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수 있다면 그녀가 평생 슬퍼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강지혁은 그녀 얼굴에 묻은 눈물에 조금씩 입 맞췄고 임유진은 온몸이 굳은 채 꼼짝하지 않았다. 강지혁이 입 맞췄던 곳은 뜨겁게 불타오를 것만 같았다.영화가 다 끝난 후 임유진은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다. 영화의 80퍼센트는 재미있게 잘 봤는데 뒷부분 20퍼센트는 강지혁의 키스 때문에 도저히 집중해서 볼 수가 없었다.그저 엔딩 장면만 머릿속에 남았지만 윤이는 달랐다. 영화가 다 끝난 후에도 아이는 흥이 채 가시지 않는지 계속 나쁜 놈을 때리고 싶어 했다.임유진은 윤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데려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시사회에서 영화를 이렇게 재미있게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으니까.“윤이 이따가 이모랑 함께 영화배우들 보러 갈래? 아까 나쁜 놈 때렸던 주인공 말이야.”임유진은 아이에게 물으며 수어로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다.“네.”윤이는 어쩌다가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대답했다.임유진은 너무 기뻤다. 윤이은 앞으로 할 줄 아는 말이 점점 더 많아질 테고 머지않아 보통 아이들처럼 정상적으로 대화할 수 있겠지.그녀는 아이와 함께 강지혁 따라 스텝들의 안내를 받으며 배우 대기실로 향했다.대기실이라기보단 엄청 큰 룸에 가까웠고 고주원을 비롯한 몇몇 주연 배우들이 휴식하는 중이었다.감독이 미리 고주원에게 말했던 터라 그는 강지혁이 여자친구를 데리고 와서 함께 사진 찍고 사인하는 걸 알고 있었다.애초에 고주원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S 시에서 명성이 자자한 강지혁 대표님이 여자친구가 있다고? 게다가 여자친구분이 자기 팬이었다니?! 그는 복잡미묘한 감정이 들었다.강지혁 같은 인물은 고주원이 가까이에서 볼 수 없는 유명인사인데 지금 팬 덕분에 가까이에서 보게 된 셈이다.“강지혁 씨 맞으시죠? 안녕하세요, 저는 고주원이에요.”고주원이 앞으로 걸어가며 활짝 웃더니 임유진에게 시선을 돌렸다.“감독님께 전해 들었어요. 제 팬이시라고요? 영광입니다. 만나서 반가
연예계에 예쁜 사람은 널렸다.얼굴이 좀 예쁘다 하는 여자들은 심지어 포즈까지 취하며 강지혁의 시선을 끌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눈길은 임유진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한편 고주원은 윤이와도 몇 장의 사진을 찍어주었고 포토 타임이 끝나자 윤이가 임유진을 향해 천천히 말했다."쉬아... 쉬아..."임유진은 윤이가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말을 금세 알아들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단독 화장실이 없었을뿐더러 매 층 제일 끝에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었다.그녀가 윤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향하려 하자 강지혁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남자 화장실로 들어가야 해서 불편할 거야. 스태프한테 데려다주라고 할게."강지혁은 옆에 서 있는 스태프 한 명에게 윤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갈 것을 요구했다.임유진은 윤이를 향해 말과 함께 수어도 같이 쓰며 스태프 아저씨를 따라가면 된다고 전했고 윤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수어로 얘기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윤이가 평범한 아이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고 인공와우를 착용하고 있다는 걸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탁유미가 인공와우인 걸 티나지 않게 예쁘게 꾸몄던 터라 아마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아이들이 달고 다니는 액세서리 같은 건 줄 알았을 것이다.한편, 두 사람의 모습에 아까 강지혁의 주의를 끌려고 했던 여배우들은 안타까운 눈길로 임유진을 바라봤다. 강지혁의 사생아를 낳아주면 뭐할까.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인 이상 강씨 일가의 재산을 물려받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스태프는 윤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다 얼마 안 가 아까 그 스태프가 다급하게 혼자 달려왔다."윤이는요?"임유진이 물었다."죄... 죄송합니다. 그게 실은 아이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아까 아이를 화장실에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전화가 걸려와서 잠깐 10초 정도 통화를 했는데... 전화를 끊고 보니 아이가 사라졌어요..."스태프는 당황한 표정으로 횡설수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아이가 강지혁의 사생아라면 그는 엄청난 실수를
