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 정도가 흐른 후 의사들이 밖으로 나왔다.“태아 상태는 양호합니다.”“유진이는요? 유진이는... 괜찮습니까?”강지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네, 불안정한 정서 때문에 조금 위험할 뻔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괜찮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어떤 자극도 주지 마세요. 만약 지금 상태에서 더한 자극을 받게 되면 그때는 아이들이 35주도 채 채우지 못하고 나와야 할 테니까요.”일전의 정기검진으로 의사는 35주가 됐을 때 제왕 절개로 아이를 낳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오늘 이런 일이 생겨버렸고 만약 이대로 임유진의 정서가 더 격해지면 그때는 35주가 다 되기 전에 아이를 낳아야 할 수도 있다.그리고 그렇게 되면 각종 장기가 채 발육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살았다고 해도 질병 같은 걸 지니게 될 수 있다.“알겠습니다.”강지혁이 답했다.하지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어떻게 해야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왜 하필 이렇게 중요한 때에 진실을 들켜버린 걸까. 대체 왜!강지혁이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강현수가 그의 팔을 덥석 잡으며 막았다.“안으로 들어가려고? 유진이가 정신을 차린 뒤에 네 얼굴을 보면 또다시 흥분하지 않겠어?”그 말에 강지혁의 표정이 변하더니 강현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유진이는 내 아내야!”“그래서? 유진이가 네 아내든 아니든 나는 유진이가 상처받는 꼴 못 봐.”강현수가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너 때문에 이미 한번 쓰러졌는데 너는 이 상황에서 또다시 유진이를 자극하고 싶어?”강지혁의 몸이 움찔 떨렸다. 반박할 말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임유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VIP 병실로 옮겨진 뒤였다.그리고 그녀의 병실에는 탁유미가 와 있었다.“유미 언니...?”임유진은 탁유미가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는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여긴 어디지? 병원인가? 계단에서 혁이랑 강현수가 대화하던 장면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그 뒤로...’임유진의 머릿속으로 두 사람
여기서 또다시 정서가 불안정해지면 그때는 아이들이 위험해질 테니까.탁유미는 임유진의 말에서 그녀가 더 이상 이 화제로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하지만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사소한 일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뭐가 됐든 혼자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내가 제대로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진 씨 얘기를 들어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니까요.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는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더 낫다고들 하잖아요.”“네, 고마워요.”“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죠. 유진 씨가 나를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임유진은 탁유미가 억울하게 당했을 때 그녀를 위해 가장 먼저 증거를 찾아주고 몇 년 전의 사건도 적극적으로 파헤치며 그녀를 도왔다.만약 임유진이 아니었으면 이경빈에게 간이식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고 이렇게 멀쩡하게 얘기를 하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탁유미는 임유진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려는 듯 일부러 재밌는 얘깃거리를 꺼냈다.그렇게 얼마간 대화를 한 후 임유진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언니, 이만 병실로 돌아가요. 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다시는 아이들을 위험에 빠트리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탁유미는 정말 괜찮다는 듯한 임유진의 말에 조금 안심이 됐다.“알겠어요. 그럼 오늘은 먼저 가볼게요.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밤늦게라도 괜찮아요.”탁유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가려던 그때 임유진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언니, 밖에... 강현수 씨도 있었다고 했죠?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런데 안으로 좀 불러줄래요?”그 말에 탁유미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알겠다며 병실 문을 열었다.병실 문이 열리자 밖에 있던 두 남자의 시선이 일제히 탁유미에게로 꽂혔다. 그리고 마치 짠 것처럼 동시에 물었다.“유진이는 좀 어때요?”초조함이 그대로 담겨 있는 두 시선에 탁유미는 조금 멈칫했다.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S 시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두 남자가 한 여자 때문에
