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해준다며. 네가 그때 그랬잖아... 내가 울면, 이경빈처럼 펑펑 울면 용서 준다고 했잖아. 유진아, 나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돼...? 평생 울면서 사죄할게. 진심으로 내가 한 짓을 뉘우칠게. 그러니까 제발... 제발 나 한 번만 용서해줘...”강지혁은 그렇게 말하며 뜨거운 눈물을 아래로 쏟아냈다.임유진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프게 욱신거리고 또 그로 인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강지혁의 눈물을 이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강지혁의 눈물은 그의 볼을 타고 내려와 이내 임유진의 손을 뜨겁게 데웠다.임유진은 그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한쪽 손을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 쪽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막상 그의 눈물 젖은 볼과 닿으려는 순간 일전 느꼈던 울렁거림이 밀려왔다.그녀는 서둘러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강지혁을 밀친 다음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변기를 붙잡고 미친 듯이 토하기 시작했다.입덧 시기가 지난 후 한 번도 속이 울렁거리거나 토하고 싶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 이 순간 참지 못할 정도로 위가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유진아! 너 괜찮아?!”강지혁은 임유진이 토하는 모습에 순간 긴장감이 극도로 치솟아 얼른 화장실로 달려와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하지만 그의 손이 닿는 순간, 임유진의 상태는 더 심해졌고 토도 더 세게 하기 시작했다.“나한테... 나한테 손대지 마.”임유진은 힘겹게 숨을 내쉬며 강지혁의 팔을 잡아 멀리 뿌리쳤다.그렇게 10초 정도 지났을까, 역시 강지혁의 손길이 문제였던지 임유진은 천천히 토를 멈추고 진정하기 시작했다.임유진은 티슈로 입가를 정리한 후 창백해진 얼굴을 들어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빛에는 강지혁을 향한 배신감과 원망의 감정이 들어있었다.임유진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며 그녀가 뭔가를 얘기하려던 그때, 강지혁은 마치 본능적으로 뭔가를 알아차린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안 돼... 말하지 마!’하지만 그의 간절한
의사와 간호사가 나간 후 임유진은 너무 가깝지도 않고 또 너무 멀지도 않은 곳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는 강지혁을 빤히 바라보았다.지금의 그는 꼭 두려움과 절망에 잠식되어 버린 사람 같았다.임유진은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다 드디어 입 밖으로 말을 내뱉었다.“아이들을 출산하고 나면 따로 나가서 살고 싶어.”강지혁은 그 말에 고개를 홱 들더니 초조해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집을 나가겠다고...?”“응.”임유진이 답했다.“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고 또 어떤 얼굴로 너를 봐야 하는지를 모르겠어. 그러니까 내가 나가는 게 나한테도 너한테도 좋을 거야.”사실 임유진도 변명거리라면 얼마든지 생각해낼 수 있었다.그녀가 감옥으로 들어가게 됐을 때 강지혁은 아직 그녀와 알게 되기도 전이었기에 그에게 있어 그녀는 그저 어찌 되든 상관없는 사람이었다든지 또는 강지혁은 원래부터 성정이 냉랭하고 조금은 잔인한 사람이라 동정심 같은 건 없었다든지 또 강지혁은 그저 방관자일 뿐 실질적으로 진세령의 죄를 덮는 데 참여한 건 아니라던지... 변명거리라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다.하지만 그 무엇하나 그녀 스스로를 설득시키지 못했다.임유진은 어릴 때부터 죄를 단죄하는 것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변호사라는 직업을 꿈꿨다. 그녀는 정의에 예민한 사람이었고 늘 법을 자신의 무기로 싸워왔다.그런데 하필이면 그녀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었음에도 그녀가 억울하게 당하는 걸 가만히 지켜만 봤다.지옥 같던 3년의 옥살이는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놨을 만큼의 큰 사건이었다. 그 일로 인해 상처받았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거의 평생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치유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납득할 수 없어! 너한테도 좋고 나한테도 좋을 거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어!”강지혁이 빠르게 다가와 병상 바로 옆에 서며 말했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고 했다. 하