순간 임유진의 머릿속으로 유괴 아동 뉴스와 잔혹하게 살해당한 아이들의 기사가 스쳐 지나갔다.만약 윤이가 정말 유괴라도 당한 거면 그녀는 아마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이미 제정신이 아닌 그녀는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한시라도 빨리 윤이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만 앞섰다.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당기더니 침착한 말투로 말했다."급해 하지 마."임유진은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에 그제야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어떡해, 윤이가 없어!"그녀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고 목소리도 울먹거렸다."다 내 탓이야. 내가 윤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가야 했는데... 내가 옆에 있었더라면 윤이 손을 놓지 않았을 텐데...""아니야. 내 탓이야."강지혁이 말했다."스태프에게 윤이를 보낸 건 나잖아. 하지만 걱정하지마. 내가 지금 당장 이 건물을 봉쇄하고 사람들을 풀어서 윤이를 찾아볼게.""하... 하지만 만약 유괴범이 데려간 거면 어떡해? 이미 윤이를 데리고 이 건물을 빠져나갔을지도 모르잖아."임유진은 지금 머릿속으로 최악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그럼 S 시 전체를 봉쇄할게."강지혁이 담담하게 말했다."10분 안에 S 시를 봉쇄할 거야. 아무리 대단한 유괴범이라도 10분 안에 이 도시를 빠져나갈 수는 없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찾아낼게."임유진은 그의 말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도시를 봉쇄하겠다니?! 아무리 강지혁이 대단한 사람이라고는 하나 10분 안에 도시 전체를 봉쇄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그가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아무리 말이 안 돼 보여도 결국에는 가능한 일이 된다."나 믿어. 내가 S 시를 뒤집어 엎어서라도 찾아올게."강지혁이 이렇게까지 말한 이유는 임유진이 혹시나 죄책감을 가질까 봐서였다. 만약 윤이를 정말 찾지 못하게 되면 그녀는 분명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강지혁이 핸드폰을 꺼내 막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도시를 봉쇄하라고 말하려던 찰나 어딘가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임유진은 윤이가 침묵하자 한 번 더 차근차근 수어로 물었다. 그러자 윤이는 손바닥 위에 있는 인공와우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정확히 말하면 귀에 꽂는 부분을 말이다.윤이의 인공와우가 떨어졌었나?임유진은 수어로 윤이와 한차례 대화를 나눈 후 드디어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아까 화장실에서 나오고 다시 돌아가는 길, 스태프가 통화하고 있음에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윤이는 급하게 화장실로 들어가 자신의 인공와우를 찾고 있었다.그때 이경빈을 만나게 됐다. 상대는 수어를 할 줄 몰랐지만 똑똑한 윤이가 세면대에 있는 물을 손가락에 적셔 벽에 사람을 찾고 있다는 등 의사 표현을 열심히 한 덕에 이경빈은 그를 데리고 인공와우를 찾은 후 화장실에서 나왔고 그렇게 임유진을 만나게 된 것이다.임유진은 사건의 경과를 전해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착한 사람과 우연히 만나게 돼서 너무 다행이었다. 만약 나쁜 사람을 만났으면 정말 끔찍한 결말을 마주할 뻔했다.그녀는 생각을 마친 후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윤이 옆에 있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우리 아이 찾아줘서 너무 고맙습니..."임유진은 남자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뭔가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뚫어지게 그를 쳐다봤다."왜요? 혹시 저 알아요?"이경빈은 눈앞에 여자를 향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자신을 아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임유진은 그를 알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그야 이 남자는 윤이의 아빠이니까! 부자가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리고... 두 사람은 아직 서로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임유진은 지금 이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말을 잇지 못했다."알죠."그때 강지혁이 그녀를 대신해 대답했다. 그는 임유진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웃었다."이경빈 대표님이시죠. 여기서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강지혁입니다.""GH 그룹 강지혁 씨요?"이경빈이 물었다."네."강지혁이 답했다."이거 참 우연이네요
