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그렇게도 쉽게 죽어버릴 수가 있는 거지? 왜 자신만 바라보는 아들이 있다는 생각은 못 하는 거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떠나보낸 강지혁이 어떻게 살아갈지는 한 번도 걱정이 안 됐던 건가?강선우라는 남자는 한 번도 강지혁의 처지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싶었다. 어린 강지혁에게 필요했던 건 아버지의 품과 사랑이었을 텐데...어머니도 잃고 아버지마저 잃은 강지혁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할아버지와 어떻게 지냈을지 눈에 훤했다.이 큰 저택에서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오직 아이의 절절함만 있었을 것이다.임유진은 천천히 거실을 지나 옆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그녀가 그때 봤던 것과 마찬가지로 강선우의 위패가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그녀가 찾아 헤매던 남자가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다.곧게 뻗은 그의 몸에 은은한 불빛이 내려앉으니 마치 강지혁만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임유진은 갑자기 코가 시큰거리고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대체 왜 이 순간 자신과 강지혁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가장 친밀한 관계여야 할 두 사람인데 말이다."혁아!"그녀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등지고 있던 몸이 흠칫하더니 천천히 뒤를 돌았고 까맣고 공허한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그와 눈이 마주친 임유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강지혁과 처음 만났을 때 봤었던 그 눈빛이었다.마치 아무것도 필요 없고 심지어 저 자신도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그런 표정이었다."혁아!"그녀의 외침에는 초조함과 불안함이 섞여 있었다.강지혁은 차츰차츰 이성을 되찾았고 서서히 빛바랜 눈빛에서 다정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돌아왔다.평소의 강지혁이다."여긴 왜 왔어?""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대체 이 늦은 시간에 여기는 왜 온 거야?"오늘은 특별한 날도 뭐도 아니었다.임유진은 그에게 다가오더니 손으로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지금은 7월이고 에어컨도
약해진 그로 인해 임유진의 불안도 더 커져만 갔다."갑자기 그런 말은 왜 하는 거야?""대답해. 넌 영원히 날 배신할 일 없어, 그렇지?"잔뜩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는 애절함이 묻어있었다.임유진은 그의 말에 가슴이 아려왔다.대체 천하의 강지혁이 왜 이렇게도 절절하게 그녀를 향해 배신에 관해 묻는 걸까?!임유진의 시선이 그를 스쳐 지나가 강선우의 위패에 멈췄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당해 죽음을 택한 남자.그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에게 배신을 당했고 강지혁은 그의 아버지에게 배신을 당해 홀로 이 세상에 남겨졌다.강지혁의 눈빛은 아직도 그녀를 바라보며 답을 요구했다.뭐든지 다 가졌을 것만 같던 남자가 이토록 깊은 상처를 안고 있다는 걸 그 누가 알았을까.임유진은 이 순간 그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그에게 확신을 주고 싶었다."난 절대 널 배신하지 않을 거야."그녀는 시선을 다시 강지혁에게로 돌려 그의 눈을 마주치며 더없이 단호한 말투로 얘기해주었다."맹세할 수 있어?""맹세해."임유진의 답이 떨어지자마자 강지혁은 천천히 볼을 그녀의 손바닥에 비비적거렸다. 따뜻한 체온이 차갑게 얼어붙은 그의 마음을 녹여주는 것 같았다.오늘 밤 강지혁이 이곳 위패 앞에 섰을 때 얼마나 비참한 기분이었는지 임유진은 모를 것이다.그는 몇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했다."혁아, 너는 나처럼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지 마. 사랑하면 할수록 상처받는 건 너일 테니까."강선우는 그렇게 당부했지만, 강지혁은 이미 누군가를 사랑해 버리고 말았다.다만 임유진은 그의 어머니가 아니고 그 역시 강선우가 아니기에 같은 결말을 맞이할 일은 없을 것이다."방금 했던 말 꼭 기억해."강지혁은 그녀의 손에 가볍게 키스했다."유진아, 네가 날 배신하면 나는 정말 못 견딜 거야."만약 그 어느 날, 임유진이 그를 배신하는 날이 오게 되면 강지혁은 아마 그녀도 같이 망가트려 버릴지도 모르겠다....다음날, 임유진이 잠에서 깨보니 강지혁은 옆에