이에 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유진 씨를 정말 사랑한다면, 유진 씨를 정말 아껴주고 싶다면 유진 씨한테 상처가 되는 일은 하지 말아줘요.”그 말에 강지혁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조금 뒤에야 아주 작게 말을 내뱉었다.“이 세상에서 유진이가 아주 조금의 상처도 받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일 겁니다.”...강현수는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환자복을 입은 채 반쯤 누워있는 임유진의 모습이 보였다.“미안해...”강현수가 먼저 말을 걸었다.그런 방식으로 그녀에게 사실을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녀가 병원에 입원하게 만들 생각도 없었다.그는 메일로 전해 받은 진실을 가능하면 끝까지 마음속에 묻어둘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진세령에게 죗값을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참으로 야속하게도 세상일은 뜻대로 되는 법이 없었고 최악의 방식으로 그녀에게 진실을 전하게 되었다.마치 그녀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녀가 가장 필요할 때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녀를 믿지 못했던 그때처럼 말이다.그녀가 강지혁을 선택하게 만든 건 결국 그였다. 그가 두 손으로 직접 그녀를 강지혁의 곁으로 밀어버렸다.“현수 씨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죠.”임유진이 말했다.“익명으로 받았다던 그 메일, 나한테도 보여줄래요? 내 메일로 그대로 보내줘요.”강현수는 그녀의 말에 조금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 메일을 보려고?”“네. 안 될까요?”임유진이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안될 건 없지만 너 지금 몸이...”“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해요. 갑자기 흥분하거나 그럴 일은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임유진은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그 사건의 진실을 보고 싶었다.그 누구보다 그녀가 가장 먼저 알았어야 하는 일이니까. 또한 진애령이 죽은 지금 당사자는 이제 그녀밖에 없으니까.강현수는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휴대폰을 꺼내 들
임유진에게는 저택에서 들었던 얘기들이 지금도 여전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꼭 청천벽력이라도 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하고 난도질당한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하지만 그녀는 홑몸이 아니고 배 속의 아이까지 임신한 상태이기에 마음대로 아파할 수도 없었다.임유진은 휴대폰을 들고 메일함으로 들어갔다.강현수가 보낸 메일... 이걸 강현수에게 보낸 사람은 강문철이다.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강문철이 임종 직전에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럼... 우리 내기할까? 아가씨가 정말... 지혁이를 사랑하는지...”강문철은 아마 그때 그녀가 모든 진실을 알고도 강지혁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지 보고 싶었을 것이다.물론 눈을 감기 직전까지 끝끝내 그녀에게 진실을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대신 진실을 알릴 선택권을 강현수에게 넘겨주었다.하지만 저택에서 그녀에게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다고 했던 강현수의 말을 떠올려보면 어쩌면 그녀는 영원히 진실이 무엇인지 몰랐을지 모른다. 강현수까지 입을 닫게 되면 그녀에게 진실을 얘기해줄 사람은 영원히 없을 테니까.만약 강현수가 오늘 강지혁에게 그 진실을 늘어놓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녀는 평생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 대신 자신을 해한 게 누군지, 자신의 인생을 망가트린 사람이 누군지, 왜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해야만 했는지 평생 모르고 살게 됐을 것이다.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게 현명한 건지 아니면 모든 걸 다 깨닫고 사는 게 현명한 건지에 대한 정확한 답변은 누구도 줄 수 없다.사람마다 다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으니까.하지만 임유진은 평생 고통받더라도 아무것도 모르고 싶지는 않았다.그녀는 강현수가 보낸 메일로 들어가 내용을 훑어보았다.자료에는 당시 사건의 모든 파일과 진세령이 진범이라는 증거들이 아주 세세하게 나열되어 있었다.진애령의 사고는 진세령이 꾸민 일이 맞고 허재명은 그저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에 불과했다. 그리고 진기태는 사고가 있고 난 뒤 곧바로 모든 걸 알고 있는 허재명을 해외로 보내
