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한 음식이 다 올라온 후 네 사람은 식사하기 시작했다. 강지혁은 자연스럽게 새우 껍질을 까서 임유진에게 건네주었고 임유진은 그의 행동에 꽤 민망해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지영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임유진을 툭툭 건드렸고 임유진은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멋쩍게 웃어넘겼다.그에 반해 강지혁은 다른 사람 눈길 따위는 신경도 안 쓰인다는 듯 계속 그녀를 챙겼고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임유진을 살뜰히 챙겼다."20분 뒤에 약 먹는 거 잊지 마.""응, 알겠어."그러자 옆에 있던 한지영이 놀란 얼굴을 하며 물었다."너 어디 아파?""아니. 관절염 치료하려고 먹는 약이야."그 말에 한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임유진이 감방에 있던 3년 동안 관절이 많이 안 좋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병원에 가서 제대로 치료받기를 권했지만, 매번 임유진은 적당한 핑계를 대며 병원 가기를 거부했었다. 치료에는 돈이 많이 들었고 임유진이 걱정하는 게 돈이라는 걸 잘 알고 있던 한지영이 자신이 치료비를 내겠다고도 했지만, 그 역시 임유진에게 거절당했다.그런데 지금 임유진이 착실히 치료받고 있는 걸 보면 강지혁이 그녀를 설득한 게 틀림없었다. 한지영은 강지혁을 점점 더 좋게 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친구가 감방에서 고생한 게 강지혁과 관련이 있는 건 맞지만 그때는 어찌 됐든 두 사람이 서로를 몰랐던 상황이고 지금은 옆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지혁은 임유진에게 지극정성이다.그러니 만약 강지혁이 자신의 친구에게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준다면 이것도 나름 좋은 결말이라고 한지영은 그렇게 생각했다.20분 후, 강지혁은 적당히 따뜻한 물을 가져오더니 손수 약 봉투를 뜯어주고는 약을 임유진의 손에 올려주었다. 한지영은 하나부터 열까지 자상함이 묻어나오는 강지혁의 행동을 보고는 그가 정말 임유진을 많이 아끼고 사랑해 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남자가 여자를 얼마나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느냐는 여자에게 돈을 얼마나 잘 쓰는것인지도
임유진은 자신의 눈치를 보는 한지영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꼭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서 진애령 씨 그렇게 만든 사람도 알아내고 내 결백도 찾을 거야.""그보다 너는? 너는 백연신 씨랑 어떻게 된 거야?"임유진이 되레 물었다."그냥 똑같지, 뭐."한지영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남들 눈에는 그저 평범한 커플처럼 보일 거야."하지만 가끔은 너무 ‘평범한 커플’처럼 보였기에 한지영은 종종 백연신과 진짜 연인 사이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매번 그런 기분이 들 때면 백연신은 그저 복수하기 위해 이러는 거라고 스스로 다그쳤다."나는 여전히 백연신 씨가 복수를 위해 너한테 접근했다는 생각은 안 들어."임유진은 만약 백연신이 정말 복수를 한다면 더 쉽고 빠른 방법을 선택했지 이렇게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드는 복수를 택할 것 같지는 않았다."나도 제발 그게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어."한지영이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임유진은 뭐라고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녀도 백연신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었기에 그냥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어떤 일은 직접 겪어야 안다고는 하지만 임유진은 한지영만큼은 상처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화장실에서 나온 두 사람은 다시 룸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보니 마침 백연신이 한 손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은 강지혁이 앉아 있는 의자의 등받이에 올려놓고는 허리까지 숙인 채 강지혁에게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다.꽤 가까운 거리에서 눈까지 마주치며 얘기하는 두 사람을 보고 임유진과 한지영은 처음 보는 광경에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둘이... 뭐해요?"한지영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장면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졌고 심지어 그 주위로 꽃가루가 날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백연신은 한지영의 표정을 보더니 그녀가 또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게 뻔하다며 얼굴을 찌푸렸다."아무것도 아니야."백연신은 숙이고 있던 허리를 펴며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응, 아무것도 아니야."
