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다시 오게 된 지금, 그런 감정 같은 건 전혀 없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다가가 보니 상당히 많은 서류가 이곳저곳 흐트러져있었다.강지혁이 이 책상에서 회사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 멋대로 그려지는 듯했다.그때 흐트러진 서류 속 유난히 눈에 띄는 [진가원]이라고 적혀 있는 서류 봉투가 보였다.진가원은 진씨 가문에서 주관하고 있는 중요한 프로젝트로 듣기로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땅 부지를 사는 데만 천억 원도 넘게 들었다고 하며 근 2년간 대외홍보에도 역시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그런데 그 중요한 서류가 왜 강지혁의 책상 위에 있는 거지?임유진이 의문을 가진 그때 갑자기 사무실 문이 열리고 이에 깜짝 놀란 임유진은 손에 든 서류 봉투를 그만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봉투가 열리고 안에 든 것들이 하나둘 밖으로 튀어나왔다.그리고 임유진은 그것들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봉투 안에서 나온 것들이 전부 진애령의 사진이었기 때문이었다.강지혁의 유일한 약혼녀였던 진애령 말이다.진애령의 사진이 왜 봉투 안에 들어있는 거지? 그것도 엄청 많이?진애령은 강지혁의 약혼녀로 안타깝게도 차 사고로 죽어버렸다. 그리고 그 사고로 임유진은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하나의 교통사고로 두 사람의 운명은 한순간에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으로 흘러가게 되었다.임유진이 멍하니 사진을 구경하고 있을 그때, 강지혁이 다가와 사진을 주웠다.임유진은 허리를 숙인 채 바닥에 떨어진 사진과 서류 봉투를 줍는 그의 모습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어...”그녀는 어쩐지 목이 말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지영이 보러 병원에 갔다가 너 보고 싶어서 왔어.”“한지영은 좀 어때?”강지혁이 물었다.“괜찮아. 힘들어할 줄 알았는데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고 있어.”임유진은 사진들을 아무렇게나 서류 봉투에 넣어버리는 강지혁을 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그 사진들은 뭐야?”“신경 쓰여?”“그거 진애령
“소민준...”강지혁의 입에서 세글자가 흘러나왔다.“만약 소민준이 그때 너를 배신 안 했으면 지금쯤 소민준과 결혼했을 수도 있었겠네?”“아니.”임유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해?”“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어. 그래서 결혼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잘 몰랐어.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결혼하겠다고 해도 소민준네 집안에서 반대했을 거야.”임유진은 그때 너무 어렸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그리고 소민준도 나를 결혼까지 생각할 만큼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고. 호감 정도의 좋아함은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주변 여자들이랑 다르다는 신선함이 더 컸을 거야. 소민준은 나를 위해 자기 부모님의 반대까지 무릅쓸 사람이 아니야. 그건 이미 진애령 씨 사건으로 증명이 됐고. 나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그렇게 쉽게 버리지 않았겠지.”“만약 소민준이 부모님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널 선택했다면?”임유진은 강지혁이 엄청 신경 쓰인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세상 사람들이 다 너 같은 줄 알아? 세상에 만약에는 없어. 그리고 나도 마치 장기 말 버리듯 날 버린 사람으로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고 싶지 않고.”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꽉 쥐었다.“조금만 기다려. 소씨 가문도 곧 조용히 사라질 테니까. 그렇게도 진세령과 진세령네 집안이 좋다면 그 인간들과 같은 말로를 맞게 해야지.”임유진이 흠칫하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소씨 가문을 없애려고?”“진씨 가문은 조만간 사라질 거야. 소씨 가문은 진씨 가문과 엮여 있으니 자연스럽게 같이 사라지게 되겠지.”강지혁은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로 무서운 얘기를 꺼냈다.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으면 농담이겠거니 할 테지만 강지혁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쉽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아마 별다른 이변이 없으면 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은 정말 머지않아 조용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름이 있는 두 가문인데...’특히 진씨