강지혁은 그 사건의 진상이 그런 방식으로 임유진에게 들킬 줄도 몰랐고 그로 인해 임유진이 하마터면 아이를 잃게 될 줄도 몰랐다.만약 임유진이나 아이들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겼으면 아마 그는 평생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강지혁은 병상 옆으로 다가가 달빛을 빌어 그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살짝 부어있었고 볼은 여전히 창백했다.임유진은 잠을 자는 와중에도 아이들을 지키려는 듯 두 손을 복부에 딱 붙이고 있었다.그녀가 얼마나 아이들을 생각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하긴 이렇게도 필사적이니 목숨을 걸고 세 명 모두 지키려고 했겠지.“미안해... 유진아, 내가 잘못했어...”강지혁의 목소리는 싹 잠겨있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유약했다.“그때 일은 변명할 것도 없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눈앞의 이익 때문에 너를 사지로 몰아갔어... 그때는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네가 망가지는 걸 그대로 지켜만 봤어... 정말 미안해...”당시 그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그저 이해관계의 일환일 뿐이었다.사실 진씨 가문에서는 진범이 누군지 그에게 말을 해준 적은 없다. 그저 강지혁이 자료를 조사하다가 진세령이 진범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뿐이다.하지만 진세령이 범인인 걸 알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애초에 진애령에게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진씨 가문의 일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으니까.강지혁에게 있어 그 사건은 그저 약혼녀가 죽은 사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약혼녀라는 건 어차피 다시 찾으면 그만일 테니까.당시 그에게는 그런 사사로운 사건보다는 회사를 더 크게 만드는 게 더 중요했다. 그래서 이익 관계를 최우선으로 뒀다.하지만 임유진을 사랑하게 된 지금 당시의 생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그의 방관으로 그녀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얻게 됐고 물리적인 고통도 받았다.미안하다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그녀가 받은 상처를 보상해줄 수는 없었다.강지혁은 두 손을 들어
임유진은 탁유미의 말을 곱씹으며 쓰게 웃었다.차라리 이 모든 게 다 오해라면 얼마나 좋을까.강지혁이 처음부터 끝까지 진애령을 죽인 게 그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진씨 가문과 강지혁 사이에 아무런 거래도 없었다면 얼마나 좋을까.그날 밤, 임유진이 잠든 후 강지혁은 평소처럼 조심스럽게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매일 밤 같은 시간, 그는 이때야 비로소 그녀의 곁을 지킬 수 있었다.아마 임유진은 모를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또 소중한지.오늘도 강지혁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임유진의 볼을 매만졌다.하지만 그녀의 볼과 손바닥이 닿으려는 순간 임유진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임유진과 두 눈이 마주친 강지혁은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정신을 차린 후 곧바로 손을 거두어들이고 뒷걸음질 치더니 병실을 나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임유진은 아직 그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아무리 그가 종일 병실 밖을 지켜도 그녀는 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고 퇴원이 예정돼 있던 날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원 기간을 연장하겠다고 했으니까.아마 집으로 돌아가면 그와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될 테니 그게 싫어서일 것이다.강지혁이 서둘러 병실 문을 열어젖히려던 그때 임유진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잠깐만.”강지혁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그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혹시 너무나도 간절한 마음에 헛걸 들은 건 아닌지 의심이 됐다.그래서 그녀의 말에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고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강지혁, 나랑 얘기 좀 해.”임유진이 말했다.탁유미의 말대로 피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뭐든 얘기를 해봐야만 한다.강지혁은 그녀의 말에 가슴이 욱신거렸다.임유진은 그를 ‘혁이’가 아닌 ‘강지혁’으로 불렀다. 서로 마음을 확인한 뒤에는 항상 다정하게 애칭으로 불러줬는데 지금은 마치 낯선 이를 부르듯 딱딱하게 불렀다.“그래.”강지혁은 천천히 돌아
“아니. 진세령은 처음부터 유진이 널 살인범으로 몰아가려고 했어...”강지혁이 말했다.“진세령은 당시 소민준의 여자친구였던 널 눈엣가시로 여겼으니까. 그래서 진애령을 제거하는 차에 너까지...”임유진은 순간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기분이 들었다.진세령은 처음부터 자신의 계획안에 그녀를 넣었다.임유진은 우연히 살인범으로 몰린 것이 아니라 진세령의 철저한 계획 속에 살인범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억울함을 가득 안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임유진은 눈을 질끈 감고는 이불을 말아쥔 손에 힘을 가했다.진실이란 늘 그렇듯 이렇게 잔혹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더 잔혹한 진실이 아직 하나 더 남았다.임유진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입술을 꽉 깨물다 한참 뒤에야 다시 눈을 떴다.“네가 날 도와 사건을 뒤집어 준 건 단지 내가 진실을 파헤치지 않았으면 해서였어. 