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빈은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얼른 공수진을 안아 들고 밖으로 나섰다.그리고 공한철과 한영애는 독기 어린 눈으로 탁유미에게 모진 말을 내뱉었다.“이번 일 절대 쉽게 안 넘어갈 거다. 우리 수진이는 너랑 달리 무척이나 소중한 아이니까! 반드시 너한테 책임을 물을 거야!”탁유미는 그들에게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면서 두 손으로는 계속해서 아이를 제 품에 끌어안으며 악의에 가득 찬 인간들을 보지 못하게 했다.윤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탁유미는 진이 다 빠지는 느낌이었다.김수영은 윤이가 무사한 걸 보더니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아이고, 다행이야. 우리 윤이가 다치지 않아 정말 다행이야.”그녀는 집에서 탁유미와 윤이가 무사히 돌아오길 빌고 또 빌었다.탁유미는 그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며 안방 쪽으로 향했다.“엄마, 잠깐 윤이 좀 봐줘요. 나는 일단 옷 좀... 갈아입어야겠어요.”김수영은 탁유미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복부를 꽉 누르고 있는 것을 보며 통증이 또다시 시작됐다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그래그래. 얼른 들어가.”탁유미는 윤이 앞에서 아픈 티를 내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김수영은 얼른 그녀를 방으로 보냈다.탁유미는 방으로 들어간 후 병원에서 받은 진통제를 두 알 복용했다.그러고는 침대 위에 새우 자세로 누워 고통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오늘 일은 이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공씨 집안에서 이렇게까지 공을 들였다는 건 그녀를 완전히 제거해버리겠다는 뜻이니까.하지만 그걸 알고 있다고 해도 지금 이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게다가 한 달 정도 뒤에는 직접 윤이를 이경빈에게 보내줘야만 한다.이씨 가문이 정말 윤이를 지켜줄 수 있을까?공씨 가문 쪽에서 아이를 없애려고 들 텐데 정말 이경빈이 제대로 지켜줄 수 있을까?윤이는 아직 어려서 자기 몸을 지킬 능력이 없다.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어떻게 하면 죽기 전에 아이를 지켜줄 수 있지?엄마로서 제 아들 하나 보호해주지 못한다니... 정말 무능력한
당시 이경빈은 누군가를 배신했다는 죄책감 같은 것이 들어 바로 눈을 옆으로 돌렸다.하지만 곧바로 자신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배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그는 곧 있으면 공수진과 부부가 되고 부부 사이에 잠자리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게다가 그는 이미 탁유미가 감옥으로 들어가기 전에 공수진과 잠자리를 한 적도 있었고 말이다.물론 탁유미가 감옥에 들어간 뒤로는 계속해서 혼자 잠들었다.공수진과는 연인 사이를 넘어 결혼 얘기까지 오가던 상태였는데도 이상하게 공수진과 잠자리를 하려고 하면 이상한 죄책감이 들었다.그조차도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탁유미 때문일까? 말도 안 된다.탁유미의 존재가 이토록 큰 영향을 줄 수 있을 리가 없다.재판장에서 증인으로 나서 증언까지 했는데 아직 그 여자에게 마음이 남아 있을 리 없다.“아이고, 이걸 어째! 우리 수진이가 또다시 아이를...!”한영애는 공수진의 손을 잡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그 빌어먹을 것이 또다시 우리 수진이 아이를 사라지게 했어! 두 아이 모두 탁유미 그것 때문에! 우리 수진이 불쌍해서 어째...!”“엄마... 흡... 그만 해요...”공수진은 가뜩이나 수술을 막 하고 난 뒤라 얼굴이 창백한데 거기에 눈물까지 범벅이 되니 가엽기 그지없어 보였다.“임신이 힘든 몸이 된 후로 찾아온 기적적인 아이를 또다시 탁유미 때문에 잃어버렸는데 내가 어떻게 그만해! 분명히 일부러 그랬을 거야! 네가 아이를 낳으면 자기 아들이 나중에 이씨 가문을 물려받지 못할까 봐, 그래서 미리 수를 쓴 게 분명해!”이경빈은 그 말에 몸을 휘청였다.“탁유미도 알고 있었습니까? 수진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수진이가 윤이한테 이제 곧 있으면 네 동생이 생긴다고 했어. 오늘 수진이가 윤이를 데리고 우리를 만나러 온 것도 앞으로 자기 아들이 될 아이니까 잘 봐달라고 데리고 온 거였어. 그런데 탁유미 그게... 우리 수진이를...!”한영애는 마치 이 자리에 탁유미가 있었다면 씹
다음날.오늘은 토요일이라 윤이는 유치원이 아닌 집에 있었다.“엄마, 나 윤이 데리고 놀이터로 가서 놀고 올게요.”탁유미가 김수영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러지 말고 집에서 좀 쉬어.”김수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탁유미는 평소 일 때문에 항상 늦게 잤기에 김수영은 늘 그런 딸을 대신에 오전이면 자신이 윤이를 데리고 나가 놀았다.“괜찮아요. 윤이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요.”탁유미는 지금 1분 1초가 아쉬웠다.이에 감수영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그럼 점심 맛있게 해놓을 테니까 늦지 않게 돌아와. 네가 좋아하는 거로 해둘게.”“네.”탁유미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윤이를 데리고 밖으로 향했다.주말이라 그런지 놀이터에는 아이들 데리고 놀러 나온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다.