백연신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강지혁을 바라보는 한지영을 보며 기분이 언짢아졌다.S 시에 들어선 후 차는 먼저 강씨 저택에 도착했다. 강지혁과 임유진이 내린 후 운전석은 다시 백연신이 차지했다."유진아, 그럼 다음에 또 봐."한지영은 임유진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응. 오늘 고마워. 조심해서 가!"임유진 역시 인사를 건넨 후 강지혁과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한지영의 눈은 강지혁과 임유진의 뒷모습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고 백연신은 그런 그녀를 보더니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그만 보지.""이제는 마음대로 보게도 못하네."한지영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그녀는 전에 임유진의 셋방에서 봤던 강지혁이 떠돌이 거지는 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S 시에서 영향력이 제일 큰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한지영이 아직도 두 사람을 보며 한창 그때를 떠올리고 있을 때 백연신은 두 손으로 그녀의 볼을 확 잡고는 자기 쪽으로 돌려버렸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내 얼굴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더니 이제는 강지혁이야?" 그 말에 한지영은 하마터면 침에 사레 들릴 뻔했다.대체 언제 그녀가 강지혁을 보고 정신을 못 차렸다는 거지!한지영은 단순히 임유진과 강지혁이 정식으로 연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탄했을 뿐인데 이런 오해를 받으니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백연신과의 관계에서 그녀는 을이었고 감히 강하게 얘기할 수 없었기에 마지못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내가 강지혁 씨를 왜 그런 눈으로 보겠어요. 난 그저... 음, 두 사람이 잘돼서 너무 좋다고 생각했던 것뿐이에요.""정말이야?"백연신은 그녀의 진심을 꿰뚫어 보려는 듯 얼굴을 더 가까이했다."그럼요!"한지영은 한껏 억울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그를 안심시켰다."그래. 네가 누구 여자친구인지 잊지 마."백연신은 경고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한지영은 그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여자친구’라는 말은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계속 그녀의 머릿속에서 ‘자신은 지금 빚을 갚
‘을’인 한지영이 뭐라고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강씨 저택으로 들어온 후 강지혁은 임유진을 향해 물었다."오늘 혹시 실망했어? 기껏 해성시까지 갔는데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했잖아."그러자 임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실망 안 했다고?"강지혁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결백을 되찾을 수 있게 네가 증거를 찾아주겠다고 했잖아. 그 증거가 남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날 위해 찾아주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너무 기뻐."임유진은 오늘 드디어 강지혁이 자신을 완전히 믿고 있는 것 같았고 둘 사이를 막고 있던 벽도 천천히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가 얼마나 사건의 진상을 원하는지 강지혁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결백은 되찾아 줄 수 있어도 진실은 여전히 줄 수 없다."누나가 기쁘면 나도 좋아."강지혁은 예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는 곧 화제를 돌렸다."출근 안 하는 나머지 며칠은 뭐할 거야?""며칠 뒤에 외할머니 뵈러 가려고."임유진은 평소 일 때문에 바빠 그녀의 외할머니와는 틈틈이 전화로만 안부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휴일이 생긴 김에 외할머니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그래. 언제 갈 건데? 나도 같이 가."강지혁이 말했다."너도? 우리 할머니 보러 가겠다고?"임유진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누나 외할머닌데 나도 당연히 가야지."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코끝이 찡해지는 느낌이 들었다."그래. 그럼 그때 같이 가자."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저녁이 될 때쯤 한의원에서 강씨 저택으로 한약을 보내왔다. 이 약은 임유진의 자궁을 치료하기 위한 약이다.임유진은 한약을 보며 조금 울컥했다. 만약 강지혁이 그녀를 데리고 건강검진 하러 가지 않았다면 그녀는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고 혼자 단정 짓고 살았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이 약이 마치 희망처럼 느껴졌다.저녁 시간.식사를 마친 후 20분쯤 지나자 고용인은 강지혁의 지시대로