그래서 일부러 빠르게 허재명을 내 눈앞에 대령해 허재명이 말한 게 모두 진실이라고 내가 생각하게끔 만든 거야. 맞아?”강지혁은 살짝 휘청거리더니 천천히 임유진 곁으로 다가갔다.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임유진의 손아귀 힘은 점점 더 세졌다.강지혁은 병상 가까이 다가오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다.“미안해... 그때는 그게 네 억울함도 풀어주고 사건을 빨리 종결시킬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어...”그는 그녀에게 미안해라는 말을 이렇게도 많이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강지혁은 요 며칠 입만 열었다 하면 미안해라는 말을 입가에 달고 살았고 그건 그녀가 깨어있을 때도 그러했고 그녀가 깊이 잘 때도 그러했다.“왜 날 속였어?”임유진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차라리 사건을 뒤집어주겠다는 말이나 하지 말지. 왜 날 속였어? 왜 내가 허재명이 진범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어? 왜 진세령을 감싸줬어?! 대답해!”그녀의 추궁은 마치 차가운 칼날처럼 그의 심장을 아프게 찔러댔다.“미안해... 미안해...”강지혁은 고개를 살짝 든 채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해준다며. 네가 그때 그랬잖아... 내가 울면, 이경빈처럼 펑펑 울면 용서 준다고 했잖아. 유진아, 나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돼...? 평생 울면서 사죄할게. 진심으로 내가 한 짓을 뉘우칠게. 그러니까 제발... 제발 나 한 번만 용서해줘...”강지혁은 그렇게 말하며 뜨거운 눈물을 아래로 쏟아냈다.임유진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프게 욱신거리고 또 그로 인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강지혁의 눈물을 이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강지혁의 눈물은 그의 볼을 타고 내려와 이내 임유진의 손을 뜨겁게 데웠다.임유진은 그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한쪽 손을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 쪽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막상 그의 눈물 젖은 볼과 닿으려는 순간 일전 느꼈던 울렁거림이 밀려왔다.그녀는 서둘러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강지혁을 밀친 다음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변기를 붙잡고 미친 듯이 토하기 시작했다.입덧 시기가 지난 후 한 번도 속이 울렁거리거나 토하고 싶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 이 순간 참지 못할 정도로 위가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유진아! 너 괜찮아?!”강지혁은 임유진이 토하는 모습에 순간 긴장감이 극도로 치솟아 얼른 화장실로 달려와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하지만 그의 손이 닿는 순간, 임유진의 상태는 더 심해졌고 토도 더 세게 하기 시작했다.“나한테... 나한테 손대지 마.”임유진은 힘겹게 숨을 내쉬며 강지혁의 팔을 잡아 멀리 뿌리쳤다.그렇게 10초 정도 지났을까, 역시 강지혁의 손길이 문제였던지 임유진은 천천히 토를 멈추고 진정하기 시작했다.임유진은 티슈로 입가를 정리한 후 창백해진 얼굴을 들어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빛에는 강지혁을 향한 배신감과 원망의 감정이 들어있었다.임유진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며 그녀가 뭔가를 얘기하려던 그때, 강지혁은 마치 본능적으로 뭔가를 알아차린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안 돼... 말하지 마!’하지만 그의 간절한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
“그럼 어떻게 하면 끝내줄 건데요? 뭐 하룻밤 같이 자 줘요? 아니면 백연신 씨가 만족할 만큼 다시 연애하는 것처럼 연기라도 해줘요?”한지영이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어갔다.“백연신 씨 좋다는 여자들 많잖아요. 그런데 왜 꼭 나여야 해요? 아니, 그건 또 아니었지. 꼭 나여야 하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헤어지자고도 안 했을 테니까.”“너한테 나라는 인간은 대체 뭐야?”백연신이 한지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한지영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답했다.“한때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더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나한테 백연신 씨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에요. 우리 두 사람은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이고 인생관도 너무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은 제일 중요한 게 사업이고 가문이지만 나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고 단란하게 사는 게 더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나는 백연신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약한 사람이라 같은 고통을 두 번은 못 겪어요.”