평소 윤이는 놀이터에 도착하면 항상 또래 아이와 함께 신나게 같이 놀았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친구가 먼저 다가오는데도 고개를 푹 숙인 채 고민이 많은 얼굴로 탁유미의 옆에 앉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윤이 왜 그래? 왜 친구랑 안 놀아?”탁유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엄마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죠?”윤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국에는 그녀를 향해 이 질문을 던졌다.어제 룸에서 들었던 말로 여태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이제 고작 4살이라고는 하나 나쁜 것과 좋은 것 정도는 윤이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는 꽤 예민한 구석이 있었기에 분위기만 봐도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탁유미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응, 엄마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그녀는 아이의 얼굴을 조목조목 훑어보았다.윤이는 이경빈을 많이 닮았지만 영롱한 두 눈과 웃을 때의 느낌은 그녀 판박이였다.다만 근 몇 년간 탁유미는 먹고 사는데 바빠 좀처럼 웃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윤이만큼은 앞으로 많이 웃기를 바라며 자신 때문에 슬퍼하거나 움츠러들지는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엄마 말 기억해. 엄마는 그 누구도 해한 적이 없어. 엄마
사진을 한 장 옆으로 넘기자 이번에는 그녀를 포함한 세 사람의 사진이 보였다.윤이는 놀이공원에서 돌아온 뒤로 시간이 날 때마다 탁유미의 휴대폰을 들고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바라보았다.사진을 보는 아이의 얼굴에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그 모습에 탁유미는 사진을 지우려다가도 결국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탁유미는 시선을 내려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세 사람의 사진을 바라보았다.윤이는 활짝 웃고 있었고 그녀는 안전바를 꼭 잡은 채 무언가를 참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으로 보아 당시 통증이 일었던 게 분명해 보였다.그리고 이경빈은 고개를 돌린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아마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그녀를 걱정해서 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실상은 증오해 마지않는 관계인데 말이다.두 사람은 같은 회전목마를 타고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마음의 거리는 하늘과 땅처럼 멀었다.이대로 이경빈과는 죽을 때까지 평생 다시는 보지 않기를 그녀는 진심으로 바랐다.하지만 그 생각을 하자마자 윤이가 큰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아빠!”그 목소리에 탁유미가 고개를 들어보니 윤이가 활짝 웃으며 이경빈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이경빈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탁유미는 이쪽으로 걸어오는 이경빈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이경빈은 윤이가 코앞까지 다가왔는데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계속해서 성큼성큼 걸어왔다.얼음장 같은 그의 얼굴에 탁유미는 순간 불안감이 밀려왔다.아니나 다를까 이경빈은 탁유미의 바로 앞에 서더니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당장 나랑 같이 병원으로 가. 가서 수진이한테 사과해. 수진이가 너 때문에 또 유산을 해버렸어. 3개월 된 아이가 그렇게 또다시 수진이 뱃속에서 사라졌다고!”탁유미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공수진은 또다시 같은 판을 짰다.공수진은 이번에도 또다시 탁유미를 가해자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아무리 아빠라고 해도 엄마를 괴롭히는 건 용서할 수가 없다.이경빈은 잔뜩 가라앉은 얼굴로 윤이에게 말했다.“윤이야, 비켜. 엄마는 큰 잘못을 했어. 그래서 지금 당장 사과하러 가야 해.”“싫어요. 엄마는 잘못한 거 없어요! 그런데 왜 사과를 해요.”윤이가 말했다.“엄마는 그저 그 아줌마의 손을 살짝 밀쳤을 뿐이에요. 그랬는데 아줌마가 갑자기 뒤로 넘어가 넘어진 거라고요! 엄마는 그저 그 아줌마가 내 볼을 만지는 걸 막아준 것뿐이에요! 엄마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윤이는 공수진을 좋아하지 않았다.아니, 싫어했다.매번 미소를 지어주고는 있지만 그 눈빛이 묘하게 섬뜩하고 또 무서웠다.윤이는 아직 아이이기는 하지만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과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 정도는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하지만 탁유미의 억울함을 밝히려 한 아이의 말은 되레 이경빈의 심기만 건드리고 말았다.“탁유미, 입을 열 때마다 아이를 위한다고 하더니 이딴 식으로 교육했어? 아이한테까지 거짓말을 하게 했냐고! 너, 그 룸에 CCTV가 있었던 거 모르지? 