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한 것도 없는데 뭘 자꾸 사과하라는 거야? 공수진이 짠 판에 놀아난 건 나야. 사과받아야 할 사람은 나라고. 이경빈, 너 정말 이번 일이 내 잘못이라고 생각해?”“수작 피우지 마. 오늘 넌 네 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 해!”이경빈의 말에 탁유미가 피식 웃었다.“못 본 새에 꼭두각시가 다 됐구나. 저들이 뭐라고 하면 그저 곧이곧대로 믿는 거야? 이경빈, 공수진이 네 목숨을 살려줬다고 했지? 아니, 공수진은 아무것도 안 했어. 네가 지금 멀쩡히 살아있는 것에 공수진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됐다고!”탁유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공씨 부부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느긋하게 물을 마시고 있던 공수진도 그 말을 듣고는 하마터면 손에 든 물컵을 떨어트릴 뻔했다.‘설마 탁유미 저게 뭘 알고 말하는 건가...?’“경빈 씨... 탁유미 씨 왜 저래요? 나는 지금 탁유미 씨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공수진은 창백한 얼굴로 한껏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이경빈을 바라보았다.이에 이경빈은 공수진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녀를 안심시켰다.“아무것도 아니야. 궁지에 몰려서 하는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그때 공한철이 탁유미 쪽으로 다가가더니 그대로 그녀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이게 진짜! 그래도 애 엄마라고 봐줬더니 어디서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지껄여? 너 같은 건 평생 감옥에서 썩었어야 했어!”공한철은 말을 마친 후 고개를 돌려 탁유미를 제압한 두 남성에게 소리를 질렀다.“빨리 무릎 꿇리지 않고 뭐해?!”그 말에 두 남성은 이경빈을 바라보았고 이경빈은 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명의 부하직원은 이경빈의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손에 힘을 가해 그대로 탁유미의 상체를 아래로 찍어눌렀다.다리에 힘을 주어 조금이나마 버티던 탁유미는 이내 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얼마나 세게 꿇었는지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전달해오는 듯했다.탁유미는 무릎이 아플 것이 분명한데도 마음의 고통과
“피고 임유진, 음주 운전으로 피해자 진애령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으므로 징역 3년에 처한다!”“유진아, 미안한데, 그 일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널 반대하셔. 탓하고 싶으면 그 사고를 저지른 널 탓해. 그러게 왜 하필이면 진애령을 쳐 죽이냐고.”“진애령은 진화 그룹 큰딸이자 강지혁의 약혼녀였어. 너 강지혁 몰라? S시에 있는 그 누구도 감히 그를 건드릴 수 없어. 그런데 왜 하필이면……, 우리 그만하자. 우리 집안까지 화를 입게 할 수는 없어.”“임유진 씨, 죄송하지만 당신은 이미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으므로 아무리 좋은 경력을 갖고 있더라도 채용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 사건과 연루된 지라, 자격증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려울 겁니다. 죄송합니다.”“네가 무슨 낯짝으로 집에 기어들어 와? 그 일로 우리 집안이 얼마나 곤욕을 치렀는지 알기나 해? 네 동생은 여주인공으로 데뷔할 수 있었는데, 너 하나 때문에 무산됐다고! 넌 네 여동생의 앞길을 망쳤어.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난 너 같은 범죄자를 딸로 둔 적 없어!”……유진은 꽁꽁 얼어붙은 손을 비볐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1월의 밤이었다.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녀의 살과 뼈를 파고들었다.노란 형광색의 환경미화원 복장을 입고 있는 유진의 청초한 얼굴은 찬바람을 맞아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예쁘고 맑은 두 눈 아래에 오뚝한 코와 빨간 입술, 긴 머리를 대충 질끈 묶어 올린 그녀의 모습은 온갖 풍파를 겪은 여성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그녀의 얼굴만 보면 아마 갓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생 정도로 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젊음의 활기 대신 사회의 모든 풍파를 겪은 듯한 체념과 무기력함이 담겨 있었다.유진은 3년의 옥살이로 거칠거칠해진 자기 손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본래 새하얗고 보드라웠던 그녀의 손은 온데간데없었다.손에 감각이 돌아온 그녀는 계속해서 빗자루를 들고 길을 쓸다가 돌연 그녀의 시선은 길 건너편의 검은 실루엣에 멈췄다.이른 아침, 그녀가 이 거리를 청소할 때
