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언니, 앞으로 다시는 내 앞에서 그딴 말 하지 마. 언니도 할머니 손녀인 걸 봐서 친절하게 알려주자면 강현수 그 남자 그렇게 쉽게 볼 사람 아니야. 욕심을 너무 부리다가는 모든 걸 다 빼앗길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그 말을 끝으로 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마친 커피값을 계산한 후 카페를 떠났다.한편 배여진은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있었고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마셨다.“대체 언제 기억이 돌아온 거야... 만약 얘가 정말 현수 씨한테 가서 전부 다 말해버리면...”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 임유진의 얘기를 강현수가 믿지 않도록!반드시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카페에서 나온 임유진은 버스를 타고 탁유미의 현재 거처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탁유미는 짐 정리에 한창이었다.윤이는 임유진을 보더니 신이 나서 뛰어가 안겼다. 그러고는 여름이 지나가면 이제는 유치원도 다닐 수 있다며 즐거워했다.“유치원 찾았어요?”임유진이 탁유미에게 물었다.“네, 찾았어요. 그쪽 원장님 한 분이 윤이 상황을 듣고 영상통화로 얘기까지 나눠 보더니 받아주겠대요.”최근 들어 가장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그럼 G 시로 언제 갈 건지는 정했어요?”“보름 뒤에요. 이삿짐센터에 연락해 보고 구체적인 날짜가 정해지면 알려줄게요.”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윤이는 G 시로 이사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귀가 축 늘어진 강아지가 보이는 듯했다.“그러면 앞으로 이모 못 보는 거예요? 나는 이모 많이 보고 싶을 것 같은데, 이모는요?”임유진은 아이의 볼에 뽀뽀를 해주며 말했다.“이모도 당연히 윤이가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직접 볼 수는 없겠지만 영상통화로 우리는 또 만날 수 있어. 그리고 이모가 시간이 될 때 윤이 찾으러 가면 되지! 그때 또 놀이공원 가자.”놀이공원이라는 말에 아이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그러면 그때 동현이 아저씨도 같이 가는 거예요?”곽동현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임유진이 뜸을 들이며 난감한
“네, 아저씨가 나 목마도 태워주고 나랑 같이 게임도 해줘서 정말 좋아요.”아이는 손가락을 접어가며 그와 같이 한 어떤 순간이 가장 좋았는지 얘기했다. 들어보니 대부분이 남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어트랙션에 부자가 같이할 수 있는 게임들이 많았다.탹유미는 아이의 말을 들으면서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아버지라는 자리를 메꾸려고 아무리 노력해 봐도 윤이의 마음속 아버지의 자리를 대체할 수는 없었다.매번 아버지 손을 꼭 잡고 가는 친구들을 윤이가 얼마나 부러운 눈으로 보고 있는지 모르는 게 아니다.하지만 이경빈은... 좋은 아버지가 아니다. 그에게 윤이는 태어나지 말아야 할 존재일지도 모른다.임유진은 탁유미의 기분을 알아채고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그렇게 한참을 더 얘기 나누다 떠날 때쯤 임유진이 탁유미에게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요?”“이제 괜찮아요. 움직여도 아무 문제 없어요.”탁유미가 걱정하지 말라며 웃었다.“이경빈 씨는 그 뒤로 언니 찾아온 적 있어요?”임유진의 말에 탁유미가 고개를 저었다. 그날 이경빈의 앞에서 자해한 후 그는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요.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짊어지는 것보다 한 명이라도 같이 짊어지는 게 낫잖아요”“고마워요. 그보다 유진 씨는 요즘 어때요? 아까 윤이가 얘기한 그 아저씨라는 사람과는...”임유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그냥 친구예요. 음, 친구라도 얘기하는 것도 좀 그런가... 이전 직장에서 친했던 동료예요.”“그 사람 유진 씨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그게 아니라면 굳이 놀이공원까지 갈 이유가 없다. 그것도 아이를 데리고 말이다.“언니, 나는 지금 누구를 알아가고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지금은 그게 사치 같아서요.”이번 생에 평생을 같이할 사람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은 이제 버렸다.어릴 적 꿈꿔왔던 로망이 거듭되는 현실로 부서지기 시작할 때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초연한 얼굴의 그녀를 보며 탁유미도 더
