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하는 중간에도 기억을 되짚어보듯 목소리가 조금씩 끊겼고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그녀의 눈빛이 암기했던 무언가를 기억해 내려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는 것이다.만약 아까 했던 답변들이 전부 소지혜가 미리 준비한 것들이라면 임유진의 가설에도 더더욱 힘이 실리게 된다. 당당하다면 굳이 이런 준비를 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그렇게 계속 생각을 이어나가려는데 누군가의 호통이 들려왔다.“거기 뭐야! 당장 카메라 앞에서 안 나가?”임유진이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그녀는 어느새 다른 촬영 스튜디오의 카메라 앞에 서 있었다.“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그녀는 황급히 머리를 숙여 사과했다.“어디 감히 엑스트라 따위가 촬영을 망쳐? 그리고 너...”감독으로 보이는 사람의 호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여자 엑스트라 아닙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강현수가 그녀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감독은 강현수의 등장에 조금 놀란 듯하더니 바로 자세를 낮췄다.“현... 현수 씨... 현수 씨가 여기는 웬일로...”“제 지인이니 금방 데리고 나갈게요. 촬영 계속하세요.”그는 말을 마친 후 임유진을 데리고 스튜디오를 나갔다.“여긴 어쩐 일이에요?”강현수가 임유진을 향해 물었다.“옆 스튜디오에서 드라마를 찍고 있는 여배우가 제가 조사하는 사건의 증인이라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요. 아까는 고마웠어요.”말을 마친 임유진은 다시 갈 길을 가려고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하지만 그녀의 손목은 곧바로 강현수에게 잡혀버리고 말았다.“강현수 씨? 저한테 무슨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세요?”강현수는 눈앞에 있는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임유진의 얼굴은 촬영장 열기 때문인지 옅은 붉은 색을 띠고 있었고 머리는 간단하게 포니 테일로 묶어 올렸다. 그리고 그 예쁜 눈은 지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방금 임유진의 손을 잡은 건 정말 자기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아마 이대로 그녀를 보내기 싫다는 생각에 몸이 먼저 반응한 듯하다
만약 이대로 계속 대답을 하지 않으면 강현수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헤어졌으니 당연히 그러겠죠? 궁금한 거 해결됐으면 이제 손 좀 놔줄래요?”“그러면 지금은?”지금은 그 누구도 사랑하고 싶지 않고 혼자 잘살아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임유진은 한숨을 내쉬더니 그를 향해 답했다.“대체 그게 왜 궁금한데요? 그때 산속에서 얘기하지 않았어요? 앞으로 우리는 모르는 사이라면서요.”강현수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버렸다.모르는 사이...고작 임유진을 모르는 사람 취급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 몰랐다.며칠 전 당구장에서 그녀가 홀로 당구대 옆에 초라하게 서 있었을 때는 도저히 시선을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임유진만 보면 간신히 부여잡았던 마음이 또다시 파도가 치는 기분이다. 심지어 얼마 전 강지혁과 헤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마음이 들뜨기도 했다.대체 왜?그녀를 쟁취할 기회가 생긴 것 같아서? 우스운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천하의 강현수에게 기회라니.S 시를 통틀어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그와 잠자리 한 번 가져보려고 애를 쓰는가. 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그의 시선 한 번 받기 위해 노력하는가. 이런 그가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런 마음이 든다는 건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임유진이 아무리 매력이 넘친다고 해도 연예계에는 그녀보다 더 예쁘고 더 매력 있는 여자가 차고도 넘친다.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되뇌어봐도 그녀를 보는 순간 마음은 고삐 풀린 말처럼 통제되지 않는다.지금도 그는 임유진의 얼굴을 1초라도 더 보기 위해 시선을 떼지 않고 있다.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버렸을까?“현수 씨, 유진아, 지금 둘이 뭐 하는 거야...?”황급히 달려온 배여진의 눈에 질투가 일렁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표정을 바꾸고 강현수에게 얘기했다.“혹시 유진이가 현수 씨한테 실수한 거 있어요? 그런 거라면 저를 봐서라도 유진이 용서해 주세요.”자기가 뭐라도 되는듯한 그녀의 말에 임유진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스