수진이가 윤이 볼을 어루만지려고 한 걸 네가 밀쳐버린 걸 내가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해? 너는 그저 가볍게 밀친 거겠지만 네 그 행동으로 수진이는 또다시 아이를 잃었어. 너, 수진이가 아이를 낳으면 윤이가 설 자리가 없어질 것 같아서 그런 거지? 그래서 밀쳐버린 거지?”이경빈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차갑고 또 날카로웠다.탁유미는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사실 그녀는 이경빈이 오해하든 말든 욕설을 퍼붓든 말든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지만 윤이 앞에서 이런 말을 내뱉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이경빈은 지금 공수진의 일 때문에 이성을 잃어 유산이란 말을 계속해서 들먹이며 그 말을 듣게 될 윤이의 생각 같은 건 조금도 하지 않고 있다.탁유미는 아이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는 걸 원하지 않아 윤이의 인공와우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그걸 떼어내기도 전에 이경빈의 말소리가 들려왔다.“나한테 양육권을 넘기
윤이가 들으면 안 되는 말이었다!“엄마, 아빠는... 윤이를 싫어하는 거예요?”그때 아이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까만 눈동자가 이경빈을 한번 본 후 다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이경빈은 아이의 눈빛을 받는 순간 자신이 무척 초라하게 느껴졌다.아이의 눈빛에는 더 이상 그를 향한 애정과 사랑은 없었다. 그저 두려움과 상처만이 남아 있었다.이경빈은 그제야 자신이 뭐라고 했는지 깨닫고 뒤에 있던 비서에게 소리쳤다.“윤이를 뒤로 데려가!”그 말에 부하 직원이 다가와 윤이를 번쩍 들었고 윤이는 이에 발버둥 치며 부하 직원의 가슴팍을 두드렸다.“윤이한테 뭐 하려는 거야! 당장 안 내려놔?!”분노한 탁유미가 아이를 빼앗으려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경빈이 팔을 꽉 잡고 있는 바람에 다가갈 수가 없었다.“윤이는 내 아들이야. 윤이를 다치게 하지 않아. 그러니까 핑계 그만 대고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서 수진이한테 사과해!”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그대로 탁유미의 팔을 부여잡고 놀이터 입구로 향했다.그는 차로 향하는 길 부하 직원에게 뒷수습을 맡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두 사람이 소리치며 화를 내는 바람에 이미 많은 이목이 쏠렸으니까.탁유미는 이경빈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휘청거리며 결국 놀이터 밖에 있는 차량 옆으로까지 왔다.그녀는 윤이가 이경빈의 부하 직원의 손에 의해 다른 쪽으로 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경빈, 윤이를 대체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 만약 윤이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는 내 모든 걸 걸고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탁유미는 무력한 자신이 한스러웠고 아이를 다른 곳으로 데려간 이경빈이 원망스러웠다.차에 올라탔는데도 이경빈은 여전히 그녀의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말했지. 윤이를 다치게 하는 일은 없다고. 윤이는 집으로 보내주라고 했어. 너도 윤이한테 사과하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을 거 아니야. 아니면 다시 윤이를 불러올까? 윤이가 네가 한 짓을 낱낱이 알게 돼야 속이 시원하겠어?”이경빈은 기사에게 병원으로
“공수진을 믿는 이유가 뭐야? 너한테 골수를 기증해줘서? 그것 때문에 네가 살 수 있게 돼서?”탁유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경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그 사실은 이씨 가문과 공씨 가문밖에 모르는 일이다.“만약 널 구한 사람이 공수진이 아니라면 믿을 거야?”“탁유미, 이제는 정말 질린다. 감옥살이 한번 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이경빈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네가 그 일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잘 모르지만 경고하는데 나랑 수진이 사이를 이간질하지 마.”이경빈은 차가운 얼굴로 탁유미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았다.“왜, 이번에는 날 구한 게 수진이가 아니라 너라는 말이라도 하게? 꿈도 꾸지 마. 내가 지켜줘야 할 여자는 수진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수진이야. 너 따위가 들어올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알아 들어?”그 말에 탁유미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하하하하.”그녀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그만해.”이경빈은 그녀의 웃음소리가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하지만 탁유미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고 이제는 눈물까지 보였다.“그만하라고! 내 말 안 들려?”이경빈은 턱을 잡았던 손으로 이번에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그는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웃음소리가 이상하리만큼 심장을 찔러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그의 손바닥에 닿은 그녀의 입술은 조금 서늘했다.