그는 배여진이 드레스를 쥐고 있는 걸 보더니 화를 내며 말했다.“누가 너더러 그거 들고 있으래? 당장 내려놔!”갑자기 들리는 차가운 목소리에 배여진이 깜짝 놀랐다.“이... 이 드레스 나 주려고 했던 거 아니에요?”그녀의 말에 강현수가 멈칫하더니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그녀를 주려던 옷이 맞긴 하지만 또 아니다...이 드레스는 그 언젠가 자신을 구해준 소녀를 찾으면 선물로 주려던 것이었다. 예쁜 보라색 치마를 꼭 사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하지만 막상 그 소녀를 찾아내 그게 배여진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는 이상하게도 어릴 적 그녀와 배여진을 동일시할 수 없었다.그렇게 찾아 헤맨 여잔데 반갑고 설레는 느낌은 없었고 낯설기만 했다.“드레스가 갖고 싶은 거면 다음에 하나 사줄게.”강현수는 그녀의 손에서 드레스를 빼앗아 들었다.배여진의 얼굴은 삽시에 굳었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네, 고마워요. 그런데 오늘 현수 씨 카드로 돈을 좀 찾았는데 괜찮죠...?”“너 쓰라고 준 거니까 마음대로 해.”강현수가 담담하게 얘기했다.“사실 아직 쓰지는 않았어요. 유진이가 강지혁 씨랑 헤어졌다고 해서 도움을 주려고 했는데...”배여진은 서러운 사람처럼 입술을 깨물었다.“유진이한테는 적은 돈이었나 봐요. 안 받더라고요.”“그랬어?”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배여진은 조금 뜨끔했다.“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도 가요. 출소하고 강지혁 씨를 만나면서 허영심이 많이 들었을 거예요. 이러다 돈 많은 남자에게 접근해 팔자 피려다가 도리어 사기라도 당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배여진의 목적은 강현수에게 임유진은 허영심이 많고 사치스러운 여자라는 걸 각인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임유진이 혹시나 그에게 무슨 말을 하러 와도 강지혁과 사귀었을 때의 생활을 못 잊어 일부러 거짓말한다고 생각하게 될 테니까.임유진의 기억이 돌아온 이상 하루빨리 강현수가 임유진의 말을 믿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그렇게 있는 말 없는 말 지어내는데 강현수의
“대체 어딘데 그래?”임유진도 괜히 호기심이 일었다.“이따 가보면 알게 될 거야.”한지영은 마치 느끼한 아저씨처럼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한지영을 따라 ‘좋은 곳’에 도착해 보니 거기는 크게 다를 것 없는 클럽이었다.클럽 안에는 온통 20대 초반의 젊은이들뿐이었고 언뜻언뜻 10대 후반의 아이들도 보였다.그리고 그 가운데를 비집고 들어가니 급격한 세대 차이가 느껴졌다.“여기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온 거야?”임유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응? 아아, 이따 보면 알게 될 거야.”한지영은 뭔가를 기다리는 듯 스테이지 쪽을 두리번거렸다.그러다 8시가 되니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고 여성들의 환호 소리와 함께 남자 다섯 명이 스테이지에 올라왔다.잘생긴 얼굴들인 건 맞지만 딱히 특별할 건 없어 보였다.한지영은 어느새 두 눈을 반짝이며 임유진의 팔을 툭툭 쳤다.“왔어, 왔어. 드디어 왔다고!”“저 사람들 보러 온 거야?”“응! 얘네 지금 언더에서 인기가 거의 아이돌급이야. 잘생겨, 몸도 좋아, 노래도 잘해, 게다가 춤까지 잘 춰!”한지영은 잔뜩 흥분해서 남자들의 프로필을 쭉 읊었다.임유진은 잘생긴 남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연신 씨는 너 여기 오는 거 알아?”“당연히 모르지.”한지영은 눈을 남자들에게 고정한 채 대답했다.“그리고 나는 단순히 감상하는 것뿐이야. 좋아하는 사람은 당연히 연신 씨지.”그 말에 임유진이 놀란 얼굴을 했다.“너 연신 씨 좋아해?”“응?”한지영은 그제야 아차 한 표정을 짓더니 조금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그게... 얼마 전에 연신 씨랑 사귀기로 했어. 사귀는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원래는 임유진이 강지혁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적당한 시기에 얘기해 주려고 했는데 아까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만 말이 뇌를 걸치지 않고 나와버렸다.임유진은 그 마음을 알아챈 듯 한지영의 어깨를 토닥이며 웃었다.“잘됐네. 진심으로 사귄다고