“나도 혁이 널 지켜줄 거야.”임유진은 강지혁을 꼭 끌어안으며 말하다가 뭔가 생각난 듯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혹시 진씨 가문에서 네가 진가원 프로젝트를 방해하려고 한다는 걸 알게 된 거 아닐까? 한때 약혼녀였던 자기 딸을 생각해서라도 좀 봐달라고.”강지혁은 그 말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진씨 가문에서 진애령의 사진을 보낸 건 봐달라고 부탁하려는 것이 아닌 그때의 일을 잊지 말라고 알려주는 것이다....공항 VIP 라운지.백연신은 라운지 소파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수중에 들린 티켓을 바라보았다.그는 이제 몇 분 뒤면 S 시를 떠나게 된다.이미 확정된 일이지만 머릿속으로 자꾸 그날 흰색 붕대를 감은 채 창백하고도 또 평온한 얼굴로 헤어져 주겠다고, 원하는 것을 이루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했던 한지영의 얼굴이 떠오른다.원하는 것을 이루길 바라겠다라...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만약 한지영이 치료에 전념하고 무사히 퇴원해 앞으로 행복하게만 살아간다면 가능한 일이 될 수도 있다.지금의 백연신이 바라는 건 오직 한지영의 행복뿐이니까.“설마 아직도 전 여자친구 생각해요?”그때 고은채가 다가와 그의 팔짱을 끼며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우리가 했던 약속을 잊은 건 아니죠?”“안 잊었어.”백연신이 차가운 말투로 대꾸했다.“아니면 됐어요. 한지영 씨가 무사히 살 수 있었던 게 다 내 덕이라는 거, 평생 잊어버리면 안 돼요. 연신 씨가 내 옆에 있는 게 그것 때문이라는 것도요.”고은채는 백연신의 얼굴이 어두워져 가는 걸 보면서도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나는 지금도 이해가 안 가요. 여자친구로나 아내로나 한지영 씨보다는 내가 훨씬 낫잖아요. 나랑 결혼하면 연신 씨는 고씨 가문을 등에 업을 수 있고 회사를 더 크게 키울 수 있어요. 나는 그 과정에서 연신 씨랑 권력 다툼도 하지 않을 거고요. 연신 씨가 줄곧 원하던 게 이런 거 아니었어요?
대부분의 환자가 그러하듯 탁유미 역시 유한한 시간을 병원에 갇힌 채 치료에 쏟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보내고 싶었다.“알고 있어요. 그리고 마음의 준비도 이미 다 돼 있어요. 그러니까 선생님, 다른 거 말고 그냥 진통제만 더 많이 처방해주세요. 요즘 통증이 더 심해져서요.”탁유미의 말에 주치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녀의 선택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탁유미는 죽음에 대해 지나치게 평온했다.이제껏 봐온 환자들은 남은 수명을 들으면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거나 살고 싶다며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었다.치료할 돈이 없어도 어떻게든 돈은 구해올 테니 목숨만은 제발 살려달라고 했었다.하지만 탁유미는 달랐다. 병원으로 찾아올 때마다 수명이 줄어가는 걸 들으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이렇게 담담한 사람일수록 사연이 더 많은 법이었다.“알겠습니다. 진통제는 효과가 더 강한 것으로 대체하죠. 다만 진통제도 많이 먹게 되면 내성이 생겨 약효가 들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암세포 증식도 더 빨라지게 되고요. 그러니 정말 참지 못하겠을 때만 드세요.”의사가 신신당부했다.“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처방 약을 받은 후 1층 로비를 지나 밖으로 걸어 나가려는데 김수영으로부터 전화가 걸어왔다.“네, 엄마. 무슨 일...”“유미야, 공수진 그 여자가 우리 윤이를... 우리 윤이를 데려갔어!”전화기 너머로 다급한 김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공수진이 윤이를 데려갔다고요?!”탁유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그래. 선생님이 그러는데 공수진이 직접 찾아와서 자기가 새엄마라고 애 아빠한테 데려다준다고 하면서 윤이를 데려갔대! 원장님하고도 인사를 한 탓에 한 선생님도 뭐라 말릴 수가 없었대.”김수영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탁유미는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일단 차분하게 답했다.“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윤이는 내가 빨리 찾아볼게요.”“그래그래. 윤이 그게 다치면 안 되는데. 내가 조금 더 빨리 데리고
탁유미는 마침 정차되어 있는 택시로 달려가 기사에게 얼른 XX 레스토랑으로 가달라고 했다.레스토랑에 도착한 후 탁유미는 문자에 적혀 있던 룸으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거기에는 공수진과 윤이 뿐만이 아니라 공수진의 부모님, 그리고 부하직원으로 보이는 우락부락한 남성들까지 여럿 서 있었다.윤이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맛있는 쿠키와 장난감에는 손도 대지 않고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탁유미의 얼굴을 보고는 그제야 뚱한 얼굴을 지우고 활짝 웃었다.그러고는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려 탁유미의 앞으로 달려왔다.“엄마!”탁유미는 아들을 꼭 껴안으며 눈으로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샅샅이 훑어보았다.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엄마 왔으니까 우리 빨리 집으로 가자.”