"누나가 먹은 약이 얼마나 쓴지 궁금해서."강지혁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하더니 흡사 쓴맛을 음미하듯 말했다."역시 쓰네.""..."임유진은 그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쓴맛이 궁금하다고 그걸 대뜸 마셔보는 사람은 아마 강지혁 말고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건 여자를 위한 약이다. 조금밖에 먹지 않아 다행히 별다른 문제는 없을 거지만 강지혁은 자신의 몸에 너무 무신경했다."너도 사탕 먹을래? 그럼 좀 나을 거야."임유진이 사탕을 입에 문 채로 얘기했다."응."강지혁은 짧게 대답한 후 임유진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잡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너..."임유진이 막 입을 벌려 얘기하려고 할 때 강지혁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쳐버렸다. 그의 키스는 여전히 집요했고 그녀를 숨조차 쉬기 힘들게 만들었다. 또한, 쓴맛과 단맛이 섞여버려 임유진은 지금 자기가 느끼고 있는 것이 무슨 맛인지도 몰랐다.키스가 끝난 후 임유진의 얼굴을 빨갛게 달아올랐고 강지혁은 그녀가 시선을 돌릴 수 없게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역시, 달아."강지혁은 예쁜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피식 웃고는 입을 벌려 네 글자를 뱉었다. 그 모습에 임유진의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었고 홀린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은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만날 시간과 날짜를 잡은 후 내일 그녀에게 줄 선물을 사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임유진의 외할머니는 현재 퇴원한 상태이다. 그녀는 임유진에게 어차피 자신은 병원에 있으나 집에 있으나 똑같다며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집에서 요양하겠다고 했다.임유진은 자신의 외할머니가 이런 결정을 한 게 돈 때문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병원에 있으면 그녀는 여러모로 더 좋은 보살핌을 받을 수 있고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을 테지만 병원에 계속 있게 되면 외삼촌들과 이모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가 없다.하지만 집으로 가면 외할머니는 과연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을까?의사의 말에 따르면
그러자 임유진이 잠깐 고민하나 싶더니 곧장 머리를 끄덕였다.임유진은 기사님에게 백화점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그녀는 먼저 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먹거리를 사기 위해 지하 1층인 식품 코너를 돌았다. 그러다 어르신과 당뇨 환자들을 위한 다과 세트를 발견했다. 가격은 조금 비싸긴 해도 서은숙도 가끔 혈당이 기준을 초과할 때가 있었기에 이 간식으로 결정했다.계산한 후 그녀는 다과 세트를 손에 들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옷을 사기 위해 위로 이동했다. 그렇게 2층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그녀 쪽으로 누군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그녀의 뺨을 때려버렸다.임유진은 갑자기 날아든 매서운 손에 하마터면 옆으로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몸은 중심을 잡아 괜찮았지만, 손에 들고 있던 다과는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난 내가 잘못 봤나 했는데 역시 네년이 맞았네. 출소하더니 이제는 뻔뻔하게 백화점까지 돌아다녀?"임유진은 맞은 쪽 얼굴을 감싸며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잔뜩 화가 나 있는 중년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는 얼굴이었다.당시 법정에서 임유진에게 달려들어 미친 듯이 뺨을 때린 여자가 바로 이 여자였다. 그것 때문에 임유진은 입술이 다 찢어지고 얼굴도 며칠 동안 퉁퉁 부어있었다.여자가 한창 날뛰고 있을 당시 경찰도 옆에 있었지만 마치 일부러 그 여자에게 분풀이할 시간을 주듯 말리지 않았다.이 여자가 바로 진애령의 어머니인 윤수경이다.상대가 진씨 가문이어서, 그에 반해 임유진은 아무것도 아니라서 그래서 심지어는 소씨 가문에게까지도 버림받은 걸까? 당시의 임유진은 진짜 절망 그 자체였다.그렇게 3년 형을 채우고 드디어 출소했지만, 윤수경은 지금 또다시 그녀를 때렸고 심지어 한 번으로는 성에 안 차는지 또 한 번 때리려고 했다.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윤수경의 팔을 잡았다."나 죄지은 적 없어요."임유진이 차가운 눈빛으로 상대방을 보며 말했다."법원에서 네가 죄가 있다고 이미 판결이 났는데 뭐가 어째? 고작 3년, 하... 내가 볼