이경빈은 그제야 자신과 닿아있는 그녀의 피부가 차가운 것을 알아챘다.그리고 그녀의 얼굴은 지금 혈색 하나 돌지 않았고 무척이나 창백했다.두 눈이 마주치고 탁유미는 이경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녀의 눈은 냉랭하고 또 차가웠으며 눈가에는 아까 웃어서 생긴 눈물방울이 맺혀있었다.이경빈은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둔기 같은 것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심장이 조여오고 호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탁유미의 두 눈을 보면 꼭 자신 같은 건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서 튕겨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러면 지금 그녀의 마음을 차지 하고 있는 사
하지만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사과하고 싶지 않다.사과를 하면 공수진을 질투해 나쁜 마음을 먹고 일부러 계단에서 밀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니까.만약 그렇게 되면 윤이 앞에서는 평생 머리를 들지 못하게 된다.이경빈은 탁유미의 고요함에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사실 그녀가 조용해졌으니 이제는 그녀와 닿고 있는 손을 거두어들여야 마땅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머리의 통제를 벗어난 듯 그녀의 조금 차가운 볼에서 떠날 줄을 몰랐고 심지어는 이 감각을 더 느끼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보였다.탁유미는 얼굴이 확연히 말라 있었고 피부도 백옥같았던 예전과는 달리 조금 타 있었으며 촉감도 조금 거칠었다.하지만 청초하고도 수려한 얼굴 윤곽은 여전했으며 예쁘게 내린 눈썹과 작고 앙증맞은 코, 그리고 눈을 감으면 더 훤히 보이는 풍성한 속눈썹도 예전과 하나 다를 것 없었다.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마치 인형처럼 가만히 있는 모습에 이경빈은 한참을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차량이 병원 입구에 다 도착해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손을 거두어들였다.“나는 사과 안 해.”차 문이 열린 순간 탁유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그 말에 이경빈은 강경한 태도로 그녀를 차에서 끌어냈다.“그건 네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탁유미는 결국 이경빈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공수진의 병실에 데려와 졌다.병실 안에는 공수진은 물론이고 그녀의 부모님도 함께 있었다.“경빈 씨... 탁유미 씨는 왜 데리고 온 거예요?”공수진이 병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번 일 이대로 넘길 생각 없다고 했잖아.”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다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또다시 감옥에 들어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지금 당장 사과해!”탁유미는 차가운 눈빛으로 병실 안을 쭉 훑어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난 분명히 말했어. 사과 같은 거 안 한다고.”그 말에 공수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윤이가 너 보러 감옥으로 면회 가기를 바라는 거야? 그래?”잔뜩 분노한 이경빈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소민아는 그런 그녀의 아부가 싫지 않았기에 이름이 알려진 뒤로 심심풀이용으로 하던 라이브에 문혜진을 포함한 상류층 사람들을 부르며 인기몰이를 했다. 다들 무척이나 협조적이었고 심지어는 새벽에 연락해도 흔쾌히 나와주었다.부자들이 나오는 컨텐츠는 수요가 많았기에 소민아는 라이브로 얻은 인기에 힘입어 자신만의 작은 회사까지 차리며 계속해서 라이브로 수익을 벌어 들었다.하지만 임유진이 돌아온 뒤로 모든 것이 변했다. 매일같이 아부하며 스케줄을 물어보던 친구들은 갑자기 연락이 뚝 끊겼고 라이브에 와주기로 했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다른 스케줄이 있다며 거절을 해왔다.그리고 이제는 제일 만만하고 항상 개처럼 따르던 문혜진조차도 그녀의 초대를 단칼에 거절해버렸다.강씨 가문의 안주인 후보가 아닌 소민아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까.옆에 있던 비서는 소민아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은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그럼 오늘 라이브는 어떻게...”“뭘 어떻게 해요? 지금 당장 스케줄 가능한 연예인 쪽으로 연락 돌리세요. 인기 없는 애들 말고 지금 한창 핫한 애들로요.”소민아가 앙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너희들이 없으면 내가 라이브 못할 줄 알아? 두고봐.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겠어!’“네, 알겠습니다.”비서는 고개를 한번 숙이더니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소민아는 의자 시트에 등을 기댄 채 화를 억누르다 다시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앨범을 한번 훑어보았다.많고 많은 사진 속 유난히 눈에 띄는 사진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한정판 드레스에 예쁜 루비 목걸이를 하고 강지혁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임유진의 사진이었다.해당 사진은 누군가가 SNS에 업데이트한 사진으로 소민아는 사진을 보자마자 바로 자신의 앨범에 저장했다.소민아는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또다시 분노를 터트렸다.“드레스도 내가 먼저 고른 거고 루비 목걸이도 내가 먼저 발견한 건데 왜 다 이 여자한테 가 있는 거야!”임유진이 나타나기 전, 한창 사모님 기분을 내며 쇼핑하던 어
