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이대로 집에 돌아가려고 했지만, 강지혁이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혁이라고 불러.”“아니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저희는...”“혁이라고 불러.”강지혁은 물러서지 않았다.“아니면 사람들 눈에 더 띄고 싶어서 그래?”임유진이 입술을 깨물고 주위를 둘러보자 이미 꽤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정말 인터넷에 동영상이 올라갈지도 모른다.“혀, 혁아...”이 두 글자를 내뱉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강지혁은 그제야 만족한 듯 예쁘게 웃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 있던 분노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임유진은 마치 제집인 양 당당하게 들어오는 강지혁을 보며 진지하게 이사를 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아무리 이사를 해도 강지혁은 또다시 이렇게 드나들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대체 왜 따라 들어오는 거야?”임유진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아까 그를 혁이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더 이상 존댓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저녁밥 차리려는 거야?”강지혁은 그녀의 손에 든 식자재를 보며 물었다.“응.”“그럼 나도 먹을 거니까 2인분 만들어.”임유진은 조금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1인분 요리할 재료밖에 안 돼. 배고프면 집에 가서 먹어.”“나는 네가 만든 게 먹고 싶어. 재료가 부족한 거면 지금 사 오라고 할게. 얘기해 봐, 뭐 필요한데?”강지혁의 고집은 보통 사람이 꺾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임유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오늘 도와준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셈 치고 결국은 요리를 해주기로 했다.“알았어. 만들어 줄게. 반 시간 정도 걸릴 거야.”그러고는 몸을 돌려 주방으로 가 요리하기 시작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이 익숙한 듯 재료를 씻고 칼질하는 것을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요 며칠 그는 텅 비어버린 강씨 저택에서 매일 임유진의 얼굴만 떠올렸다. 그리고 저녁에는 그녀가 취침했던 방으로 들어가 그녀가 덮었던 이불을 덮고 그녀가 챙
강지혁은 두세 입 먹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맛있다, 누나.”임유진은 하마터면 음식이 목에 걸릴 뻔했다.“난 네 누나 아니야.”“그래?”강지혁이 웃었다.“내 누나하면 좋을 텐데? 나는 널 S 시 제일 꼭대기까지 올려놓을 수 있어. 네가 원하는 거면 그게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나는 너한테 줄 수 있어.”“그럼 내가 너한테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 달라고 하면, 그것도 들어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내 얼굴을 보는 게 그렇게도 싫어?”또한, 목소리도 아까와는 다르게 차가워졌다.“그래.”임유진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강지혁의 얼굴을 계속 마주하게 되면 영원히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를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려면 그를 보는 것부터 그만해야 한다.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팽팽해졌다.임유진은 분을 못 이긴 강지혁이 자리를 박차고 떠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다시 미소를 띠며 말했다.“하지만 나는 네가 보고 싶어.”이 말에 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걸까...“밥 먹어. 오랜만에 너와 밥 먹는 건데 날 선 채로 있기 싫어.”강지혁은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전에는 나랑 밥 먹는 거 좋아했던 것 같은데. 내가 늦게 들어와도 항상 나 기다렸다가 먹었잖아.”임유진은 다시 밥을 먹는 그를 보며 목이 메어왔다.전에는 강지혁과 같이 밥을 먹는 게 좋았다. 그런 모습이 진정한 가족 같다는 생각을 했으니까.하지만 지금은... 같이 식사하는 이 상황이 우습게 느껴졌다.임유진도 수저를 들고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분명히 평소와 똑같은 음식인데 지금은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그 뒤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집 안은 두 사람의 식사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밥을 다 먹은 후 임유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이제 밥도 다 먹었잖아. 그만 가줄래?”“너야말로 생각 해봤어? 내 누나가 되는 거.”강지혁이 태연하게 되물었다.“강지혁, 너는 한때 너의 연인이