"당신은 사람 눈도 많은 곳에서 꼭 이래야겠어?"진기태의 말에 윤수경이 분노하며 말했다."너무 화가 나니까 그렇죠. 당신도 아까 쟤가 하는 말 들었잖아요. 우리 애령이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한 거!"진기태는 임유진을 노려보며 말했다."기어이 출소했네. 아까 잘못된 판결이라고 하던데 그건 법원에서 결정한 문제지 가해자가 감히 입에 올릴 수 있는 말이 아니야. 그리고..."진기태는 벌레 보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 같은 게 내 앞에서 권리를 논할 자격은 없어."그러고는 옆에 있던 경호원들에게 말했다."저 여자 당장 끌어내. 그리고 저 여자 사진 보안팀과 관리팀에 보내서 앞으로 백화점에 영구 출입금지시켜."그 말에 경호원은 임유진의 팔을 잡고는 그대로 밖으로 끌고 나가려고 했다."잠, 잠깐만요. 내 물건이 아직..."임유진은 그제야 진씨 가문이 이 백화점 소유주거나 혹은 이 백화점 대주주 중 한 명이라는 걸 깨달았다.그녀가 끌려나가면서 아까 산 다과 세트를 주우려고 하자 진기태는 얼른 다른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저 쓰레기는 당장 쓰레기통에 버리도록 해. 걸리적거리니까."그녀가 산 다과 세트는 곧바로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진기태는 지금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그녀를 모욕했고 임유진은 치욕스러움에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하지만 그녀는 반격할 힘조차 없었고 그저 짐짝처럼 경호원의 손에 의해 백화점 밖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입구에 다다른 후 경호원들은 그녀를 잡던 손을 풀어주더니 경고까지 잊지 않았다."이제 당신은 이 백화점에 발을 들일 수 없습니다. 만약 경고를 어기고 또다시 방문할 시 공공질서 위반 혐의로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임유진은 변호사였던 자신이 이제는 법으로 협박까지 당하자 헛웃음이 났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는 백화점 안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그러고는 이런 일에 속상해 하거나 힘들어할 필요 없다고, 그녀가 화를 내면 진기태가 원하는 대로 될 뿐이라고 끝없이 자신을
윤수경의 말을 듣고 있던 진기태가 입을 열었다."저런 여자 다시 감옥에 보내는 거 쉬워. 내가 사람 시켜서 처리할게."진기태는 한 사람의 운명을 마치 장난감처럼 쉽게 다룰 수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윤수경이 이를 갈며 말을 보탰다."그럼 이번에는 아예 평생 감옥에서 썩게 만들어 놔요."그녀는 그래야만 자기 마음에 있는 울분이 조금이라도 가실 수 있을 것 같았다."그래, 알았어. 당신 말 대로 할게."진기태는 윤수경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당신도 이제 애령이 생각은 그만하고 우리 세령이 생각이나 해.""이제 우리한테 남은 유일한 딸인데 당연히 그래야죠."윤수경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세령이는 왜 하필 강지혁이 아닌 소씨 가문 애를 좋아해서는. 그것만 아니면 지금쯤 강지혁에게 장인 장모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윤수경의 아쉬움 가득한 말에 진기태가 말했다."애들 마음을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그럼 지금 내 마음이라도 나아지게 임유진 그 여자를 빨리 감옥에 집어넣어요!"윤수경은 다시 표독스러운 얼굴로 돌아와 진기태를 닦달했다."알았어, 알았어. 내가 빨리 그렇게 할게."진기태가 그녀를 달래주며 답했다...."네? 백화점에서 임유진을 봤다고요?"부모님 보러 본가로 온 진세령이 윤수경에게서 오늘 임유진을 우연히 만났다는 걸 전해 듣고 깜짝 놀라 물었다."그래. 그게 글쎄 우리 백화점을 돌고 있더라니까?!"윤수경이 말했다."살 게 있어서 네 아버지와 같이 백화점에 갔다가 어쩌다 그렇게 딱 만났는지. 그러고는 자기는 죄를 짓지 않았다며 뻔뻔하게 말하는데 내가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아주 개망신을 줘버렸어."의기양양해서 말하는 윤수경에 반해 옆에서 듣고 있던 진세령의 얼굴을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개망신을 주다니... 어떻게요?""나는 그 여자 뺨을 때렸고 너희 아버지는 경호원을 불러 그 여자를 백화점에서 쫓아내 버렸어."윤수경은 아직 진세령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는
그때 현이가 옆에서 큰소리로 외쳤다.“나도 좋은 동생이 될 거야. 그리고 오빠는 내가 지켜줄 거야!”부풀린 볼이 꺼진 걸 보니 이제는 자신이 동생이 된 걸 인정한 모양이다.강선율은 현이의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 떨렸다.‘동생이면서 나를 지켜주겠다고...?’아이는 오늘 온통 처음 겪는 것들투성이였다. 누군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처음이었고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이게 바로 여동생이 생기면 느끼게 되는 진짜 기분인 건가? 소안나는 진짜 동생이 아니라 그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던 건가?“사모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집사의 말에 임유진은 2층을 쳐다보았다.“혁이는요?”박건태는 1시간 전에 이미 저택을 떠났고 가기 전 임유진에게 강지혁은 그저 기억이 자극된 바람에 두통이 온 거라고 얘기해주었다.