“안 돼요. 조금 있으면 아빠가 여기로 온다고 했어요.”윤이가 나지막이 속삭였다.아이가 공수진을 따라간 건 아빠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지난번 셋이서 놀이공원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차에서 깜빡 잠이 드는 바람에 이경빈과 제대로 인사를 못 했으니까.탁유미는 아이의 말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아빠는 나중에 또 만나면 되지. 오늘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 할머니가 지금 윤이 없다고 많이 걱정하고 계셔.”윤이는 그 말에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할머니한테로 가요!”하지만 윤이와 탁유미가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룸 안에 있던 남성들 몇몇이 두 사람의 앞길을 막아섰다.그리고 곧바로 뒤에서 공수진의 아버지인 공한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뭘 그리 급하게 가려고 하나. 수진이와 경빈이가 결혼하게 되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우리 수진이 아들이 될 텐데 여기까지 온 거 이 기회에 우리 딸한테 제대로 된 감사의 인사라도 하는 게 어떻겠나? 그래야 자네도 앞으로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을 테니까.”탁유미는 굳게 닫힌 문과 그 앞을 막아선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을 빤히 바라보았다.이 남자들을 뚫고 아이와 함께 빠져나간다는 건 불가
“어쩜 이렇게 끝까지 뻔뻔하신지.”그때 의자에 앉아 있던 공수진이 차를 홀짝이며 입을 열었다.“애 앞에서 거짓말하는 거 부끄럽지도 않아요? 나랑 경빈 씨가 함께 있는 게 질투 난다고 탁유미 씨가 나를 계단에서 밀어버린 건 사실이잖아요. 내가 아이를 임신한 걸 뻔히 알면서. 그때 그렇게 아이를 잃지만 않았으면 나는 지금쯤...”공수진은 말을 흐리면서 윤이 쪽을 바라보았다.“지금쯤 윤이만큼 큰 아이와 함께 경빈 씨랑 셋이서 도란도란 잘살고 있었을 거예요.”“공수진, 그 입 안 다물어?!”탁유미는 공수진의 말에 크게 화를 냈다.아이의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화를 내는 걸 보니 찔리기는 하나 보죠?”공수진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윤이 앞으로 다가왔다.“그거 알아? 너희 엄마가 너희 아빠랑 함께 있는 나를 질투해서 내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죽여버렸어. 그 예쁜 생명체가 빛을 보기도 전에 그렇게 죽여버렸다고.”악마가 있다면 바로 공수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그녀는 지금 아이에게 평생의 트라우마가 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다.윤이는 지난번의 살인자 소동 이후에 또다시 엄마가 살인자라는 말이 들리자 눈을 동그랗게 부릅뜨며 소리를 쳤다.“아니에요! 우리 엄마는 살인자가 아니에요! 아무런 잘못도 한 적이 없다고 했단 말이에요!”“그건 너희 엄마가 네가 어리다고 거짓말을 한 거고. 만약 정말 누구를 해친 적이 없으면 왜 감옥에 갔겠어? 감옥에 가는 사람들은 모두 나쁜 사람들인데. 안 그래?”공수진은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그러자 탁유미가 공수진의 손을 세게 뿌리쳤다.“우리 아들한테 손대지 마!”탁유미는 공수진이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손을 뿌리치자마자 공수진은 마치 크게 밀침을 당한 것처럼 뒤로 쓰러졌다. 그리고 쓰러지는 순간 테이블 매트를 건드리는 바람에 그만 테이블 위에 있던 것들이 공수진 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악!”공수진
‘아, 이걸 원했던 거였어. 이경빈 앞에서 또다시 나를 가해자로 만들 생각이었던 거야. 하지만 왜? 무엇 때문에?’탁유미는 공수진이 왜 이런 짓까지 하는지 그 목적이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그녀는 이미 이경빈을 포기했고 아이까지 주겠다고 했다.그런데 왜 이런 짓을 벌인 거지?탁유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얼마 안 가 이경빈과 결혼까지 하게 되면서 대체 뭐가 그렇게도 거슬리는 거지?이경빈에게 있어 그녀는 그저 죽이고 싶은 원수일 뿐일 텐데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가 있지?‘설마... 이경빈이 나를 좋아하게 될까 봐?’탁유미는 그 생각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한 손을 들어 윤이의 인공와우를 떼어냈다.지금부터 하는 말을 윤이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어른들의 더러운 싸움은 아이에게 트라우마만 남기게 될 뿐이니까.그녀는 자기 아들이 어른들의 싸움에 휘말리는 것도 원치 않았고 어른들 때문에 불필요한 원한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탁유미는 그저 윤이가 항상 행복하기만을 바랄 뿐이다.윤이는 인공와우를 떼어낸 그녀를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멍청한 짓도 적당히 해야지. 공수진, 그때 네가 날 음해해 날 가해자로 만든 건 이경빈이 나를 좋아하게 될까 봐 그런 거였겠지만 지금은 대체 왜 이래? 이경빈은 내가 자기 앞에서 죽는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사람이야. 아니, 어쩌면 기분 나쁘다고 눈살이나 찌푸리겠지. 그런데 대체 왜 날 아직도 건드리지 못해 안달이야?”탁유미가 차가운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아니면 서로에게 확신이 없는 건가? 그래서 맨날 뒤에서 이런 추잡한 짓이나 하는 거야? 그래?”공수진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탁유미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경빈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아픈 척을 해야만 했다.물론 식기가 떨어진 건 정말 아팠지만 말이다.그때 탁유미의 말을 들은 한영애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사람이 어쩜 그렇게 악독해