강지혁은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었지만 그녀가 그의 곁을 떠나는 것만큼은 허락할 수 없었다.임유진이 강씨 저택에 돌아가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건지, 아니면 그를 싫어하는 건지는 잘 모르지만 뭐가 됐든 그는 그녀를 자신의 감시망 안에서 풀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녀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는 순간부터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으니까.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그녀의 대답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대로 병실을 나가버렸다.그리고 잠시 후 요 며칠 그녀를 돌봐줬던 간호사가 들어와 그녀에게 말을 전했다.“대표님께서 더는 병실에 들어오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시라고 하셨습니다.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저를 불러주세요.”임유진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천천히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그리고 두 손을 복부에 살포시 올려놓으며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아이를 무사히 출산하려면 감정의 기복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하지만 그렇게 눈을 감은지 10분 정도나 지났지만 마음이 진정되기는커녕 점점 더 복잡해지기만 했다.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과거의 고통 같은 건 전부 다 깨끗이 지워버리고 강지혁이 그녀의 고통에 일조한 것을 마치 몰랐던 일인 것처럼 세뇌하며 살아야 하나? 그러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까?그때 문득 그녀의 머릿속으로 일전 강지혁이 했던 만약 조금만 더 일찍 그녀를 만났으면 그런 고통은 겪게 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 떠올랐다.그때는 그저 연인의 과거를 안타까워하는 말인 줄 알았다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완전히 다른 의도로 한 말이었다.아마 강지혁은 조금 더 일찍 그녀를 만났으면, 조금 더 일찍 그녀를 사랑했으면 그녀가 그런 고통을 겪도록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고 온 힘을 다해 그런 일이 없게 그녀를 지켜줬을 것이다.왜, 왜 그와 그녀는 이렇게도 늦게서야 서로를 만나게 된 걸까? 왜 그녀가 감옥에 가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걸까?임유진의 닫힌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와 이내 그녀의 베개를
임유진이 저택에만 있던 며칠간, 밖에서는 한차례 폭풍이 일었다.진씨 가문의 자금원은 완전히 끊겼고 그로 인해 은행 대출조차 갚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은행은 당연하게도 법원에 진씨 가문의 산업들을 동결할 것에 대한 신청서를 제출했다.물론 진씨 가문의 재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산업이 막힌 그다음 날 진세령은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진세령은 진작 은퇴를 했지만 아직도 그녀를 지지하고 있는 팬들은 존재했다. 그날 진세령은 팬 미팅을 위해 아침부터 샵으로 가 정성스럽게 꾸미고 억대의 목걸이까지 착용했다.또한 단지 팬들과 근황 얘기나 하는 자리인데도 굳이 기자들까지 불렀다.사실 그녀는 팬 미팅 자리를 빌려 기사를 타 진씨 가문에 경제적인 위기 같은 건 없다고 알릴 참이었다. 하지만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경찰들이 와 그녀를 체포했다.진세령은 한순간에 자기 팬들과 기자들 앞에서 경찰에 의해 수갑이 채워진 모습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게다가 경찰은 수갑을 채울 때 그녀를 살인 용의자로 체포한다는 얘기까지 했었다.그 때문에 팬들은 너도나도 상황 파악이 안 된 얼굴로 벙쪄 있기만 했다.살인 용의자라니, 그들의 영원한 여신인 진세령이 살인 용의자라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물론 당황한 건 진세령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경찰이 하필 팬 미팅하는 날 오래된 일로 들이닥칠 줄은 몰랐으니까.이로써 진씨 가문의 몰락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더 이상 그 어떤 것으로도 이미지를 회복할 수 없어졌다.그녀가 잡혀간 후 기자들에 의해 진세령이 살인 용의자라는 얘기는 일파만파 전해졌고 인터넷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스캔들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네티즌들은 살인 용의자라는 말에 3년 전 진애령의 교통사고 사건을 수면으로 끄집어내며 진세령은 그 사건의 용의자로 잡혀간 것이라고 추측했다.그리고 그 추측에 인터넷은 또다시 들끓었다.그도 그럴 것이 당시 진애령이 차 사고로 죽었을 때 진세령이 통곡하며 속상해했던 사진과 기사가 아직
