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혁은 아무 말도 없다가 임유진의 두 눈과 마주치고서야 드디어 ‘응’이라는 한마디를 꺼냈다.“다 알고 있었으면서 진씨 가문과의 거래 때문에 침묵을 택한 거야? 그래?”임유진이 계속해서 물었다.강지혁의 입술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질문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의 심장을 아프게 도려냈다. 이미 피가 흥건해졌는데도 칼끝은 멈출 줄을 몰랐다.너무나도 아팠다.하지만 이 고통은 그가 받아야만 하는 고통이었다. 그에게는 변명할 자격조차 없었다.“내가 묻잖아. 대답해.”임유진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표정도 조금 흥분해 있었다.“...맞아. 하지만 유진아, 나는 그때...”“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고작 이익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감방에 가는 걸 아무렇지 않아 할 수가 있어? 너 그때 알고 있었잖아. 진세령이, 걔네 가족이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었잖아!”강지혁은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여전히 침묵을 택했다.임유진은 줄곧 강지혁이 매정했던 것이 전부 다 그녀를 진범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사랑이 없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약혼녀이기에, 그래서 죗값을 치르게 한 줄 알았다.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만큼 우스운 착각이 또 없었다.강지혁은 처음부터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 그녀가 죽인 게 아니라는 것도, 그녀가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는 것도 전부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단 일말의 동정심도 내보이지 않았다.“미안해... 유진아, 내가 정말 미안해... 잘못했어...”강지혁은 임유진에게 사과하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았다.하지만 임유진은 그런 그의 손을 차갑게 뿌리쳤다.“미안하다고? 하... 너희 같은 사람한테는 한 사람 인생을 망친 게 고작 미안하다는 말로 끝낼 수 있는 일이구나... 나 그때 하마터면 감옥에서 죽을 뻔했어. 손톱이 뽑히고 발에 치이면서...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그런데 네가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30분 정도가 흐른 후 의사들이 밖으로 나왔다.“태아 상태는 양호합니다.”“유진이는요? 유진이는... 괜찮습니까?”강지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네, 불안정한 정서 때문에 조금 위험할 뻔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괜찮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어떤 자극도 주지 마세요. 만약 지금 상태에서 더한 자극을 받게 되면 그때는 아이들이 35주도 채 채우지 못하고 나와야 할 테니까요.”일전의 정기검진으로 의사는 35주가 됐을 때 제왕 절개로 아이를 낳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오늘 이런 일이 생겨버렸고 만약 이대로 임유진의 정서가 더 격해지면 그때는 35주가 다 되기 전에 아이를 낳아야 할 수도 있다.그리고 그렇게 되면 각종 장기가 채 발육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살았다고 해도 질병 같은 걸 지니게 될 수 있다.“알겠습니다.”강지혁이 답했다.하지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어떻게 해야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왜 하필 이렇게 중요한 때에 진실을 들켜버린 걸까. 대체 왜!강지혁이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강현수가 그의 팔을 덥석 잡으며 막았다.“안으로 들어가려고? 유진이가 정신을 차린 뒤에 네 얼굴을 보면 또다시 흥분하지 않겠어?”그 말에 강지혁의 표정이 변하더니 강현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유진이는 내 아내야!”“그래서? 유진이가 네 아내든 아니든 나는 유진이가 상처받는 꼴 못 봐.”강현수가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너 때문에 이미 한번 쓰러졌는데 너는 이 상황에서 또다시 유진이를 자극하고 싶어?”강지혁의 몸이 움찔 떨렸다. 반박할 말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임유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VIP 병실로 옮겨진 뒤였다.그리고 그녀의 병실에는 탁유미가 와 있었다.“유미 언니...?”임유진은 탁유미가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는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여긴 어디지? 병원인가? 계단에서 혁이랑 강현수가 대화하던 장면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그 뒤로...’임유진의 머릿속으로 두 사람