강지혁이 미간을 찌푸렸다.“왜?”그게 임유진의 남은 자존심이니까.이미 짓밟힐 대로 짓밟혀 조각밖에 남지 않은 자존심이지만 그거라도 지켜야 했다.“내가 원하는 가족에 네 자리는 없어. 나와 넌 그 어떤 관계도 될 수 있지만, 가족은 못 돼. 이건 확실해.”‘가족’이라는 단어는 어릴 때부터 쭉 갈망해 왔던 간절함이 묻어있는 그런 단어다.그러니 이런 이상한 관계에 가족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강지혁의 매서운 눈빛은 아프게 그녀의 마음을 할퀴었다.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우리 두 사람은 가족이 될 수 없다고 그렇게 무언의 말을 전했다.그때 강지혁이 피식하고 입꼬리를 올리더니 조금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그럼 내기할까? 나는 조만간 네가 네 입으로 나한테 한 번만 더 내 누나가 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서 말이야.”너무나도 확신하는 듯한 그의 말에 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그럴 일은 없을 거야.”그녀 역시 확신하며 대답했다....강지혁이 월세방에서 나와 단지 밖으로 걸어가자 거기에는 고이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이준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물었다.“집으로 모실까요?”“그래. 그놈들한테서 알아낸 건?”“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이런 짓을 벌인 것까지는 확인했습니다. 임유진 씨가 병원 신세를 질 수 있게 엉망으로 만들어 놔달라고 시켰답니다. 하지만 모두 연락을 온라인으로 한 바람에 사주한 사람의 얼굴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그 말인즉슨 이런 짓을 벌인 배후가 누군지 알아내려면 시간이 더 걸려야 한다는 것이다.“계속 알아봐.”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은 강지혁을 따라 함께 차에 올라탔다.“유진이한테는 사람은 계속 붙여둬. 오늘처럼 위험한 일에 휘말리게 하지 말고. 그리고 근래 유진이한테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들을 알아봐.”고이준은 알겠다고 한 뒤 룸미러로 강지혁을 바라봤다.‘역시 대표님은 아직 유진 씨를
게다가 경찰 쪽에서 재수사 해줄지도 의문이었다.“경찰서 쪽은 제가 가보죠.”차 변호사는 피곤해 보이는 임유진을 향해 말했다.“두 사람 만나고 오느라 수고했어요. 사건 때문에 제대로 잠도 못 잔 것 같은데 오늘 하루 휴가 줄 테니까 집에 돌아가서 쉬도록 해요.”차 변호사가 뭔가 오해를 한 것 같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건 사건 때문이 아니라 강지혁 때문이었으니까.하지만 부하 직원을 살뜰히 챙기는 모습을 보고 어쩌면 앞으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조금 마음이 놓였다.임유진은 기왕 휴가를 얻은 김에 탁유미와 윤이를 보러 가기로 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두 사람 모두 이 도시를 떠나게 될 테니까.그렇게 로펌을 나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려는데 비싼 차 한 대가 임유진 앞에 멈춰서더니 그 안에서 온몸에 명품을 걸친 여자가 내렸다.배여진이었다.임유진이 조금 의외라는 눈길로 보자 배여진도 그녀를 발견하고 반가운 척 다가왔다.“어머, 유진아, 안 그래도 너 찾으러 가려 했는데, 이렇게 만나네.”배여진은 지난번에 만났던 유승호를 통해 임유진이 이곳에서 변호사 비서 일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임유진은 전에 전도유망한 신인 변호사였지만 지금은 고작 비서 일이나 하고 있다.배여진은 비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시간 좀 내줄 수 있어? 너랑 하고 싶은 얘기가 좀 있는데.”“우리 사이에 할 얘기가 있나?”임유진이 쌀쌀맞게 되물었다.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사뭇 다른 성격이었고 임유진이 도시에서 공부하기 시작하고부터는 점점 더 접점이 없어졌다. 그러니 당연히 사촌 간의 정도 없다.“당연히 있지. 일 때문에 바쁜 거면 너희 사무실로 올라가서 얘기해도 되고. 설마 손님한테 차 한잔도 못 내줄 정도로 정 없는 회사는 아니지?”배여진은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을 꺼냈다. 계속 강현수의 옆에 있다 보니 마치 자신이 강현수가 된 줄 아는 것 같다.실상은 강현수를 떠나면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다.임유
