고 그 검은색 티셔츠 남자가 카메라 앵글에서 벗어나 버렸다.“이 앞에는 CCTV가 없어 그 다음의 상황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으로부터 3분 뒤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입구에 멈췄다가 다시 금방 떠나버렸습니다.”보안실 팀장은 시간을 3분 앞으로 감아 차량이 보이는 장면을 띄웠다.강현수는 차량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옆에 있는 보안실 팀장에게 말했다.“경찰 쪽에 연락해서 먼저 신고하고 이 차량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와.”이 차량 안에 임유진이 있는 걸까?강현수는 지금 이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그녀가 불한당에게 납치당해 차에서 해코지라도 당할까봐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임유진이 다치는 상상같은 건 감히 할 수가 없었다.“어떡해... 설마 유진이가 납치라도 당한 걸까요?”강현수를 따라와 줄곧 화면을 보고 있던 배여진이 걱정하는 척 물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배여진이 아니었다. 그녀는 물컵을 억지로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강현수의 손으로 넘어간 물컵은 거세게 흔들리더니 곧 물이 절반이나 바닥에 쏟아져버렸다.강현수는 물컵을 제대로 쥐려고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컵은 더 세게 떨렸다.컵이 떨리는 것이 아닌 그의 손이 떨리는 것이었다.강현수는 컵을 쥔 자신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는 여태껏 이토록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했던 적이 없었다. 지금은 그의 몸뚱어리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임유진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듯했다....곽동현은 뜻밖에도 경찰서에서 임유진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어디 다친 건 아닌가 걱정했었지만 그녀는 다행히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미안해요. 걱정했죠.”임유진은 그를 보고 제일 먼저 사과부터 했다.“휴대폰이 고장 나서 전화를 할 수가 없었어요. 동현 씨 번호를 모르니까 유심을 꺼내 다른 휴대폰에 꽂고 전화해야 해서 시간이 조금 걸렸네요.”곽동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동현 씨 기다리다가 결정적인 단서가 생각났거든요. 그때 갑자기 이 남자가 뒤에서 나타나 나한테 스프레이를 뿌리려고 했어요. 마침... 길을 지나가던 시민 두 명이 금방 제압해줘서 그대로 경찰서로 데려왔어요.”임유진은 도움을 받은 시민에 대해 얘기할 때 조금 뜸을 들였다.사실 그녀도 아까 기습 공격을 받을 때 두 명의 남자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 단숨에 범인을 제압해줄 줄은 몰랐다. 그때 화들짝 놀라 손에 든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뒷걸음치다가 발로 밟아버렸다.범인을 제압한 후 두 명의 남자는 그녀에게 자신들은 강지혁이 붙여준 경호원이라고 얘기해주었다.강지혁이 자신에게 사람을 붙였다는 사실은 그녀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렇게도 자세히 알 수 없었을 테니까.그리고 오늘 이렇게 눈앞에서 마주하니 확실해졌다.임유진은 경호원들이 범인을 차에 태우고 경찰서로 가겠다고 하자 같이 따라나섰
그녀와 시선이 마주한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몸이, 그의 심장이 그녀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려주는 듯했다.심장 고동 소리도 더욱더 크게 들려왔다.강현수는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지금은 단지 그녀와 더 가까워지고 싶을 뿐이고 그녀의 두 눈을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을 뿐이다.그녀의 맑은 두 눈동자에 그의 모습이 비쳤다.강현수는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와 이윽고 임유진의 앞에 멈춰서더니 그녀를 자신의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임유진은 강현수가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이런 행동을 할 줄은 몰랐던 터라 화들짝 놀란 얼굴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러다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그를 힘껏 밀어내려 했지만 강현수가 힘을 세게 주는 바람에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강현수 씨, 이거 놔요.”임유진이 낮게 경고했다.“안 놔. 안 놓을 거야. 이번에는 절대 안 놓을 거야.”강현수는 나지막이 그렇게 속삭이더니 마치 그녀를 자신의 몸에 딱 붙이려는 듯 그녀를 더욱더 세게 끌어안았다.이렇게 꼭 끌어안아야만 그녀를 잃을 뻔했던 불안감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고 공허했던 마음이 가득 찰 것만 같았다.강현수는 줄곧 그녀를 그저 자신의 상상 속 소녀의 성인 모습이라고만 생각했다. 임유진이 그토록 찾아 헤맨 소녀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는 모든 걸 내려놓고 그녀를 모르는 사람 취급하며 살아가는 게 무척이나 간단한 일일 줄 알았다. 그녀가 피를 토하고 앞에서 쓰러진다고 해도 모른 척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날 저녁 유승호 옆에서 가녀린 몸으로 오랜 시간 서 있으며 심지어 떠날 때 다리를 절뚝이는 모습을 본 순간 마음이 욱신거리며 아파 나기 시작했다.그 뒤로 강지혁과 다시 함께 있는 걸 보고 로펌으로 찾아갔다가 마침 그녀가 위험에 처한 걸 봤을 때는 몸이 본능적으로 그녀를 향해 달렸다.그녀의 몸에 아주 조금의 생채기가 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그리고 오늘, CCTV 화면이 더 이상 그녀의 모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걸까?!“강현수 씨, 농담이 지나치네요!”임유진이 화를 내며 말했다.“난 이런 일로 농담 같은 안 해.”