“방금 도우미가 물어보고 왔는데 입맛이 없으시다고 사모님과 아이들 먼저 식사하라고 하셨답니다.”‘혹시 두통 때문인가?’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며 아이 둘을 데리고 식탁으로 향했다.하지만 저녁 식사를 다 마쳤는데도 여전히 강지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식사를 들고 직접 2층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계단을 막 오르려는 찰나 작은 손이 그녀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이에 임유진이 고개를 돌리자 강선율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또다시 나랑 아빠 곁을 떠날 거예요?”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아니, 안 떠나. 율이랑 아빠 곁을 떠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임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켜 주었다.“율아, 엄마라고 불러줄래?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주면 엄청 기쁠 것 같아.”강선율은 그 말에 잠깐 흠칫하더니 그녀와 시선을 맞추는 게 부끄러운 듯 점점 볼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엄마...”아직 마음의 문을 다 연 것은 아닌 듯했지만 임유진은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준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아들과는 5년이라는
“네, 자극을 차단하면 기억을 회복하는 데 지장이 생기게 됩니다.”박건태가 말했다.사실 그는 당시 처음으로 그에게 약을 처방해 주려 했을 때도 오늘과 똑같은 말을 했었다.다만 그에 대한 대답이 오늘은 조금 달랐다.“그럼 약 처방은 받지 않는 것으로 하지.”“네?”박건태가 조금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약 처방을 받지 않겠다고? 그렇다는 건...’“기억을 되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 오래 잊어버리고 살았으니 이제 찾을 때도 됐지.”강지혁이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하지만 그렇게 되면 매번 더 심한 통증이 일 테고 그 통증으로 인해 회장님 몸이...”박건태는 침을 한번 삼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회장님, 사람의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고통의 한계는 정해져 있습니다. 만약 그 한계선을 벗어나게 되면 어떤 상태가 될지 그 누구도 모릅니다.”강지혁의 기억은 일반 기억상실 환자들과 달리 기억을 되찾을 때 극심한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만약 기억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사고라도 생기면 그때는 상상도 못 할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리며 웃는 듯 마는듯한 눈빛을 보냈다.“어디 한번 보고 싶네. 기억을 회복할 때의 통증이 더 강한지 내 몸이 더 단단한지 말이야.”박건태는 그 말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를 몰랐다.눈앞에 있는 남자는 S 시 전체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고 또 대단한 남자다. 즉 이 남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S 시 전체가 하루아침에 모습을 달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그런데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이 남자는 자기 목숨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기억을 회복하려고 하고 있다.분명히 4년 전에는 ‘그런 기억은 떠올리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약 처방해.’라고 했으면서 말이다.‘갑자기 왜 이런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거지? 혹시... 아까 봤던 살아 돌아온 사모님 때문인가? 하지만 정말...?
“내가 누나야. 아까도 봐. 아빠가 엄마한테 누나라고 했잖아!”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했던 누나라는 소리를 자신들의 관계에도 적용하려는 아이의 말에 진땀이 다 났다.1층에서 누가 더 큰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때, 2층 서재에서는 강지혁의 검사가 진행되고 있었다.박건태는 강지혁에게서 두통이 시작된 계기와 통증의 정도를 확인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무래도 사모님의 말로 과거의 기억들이 자극을 받아 멋대로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 것 같습니다.”사실 박건태는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머릿속의 혼란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에 강지혁에게서 거실에 있던 여자가 바로 그의 사망한 아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으니까.