"이 아이는..."이경빈이 물었다."아, 제 친구의 아이입니다."임유진은 일부러 모호하게 답변했다."아까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아이를 여기까지 데려와 주시고.""뭘요."이경빈은 짧게 대답한 후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다리 옆에 있는 자그마한 아이에게 주었다.아까 화장실에서 아이는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얼굴에 가득 차 있는 긴장감과 초조함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그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평소에 이런 일에 관여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였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눈앞에 있는 아이가 대체 무엇 때문에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졌다.그렇게 다가가서 물어보니 이 아이는 청각장애가 있는 아이였고 무언가 자신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듯한데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았다.난감한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일단 이 아이를 데리고 나가려고 할 때 그는 아이의 다음 행동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글자를 쓸 줄 알았다. 그것도 간단한 글자뿐만이 아니라 조금 복잡한 듯 보이는 단어들까지도 말이다.그는 아이의 똑똑한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이런 똑똑한 아이가 장애를 앓고 있다고 생각하자 안타깝기 그지없었다.그는 아이를 도와 고개 숙여 인공와우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드디어 세면대 아래에 놓인 인공와우를 찾고는 먼지를 털어낸 후 건네주자 아이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그는 흠칫하더니 자기도 모르게 누군가의 얼굴이 잠깐 떠올랐다.그러다 이내 피식 웃으며 아이의 얼굴에서 어떻게 그 여자를 떠올릴 수 있냐며 자기 자신을 비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1년을 찾아 헤맸는데도 끝내 찾지 못했으니까.이경빈은 출소한 여자를 찾는 일이 매우 간단한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여태까지 그녀가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하고 있다...그는 지금 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 중 한 명이 강지혁이라는 사실에 조금 놀란 듯 보였다. 그때 등 뒤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경빈 씨, 왜 아직도 여기 있어요?"이경빈은 몸을 돌려 여자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일이 조금 있
공수진은 옅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이경빈 씨 약혼녀 공수진이라고 합니다.""그럼 강지혁 씨, 저희는 이만 일이 있어서 가야 할 것 같네요. 다음에 다시 봅시다."이경빈이 말했다."그러죠."강지혁은 그를 향해 대답했다.이경빈과 공수진이 떠난 후 강지혁은 임유진을 향해 물었다."윤이도 찾았는데 왜 아직도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어?""아까 그 사람 이경빈이잖아."임유진이 말했다."그렇지. 근데 그게 왜?"강지혁이 덤덤하게 물었다."윤이를 앞에 두고 이경빈 씨는 자기 자식인 것도 몰랐어."임유진의 말투에는 씁쓸함이 묻어있었다.사실 아까 임유진은 윤이와 이경빈의 얼굴을 몰래 번갈아 쳐다봤었는데 두 사람은 닮은 부분이 꽤 많았다."됐어. 어차피 다른 사람 일이야. 누나가 신경 쓸 필요 없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윤이를 쳐다봤다. 다행히 아까 인공와우가 떨어진 탓에 윤이는 지금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상황이다.세 사람은 룸으로 돌아와 고주원과 인사를 한 후 옆문으로 건물을 빠져나왔다.인공와우를 꽂는 방법을 몰랐기에 임유진은 일단 떨어진 인공와우를 윤이 대신 호주머니에 넣어 두었다."뭐 먹고 싶은 거 있어?"강지혁의 질문에 임유진은 그제야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 윤이는 더 배고팠을 테지만 불평 한마디 없이 그들 옆에서 걷고 있었다."미안해, 윤이 배고프지? 이모랑 저녁 먹으러 가자."임유진은 수어로 윤이에게 말을 전했고 아이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이 근처에 유명한 키즈 레스토랑이 있는 걸 떠올리고는 강지혁에게 말했다."여기 근처에 있는 키즈 레스토랑으로 가는 게 어때? 엄마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더라고.""그래."강지혁이 흔쾌히 동의하자 임유진은 맵을 켜고 키즈 레스토랑 주소를 찍었다. 거리도 마침 300m 정도밖에 안 됐기에 세 사람은 도보를 택했다.레스토랑에 도착하자 키즈라는 단어가 붙어서 그런지 아이들이 딱 좋아할 만한 공간이 펼쳐졌다. 마치 미니
임유진은 블로그에서 추천한 대로 세트 메뉴를 시켰다.음식이 올라오자 아이들 세트에만 귀여운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 세트도 귀엽게 데코레이션 되어 있었다.다만...임유진은 앞에 앉은 남자를 바라봤다. 올 슈트 차림에 머리까지 올린 강지혁은 금방이라도 파티나 중요한 콘퍼런스에 참석해야 할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임유진은 그런 그의 앞에 귀여운 메뉴가 놓여 있는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풉’ 하고 소리 내 웃었다."뭐가 그렇게 재밌어?"강지혁이 물었다."아니, 그냥... 음, 네가 이런 귀여운 세트 메뉴를 먹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서 말이야. 참 네 음식 위에 그려져 있는 그 캐릭터 짱구야."임유진은 설명까지 해줬다.그에 강지혁도 이런 식사는 처음인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어릴 적 부모님과 같이 레스토랑에 갔을 때 이런 어린이 세트 메뉴를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꽤 가격이 비쌌기에 선뜻 주문할 수 없었다.