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혁과 백연신은 서로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주변의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오직 두 사람만 다른 세상에 있는 듯했다.그리고 고이준은 지금 강지혁의 뒤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그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만약 이대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번지기라도 한다면 뒷수습하기도 힘들 것이다. S 시가 강지혁의 손바닥 안이라고는 하지만 만약 백연신이 백씨 가문까지 끌어들이게 되면 서로 피만 보게 될 게 분명했다.게다가 백연신은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 같은 외모와 달리 상당히 잔인하고 무서운 사람이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사생아라는 타이틀을 달고 백씨 가문의 꼭대기까지 군림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그렇게 서로 대치 중이던 그때, 강지혁의 품속에 있던 임유진이 한지영을 향해 말했다.“지영아... 혁이가 나 데리러 왔어... 우리는 다음에 또 오자...”“응, 알겠어... 다음에 또 오는 거야.”다행히 술에 취한 두 여자 덕분에 차가웠던 분위기가 조금은 풀어졌다.강지혁은 임유진을 안은 채로 클럽을 나가버렸고 고이준도 서둘러 따라나섰다.백연신도 얼른 품속의 여자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려고 했지만 한지영이 싫다며 이리저리 발버둥을 쳐댔다.“그러지 말고 연신 씨도 같이 봐요, 응?”‘같이 보자고? 이 여자가 진짜.’이곳에 1분이라도 더 있게 되면 백연신은 정말 폭발해 버릴지도 모른다.그는 지금 당장에라도 오늘 한지영이 봤던 모든 저질스러운 광경들을 다 잊어버리게 최면이라도 걸고 싶은 마음이었다.백연신은 한지영의 말을 무시한 채 이번에는 그녀를 어깨 위에 올려놓고 클럽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차 조수석에 힘껏 던져버렸다.“나... 나 아직 다 못 봤는데 왜 데리고 나와요! 아무리 연신 씨라고 해도... 음악을 향한 나의 열정은 방해할 수 없다고요...!”한지영은 술에 취한 채 계속 중얼거렸다.그나마 다행인 건 자신을 데리고 나온 사람이 백연신이라는 건 아직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백연신은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다가 지금의 그녀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걸 보고 깊게
임유진은 두 손으로 강지혁의 목을 감싼 채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이건 혁이의 얼굴이다.“혁아, 그거 알아? 나 오늘... 너무 즐거웠어...”그녀의 말에 강지혁이 미간을 찌푸렸다.“즐거웠어?”“응... 즐거웠어... 사람들이랑 같이 춤추며 놀다 보니까 전부 다 잊어버릴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말은 이렇게 했지만 정작 잊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던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다만 지금 확실한 건 이렇게 혁이를 끌어안고 있으면 안심이 되고 오랜만에 다시 안정을 되찾은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지영이가 그러는데... 아까 스테이지에서 춤췄던 남자들이 요즘 가장 핫하대... 지영이는 머리를 흰색으로 염색한 남자가 제일 멋있다고 하는데... 나는 흑발이 제일 좋았어... 그리고 나도 옷 뺏을 수 있었는데... 지영이만 뺏었어... 그런데 내가 그거 갖고 싶다고 하면 지영이가 주겠대 헤헤...”임유진이 말을 뱉으면 뱉을수록 고이준은 차 안의 공기가 점점 더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지금은 차라리 술에 취해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이 이상 더 얘기해버리면 강지혁이 정말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노릇이니까.“그래? 너는 그 흑발이 제일 좋았어?”강지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차 안에서 울려 퍼졌다.고이준은 이 순간 아까 다섯 명 중 가장 중앙에 서 있던 흑발 남자가 불쌍해지기 시작했다.“응.”임유진은 단호하게 고개까지 끄덕였다.“하지만...”하지만 임유진의 다음 말로 고이준은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나는 역시... 우리 혁이가 제일 좋아.”강지혁의 차가웠던 눈이 그 말 한마디에 다시 부드럽게 변했다.우리 혁이...전에는 이런 식으로 마치 진짜 가족이라도 된 듯이 다정하게 불러줬었다.그녀의 손은 강지혁의 목에서 서서히 위로 올라가더니 그의 머리를 이리저리 매만졌다.“우리 혁이처럼 검은 머리가 좋아... 제일 예뻐...”강지혁은 그녀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머리가 헝클어지든 말든 그저