여기서 또다시 정서가 불안정해지면 그때는 아이들이 위험해질 테니까.탁유미는 임유진의 말에서 그녀가 더 이상 이 화제로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하지만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사소한 일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뭐가 됐든 혼자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내가 제대로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진 씨 얘기를 들어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니까요.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는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더 낫다고들 하잖아요.”“네, 고마워요.”“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죠. 유진 씨가 나를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임유진은 탁유미가 억울하게 당했을 때 그녀를 위해 가장 먼저 증거를 찾아주고 몇 년 전의 사건도 적극적으로 파헤치며 그녀를 도왔다.만약 임유진이 아니었으면 이경빈에게 간이식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고 이렇게 멀쩡하게 얘기를 하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탁유미는 임유진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려는 듯 일부러 재밌는 얘깃거리를 꺼냈다.그렇게 얼마간 대화를 한 후 임유진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언니, 이만 병실로 돌아가요. 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다시는 아이들을 위험에 빠트리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탁유미는 정말 괜찮다는 듯한 임유진의 말에 조금 안심이 됐다.“알겠어요. 그럼 오늘은 먼저 가볼게요.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밤늦게라도 괜찮아요.”탁유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가려던 그때 임유진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언니, 밖에... 강현수 씨도 있었다고 했죠?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런데 안으로 좀 불러줄래요?”그 말에 탁유미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알겠다며 병실 문을 열었다.병실 문이 열리자 밖에 있던 두 남자의 시선이 일제히 탁유미에게로 꽂혔다. 그리고 마치 짠 것처럼 동시에 물었다.“유진이는 좀 어때요?”초조함이 그대로 담겨 있는 두 시선에 탁유미는 조금 멈칫했다.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S 시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두 남자가 한 여자 때문에
이에 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유진 씨를 정말 사랑한다면, 유진 씨를 정말 아껴주고 싶다면 유진 씨한테 상처가 되는 일은 하지 말아줘요.”그 말에 강지혁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조금 뒤에야 아주 작게 말을 내뱉었다.“이 세상에서 유진이가 아주 조금의 상처도 받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일 겁니다.”...강현수는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환자복을 입은 채 반쯤 누워있는 임유진의 모습이 보였다.“미안해...”강현수가 먼저 말을 걸었다.그런 방식으로 그녀에게 사실을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녀가 병원에 입원하게 만들 생각도 없었다.그는 메일로 전해 받은 진실을 가능하면 끝까지 마음속에 묻어둘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진세령에게 죗값을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참으로 야속하게도 세상일은 뜻대로 되는 법이 없었고 최악의 방식으로 그녀에게 진실을 전하게 되었다.마치 그녀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녀가 가장 필요할 때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녀를 믿지 못했던 그때처럼 말이다.그녀가 강지혁을 선택하게 만든 건 결국 그였다. 그가 두 손으로 직접 그녀를 강지혁의 곁으로 밀어버렸다.“현수 씨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죠.”임유진이 말했다.“익명으로 받았다던 그 메일, 나한테도 보여줄래요? 내 메일로 그대로 보내줘요.”강현수는 그녀의 말에 조금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 메일을 보려고?”“네. 안 될까요?”임유진이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안될 건 없지만 너 지금 몸이...”“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해요. 갑자기 흥분하거나 그럴 일은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임유진은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그 사건의 진실을 보고 싶었다.그 누구보다 그녀가 가장 먼저 알았어야 하는 일이니까. 또한 진애령이 죽은 지금 당사자는 이제 그녀밖에 없으니까.강현수는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휴대폰을 꺼내 들