그러다 이런 메뉴도 마음껏 주문할 수 있을 때는 이미 커버려서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오늘도 만약 임유진이 아니었다면 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은 윤이에게 턱받이를 해주었다. 평소 윤이는 스스로 밥을 먹을 줄 알았기에 그녀도 굳이 떠먹여 주지 않고 윤이가 혼자 먹을 수 있게 내버려 두었다.윤이는 조그마한 포크로 채소와 고기들을 짚어 오물오물하며 먹었다. 스스로 밥을 먹을 수 있다고는 하나 아직 어렸기에 깨끗하게 먹지는 못했다. 얼마 후 윤이의 턱받이와 책상 위에는 음식물 잔해들이 가득 떨어져 있었다.임유진은 윤이의 옷에 음식물이 묻지 않게 밥 먹는 틈틈이 아이의 옷을 정리해 주고는 입가에 묻은 것들도 정리해 주었다.어느 정도 배가 불러온 윤이는 예쁜 눈을 반짝이며 놀이 구역을 바라보았다.임유진은 피식 웃더니 아이의 목에 있는 턱받이를 풀어준 후 강지혁을 향해 말했다."나 윤이 데리고 놀다 올게.""그래."강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임유진은 윤이를 데리고 미끄럼틀부터 탔다. 아이는 신이
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반 시간 정도 흘렀을까, 임유진은 시계를 보더니 이제 슬슬 윤이를 집으로 돌려보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는 생각에 아이의 손을 잡고 강지혁 앞으로 다가갔다."잘 놀았어?"강지혁이 물었다."응, 이제 슬슬 윤이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언니가 걱정할 거야."임유진은 신이 나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윤이를 보며 수어로 물었다."윤이 여기 좋아?"그러자 아이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모가 다음에 또 데리고 와줄게."임유진의 말에 아이는 기쁜 듯 활짝 웃더니 손을 들어 임유진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는 그녀의 배에 얼굴을 비비적댔다.그 모습에 강지혁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아이를 그녀에게서 떨어트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얘기했다."그럼 가자."역시 임유진과 너무 가까이 붙어 있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다.임유진은 아이 같은 강지혁의 모습에 속으로 피식하고 웃었다.차에 올라탄 후 윤이는 많이 피곤했는지 하품을 몇 번 하더니 금세 임유진의 팔에 기대 잠이 들었다. 그녀는 아기천사 같은 윤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윤이는 너무 귀여운 것 같아. 청력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귀엽나?강지혁은 잠든 탁윤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의 눈에는 어린아이가 다 비슷하게 보였기 때문이다."윤이 이렇게 자면 많이 불편할 거야. 혁아 나 좀 도와줄래?"임유진은 몸을 천천히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내가 상체를 잡을 테니까 네가 하체를 잡아줘."임유진은 강지혁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는 잠시 그녀를 보더니 별다른 말 없이 순순히 그녀의 지휘를 따랐다.이 세상에서 강지혁을 이렇게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임유진뿐일 것이다."아, 좀 살살 해. 윤이 깨겠다."임유진의 말에 운전기사는 하마터면 운전대를 잡은 손이 미끄러질 뻔했다.천하의 강지혁을 이렇게 부려먹을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만약 다른 사람이었으면 진작
강지혁은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허리를 다시 바로 세웠다.“별로.”그는 이 말을 남긴 후 강선율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떠난 후 멍한 얼굴로 강지혁의 말을 곱씹어보았다.‘별로... 싫은 건 아니라는 뜻인가? 정말 싫었다면 혁이 성격상 바로 얘기했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쓰다듬어도 된다는 말인가?’임유진은 강지혁이 생각보다는 그녀를 잘 받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여기까지는 웬일이야?”이한이 웃으며 강현수에게 물었다.“시간이 조금 비어서 왔어.”강현수가 답했다.“그리고 며칠 뒤에 또다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 그 전에 얼굴 한번 보려고.”“또 해외로 간다고?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안 됐잖아.”“해외에서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주관할 사람이 필요해.”강현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아저씨도 너 가는 거 동의하셨어?”“아버지가 동의 안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가겠다고 한 거니까.”이한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현수야, 너 자꾸 해외로 나가는 거 임유진 씨 때문이지?”강현수는 그 말에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여전히 그는 임유진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가슴에 통증이 밀려왔다.“임유진 씨가 죽은 것 때문에 괴로워서 해외로 나가는 거라면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이한이 강현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유진 씨 죽지 않았어. 다시 돌아왔어. 지혁이 곁으로.”어차피 임유진이 살아있단 얘기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강현수도 며칠 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다.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는 것과 다시 살아서 강지혁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강현수는 그간 줄곧 해외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어 국내 소식은 조금 늦게 접하는 편이었다. 만약 그