“혹시 갈 곳이 없으면 저랑 같이 갈래요?”임유진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유진은 자기가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충동적으로 낯선 남자를 집에 데려오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어쩌면 이 남자가 아무런 공격성이 없어 보여서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이 남자가 감옥에 있을 때의 자신과 너무 닮아서일 수도 있다.그도 아마 그녀와 똑같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살아보려 발버둥 치고 있는 그녀에 반해, 그는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없는 것 같았다.“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괜찮으시다면 바닥에서 주무시겠어요? 이불 깔아 드릴게요.”유진은 침묵을 유지하는 상대에게 새 수건과 새 칫솔을 꺼내 건네주었다.“욕실은 저쪽이에요. 남자 옷이 없어서……, 최대한 옷이 젖지 않게 조심하세요.”남자가 욕실에 들어가자 유진은 바닥에 이부자리를 깔고 여분의 이불을 꺼냈다.그녀가 살고 있는 그리 집은 크지 않은 원룸이다. 기껏해야 5평 남짓한 크기에 따로 주방도 없이 달랑 화장실 하나 있는 게 다였다. 때문에 평소에 요리를 해 먹을 때면 구비해 둔 인덕션을 사용하곤 했다.남자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여전히 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머리는 물에 젖어있었다.유진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수건 하나를 꺼내 들고 몸을 일으켰다.“허리 좀 숙여 봐요.”남자는 허리를 숙이는 대신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물기를 닦아드리려고요. 머리가 너무 축축하잖아요, 안 말리면 감기 걸리기 십상이에요. 다른 뜻은 없어요.”여전히 유진을 빤히 쳐다보던 남자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지금 나 걱정하는 거예요?”서늘한 목소리였지만 이상하리만치 듣기 좋았다.“네.”유진은 눈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제가 당신을 데려온 이상 걱정하는 건 당연하잖아요.”속눈썹이 살짝 떨리던 그는 이내 천천히 몸을 숙였다.그제야 유진은 수건을 그의 머리에 덮고 담담히 물기를 털어주었다.“이름이 뭐예요?”오랜 침묵 끝에 그의 입에서
임유진은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네, 원해요.”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좋아요.”이건 그녀가 처음 보는 남자의 미소였다. 매우 옅고 희미한 미소였지만 매우 아름다웠다.……출근해야 하는 유진은 그에게 5천원을 건네며 밥을 챙겨 먹으라고 했다.혁이 유진의 집에서 나오자 이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는 그를 보고 공손히 인사했다.“대표님.”“가자.”강지혁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검은색 벤츠에 올라탄 지혁은 손에 쥐고 있던 5천 원짜리 지폐를 한참이나 바라봤다.‘오랜만에 용돈을 받아보네. 그것도 5천원을.’그는 생각할수록 웃음이 새어 나왔다.“강 대표님, 어제 대표님과 같이 있던 여성분은 환경위생과의 계약직 직원입니다. 한 달 전부터 이곳에서 월세로 지내고 계시고, 2달 전에 출소하신 걸로 확인됩니다.”오랫동안 지혁의 개인 비서였던 고이준이 차에 오르기 바쁘게 보고하기 시작했다.“감옥?”“네. 이름은 임유진, 3년 전 음주 운전으로 진애령 씨를 죽인 장본인이자 소민준의 전 여자친구입니다. 그때 그 일로 3년 동안 징역을 살았고 변호사 자격까지 취소당했습니다.”이준은 지혁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지혁은 매년 이맘때면 남루한 차림으로 노숙자인 양 거리에 앉아있곤 했다.이는 지혁의 이상한 취미이자 꺼내면 안 될 금기에도 가깝다. 누구도 감히 묻지 못하는 금기.심지어 그의 곁에서 오랜 세월 함께 해온 이준마저 자기의 대표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몰랐다. 이건 어느 순간부터 그의 루틴이자 꼭 치러야 할 의식이었다. 이미 모두가 우러러보는 선망의 대상일지 언정 매년 이 행동은 반복됐다.추운 겨울밤, 지혁은 홀로 거리에 머물렀다.이준이 할 수 있는 일은 멀지 않은 곳에 차를 세우고 하루 종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밤 11시 35분만 되면 다시 그가 알던 강 대표님으로 돌아올 지혁을.하지만 모든 일에 예외가 있듯이, 어젯밤은 이변이 일어났다. 낯선 여자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 것이었다. 게다가