만약 강지혁의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매스컴은 물론이고 S 시 전체가 들썩일지도 모른다.그리고 그렇게 되면 임유진은 S 시에 제일 꼭대기에 있는 여성이 될 테고 강지혁의 옆자리를 노리던 여자들은 닭 쫓던 개처럼 허망한 표정을 짓게 되겠지.“그럼 만약 앞으로도 그 여자가 예전을 떠올리게 할 만한 얘기를 하게 되면 또다시 오늘처럼 기억이 자극을 받아 두통이 일 거라는 소린가?”강지혁이 물었다.“그렇다고 봐야죠. 애초에 회장님의 두통이 시작된 계기도 사모님과의 짤막한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셨잖습니까. 그러니 사모님께서 돌아온 지금, 더더욱 그 기억이 자극을 받게 될 겁니다.”“그럼 내 기억이 완전히 다 회복될 수도 있다는 말인가?”강지혁이 또 한 번 물었다.“그럴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다만...”박건태가 말을 흐렸다.“다만 뭐지?”“다만 이런 식으로 기억이 회복되면 회장님은 매번 고통스러울 겁니다. 오늘도 고작 한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 것만으로 머리가 찢어질 듯 아프셨다고 하셨잖습니까. 앞으로는 사모님과 점점 더 자주 얼굴을 마주할 텐데 그렇게 되면 두통의 빈도도 커질 테고 통증도 점점 더 심해질 겁니다.”박건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사람마다 체질
여동생에게 안기면 이런 느낌인 건가?눈앞에 있는 여동생은 양녀로 들어온 또 다른 여동생과 많이 달랐다. 소안나는 매번 그를 보면 잘 보이려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멀리 떨어진 채 가까이 다가오는 걸 무서워했는데 눈앞에 있는 여동생은 그의 손을 덥석 잡는 것도 모자라 엄마처럼 그를 꼭 끌어안아 주기까지 했다.강선율은 아까 임유진도 밀쳐내지 못하더니 이번에는 여동생의 포옹도 밀쳐내지 못하고 있었다.한편 임유진은 아이들이 꼭 끌어안은 채 감정을 나누는 모습에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강선율이 워낙 과묵하고 애어른 같은 면이 있는 아이라 조금 걱정이 됐는데 수다쟁이에 애교쟁이인 딸이 먼저 가까이 다가가 주니 둘 사이에 밸런스가 맞는 것 같아 참으로 다행이었다.게다가 강선율의 반응을 보면 현이를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잠시 후, 의사인 박건태가 저택에 도착했다.서둘러 소파로 다가온 박건태는 임유진과 강지혁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강지혁의 몸 상태를 살폈다.그런데 그때 강지혁이 서서히 두 눈을 뜨며 말했다.“이제 괜찮아졌어. 아까처럼 아프지 않아.”박건태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게 전에는 한번 아프면 적어도 몇 시간은 아팠었으니까. 그런데 집사에게서 전화를 받고 저택에 도착하기까지 고작 20분밖에 안 됐는데 전과 달리 정말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전혀 아픈 얼굴이 아니었다.‘증상이 전보다 괜찮아진 건가...?’“그래도 검사는 한번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박건태의 노파심에 강지혁은 잠깐 생각하더니 이내 2층으로 올라가 검사를 받았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올라간 뒤 집사를 향해 물었다.“혁이 저러는 거 자주 있는 일이에요?”“그게... 사모님께서 곁에 없으신 뒤로 자주 두통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셨어요. 근 2년간은 그래도 전보다 아프다고 하신 빈도가 줄었는데 오늘 갑자기 또 두통이 도졌네요. 아마 사모님을 봬서 두통이 재발한 것 같아요.”집사가 자신의 추측을 얘기했다.그리고
‘누나’라는 두 글자가 나왔을 때 임유진과 강지혁의 몸이 동시에 움찔했다.임유진은 너무나도 오랜만에 듣는 ‘누나’라는 소리에 조금 벙찐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당시의 강지혁은 그녀와 연인이 되어서도 가끔 둘만 있을 때 그녀를 누나라고 불렀다.그에게는 그녀가 단지 ‘사랑하는 여자’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가족이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강지혁은 그녀를 누나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은 외롭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각인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임유진은 그에게 잡히지 않은 나머지 한 손을 들어 가볍게 그의 앞머리를 위로 젖힌 후 그의 관자놀이를 주물러주었다.“혁아, 나 여기 있으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편히 누워있어.”강지혁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 때문에 상당히 놀란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인 놀람으로 머리가 아픈 것까지 다 잊어버렸다.왜 그녀를 누나라고 부른 거지?또한 처음 부르는 호칭일 텐데 왜 이토록 몇백 번이나 불러봤던 것처럼 익숙하고 또 자연스럽게 입에서 뱉어지는 거지?“너...”강지혁이 뭔가 물으려는 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머리 아플 때 자꾸 말하려고 하면 더 아플 거야. 이따 괜찮아지면 뭐든 대답해 줄 테니까 지금은 가만히 있어.”임유진이 그의 말을 끊고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그리고 손 좀 풀어줘. 내가 마사지해줄게. 그러면 조금은 괜찮아질 거야.”강지혁은 까만 눈동자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서서히 눈을 감고 그녀의 손목을 풀어주었다.임유진의 손목은 빨갛게 손자국이 나서야 드디어 그에게서 해방되었다.임유진은 분명히 그에게 잡힌 손목이 아플 텐데도 마치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적절히 힘을 조절해 가며 그가 아플 것 같은 곳을 세심하게 마사지해주었다.임유진의 몸은 마사지를 해주면서 자연스럽게 강지혁의 몸 가까이 기울어졌고 이에 강지혁은 마치 그녀의 숨결에 몸이 포근히 감싸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의 손길 때문인지 아니