강지혁의 오른쪽 옆에 앉은 강선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안 먹어? 엄마가 만든 김밥 엄청 맛있어! 현이가 장담해!”아이는 말을 마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왼쪽 옆에 앉은 강선율을 바라보았다.“오빠도 엄청 맛있다고 했어. 그치?”강선율은 그 말에 입에 김밥을 넣은 채로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엄청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엄마가 만든 거라 계속 입에 넣었다. 유치원에서 또래 친구들은 항상 엄마가 준비해준 음식을 먹었으니까.임유진의 김밥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예쁜 모양을 하고 있었다.맛이 없지는 않다만 과연 아빠가 이 김밥을 먹을까?강선율은 강지혁이 이런 귀여운 김밥을 먹는다는 게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두 아이는 들고 있던 포크도 내려놓고 강지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한번 먹어봐. 분명히 맛있을 거야.”그녀가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김밥을 마는 것뿐인데도 모양이 제대로 나지 않았고 맛도 짜거나 이상했으니까.강지혁이 선뜻 손을 대지 않자 옆에 있던 집사가 한마디 거들었다.“사모님께서 1시간이나 넘게 부엌에서 만드신 거예요. 저도 맛을 봤는데 아주 맛있더라고요.”그 말에 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바라보았다. 변형되어있는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심장에 통증이 이는 것 같았다.강지혁은 몇 초 고민하다 결국 젓가락을 들어 김밥을 입에 넣었다.그리고 강선율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입을 떡하고 벌렸다.아빠가 아이들이나 먹을 것 같은 김밥을 먹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전에 셰프가 귀여운 동물 모양의 음식을 내왔을 때도 한 번쯤은 먹을 만한데 끝까지 손을 대지 않았던 그였으니까.반면 강선현은 묵묵히 김밥을 먹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역시 엄마의 김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이라며 뿌듯해하고 있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강지혁은 회사에 가기 위해, 그리고 강선율을 유치원에 가
“그래, 그렇게 해.”임유진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나는 네 손을 놓을 생각이 없으니까 뭐가 됐든 상관없어. 두 손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네 손을 놓지 않을 거야. 그런데 혁아, 언젠가는 나만 네 손을 놓지 않는 게 아니라 너도 내 손을 꽉 잡고 놓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지금처럼...”그녀의 시선이 서로를 꽉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 쪽으로 내려갔다.“한사람이 잡는 것보다 역시 둘이 함께 잡는 게 훨씬 더 단단하잖아. 안 그래?”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강지혁은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더 꽉 잡고 싶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끈질긴 말에 결국 그녀가 가져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다만 그녀가 두 손을 턱에 받친 채 생글생글 웃으며 지켜보는 바람에 그는 식사하는 내내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여자의 시선 같은 건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 여자가 바라보면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쿵쿵거리며 피가 얼굴에 몰리는 느낌이었다.고작 여자의 시선 하나에 이런 식의 반응이 온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그날 저녁, 임유진은 씻은 후 전처럼 강지혁과 이어져 있는 침실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침실로 들어온 후 그녀가 조금 의외라고 느꼈던 건 방이 그녀가 5년 전에 썼던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옷가지들까지 똑같이 그대로 옷장 안에 걸려 있었다.지속해서 도우미들이 방을 깨끗이 청소해준 게 틀림없었다.임유진은 오늘 하루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어 조금 피곤했던 건지 딸까지 마저 씻긴 후 금방 잠자리에 들었다.깊은 밤.누군가가 침대 바로 옆으로 다가와 창문으로 쏟아진 달빛을 빌어 새근새근 자고 있는 여자와 아이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정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이 두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와 딸이다.어제까지만 해도 죽은 아내가 다시 살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바로 오늘, 이미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아내가 그와