강현수는 고개를 들어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는 두 눈을 마주하고 다시 한번 말했다.“임유진, 나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임유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설마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강현수의 뒤를 따라온 배여진 역시 임유진과 마찬가지로 믿기 힘들다는 얼굴이었다.아까 보안실에서 강현수는 스튜디오 앞에 잠깐 보였던 차량이 현재 경찰서 앞에 있다는 말을 듣더니 서둘러 차를 몰고 여기로 달려왔다.차에 오를 틈도 주지 않고 가버리는 강현수 때문에 배여진은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경찰서에 도착했다.그렇게 달려왔더니 설마 이런 장면을 목격하게 될 줄이야.강현수가 임유진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그 말을 자신이 아닌 임유진에게 할 수 있지?!그가 사랑해야 하는 여자는 자신이어야 하는데?꽤 많은 사람이 그녀를 강현수의 여자친구로 오해하는 지금 조금만 더 노력하면 공식적으로 여자친구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배여진은 마치 이 모든 상황이 다 임유진 때문인 것처럼, 자신의 누려야 할 것들을 임유진이 일부러 빼앗기라도 한 것처럼 분노와 질투의 감정을 가득 담아 임유진을 노려보았다.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두 사람 사이를 어떻게 해서든 갈라놔야 한다!배여진이 그들에게로 달려가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그때 갑자기 그녀 옆으로 누군가가 빠르게 지나가더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임유진과 강현수 쪽으로 걸어갔다.그녀는 그 누군가가 강지혁인 걸 보고는 깜짝 놀라버렸다.강지혁은 여기에 또 어떻게 온 거지?!강지혁이 거의 가까이 다가갈 때쯤 강현수는 본능적으로 뭔가를 느낀 듯 고개를 들어 강지혁 쪽을 바라보았다.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강현수는 지금 강지혁을 정면에서 보고 있었고 임유진은 등을 지고 있어 아직 강지혁을 발견하지 못했다.“강현수 씨, 방금 그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손길에 화들짝 놀랐다가 그 상대가 강지혁인 걸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네, 네가 왜 여기 있어?”그녀는 그 말을 내뱉고 나서 이내 스스로도 멍청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경호하던 경호원들이 경찰서까지 온 이상 강지혁이 모를 리가 없었다.“누나는 내가 여기 있는 게 싫어?”강지혁은 방금 임유진의 몸에 닿았던 강현수의 흔적을 지우기라도 하듯 그대로 똑같이 그녀를 껴안았다.이에 임유진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강지혁은 고개를 들어 강현수를 바라보았다.“내가 분명히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강현수는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그건 네가 이래라저래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강현수!”강지혁이 위협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강현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전에는 건드릴 수 없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지. 너랑 헤어진 마당에 문제 될 게 뭐가 있는데?”강현수는 다시 시선을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았다.“바로 대답할 필요 없어. 그리고 오늘 내가 했던 말 전부 다 진심이야. 강지혁이 줄 수 있는 건 나도 줄 수 있고 강지혁이 줄 수 없는 것도 난 너에게 줄 수 있어.”그의 얼굴은 오늘따라 유난히 더 진지해 보였다.임유진은 그이 말을 듣는 순간 어쩐지 그의 얼굴에서 어린 남자아이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만 같았다.“진짜야! 내가 너 꼭 찾으러 갈게. 그리고 너 데리고 재밌는 곳도 엄청 많이 가고 맛있는 것도 엄청 많이 먹고 정말 정말 즐겁게 해줄게!”어린 시절의 그 남자아이는 그녀에게 다짐하듯 이렇게 말했었다.“강현수, 그 입 닫아!”강지혁의 목소리가 임유진을 다시 현실로 끄집어 왔다. 그의 얼굴은 지금 무섭게 가라앉았고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네가 원하는 답변은 영원히 들을 수 없을 테니까.”“과연 그럴까?”강현수가 피식 웃었다.“어디 한번 네 말대로 되나 내가 원하는 대로 되나 지켜보든가.”두 남자를 둘러싼 공기가
하지만 진짜일까?눈앞에 있는 남자가 그 강지혁이 맞을까?S 시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을 찾기 더 힘들다는,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그 강지혁이 정말 임유진이 동생이라고 얘기했던 그 ‘동생’과 동일 인물일까?하지만 방금 임유진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은, 강현수를 경계하던 그 모습은 절대 단순한 누나 동생 사이 같지 않았다.그건 임유진을 사랑하는 한 남자의 눈이었다.강지혁과 강현수 이 두 남자가 지금 임유진을 두고 싸우는 건가?곽동현은 어쩐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한편 배여진은 어느새 강현수 곁으로 다가와 불쌍한 얼굴로 물었다.“현수 씨... 유진이 사랑한다는 거 진심이에요?”“그래.”강현수는 짤막하게 얘기했다. 배여진이 자신에게 어떤 마음인지 잘 알고 있지만 그는 그녀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없었다.그녀는 그저 생명의 은인일 뿐 그의 여자는 될 수 없었다. 처음 그녀를 보던 그 순간에도 그에게는 낯선 느낌밖에 들지 않았으니까.“하지만 유진이 옆에는 아직 강지혁 씨가 있잖아요. 헤어졌는데도 둘이 같이 있을 정도면 현수 씨랑은...”“배여진!”강현수는 그녀의 말을 잘라버리고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이건 내 일이야. 거기까지 해.”배여진은 그의 모습에 심장이 철렁했다. 미처 다하지 못한 말이 목구멍에 걸린 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강현수가 곁을 지나쳐 경찰서를 나갈 때야 비로소 입술을 꼭 깨물고 그를 따라나섰다.빠른 걸음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온 배여진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현수 씨 일에 일부러 간섭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조금 두려운 것뿐이에요!”이 말을 하는 그녀의 눈은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있었다.그리고 지금 하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두렵다고 한 건 진심이었다.“두렵다고?”강현수가 미간을 찌푸렸다.“현수 씨가 유진이랑 잘 되기라도 하면... 그럼 지금처럼 나한테 잘해주지 않을까 봐... 나와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들까 봐... 그래서 두려워요.”배여진은 이제 울먹거리기