“원해. 혁아, 나는 널 원해.”그리고 이건 임유진의 목소리였다.강지혁은 강선율을 꼭 끌어안고 있는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한 손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 눌었다. 그는 지금 마치 머리가 날카로운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팠다.“그럼 내 곁에서 떠나지 마. 평생 내 곁에만 있어.”“혁아, 난 널 떠나지 않아. 약속해.”“유진아... 유진아...”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임유진의 이름을 부르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게 그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또 중요했던 일인 것처럼 말이다.대체 이 대화들은 뭐지? 5년 전에 그와 그녀가 나눴던 대화인 건가?“윽...”“혹시 또 머리가 아프세요?!”집사가 강지혁의 상태를 눈치채고 서둘러 다가왔다.강지혁은 그 질문에 뭐라고 대답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아팠다. 전에도 머리가 아픈 적이 간혹 있었지만 오늘은 특히 더 아픈 것 같았다.강선율을 안고 있던 임유진은 집사의 말에 아이를 놓아주고 서둘러 강지혁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혁아, 왜 그래? 어디 아파?!”강지혁의 얼굴은 어느새 하얗게 질려있었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으며 두 눈에는 고통이 가득 서려 있었다.“아무래도 또다시 두통이 도진 것 같아요. 지금 당장 박 선생님을 부를게요.”집사는 서둘러 휴대폰을 집어 들고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유진은 고통스러워하는 강지혁을 보다가 탁자 위에 있는 티슈를 뽑아 그의 땀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가까이 가져갔다.그런데 이마에 티슈가 닿기도 전에 강지혁의 손에 의해 막혀버리고 말았다.“뭐... 하는 거야...”강지혁의 입에서 힘겹게 말이 뱉어져 나왔다. 두통이 심한 탓인지 목소리까지 덜덜 떨려있었다.“너 땀 닦아주려고 그래.”임유진은 강지혁에게 잡힌 손목이 무척이나 아팠지만 아프다는 걸 티 내지는 않았다.“혁아, 많이 아프면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을 하면 할 수록 점점 더 아파질 거야. 그리고 조금만 참아. 의사
혹시 집사나 고이준이 얘기해줬나?임유진은 그 생각에 고개를 돌려 집사와 고이준을 바라보았다. 이에 두 사람은 그녀에게 자신들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아빠랑 함께 엄마 성묘하러 갔을 때 묘비 옆에 놓인 엄마 사진을 봤어요.”강선율이 답했다.임유진은 아들의 말에 이번에는 정말 사레에 들리고야 말았다.그녀는 시선을 홱 돌려 태연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있는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율이를 데리고 내 성묘하러 까지 갔어? 아니 뭐... 혁이는 내가 죽었다고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왜 엄마 성묘하러 간 거야? 그리고 왜 묘비 옆에 엄마 사진이 있어?”그때 강선현이 궁금하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엄마가 돌아가셨으니까.”강선율이 대답했다.“엄마 살아 있는데?”“다들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했어.”“아니야. 엄마 안 죽었어.”아이들은 임유진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에 관해 열띤 토론을 펼쳤고 임유진은 이에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두 아이 사이에 끼어들었다.“그만! 엄마는 보다시피 이렇게 잘 살아 있고 죽었다는 건... 오해야! 율아, 엄마 돌아왔어. 그간 율이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앞으로는 절대 율이 곁에서 떠나지 않을게.”임유진의 눈가는 어느새 빨갛게 물들어있었고 목소리는 잔뜩 메어있었다.그녀는 세쌍둥이가 그녀의 뱃속에서 힘차게 발길질을 하던 순간을 지금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전에는 기억을 잃어 현이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이렇게 율이까지 만나게 되었다.다만 잔뜩 격앙된 임유진과 달리 강선율의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 변화도 없었다. 마치 엄마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게 아이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닌 것처럼, 엄마라는 존재가 그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닌 것처럼 강선율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떠나도 괜찮아요.”강선율이 입을 열었다. 아이는 얼굴만 닮은 것이 아니라 말하는 말투까지 강지혁과 똑 닮아 있었다.임유진은 아이의 말에 더더욱 눈시울이 빨개졌다.5년이라는 시간 동안