갑자기 공허해진 손아귀에 이경빈의 두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경빈 씨...”그때 공수진의 허약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에 이경빈은 서둘러 공수진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공수진은 차를 뒤집어써 엉망진창이었고 얼굴을 새하얗게 질렸으며 입술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경빈 씨, 나는... 나는 그저 윤이랑 대화를 조금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앞으로는 내 아들이 될 아이니까...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됐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나는 정말...”공수진은 힘겹게 입을 열며 억울하고 또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윽...”그때 공수진이 미간을 세게 찌푸리더니 고통을 호소했다.“나... 나 배가 너무 아파요. 윽... 경빈 씨...”그 모습에 이경빈이 미간을 찌푸렸다.“알았으니까 그만 말해. 지금 당장 병원에 데려다줄 테니까.”하지만 공수진을 안으려 허리를 숙이려는데 공수진의 치마 사이로 피가 흥건하게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오늘 입은 치마가 흰색 치마라 빨간색이 더더욱 눈에 띄었다.공수진의 부모님은 그 피를 보더니 아연실색하며 말했다.“피?! 수진아, 너 대체 어디를 다친 거야?!”탁유미도 피가 흥건한 것을 눈치챘다.‘피가 저 정도로 심하게 흐른다고?’공수진은 그저 넘어진 것뿐이다. 테이블 위의 식기들에 맞았다고 해도 피까지 흘릴 정도는 아니었다.순간 탁유미의 머릿속으로 몇 년 전의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그때도 공수진은 계단에서 넘어진 후 이렇게 치마를 빨갛게 적시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리고 이경빈은 그 모습을 보고 그녀를 안고 바로 병원으로 뛰어갔다.이렇게도 똑같은 광경을 두 번이나 겪는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공수진은 정말 그때와 똑같은 수법으로 그녀를 가해자로 만들려는 걸까?탁유미는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버렸다.이경빈은 공수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더니 얼굴을 굳히고 곧바로 공수진을 안아 들고 밖으로 향했다.룸을 나설 때 분노에 찬 얼굴로 탁유미를 향해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다시 눈을 뜬 이경빈이 보게 된 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강지혁이었다.마취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그런지 통증 같은 건 없었다.“유미는... 어떻게 됐습니까?”이경빈이 힘겹게 입을 열며 물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탁유미 시는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이틀 정도 경과를 지켜봐야 한대요.”그의 말에 대답해준 건 강지혁이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수술이 무사히 끝났으니 된 거다.앞으로 두 번 다시 탁유미 곁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몸 안에 그의 일부가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그녀가 죽을 때까지 줄곧 함께하게 될 거니까 그것으로 됐다.그리고 그녀가 준 골수도 평생 그와 함께 할 테니 그 역시 이것으로 그녀와 평생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이경빈은 탁유미의 상태 외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몸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의사가 수술 후 주의사항과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에 관해 설명해주는데도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침묵만 고수할 뿐이었다.강지혁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사와 간호사가 전부 다 나간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탁유미 씨 사건을 뒤엎으려고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이강 그룹이 큰 타격을 입게 될 겁니다. 어쩌면 판결 결과에 따라 이경빈 씨는 감방살이하게 될지도 모르고요.”“알고 있어요.”이경빈이 담담하게 말했다.자신의 결정으로 그룹에 어떤 파문이 일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가 받아야 할 벌이다.복수하겠다는 생각에 매몰돼 공수진의 말만 믿고 거짓 증언한 그의 업보다.탁유미가 형을 살게 된 것에 제일 큰 공헌을 한 건 바로 그의 증언이었다.그러니 그녀를 감옥으로 보낸 건 그나 다름없었다.“정말 앞으로는 탁유미 씨 앞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지혁이 물었다.“내가 유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유미가 그걸 원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들어줄 수밖에요.”그 소원을