“뭐라고? 너도 딸인데 설마 어머님과 아버님이 너희 언니만 챙기려고 했을까! 너한테도 일정 부분을 물려주려고 했겠지!”“하, 일정 부분? 언니한테 다 주고 나머지를 나한테 준다는 건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진세령이 코웃음을 쳤다.“그리고 만약 언니가 살아 있었다면 과연 너희 부모님이 지금처럼 나를 좋아했을까? 후계자도 아닌 나를 반겼겠냐고?”그녀의 말에 소민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진세령의 말이 맞았다. 당시 진세령과 연애한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그의 부모님이 그녀를 반겼던 건 그녀가 장차 진씨 가문을 이어갈 후계자였기 때문이었다.“그럼 유진이는 왜 건드린 건데? 걔가 너한테 무슨 잘못을 했다고. 차라리 다른 사람한테 죄를 뒤집어씌우지 유진이는 왜 건드렸어?”소민준이 물었다.그는 당시 진세령이 다 알면서도 마치 임유진이 진범인양 그녀에게 온갖 못된 짓을 한 것을 생각하면 머리털이 쭈뼛서며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질투가 많은 여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도 무서운 짓까지 하는 여자일 줄은 몰랐다.“네 여자친구였으니까. 걔를 제거해야 내가 네 옆에 설 수 있었으니까.”진세령이 비릿하게 웃으며 소민준을 빤히 바라보았다.“궁금했어. 임유진이라는 여자가 너한테 어떠한 존재인지. 네가 임유진을 위해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그런데 생각보다 쉽게 내치더라고? 하하하.”진세령은 한바탕 웃더니 다시 웃음을 거두어들이고 정색했다.“민준아, 너는 그때 너희 집안을 위해서 여자친구인 임유진을 망설임 없이 내쳤어. 그럼 과연 지금은 어떨까? 임유진한테 그랬던 것처럼 나도 내칠 거야? 아니면 나를 위해 네 모든 걸 걸고 날 도와줄 거야?”이 말을 하는 그녀의 눈빛에는 일말의 긴장감과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진세령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은 물어보지 않아도 훤했다.하지만 그 간단한 말을 소민준은 입을 꾹 닫은 채 끝끝내 해주지 않았다.진세령은 계속되는 그의 침묵에 쓴 웃음을 지었다.“넌 어쩜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달라진 게 없어?”진세령
“강지혁이 또 널 감금한 거야?”강현수가 물었다.그리고 임유진은 그의 질문에 어안이 벙벙해졌다.감금이라니?강현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다시 말을 건넸다.“요 며칠 강씨 저택을 지키는 경호원 수가 3배 가까이 늘었어. 보안상 문제라고는 하는데 진짜 이유가 뭔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지. 너랑 할 얘기가 있어서 다섯 번이나 찾아갔는데 그 다섯 번 다 강지혁 때문에 막혔어. 그리고 너한테 전화를 걸어도 전파가 차단당한 건지 연락이 되지 않았고.”임유진은 그 말에 흠칫했다.저택의 경호원 수가 는 건 그녀의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 인원이 많아진 것이었다.그리고 이제 와 생각해보니 며칠 전 쇼핑하러 쇼핑 거리에 갔을 때도 이상했다.아무리 평일이라도 그 거리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그날따라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경호원들도 5명 가까이 따라붙었으니까.그날 바로 의심하지 못했던 건 쇼핑하느라 많이 피곤했기 때문이었다.‘그러고 보니 저택 안에 CCTV 개수도 는 것 같은데. 설마... 내가 도망갈까 봐 더 많이 설치한 건가? 그래서 그런 식으로 경호원들과 도우미들이 내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한 건가...?’강현수는 고민에 빠진 임유진을 보며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강지혁과는 지금 어떤 상태야? 강지혁이 혹시 너한테...”그는 그날 그렇게 돌아간 후 임유진이 계속 걱정되었다. 강지혁과 혹여 싸운 건 아닌지, 그로 인해 몸이 상한 건 아닌지, 궁금한 것들투성이였다.그래서 몇 번이나 전화하고 직접 찾아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강지혁은 그녀와 연락이 닿을 만한 수단을 전부 다 차단해놨고 얼굴도 보지 못하게 했다.이게 감금이 아니면 또 뭐란 말인가.“현수 씨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어요.”임유진이 고개를 저었다.“그냥... 곧 출산 예정일이라, 그래서 경호원을 더 늘린 것뿐이에요.”“정말이야?”강현수가 임유진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네.”임유진이 답했다.하지만 답은 이렇게 했지만 그녀 역시 완전히 확신하는 건
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임유진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평생 내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어. 그치 유진아?”임유진은 그 말에 순간 숨이 턱 막혔다.그에게 해줬던 말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불러온 복부를 쓰다듬으며 숨을 한번 고른 후 말을 내뱉었다.“맞아.”그러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 강현수를 바라보았다.“나는... 혁이 곁을 떠날 생각이 없어요.”임유진의 입에서 ‘혁이’라는 호칭이 나온 순간 강지혁의 눈빛이 반짝거리며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일말의 흥분이 일었다.다시 혁이라고 불렀다는 건 용서해줄 마음이 생겼다는 증거가 아닐까?과거의 안 좋은 기억들을 이제는 내려놓겠다는 말이 아닐까?한편 임유진의 말에 강현수의 얼굴은 조금 가라앉았다.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임유진이라면 강지혁의 곁에 있겠다고 할 것 같았다.