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이 저택에만 있던 며칠간, 밖에서는 한차례 폭풍이 일었다.진씨 가문의 자금원은 완전히 끊겼고 그로 인해 은행 대출조차 갚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은행은 당연하게도 법원에 진씨 가문의 산업들을 동결할 것에 대한 신청서를 제출했다.물론 진씨 가문의 재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산업이 막힌 그다음 날 진세령은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진세령은 진작 은퇴를 했지만 아직도 그녀를 지지하고 있는 팬들은 존재했다. 그날 진세령은 팬 미팅을 위해 아침부터 샵으로 가 정성스럽게 꾸미고 억대의 목걸이까지 착용했다.또한 단지 팬들과 근황 얘기나 하는 자리인데도 굳이 기자들까지 불렀다.사실 그녀는 팬 미팅 자리를 빌려 기사를 타 진씨 가문에 경제적인 위기 같은 건 없다고 알릴 참이었다. 하지만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경찰들이 와 그녀를 체포했다.진세령은 한순간에 자기 팬들과 기자들 앞에서 경찰에 의해 수갑이 채워진 모습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게다가 경찰은 수갑을 채울 때 그녀를 살인 용의자로 체포한다는 얘기까지 했었다.그 때문에 팬들은 너도나도 상황 파악이 안 된 얼굴로 벙쪄 있기만 했다.살인 용의자라니, 그들의 영원한 여신인 진세령이 살인 용의자라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물론 당황한 건 진세령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경찰이 하필 팬 미팅하는 날 오래된 일로 들이닥칠 줄은 몰랐으니까.이로써 진씨 가문의 몰락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더 이상 그 어떤 것으로도 이미지를 회복할 수 없어졌다.그녀가 잡혀간 후 기자들에 의해 진세령이 살인 용의자라는 얘기는 일파만파 전해졌고 인터넷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스캔들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네티즌들은 살인 용의자라는 말에 3년 전 진애령의 교통사고 사건을 수면으로 끄집어내며 진세령은 그 사건의 용의자로 잡혀간 것이라고 추측했다.그리고 그 추측에 인터넷은 또다시 들끓었다.그도 그럴 것이 당시 진애령이 차 사고로 죽었을 때 진세령이 통곡하며 속상해했던 사진과 기사가 아직
“뭐라고? 너도 딸인데 설마 어머님과 아버님이 너희 언니만 챙기려고 했을까! 너한테도 일정 부분을 물려주려고 했겠지!”“하, 일정 부분? 언니한테 다 주고 나머지를 나한테 준다는 건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진세령이 코웃음을 쳤다.“그리고 만약 언니가 살아 있었다면 과연 너희 부모님이 지금처럼 나를 좋아했을까? 후계자도 아닌 나를 반겼겠냐고?”그녀의 말에 소민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진세령의 말이 맞았다. 당시 진세령과 연애한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그의 부모님이 그녀를 반겼던 건 그녀가 장차 진씨 가문을 이어갈 후계자였기 때문이었다.“그럼 유진이는 왜 건드린 건데? 걔가 너한테 무슨 잘못을 했다고. 차라리 다른 사람한테 죄를 뒤집어씌우지 유진이는 왜 건드렸어?”소민준이 물었다.그는 당시 진세령이 다 알면서도 마치 임유진이 진범인양 그녀에게 온갖 못된 짓을 한 것을 생각하면 머리털이 쭈뼛서며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질투가 많은 여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도 무서운 짓까지 하는 여자일 줄은 몰랐다.“네 여자친구였으니까. 걔를 제거해야 내가 네 옆에 설 수 있었으니까.”진세령이 비릿하게 웃으며 소민준을 빤히 바라보았다.“궁금했어. 임유진이라는 여자가 너한테 어떠한 존재인지. 네가 임유진을 위해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그런데 생각보다 쉽게 내치더라고? 하하하.”진세령은 한바탕 웃더니 다시 웃음을 거두어들이고 정색했다.“민준아, 너는 그때 너희 집안을 위해서 여자친구인 임유진을 망설임 없이 내쳤어. 그럼 과연 지금은 어떨까? 임유진한테 그랬던 것처럼 나도 내칠 거야? 아니면 나를 위해 네 모든 걸 걸고 날 도와줄 거야?”이 말을 하는 그녀의 눈빛에는 일말의 긴장감과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진세령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은 물어보지 않아도 훤했다.하지만 그 간단한 말을 소민준은 입을 꾹 닫은 채 끝끝내 해주지 않았다.진세령은 계속되는 그의 침묵에 쓴 웃음을 지었다.“넌 어쩜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달라진 게 없어?”진세령