입맞춤이 끝났을 때 임유진은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은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두 눈동자에는 모순의 감정이 가득 엉켜있었다.그리고 임유진은 그 눈동자를 보며 또다시 그와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네가 얼마나 예쁜지 알아? 네가 얼마나 내 혼을 쏙 빼놓는지 알아? 나는 오히려 너한테 묻고 싶어. 왜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왜 내가 몸과 마음을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너한테 빠져있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이런 예쁜 얼굴을 하고서 그러한 자신감도 없어?”임유진은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너...!”강지혁은 이에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행동은 마치 그를 유혹하고 있는듯했다.강지혁은 그녀에게 뭐라고 얘기하려다가 문득 손에 잡힌 그녀의 손가락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그녀의 손가락이 다른 사람과 달리 삐뚤빼뚤 변형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너 손가락이 왜...”그의 눈동자에 순간 고통의 감정이 스쳐 갔다.“아무것도 아니야. 감옥에 있을 때 조금 다쳤는데 그때 이렇게 됐어.”임유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가볍게 말해주었다.강지혁은 그 말에 침묵했고 임유진은 이에 고개를 숙인 채 강지혁의 손을 세게 맞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혁아, 나는 널 사랑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그리고 뭐가 됐든 결국에는 다시 널 찾아왔잖아. 이렇게 다시 네 곁으로 왔잖아. 앞으로는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이렇게 네 손을 꽉 잡고 절대 놓지 않을게. 약속해.”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또 그만큼 무척이나 단호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동자는 한 치의 거짓말도 담겨있지 않은 것처럼 매우 깨끗하고 맑았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또 손도 놓지 않을 거라고?그녀의 눈빛과 그녀의 목
임유진이 강지혁을 떠난 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오히려 그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서, 그를 대신해 죽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해서,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세 아이의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해서였다.그녀는 세 사이의 엄마면서 이기적이게도 아이들의 목숨으로 그의 목숨을 바꾸려고 했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에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어머니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또 철석같이 믿은 바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아버지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봤었기에 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원래 믿음이라는 건 배신당할 리스크를 어느 정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믿지 않으면 배신당하는 기분 같은 걸 느낄 일이 없다.“그럼 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이유가 뭔지 네 입으로 한번 말해봐.”강지혁이 말했다.“그건...”임유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건 나도 아직 기억을 못 하고 있어.”그녀의 기억은 강지혁이 과거에 했던 행동을 용서해주기로 한 거기가 끝이고 그 뒤는 고이준에게서 오늘 막 들었으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그녀의 자신 없는 말에 강지혁의 빈정거림은 더더욱 짙어졌다.“그래? 그럼 기억을 다 되찾고 나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던가 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서 날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지 말고.”임유진은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지혁은 분명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진 것을 알고 하마터면 정신을 완전히 놓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아무리 모든 걸 다 잊었다고 해도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의 아주 조그마한 조각 정도는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정말 이제는 그녀를 향한 마음 같은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건가?임유진은 그의 눈빛에 선명히 어려있는 빈정거림도 싫었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태도도 싫었다.그래서 그녀는 욱하는 마음에 몸을 강지혁 쪽으로 확 기댔다.이에 강지혁은 어찌할 새도 없이 임유진의 아래에 꼼짝없이 갇혀버렸