하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정말 그 진실을 다 알고서도 강지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지 직접 그녀의 말로 확인해보고 싶었다.“알겠어.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더 이상 둘 사이에 끼어들지 않을게.”강현수는 쓰게 웃더니 사람들을 데리고 진료실을 나갔다.그리고 그가 나간 후 강지혁은 자신의 경호원과 임유진의 경호원에게 잠시 대기하라고 하며 밖으로 내보냈다.그렇게 널찍한 진료실 안에 오직 임유진과 강지혁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강지혁은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정말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정말?”“나는...”임유진은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어 다시 입을 닫았다.사실 그녀도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확신할 수 없었다.임유진은 요 며칠 줄곧 마음속으로 갖가지 핑계를 대며 그때는 강지혁과 알게 되기 전이었으니 그가 그녀에게 냉정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되뇌었다.하지만 그렇게 했는데도 여전히 그를
강지혁은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임유진의 경호원인 황채린에게 뒤를 맡기고 의사도 다시 돌려보냈다.강현수 때문에 한참을 기절해 있었던 의사는 그의 말에 알겠다고 하며 황채린의 부축을 받고 진료실 쪽으로 향했다.“대표님, 괜찮으십니까?”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고이준이 강지혁에게 물었다.“그래...”강지혁은 벽을 짚은 채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그는 여전히 무서워하고 있었다. 임유진이 정말 결혼한 걸 후회할까 봐, 이전까지는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고 해도 앞으로는 시도 때도 없이 하게 될까 봐, 그리고 사실은 그를 그 정도로 사랑한 건 아닐까 봐... 그는 너무나도 두려웠다.강지혁도 자신이 이렇게까지 겁쟁이가 될 줄은 아마 몰랐을 것이다.“김재호는?”강지혁이 이마에 난 땀을 손으로 닦으며 물었다.“아직 못 찾았습니다.”김재호는 강문철의 충직한 수행비서로 강문철의 장례식 이후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강현수가 임유진의 사건을 알게 된 일 때문에 사람들을 풀어 계속해서 김재호의 종적을 찾고 있지만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에 관한 아주 조금의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계속 찾아. 김재호가 S 시를 뜨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든 내 앞에 잡아 와.”강지혁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김재호는 그저 단순한 비서가 아니라 줄곧 강문철을 따라다니던 심복이었다. 그러니 분명 강문철의 지시를 받았을 것이고 뭔가를 할 것이 분명했다.‘뭔가를 할 생각이 아니라면 종적을 감추지 않았겠지. 하루빨리 김재호를 잡아야 해.’“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이 답했다.“그리고 보안을 조금 더 강화해. 유진이 옆에도 사람을 더 붙이고. 한시라도 눈을 떼지 않게 해.”“네!”만약 김재호가 정말 강문철의 지시를 받은 게 맞다면 그 지시내용은 아마 임유진을 제거하라는 지시일 것이 분명했다.강문철은 목숨이 끝날 때까지도 여전히 임유진을 탐탁지 않아 했으니까.그러니 강지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임유진을 지켜내야만 한다....병원에서 나온 임유진을 기다리고 있던 건
임유진은 자신의 양손이 왜 한쪽은 핸들에 묶여있고 또 한쪽은 기어봉에 묶여있는지 이제야 확실히 깨달았다.애초에 다른 선택지는 없게 둘 중 하나가 살 수 있게만 만들어놓은 것이었다.지금 그녀가 탄 차량의 주위에 얼마만큼의 폭탄이 설치되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그걸 파악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만약 파악하는 도중에 누군가가 폭탄을 건드리면 최악의 결과로 치닫게 된다.정말 두 사람 다 사는 방법은 없는 걸까?임유진은 머리를 최대한으로 굴리며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했다.그때 김재호의 말을 전부 듣고 있던 진세령이 표독스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어때? 상황이 엄청 재미있어졌지? 이제 강지혁은 어떻게 할까? 나는 강지혁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널 버릴 거라는 거에 한 표를 던지고 싶은데 너는 어때? 혹시 너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얼굴이 그렇게 죽상이 된 거야? 하하하!”임유진은 진세령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강지혁의 얼굴만 바라보았다.그리고 강지혁도 그런 그녀를 똑같이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그의 눈동자에 뭔가의 결심이 섰고 임유진은 그걸 보고는 서둘러 크게 외쳤다.“혁아, 하지 마! 분명히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그런데 강지혁은 그녀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녹음을 켠 후 휴대폰을 입 가까이에 가져갔다.