“강지혁이 또 널 감금한 거야?”강현수가 물었다.그리고 임유진은 그의 질문에 어안이 벙벙해졌다.감금이라니?강현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다시 말을 건넸다.“요 며칠 강씨 저택을 지키는 경호원 수가 3배 가까이 늘었어. 보안상 문제라고는 하는데 진짜 이유가 뭔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지. 너랑 할 얘기가 있어서 다섯 번이나 찾아갔는데 그 다섯 번 다 강지혁 때문에 막혔어. 그리고 너한테 전화를 걸어도 전파가 차단당한 건지 연락이 되지 않았고.”임유진은 그 말에 흠칫했다.저택의 경호원 수가 는 건 그녀의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 인원이 많아진 것이었다.그리고 이제 와 생각해보니 며칠 전 쇼핑하러 쇼핑 거리에 갔을 때도 이상했다.아무리 평일이라도 그 거리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그날따라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경호원들도 5명 가까이 따라붙었으니까.그날 바로 의심하지 못했던 건 쇼핑하느라 많이 피곤했기 때문이었다.‘그러고 보니 저택 안에 CCTV 개수도 는 것 같은데. 설마... 내가 도망갈까 봐 더 많이 설치한 건가? 그래서 그런 식으로 경호원들과 도우미들이 내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한 건가...?’강현수는 고민에 빠진 임유진을 보며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강지혁과는 지금 어떤 상태야? 강지혁이 혹시 너한테...”그는 그날 그렇게 돌아간 후 임유진이 계속 걱정되었다. 강지혁과 혹여 싸운 건 아닌지, 그로 인해 몸이 상한 건 아닌지, 궁금한 것들투성이였다.그래서 몇 번이나 전화하고 직접 찾아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강지혁은 그녀와 연락이 닿을 만한 수단을 전부 다 차단해놨고 얼굴도 보지 못하게 했다.이게 감금이 아니면 또 뭐란 말인가.“현수 씨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어요.”임유진이 고개를 저었다.“그냥... 곧 출산 예정일이라, 그래서 경호원을 더 늘린 것뿐이에요.”“정말이야?”강현수가 임유진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네.”임유진이 답했다.하지만 답은 이렇게 했지만 그녀 역시 완전히 확신하는 건
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임유진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평생 내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어. 그치 유진아?”임유진은 그 말에 순간 숨이 턱 막혔다.그에게 해줬던 말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불러온 복부를 쓰다듬으며 숨을 한번 고른 후 말을 내뱉었다.“맞아.”그러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 강현수를 바라보았다.“나는... 혁이 곁을 떠날 생각이 없어요.”임유진의 입에서 ‘혁이’라는 호칭이 나온 순간 강지혁의 눈빛이 반짝거리며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일말의 흥분이 일었다.다시 혁이라고 불렀다는 건 용서해줄 마음이 생겼다는 증거가 아닐까?과거의 안 좋은 기억들을 이제는 내려놓겠다는 말이 아닐까?한편 임유진의 말에 강현수의 얼굴은 조금 가라앉았다.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임유진이라면 강지혁의 곁에 있겠다고 할 것 같았다.하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정말 그 진실을 다 알고서도 강지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지 직접 그녀의 말로 확인해보고 싶었다.“알겠어.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더 이상 둘 사이에 끼어들지 않을게.”강현수는 쓰게 웃더니 사람들을 데리고 진료실을 나갔다.그리고 그가 나간 후 강지혁은 자신의 경호원과 임유진의 경호원에게 잠시 대기하라고 하며 밖으로 내보냈다.그렇게 널찍한 진료실 안에 오직 임유진과 강지혁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강지혁은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정말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정말?”“나는...”임유진은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어 다시 입을 닫았다.사실 그녀도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확신할 수 없었다.임유진은 요 며칠 줄곧 마음속으로 갖가지 핑계를 대며 그때는 강지혁과 알게 되기 전이었으니 그가 그녀에게 냉정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되뇌었다.하지만 그렇게 했는데도 여전히 그를
강지혁은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임유진의 경호원인 황채린에게 뒤를 맡기고 의사도 다시 돌려보냈다.강현수 때문에 한참을 기절해 있었던 의사는 그의 말에 알겠다고 하며 황채린의 부축을 받고 진료실 쪽으로 향했다.“대표님, 괜찮으십니까?”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고이준이 강지혁에게 물었다.“그래...”강지혁은 벽을 짚은 채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그는 여전히 무서워하고 있었다. 임유진이 정말 결혼한 걸 후회할까 봐, 이전까지는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고 해도 앞으로는 시도 때도 없이 하게 될까 봐, 그리고 사실은 그를 그 정도로 사랑한 건 아닐까 봐... 그는 너무나도 두려웠다.강지혁도 자신이 이렇게까지 겁쟁이가 될 줄은 아마 몰랐을 것이다.“김재호는?”강지혁이 이마에 난 땀을 손으로 닦으며 물었다.“아직 못 찾았습니다.”김재호는 강문철의 충직한 수행비서로 강문철의 장례식 이후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강현수가 임유진의 사건을 알게 된 일 때문에 사람들을 풀어 계속해서 김재호의 종적을 찾고 있지만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에 관한 아주 조금의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계속 찾아. 