“아주 잠깐 아팠을 뿐인데 뭐하러. 그리고 통증이 시작됐을 때 나는 침실이 아니라 서재에 있었어. 아침에 박 선생한테 연락해봤는데 큰 문제는 아니래. 그리고 일전에 박 선생이 처방해준 약도 아직 있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괜찮아.”임유진은 괜찮다는 그의 말에도 좀처럼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나 정말 괜찮아. 큰 상처도 아니고. 며칠 지나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강지혁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보다... 5년 전에 내 곁을 떠난 이유가 뭔지 정말 기억이 안 나?”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응.”사실이었다.다른 기억은 다 돌아왔지만 하필이면 그때의 기억만 마치 누가 잘라놓기라도 한 듯 아주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사실 기억을 찾고 싶은 건 강지혁뿐만이 아니라 임유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절벽에서 그렇게 떨어진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왜 현이만 곁에 있었는지, 그리고 나머지 한 아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만약 살아있다면 지금쯤 어디에 있는지 등등 궁금한 게 너무도 많았다.임유진은 손을 뻗어 강지혁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어젯밤에... 사실은 많이 아팠던 거지?”강지혁은 아주 잠시만 아팠다고 했지만 그랬다면 이런 깊은 상처들이 생겼을 리가 없다.“지금은 안 아파.”“만약 앞으로 또 통증이 찾아오면 내가 자고 있더라도 깨워. 내가 아무것도 모르게 하지 마.”임유진은 강지혁이 고통스러워하는 순간에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자고 있었다는 게 너무나도 속상했다.“나도 알아. 너 아플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뭐 없다는 거. 하지만 우리는 부부잖아. 그때 혼인신고하고 나올 때 아플 때도 슬플 때도 언제나 함께 있자고 맹세했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뭐든 얘기해줘. 너 혼자 아파하지 마.”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임유진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얼굴이 창백해질 때까지 괴롭게 토를 하던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임유진은 그의 곁을 떠난 게 분명히 그럴
하지만 머리에 손이 닿기도 전에 강지혁이 빠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괜찮아. 이제 안 아파.”“그래.”임유진은 안도한 듯 웃으며 손을 거두어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왜? 뭐 할 말 있어?”강지혁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큰 결심을 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거 말이야. 정말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거 확실해?”“그건 갑자기 왜 물어? 그리고 말했잖아.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일 거라고.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너밖에 없어.”임유진은 당시 절벽에서의 일을 얘기해 주면 강지혁에게 큰 자극으로 다가올까 봐 오늘도 진실을 얘기해 주지 않았다.“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너도 알다시피 난 너에 관한 기억이 거의 없잖아.”임유진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그럼 앞으로 내가 틈틈이 우리가 함께했을 때 얘기를 해줄게. 계속 듣다 보면 네 기억도 점점 돌아오게 될 거야.”“너는 내가 기억을 다 찾았으면 좋겠어?”강지혁이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당연하지. 하지만 내 바람이 그렇다고 괜히 조바심낼 필요는 없어. 나는 네 기억이 아주 자연스럽게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돌아왔으면 좋겠으니까.”‘천천히... 하지만 내 기억은 이미...’강지혁은 조금 복잡한 얼굴로 임유진의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손이 풀리자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듯 몸을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막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나려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기울여버렸다.강지혁은 재빠르게 임유진을 받아내고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고마...”임유진은 몸을 바로 세운 후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강지혁의 손등을 보고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게 고운 손에 시퍼런 멍이 한가득했기 때문이다.“너 손이 왜 이래?”임유진이 눈을 크게 뜬 채 묻자 강지혁은 재빠르게 손을 거두어들였다.“