고작 단역인 배여진은 강현수의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제작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됐고 감독은 그녀에게 분량을 더 늘려주기도 했다.그러니 아까까지만 해도 오늘은 정말 순조로운 하루였다.그런데... 임유진이 나타나고 나서 모든 게 달라졌다.아까 강현수가 임유진의 손을 잡았을 때 제작팀 사람들은 그 두 사람과 배여진을 보며 쉬쉬거렸다. 그리고 이제는 곁에 있어야 할 강현수도 사라져 버렸다...배여진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부러움과 질투에서 한순간에 조롱과 동정으로 변해버렸다.임유진 때문에!강현수는 배여진의 인생에서 다시 없을 행운이고 유일한 동아줄이다. 인생을 피게 해줄 남자를 고작 임유진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다음날, 임유진은 김은아를 만나러 감옥으로 향했다. 김은아는 교통사고를 일으킨 죄로 1년 형을 받아 현재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새로운 정보가 있을까 싶어 면회를 요청해 그녀와 단둘이 남겨졌다. 하지만 임유진이 원고 쪽 변호사라고 인사를 하니 엄청난 거부반응을 보이며 당장 눈앞에서 꺼지라고 소리쳤다.도저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임유진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떠나기 전 일부러 김은아에게 그날 강아지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놀라셨겠다며 한마디를 꺼냈다.“강아지 아니고 고양이예요. 고양이가 튀어나왔어요. 삼색 고양이요!”김은아는 임유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반사적으로 외쳤다. 심지어는 어떤 무늬의 고양이인 것까지... 마치 정말 그런 고양이가 있었다고 믿음을 주려는 사람처럼.“그래요. 고양이였죠, 참. 제가 다른 사건이랑 헷갈렸네요.”임유진은 이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아챘다.‘역시 김은아는 그저 죄를 뒤집어쓴 거고 그날 운전한 사람은 소지혜야.’돌아가는 길, 임유진은 사건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정황상 결론이 난 건 맞지만 증거가 없었다.가해자가 소지혜라고 특정한 건 단지 증인들의 증언과 그녀의 추측이 가미된 것이라 이 정도로는 증거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어떻게 해야 경찰이 다시 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직 정신을 못 차린 임유진이 다리에 힘이 빠져 넘어지려는데 누군가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와락 감싸 안았다.그리고 곧바로 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어떻게 된 거야?”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코가 닿을 거리에 강지혁이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경호원들이 방금 그 두 남자를 제압하고 있었다.“모르겠어. 모르는 사람이야.”강지혁이 미간을 찌푸렸다.“모르는 사람이라고?”“응.”임유진이 다시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너는 왜 여기 있어?”“너 보러.”강지혁은 바닥에서 앓는 소리를 내는 남자를 보고 다시 한번 임유진을 보더니 물었다.“아까 저 남자가 네 남자친구라고 하는 것 같던데, 맞아?”낮게 깔린 목소리는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말했잖아.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저런 짓을 하는 사람이 내 남자친구일 리가 없잖아!”이에 강지혁이 피식 웃었다.“하긴. 쓸데없는 걸 물었네, 내가.”그는 말을 마친 후 바닥에 앉아있는 남자에게로 다가가 그대로 명치를 힘껏 밟아버렸다. 그 남자는 ‘컥’ 하는 소리와 함께 눈물이 맺혔다.“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하면 안 되지. 남자친구? 네가 저 여자랑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보지?”싸늘하기 그지없는 그의 말에 남자는 의식이 흐려지는 걸 느끼며 온 힘을 다해 외쳤다.“아, 아닙니다. 제가 헛, 헛소리한 겁니다. 살려주세요. 윽.”임유진은 문득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때도 강지혁은 지금처럼 무자비했고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웠다.다만 당시의 그는 눈빛이 공허했고, 그 무엇에도 미련이 없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고작 유괴범들의 한낱 거짓말에도 신경을 쓸 정도로 눈동자에 힘이 꽉 차 있었다. 임유진의 남자친구라고 얘기한 것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인 것처럼.남자가 숨을 쉬지 못해 팔다리에 힘이 풀린 뒤에야 강지혁은 발을 치웠다.“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네, 알겠습니다.”강지혁의 명령에 경호원들은 길바닥에 뻗은 두 남