임유진에게는 저택에서 들었던 얘기들이 지금도 여전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꼭 청천벽력이라도 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하고 난도질당한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하지만 그녀는 홑몸이 아니고 배 속의 아이까지 임신한 상태이기에 마음대로 아파할 수도 없었다.임유진은 휴대폰을 들고 메일함으로 들어갔다.강현수가 보낸 메일... 이걸 강현수에게 보낸 사람은 강문철이다.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강문철이 임종 직전에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럼... 우리 내기할까? 아가씨가 정말... 지혁이를 사랑하는지...”강문철은 아마 그때 그녀가 모든 진실을 알고도 강지혁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지 보고 싶었을 것이다.물론 눈을 감기 직전까지 끝끝내 그녀에게 진실을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대신 진실을 알릴 선택권을 강현수에게 넘겨주었다.하지만 저택에서 그녀에게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다고 했던 강현수의 말을 떠올려보면 어쩌면 그녀는 영원히 진실이 무엇인지 몰랐을지 모른다. 강현수까지 입을 닫게 되면 그녀에게 진실을 얘기해줄 사람은 영원히 없을 테니까.만약 강현수가 오늘 강지혁에게 그 진실을 늘어놓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녀는 평생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 대신 자신을 해한 게 누군지, 자신의 인생을 망가트린 사람이 누군지, 왜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해야만 했는지 평생 모르고 살게 됐을 것이다.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게 현명한 건지 아니면 모든 걸 다 깨닫고 사는 게 현명한 건지에 대한 정확한 답변은 누구도 줄 수 없다.사람마다 다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으니까.하지만 임유진은 평생 고통받더라도 아무것도 모르고 싶지는 않았다.그녀는 강현수가 보낸 메일로 들어가 내용을 훑어보았다.자료에는 당시 사건의 모든 파일과 진세령이 진범이라는 증거들이 아주 세세하게 나열되어 있었다.진애령의 사고는 진세령이 꾸민 일이 맞고 허재명은 그저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에 불과했다. 그리고 진기태는 사고가 있고 난 뒤 곧바로 모든 걸 알고 있는 허재명을 해외로 보내
강지혁은 그 사건의 진상이 그런 방식으로 임유진에게 들킬 줄도 몰랐고 그로 인해 임유진이 하마터면 아이를 잃게 될 줄도 몰랐다.만약 임유진이나 아이들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겼으면 아마 그는 평생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강지혁은 병상 옆으로 다가가 달빛을 빌어 그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살짝 부어있었고 볼은 여전히 창백했다.임유진은 잠을 자는 와중에도 아이들을 지키려는 듯 두 손을 복부에 딱 붙이고 있었다.그녀가 얼마나 아이들을 생각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하긴 이렇게도 필사적이니 목숨을 걸고 세 명 모두 지키려고 했겠지.“미안해... 유진아, 내가 잘못했어...”강지혁의 목소리는 싹 잠겨있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유약했다.“그때 일은 변명할 것도 없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눈앞의 이익 때문에 너를 사지로 몰아갔어... 그때는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네가 망가지는 걸 그대로 지켜만 봤어... 정말 미안해...”당시 그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그저 이해관계의 일환일 뿐이었다.사실 진씨 가문에서는 진범이 누군지 그에게 말을 해준 적은 없다. 그저 강지혁이 자료를 조사하다가 진세령이 진범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뿐이다.하지만 진세령이 범인인 걸 알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애초에 진애령에게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진씨 가문의 일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으니까.강지혁에게 있어 그 사건은 그저 약혼녀가 죽은 사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약혼녀라는 건 어차피 다시 찾으면 그만일 테니까.당시 그에게는 그런 사사로운 사건보다는 회사를 더 크게 만드는 게 더 중요했다. 그래서 이익 관계를 최우선으로 뒀다.하지만 임유진을 사랑하게 된 지금 당시의 생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그의 방관으로 그녀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얻게 됐고 물리적인 고통도 받았다.미안하다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그녀가 받은 상처를 보상해줄 수는 없었다.강지혁은 두 손을 들어