두 사람은 살아온 환경, 그리고 그로 인한 인생을 대하는 태도,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어쩌면 처음부터 이어지지 않을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백연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나더니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달빛 아래의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하고 또 어두웠다.“네 말이 맞아... 나 좋다는 여자들도 많고 꼭 너여야 하는 것도 아니야.”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입꼬리를 조금씩 위로 올렸다.5년이다. 5년을 숨죽이고 드디어 고씨 가문을 사지까지 내몰았는데 그 시간 동안 한지영은 서서히 그의 존재를 지워가고 있었다.백연신은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한지영은 그가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리며 숨이 가빠왔다.‘아파하지 마. 백연신 때문에 아파하지 마! 잊기로 했잖아. 이제는 다 잊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한지영은 속으로 끊임없이 이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서 두 눈을 떼지 못했고 심장은 계속해서 아파 났다.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끝까
한지영의 목소리를 참 좋아했던 백연신이었지만 오늘은, 지금은,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밉고 잔혹하게 들려와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다.충격이 컸던 건지 백연신의 얼굴은 서서히 하얗게 질려갔다.“날... 안 좋아해?”고작 다섯 글자를 내뱉는 건데도 그는 무척이나 힘이 들어 보였다.“백연신 씨를 계속 사랑하고 있었으면 소개팅 같은 건 나가지도 않았겠죠. 다시 연애할 생각 같은 것도 안 했을 거고요.”한지영이 말했다.“백연신 씨를 좋아했던 건 맞아요. 사랑도 했고요. 하지만 헤어졌잖아요.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에요. 어른이면 어른답게 질척거리지 말고 깔끔하게 끝내요.”“깔끔하게 끝내자고?”백연신이 쓰게 웃었다.‘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네가 다쳤을 때 내가 널 살리겠다고 무슨 짓을 했는지, 네 안전을 위해서 내가 어떤 일까지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내가 틀린 말 했어요?”“날 안 좋아하면 연우진 그놈을 좋아하는 건가?”백연신은 자기가 물어봐 놓고 한지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자기가 다시 확신을 가지며 답했다.“아니. 넌 연우진 안 좋아해. 연우진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었으면 내가 너한테 키스했을 때 내 따귀를 때리고 살점을 물어뜯어서라도 날 멈추게 했을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꼭 맹수에게 쫓기다 궁지에 몰린 아기 고양이 같았다.하지만 심적으로 궁지에 몰린 건 그녀가 아닌 백연신이었다.“한지영, 너는 한순간도 연우진을 좋아해 본 적 없어. 아니야?”백연신은 얼른 그렇다고 말하라는 듯한 눈빛으로 한지영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한지영은 숨을 한번 들이켜더니 곧바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그래서?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 게 뭐? 내가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백연신 씨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요.”한지영은 말을 마친 후 갑자기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백연신은 그녀의 행동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얼굴은 더 하얗게
백연신은 침대 바로 옆에까지 다가오더니 갑자기 몸을 아래로 기울이며 한지영을 가두듯 양손을 그녀의 몸 바로 옆에 올려놓았다.그러고는 타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한지영,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쉬운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고 단 한 번도 너를 멋대로 휘둘러도 되는 여자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누가 감히 자기 목숨을 쉬운 거라고, 언제든지 휘두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한지영은 갑자기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순간 몸이 굳으며 이성을 놓칠 뻔했다가 간신히 다시 정신을 다잡고 뒤로 몸을 움직였다.하지만 얼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금방 벽에 부딪혀버렸다. 그리고 백연신은 벌어진 거리 만큼 다시 앞으로 몸을 움직이며 더 바짝 다가왔다.“하...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아?”낮게 깔린 목소리가 한지영의 귀를 간지럽히며 이내 그녀의 마음마저 뒤흔들려고 했다.그래서 한지영은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그와 눈을 마주하는 것을 피했다. 이대로 계속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어버릴 것 같았으니까.백연신은 한지영의 옆얼굴을 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지난 5년간, 단 하루도 네 생각을 안 했던 날이 없었어.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어. 내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 내가 제대로 해결했으면 우리는 지금쯤 무사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았을 테니까...”한지영은 그 말에 흠칫하더니 곧바로 다시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그만 해요.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지영아, 나는 단 한 번도, 아니, 단 한 순간도 고은채를 사랑한 적이 없어. 좋아한 적도 없어.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한지영 너였어.”백연신은 5년을 꾹 참았던 말을 드디어 입 밖으로 꺼냈다.지난 5년간은 아무리 한지영이 보고 싶어도, 아무리 한지영을 안고 싶어도 그저 마음속으로만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녀를 껴