임유진은 이대로 집에 돌아가려고 했지만, 강지혁이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혁이라고 불러.”“아니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저희는...”“혁이라고 불러.”강지혁은 물러서지 않았다.“아니면 사람들 눈에 더 띄고 싶어서 그래?”임유진이 입술을 깨물고 주위를 둘러보자 이미 꽤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정말 인터넷에 동영상이 올라갈지도 모른다.“혀, 혁아...”이 두 글자를 내뱉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강지혁은 그제야 만족한 듯 예쁘게 웃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 있던 분노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임유진은 마치 제집인 양 당당하게 들어오는 강지혁을 보며 진지하게 이사를 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아무리 이사를 해도 강지혁은 또다시 이렇게 드나들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대체 왜 따라 들어오는 거야?”임유진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아까 그를 혁이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더 이상 존댓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저녁밥 차리려는 거야?”강지혁은 그녀의 손에 든 식자재를 보며 물었다.“응.”“그럼 나도 먹을 거니까 2인분 만들어.”임유진은 조금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1인분 요리할 재료밖에 안 돼. 배고프면 집에 가서 먹어.”“나는 네가 만든 게 먹고 싶어. 재료가 부족한 거면 지금 사 오라고 할게. 얘기해 봐, 뭐 필요한데?”강지혁의 고집은 보통 사람이 꺾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임유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오늘 도와준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셈 치고 결국은 요리를 해주기로 했다.“알았어. 만들어 줄게. 반 시간 정도 걸릴 거야.”그러고는 몸을 돌려 주방으로 가 요리하기 시작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이 익숙한 듯 재료를 씻고 칼질하는 것을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요 며칠 그는 텅 비어버린 강씨 저택에서 매일 임유진의 얼굴만 떠올렸다. 그리고 저녁에는 그녀가 취침했던 방으로 들어가 그녀가 덮었던 이불을 덮고 그녀가 챙
강지혁은 두세 입 먹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맛있다, 누나.”임유진은 하마터면 음식이 목에 걸릴 뻔했다.“난 네 누나 아니야.”“그래?”강지혁이 웃었다.“내 누나하면 좋을 텐데? 나는 널 S 시 제일 꼭대기까지 올려놓을 수 있어. 네가 원하는 거면 그게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나는 너한테 줄 수 있어.”“그럼 내가 너한테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 달라고 하면, 그것도 들어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내 얼굴을 보는 게 그렇게도 싫어?”또한, 목소리도 아까와는 다르게 차가워졌다.“그래.”임유진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강지혁의 얼굴을 계속 마주하게 되면 영원히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를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려면 그를 보는 것부터 그만해야 한다.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팽팽해졌다.임유진은 분을 못 이긴 강지혁이 자리를 박차고 떠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다시 미소를 띠며 말했다.“하지만 나는 네가 보고 싶어.”이 말에 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걸까...“밥 먹어. 오랜만에 너와 밥 먹는 건데 날 선 채로 있기 싫어.”강지혁은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전에는 나랑 밥 먹는 거 좋아했던 것 같은데. 내가 늦게 들어와도 항상 나 기다렸다가 먹었잖아.”임유진은 다시 밥을 먹는 그를 보며 목이 메어왔다.전에는 강지혁과 같이 밥을 먹는 게 좋았다. 그런 모습이 진정한 가족 같다는 생각을 했으니까.하지만 지금은... 같이 식사하는 이 상황이 우습게 느껴졌다.임유진도 수저를 들고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분명히 평소와 똑같은 음식인데 지금은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그 뒤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집 안은 두 사람의 식사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밥을 다 먹은 후 임유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이제 밥도 다 먹었잖아. 그만 가줄래?”“너야말로 생각 해봤어? 내 누나가 되는 거.”강지혁이 태연하게 되물었다.“강지혁, 너는 한때 너의 연인이