임유진은 탁유미의 말을 곱씹으며 쓰게 웃었다.차라리 이 모든 게 다 오해라면 얼마나 좋을까.강지혁이 처음부터 끝까지 진애령을 죽인 게 그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진씨 가문과 강지혁 사이에 아무런 거래도 없었다면 얼마나 좋을까.그날 밤, 임유진이 잠든 후 강지혁은 평소처럼 조심스럽게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매일 밤 같은 시간, 그는 이때야 비로소 그녀의 곁을 지킬 수 있었다.아마 임유진은 모를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또 소중한지.오늘도 강지혁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임유진의 볼을 매만졌다.하지만 그녀의 볼과 손바닥이 닿으려는 순간 임유진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임유진과 두 눈이 마주친 강지혁은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정신을 차린 후 곧바로 손을 거두어들이고 뒷걸음질 치더니 병실을 나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임유진은 아직 그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아무리 그가 종일 병실 밖을 지켜도 그녀는 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고 퇴원이 예정돼 있던 날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원 기간을 연장하겠다고 했으니까.아마 집으로 돌아가면 그와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될 테니 그게 싫어서일 것이다.강지혁이 서둘러 병실 문을 열어젖히려던 그때 임유진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잠깐만.”강지혁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그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혹시 너무나도 간절한 마음에 헛걸 들은 건 아닌지 의심이 됐다.그래서 그녀의 말에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고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강지혁, 나랑 얘기 좀 해.”임유진이 말했다.탁유미의 말대로 피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뭐든 얘기를 해봐야만 한다.강지혁은 그녀의 말에 가슴이 욱신거렸다.임유진은 그를 ‘혁이’가 아닌 ‘강지혁’으로 불렀다. 서로 마음을 확인한 뒤에는 항상 다정하게 애칭으로 불러줬는데 지금은 마치 낯선 이를 부르듯 딱딱하게 불렀다.“그래.”강지혁은 천천히 돌아
“아니. 진세령은 처음부터 유진이 널 살인범으로 몰아가려고 했어...”강지혁이 말했다.“진세령은 당시 소민준의 여자친구였던 널 눈엣가시로 여겼으니까. 그래서 진애령을 제거하는 차에 너까지...”임유진은 순간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기분이 들었다.진세령은 처음부터 자신의 계획안에 그녀를 넣었다.임유진은 우연히 살인범으로 몰린 것이 아니라 진세령의 철저한 계획 속에 살인범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억울함을 가득 안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임유진은 눈을 질끈 감고는 이불을 말아쥔 손에 힘을 가했다.진실이란 늘 그렇듯 이렇게 잔혹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더 잔혹한 진실이 아직 하나 더 남았다.임유진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입술을 꽉 깨물다 한참 뒤에야 다시 눈을 떴다.“네가 날 도와 사건을 뒤집어 준 건 단지 내가 진실을 파헤치지 않았으면 해서였어. 그래서 일부러 빠르게 허재명을 내 눈앞에 대령해 허재명이 말한 게 모두 진실이라고 내가 생각하게끔 만든 거야. 맞아?”강지혁은 살짝 휘청거리더니 천천히 임유진 곁으로 다가갔다.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임유진의 손아귀 힘은 점점 더 세졌다.강지혁은 병상 가까이 다가오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다.“미안해... 그때는 그게 네 억울함도 풀어주고 사건을 빨리 종결시킬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어...”그는 그녀에게 미안해라는 말을 이렇게도 많이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강지혁은 요 며칠 입만 열었다 하면 미안해라는 말을 입가에 달고 살았고 그건 그녀가 깨어있을 때도 그러했고 그녀가 깊이 잘 때도 그러했다.“왜 날 속였어?”임유진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차라리 사건을 뒤집어주겠다는 말이나 하지 말지. 왜 날 속였어? 왜 내가 허재명이 진범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어? 왜 진세령을 감싸줬어?! 대답해!”그녀의 추궁은 마치 차가운 칼날처럼 그의 심장을 아프게 찔러댔다.“미안해... 미안해...”강지혁은 고개를 살짝 든 채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강지혁은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었지만 그녀가 그의 곁을 떠나는 것만큼은 허락할 수 없었다.임유진이 강씨 저택에 돌아가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건지, 아니면 그를 싫어하는 건지는 잘 모르지만 뭐가 됐든 그는 그녀를 자신의 감시망 안에서 풀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녀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는 순간부터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으니까.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그녀의 대답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대로 병실을 나가버렸다.그리고 잠시 후 요 며칠 그녀를 돌봐줬던 간호사가 들어와 그녀에게 말을 전했다.“대표님께서 더는 병실에 들어오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시라고 하셨습니다.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저를 불러주세요.”