“나 강지혁은 죽은 후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전부 아내인 임유진에게 넘겨주겠다. 이건 그 어떤 외부의 강요도 받지 않은 온전한 내 의지임을 밝힌다.”그는 말을 마친 후 곧바로 휴대폰을 고이준에게 던져버렸다.그리고 고이준은 그의 휴대폰을 받고 그대로 몸이 얼어붙어 버렸다.‘지금 자기 목숨을 희생해 유진 씨를 구하려는 건가? 그래서 유언을 남긴 건가...? 하지만 이대로 대표님이 죽어버리면...’고이준은 그 뒤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강지혁의 유언에 굳어버린 건 고이준 뿐만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김재호의 얼굴 역시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대표님, 정말 임유진 씨를
김재호가 한 손을 들어 임유진이 타 있는 차량과 약 20m 정도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저쪽으로 가시면 웬 기계 장치가 하나 보일 건데 거기에 폭탄을 해제할 수 있는 버튼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버튼을 누르기 위해서는 대표님의 지문이 필요합니다.”김재호의 웃음기가 한층 더 깊어졌다.그리고 강지혁은 김재호의 말에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이 상황이 단지 지문을 찍고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만약 그렇게 간단한 거였으면 굳이 이런 짓을 벌이지는 않았을 테니까.“인내심 테스트하지 말고 똑바로 끝까지 말해. 너와 여기서 입씨름할 시간 없으니까!”강지혁은 지금 일 초라도 빨리 임유진을 저기서 구해내고 싶었다.“그러죠. 만약 대표님께서 해제 버튼을 누르시게 되면 기계 장치에 설치된 폭탄의 스위치가 자동으로 켜지게 될 겁니다. 즉 임유진 씨를 구하면 대표님의 목숨이 위험해진다는 뜻이죠.”김재호는 강지혁이 바로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꽤 큰 목소리로 말했다.차 안에 있는 임유진에게도 이 얘기가 전달되기를 바라서였다.그리고 그의 의도대로 임유진은 그의 말을 아주 똑똑히 들어버렸다.임유진은 마치 온몸이 한기에 둘러싸인 것처럼 몸이 뻣뻣하게 얼어붙어 버렸다.자신이 사는 대가로 강지혁이 목숨을 잃게 될 줄은 정말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왜... 대체 저 남자는 뭣 때문에 이런 짓을 계획한 거지? 단순히 내 목숨이 목적인 거면 내가 기절해있을 때 진세령을 통해 나를 죽이면 됐을 텐데...?’그때 임유진의 의문에 대답을 해주듯 김재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회장님께서 이 판을 계획한 건 다 대표님이 정신을 차렸으면 해서입니다. 임유진 씨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일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요. 대표님, 임유진 씨를 대체할 여자는 차고도 넘칩니다. 만약 외모 때문이라면 똑같이 성형하게 하면 될 일입니다.”요즘은 의술이 워낙 좋아 완전히 똑같게는 만들지 못하더라도 비슷하게는 만들어낼 수 있었다
임유진은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차분한 음성으로 진세령에게 말했다.“지금이라도 날 풀어주면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해줄게. 혁이한테도 널 봐달라고 하고 네 집안이 무너지지 않게 도와주라고도 할게.”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최대한 진세령이 혹할 만한 제안을 제시하는 것밖에 없었다. 진세령에게 조금이라도 틈이 보인다면 그걸 기회로 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그런데 진세령은 마치 임유진의 말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 건지 자기 할 말만 이어나갔다.“나는 그냥 확인하고 싶을 뿐이야. 강지혁이 널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우리 언니가 죽었을 때는 눈물은커녕 동정심도 내보이지 않았거든. 솔직히 너도 확인해보고 싶지 않아? 강지혁이 널 위해서 정말 목숨을 걸 수 있을지 없을지?”진세령의 두 눈은 어느새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임유진을 증오했다. 한낱 버러지 같은 여자 때문에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 너무나도 억울했으니까.진애령의 사고가 있었던 그때 사실 진세령은 임유진의 곁에서 소민준을 빼앗으며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소민준이 임유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녀에게는 일말의 감정도 내비치지 않을까 봐.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소민준은 아주 손쉽게 임유진을 버렸다. 마치 다 쓴 건전지를 버리듯 너무나도 쉽게 그녀를 버려버렸다.생각해보면 첫사랑의 이미지로 남자들을 홀린 자신이 임유진 따위를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진세령은 강지혁도 크게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소민준처럼 임유진을 가차 없이 버릴 거라고 확신했다.그리고 모든 일이 끝나면 그는 김재호라는 남자에게서 거액의 보수를 건네받은 후 해외로 넘어가 남은 생을 편히 즐기면 된다.그때 검은색 승용차가 연이어 이곳에 도착했다.임유진은 차 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연달아 내리는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 중에 강지혁의 모습이 보였다.강지혁은 아슬아슬한 상태로 절벽에 걸려있는 차량과 그 차량의 운전석에 앉은 임유진을 확인하더니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바