두 사람이 좁은 원룸 방에서 살았을 때도 강지혁은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그리고 그때 임유진은...“응, 당연하지!”임유진은 술에 취해 있는 상태이면서도 그때와 똑같은 대답을 했다.지금의 그녀는 술에 취한 상태라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기라도 한 걸까? 그때 임유진은 강지혁의 누나였고 강지혁은 그녀의 혁이었다.“그럼 착하게 굴면 내 누나도 해줄 거야?”누나가 되어 옆에 있어 준다면 강지혁은 그녀에게 사랑을 제외한 모든 걸 줄 수 있다.임유진의 꿈도 이루어 줄 수 있고 그녀를 낮잡아 봤던 사람들이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할 정도의 자리까지 올려줄 수 있다.자신의 옆에 있어만 준다면...아마 강지혁은 임유진이 곁에 있어야만 그 괴로움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나는 계속 네 누나였잖아... 혁아, 걱정하지 마. 내가... 내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 거야...”임유진의 눈이 점점 감기는가 싶더니 이내 목소리도 점점 작아지고 결국에는 침대에 뻗어버렸다.강지혁은 그런 그녀의 자세를 바로 해주고 이불을 덮어준 다음 헝클어진 머리도 정리해주었다.“정말 날 지켜주고 싶은 거라면 내 곁에만 있어. 그래야만 내가 안 아파...”그는 말을 하면서 그녀의 손을 자신의 심장 쪽으로 가져갔다.전에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기만 하면 더 이상 감정에 휘둘릴 일 없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올 줄 알았다.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녀가 떠난 순간부터 하루하루가 괴로워 미칠 것만 같았다.지금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녀를 자신의 시야 속에 두고 보고 싶을 때면 언제든 볼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백신은 인사불성이 된 한지영을 보며 이대로 집에 보내는 것이 아닌 일단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기로 했다.적어도 어느 정도 제정신으로 돌아온 뒤에 집으로 보내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으니까.그리고 아직도 품속에 꼭 껴안은 저 셔츠부터 어떻게 해야만 했다.백연신은 그녀의 손에 들린 셔츠를 보며 혀를 찼다. 자신의 옷은 이토록 소중히 다룬 적
백연신은 한지영을 안방 소파에 내려놓고 말했다.“이따 숙취해소제 마시고 나서 다시 집에 데려다줄게.”“싫어. 안 갈 거예요. 나 집 말고 아까 그 클럽으로 데려다 줘요... 나는 잘생긴 남자가 보고 싶다고요!”그녀의 말은 백연신을 도발한 거나 다름없었다.“잘생긴 남자?! 한지영, 내가 지금 이성적으로 얘기할 때 적당히 하지? 나한테 오늘 일해야 한다고 거짓말까지 하고 감히 그런 클럽을 가? 내가 요즘 많이 풀어줬지. 그래서 이러는 거지, 응?”한지영은 그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술에 취해있는 상태라고는 하나 사리 분별은 되는 것 같았다.“나... 거기 있는지는 어떻게 알았어요? 연신 씨한테 거기 간다고 얘기한 적 없는 것 같은데...”한지영은 볼을 부풀리며 혼자 중얼거렸다.“어떻게 알았냐고? 그걸 몰라서 물어?!”신나서 사진까지 올려놓은 것도 모자라 위치까지 태그했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이건 와서 잡아가라는 것과 다를 것 없지 않은가?“됐고, 그 셔츠나 내놔.”백연신은 아까부터 눈에 거슬렸던 셔츠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싫어요!”한지영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오히려 셔츠를 더 꽉 끌어안았다.“이건 내가 끅... 내가 얼마나 힘들게 뺏은 건데!”저딴 셔츠를 뺏기까지 했다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그딴 건 왜 뺏어?”“그야... 기념으로요. 걔들이 얼마나 잘생겼는지 알아요?”“그래?”백연신은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며 두 손을 소파에 올려놓은 채 한지영을 자신의 품속에 가뒀다.“얼마나 잘생겼는데?”“그게... 아무튼, 되게 잘생겼어요... 몸도 좋고... 매력적이고...”한지영은 술에 취해 그 잘생긴 얼굴들을 형용할 단어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고 말도 점점 꼬였다.백연신은 자신의 얼굴을 그녀의 얼굴 가까이 가져가며 물었다.“그럼 걔들이 좋아, 내가 좋아?”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로 물어보는 그의 얼굴은 단순히 섹시한 걸 넘어서 위험하기까지 했다.만약 한지영이 이래도 그 남자들이 더 좋다고 하면 백연