임유진은 씻은 후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녀가 저택을 빠져나간 후 누군가가 그녀의 행보를 강지혁에게 보고했다."대표님, 임유진 씨가 방금 집을 나섰습니다."대표 사무실.고이준의 말에 강지혁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그래."그러고는 숨 막힐 듯한 정적이 이어졌다.고이준은 화를 내는 강지혁보다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는 강지혁이 더 두려웠다.임유진은 어느새 병원에 도착했고 접수를 마친 뒤 곧장 안은영의 진료실로 들어갔다.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의사는 살집이 조금 있었고 친근한 얼굴을 하고 있어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심리상담 의사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임유진은 자리에 앉은 후 자신의 증상을 의사에게 얘기하고는 요즘 꿈을 꾸는 일이 점점 더 많아졌다고 토로했다.특히 전시회에서 강현수를 만난 이후 또다시 꿈을 꿨다."임유진 씨는 아마 기억을 잃은 게 맞을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로 자신을 꿈에 대입시켰다기에는 같은 꿈을 꾸는 횟수가 너무 많거든요."안은영이 차근차근 분석했다.기억을 잃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은 전에도 해봤지만, 막상 의사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만약 그 꿈이 정말 잃어버린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강현수와 그녀는..."임유진 씨?"안은영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 잡념에서 꺼내주었다."죄송해요. 뭐라고 하셨죠?""기억을 잃어버린 게 맞는지 알고 싶은 거면 잘 찾아오셨어요. 최면 유도를 통하면 유진 씨 기억도 되살아날 수 있을 거예요."안은영이 말했다."그렇게 쉽게 돌아오는 건가요...?"임유진이 조금 의아해하며 묻자 안은영이 옅게 웃었다."유진 씨는 이미 수차례 꿈을 꾸었고 점점 더 선명해진다고 하니 최면 유도만 하게 되면 쉽게 해결될 수 있어요. 물론 만에 하나 기억 상실이 아니었다고 하면 다른 쪽으로 원인을 찾아보면 되고요."안은영은 잠시 스케줄을 체크하더니 말을 이었다."임유진 씨가 당장이라도 기억을 찾고 싶으시다면 내일 바로 최면 치료해드릴 수 있
임유진은 언제 나오는 거지?그녀는 절대 그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해놓고 왜 또 의사를 만나러 간 걸까?아직도 강현수와의 기억을 찾고 싶은 건가?그렇게 가만히 보고 있다 보니 드디어 입구에서 흰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강지혁의 시야에 들어왔다.정신없이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그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봤다. 임유진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려는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곧이어 강지혁의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졌고 핸드폰을 꺼내 들어보니 발신자 표시란에 ‘누나’라는 이름이 떴다.그는 아직도 이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아마도 그건 추억이 가득한 호칭이어서 일 거다."너 내 동생 할래? 앞으로 나는 너를 아껴줄 거고 너도 나를 아껴주는 거야."임유진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었다.누나... 누나...그때의 강지혁은 훗날 이 여자를 이렇게나 사랑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벨 소리는 계속 울려 퍼졌고 강지혁이 통화버튼을 누르자 전화기 너머로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혁아, 어디야?"강지혁은 병원 입구를 바라보며 답했다."나 지금 회사야.""그럼 이따가 점심 사 들고 갈테니까 같이 먹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임유진이 물었다."아무거나 좋아. 네가 알아서 정해.""응, 알겠어."임유진은 통화를 마친 후 택시를 잡고 떠났고 강지혁도 기사에게 회사로 돌아가자고 말했다....임유진은 도시락 2인분과 사과 두 알을 들고 GH 그룹에 도착했다.얼마 전 인터넷에 임유진의 사진이 올라와 이슈가 될 뻔한 적이 있었지만, 다시 빠르게 사라진 덕에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은 많이 없었다.오랜만에 들린 회사이지만 경비원과 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배달 일을 했던 시절 계속 강지혁에게 도시락은 전해줬던 그녀였으니까.그들은 빠르게 다가가 예의를 갖춰 인사하더니 그녀를 엘리베이터까지 정중히 모셨다."저 여자가 누군데 그렇게 굽신거려요?"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후 지나가던 일반 직원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우