“임유진 씨한테 맡기려고 했는데 너를 설득하지 못할까 봐... 그래서 너와 직접 얘기하려고 들어왔어. 내 얼굴 보고 싶지 않다는 거 알아. 내 간이 너한테는 달갑게 느껴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이경빈은 주먹을 꽉 말아쥐더니 탁유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수술은 받아줘. 네가 수술을 받으면 그때는 두 번 다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줄게.”이경빈은 지금 오직 그녀가 살기만을 바랐다.그녀만 살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탁유미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만약 나한테 간을 기증해주면 수술 후에 후유증 같은 게 생길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평온한 그녀의 말투에 이경빈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수, 수술받으려고?!”“...응.”윤이와 김수영을 위해 그녀는 한번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다.“간을 기증해주는 대신에 뭐 바라는 거 있으면 지금 여기서 확실하게 얘기해. 너한테 빚지는 건 싫으니까. 물론 내가 수술대 위에서 죽게 되면 그때는 네가 바라는 게 뭐든 간에 들어줄 수 없게 되겠지만.”“아니! 넌 죽지 않아!”이경빈이 흥분해서 외쳤다.“분명히 괜찮을 거야. 네 골수를 이식받았을 때 나는 아무런 거부반응도 없었어.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주는 것도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이경빈은 확신에 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서 조건은? 그것부터 말해.”탁유미의 말에 이경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조건이라니, 그녀에게 간을 기증해주는 대신 바라는 게 있다고 하면 그녀가 멀쩡히 살아 숨 쉬는 것밖에 없다.그녀가 살 수 있다면 간 따위 몇 번이고 더 기증해줄 수 있다.“바라는 거 없어. 그리고 나한테 빚진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오히려 지금은 내가 너한테 빚진 걸 갚는 거니까. 너도 그때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잖아.”“그래? 그럼 서로 빚진 게 없는 거네? 알았어. 수술 무사히 끝나면... 우리 더는 보지 말자. 나는 더 이상 너랑
“유진 씨? 유진 씨가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탁유미가 깜짝 놀라며 임유진에게 물었다.“이경빈 씨 전화를 받고 왔어요.”임유진은 탁유미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언니, 수술해요. 지금이 마지막 기회예요. 이 기회를 포기하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어져요.”“유진 씨!”탁유미는 갑작스러운 임유진의 말에 당황해하며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러고는 서둘러 윤이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은 윤이가 바로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을 알기에 태연한 표정이었다.“언니가 남은 시간을 편히 보내고 싶은 건 알겠어요. 그리고 수술 결과가 안 좋으면 그 남은 시간마저 사라지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알겠고요. 하지만 언니... 만약 수술에 성공하면 그때는 윤이가 어른이 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어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자신의 복부를 쓰다듬었다.“언니, 만약 그때 내가 배 속의 아이를 한 명 지우는 걸 택했으면 어쩌면 아이들이나 나나 조금 더 안전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랬으면 결코 지금 같은 행복감은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나는 그때 의사 선생님들의 권고에도, 혁이의 반대에도 결국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아이들과 함께 이겨내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언니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으면 좋겠어요. 쉽게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윤이도 언니가 그러기를 바랄 거예요. 세상에 엄마를 일찍 보내고 싶어 하는 자식은 없으니까요. 윤이를 위해서라도 포기하지 말아줘요.”탁유미는 그 말에 몸을 움찔하더니 시선을 돌려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들을 바라보았다.윤이는 임유진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본능적으로 알아들었다.“엄마, 윤이는 엄마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윤이랑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윤이가 키도 크고 힘도 세지면 그때는 윤이가 엄마를 지켜줄게요!”탁유미는 그 말에 결국 눈물을 보였다.윤이는 서둘러 침대 위로 올라가더니 앙증맞은 손으로 하염없이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그때 병실