웬일로 걱정하나 싶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다음 말이 본론이었다.“다만 현수 씨가 전에 네가 나인 줄 알고 헷갈린 적이 있었잖아. 그래서 앞으로는 현수 씨와 거리를 뒀으면 좋겠어. 불필요한 오해를 빚을 필요는 없잖아, 친척끼리, 안 그래?”임유진이 옅게 웃으며 되물었다.“불필요한 오해? 어떤 오해를 말하는 거야?”“저번에 방송국에서 너와 현수 씨가 손을 잡은 바람에 사람들이 좀 오해를 하더라고.”배여진은 조금 쑥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나와 현수 씨 지금은 아직 대외적으로 알리지는 않았지만 조만간...”그녀는 일부러 말끝을 흐려 임유진에게 상상의 여지를 남겨주었다.“나 강현수 씨한테 관심 없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네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그냥 아예 그 사람 눈앞에 띄지 않으면 더 좋잖아. 아니면... 내가 돈 줄 테니까 이곳을 떠나는 건 어때? 다른 지역에서 소소하게 장사하면서 산다던가, 이러면 너도 편할 거 아니야. 나한테 지금 4억 정도 여유자금이 있으니까 그 돈으로 발을 붙여보는 거 어때?”‘4억?’임유진은 강현수의 것이 분명할 돈으로 유세 떠는 그녀가 우스웠다.게다가 가짜인 배여진이 강현수의 돈으로 진짜인 임유진을 S 시에 쫓아내려고 하는데 어찌 우습지 않을 수 있을까?‘내가 그딴 제안에 넘어갈 정도로 멍청해 보이나? 아니면 욕심에 눈이 멀어 이런 짓을 하는 건가?’“만약 강현수 씨가 언니가 사기 치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그 4억을 되돌려 달라고 하는 거 아니야?”그 말에 배여진은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으며 표정이 점점 더 부자연스러워졌다.“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무슨 사기를 쳐?”“어릴 때 산에서 강현수를 구한 거 정말 언니 맞아?”임유진의 눈빛이 무섭게 그녀를 쫓았다.“당연하지.”“정말 산에서 강현수를 구한 거 언니 맞아?”임유진이 다시 물었다.“너 말이 좀 이상하다? 내가 아니면 누군데!”임유진은 싸늘해진 눈으로 그녀를 비웃듯 말했다.“언니, 내가
“그러니까, 언니, 앞으로 다시는 내 앞에서 그딴 말 하지 마. 언니도 할머니 손녀인 걸 봐서 친절하게 알려주자면 강현수 그 남자 그렇게 쉽게 볼 사람 아니야. 욕심을 너무 부리다가는 모든 걸 다 빼앗길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그 말을 끝으로 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마친 커피값을 계산한 후 카페를 떠났다.한편 배여진은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있었고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마셨다.“대체 언제 기억이 돌아온 거야... 만약 얘가 정말 현수 씨한테 가서 전부 다 말해버리면...”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 임유진의 얘기를 강현수가 믿지 않도록!반드시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카페에서 나온 임유진은 버스를 타고 탁유미의 현재 거처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탁유미는 짐 정리에 한창이었다.윤이는 임유진을 보더니 신이 나서 뛰어가 안겼다. 그러고는 여름이 지나가면 이제는 유치원도 다닐 수 있다며 즐거워했다.“유치원 찾았어요?”임유진이 탁유미에게 물었다.“네, 찾았어요. 그쪽 원장님 한 분이 윤이 상황을 듣고 영상통화로 얘기까지 나눠 보더니 받아주겠대요.”최근 들어 가장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그럼 G 시로 언제 갈 건지는 정했어요?”“보름 뒤에요. 이삿짐센터에 연락해 보고 구체적인 날짜가 정해지면 알려줄게요.”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윤이는 G 시로 이사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귀가 축 늘어진 강아지가 보이는 듯했다.“그러면 앞으로 이모 못 보는 거예요? 나는 이모 많이 보고 싶을 것 같은데, 이모는요?”임유진은 아이의 볼에 뽀뽀를 해주며 말했다.“이모도 당연히 윤이가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직접 볼 수는 없겠지만 영상통화로 우리는 또 만날 수 있어. 그리고 이모가 시간이 될 때 윤이 찾으러 가면 되지! 그때 또 놀이공원 가자.”놀이공원이라는 말에 아이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그러면 그때 동현이 아저씨도 같이 가는 거예요?”곽동현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임유진이 뜸을 들이며 난감한