강지혁이 미간을 찌푸렸다.“왜?”그게 임유진의 남은 자존심이니까.이미 짓밟힐 대로 짓밟혀 조각밖에 남지 않은 자존심이지만 그거라도 지켜야 했다.“내가 원하는 가족에 네 자리는 없어. 나와 넌 그 어떤 관계도 될 수 있지만, 가족은 못 돼. 이건 확실해.”‘가족’이라는 단어는 어릴 때부터 쭉 갈망해 왔던 간절함이 묻어있는 그런 단어다.그러니 이런 이상한 관계에 가족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강지혁의 매서운 눈빛은 아프게 그녀의 마음을 할퀴었다.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우리 두 사람은 가족이 될 수 없다고 그렇게 무언의 말을 전했다.그때 강지혁이 피식하고 입꼬리를 올리더니 조금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그럼 내기할까? 나는 조만간 네가 네 입으로 나한테 한 번만 더 내 누나가 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서 말이야.”너무나도 확신하는 듯한 그의 말에 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그럴 일은 없을 거야.”그녀 역시 확신하며 대답했다....강지혁이 월세방에서 나와 단지 밖으로 걸어가자 거기에는 고이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이준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물었다.“집으로 모실까요?”“그래. 그놈들한테서 알아낸 건?”“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이런 짓을 벌인 것까지는 확인했습니다. 임유진 씨가 병원 신세를 질 수 있게 엉망으로 만들어 놔달라고 시켰답니다. 하지만 모두 연락을 온라인으로 한 바람에 사주한 사람의 얼굴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그 말인즉슨 이런 짓을 벌인 배후가 누군지 알아내려면 시간이 더 걸려야 한다는 것이다.“계속 알아봐.”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은 강지혁을 따라 함께 차에 올라탔다.“유진이한테는 사람은 계속 붙여둬. 오늘처럼 위험한 일에 휘말리게 하지 말고. 그리고 근래 유진이한테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들을 알아봐.”고이준은 알겠다고 한 뒤 룸미러로 강지혁을 바라봤다.‘역시 대표님은 아직 유진 씨를
게다가 경찰 쪽에서 재수사 해줄지도 의문이었다.“경찰서 쪽은 제가 가보죠.”차 변호사는 피곤해 보이는 임유진을 향해 말했다.“두 사람 만나고 오느라 수고했어요. 사건 때문에 제대로 잠도 못 잔 것 같은데 오늘 하루 휴가 줄 테니까 집에 돌아가서 쉬도록 해요.”차 변호사가 뭔가 오해를 한 것 같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건 사건 때문이 아니라 강지혁 때문이었으니까.하지만 부하 직원을 살뜰히 챙기는 모습을 보고 어쩌면 앞으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조금 마음이 놓였다.임유진은 기왕 휴가를 얻은 김에 탁유미와 윤이를 보러 가기로 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두 사람 모두 이 도시를 떠나게 될 테니까.그렇게 로펌을 나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려는데 비싼 차 한 대가 임유진 앞에 멈춰서더니 그 안에서 온몸에 명품을 걸친 여자가 내렸다.배여진이었다.임유진이 조금 의외라는 눈길로 보자 배여진도 그녀를 발견하고 반가운 척 다가왔다.“어머, 유진아, 안 그래도 너 찾으러 가려 했는데, 이렇게 만나네.”배여진은 지난번에 만났던 유승호를 통해 임유진이 이곳에서 변호사 비서 일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임유진은 전에 전도유망한 신인 변호사였지만 지금은 고작 비서 일이나 하고 있다.배여진은 비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시간 좀 내줄 수 있어? 너랑 하고 싶은 얘기가 좀 있는데.”“우리 사이에 할 얘기가 있나?”임유진이 쌀쌀맞게 되물었다.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사뭇 다른 성격이었고 임유진이 도시에서 공부하기 시작하고부터는 점점 더 접점이 없어졌다. 그러니 당연히 사촌 간의 정도 없다.“당연히 있지. 일 때문에 바쁜 거면 너희 사무실로 올라가서 얘기해도 되고. 설마 손님한테 차 한잔도 못 내줄 정도로 정 없는 회사는 아니지?”배여진은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을 꺼냈다. 계속 강현수의 옆에 있다 보니 마치 자신이 강현수가 된 줄 아는 것 같다.실상은 강현수를 떠나면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다.임유
설마 재벌과 사귀었던 신데렐라가 주변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한지영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조나연을 바라보았다. 조나연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이 번기 회에 자신을 깎아내리며 조롱하려는 게 분명했으니까.조나연은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묘하게 그녀를 깎아내렸다. 게다가 한지영이 없을 때면 다른 동료에게 두 사람은 얼마 안 가 반드시 헤어지게 될 거라며 저주 아닌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그러다 정말 헤어졌을 때는 한껏 기분 좋은 얼굴로 한지영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나는 두 사람 오래 못 갈 줄 알았어요. 솔직히 백연신 씨가 아무것도 없는 지영 씨와 진심으로 사귈 리가 없잖아요. 요즘은 남자들도 여자 배경을 본다고요.”진심이 아니었다고? 그럴 리는 없다.한지영과 사귀었을 당시 백연신은 늘 그녀에게 진심을 다해 행동했고 자신의 사랑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니 진심이 아니었다는 말은 틀렸다.하지만 조나연의 말에 맞는 말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한지영은 백연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못했으니까.