임유진의 상처받은 눈빛과 아프게 내뱉은 모든 말이 그에게는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헉!”어두운 저녁, 강지혁은 악몽에서 깨듯 눈을 번쩍 떴다.한숨 잤는데도 여전히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고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기억이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강지혁은 이를 꽉 깨문채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너무나도 괴로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옆에 누워있는 그녀가 깨기라도 할까 봐 그는 마음껏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임유진은 오늘 많이 피곤했던 건지 평소보다 깊게 잠이 들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였다.강지혁은 휘청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서는 안간힘을 쓰며 옆방과 연결된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다시 닫은 후 그는 힘이 다한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분명히 아픈 건 머리뿐이어야 하는데 이제는 머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다 아픈 느낌이었다.일전 박건태가 말했던 것처럼 강지혁은 쉽게 기억을 떠올리고 빠르게 기억을 찾아가는 일반 사람들과 달리 아주 조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두통을 느끼며 아주 힘겹게 기억을 되찾고 있었다.임유진 때문에 고통이 전보다 더할 거라는 건 이미 인지한 바 있지만 이렇게도 통증이 강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머리가 두 동강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강지혁은 지금 너무나도 힘들고 괴로웠다.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꽉 움켜쥔 채 아주 미약한 흐느낌만 내고 있었다.소리를 키우면 임유진이 깰 수도 있으니 꼭 참고 있었다.강지혁은 자꾸만 새어 나오는 흐느낌에 결국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가 입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이렇게 아픈데도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세글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임유진.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기억의 조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가며 그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그 시각 임유진은 강지혁의 흐느낌 소리도 그가 아파하는 것도 그 무엇하나 느끼지 못한 채 아주 깊게 잠들어 있었다.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천국이
“혁아,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내 말 들려? 눈 좀 떠봐!”다급한 여자의 목소리에 어둠이 천천히 걷혔다.강지혁은 고통의 감정이 서서히 사라짐과 동시에 누군가가 관자놀이 쪽을 부드럽게 마사지 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걱정으로 가득 뒤덮인 임유진의 얼굴이 보였다.“머리가 아픈 거지? 병원으로 갈까? 아니면 집사님한테 전화해서 지난번에 저택으로 왔었던 의사를 부르라고 할까?”강지혁은 임유진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그의 이마는 어느새 땀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과거의 나는 대체 널 얼마나 많이 사랑했던 걸까? 왜 네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살기 싫다는 감정부터 들었을까?’전에는 기억이 떠올라도 어디까지나 제삼자의 관점으로 그저 그 상황을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만 들 뿐이었는데 오늘은 마치 그 일을 그대로 겪은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너무나도 아프고 고통스러워 정신이 다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대체 얼마나 많이 사랑해야 이런 느낌이 들 수가 있는 거지?“혁아, 내 말 들려? 나 보여?”아무런 대답도 없자 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조금 심각한 얼굴로 그의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그런데 그때 강지혁이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따뜻한 손이다. 차디찬 유골함 따위가 아닌 매우 따뜻한 손이다.강지혁은 갑자기 몸을 기울여 으스러질 듯이 임유진을 꽉 끌어안았다.“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널 얼마만큼 사랑했는지 한번 얘기해봐.”간절하고도 유약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임유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당황한 것도 잠시 이내 그가 원하는 대로 얘기해주었다.“많이, 아주 많이 사랑했어. 혁이 너는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버릴 수 있었어.”아직 절벽에서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고이준이 해줬던 얘기만으로도 그녀는 강지혁이 당시 어떤 마음이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그녀를 얼마나 사