김재호가 S 시를 뜨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든 내 앞에 잡아 와.”강지혁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김재호는 그저 단순한 비서가 아니라 줄곧 강문철을 따라다니던 심복이었다. 그러니 분명 강문철의 지시를 받았을 것이고 뭔가를 할 것이 분명했다.‘뭔가를 할 생각이 아니라면 종적을 감추지 않았겠지. 하루빨리 김재호를 잡아야 해.’“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이 답했다.“그리고 보안을 조금 더 강화해. 유진이 옆에도 사람을 더 붙이고. 한시라도 눈을 떼지 않게 해.”“네!”만약 김재호가 정말 강문철의 지시를 받은 게 맞다면 그 지시내용은 아마 임유진을 제거하라는 지시일 것이 분명했다.강문철은 목숨이 끝날 때까지도 여전히 임유진을 탐탁지 않아 했으니까.그러니 강지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임유진을 지켜내야만 한다....병원에서 나온 임유진을 기다리고 있던 건
“대표님은 그저 사모님을 더 잘 보호하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고이준이 답했다.“보호요? 감시가 아니라?”임유진의 되물음에 고이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강지혁은 일전 그에게 김재호의 일에 관해서는 임유진에게 아무것도 얘기하지 말라고 했었다. 곧 출산을 앞둔 사람이 괜한 걱정을 하는 건 싫다면서 말이다.임유진은 고이준의 침묵에 더 추궁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볼록해진 자신의 복부를 바라보았다.병원에 도착한 후 임유진은 아까보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병실에 도착해보니 상당히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한지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치료에 잘 협조한 덕에 한지영은 이제 일상생활도 무리 없이 즐길 수 있게 되었고 퇴원하는 날도 이제는 멀지 않아졌다.“유진아, 왔어?”한지영은 손을 휘휘 저으며 임유진을 반갑게 맞이했다.“빨리 이쪽으로 와서 앉아. 너는 지금 세상에서 제일 조심해야 하는 임산부란 말이야!”임유진은 자리에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몸은 좀 어때? 선생님은 뭐라셔?”“다음 주면 퇴원할 수 있대.”한지영이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더니 허전한 머리를 쓱쓱 매만졌다.그녀는 수술 때문에 머리카락을 전부 다 잘라야만 했다. 그래서 지금은 마치 어린 남자아이처럼 머리가 다 잘려있었다.퇴원하고 나면 아마 가장 먼저 가발을 사야 할 것이다.“어제 유미 언니가 나 보러 왔어. 언니는 이미 퇴원했대.”“너랑 언니랑 두 사람 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언니는 착한 일을 한 보답을 받은 거고 나는 정말 운이 좋았지.”한지영은 새삼 자신이 살아난 것이 놀라웠다.“참, 그러고 보니 뉴스 봤어. 진애령을 죽인 게 진세령이었다면서? 내가 그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우리는 줄곧 허재명이 진범인 줄 알고 있었잖아. 진세령도 참 대단해?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지혁까지 속였지?”“속이지 못했어.”임유진의 말에 한지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응? 그게 무슨 말이야? 속이지 못했다니?”임유진은 주먹을 꽉 말아쥐
임유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지영을 와락 끌어안았다.“미안해. 미안해 지영아. 울지 마...”“울긴 누가 운다고 그래?”한지영은 코를 한번 훌쩍이더니 이내 씩씩하게 말을 내뱉었다.“유진아,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과거의 고통에 얽매이지 않고 이제는 앞만 보며 나아갔으면 좋겠어. 진심이야.”임유진은 그녀의 웃음에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그 누구보다 마음이 아플 텐데도 한지영은 힘든 티 한번 내지 않고 오히려 그녀에게 위로를 건네주었다.“응, 행복해질게. 꼭 그럴게. 그리고 너도 하루빨리 나아서 원래의 한지영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낳으면 맨날 너한테 봐달라고 부탁할 테니까.”임유진의 진심 반 장난 반이 담긴 말에 한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임유진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백연신은 이제 잊겠다고, 너무나도 사랑했던 사람이지만 이제는 보내주겠다고, 그와의 기억은 그저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겨주겠다고 말이다....날씨는 점점 차가워지고 이제 이틀 뒤면 설날을 맞이하게 된다.임유진은 부드럽게 복부를 쓸어내리며 벌써 강지혁을 못 본 지도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요 며칠 그녀는 줄곧 한지영과의 대화를 되뇌었다. 한지영은 그녀에게 과거의 고통에 얽매이지 말고 이제는 앞만 보며 살라고 했다.고통이라...만약 누군가가 강지혁을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생각할 것도 없이 ‘그렇다’였다.강지혁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그 잔인한 진실이 눈앞에 놓였을 때 그렇게도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고 또 이렇게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임유진은 강지혁을 사랑하고 있다. 그녀가 감옥에 가는 걸 차가운 눈길로 그저 지켜보기만 한 남자를 그녀는 아직도 깊이 사랑하고 있다.임유진은 그때 강지혁에게 이런 약속을 했다. 그녀는 절대 그의 어머니처럼 그의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하지만 지금은...임유진은 휴대폰을 뒤척이며 사진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바로 그녀의 배
