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수 옆에 서 있던 배여진의 몸이 티 나게 굳었다.강현수는 지금 모든 신경이 전부 임유진에게 가 있어 그녀의 말 같은 건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섬뜩한 소리를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할 만큼 화가 난 것도 전부 임유진 때문이었다.배여진은 만약 소지혜가 이대로 말을 하지 않으면 강현수가 정말 임유진 때문에 살인을 저지를 것 같은 무서운 예감이 들었다.대체 왜!임유진이 뭐라고!그토록 찾던 어릴 적 소녀를 눈앞에 두고 대체 왜 자꾸 임유진에게 신경을 쓰는 거지? 자신에게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게 맞지 않나?!소지혜는 지금 죽음이라는 공포에 몸이 점점 더 세게 떨려왔다. 전에 악역을 맡았을 때 누군가에게 목을 졸리는 신을 찍어본 경험이 있지만 이러한 느낌은 아니었다. 남자배우가 연기에 몰입해 진짜 그녀의 목을 세게 졸랐을 때도 그저 호흡만 딸릴 뿐이었지 이런 공포를 느끼지는 않았다.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목을 조르는 손은 강철이라도 되는 건지 아무리 벗어나려고 노력해봐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목 졸림 당하는 게 이토록 무서운 느낌일 줄은 정말 상상도 해본 적이 없다.소지혜는 임유진의 뒤에 강현수가 있는 줄 알았더라면 목을 졸리기 전에 실토할 것 그랬다며 이제 와서 의미 없는 후회를 했다.그때, 목을 조르던 손에 힘이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귓가에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마지막으로 말할 기회 줄 테니까 말해. 임유진 지금 어디 있지?”“저, 정말 모르겠어요. 아까 저 보러 온 팬한테 그 여자 얘기를 한 적은 있어요... 하, 하지만 그 뒤로는 정말 몰라요...”소지혜는 말을 더듬거리며 답했다.“마지막으로 그 팬을 본 게 어디지? 시간은? 그리고 그 팬 성별은?”“화, 화장실 쪽에서요. 아마... 15분 전이었을 거예요. 성별은 남자예요.”말을 마치자 강현수는 그녀의 목을 조르던 손을 갑자기 놔버렸다. 그 탓에 소지혜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쓰러지고 말았다.강현수는 서둘러 휴
연예계란 원래 가십이 넘쳐나는 곳이라 사람들은 저마다 제 멋대로 추측을 했다.한편 곽동현은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건지 어벙벙한 표정이었다.강현수와 임유진은 대체 무슨 사이인 걸까?강현수의 방금 그 모습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에 처한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사랑하는 사람?!곽동현은 무의식 속에 떠오른 단어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사랑하는 사람이라니. 허구한 날 여자친구를 바꾸는 강현수가, 눈앞에서 사람 하나 죽어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을 것처럼 냉정한 남자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강현수이 보안실에 도착했을 때 그가 원하는 CCTV 영상이 벌써 준비되어 있었다.영상을 보니 소지혜는 화장실앞에서 확실히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남자와 30초가량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소지혜가 세트장으로 들어간 다음 검은색 티셔츠 남자는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그때 임유진의 모습이 보이고 남자는 화장실에서 나와 임유진과 곽동현의 뒤를 따라갔다.정황상 이남자가 뭔짓을 한 게 틀림없어 보였다.강현수가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행적을 따라가려는데 임유진과 곽동현 그리고 그 검은색 티셔츠 남자가 카메라 앵글에서 벗어나 버렸다.“이 앞에는 CCTV가 없어 그 다음의 상황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으로부터 3분 뒤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입구에 멈췄다가 다시 금방 떠나버렸습니다.”보안실 팀장은 시간을 3분 앞으로 감아 차량이 보이는 장면을 띄웠다.강현수는 차량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옆에 있는 보안실 팀장에게 말했다.“경찰 쪽에 연락해서 먼저 신고하고 이 차량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와.”이 차량 안에 임유진이 있는 걸까?강현수는 지금 이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그녀가 불한당에게 납치당해 차에서 해코지라도 당할까봐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임유진이 다치는 상상같은 건 감히 할 수가 없었다.“어떡해... 설마 유진이가 납치라도 당한 걸까요?”강현수를 따라와 줄곧 화면을 보고 있던 배여진이 걱정하는 척 물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배여진이 아니었다. 