백연신은 앞머리를 전부 깔끔하게 뒤로 넘긴 채 검은색 슈트 셋업을 입고 있었다. 아까 한지영이 인터넷을 검색하며 봤던 기자들 앞에서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었다.그래서일까, 한지영은 백연신이 눈앞에 있는 게 어쩐지 조금 현실감이 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이상한 느낌도 들었다.백연신과 한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러기를 몇 분, 더는 못 참겠던지 한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12시가 넘었어요.”“알아.”그리고 곧이어 백연신의 입에서도 말이 흘러나왔다.‘안다고? 아는 사람이 왜 안 나가고 계속 거기 앉아있어? 아니, 애초에 내 방에는 왜 들어온 거야?’한지영은 이해를 못한 채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이 집은 원래 그의 것이라는 깨닫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늦었는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왔어요?”“너 보러.”백연신은 이 방에 들어온 뒤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한지영을 바라보았다. 그저 자는 얼굴을 바라만 보는 건데도 마음이 녹고 또 행복했다.한지영의 잠버릇은 여전했다. 또 어떤 기이한 꿈을 꾸는지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왔다 갔다 했다가 갑자기 이를 갈고, 또 어느 순간에는 헤벌쭉 웃어댔다.전에 그와 함께 취침했을 때와 다를 거 하나 없었다.그래서 더 좋았다.“잘 자더라.”백연신이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어. 다음에는 킹사이즈 침대로 주문할까 봐. 그러면 쉽게 떨어지지 못하겠지.”한지영은 그의 말에 땀이 삐질 흘렀다.‘고작 나 자는 거 보려고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낮에 고은채 씨 기자회견 봤어요. 이제 다 해결됐으니까 이만 집으로 돌아가도 되죠?”한지영은 화제를 돌렸다. 언제쯤 돌아갈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그렇게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당연한 거 아니에요? 행동을 제한받은 채로 생활하는 걸 즐기는 사람은 없잖아요.”백연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한지영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백연신과 고은채가 진작 헤어진 거라면 한지영은 파렴치한 상간녀도 아니고 염치없는 세컨드도 아니니까.“응, 아마도.”한종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지영아,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봐. 언제쯤 집에 갈 수 있는지.”“근데 여보, 연신이 말이에요. 혹시 우리 지영이한테 아직 마음이 남아있는 거 아닐까요? 지영아, 너 혹시 연신이랑 다시 잘해볼...”“엄마, 전에도 말했잖아요. 백연신 씨와는 두 번 다시 사귈 일 없다고. 그러니까 괜한 생각하지 마세요.”한지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이해영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이해영은 그런 딸의 태도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부터 백연신을 꽤 좋게 보고 있었으니까. 물론 한지영이 아플 때 헤어짐을 고한 건 지금 생각해도 괘씸하지만 근 5년간 딸이 남자와의 만남을 피해온 것도 그렇고 백연신이 얼마 전에 한지영의 손을 사라진 것도 그렇고 어쩌면 두 사람 모두 아직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그래, 그만해. 그놈이 뭐가 좋다고 다시 우리 지영이와 이어주려고 그래? 지영이가 병상 위에 있을 때 헤어지자고 했던 놈이야. 아무리 지금 잘나간다고 해도 나는 그놈한테 우리 지영이 못 줘! 그놈 아니면 우리 딸이 시집 못 간다고 해도 평생 내가 끼고 살고 말지 그놈한테는 안 줘!”한종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그냥 해본 말이에요. 나라고 뭐 우리 지영이 안 소중한 줄 알아요?”한종훈과 이해영 사이에 팽팽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한지영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말렸다.“자자, 그만 해요. 두 분 다 이곳에 오래 갇혀 있어서 지금 많이 예민해진 것 같아요. 아빠 말대로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내가 이따 밖에 있는 경호원한테 언제쯤 나갈 수 있는지 물어볼게요. 내 생각에는 아마 내일쯤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하지만 저녁 식사를 마치고 경호원에게 언제쯤이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냐고 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