임유진이 먼저 식사 제안을 해왔다는 건 그를 용서할 마음이 생겼다는 뜻이 틀림없었다.똑똑.그때 누군가가 조금은 조급하게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와.”허락이 떨어지자 고이준이 빠르게 안으로 들어와 보고했다.“대표님, 진세령이 탈옥했습니다!”그 말에 강지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다시 어두워졌다. 그는 고이준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경찰들 말로는 오늘 새벽 3시경에 탈옥했다고 합니다. CCTV는 누군가에 의해 지워졌고요. 그래서 현재 상황으로는 누가 진세령을 도와준 건지 파악하기 어렵습니다.”고이준의 말에 강지혁은 주먹을 꽉 말아쥐며 머릿속으로 사람들을 한번 훑어 내려갔다.진씨 가문일까? 아니면 소씨 가문?진세령은 연예인이었으니까 뒷배가 있는 사생팬이 그녀를 꺼내줬을 수도 있다.만약 그것도 아니면...“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 인간들한테 사람을 붙여. 수상한 낌새가 포착되면 바로 나한테 보고하고. 그리고 최대한 빨리 김재호를 찾아내!”강지혁은 김재호가 꼭 시한폭탄 같았다. 그래서 그 시한폭탄이 엉뚱한 곳에서 터지기 전에 하루빨리 찾고 싶었다.김재호의 실종이 정말 강문철의 지시와 연관이 있는 건지, 만약 있다고 하면 그 지시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김재호를 찾아내야만 알 수 있다....드디어 설 전날이 되고 임유진은 드디어 강지혁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강지혁은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회색 스리피스 정장에 검은색 코트를 입었다. 조금 핼쑥해진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것 나름대로 또 분위기 있고 멋있어 보였다.하지만 다 좋은데 두르고 있는 목도리와 장갑은 지금 그의 패션과 많이 동떨어져 있었다.임유진은 그가 하고 있는 목도리와 털장갑이 1년 전 자신이 그를 위해 뜬 것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당시 그녀는 오래된 스웨터의 올을 다 풀고 그것으로 그의 목도리와 장갑을 만들었다.“왜? 왜 그렇게 빤히 봐?”강지혁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물었다.“아... 그냥 음.. 네가 그 목도리랑 장갑을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
“그럼 어떻게 하면 끝내줄 건데요? 뭐 하룻밤 같이 자 줘요? 아니면 백연신 씨가 만족할 만큼 다시 연애하는 것처럼 연기라도 해줘요?”한지영이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어갔다.“백연신 씨 좋다는 여자들 많잖아요. 그런데 왜 꼭 나여야 해요? 아니, 그건 또 아니었지. 꼭 나여야 하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헤어지자고도 안 했을 테니까.”“너한테 나라는 인간은 대체 뭐야?”백연신이 한지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한지영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답했다.“한때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더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나한테 백연신 씨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에요. 우리 두 사람은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이고 인생관도 너무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은 제일 중요한 게 사업이고 가문이지만 나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고 단란하게 사는 게 더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나는 백연신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약한 사람이라 같은 고통을 두 번은 못 겪어요.”두 사람은 살아온 환경, 그리고 그로 인한 인생을 대하는 태도,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어쩌면 처음부터 이어지지 않을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백연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나더니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달빛 아래의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하고 또 어두웠다.“네 말이 맞아... 나 좋다는 여자들도 많고 꼭 너여야 하는 것도 아니야.”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입꼬리를 조금씩 위로 올렸다.5년이다. 5년을 숨죽이고 드디어 고씨 가문을 사지까지 내몰았는데 그 시간 동안 한지영은 서서히 그의 존재를 지워가고 있었다.백연신은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한지영은 그가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리며 숨이 가빠왔다.‘아파하지 마. 백연신 때문에 아파하지 마! 잊기로 했잖아. 이제는 다 잊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한지영은 속으로 끊임없이 이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서 두 눈을 떼지 못했고 심장은 계속해서 아파 났다.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끝까