“지금 돌이켜봐도 참 안타까워요. 만약 헤어지지 않았으면 지금쯤 사모님 소리 들으며 편히 살고 있을 텐데.”조나연이 안타까운 척 그녀를 비꼬았다.한지영은 그런 그녀를 차가운 눈길로 빤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피식 웃었다.“그렇게 안타까우면 백연신 씨와 나 사이에 다리 좀 놔주지 그래요? 말로만 계속 안타깝다고 하니까 괜히 놀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물론 제 착각이겠죠, 안 그래요?”한지영의 뼈 있는 말에 조나연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그리고 가만히 구경하던 동료들 역시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듯 이상한 눈길로 조나연을 바라보았다.조나연은 조금 머쓱한 얼굴로 웃더니 별다른 대답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한지영은 자리로 돌아간 후 소개팅 상대와 약속 시간을 잡으려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가 잠깐 멈칫하더니 저도 모르게 백연신의 기사를 검색했다.지난 5년간 그녀는 백연신을 완전히 내려놓을 작정으로 그와 관련
한지영은 한숨을 한번 내뱉더니 이내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엄마, 소개팅 같은 거 하기 싫다고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요. 남자는 내가 알아서 찾을 테니까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둬요. 이게 대체 몇 번째야.”“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면 내가 이러지 않겠지. 너 이제 20대 아니고 30대야. 34살이나 돼서 남자친구 한 명 없다는 게 말이 돼? 내일모레면 당장 노산에 진입하는데 그때 되면 점점 더 좋은 남자 찾는 게 어려워져!”이해영이 속사포로 말을 뱉어냈다.한지영도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소개팅을 주선하는지 잘 알고 있다. 34살이나 된 딸이 이대로 계속 남자와의 교제를 피하다 결국에는 남자도 자식도 없이 홀로 인생을 마감할까 봐 걱정되고 또 불안한 거겠지.사실 한지영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주의였다. 게다가 요즘은 실버타운도 잘 되어있어 정말 혼자가 된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하지만 부모님들은 그런 걸 바라지도 않거나와 그래도 결혼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었다.그래서 한지영은 결국 오늘도 소개팅을 수락하고 말았다.더 이상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기도 했고 말이다.“아, 알겠어요. 만나면 되잖아요. 톡으로 연락처 보내세요. 이따 연락할게요.”이해영은 딸의 말에 그제야 만족하며 전화를 끊었다.몇 초 후 한지영의 휴대폰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보낸 사람은 이해영이었고 내용은 소개팅할 남자의 프로필과 연락처였다.한지영은 메시지를 보고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뱉었다. 이해영의 말대로 그녀도 이제는 34살로 절대 마냥 어리기만 한 나이는 아니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백연신을 천천히 마음속에서 내려놓았다....정말?문득 마음속 깊은 속에서 이러한 의문이 떠올랐다.정말 백연신을 향한 마음을 완전히 접어버린 게 맞나?한지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이내 잡생각을 털어버리듯 머리를 흔들며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웬 동료 한 명이 그녀를 불렀다.“지영 씨,
얘기가 일단락되자 강지혁은 아들의 손을 잡고, 임유진은 딸의 손을 잡고, 그리고 두 아이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유치원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그런 네 사람의 뒤를 따라 딸과 함께 조용히 앞으로 걸어갔다.만약 전이였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강지혁의 옆에 서며 사람들의 뇌리에 그 모습을 각인하려고 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어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소민아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던 소안나는 강선현과 강선율이 맞잡고 있는 손을 빤히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강선율이 그녀의 손을 잡아준 건 첫 만남뿐으로 그 뒤로는 한번도 손을 잡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분명히 전보다 훨씬 예뻐지고 공주 옷도 입고 머리도 예쁘게 했는데 강선율은 다른 이들처럼 그녀에게 예쁘다고 칭찬해주기는커녕 점점 더 거리를 두며 이제는 말도 잘 섞으려고 하지 않았다.소안나는 그런 강선율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왜 자신의 손은 잡아주려 하지 않는 거지?결국에는 양녀라 정을 주지 않는 건가?경찰서 앞에서의 일이 있고 난 뒤 소민아는 강지혁의 사진을 들고 있던 여자아이가 바로 강씨 가문의 진정한 딸이고 강선율의 친여동생이라는 것을 소안나에게 얘기해주었다.소안나는 그 말을 듣고는 더욱더 기분이 나빠졌다. 갑자기 나타난 강선현에게 아빠와 오빠를 빼앗기는 것 같았으니까.유치원 입구에 다다른 임유진은 먼저 아이들을 안으로 들여보내고 선생님들과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강지혁은 그런 그녀의 옆에 선 채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강선율은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강선현의 손을 꼭 잡은 채 자리까지 이동했다. 그러고는 듬직한 오빠의 얼굴로 동생의 가방을 직접 옆에 내려놓아 주기도 했다.그 장면을 바라보던 소안나는 질투심에 씩씩거렸다.‘나한테는 한번도 그렇게 해주지 않았으면서! 오빠랑 먼저 알게 된 건 쟤가 아니라 안나잖아!’“엄마, 나도 율이 오빠 친동생 하면 안 돼요?”소안나가 고개를 홱 들며 소민아에게 물었다.소민아는 딸의 말에 서둘러 주위