“네, 아저씨가 나 목마도 태워주고 나랑 같이 게임도 해줘서 정말 좋아요.”아이는 손가락을 접어가며 그와 같이 한 어떤 순간이 가장 좋았는지 얘기했다. 들어보니 대부분이 남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어트랙션에 부자가 같이할 수 있는 게임들이 많았다.탹유미는 아이의 말을 들으면서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아버지라는 자리를 메꾸려고 아무리 노력해 봐도 윤이의 마음속 아버지의 자리를 대체할 수는 없었다.매번 아버지 손을 꼭 잡고 가는 친구들을 윤이가 얼마나 부러운 눈으로 보고 있는지 모르는 게 아니다.하지만 이경빈은... 좋은 아버지가 아니다. 그에게 윤이는 태어나지 말아야 할 존재일지도 모른다.임유진은 탁유미의 기분을 알아채고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그렇게 한참을 더 얘기 나누다 떠날 때쯤 임유진이 탁유미에게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요?”“이제 괜찮아요. 움직여도 아무 문제 없어요.”탁유미가 걱정하지 말라며 웃었다.“이경빈 씨는 그 뒤로 언니 찾아온 적 있어요?”임유진의 말에 탁유미가 고개를 저었다. 그날 이경빈의 앞에서 자해한 후 그는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요.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짊어지는 것보다 한 명이라도 같이 짊어지는 게 낫잖아요”“고마워요. 그보다 유진 씨는 요즘 어때요? 아까 윤이가 얘기한 그 아저씨라는 사람과는...”임유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그냥 친구예요. 음, 친구라도 얘기하는 것도 좀 그런가... 이전 직장에서 친했던 동료예요.”“그 사람 유진 씨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그게 아니라면 굳이 놀이공원까지 갈 이유가 없다. 그것도 아이를 데리고 말이다.“언니, 나는 지금 누구를 알아가고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지금은 그게 사치 같아서요.”이번 생에 평생을 같이할 사람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은 이제 버렸다.어릴 적 꿈꿔왔던 로망이 거듭되는 현실로 부서지기 시작할 때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초연한 얼굴의 그녀를 보며 탁유미도 더
그는 배여진이 드레스를 쥐고 있는 걸 보더니 화를 내며 말했다.“누가 너더러 그거 들고 있으래? 당장 내려놔!”갑자기 들리는 차가운 목소리에 배여진이 깜짝 놀랐다.“이... 이 드레스 나 주려고 했던 거 아니에요?”그녀의 말에 강현수가 멈칫하더니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그녀를 주려던 옷이 맞긴 하지만 또 아니다...이 드레스는 그 언젠가 자신을 구해준 소녀를 찾으면 선물로 주려던 것이었다. 예쁜 보라색 치마를 꼭 사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하지만 막상 그 소녀를 찾아내 그게 배여진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는 이상하게도 어릴 적 그녀와 배여진을 동일시할 수 없었다.그렇게 찾아 헤맨 여잔데 반갑고 설레는 느낌은 없었고 낯설기만 했다.“드레스가 갖고 싶은 거면 다음에 하나 사줄게.”강현수는 그녀의 손에서 드레스를 빼앗아 들었다.배여진의 얼굴은 삽시에 굳었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네, 고마워요. 그런데 오늘 현수 씨 카드로 돈을 좀 찾았는데 괜찮죠...?”“너 쓰라고 준 거니까 마음대로 해.”강현수가 담담하게 얘기했다.“사실 아직 쓰지는 않았어요. 유진이가 강지혁 씨랑 헤어졌다고 해서 도움을 주려고 했는데...”배여진은 서러운 사람처럼 입술을 깨물었다.“유진이한테는 적은 돈이었나 봐요. 안 받더라고요.”“그랬어?”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배여진은 조금 뜨끔했다.“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도 가요. 출소하고 강지혁 씨를 만나면서 허영심이 많이 들었을 거예요. 이러다 돈 많은 남자에게 접근해 팔자 피려다가 도리어 사기라도 당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배여진의 목적은 강현수에게 임유진은 허영심이 많고 사치스러운 여자라는 걸 각인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임유진이 혹시나 그에게 무슨 말을 하러 와도 강지혁과 사귀었을 때의 생활을 못 잊어 일부러 거짓말한다고 생각하게 될 테니까.임유진의 기억이 돌아온 이상 하루빨리 강현수가 임유진의 말을 믿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그렇게 있는 말 없는 말 지어내는데 강현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