그녀는 물컵을 억지로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강현수의 손으로 넘어간 물컵은 거세게 흔들리더니 곧 물이 절반이나 바닥에 쏟아져버렸다.강현수는 물컵을 제대로 쥐려고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컵은 더 세게 떨렸다.컵이 떨리는 것이 아닌 그의 손이 떨리는 것이었다.강현수는 컵을 쥔 자신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는 여태껏 이토록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했던 적이 없었다. 지금은 그의 몸뚱어리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임유진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듯했다....곽동현은 뜻밖에도 경찰서에서 임유진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어디 다친 건 아닌가 걱정했었지만 그녀는 다행히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미안해요. 걱정했죠.”임유진은 그를 보고 제일 먼저 사과부터 했다.“휴대폰이 고장 나서 전화를 할 수가 없었어요. 동현 씨 번호를 모르니까 유심을 꺼내 다른 휴대폰에 꽂고 전화해야 해서 시간이 조금 걸렸네요.”곽동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동현 씨 기다리다가 결정적인 단서가 생각났거든요. 그때 갑자기 이 남자가 뒤에서 나타나 나한테 스프레이를 뿌리려고 했어요. 마침... 길을 지나가던 시민 두 명이 금방 제압해줘서 그대로 경찰서로 데려왔어요.”임유진은 도움을 받은 시민에 대해 얘기할 때 조금 뜸을 들였다.사실 그녀도 아까 기습 공격을 받을 때 두 명의 남자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 단숨에 범인을 제압해줄 줄은 몰랐다. 그때 화들짝 놀라 손에 든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뒷걸음치다가 발로 밟아버렸다.범인을 제압한 후 두 명의 남자는 그녀에게 자신들은 강지혁이 붙여준 경호원이라고 얘기해주었다.강지혁이 자신에게 사람을 붙였다는 사실은 그녀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렇게도 자세히 알 수 없었을 테니까.그리고 오늘 이렇게 눈앞에서 마주하니 확실해졌다.임유진은 경호원들이 범인을 차에 태우고 경찰서로 가겠다고 하자 같이 따라나섰
그녀와 시선이 마주한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몸이, 그의 심장이 그녀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려주는 듯했다.심장 고동 소리도 더욱더 크게 들려왔다.강현수는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지금은 단지 그녀와 더 가까워지고 싶을 뿐이고 그녀의 두 눈을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을 뿐이다.그녀의 맑은 두 눈동자에 그의 모습이 비쳤다.강현수는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와 이윽고 임유진의 앞에 멈춰서더니 그녀를 자신의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임유진은 강현수가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이런 행동을 할 줄은 몰랐던 터라 화들짝 놀란 얼굴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러다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그를 힘껏 밀어내려 했지만 강현수가 힘을 세게 주는 바람에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강현수 씨, 이거 놔요.”임유진이 낮게 경고했다.“안 놔. 안 놓을 거야. 이번에는 절대 안 놓을 거야.”강현수는 나지막이 그렇게 속삭이더니 마치 그녀를 자신의 몸에 딱 붙이려는 듯 그녀를 더욱더 세게 끌어안았다.이렇게 꼭 끌어안아야만 그녀를 잃을 뻔했던 불안감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고 공허했던 마음이 가득 찰 것만 같았다.강현수는 줄곧 그녀를 그저 자신의 상상 속 소녀의 성인 모습이라고만 생각했다. 임유진이 그토록 찾아 헤맨 소녀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는 모든 걸 내려놓고 그녀를 모르는 사람 취급하며 살아가는 게 무척이나 간단한 일일 줄 알았다. 그녀가 피를 토하고 앞에서 쓰러진다고 해도 모른 척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날 저녁 유승호 옆에서 가녀린 몸으로 오랜 시간 서 있으며 심지어 떠날 때 다리를 절뚝이는 모습을 본 순간 마음이 욱신거리며 아파 나기 시작했다.그 뒤로 강지혁과 다시 함께 있는 걸 보고 로펌으로 찾아갔다가 마침 그녀가 위험에 처한 걸 봤을 때는 몸이 본능적으로 그녀를 향해 달렸다.그녀의 몸에 아주 조금의 생채기가 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그리고 오늘, CCTV 화면이 더 이상 그녀의 모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걸까?!“강현수 씨, 농담이 지나치네요!”