“그래.”강지혁은 임유진의 허리에 손을 두른 채 발걸음을 돌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는 아주 잠깐 시선을 돌려 백연신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백연신의 얼굴에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아니, 이건 절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분명히 살아있는데도 마치 껍데기만 남아있는 듯했다.강지혁은 그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철렁하며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졌다. 머릿속으로 기억의 파편이 빠르게 스쳐 가는 게 느껴졌다.“혁아, 왜 그래?”임유진이 조금 의아한 얼굴로 갑자기 멈춘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아무것도 아니야.”강지혁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와 함께 파티장을 벗어났다.차에 오른 후, 강지혁은 시트에 등을 기대고는 곧바로 두 눈을 감았다.“많이 피곤해?”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울려 퍼졌다.“조금.”“그럼 잠깐 눈 좀 붙이고 있어. 집에 도착하려면 30분 정도 걸려야 하니까.”임유진이 말했다.강지혁은 편히 쉬기 위해 심호흡을 두어 번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마음이 진정되기는커녕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고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아까 봤던 백연신의 얼굴만 떠올랐다.그 언젠가 자신 역시 그 얼굴과 똑같은 얼굴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다.언제? 아니, 애초에 그렇게까지 절망할 일이 있었나?그때 웬 장면 하나가 빠르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아주 정확하게 보였다.기억의 파편 속 그는 웬 유골함을 껴안은 채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절망이 그대로 담긴 울음소리는 꼭 이대로 목숨마저 포기하려는 사람 같았다.“왜 내가 아닌 건데? 왜 네가...! 너한테 미안해해야 할 사람도 나고 죽어야 할 사람도 난데 왜 네가 죽어버린 거냐고! 아아악!!”그는 주위 시선 따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왜 울고 있는 거지?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이건 임유진이 죽은 뒤에 일어난 일인 건가? 임유진이 죽었다고 생각해 이
“그러고 보니 너 얼마 전에 해외로 다시 간다고 하지 않았어? 새 프로젝트 시작했다며.”이한이 물었다.“당분간은 여기 있으려고.”강현수가 답했다.5년이나 지났음에도 임유진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강지혁밖에 없었지만 그는 그럼에도 떠날 수가 없었다. 방금처럼 그저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기만 해도 좋으니 그저 곁에 있고 싶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이한은 강현수의 대답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뒤돌면 해외로 가 있던 놈이 갑자기 해외 스케줄을 취소했다는 건 물어보나 마나 임유진 때문일 게 분명했다.사실 평소 가벼운 마음으로 이제 그만 임유진을 잊으라고는 했지만 만날 때마다 점점 야위어가는 강현수를 보고 있자니 이한은 이제 진심으로 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임유진이 돌아온 이상 강지혁은 절대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 즉 강현수에게는 영원히 기회가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임유진은 강지혁과 함께 간단하게 디저트로 배를 채운 후 홀로 테라스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보니 마침 백연신이 넋을 잃은 얼굴로 달빛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오늘은 만월이라 평소보다 달빛이 조금 더 강한 듯한 느낌이었다.백연신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인기척 소리에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임유진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왜 혼자예요?”“혁이는 지금 사업 얘기로 한창이라 혼자 왔어요.”임유진이 답했다.“그러는 백연신 씨야말로 왜 혼자예요? 고은채 씨는요?”“일이 있어서 먼저 갔어요.”임유진은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 이내 백연신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지영이는 백연신 씨를 정말 많이 사랑했어요. 둘이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도 늘 백연신 씨와는 가치관이 달라 헤어진 것뿐이지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진 건 아니라고 했어요. 백연신 씨는 그저 사랑과 사업 중에서 사업을 택한 것뿐이라면서.”임유진의 말에 백연신은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저도 모르게 꽉 말아쥐었다.“지영이는 백연신 씨와 헤어지고서 나서 단 한 번도 백연신 씨를 원망하거나 미