“혁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이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이대로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기다란 속눈썹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강지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리고 다 떠진 눈동자에 임유진의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임유진은 순간 그의 눈에 사로잡힌 포로라도 되는 양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마치 홀린 것처럼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그럼 말해봐. 네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그때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임유진은 그제야 번쩍 정신을 차렸다.“나는...”강지혁을 얼마나 사랑하냐고?그녀는 그를 위해 3년간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그의 행동을 다 알고도 과거의 원망을 다 내려놓겠다고 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이 세상에서 자신을 이렇게도 사랑해주는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과 이렇게도 마음을 다해 사랑할 만한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게다가 고이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강지혁이 죽는 게 싫어 자신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선택을 했다고도 했다. 물론 기억을 잃은 강지혁은 이 사실을 전부 다 잊어버렸지만 말이다.“왜 말을 못 하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하긴 정말 날 사랑했으면 애초에 내 곁을 떠나지 않았겠지. 안 그래?”‘떠났다라... 혁이한테는 내가 내 두 발로 떠난 것으로 되어있으니까...’임유진은 꼭 심장이 뭔가에 의해 눌린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만약 네가 정말 나를 사랑했으면 그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안 그래?”강지혁의 목소리에 점점 빈정거림이 섞여들기 시작했다.“즉 너는 날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닌 거야. 그러니까 날 대단히 많이 사랑한다느니 하는 말은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하지 마.”임유진은 그의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사모님, 회장님은 사모님과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늘 저
그때 현이가 옆에서 큰소리로 외쳤다.“나도 좋은 동생이 될 거야. 그리고 오빠는 내가 지켜줄 거야!”부풀린 볼이 꺼진 걸 보니 이제는 자신이 동생이 된 걸 인정한 모양이다.강선율은 현이의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 떨렸다.‘동생이면서 나를 지켜주겠다고...?’아이는 오늘 온통 처음 겪는 것들투성이였다. 누군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처음이었고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이게 바로 여동생이 생기면 느끼게 되는 진짜 기분인 건가? 소안나는 진짜 동생이 아니라 그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던 건가?“사모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집사의 말에 임유진은 2층을 쳐다보았다.“혁이는요?”박건태는 1시간 전에 이미 저택을 떠났고 가기 전 임유진에게 강지혁은 그저 기억이 자극된 바람에 두통이 온 거라고 얘기해주었다.“방금 도우미가 물어보고 왔는데 입맛이 없으시다고 사모님과 아이들 먼저 식사하라고 하셨답니다.”‘혹시 두통 때문인가?’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며 아이 둘을 데리고 식탁으로 향했다.하지만 저녁 식사를 다 마쳤는데도 여전히 강지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식사를 들고 직접 2층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계단을 막 오르려는 찰나 작은 손이 그녀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이에 임유진이 고개를 돌리자 강선율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또다시 나랑 아빠 곁을 떠날 거예요?”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아니, 안 떠나. 율이랑 아빠 곁을 떠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임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켜 주었다.“율아, 엄마라고 불러줄래?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주면 엄청 기쁠 것 같아.”강선율은 그 말에 잠깐 흠칫하더니 그녀와 시선을 맞추는 게 부끄러운 듯 점점 볼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엄마...”아직 마음의 문을 다 연 것은 아닌 듯했지만 임유진은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준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아들과는 5년이라는