하지만 이 유치한 방법이 먹힌 건지 곧 죽어도 놓지 않을 것 같던 그녀의 손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나빴어... 어떻게 이거 하나 못 가지게 해요?”그녀의 눈에는 서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내가 더 좋다며? 그런데 다른 남자 셔츠가 왜 필요해?”그는 한지영이 술에 취한 걸 잊어버린 건지 도리를 따지기 시작했다.“걔들은 춤도 추고 노래도 하는데 연신 씨는 그런 거 못 하잖아요...”백연신은 기가 막혀 바로 반론했다.“내가 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그럼 내 앞에서 춰봐요. 아까 걔들처럼 옷도 벗으면서요.”한지영은 굳이 마지막 말까지 덧붙였고 백연신은 그런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내게 네 앞에서 춤을 추면 앞으로 다른 남자 안 볼 거야? 맹세할 수 있어?”“네, 맹세해요!”한지영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좋아. 그 말 꼭 기억해. 만약 어겼다가는...”그의 목소리가 잠시 멈추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물론 어기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지만.”그는 그 말을 끝으로 한지영의 앞에서 서서히 옷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백연신은 일전 해외 클럽에서 봤던 것처럼 서서히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춤을 추는 건 쉽다. 오늘 그 남자들보다 더 잘 출 자신도 있고 이 여자의 눈이 자신에게 머무를 수 있다면 몇 번도 더 춰줄 수 있다.한지영이라는 여자는 잡혀줄 것 같으면서도 좀처럼 잡혀주지 않는다. 입으로는 항상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틈만 나면 바로 다른 남자를 눈에 담아 버리는 여자니까.백연신은 그녀의 시선이 다른 남자에게 머무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녀의 모든 신경이 자신에게만 향했으면 좋겠고 다른 남자를 볼 틈도 없이 자신만 사랑해줬으면 좋겠다.옷이 한 벌 한 벌 벗겨지기 시작하고 한지영은 다른 남자의 셔츠는 어느새 옆으로 치워버린 채 황홀한 눈빛으로 눈앞의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예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한지영은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그대로 백연신을 덮쳐버리듯 달려들
“네, 네, 알겠습니다.”도우미는 숙취해소제만 남겨두고 헐레벌떡 방을 나갔다.안방에는 또다시 두 사람만 남았다.“한지영, 얼른 일어나.”“싫어요!”한지영은 술에 취했어도 이 세글자만은 또렷하게 뱉었다.“자, 착하지. 얼른 숙취해소제부터 마셔.”백연신이 마치 아이 다루듯 부드럽게 말하는 걸 부하직원이 봤으면 아마 경악을 할 것이다.그는 한지영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이렇게 다정해 본 적이 없다.“나 어떡해요... 점점 더 연신 씨가 좋아지는 것 같아요...”술에 취해 내뱉는 소리가 분명했지만 그런 그녀의 말에도 백연신의 심장은 거세게 뛰어버리고 말았다.“그렇게 날 좋아하면서 그딴 건 왜 보러 간 거야? 게다가 다른 남자 옷까지 뺏고.”“그거야... 유진이 스트레스 풀어주려고 간 거죠, 헤헤... 물론 걔들이 잘생기긴 했지만...”한지영은 트림을 한번 시원하게 하더니 양손으로 백연신의 얼굴을 감쌌다.“그건 그냥 감상만 하는 거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연신 씨예요... 나는 연신 씨가 정말 정말 너무 좋아요...”그녀는 말과 함께 마치 느끼한 아저씨처럼 백연신의 볼 곳곳에 뽀뽀해댔다.백연신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밀어내기는커녕 뽀뽀 세례를 가만히 받고만 있었다.지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찔러왔지만, 그 상대가 한지영이라서 오히려 향기롭기도 했다.한지영은 좋아한다고 얘기할 때마다 그에게 입을 맞췄다.“한지영, 나한테 사랑한다고 해 봐.”이렇게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야만 이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가실 것 같았다.한지영은 그 말에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치더니 백연신의 마음이 두근거릴 만큼 환하게 웃었다.“나는 연신 씨를 사랑해요.”백연신은 그 말을 끝으로 그녀의 머리를 잡아 거칠게 입을 맞춰왔다.그녀가 계속 이렇게 사랑해줬으면 좋겠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자신만을!이번 생은 꼼짝없이 한지영이라는 여자에게 감겨버렸지만 이 지독한 사랑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다음 날 아침.한지영은 알람 소리에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어제 술을 너무 마신 탓에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러다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크게 외쳤다.“유진이는요? 나 어제 유진이랑 같이 갔었는데?”그 말에 백연신은 간신히 눌렀던 화가 또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유진 씨랑 같이 있었던 건 기억이 나나 보지? 어제 나한테 꼭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바쁘다며, 그런데 그딴 곳을 가?”