한지영의 목소리를 참 좋아했던 백연신이었지만 오늘은, 지금은,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밉고 잔혹하게 들려와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다.충격이 컸던 건지 백연신의 얼굴은 서서히 하얗게 질려갔다.“날... 안 좋아해?”고작 다섯 글자를 내뱉는 건데도 그는 무척이나 힘이 들어 보였다.“백연신 씨를 계속 사랑하고 있었으면 소개팅 같은 건 나가지도 않았겠죠. 다시 연애할 생각 같은 것도 안 했을 거고요.”한지영이 말했다.“백연신 씨를 좋아했던 건 맞아요. 사랑도 했고요. 하지만 헤어졌잖아요.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에요. 어른이면 어른답게 질척거리지 말고 깔끔하게 끝내요.”“깔끔하게 끝내자고?”백연신이 쓰게 웃었다.‘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네가 다쳤을 때 내가 널 살리겠다고 무슨 짓을 했는지, 네 안전을 위해서 내가 어떤 일까지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내가 틀린 말 했어요?”“날 안 좋아하면 연우진 그놈을 좋아하는 건가?”백연신은 자기가 물어봐 놓고 한지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자기가 다시 확신을 가지며 답했다.“아니. 넌 연우진 안 좋아해. 연우진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었으면 내가 너한테 키스했을 때 내 따귀를 때리고 살점을 물어뜯어서라도 날 멈추게 했을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꼭 맹수에게 쫓기다 궁지에 몰린 아기 고양이 같았다.하지만 심적으로 궁지에 몰린 건 그녀가 아닌 백연신이었다.“한지영, 너는 한순간도 연우진을 좋아해 본 적 없어. 아니야?”백연신은 얼른 그렇다고 말하라는 듯한 눈빛으로 한지영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한지영은 숨을 한번 들이켜더니 곧바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그래서?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 게 뭐? 내가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백연신 씨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요.”한지영은 말을 마친 후 갑자기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백연신은 그녀의 행동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얼굴은 더 하얗게
백연신은 침대 바로 옆에까지 다가오더니 갑자기 몸을 아래로 기울이며 한지영을 가두듯 양손을 그녀의 몸 바로 옆에 올려놓았다.그러고는 타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한지영,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쉬운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고 단 한 번도 너를 멋대로 휘둘러도 되는 여자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누가 감히 자기 목숨을 쉬운 거라고, 언제든지 휘두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한지영은 갑자기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순간 몸이 굳으며 이성을 놓칠 뻔했다가 간신히 다시 정신을 다잡고 뒤로 몸을 움직였다.하지만 얼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금방 벽에 부딪혀버렸다. 그리고 백연신은 벌어진 거리 만큼 다시 앞으로 몸을 움직이며 더 바짝 다가왔다.“하...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아?”낮게 깔린 목소리가 한지영의 귀를 간지럽히며 이내 그녀의 마음마저 뒤흔들려고 했다.그래서 한지영은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그와 눈을 마주하는 것을 피했다. 이대로 계속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어버릴 것 같았으니까.백연신은 한지영의 옆얼굴을 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지난 5년간, 단 하루도 네 생각을 안 했던 날이 없었어.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어. 내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 내가 제대로 해결했으면 우리는 지금쯤 무사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았을 테니까...”한지영은 그 말에 흠칫하더니 곧바로 다시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그만 해요.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지영아, 나는 단 한 번도, 아니, 단 한 순간도 고은채를 사랑한 적이 없어. 좋아한 적도 없어.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한지영 너였어.”백연신은 5년을 꾹 참았던 말을 드디어 입 밖으로 꺼냈다.지난 5년간은 아무리 한지영이 보고 싶어도, 아무리 한지영을 안고 싶어도 그저 마음속으로만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녀를 껴