소씨 모녀의 등장에 사람들의 두 눈은 금세 흥미로움으로 가득 찼다. 그도 그럴 것이 강지혁이 또다시 결혼하게 된다면 그 상대는 분명히 양녀의 어머니인 소민아라고 생각했으니까.임유진은 포르쉐에서 내린 소민아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간 집사와 고이준으로부터 전해 들은 말에 의하면 소민아는 소소하게 인기를 얻고 있던 인플루언서였다가 재벌 2세의 아이를 배고 그 집의 며느리로 들어가려다가 철저하게 버림을 받고 홀로 아이를 키우며 그간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소안나가 강씨 가문에 입양된 건 2년 전의 일로 강지혁은 소안나와 소민아를 위해 집도 주고 생활비도 다달이 보내주며 그 외의 큰 지출도 부담해주었다고 한다. 즉 소씨 모녀는 하루아침에 강지혁이라는 든든한 백을 둔 신데렐라 모녀가 됐다는 뜻이었다.지금 소민아가 입고 있는 옷이나 타고 있는 차량만 봐도 그간 얼마나 호의호식하며 지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임유진이 소민아를 훑어보고 있을 때 소민아도 마찬가지로 임유진을 훑어보고 있었다. 설마 레스토랑에서 언쟁을 벌였던 별 볼 일 없는 여자가 강지혁의 사망한 아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소민아는 강지혁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질투의 감정이 몸 곳곳에 퍼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하지만 그 감정을 겉으로 내비칠 수는 없었기에 소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임유진 씨 맞으시죠? 그날은 죄송했어요. 딸 일이라 괜히 흥분해서 언성을 좀 높였어요. 용서해주세요...”그 말에 임유진이 뭐라 대꾸하려는데 강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호칭 똑바로 해. 임유진 씨가 아니라 사모님.”차가운 그의 말에 주변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임유진이 강지혁의 아내였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임유진의 위치를 똑똑히 전하고자 하는 강지혁의 의도를 바로 알아챘다.5년 만에 돌아왔어도 임유진은 여전히 강지혁의 아내였고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었다.하지만 임유진이 누군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은 강지혁의 말에
게다가 5년 만에 돌아온 거라 그간 많이 변한 저택의 상황도 알아야 했고 새로운 사람들과도 익숙해져야만 했다.그래서 아이들 일에는 조금 소홀해졌다. 딸이 아버지를 원했던 만큼 아들도 마찬가지로 엄마를 원했을 텐데 말이다.저택 고용인들에게 듣기로 강지혁은 매일 아침 율이와 함께 저택을 나서기는 하지만 나가서는 서로 다른 차를 타고 각자의 목적지로 향한다고 한다.즉, 강선율은 그간 아버지가 아닌 도우미나 기사의 보호 아래 유치원에 갔다는 소리였다.임유진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또다시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또한 바쁘다는 이유로 율이에게 소홀했던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강선율은 임유진의 팔이 더 세게 자신을 끌어안자 조금 움찔했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안기는 일은 익숙지 않았지만 상대가 엄마라서 그런지 이런 식의 포옹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기분이 좋았다.게다가 앞으로는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 유치원으로 가주겠다는 말 또한 기분 좋게 귓가에서 맴돌았다....다음날.강선현이 유치원으로 가는 날, 임유진은 율이와 현이에게 똑같은 옷을 입혔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강선율은 바지고 강선현은 치마라는 것이다. 엇비슷한 키의 두 아이가 똑같은 옷에 똑같은 신발을 신은 채 가방을 메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절로 마음이 녹는 기분이었다.임유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두 아이를 품에 끌어안고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강선현은 그녀의 이런 행동에 이미 습관이 되었던 터라 꺄르르 웃으며 뽀뽀로 회답했지만 강선율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그녀의 행동을 받고만 있었다. 분명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귀가 살짝 빨개진 것을 보니 기분이 나쁜 건 아닌 듯했다.강지혁은 세 사람이 다정하게 스킨십하는 걸 보면서 저도 모르게 슬쩍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유치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과 임유진은 각자 아이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아이를 등원시키러 온 학부모들은 네 사람의 등장에 입을 떡 벌리며 그대로 굳어버렸다.강지혁은 좀처럼 유치원에 얼굴을 내비치