“무슨 일이야?”강지혁이 물었다.“그게... 임유진 씨 관련해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유진이?”강지혁은 표정을 바꾸며 물었다.“유진이가 왜?”“오늘 한지영 씨가 임유진 씨를 찾아와 클럽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클럽? 그래서? 거기서 누구랑 싸웠대?”장소가 클럽이라는 것이 상당히 거슬렸다.하지만 만약 거기서 싸움이 일어났다고 해도 자신이 붙여둔 경호원이 있었기에 임유진은 안전할 것이다. 고작 그 정도 경호도 못 하면 경호원 실격이니까.“싸움은 아니고요, 그 클럽에는 KING이라는 퍼포먼스 팀이 있어요.”“KING?”강지혁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요즘 언더그라운드에서 아이돌급으로 인기가 많은 팀이 있는데 그 팀의 퍼포먼스가... 젊은 여성들에게 그렇게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고이준의 목소리는 점점 더 기어들어 갔다.“계속해 봐.”“5명의 남자가 스테이지 위에서 춤을 추고, 그중에는 옷을 벗는 퍼포먼스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 여성들의 환호가 압도적으로 많이 쏟아지고요...”고이준은 아까부터 강지혁의 눈치만 보고 있다.방금 옷을 벗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강지혁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졌다.서재에는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그때 강지혁이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고이준을 향해 물었다.“그래서 그 클럽이 어디라고?”‘설마 직접 가시려는 건가?!’고이준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한편, 클럽 안에서는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임유진과 한지영의 테이블에는 술병이 잔뜩 쌓여 있었고 두 사람은 지금 술을 마시면서 퍼포먼스를 보고 있었다.주위에는 온통 여자들의 환호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언더그라운드 팀이라 해도 인기가 많아서 그런지 응원봉도 있었고 지금은 단순 클럽이 아니라 마치 콘서트장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한지영이 말한 대로 확실히 스트레스가 풀리는 공간이다. 이곳에 있으면 현실 속 고민을 잠시 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임유진이 분위기에 취해 술을 한 모금 들이켜자 마침 음악이 바뀌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들리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여성들의 환호 소리에 강지혁은 인상을 찌푸렸다.고이준은 강지혁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제가 들어가서 임유진 씨를 데리고 나올까요?”“내가 가.”강지혁이 싸늘하게 답했다.그때 은색 포르쉐 한 대가 또 클럽 입구에 멈춰서더니 잘 빠진 기럭지의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그 남자는 강지혁을 보더니 조금 멈칫했고 강지혁도 그 남자를 보고는 마찬가지로 자리에 멈춰 섰다.두 남자는 설마 상대방을 이런 곳에서 볼 줄은 몰랐다는 얼굴로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고이준은 그 옆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이 광경에 어쩐지 웃음이 나기도 했다.“한지영 씨 찾으러 왔나 보죠?”강지혁이 먼저 말을 걸었다.“그러면 강지혁 씨는 임유진 씨 찾으러 온 건가요...?”백연신이 조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각자 찾으러 온 사람 데리고 가는 거로 하죠.”강지혁의 말에 백연신은 그가 임유진을 찾으러 온 게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백연신이 이곳으로 온 건 한지영이 인스타에 올린 한 장의 사진 때문이다. 술에 취한 건지 위치까지 태그한 덕에 헤매지 않고 바로 이곳으로 올 수 있었다.오늘 급히 마무리 지어야 하는 프로젝트가 있다고, 데이트는 못 한다고 했던 여자가 지금 클럽에서 잘생긴 남자들을 보며 침을 흘리고 있다!아까 사진과 함께 올린 말도 가관이었다.[다섯 명 다 내 스타일이야! 오빠 날 가져~!]그걸 봤을 때 이가 갈린다는 게 어떤 건지 처음 느끼게 되었다.‘다섯 명이 다 자기 스타일이라고? 자기를 가지라고?! 언제는 나만 좋다더니!’이곳으로 오는 길, 이 거짓말쟁이 여자친구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게다가 혼자 몰래 간 줄 알았는데 물귀신처럼 임유진까지 데리고 갔다.물론 가장 의외였던 건 이곳에서 강지혁을 마주친 것이다.“각자요?”백연신이 가볍게 웃었다.“두 사람, 헤어진 거 아니었습니까?”그의 말에 강지혁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