임유진이 화를 내며 말했다.“난 이런 일로 농담 같은 안 해.”강현수는 고개를 들어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는 두 눈을 마주하고 다시 한번 말했다.“임유진, 나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임유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설마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강현수의 뒤를 따라온 배여진 역시 임유진과 마찬가지로 믿기 힘들다는 얼굴이었다.아까 보안실에서 강현수는 스튜디오 앞에 잠깐 보였던 차량이 현재 경찰서 앞에 있다는 말을 듣더니 서둘러 차를 몰고 여기로 달려왔다.차에 오를 틈도 주지 않고 가버리는 강현수 때문에 배여진은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경찰서에 도착했다.그렇게 달려왔더니 설마 이런 장면을 목격하게 될 줄이야.강현수가 임유진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그 말을 자신이 아닌 임유진에게 할 수 있지?!그가 사랑해야 하는 여자는 자신이어야 하는데?꽤 많은 사람이 그녀를 강현수의 여자친구로 오해하는 지금 조금만 더 노력하면 공식적으로 여자친구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배여진은 마치 이 모든 상황이 다 임유진 때문인 것처럼, 자신의 누려야 할 것들을 임유진이 일부러 빼앗기라도 한 것처럼 분노와 질투의 감정을 가득 담아 임유진을 노려보았다.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두 사람 사이를 어떻게 해서든 갈라놔야 한다!배여진이 그들에게로 달려가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그때 갑자기 그녀 옆으로 누군가가 빠르게 지나가더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임유진과 강현수 쪽으로 걸어갔다.그녀는 그 누군가가 강지혁인 걸 보고는 깜짝 놀라버렸다.강지혁은 여기에 또 어떻게 온 거지?!강지혁이 거의 가까이 다가갈 때쯤 강현수는 본능적으로 뭔가를 느낀 듯 고개를 들어 강지혁 쪽을 바라보았다.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강현수는 지금 강지혁을 정면에서 보고 있었고 임유진은 등을 지고 있어 아직 강지혁을 발견하지 못했다.“강현수 씨, 방금 그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손길에 화들짝 놀랐다가 그 상대가 강지혁인 걸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네, 네가 왜 여기 있어?”그녀는 그 말을 내뱉고 나서 이내 스스로도 멍청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경호하던 경호원들이 경찰서까지 온 이상 강지혁이 모를 리가 없었다.“누나는 내가 여기 있는 게 싫어?”강지혁은 방금 임유진의 몸에 닿았던 강현수의 흔적을 지우기라도 하듯 그대로 똑같이 그녀를 껴안았다.이에 임유진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강지혁은 고개를 들어 강현수를 바라보았다.“내가 분명히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강현수는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그건 네가 이래라저래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강현수!”강지혁이 위협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강현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전에는 건드릴 수 없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지. 너랑 헤어진 마당에 문제 될 게 뭐가 있는데?”강현수는 다시 시선을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았다.“바로 대답할 필요 없어. 그리고 오늘 내가 했던 말 전부 다 진심이야. 강지혁이 줄 수 있는 건 나도 줄 수 있고 강지혁이 줄 수 없는 것도 난 너에게 줄 수 있어.”그의 얼굴은 오늘따라 유난히 더 진지해 보였다.임유진은 그이 말을 듣는 순간 어쩐지 그의 얼굴에서 어린 남자아이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만 같았다.“진짜야! 내가 너 꼭 찾으러 갈게. 그리고 너 데리고 재밌는 곳도 엄청 많이 가고 맛있는 것도 엄청 많이 먹고 정말 정말 즐겁게 해줄게!”어린 시절의 그 남자아이는 그녀에게 다짐하듯 이렇게 말했었다.“강현수, 그 입 닫아!”강지혁의 목소리가 임유진을 다시 현실로 끄집어 왔다. 그의 얼굴은 지금 무섭게 가라앉았고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네가 원하는 답변은 영원히 들을 수 없을 테니까.”“과연 그럴까?”강현수가 피식 웃었다.“어디 한번 네 말대로 되나 내가 원하는 대로 되나 지켜보든가.”두 남자를 둘러싼 공기가