임유진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천천히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그리고 두 손을 복부에 살포시 올려놓으며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아이를 무사히 출산하려면 감정의 기복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하지만 그렇게 눈을 감은지 10분 정도나 지났지만 마음이 진정되기는커녕 점점 더 복잡해지기만 했다.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과거의 고통 같은 건 전부 다 깨끗이 지워버리고 강지혁이 그녀의 고통에 일조한 것을 마치 몰랐던 일인 것처럼 세뇌하며 살아야 하나? 그러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까?그때 문득 그녀의 머릿속으로 일전 강지혁이 했던 만약 조금만 더 일찍 그녀를 만났으면 그런 고통은 겪게 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 떠올랐다.그때는 그저 연인의 과거를 안타까워하는 말인 줄 알았다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완전히 다른 의도로 한 말이었다.아마 강지혁은 조금 더 일찍 그녀를 만났으면, 조금 더 일찍 그녀를 사랑했으면 그녀가 그런 고통을 겪도록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고 온 힘을 다해 그런 일이 없게 그녀를 지켜줬을 것이다.왜, 왜 그와 그녀는 이렇게도 늦게서야 서로를 만나게 된 걸까? 왜 그녀가 감옥에 가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걸까?임유진의 닫힌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와 이내 그녀의 베개를
의사와 간호사가 나간 후 임유진은 너무 가깝지도 않고 또 너무 멀지도 않은 곳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는 강지혁을 빤히 바라보았다.지금의 그는 꼭 두려움과 절망에 잠식되어 버린 사람 같았다.임유진은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다 드디어 입 밖으로 말을 내뱉었다.“아이들을 출산하고 나면 따로 나가서 살고 싶어.”강지혁은 그 말에 고개를 홱 들더니 초조해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집을 나가겠다고...?”“응.”임유진이 답했다.“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고 또 어떤 얼굴로 너를 봐야 하는지를 모르겠어. 그러니까 내가 나가는 게 나한테도 너한테도 좋을 거야.”사실 임유진도 변명거리라면 얼마든지 생각해낼 수 있었다.그녀가 감옥으로 들어가게 됐을 때 강지혁은 아직 그녀와 알게 되기도 전이었기에 그에게 있어 그녀는 그저 어찌 되든 상관없는 사람이었다든지 또는 강지혁은 원래부터 성정이 냉랭하고 조금은 잔인한 사람이라 동정심 같은 건 없었다든지 또 강지혁은 그저 방관자일 뿐 실질적으로 진세령의 죄를 덮는 데 참여한 건 아니라던지... 변명거리라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다.하지만 그 무엇하나 그녀 스스로를 설득시키지 못했다.임유진은 어릴 때부터 죄를 단죄하는 것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변호사라는 직업을 꿈꿨다. 그녀는 정의에 예민한 사람이었고 늘 법을 자신의 무기로 싸워왔다.그런데 하필이면 그녀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었음에도 그녀가 억울하게 당하는 걸 가만히 지켜만 봤다.지옥 같던 3년의 옥살이는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놨을 만큼의 큰 사건이었다. 그 일로 인해 상처받았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거의 평생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치유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납득할 수 없어! 너한테도 좋고 나한테도 좋을 거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어!”강지혁이 빠르게 다가와 병상 바로 옆에 서며 말했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고 했다. 하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해준다며. 네가 그때 그랬잖아... 내가 울면, 이경빈처럼 펑펑 울면 용서 준다고 했잖아. 유진아, 나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돼...? 평생 울면서 사죄할게. 진심으로 내가 한 짓을 뉘우칠게. 그러니까 제발... 제발 나 한 번만 용서해줘...”강지혁은 그렇게 말하며 뜨거운 눈물을 아래로 쏟아냈다.임유진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프게 욱신거리고 또 그로 인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강지혁의 눈물을 이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강지혁의 눈물은 그의 볼을 타고 내려와 이내 임유진의 손을 뜨겁게 데웠다.임유진은 그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한쪽 손을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 쪽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막상 그의 눈물 젖은 볼과 닿으려는 순간 일전 느꼈던 울렁거림이 밀려왔다.그녀는 서둘러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강지혁을 밀친 다음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변기를 붙잡고 미친 듯이 토하기 시작했다.입덧 시기가 지난 후 한 번도 속이 울렁거리거나 토하고 싶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 이 순간 참지 못할 정도로 위가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유진아! 