임유진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얼른 답했다.“알겠어요.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갈게요!”“임유진 씨...”전화를 끊으려던 그때 기어들어 갈 듯한 이경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웬만하면 이런 부탁을 하지 않는데 지금은 임유진 씨 말고는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부탁 좀 할게요. 제발... 제발 유미 좀 설득해주세요. 유미가 내 간을 받고 수술할 수 있게 제발 도와주세요...”임유진은 그의 간절한 부탁에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그간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경빈과는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남자인지 임유진은 아주 잘 알고 있다.그런데 그런 남자가 지금 탁유미의 목숨 때문에 제발이라는 말까지 하며 그녀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있다.만약 이대로 탁유미가 죽게 되면 이경빈은 어쩌면 평생 지옥 속에서 살지도 모른다.“알겠어요.”“무슨 일이야?”전화를 끊자마자 옆에 있던 강지혁이 물었다.“유미 언니 지금 병원에 있대. 지금 바로 간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언니가 위험하대.”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투를 챙겼다.“언니가 수술받을 수 있게 설득하러 가야겠어.”“같이 가.”“너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저녁에 다시 하면 돼. 너 혼자 보내는 게 걱정돼서 그래.”“내가 왜 혼자야. 네가 붙여둔 경호원분들이 있는데. 걱정하지 마.”“그래도 걱정돼.”강지혁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솔직히 그는 마음 같아서는 외딴 섬을 하나 사들여 임유진을 그 섬에 데리고 가 자신의 시야 안에서만 있게 하고 싶었다.임유진은 그의 고집스러운 말에 결국 알겠다며 같이 밖으로 향했다.병원.탁유미가 있는 병실 앞으로 뛰어와 보니 문밖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리를 꽉 쥐고 있는 이경빈의 모습이 보였다.“언니는 어떻게 됐어요?”임유진이 다가와 물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고 임유진을 쳐다보았다.임유진은 이경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몸이 움찔했다.이경빈이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경빈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그대로 탁유미를 안아 들고 윤이에게 말했다.“지금 당장 엄마 데리고 병원으로 갈 거야. 윤이도 엄마 아픈 거 싫지?”윤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경빈을 따라 차량 쪽으로 달려갔다.차 문이 열린 후 이경빈은 탁유미를 조수석에 내려놓았고 윤이는 아무 말 없이 서둘러 뒷좌석에 올라탔다.아이는 시트에 편히 등을 기대는 것이 아닌 몸을 앞으로 하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탁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조금만 참아요.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들이 엄마 구해줄 거예요. 그러면 하나도 안 아플 거예요!”탁유미는 그 말에 남은 힘을 끌어다 애써 웃어 보였다. 아들의 걱정 가득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엄마는 괜찮아... 조금만 있으면 금방 괜찮아져.”모자의 대화에 이경빈은 가슴이 미어져 서둘러 시동을 걸고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길 그는 혹여 아픈 소리를 내면 윤이가 걱정할까 봐 이를 꽉 깨물고 참는 그녀를 보며 문득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그날 탁유미는 그와 나란히 걷던 도중 울퉁불퉁한 바닥에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분명히 아플 텐데도 그녀는 괜찮다며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걸었다.그러다 날이 어두워지고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 그녀의 발걸음은 티가 나게 느려졌고 이에 이상함은 여긴 이경빈은 그녀의 발을 힐끔 봤다가 그제야 퍼렇게 멍든 그녀의 발목을 발견했다.“바보야? 왜 아프다고 말을 안 해?”이경빈의 추궁에 탁유미는 그의 눈빛을 피하며 우물쭈물 답했다.“아프다 그러면 또 걱정할 거잖아. 그리고 솔직히 이 정도는 집에 가서 약 바르면 금방 나아.”탁유미는 늘 이랬다. 늘 이렇게 자기보다는 옆에 사람을 더 위하며 자기가 받는 고통은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렸다.그녀는 그런 여자였다.이경빈은 차량이 빨간 불에 멈출 틈을 타 티슈를 꺼내 탁유미의 땀을 닦아주었다.많이 아픈 건지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땀 범벅이 되었고 고통을 참느라 이빨에게 혹사당한 입술은 빨갛