한지영은 잘못한 건 아는지 이불 속에 얼굴을 반쯤 파묻었다.“유진이가 요즘 스트레스받는 것 같아 데리고 간 거예요. 그리고 나 일 한 건 맞거든요? 다 마치고 오후쯤에 유진이한테 갔죠.”“그래? 그럼 왜 그렇게 신이 나서 옷까지 뺏었을까? 평소 내 옷은 눈길도 안 주더니, 애먼 남자 옷은 그렇게 꼭 쥐고 안 놔?”화를 내는 건 분명했지만 그녀의 머리를 마사지해주는 그의 손은 여전히 부드러웠다.“그, 그건... 그것도 유진이 주려고 했죠!”한지영은 임유진 핑계를 대며 이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다. 그리고 어제 술김에 임유진이 원한다면 주겠다 하기도 했으니 딱히 거짓말한 것도 아니다.“그러고 보니 그 셔츠는 어디 있어요?”한지영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버렸어.”백연신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한지영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아쉬움 가득한 얼굴을 했다.“그걸 버리면 어떡해요. 그거 인터넷에 팔면 10만 원은 받을 수 있었다고요!”그렇다. 그녀는 지금 돈이 아까운 것뿐이다.“됐어, 그 돈 내가 줄게.”“그게 같아요? 돈도 내가 직접 벌어야 좋은 거라고요!”한지영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그의 손에 자신의 머리를 맡겼다.“연신 씨 조금만 더 세게 해봐요. 응, 거기. 거기 좀 더 주물러봐요.”백연신은 미안해하며 납작 엎드려도 모자랄 판에 당당하게 명령까지 하는 그녀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그럼 어제 유진이 먼저 데려다주고 여기로 온 거예요? 유진이도 많이 취했죠?”“많이 취하긴 했는데 유진 씨 데려다준 건 내가 아니라 강지혁이야.”그 말에 한지영이 눈
“그럼 우리가 어젯밤, 같이 있었다는 것도... 세상에...”한지영은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가뜩이나 보수적인 집안인데 그런 집안의 딸이 남자를 먼저 덮치고 밤을 보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마어마한 잔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나랑 같이 있는 게 창피해?”괴롭게 신음하는 그녀를 보며 백연신은 괜스레 기분이 좋지 않아 물었다.“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한지영은 서둘러 해명했다.“우리 엄마 아빠는 정말 보수적이라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우리가 함께 밤을 보냈다는 걸 알면 뒷목 잡고 쓰러질까 봐 그래요.”백연신은 그녀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부모님께는 술 취한 너를 호텔 방에서 재워뒀다고 했어.”한지영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일단 옷부터 갈아입어. 해장국 끓이라고 해뒀으니까 그거 먹으면 속도 괜찮아 질 거야.”어젯밤 결국 그녀에게 숙취해소제는 먹이지 못했다.“알았어요.”백연신은 침대에서 내려가 그녀에게 새 옷을 건네주더니 자기도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기 시작했다.한지영은 옷을 갈아입는 그의 행동을 눈도 깜빡하지 않고 바라보았다.고작 옷을 입는 것뿐인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아무리 취해도 기억을 잃는 게 아닌데... 한지영은 어젯밤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게 한스러울 따름이었다.“왜 그렇게 봐?”옷을 다 갈아입은 백연신이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물어보자 한지영은 아쉬운 듯 시선을 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백연신이 가져다준 옷을 입으려고 들어보니 그건 명품이었고 가격은 그녀의 1년 수입보다 높았다.그녀는 잠깐 멈칫하다가 남자친구가 주는 것이니 그냥 당연하게 받기로 했다.한지영은 씻은 후 백연신과 함께 아래로 내려가 아침을 먹은 후 숙취해소제도 마셨다.그것 또한 마시기 싫다고 억지를 부리는 걸 백연신이 어르고 달래 힘겹게 다 마셨다.백연신은 한지영을 디자인 스튜디오까지 데려다주고 그녀가 내릴 때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다음은 없어. 다시는 그딴 곳 갈 생각하지 마. 알았어?”“알았어요.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그 언젠가 임유진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그를 떠나면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으면 해서 일지도 모른다....탁유미는 이틀 정도 중환자실에 있다가 모든 수치가 안정된 후 바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다만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앞으로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만 했다.탁유미는 간호사가 들어와 약을 갈아줄 때마다 보이는 수술 자국을 보면서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그녀가 아무리 원치 않았다고 해도 지금 그녀의 몸 안에 있는 간은 이경빈의 간이었다.