하지만 남매 사이가 하루가 다르게 좋은 것 같아 보이니 임유진은 괜히 뿌듯해 나며 기분이 좋았다.“내일 유치원 갈 때 아빠도 엄마랑 함께 현이 데려다주면 안 돼?”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히도 같이 가고 싶은 듯했다.강지혁은 아이가 이런 요구를 해올 줄은 몰랐는지 미간을 살짝 꿈틀거렸다.“유치원에 같이 가달라고?”“응! 원래 유치원 가는 첫날은 엄마랑 아빠가 함께 가줘야 하는 거야!”현이는 이번이 첫 유치원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아빠도 찾았으니 강지혁과 함께 등원하고 싶었다. 아빠가 있다는 기분을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사실 지금껏 아빠의 부재에도 잘 자라왔던 아이였지만 아무래도 아빠의 빈자리가 꽤 컸던 모양이다.“그래, 그럼 내일 유치원에 같이 가줄게.”강지혁의 말에 현이는 활짝 웃더니 곧바로 팔을 쭉 내밀었다. 품에 안기고 싶다는 뜻이었다.강지혁은 스킨십 많은 딸이 아직도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인 율이는 이제껏 이런 식의 요구를 해오지 않았으니까.하지만 임유진과 쏙 빼닮은 두 눈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아이에게로 팔이 뻗어졌다.현이는 강지혁에게 안긴 후 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지난번 서재에서처럼 볼에 쪽 하고 뽀뽀를 했다.“아빠가 최고야!”진심으로 기뻐 보이는 딸의 모습에 임유진은 괜스레 코끝이 찡해 났다.딸이 아빠의 존재를 그리워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새삼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조금 더 빨리 기억을 회복하지 못했던 것에 죄책감이 일었다.임유진은 눈물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바로 옆에 서 있는 아들을 발견했다.혹시 율이도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엄마가 있어야 하는 상황에 항상 없었던 것에 쓸쓸해 하지는 않았을까?“율아.”임유진은 그 생각에 강선율을 향해 팔을 활짝 열었다.“엄마가 안아줄까?”아이는 그 말에 어색해하며 답했다.“전 어린애가 아니에요. 동생이나 안아주세요.”말은 이렇게 하지만 은근히 원하고 있다는 눈빛을 보냈다.임유
그날 밤, 임유진과 강지혁은 마치 5년 전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열렬하게 사랑을 나눴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그녀가 더 적극적이라는 것이었다.강지혁은 정사가 끝이 난 후 노곤해진 그녀를 안아 들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욕실로 가 그녀를 깨끗이 씻겼다.아마 그의 이런 챙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임유진뿐일 것이다.다 씻은 후 강지혁은 임유진에게 가운을 입힌 후 다시 그녀를 안아 든 채 침대로 걸어왔다.임유진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혁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뿐이야. 강현수랑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야?”강지혁이 미간을 살짝 꿈틀거리며 물었다.“우리 다음에는 자세 좀 바꾸는 거 어때? 물론 리드하는 것도 좋지만 생각보다 내가 체력이 없어서.”“...”강지혁은 그녀의 말에 순간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 아까 그를 아래에 깔고 멋대로 주도권을 쥐어간 그녀의 행동만 생각하면 지금도 상당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어쩐지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면 그 무엇하나 자기 마음대로 흘러가는 게 없는 것 같았다. 강지혁은 임유진을 침대 위에 살포시 내려놓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너는 과거의 내가 선택했던 내 아내야. 예전의 내가 그렇게도 널 많이 사랑했다면 지금의 나도 널 사랑할 수 있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정말? 정말 날 사랑할 거야?”“그래. 하지만 절대 날 배신해서는 안 돼. 5년 전처럼 내 곁을 떠나서도 안 되고. 알았어?”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눈가를 어루만졌다.강지혁은 그날 별채에 있는 그의 아버지 앞에서도 그녀에게 비슷한 말을 했었다. 절대 자신을 떠나지 말라고.기억을 잃은 강지혁도 역시 아버지의 전철을 밟게 될까 봐 무서운 걸까?“혁아, 내가 널 떠난 건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 있어서였을 거야. 절대 원해서 널 떠난 건 아니었을 거야.”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눈가를 매만지며 어머니와 똑 닮았