탁유미는 이경빈의 말에 별다른 감흥이 없는 듯 평온한 얼굴로 물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야? 그럼 비켜. 이만 집으로 가야 하니까.”“내 얼굴 보고 싶지 않다는 거 알아. 그래서 나도... 최대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으려고 했어. 하지만 나를 거부하지는 말아줘. 아니, 최소한 내 간만은 거부하지 말아줘. 너 계속 이대로 수술하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입 다물어!”탁유미는 이경빈의 말을 자르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윤이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자신이 아프다는 걸 윤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 약을 먹을 때도 일부러 윤이가 없을 때를 봐가면서 먹었다.이제 남은 시간도 얼마 없는데 그 시간 동안 윤이의 걱정스러운 눈빛만 보는 건 사양이었다. 이경빈은 탁유미의 표정에 그제야 이 일은 아직 윤이에게는 비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엄마 아파요? 수술해야 해요?”윤이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니, 엄마 너무 건강한데? 아빠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거야.”타이밍도 참 얄궂게 이 말이 내뱉어진 다음 순간 탁유미는 또다시 간이 아파 나기 시작했다.탁유미는 고통을 참으며 다시 윤이 손을 잡았다.‘빨리 집으로 가서 약을 먹어야 해.’“자, 빨리 가자.”탁유미는 애써 고통을 참으며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그때 이경빈의 큰손이 다가와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너 지금 또 아픈 거지?”다급한 그의 질문에 탁유미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이거 놔.”“대답해. 너 지금 또 진통 시작된 거지?!”이경빈은 그녀의 진통이 빈번하게 일어날수록 그녀의 몸이 점점 더 유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안 되겠다. 지금 당장 나랑 병원 가자!”“이경빈,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병원은 무슨, 나는...”탁유미는 이경빈에게 쏘아붙이려다가 진통이 심해져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윤이는 이경빈이 탁유미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는 것을 보며 지난번 이경빈이 자신을 떼어내고 탁유미를 억지로 데려간 것이 생각났다.그 일이 있고 난 뒤 다시 만난 탁
만약 이경빈이 정말 탁유미 모자를 위해 뭔가를 하게 되면 여자의 집안은 아마 뭘 할 수 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남편이 제아무리 대기업 과장이라고 해도 이경빈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일 테니까.원래는 다른 학부모들의 시선을 끌어 탁유미가 스스로 아이의 유치원을 옮기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경빈이 등장한 지금 그 시선에 난감해진 건 오히려 자기 자신이었다.여자는 창피하기도 하고 또 이가 갈리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사과의 말을 건넸다.“죄, 죄송해요. 아까는 말 헛나온 거예요.”“사과는 내가 아닌 내 아들한테 해야지. 그리고...”이경빈은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아이 엄마한테도.”그는 자신과 탁유미 사이를 뭐라고 얘기하면 좋을지 몰랐다.여자는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지금은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해 얼른 탁유미와 윤이에게도 사과를 했다.“미안해요. 내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었는데... 아줌마가 미안해. 다시는 그런 말 안 할 테니까 용서해줘.”여자는 말을 마친 후 아들의 손을 잡고 빠르게 뛰어갔다.탁유미는 고개를 숙여 윤이에게 말했다.“이제 가자. 할머니가 집에서 기다리겠다.”“엄마, 사생아가 뭐예요?”그때 윤이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다.이에 탁유미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옆에 있던 이경빈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이경빈은 탁유미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앞으로 한발 다가가 자신이 대답했다.“윤아, 미안해. 다 아빠 잘못이야. 넌 절대 사생아가 아니야. 아빠의 유일한 아들이야.”윤이는 그의 대답에 조그마한 입술을 깨물며 그를 노려보았다.지난번 이경빈이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자신을 적대시하는 아들의 태도에 이경빈은 저도 모르게 또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윤아...”“엄마, 우리 이만 집으로 가요.”윤이는 고개를 홱 돌리며 이경빈의 시선을 피했다.윤이의 존재를 부정했던 말과 탁유미에게 상처를 줬던 말을 그렇게도