“여진아, 앞으로 지나친 스킨십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불필요한 오해 받는 거 싫으니까.”강현수가 단호하게 말했다.자신의 마음을 몰랐을 때는 배여진이 옆에서 여자친구인 척하는 행동을 내버려 둘 수 있었고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면서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에게 배여진은 생명의 은인이라 그녀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몸값을 올리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아니다.사랑하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 버린 이상 그녀에게 괜한 오해를 받는 행동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배여진은 그의 말에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져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알겠어요. 그럼... 앞으로는 주의할게요.”불쌍하고 가녀린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눈에는 분노와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옆에 늘어트린 두 손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부들거렸다.이 모든 게 다 임유진 때문이다.고작 임유진에게 고백한 것만으로도 이렇게 선을 긋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눈에 훤했다.만약 임유진과 강현수가 정말 사귀기라도 한다면 임유진은 무조건 어릴 때의 진실을 그에게 말할 것이고 강현수는 무조건 임유진의 말을 믿게 될 것이다.그렇게 되면 그녀는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을 전부 다 잃게 된다.배여진은 상상만으로도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마을 사람들 모두 그녀가 미래 재벌가 사모님이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데 이대로라면 마을에서 제일 큰 놀림거리가 될 게 뻔했다.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조롱당하는 일만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든 임유진과 강현수가 이어지지 못하게 막아야만 한다!...벤틀리 차 안은 지금 지나치게 고요하다.강지혁은 뒷좌석에서 고개를 숙인 채 임유진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가녀리고 기다란 그녀의 손은 관절이 미세하게 변형되어 있었고 자세히 보면 손가락과 손등 위에 오래된 상처 같은 것들도 있었다.그녀의 손은
그 말에 임유진은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드디어 가족이 생긴 줄 알고 무척이나 좋아했었다.하지만 그 좋아했던 마음만큼 지금은 이 순간이 더욱더 잔혹하게 느껴졌다.강지혁은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누구든 단번에 반하게 만들 것 같은 얼굴이 천천히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아니면 강현수 때문에 그래? 강현수가 사랑한다고 하니까 이제는 내가 이렇게 만지는 것도 싫어졌어?”뜨거운 입김과는 반대로 그녀를 보는 그의 눈은 지금 서늘하기 그지없었다.“강현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그래?”강지혁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그 말은 강현수를 사랑할 일은 없다는 뜻인 거지?”“내가 사랑하든 안 하든 그게 중요해? 그리고 우리는 지금 연인이 아니라 누나 동생 사이야. 내가 만약 강현수를 정말 사랑하게 된다고 해도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임유진은 순간 욱해서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강지혁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지더니 차 안의 분위기도 순식간에 변해버렸다.이에 임유진은 어쩐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강지혁은 얼굴을 조금 더 그녀와 가까이 밀착시키더니 이윽고 두 사람의 살결이 닿고야 말았다.그리고 곧바로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정말 강현수를 사랑할 거야?”임유진의 몸이 움찔 떨리더니 곧바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녀는 지금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고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그녀는 강지혁이 지금 화를 내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것보다 더한... 마치 분노하는 것 같았다.그의 목소리도 그의 행동도 무척이나 다정하고 부드러웠지만 그는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만약 이때 그녀가 강현수를 사랑하겠다고 대답한다면 어쩐지 감당할 수 없는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응? 왜 말을 안 해? 정말 강현수를 사랑할 거야?”강지혁은 다시 한번 물었다. 마치 오늘 그녀의 입에서 그 대답을 꼭 들어야겠다는 듯이 말이다.“나는...”임유진은 바싹 마른 입을 힘겹게 열었다.“그럴 생각 없어.”그녀는 처음부터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