강지혁은 이가 부러질 정도로 꽉 깨물었다.아무리 강지혁이 강문철에 대해 잘 안다고 해도 강문철이 강지혁을 알고 있는 것에 비하면 한참이나 부족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의심이 많은 인간이라는 것과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면 불안감이 극도에 달한다는 것까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김재호에게 실종 놀이를 하게 한 다음 갑자기 나타나게 했다.감쪽같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야 이미 불안도가 잔뜩 오른 강지혁이 직접 김재호를 심문하려고 저택에서 나올 테니까.강문철은 죽어서도 죽은 게 아니었다.게다가 김재호의 말에 따르면 강문철은 강지혁에게 내기까지 하려고 했다. 임유진과 관련된 내기를 말이다.‘유진아, 제발... 제발 무사해 줘!’...임유진의 눈썹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예쁜 두 눈이 떠졌다.임유진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깜짝 놀라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그녀는 차량 운전석에 앉아있었고 한 손은 핸들에 꽉 묶여있고 나머지 한 손은 기어봉에 묶여있었다.그리고 그녀가 탄 차량은 차 앞머리만 간신히 땅을 밟고 있고 뒤쪽은 공중에 떠 있었다. 즉 차량의 절반만이 아슬아슬하게 절벽에 매달린 상태라는 뜻이었다.만약 이대로 조금만 큰 움직임을 보인다거나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게 되면 이 차는 말할 것도 없이 절벽 아래의 망망대해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상황을 파악한 후 아주 미세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그때 그녀의 눈앞에 영상 통화가 켜져 있는 휴대폰 하나가 들어왔다. 그리고 화면 속에는 진세령의 얼굴이 보였다.“깼어?”진세령이 음험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솔직히 생각도 못 했어. 내가 짓밟은 한낱 벌레가 오늘날의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거라고는 말이야.”“진세령!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내면의 불안함과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며 임유진이 물었다.임유진은 아까 그렇게 강지혁을 보낸 후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침실로 돌아온 지 몇 분도 안 돼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졸음이 몰려와 잠시 침대에서 눈을 붙였다.그리고
경호원은 강지혁의 목소리에 당황한 듯 말을 버벅거렸다.“그, 그게 사모님 방으로 가봤는데 사모님은 그 어디에도 없고 채린이와 이모님만이 바닥에 기절해있었습니다. 방 안에는 CCTV가 없어 밖에 있는 CCTV를 돌려봤지만 사모님께서 침실을 나선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방안에는 지금 미약하게나마 약물 냄새가 나고 있습니다...”“찾아! 지금 당장 저택 전부를 뒤져서 유진이를 찾아!”강지혁은 휴대폰을 고이준에게 던져버린 후 누구 한 명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김재호를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김재호의 머리를 세게 움켜쥐고 벽에 짓눌렀다.“유진이를 어디로 빼돌렸어! 만약 유진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네 사지가 다 찢길 줄 알아!”쿵 하는 소리와 함께 김재호의 머리가 옆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벽에 세게 부딪혔다.분명히 아플 텐데도 김재호는 오히려 소리 내 웃었다.“지금 당장 저를 죽이셔도 저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아까 말했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라고요.”“유진이를 어디로 빼돌렸는지 말하라고 했어!”강지혁이 살기를 내뿜으며 김재호의 머리를 수도 없이 벽을 향해 박았다.지금 그의 머릿속은 온통 임유진뿐이었다.한편 고이준은 이미 이성을 잃은 듯한 강지혁의 눈빛과 행동에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목숨과도 같은 사람이기에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된다. 만약 임유진을 건드리게 되면 그건 자기 목숨을 끊어달라고 하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김재호를 죽이고 말겠어!’고이준은 이 생각에 얼른 강지혁의 곁으로 다가갔다.“대표님, 차라리 김재호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가 보는 게 어떨까요? 분명히 김재호는 사모님께서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일단은 화를 좀 가라앉히시고 손을 멈춰주세요. 이러다 김재호가 죽어버리면 아무것도 묻지 못하잖습니까.”그 말에 강지혁의 눈빛에 이성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차에 실어. 그리고 지금 당장 집으로 간다!”강지혁은 말