정다연은 볼을 감싼 채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정인태를 바라보았다.“아빠, 내가 틀린 말 했어요? 나는...”“입 다물라고 했지! 네가 뭔데 회장님 걱정을 해?! 그리고 네가 뭐라고 사모님이 사생활을 털어놔?!”정인태는 어렵게 일군 사업이 딸 때문에 한순간에 엎어질까 봐 전례 없는 분노를 터트렸다.하지만 이미 일은 엎질러졌고 그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어버렸다.“며칠 전에 얘기했던 계약 건은 아무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네요.”강지혁의 청천벽력같은 말에 정인태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강지혁은 얘기를 다 마쳤다는 듯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았다.“발은 좀 어때? 이제 괜찮아?”“응, 괜찮아졌어.”“배는 안 고파? 저쪽으로 가서 뭐 좀 먹을까?”“응, 그러자.”아침에 눈을 뜨고서부터 줄곧 온 신경을 파티에 쏟아부었던 터라 안 그래도 허기가 느껴졌던 참이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은 채 디저트 코너로 향했다.두 사람이 떠난 후 정인태는 곧바로 또 한 번 딸의 뺨을 내리쳤다.“너 때문에 우리 집안은 망했어! 이런 멍청한 것! 그러게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정다연은 두 뺨이 빨갛게 부은 채로 눈물을 글썽였다. 자신감 넘치던 모습은 몇 분도 안 돼 온데간데없어졌다.상황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볼 장 다 봤다는 듯 하나둘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었다. 5년 만에 돌아온 안주인이라고는 하나 임유진은 여전히 강지혁이 사랑하는 아내라는 것을 말이다.고은채는 가만히 옆에서 소란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리며 백연신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임유진 씨 능력 좋은데요? 5년이나 지났는데도 강지혁 씨의 마음을 꽉 잡고 있고. 정 회장 가문은 조만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되겠네요. 협력해줄 회사가 아무도 없을 테니까.”“고은채, 너는 사랑이 뭔지 몰라.”백연신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생각해요? 만약 내가 사랑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과연 연신 씨한테 5년이라는
정다연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이는 강지혁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숨을 헙 하고 들이켰다.“얘기는 다 끝났어?”임유진이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응.”강지혁은 조금 더 걸어와 임유진의 앞에 섰다.“무슨 소란인 건데?”“다른 건 아니고 여기 정다연 씨가 내가 변호사인 줄도 모르고 나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더라고. 그래서 그러면 안 된다고 차분하게 얘기를 하던 중이었어.”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강지혁은 생각보다 나약하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조금 의외라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사실 늘 파티장에는 자기 분수도 모르고 설치는 부류들이 있기에 만약 그것들이 임유진에게 뭐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호되게 갚아줄 심산이었다.그런데 지금 보니 임유진은 누군가가 괴롭힌다고 해서 쉽게 당해줄 사람도 아니었고 도리어 침착하게 말로 제압하는 당찬 여자였다.정다연은 임유진의 말에 서둘러 해명했다.“회, 회장님, 오해예요. 사모님에 대해 함부로 얘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저는 그저 사모님이 여러모로 오해를 받고 있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지난 5년간 어떻게 사셨는지 얘기해 달라고 한 것뿐이었어요! 다른 뜻은 절대 없었어요!”“오해?”강지혁의 차가운 시선이 정다연의 얼굴에 고정됐다.“그럼 누가 뭘 어떻게 오해했는지 어디 한번 들어볼까?”당연하게도 그의 질문에 나서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저... 저는 정말 아까 사람들이 다 오해하고 궁금해하길래... 그래서 대신 물은 거예요. 저, 정말 악의는 하나도 없었어요. 믿어주세요...”정다연은 지금 식은땀이 다 났다. 아무리 강지혁이 욕심났어도 끝까지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네가 뭔데 사람들을 대변해 내 와이프의 지난 5년간을 묻지? 우리 집 일에 간섭도 다 하고 정씨 가문도 꽤 심심한가 봐?”강지혁은 상대가 어리다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정다연은 다리가 풀리는 느낌에 휘청거리다 간신히 다시 중심을 잡았다.그때 50대 중후반 정도로 돼 보이는 남성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다름 아닌 정다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