“그건 그쪽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탁유미는 말을 마친 후 이곳에서 벗어나려는 듯 윤이의 손을 꽉 잡았다.여기서 더 언쟁을 높이게 되면 일이 더 커질 뿐만이 아니라 윤이도 겁을 먹을 테니까.그런데 그때 여자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나는 내 아들을 형을 살고 나온 전과자의 자식과 같은 유치원을 다니게 하고 싶지 않아. 범죄를 저지른 부모 아래에서 얼마나 정상적인 아이가 나오겠어? 범죄도 유전이야!”그녀의 목적은 아주 간단했다. 주변 학부모들의 이목을 이쪽으로 집중시켜 탁유미를 곤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탁유미는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분노 어린 눈빛으로 여자를 노려보았다.“말 가려서 해. 나이를 그만큼 먹었으면 어른답게 행동해야지. 아이들 앞에서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그리고 우리 윤이는 당신이 멋대로 판단해도 될 애가 아니야. 당장 내 아들한테 사과해!”여자는 탁유미의 기세에 눌려 흠칫하더니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질렀다.“사과하라고? 당신 아들한테? 내가 왜? 뭐, 사과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나를 밀어버리게? 또 콩밥 먹게 해줘?!”탁유미는 그녀의 말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정말 그녀의 아픈 구석을 칼로 난도질하듯 후벼팠다.탁유미는 손을 부들부들 떨더니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윤이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아 마음을 다잡고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사과하지 않으면 당신 고소할 거야.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상관없어. 당신이 우리 애한테 사과할 때까지 나는 끝까지 갈 테니까!”갈 땐 가더라도 윤이가 앞으로 괴롭힘당하지 않게는 해줘야만 한다.엄마로서 좋은 건 못 해줘도 이것만큼은 해줘야 한다.“고소? 하하하! 감방살이하고 나온 주제에 어디서 고소를 들먹여?”하지만 여자는 가소롭게 웃으며 탁유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그때 뒤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당장 사과하지 않으면 내일 바로 소장 받게 될 거야. 그리고
탁유미는 깨끗이 청소를 마친 후 슬슬 윤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 되자 김수영에게 얘기한 후 곧바로 집을 나섰다.탁유미가 밖으로 나온 순간, 멀지 않은 곳에 정차된 차량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몰래 따라붙기 시작했다.이경빈은 잔뜩 마른 탁유미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욱신거려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탁유미는 그가 눈앞에 나타나는 걸 좋아하지 않기에 이경빈은 이런 식으로밖에 그녀를 지켜볼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어떻게 하면 그녀가 간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유미 언니는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아요. 아마 당분간은 그 결정을 돌리는 게 쉽지 않겠죠. 하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언제든지 언니한테 간을 기증할 수 있게 준비해줘요. 이경빈 씨가 언니를 정말 사랑하는 거라면요.”며칠 전 임유진이 건넨 이 말에 이경빈은 바로 술을 끊었고 간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엄격하게 식단관리도 하고 몸 관리도 했다.이경빈은 탁유미가 유치원 앞에 멈춰서자 이내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유치원 앞에는 그녀 말고 다른 학부모들도 기다리고 있었다.그중에서 그녀는 유독 더 말라보였고 얼굴은 가뜩이나 작은데 병세로 인해 더 수척해 보였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옷만큼은 무척이나 단정하고 또 깔끔했다.탁유미는 아무리 아파도 윤이를 데려올 때만큼은 늘 자신의 겉모습을 신경 썼다.화려하게 치장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타인이 윤이를 낮잡아 보지는 못하게 최대한 깔끔하게 자신을 꾸몄다.이경빈은 그녀의 생각을 눈치채고는 조금 웃기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쓸쓸하기도 했다.자신의 아들을 낮잡아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지만 그런 빌미를 만들어 준 사람은 결과적으로 그였으니까.만약 당시 탁유미를 감옥으로 보내지 않았으면 윤이가 감옥에서 태어나는 일도 없었을 거고 청력을 잃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윤이는 누구보다 풍족한 생활을 누렸을 것이다.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유치원 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