“진세령이 탈옥한 걸 몰랐다?”강지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김재호를 빤히 바라보았다.“네, 몰랐습니다.”김재호가 단호하게 답했다.“그래, 그렇다고 쳐. 그럼 내가 올 때까지 아무 얘기도 하지 않겠다는 건 무슨 의도로 한 말이지?”“회장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만약 임유진 씨가 모든 진실을 알고도 대표님과 헤어지지 않으면 대표님과 내기를 하나 하시겠다고요.”“내기?”“네. 대표님께서 아버님처럼 정말 여자 하나 때문에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고 하셨습니다.”그 말에 강지혁의 얼굴빛이 확 어두워졌다.“그게 무슨 뜻이지?”강문철은 이제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인데 대체 뭘 지켜보고 무슨 내기를 하겠다는지 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김재호는 강지혁의 의혹 가득한 눈빛을 보며 아무 말 없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잔뜩 얻어터진 얼굴로 그렇게 웃으니 괜히 섬뜩하게 느껴졌다.“말해! 그게 대체 무슨 뜻인지!”강지혁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지고 눈빛도 아까보다 더 날카로워졌다.“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겁니다.”김재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회장님께서는 단지 대표님께 자명한 사실을 하나 일깨워주고 싶은 것뿐입니다. 여자를 위해 사느니 마느니 하는 건 결국 대표님께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요.”“그간 노인네 뒤를 따라다녔더니 스스로가 뭐라도 된 것 같아?”강지혁이 느긋하게 앞으로 걸어가 김재호의 멱살을 잡았다.“네가 지금부터 입을 열고 해야 하는 얘기는 이거 하나야. 노인네가 너한테 무슨 지시를 내렸는지,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털어놓지 않으면 그때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거야.”이건 누가 들어도 협박이었다.하지만 김재호는 그의 협박 따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대답했다.“저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을 때부터 회장님 뒤를 따랐습니다. 제 목숨을 구해준 사람도 회장님이시고 저를 지금껏 살게 해준 사람도 회장님이십니다. 그러니 회장님께서 저한테 맡기신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완
...강지혁은 방에서 나온 뒤에야 옆에 늘어진 손을 꽉 말아쥐었다.아까 임유진이 그의 팔을 잡고 먼저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얼굴이 가까이했을 때 그는 긴장감에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고 기대감에 마음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하지만 그가 마지막에 맛본 건 또 한 번의 실망감뿐이었다.믿음을 주려고 노력은 한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몸은 속일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여전히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그렇다는 건 그녀가 그를 진정으로 용서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하지만 뭐가 됐든 임유진은 그에게 거짓말이라도 사랑한다고 해줬고 용서하겠다는 말도 해줬다. 닿는 걸 거부하면서도 그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열심히 닿으려고 했다.그러니 그거로 된 거다.어차피 두 사람에게는 아직 시간은 많으니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다 제거하고 아이까지 무사히 출산한 후 다시 차근차근 관계를 쌓아 나아가면 된다.강지혁은 밖에 있는 이모님과 경호원에게 다가와 임유진의 상황에 관해 몇 마디 당부를 건넸다.그런데 그때 고이준이 다급하게 들어오더니 강지혁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대표님!”강지혁은 그의 다급한 태도에 사람들을 다 물린 후 고이준을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야?”“드디어 김재호를 찾았습니다.”고이준의 말에 강지혁의 몸이 흠칫했다.“어디서 찾았지?”“회장님 산소에 있더라고요. 저희 애들을 발견하고 바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잘 잡아뒀습니다. 현재 묘원 옆의 오두막에 있는데 지금 바로 만나러 가시겠습니까?”“그래. 노인네가 대체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 한번 들어봐야지.”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사실 김재호를 잡은 건 좋지만 이제껏 꼭꼭 숨어있다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 영 석연치 않았다. 게다가 진세령의 탈옥 사건도 신경이 쓰이고 말이다.강지혁은 진세령의 탈옥에 김재호가 크게 엮여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가지.”강지혁이 아래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고이준도 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