너 괜찮아?!”강지혁은 임유진이 토하는 모습에 순간 긴장감이 극도로 치솟아 얼른 화장실로 달려와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하지만 그의 손이 닿는 순간, 임유진의 상태는 더 심해졌고 토도 더 세게 하기 시작했다.“나한테... 나한테 손대지 마.”임유진은 힘겹게 숨을 내쉬며 강지혁의 팔을 잡아 멀리 뿌리쳤다.그렇게 10초 정도 지났을까, 역시 강지혁의 손길이 문제였던지 임유진은 천천히 토를 멈추고 진정하기 시작했다.임유진은 티슈로 입가를 정리한 후 창백해진 얼굴을 들어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빛에는 강지혁을 향한 배신감과 원망의 감정이 들어있었다.임유진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며 그녀가 뭔가를 얘기하려던 그때, 강지혁은 마치 본능적으로 뭔가를 알아차린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안 돼... 말하지 마!’하지만 그의 간절한
“아니. 진세령은 처음부터 유진이 널 살인범으로 몰아가려고 했어...”강지혁이 말했다.“진세령은 당시 소민준의 여자친구였던 널 눈엣가시로 여겼으니까. 그래서 진애령을 제거하는 차에 너까지...”임유진은 순간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기분이 들었다.진세령은 처음부터 자신의 계획안에 그녀를 넣었다.임유진은 우연히 살인범으로 몰린 것이 아니라 진세령의 철저한 계획 속에 살인범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억울함을 가득 안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임유진은 눈을 질끈 감고는 이불을 말아쥔 손에 힘을 가했다.진실이란 늘 그렇듯 이렇게 잔혹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더 잔혹한 진실이 아직 하나 더 남았다.임유진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입술을 꽉 깨물다 한참 뒤에야 다시 눈을 떴다.“네가 날 도와 사건을 뒤집어 준 건 단지 내가 진실을 파헤치지 않았으면 해서였어. 그래서 일부러 빠르게 허재명을 내 눈앞에 대령해 허재명이 말한 게 모두 진실이라고 내가 생각하게끔 만든 거야. 맞아?”강지혁은 살짝 휘청거리더니 천천히 임유진 곁으로 다가갔다.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임유진의 손아귀 힘은 점점 더 세졌다.강지혁은 병상 가까이 다가오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다.“미안해... 그때는 그게 네 억울함도 풀어주고 사건을 빨리 종결시킬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어...”그는 그녀에게 미안해라는 말을 이렇게도 많이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강지혁은 요 며칠 입만 열었다 하면 미안해라는 말을 입가에 달고 살았고 그건 그녀가 깨어있을 때도 그러했고 그녀가 깊이 잘 때도 그러했다.“왜 날 속였어?”임유진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차라리 사건을 뒤집어주겠다는 말이나 하지 말지. 왜 날 속였어? 왜 내가 허재명이 진범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어? 왜 진세령을 감싸줬어?! 대답해!”그녀의 추궁은 마치 차가운 칼날처럼 그의 심장을 아프게 찔러댔다.“미안해... 미안해...”강지혁은 고개를 살짝 든 채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임유진은 탁유미의 말을 곱씹으며 쓰게 웃었다.차라리 이 모든 게 다 오해라면 얼마나 좋을까.강지혁이 처음부터 끝까지 진애령을 죽인 게 그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진씨 가문과 강지혁 사이에 아무런 거래도 없었다면 얼마나 좋을까.그날 밤, 임유진이 잠든 후 강지혁은 평소처럼 조심스럽게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매일 밤 같은 시간, 그는 이때야 비로소 그녀의 곁을 지킬 수 있었다.아마 임유진은 모를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또 소중한지.오늘도 강지혁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임유진의 볼을 매만졌다.하지만 그녀의 볼과 손바닥이 닿으려는 순간 임유진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임유진과 두 눈이 마주친 강지혁은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정신을 차린 후 곧바로 손을 거두어들이고 뒷걸음질 치더니 병실을 나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임유진은 아직 그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아무리 그가 종일 병실 밖을 지켜도 그녀는 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고 퇴원이 예정돼 있던 날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원 기간을 연장하겠다고 했으니까.아마 집으로 돌아가면 그와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될 테니 그게 싫어서일 것이다.강지혁이 서둘러 병실 문을 열어젖히려던 그때 임유진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잠깐만.”강지혁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그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혹시 너무나도 간절한 마음에 헛걸 들은 건 아닌지 의심이 됐다.그래서 그녀의 말에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고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강지혁, 나랑 얘기 좀 해.”임유진이 말했다.탁유미의 말대로 피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뭐든 얘기를 해봐야만 한다.강지혁은 그녀의 말에 가슴이 욱신거렸다.임유진은 그를 ‘혁이’가 아닌 ‘강지혁’으로 불렀다. 서로 마음을 확인한 뒤에는 항상 다정하게 애칭으로 불러줬는데 지금은 마치 낯선 이를 부르듯 딱딱하게 불렀다.“그래.”강지혁은 천천히 돌아