하지만 진짜일까?눈앞에 있는 남자가 그 강지혁이 맞을까?S 시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을 찾기 더 힘들다는,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그 강지혁이 정말 임유진이 동생이라고 얘기했던 그 ‘동생’과 동일 인물일까?하지만 방금 임유진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은, 강현수를 경계하던 그 모습은 절대 단순한 누나 동생 사이 같지 않았다.그건 임유진을 사랑하는 한 남자의 눈이었다.강지혁과 강현수 이 두 남자가 지금 임유진을 두고 싸우는 건가?곽동현은 어쩐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한편 배여진은 어느새 강현수 곁으로 다가와 불쌍한 얼굴로 물었다.“현수 씨... 유진이 사랑한다는 거 진심이에요?”“그래.”강현수는 짤막하게 얘기했다. 배여진이 자신에게 어떤 마음인지 잘 알고 있지만 그는 그녀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없었다.그녀는 그저 생명의 은인일 뿐 그의 여자는 될 수 없었다. 처음 그녀를 보던 그 순간에도 그에게는 낯선 느낌밖에 들지 않았으니까.“하지만 유진이 옆에는 아직 강지혁 씨가 있잖아요. 헤어졌는데도 둘이 같이 있을 정도면 현수 씨랑은...”“배여진!”강현수는 그녀의 말을 잘라버리고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이건 내 일이야. 거기까지 해.”배여진은 그의 모습에 심장이 철렁했다. 미처 다하지 못한 말이 목구멍에 걸린 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강현수가 곁을 지나쳐 경찰서를 나갈 때야 비로소 입술을 꼭 깨물고 그를 따라나섰다.빠른 걸음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온 배여진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현수 씨 일에 일부러 간섭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조금 두려운 것뿐이에요!”이 말을 하는 그녀의 눈은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있었다.그리고 지금 하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두렵다고 한 건 진심이었다.“두렵다고?”강현수가 미간을 찌푸렸다.“현수 씨가 유진이랑 잘 되기라도 하면... 그럼 지금처럼 나한테 잘해주지 않을까 봐... 나와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들까 봐... 그래서 두려워요.”배여진은 이제 울먹거리기
“여진아, 앞으로 지나친 스킨십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불필요한 오해 받는 거 싫으니까.”강현수가 단호하게 말했다.자신의 마음을 몰랐을 때는 배여진이 옆에서 여자친구인 척하는 행동을 내버려 둘 수 있었고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면서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에게 배여진은 생명의 은인이라 그녀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몸값을 올리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아니다.사랑하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 버린 이상 그녀에게 괜한 오해를 받는 행동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배여진은 그의 말에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져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알겠어요. 그럼... 앞으로는 주의할게요.”불쌍하고 가녀린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눈에는 분노와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옆에 늘어트린 두 손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부들거렸다.이 모든 게 다 임유진 때문이다.고작 임유진에게 고백한 것만으로도 이렇게 선을 긋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눈에 훤했다.만약 임유진과 강현수가 정말 사귀기라도 한다면 임유진은 무조건 어릴 때의 진실을 그에게 말할 것이고 강현수는 무조건 임유진의 말을 믿게 될 것이다.그렇게 되면 그녀는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을 전부 다 잃게 된다.배여진은 상상만으로도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마을 사람들 모두 그녀가 미래 재벌가 사모님이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데 이대로라면 마을에서 제일 큰 놀림거리가 될 게 뻔했다.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조롱당하는 일만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든 임유진과 강현수가 이어지지 못하게 막아야만 한다!...벤틀리 차 안은 지금 지나치게 고요하다.강지혁은 뒷좌석에서 고개를 숙인 채 임유진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가녀리고 기다란 그녀의 손은 관절이 미세하게 변형되어 있었고 자세히 보면 손가락과 손등 위에 오래된 상처 같은 것들도 있었다.그녀의 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