어쩌면 하늘이 조금은 그녀를 가엽게 여겨준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살게 된 건지도 모른다.윤이와 김수영은 요 며칠 거의 탁유미 곁에서 떨어지지 않다시피 했고 임유진도 자주 탁유미를 보러 병원에 왔다.“유진 씨,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힘들게 왔다 갔다 하고...”탁유미는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의 큰 배를 바라보았다.지금쯤 집에서 태교나 들으며 휴식을 취해도 모자란 데 괜히 자신 때문에 임유진이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았다.“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가 나였으면 안 이랬을까요?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나 윤이 데리고 나갈 테니까 둘이서 얘기하고 있어.”김수영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윤이를 안아 들며 보호자가 쉴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탁유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혁이가 그러는데 이경빈 씨도 며칠 전부터는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대요. 그런데... 언니 병실까지 왔다가 매번 들어오지는 못하고 다시 돌아가나 봐요.”그 말에 탁유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이경빈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에요. 어차피 이경빈도 몸이 다 나아지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고 나는 계속 여기서 살게 되겠죠. 물론 나랑은 끝이라도 윤이랑은 부자간의 정이 있으니까 둘이서는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이경빈 씨와는 정말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거예요?”임유진의
다시 눈을 뜬 이경빈이 보게 된 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강지혁이었다.마취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그런지 통증 같은 건 없었다.“유미는... 어떻게 됐습니까?”이경빈이 힘겹게 입을 열며 물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탁유미 시는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이틀 정도 경과를 지켜봐야 한대요.”그의 말에 대답해준 건 강지혁이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수술이 무사히 끝났으니 된 거다.앞으로 두 번 다시 탁유미 곁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몸 안에 그의 일부가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그녀가 죽을 때까지 줄곧 함께하게 될 거니까 그것으로 됐다.그리고 그녀가 준 골수도 평생 그와 함께 할 테니 그 역시 이것으로 그녀와 평생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이경빈은 탁유미의 상태 외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몸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의사가 수술 후 주의사항과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에 관해 설명해주는데도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침묵만 고수할 뿐이었다.강지혁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사와 간호사가 전부 다 나간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탁유미 씨 사건을 뒤엎으려고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이강 그룹이 큰 타격을 입게 될 겁니다. 어쩌면 판결 결과에 따라 이경빈 씨는 감방살이하게 될지도 모르고요.”“알고 있어요.”이경빈이 담담하게 말했다.자신의 결정으로 그룹에 어떤 파문이 일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가 받아야 할 벌이다.복수하겠다는 생각에 매몰돼 공수진의 말만 믿고 거짓 증언한 그의 업보다.탁유미가 형을 살게 된 것에 제일 큰 공헌을 한 건 바로 그의 증언이었다.그러니 그녀를 감옥으로 보낸 건 그나 다름없었다.“정말 앞으로는 탁유미 씨 앞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지혁이 물었다.“내가 유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유미가 그걸 원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들어줄 수밖에요.”그 소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