임유진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지혁이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그의 모습에 임유진은 넋을 잃고 말았다.모든 걸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원하는 대로 휘두를 것만 같은 지금의 강지혁은 새벽 고독에 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와는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혁아."임유진의 부름에 강지혁이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왔어?""응, 도시락 사 왔는데 네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어,"그녀는 익숙한 듯 소파에 앉아 손에 든 도시락과 과일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강지혁도 마찬가지로 소파로 다가와 앉더니 도시락 뚜껑을 열어 식사를 시작했다.이러고 있으니, 마치 매일 점심 같이 식사하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맛있어?"임유진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괜찮네."강지혁이 답했다."다행이다.""참, 요즘도 머리 아프다고 했었지? 의사 예약해 줄까?"그때 강지혁이 문득 그녀의 두통에 관해 물었고 임유진의 손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급하게 말했다."아니야. 얼마 전에 의사한테 보였잖아.""하지만 전시회 때 네 상황을 보면 효과가 없는 것 같던데?"임유진이 뜨끔한 듯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그게... 다른 의사로 바꿨어."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그래?""으, 응."그녀는 그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식사했다.하지만 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혀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정말 내 도움 필요 없어?"강지혁이 다시 한번 물었다."응... 일단은. 내일 다시 병원에 가보기로 했거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다시 너한테 얘기할게."내일이 지나면 임유진은 기억을 잃은 게 맞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되고 자신이 강현수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소녀가 맞는지 아닌지도 알 수 있게 된다.그녀는 내일이 지나고 나서... 결과가 나오면 그때 강지혁에게 얘기할 생각이었다."알았어. 그럼 내일까지 기다려 보지, 뭐.."계속 고개를 숙이
사과를 깎는 단순한 행동도 지금의 그녀는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만 했다.굳이 직접 사과를 깎아주겠다고 하는 그녀의 정성에서 강지혁을 향한 그녀의 사랑이 엿보였다.강지혁은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새기려는 듯 그녀의 행동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드디어 사과 하나를 다 깎았고 임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강지혁에게 건넸다."자, 여기."그녀에게서 건네받은 사과를 한입 깨물어 보니 달콤한 과즙이 그의 입안에 퍼졌다."달아?""응, 달아.""그럼 나도 어디 한번."임유진이 남은 사과 한 알을 들고 또 깎으려고 하자 강지혁이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뭘 귀찮게 또 깎으려고 그래.""응?"강지혁은 멍하니 올려다보는 임유진에게 자신이 한입 베어먹은 사과를 건네주었다.그러자 임유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그가 베어 물었던 곳을 보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안 먹을 거야?"강지혁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묻자 임유진은 잠깐 망설이더니 곧 빨간 입술로 그가 베어 물었던 곳을 또다시 베어 물었다.마치 간접키스라도 한듯한 느낌에 그녀는 심장이 두근거렸다."달아?"강지혁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감돌았다.임유진은 온 신경이 그를 향하고 있어 씹고 있는 사과가 무슨 맛인지조차 몰랐다.그리고 강지혁의 표정이 마치 사과가 아니라 자신과의 간접키스에 대해 물어보는 느낌이 들었고 그녀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을 지켜본 강지혁은 옅게 웃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빨간 입술을 매만졌다."아쉽네. 아니라고 하면 한 번 더 먹여주고 싶었는데."임유진은 그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채고는 얼굴이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일주일 뒤면 생일인데 뭐 갖고 싶은 거 있어?"강지혁이 화제를 돌렸다.임유진은 그제야 7월 22일 곧 다가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감옥살이한 뒤부터 그녀의 생일을 챙겨준 건 오직 한지영뿐이었다. 그녀는 매번 생일 때마다 케이크를 들고 초에 불도 켜주며 생일축하 노래도 불러주었다.하지만 아쉽게도