백연신이 사진이 찍힌 각도에 따라 한곳을 특정하자 거기에는 익숙한 두 여자의 얼굴이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가려는데 한지영이 갑자기 테이블 위로 올라가더니 미친 사람처럼 스테이지 위 남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댔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검은색 셔츠가 들려 있었고 자세히 보니 무대 위 남자들의 의상 같았다!임유진은 한지영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얌전한 편이었다.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얌전하기만 한 건 아니다.임유진은 갑자기 뭐에 흥분한 건지 의자 위에 올라가더니 남자들의 춤을 따라 하며 옷을 벗을 때는 소리 질러 환호했다.“오빠 너무 멋있어요!!”“...”그 모습은 백연신이 알고 있던 임유진이 아니었다.그는 문득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강지혁을 바라보았다. 클럽 안 조명이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불빛에 언뜻언뜻 비치는 그의 표정을 보면 금방이라도 누구 한 명 죽일 것 같았다.백연신은 왠지 모르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강지혁이라는 남자와 얽혀버린 임유진이 불쌍하게 느껴졌다.이미 헤어졌다고는 하는데 강지혁의 모습을 보면 그녀가 싫증 나서 버린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헤어질 수밖에 없는 다른 사정이 있었을 것 같다...강지혁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더니 의자 위의 임유진을 그대로 자신의 품속에 안아버렸다.예상 밖으로 임유진은 발버둥 치지 않았고 오히려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더니 배시시 웃기 시작했다.“혁아...”혁이라고 다정하게 불러주는 그녀의 목소리에 강지혁은 몸을 흠칫 떨었다.평소 자신을 매정하게 거절하며 선을 긋던 그녀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강지혁은 취기에 절어있는 임유진의 눈과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술병들을 번갈아 보면서 그녀가 단단히 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임유진은 오직 술을 마셨을 때만 혁이라고 다정하게 불러준다.“여긴 어떻게 왔어...? 너도 저 사람들 춤추는 거 보러 온 거야? 저 남자들 춤 엄청 잘 춘다? 헤헤, 그래서 나도 막 춤추고 그랬어. 그런데... 아쉽게도 옷은 못 뺏었었어. 지영이는 운 좋게 하나 뺏
강지혁과 백연신은 서로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주변의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오직 두 사람만 다른 세상에 있는 듯했다.그리고 고이준은 지금 강지혁의 뒤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그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만약 이대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번지기라도 한다면 뒷수습하기도 힘들 것이다. S 시가 강지혁의 손바닥 안이라고는 하지만 만약 백연신이 백씨 가문까지 끌어들이게 되면 서로 피만 보게 될 게 분명했다.게다가 백연신은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 같은 외모와 달리 상당히 잔인하고 무서운 사람이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사생아라는 타이틀을 달고 백씨 가문의 꼭대기까지 군림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그렇게 서로 대치 중이던 그때, 강지혁의 품속에 있던 임유진이 한지영을 향해 말했다.“지영아... 혁이가 나 데리러 왔어... 우리는 다음에 또 오자...”“응, 알겠어... 다음에 또 오는 거야.”다행히 술에 취한 두 여자 덕분에 차가웠던 분위기가 조금은 풀어졌다.강지혁은 임유진을 안은 채로 클럽을 나가버렸고 고이준도 서둘러 따라나섰다.백연신도 얼른 품속의 여자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려고 했지만 한지영이 싫다며 이리저리 발버둥을 쳐댔다.“그러지 말고 연신 씨도 같이 봐요, 응?”‘같이 보자고? 이 여자가 진짜.’이곳에 1분이라도 더 있게 되면 백연신은 정말 폭발해 버릴지도 모른다.그는 지금 당장에라도 오늘 한지영이 봤던 모든 저질스러운 광경들을 다 잊어버리게 최면이라도 걸고 싶은 마음이었다.백연신은 한지영의 말을 무시한 채 이번에는 그녀를 어깨 위에 올려놓고 클럽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차 조수석에 힘껏 던져버렸다.“나... 나 아직 다 못 봤는데 왜 데리고 나와요! 아무리 연신 씨라고 해도... 음악을 향한 나의 열정은 방해할 수 없다고요...!”한지영은 술에 취한 채 계속 중얼거렸다.그나마 다행인 건 자신을 데리고 나온 사람이 백연신이라는 건 아직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백연신은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다가 지금의 그녀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걸 보고 깊게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