임유진의 몸은 마치 로봇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굳어있었고 움직임 하나하나가 뻣뻣하기 그지없었다.하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뒤꿈치까지 들고 강지혁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어느새 무척이나 가까워져 있었고 그 덕에 길게 뻗은 그의 속눈썹과 그의 검은색 눈동자가 바로 코앞에서 보였다.이제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면 입술이 맞닿게 된다.서로의 입술이 맞닿으면 강지혁도 그녀가 떠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믿을 것이다.강지혁은 아마 모르겠지만 임유진은 생각보다 그를 더 사랑하고 있었고 놓치고 싶지 않아 했다.자신을 향한 강지혁의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애정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물론 과거의 진실로 마음에 고통이 일고 아주 조금은 그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사실 고통받은 거로 따지면 강지혁도 그녀 못지않다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다시 함께 한 뒤로 강지혁은 거의 틈만 나면 그녀에게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해달라는 말을 했으니까.아마 강지혁은 그때부터 늘 불안해 왔는지도 모른다.그래서 임유진은 그에게 안정감을 주고 싶었다. 그걸 증명할 방법이 신체적인 접촉밖에 없다고 해도 그녀는 기꺼이 그를 위해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임유진은 뻣뻣하게 굳은 몸을 조금 더 밀착시키며 서서히 얼굴을 강지혁의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이제 남은 거리는 고작 2cm, 강지혁의 숨결이 전달되어 오며 그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이 보였다.임유진은 눈을 질끈 감고 그저 입만 맞추면 된다고, 그러면 괜한 오해 같은 건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심장이 쿵쿵 뛰고 드디어 강지혁의 입술과 맞닿은 순간, 그녀의 몸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뭘 느낄 새도 없이 강지혁의 몸에서 멀리 떨어져 나갔다.임유진은 뒤로 빠르게 한걸음 물러선 후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그대로 화장실로 뛰쳐 갔다.그러고는 변기를 잡고 토하기 시작했다.“웩... 웩!”얼마나 세게 토를 한 건지 그녀는 아침에 먹었던 것을 전부 다 토해버렸다.그렇게 얼마나 토를
“그럼 다른 경호원들을 물려줘. 전처럼 채린 씨만 곁에 있게 해줘. 솔직히 매번 내 뒤에 여러 명이 따라다니는 거, 나 불편해.”임유진은 그 상황이 꼭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안 돼.”강지혁이 단호하게 거절했다.“왜? 왜 안 되는데?”“뭐가 됐든 안 돼. 넌 지금 경호가 필요한 몸이야. 그러니까 사람 물리는 건 안 돼.”강지혁은 김재호 일도 그렇고 진세령이 탈옥한 일도 그렇고 아직 임유진에게는 그 어떤 것도 얘기할 생각이 없었다.불안의 근원 중 어떤 것은 단지 그의 의심과 추측에 불과하니까. 그러니 앞으로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은 출산 예정일까지는 그녀가 불안해할 만한 그 어떤 빌미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 마음이 임유진에게는 전달이 되지 않았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이러는 게 결국에는 자신을 향한 불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우리 사이에 믿음이 고작 그거밖에 안 돼?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어떻게 하면 떠나지 않겠다는 내 말을 믿어줄래?”그녀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강지혁은 마치 임유진의 내면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나한테 키스해 봐.”“뭐?”갑작스러운 요구에 임유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나한테 키스하라고. 네가 먼저 나한테 입을 맞추면 그때는 네가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거 믿어줄게.”강지혁은 단지 살과 살이 맞닿는 느낌을 원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마음의 안정감을 원했다. 그녀를 믿어도 된다는, 그녀의 사랑이 진심이라고 확신할만한 안정감을 원했다.그의 사랑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커지고 부풀어지기만 하는데 임유진은 꼭 아닌 것 같아서, 임유진은 언제든지 그를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실제로 임유진이 결혼을 승낙한 것도 이미 생겨버린 아이들과 병원에 누워있는 한지영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 때문에 임유진은 어쩔 수 없게 그의 곁에 있게 된 것이었다.그래서 강지혁은 마음속으로 늘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