“네, 자극을 차단하면 기억을 회복하는 데 지장이 생기게 됩니다.”박건태가 말했다.사실 그는 당시 처음으로 그에게 약을 처방해 주려 했을 때도 오늘과 똑같은 말을 했었다.다만 그에 대한 대답이 오늘은 조금 달랐다.“그럼 약 처방은 받지 않는 것으로 하지.”“네?”박건태가 조금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약 처방을 받지 않겠다고? 그렇다는 건...’“기억을 되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 오래 잊어버리고 살았으니 이제 찾을 때도 됐지.”강지혁이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하지만 그렇게 되면 매번 더 심한 통증이 일 테고 그 통증으로 인해 회장님 몸이...”박건태는 침을 한번 삼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회장님, 사람의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고통의 한계는 정해져 있습니다. 만약 그 한계선을 벗어나게 되면 어떤 상태가 될지 그 누구도 모릅니다.”강지혁의 기억은 일반 기억상실 환자들과 달리 기억을 되찾을 때 극심한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만약 기억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사고라도 생기면 그때는 상상도 못 할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리며 웃는 듯 마는듯한 눈빛을 보냈다.“어디 한번 보고 싶네. 기억을 회복할 때의 통증이 더 강한지 내 몸이 더 단단한지 말이야.”박건태는 그 말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를 몰랐다.눈앞에 있는 남자는 S 시 전체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고 또 대단한 남자다. 즉 이 남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S 시 전체가 하루아침에 모습을 달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그런데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이 남자는 자기 목숨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기억을 회복하려고 하고 있다.분명히 4년 전에는 ‘그런 기억은 떠올리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약 처방해.’라고 했으면서 말이다.‘갑자기 왜 이런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거지? 혹시... 아까 봤던 살아 돌아온 사모님 때문인가? 하지만 정말...?
“내가 누나야. 아까도 봐. 아빠가 엄마한테 누나라고 했잖아!”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했던 누나라는 소리를 자신들의 관계에도 적용하려는 아이의 말에 진땀이 다 났다.1층에서 누가 더 큰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때, 2층 서재에서는 강지혁의 검사가 진행되고 있었다.박건태는 강지혁에게서 두통이 시작된 계기와 통증의 정도를 확인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무래도 사모님의 말로 과거의 기억들이 자극을 받아 멋대로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 것 같습니다.”사실 박건태는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머릿속의 혼란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에 강지혁에게서 거실에 있던 여자가 바로 그의 사망한 아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으니까.만약 강지혁의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매스컴은 물론이고 S 시 전체가 들썩일지도 모른다.그리고 그렇게 되면 임유진은 S 시에 제일 꼭대기에 있는 여성이 될 테고 강지혁의 옆자리를 노리던 여자들은 닭 쫓던 개처럼 허망한 표정을 짓게 되겠지.“그럼 만약 앞으로도 그 여자가 예전을 떠올리게 할 만한 얘기를 하게 되면 또다시 오늘처럼 기억이 자극을 받아 두통이 일 거라는 소린가?”강지혁이 물었다.“그렇다고 봐야죠. 애초에 회장님의 두통이 시작된 계기도 사모님과의 짤막한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셨잖습니까. 그러니 사모님께서 돌아온 지금, 더더욱 그 기억이 자극을 받게 될 겁니다.”“그럼 내 기억이 완전히 다 회복될 수도 있다는 말인가?”강지혁이 또 한 번 물었다.“그럴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다만...”박건태가 말을 흐렸다.“다만 뭐지?”“다만 이런 식으로 기억이 회복되면 회장님은 매번 고통스러울 겁니다. 오늘도 고작 한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 것만으로 머리가 찢어질 듯 아프셨다고 하셨잖습니까. 앞으로는 사모님과 점점 더 자주 얼굴을 마주할 텐데 그렇게 되면 두통의 빈도도 커질 테고 통증도 점점 더 심해질 겁니다.”박건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사람마다 체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