내 말을 믿지도 않으면서 키스는 왜 해?임유진은 그 생각에 울컥하며 키스를 끝내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하지만 강지혁은 그녀가 피할 틈조차 주지 않았고 맹렬하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러다 임유진이 거의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을 느낄 때야 천천히 입술을 뗐다.“네가 못 믿는 건 아니고? 내가 널 그렇게 사랑했다는 걸?”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임유진은 방금의 키스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내쉬는 숨은 무척이나 거칠었다.“반대로 물어볼게. 그럼 너는? 너는 날 얼만큼 사랑하는데?”임유진은 귓가에 울려 퍼진 그의 목소리에 몸이 움찔 떨렸다.강지혁의 두 눈은 감겨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일까, 마치 두 사람을 감도는 공기와 모든 것이 한순간에 멈춰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간신히 진정한 임유진의 호흡이 또다시 흔들리며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잠깐의 침묵 후 강지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다시 떠진 그의 눈동자에는 싸늘함만이 감돌고 있었다.“그다지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앞으로 다시는 내 앞에서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다는 등의 말을 꺼내지 마. 그리고 네가 날 사랑한다는 말도.”강지혁은 차갑게 말을 내뱉고는 몸을 일으키려는 듯 천천히 그녀에게서 멀어졌다.이에 임유진은 만약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를 보낸다면 평생 이 순간을 후회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래서 그녀는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에 두른 후 더 이상 그가 멀어지지 못하게 했다.“혁아, 날 똑바로 봐!”다급한 그녀의 말에 강지혁의 몸이 멈추더니 이내 조금 놀란 듯한 시선을 그녀에게 보냈다.“내가 널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다고? 멋대로 추측하지 마.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지금도 또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렇게 궁금하다면 알려줄게.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임유진은 그 말을 끝으로 곧바로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그러고는 강지혁이 했던 키스와 달리 은근하고 유혹적이며 또 절절한 키스를 퍼부었다.키
임유진은 말을 하며 뒤로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몸을 돌린 순간 한 걸음도 채 내딛지 못하고 강지혁에게 손목이 잡혀버렸다. 그리고 눈앞이 핑 도는 느낌과 함께 어느새 침대에 눕혀져 버렸다.임유진은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겨를도 없이 강지혁의 몸이 그녀에게로 바짝 다가왔다.강지혁은 두 손을 그녀의 몸 바로 옆에 둔 채 얼굴을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 가져갔다.숨이 거칠고 눈동자가 이글거리는 것이 아주 단단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아까는 그렇게도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 도망가지? 네가 원하는 대로 얘기하고 있잖아.”“네가 흥분을 가라앉히면 다시 얘기하려고 했던 것뿐이야.”임유진이 버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일어나려고 할 때마다 강지혁이 누르는 바람에 좀처럼 상체를 일으키지 못했다.“혁아, 일단 좀 비켜봐.”임유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사람 사이는 무척이나 가까웠고 강지혁은 그녀에게 가감 없이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나는 지금 충분히 이성적이야.”강지혁이 답했다.그의 코는 거의 그녀의 코와 맞닿을 정도였다.몸을 가까이하면 할수록 임유진의 체취가 그의 몸을 감싸왔다. 마치 그의 정신을 쏙 빼놓는 게 목적인 것처럼 그를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었다.강지혁은 자신이 왜 이러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이렇게 그녀에게 화가 나는지 그는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신경이 쓰이는 걸까? 강현수와 그녀의 과거가?“강현수 좋아하지 말고 사랑하지도 마. 알아들었어?”강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다.“난 한번도 강현수를 좋아하거나 사랑한 적이 없어!”임유진이 외쳤다.“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계속 나였다. 뭐 그런 말이 하고 싶은 거야?”강지혁이 물었다.“그래.”임유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 없는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단호하게 외쳤다.“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임유진은 그 말에 멈칫했다.강지혁의 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