"응, 케이크면 돼. 그리고 그날은 너랑 나 그리고 한지영네와 같이 간단하게 보내고 싶어."임유진은 오랜만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보내는 생일이긴 했지만, 너무 거창하게 쇠고 싶지는 않았다."그래, 알았어. 생일 케이크는 내가 준비할게."강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고마워."임유진은 문득 시간을 확인한 후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걸 보고는 옆에 있던 가방을 들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그럼 나 먼저 갈게. 일 열심히 해."다만 그녀가 막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고 임유진은 그의 품에 갇혀버렸다.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내일... 그 병원 안 가면 안 돼? 내가 말한 병원으로 가자."그러고는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임유진은 잠깐 흠칫하더니 조금 뜸을 들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일 한 번만 더 가보고 그래도 나아지지 않으면 그때는 네가 얘기한 곳으로 갈게."강지혁은 아무 대답도 없이 그저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강지혁은 그제야 서서히 팔에 힘을 풀었다.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평소와 똑같이 잘생긴 얼굴에 입가에는 미소도 띄워져 있었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기사님한테 데려다주라고 할게."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대표 사무실을 나갔고 강지혁은 소파에 도로 앉더니 아까 먹다 남은 사과를 마저 먹었다.그러다 문득 열심히 그를 위해 껍질을 깎아줬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유진아, 그냥 내 말대로 하면 되잖아."사과는 너무도 달았지만, 강지혁의 입안은 너무 썼다...."오늘도 수고하셨어요."탁유미는 윤이를 데리고 활짝 웃는 표정으로 언어 재활센터에서 나왔다.윤이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더 좋아졌고 이제는 또래 아이들과 다른 점이 거의 없어 보였다.재활센터 선생님도 이곳으로 오는 횟수를 줄여도 되
며칠 전, 윤이는 탁유미가 선물을 준비하는 걸 보며 호기심에 물었고 그때 그녀가 7월 22일이 임유진의 생일이라고 알려줬다.윤이는 아마 그 뒤로 계속 임유진의 생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하지만 생각해보면 탁유미와 탁유미 엄마를 제외하고 임유진만큼 윤이를 잘 대해줬던 사람이 또 없었으니 윤이가 그녀에게 애정을 보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나도 이모한테 선물 주고 싶어요."아이의 진지한 표정에 탁유미가 눈을 깜빡였다.그녀는 임유진이 윤이를 도와준 일들이 떠올랐다. 임유진이 아니었으면 윤이는 이렇게 빨리 회복도 못 했을 것이고 좋은 치료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백화점 안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선물을 고르는 데 시간이 걸리고 얼굴이 노출될 위험도 커지게 된다.이경빈은 아직 S 시에 있고 그가 만약 윤이를 보기라도 한다면...탁유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몇 년도 지난 일이지만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면 그때의 고통이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때 가장 사랑했던 남자가 남기고 간 흉터가 말이다."엄마!"윤이는 고개를 쳐들고 간절히 원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지간히 선물을 고르고 싶은가 보다.탁유미는 잠깐 망설이나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대신 빨리 골라야 해.""네!"탁유미는 아들의 손을 잡고 백화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녀는 오랜만에 보는 명품 브랜드를 보며 조금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이경빈의 여자였을 때 그녀는 그에게서 셀 수도 없이 많은 브랜드 옷과 가방을 선물 받았다.탁유미가 원하는 거면 이경빈은 주저하지 않고 사다 주었다. 그때의 그녀는 이게 사랑인 줄 알았다.하지만 물질로 쌓아 올린 감정은 사랑이 될 수 없었고 거기에 진심은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다.그리고 그녀가 이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윤이는 탁유미의 손을 잡고 3층 여성 브랜드 매장으로 향했다.사실 아이는 사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유리 구두였다. 얼마 전 공원에서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