“당시의 내가 어떻게 널 사랑하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네가 뭐라고 내가 다시 널 사랑해야 하지?”강지혁은 마음의 동요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 톤을 높였다.하지만 목소리가 커진 탓에 어깨에 늘어져 있던 아이가 잠에서 깨버리고 말았다. 현이는 비몽사몽 한 채로 눈을 뜨더니 고개를 살짝 들고 강지혁에게 말했다.“아빠, 시끄러워. 현이 잘 거니까 조용히 해.”아이는 그렇게 말을 하고 다시 강지혁의 볼에 뽀뽀를 했다.그리고 강지혁은 아이의 행동에 또다시 몸이 경직되었고 얼굴은 부자연스럽게 변했다.“현아, 엄마랑 같이 방에 가서 자자. 아빠 일해야 해.”임유진은 그제야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며 현이에게 말했다.이에 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임유진에게로 팔을 활짝 열었다.임유진은 조심스럽게 강지혁의 품에서 현이를 안아 들며 자신의 어깨에 아이의 머리를 기대게 했다.아이가 임유진에게로 넘어간 후 강지혁은 순간 몸의 일부가 사라진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빨리 아이를 떼어내고 싶었는데 막상 임유진이 아이를 안아가자 이상하게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아니, 오늘 대체 왜 이러는 거지?강지혁이 느낀 모든 이상한 느낌은 전부 다 눈앞에 있는 두 모녀 때문이었다.“우리는 이만 나갈게. 마저 일해.”임유진은 다시 잠이 들려고 하는 현이를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살짝 낮추며 몸을 뒤로 돌렸다. 그녀는 나가기 위해 서재의 문손잡이에 손을 올리다 뭔가 할 말이 남은 듯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혁아, 나 죽은 거 아니니까 우리는 아직 부부고 나는 아직 네 와이프 맞지? 그런 거면 네가 다시 날 사랑하길 바라는 것도 당연한 거 아닌가?”임유진은 이 말을 남긴 후 그의 답변은 듣지도 않은 채 서재를 나가버렸다.그리고 강지혁은 닫힌 문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당연하다고?5년 전에 멋대로 떠나버린 여자에게서 이제 와서 이런 말을 듣는 게 달가울 리가 없다.하지만 분명히 심기가 불편해야 하는
그리고 강지혁은 아이를 품에 안아 든 채 마치 동상처럼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러다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왜 네가 들어와?”“어차피 누구든 현이만 데리고 나가면 되는 거잖아. 그래서 고 비서님 대신 내가 왔어.”임유진은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 강지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아까 고이준은 그녀가 죽은 후 강지혁이 그녀의 유골함을 품에 끌어안고 이성을 잃고 절규했다고 하며 거의 미쳐버리기 직전까지 갔었다고 했다.그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 임유진은 그저 그 얘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하며 아파 났다.이 남자는 대체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던 것일까.강지혁은 그때 그녀에게 자신의 목숨도 줄 수 있다고 했고 실제로 그녀를 위해 목숨을 버리려고도 했다.자신의 목숨과 그녀의 목숨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했던 그 날, 그는 망설임 없이 유언을 남기고 자신이 죽는 것을 택했으니까.강지혁은 정말 목숨을 다해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녀에 관한 건 추억도 감정도 뭐든 다 잊어버렸지만 말이다.하지만 살아있으니 그것으로 됐다. 이번에는 그녀가 그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면 된다. 그래서 그가 다시 한번 그녀를 사랑하게 하면 된다.임유진은 강지혁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현이가 너 엄청 좋아하나 보네. 현이는 싫은 사람한테 안기거나 안겨서 자거나 하지 않아.”강지혁은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더니 이내 다시 말을 내뱉었다.“애 데리고 나가.”임유진은 그 말에 딸을 안아가는 것이 아닌 한 걸음 더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사실은 혁이 너도 현이 좋아하잖아. 안 그래?”그녀가 알고 있는 강지혁은 정말 싫으면 상대가 아무리 아이라도 절대 안아주지 않을뿐더러 자기 몸에 찰싹 달라붙게 하지 않는다.강지혁은 그녀의 말에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왜 그렇게 확신하지?”“그야 너는 누가 네 목에 손대는 걸 쉽게 허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