강지혁은 그 사건의 진상이 그런 방식으로 임유진에게 들킬 줄도 몰랐고 그로 인해 임유진이 하마터면 아이를 잃게 될 줄도 몰랐다.만약 임유진이나 아이들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겼으면 아마 그는 평생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강지혁은 병상 옆으로 다가가 달빛을 빌어 그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살짝 부어있었고 볼은 여전히 창백했다.임유진은 잠을 자는 와중에도 아이들을 지키려는 듯 두 손을 복부에 딱 붙이고 있었다.그녀가 얼마나 아이들을 생각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하긴 이렇게도 필사적이니 목숨을 걸고 세 명 모두 지키려고 했겠지.“미안해... 유진아, 내가 잘못했어...”강지혁의 목소리는 싹 잠겨있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유약했다.“그때 일은 변명할 것도 없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눈앞의 이익 때문에 너를 사지로 몰아갔어... 그때는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네가 망가지는 걸 그대로 지켜만 봤어... 정말 미안해...”당시 그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그저 이해관계의 일환일 뿐이었다.사실 진씨 가문에서는 진범이 누군지 그에게 말을 해준 적은 없다. 그저 강지혁이 자료를 조사하다가 진세령이 진범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뿐이다.하지만 진세령이 범인인 걸 알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애초에 진애령에게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진씨 가문의 일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으니까.강지혁에게 있어 그 사건은 그저 약혼녀가 죽은 사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약혼녀라는 건 어차피 다시 찾으면 그만일 테니까.당시 그에게는 그런 사사로운 사건보다는 회사를 더 크게 만드는 게 더 중요했다. 그래서 이익 관계를 최우선으로 뒀다.하지만 임유진을 사랑하게 된 지금 당시의 생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그의 방관으로 그녀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얻게 됐고 물리적인 고통도 받았다.미안하다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그녀가 받은 상처를 보상해줄 수는 없었다.강지혁은 두 손을 들어
임유진에게는 저택에서 들었던 얘기들이 지금도 여전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꼭 청천벽력이라도 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하고 난도질당한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하지만 그녀는 홑몸이 아니고 배 속의 아이까지 임신한 상태이기에 마음대로 아파할 수도 없었다.임유진은 휴대폰을 들고 메일함으로 들어갔다.강현수가 보낸 메일... 이걸 강현수에게 보낸 사람은 강문철이다.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강문철이 임종 직전에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럼... 우리 내기할까? 아가씨가 정말... 지혁이를 사랑하는지...”강문철은 아마 그때 그녀가 모든 진실을 알고도 강지혁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지 보고 싶었을 것이다.물론 눈을 감기 직전까지 끝끝내 그녀에게 진실을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대신 진실을 알릴 선택권을 강현수에게 넘겨주었다.하지만 저택에서 그녀에게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다고 했던 강현수의 말을 떠올려보면 어쩌면 그녀는 영원히 진실이 무엇인지 몰랐을지 모른다. 강현수까지 입을 닫게 되면 그녀에게 진실을 얘기해줄 사람은 영원히 없을 테니까.만약 강현수가 오늘 강지혁에게 그 진실을 늘어놓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녀는 평생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 대신 자신을 해한 게 누군지, 자신의 인생을 망가트린 사람이 누군지, 왜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해야만 했는지 평생 모르고 살게 됐을 것이다.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게 현명한 건지 아니면 모든 걸 다 깨닫고 사는 게 현명한 건지에 대한 정확한 답변은 누구도 줄 수 없다.사람마다 다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으니까.하지만 임유진은 평생 고통받더라도 아무것도 모르고 싶지는 않았다.그녀는 강현수가 보낸 메일로 들어가 내용을 훑어보았다.자료에는 당시 사건의 모든 파일과 진세령이 진범이라는 증거들이 아주 세세하게 나열되어 있었다.진애령의 사고는 진세령이 꾸민 일이 맞고 허재명은 그저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에 불과했다. 그리고 진기태는 사고가 있고 난 뒤 곧바로 모든 걸 알고 있는 허재명을 해외로 보내