백연신은 앞머리를 전부 깔끔하게 뒤로 넘긴 채 검은색 슈트 셋업을 입고 있었다. 아까 한지영이 인터넷을 검색하며 봤던 기자들 앞에서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었다.그래서일까, 한지영은 백연신이 눈앞에 있는 게 어쩐지 조금 현실감이 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이상한 느낌도 들었다.백연신과 한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러기를 몇 분, 더는 못 참겠던지 한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12시가 넘었어요.”“알아.”그리고 곧이어 백연신의 입에서도 말이 흘러나왔다.‘안다고? 아는 사람이 왜 안 나가고 계속 거기 앉아있어? 아니, 애초에 내 방에는 왜 들어온 거야?’한지영은 이해를 못한 채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이 집은 원래 그의 것이라는 깨닫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늦었는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왔어요?”“너 보러.”백연신은 이 방에 들어온 뒤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한지영을 바라보았다. 그저 자는 얼굴을 바라만 보는 건데도 마음이 녹고 또 행복했다.한지영의 잠버릇은 여전했다. 또 어떤 기이한 꿈을 꾸는지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왔다 갔다 했다가 갑자기 이를 갈고, 또 어느 순간에는 헤벌쭉 웃어댔다.전에 그와 함께 취침했을 때와 다를 거 하나 없었다.그래서 더 좋았다.“잘 자더라.”백연신이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어. 다음에는 킹사이즈 침대로 주문할까 봐. 그러면 쉽게 떨어지지 못하겠지.”한지영은 그의 말에 땀이 삐질 흘렀다.‘고작 나 자는 거 보려고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낮에 고은채 씨 기자회견 봤어요. 이제 다 해결됐으니까 이만 집으로 돌아가도 되죠?”한지영은 화제를 돌렸다. 언제쯤 돌아갈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그렇게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당연한 거 아니에요? 행동을 제한받은 채로 생활하는 걸 즐기는 사람은 없잖아요.”백연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한지영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백연신과 고은채가 진작 헤어진 거라면 한지영은 파렴치한 상간녀도 아니고 염치없는 세컨드도 아니니까.“응, 아마도.”한종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지영아,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봐. 언제쯤 집에 갈 수 있는지.”“근데 여보, 연신이 말이에요. 혹시 우리 지영이한테 아직 마음이 남아있는 거 아닐까요? 지영아, 너 혹시 연신이랑 다시 잘해볼...”“엄마, 전에도 말했잖아요. 백연신 씨와는 두 번 다시 사귈 일 없다고. 그러니까 괜한 생각하지 마세요.”한지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이해영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이해영은 그런 딸의 태도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부터 백연신을 꽤 좋게 보고 있었으니까. 물론 한지영이 아플 때 헤어짐을 고한 건 지금 생각해도 괘씸하지만 근 5년간 딸이 남자와의 만남을 피해온 것도 그렇고 백연신이 얼마 전에 한지영의 손을 사라진 것도 그렇고 어쩌면 두 사람 모두 아직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그래, 그만해. 그놈이 뭐가 좋다고 다시 우리 지영이와 이어주려고 그래? 지영이가 병상 위에 있을 때 헤어지자고 했던 놈이야. 아무리 지금 잘나간다고 해도 나는 그놈한테 우리 지영이 못 줘! 그놈 아니면 우리 딸이 시집 못 간다고 해도 평생 내가 끼고 살고 말지 그놈한테는 안 줘!”한종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그냥 해본 말이에요. 나라고 뭐 우리 지영이 안 소중한 줄 알아요?”한종훈과 이해영 사이에 팽팽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한지영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말렸다.“자자, 그만 해요. 두 분 다 이곳에 오래 갇혀 있어서 지금 많이 예민해진 것 같아요. 아빠 말대로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내가 이따 밖에 있는 경호원한테 언제쯤 나갈 수 있는지 물어볼게요. 내 생각에는 아마 내일쯤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하지만 저녁 식사를 마치고 경호원에게 언제쯤이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냐고 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