이에 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유진 씨를 정말 사랑한다면, 유진 씨를 정말 아껴주고 싶다면 유진 씨한테 상처가 되는 일은 하지 말아줘요.”그 말에 강지혁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조금 뒤에야 아주 작게 말을 내뱉었다.“이 세상에서 유진이가 아주 조금의 상처도 받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일 겁니다.”...강현수는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환자복을 입은 채 반쯤 누워있는 임유진의 모습이 보였다.“미안해...”강현수가 먼저 말을 걸었다.그런 방식으로 그녀에게 사실을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녀가 병원에 입원하게 만들 생각도 없었다.그는 메일로 전해 받은 진실을 가능하면 끝까지 마음속에 묻어둘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진세령에게 죗값을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참으로 야속하게도 세상일은 뜻대로 되는 법이 없었고 최악의 방식으로 그녀에게 진실을 전하게 되었다.마치 그녀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녀가 가장 필요할 때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녀를 믿지 못했던 그때처럼 말이다.그녀가 강지혁을 선택하게 만든 건 결국 그였다. 그가 두 손으로 직접 그녀를 강지혁의 곁으로 밀어버렸다.“현수 씨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죠.”임유진이 말했다.“익명으로 받았다던 그 메일, 나한테도 보여줄래요? 내 메일로 그대로 보내줘요.”강현수는 그녀의 말에 조금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 메일을 보려고?”“네. 안 될까요?”임유진이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안될 건 없지만 너 지금 몸이...”“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해요. 갑자기 흥분하거나 그럴 일은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임유진은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그 사건의 진실을 보고 싶었다.그 누구보다 그녀가 가장 먼저 알았어야 하는 일이니까. 또한 진애령이 죽은 지금 당사자는 이제 그녀밖에 없으니까.강현수는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휴대폰을 꺼내 들
여기서 또다시 정서가 불안정해지면 그때는 아이들이 위험해질 테니까.탁유미는 임유진의 말에서 그녀가 더 이상 이 화제로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하지만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사소한 일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뭐가 됐든 혼자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내가 제대로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진 씨 얘기를 들어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니까요.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는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더 낫다고들 하잖아요.”“네, 고마워요.”“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죠. 유진 씨가 나를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임유진은 탁유미가 억울하게 당했을 때 그녀를 위해 가장 먼저 증거를 찾아주고 몇 년 전의 사건도 적극적으로 파헤치며 그녀를 도왔다.만약 임유진이 아니었으면 이경빈에게 간이식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고 이렇게 멀쩡하게 얘기를 하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탁유미는 임유진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려는 듯 일부러 재밌는 얘깃거리를 꺼냈다.그렇게 얼마간 대화를 한 후 임유진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언니, 이만 병실로 돌아가요. 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다시는 아이들을 위험에 빠트리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탁유미는 정말 괜찮다는 듯한 임유진의 말에 조금 안심이 됐다.“알겠어요. 그럼 오늘은 먼저 가볼게요.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밤늦게라도 괜찮아요.”탁유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가려던 그때 임유진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언니, 밖에... 강현수 씨도 있었다고 했죠?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런데 안으로 좀 불러줄래요?”그 말에 탁유미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알겠다며 병실 문을 열었다.병실 문이 열리자 밖에 있던 두 남자의 시선이 일제히 탁유미에게로 꽂혔다. 그리고 마치 짠 것처럼 동시에 물었다.“유진이는 좀 어때요?”초조함이 그대로 담겨 있는 두 시선에 탁유미는 조금 멈칫했다.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S 시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두 남자가 한 여자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