임유라의 낯빛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옆에서 듣고 있던 임정호는 망설임도 없이 임유진의 뺨을 때렸다.“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니? 네가 사고로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간 거로 우리 집 체면이 얼마나 깎였는지 알아? 네 인생 망쳤다고 동생 앞날도 망칠 셈이야?”임정호의 눈에는 유진에 대한 원망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가 유진 덕에 서씨 집안과 인연을 맺게 되었을 때 친구들과 친척들 사이에서 많은 부러움과 질투를 샀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 그 부러움은 모두 비아냥으로 변했고 우쭐대던 그도 체면이 완전히 깎여버렸다.유진의 한쪽 뺨은 이미 붉게 부어올랐지만, 눈빛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차분했다.“어머니 제사 때문에 왔는데, 보아하니 이곳에서 제사를 지낼 필요는 없는 것 같네요. 앞으로 이 집에 다시는 발 들일 일 없을 겁니다.”말을 마친 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집을 나섰다. 이 ‘집’에는 이제 그녀의 자리가 없었다.……유진이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왔을 때, 방 안은 캄캄했다. 불을 켠 뒤 그녀를 맞이하는 건 그저 쓸쓸한 적막감뿐이었다.5평 남짓한 방은 아무도 없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혁이 씨는 간 건가? 결국 또 혼자구나.’유진은 문득 공허함을 느꼈다.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닫으려고 몸을 살짝 돌렸을 때,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그림자에 멍해졌다.‘혁이 씨잖아!’그는 여전히 어제와 똑같은 남루한 옷차림으로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두꺼운 앞머리가 얼굴을 반 정도 가려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유진은 그 앞머리에 가려진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다.‘이런 사람이…… 정말 노숙자라고?’그녀는 아무런 친분도 없고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르는 그를 받아들인 것이 얼마나 충동적이고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어쩌면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나 왔어요.”차갑고 무심한 목소리였지만 그녀에겐 그저 듣기 좋은 빗소리와 같았다.
“그야…….”임유진은 손에 들고 있던 한 입 남은 찐빵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맛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예전 같았으면 맛없다고 투정 부렸을 테지만, 지금 그녀에게 맛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배를 채우면 되는 거였다.“우리는 많이 닮았으니까? 이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발버둥 치고 있는 사람이잖아. 어쩌면 그 누구도 우리를 원하지 않을 거고, 관심을 주지 않을 테지만, 적어도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말을 마친 그녀는 강지혁을 향해 살짝 미소 지었다. 희망과 기대 속에 김장감도 섞여 있었다.“그런가? 하긴, 우리가 비슷한 부류긴 하지…….”진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지만, 그의 눈은 마치 덫에 걸린 동물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진혁에게는 하루하루가 지루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가질 수 있는 그에게 삶은 아무런 재미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유진의 말은 꽤 흥미로운 게임으로 다가왔다.“누나.”그는 유진이 그토록 바라던 단어를 입 밖으로 꺼냈다.순간, 유진의 미소는 봄에 핀 꽃들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저녁을 먹고 난 뒤, 유진은 지혁을 데리고 야시장으로 가, 그가 입을 옷을 샀다. 분명 세일하는 싼 옷을 골랐지만 금액은 10만원을 훌쩍 넘었다.하지만 유진은 뿌듯한 마음으로 지혁에게 새 패딩을 입혀줬다.“따뜻하지?”“응.”지혁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자신과 머리 하나 정도 차이가 나는 아담한 유진을 바라봤다.“사실 안 사줘도 돼. 원래 있던 옷으로도 충분해.”“충분해도 새 옷을 입을 순 있잖아. 물론 돈이 없어서 많이는 못 사주지만, 적어도 너한테 옷 한 벌 정도는 사줄 수 있거든?”“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진혁은 나지막이 물었다.“그야 내가 네 누나니까.”유진은 싱긋 웃으며 지혁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우연히 닿은 차가운 그의 손에 유진은 양손으로 감싸 입김을 불어주며 이리저리 비벼댔다.“손이 너무 차가운데? 이렇게 문지르다 보면 좀 따뜻해질 거야.”스스럼없는 여자의 행동에 지혁은 약간 굳어버렸고
“그딴 영광 필요 없어.”임유진의 말에 하 감독은 술기운을 빌려 그녀에게 달려들어 뺨을 갈겼다.“내가 마시라면 마실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비싼 척은!”이윽고 욕설을 퍼붓더니 옆에 놓인 와인병을 들어 유진의 입에 마구 부어 넣었다.유진은 상대방을 밀쳐내려고 애썼지만, 여자 혼자서 건장한 남자를 힘으로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임유라까지 옆에서 그를 돕고 있었으니.하 감독은 유라의 눈치 있는 행동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유라 씨, 가만 보면 참 기특하다니까. 내가 유라 씨 분량 꼭 늘려준다. 총감독님한테는 내가 말 잘해볼게.”그 말에 임유라는 더 신이 나서 열심히 옆에서 도왔다.“하 감독님, 감사합니다. 저희 언니가 이런 데 좀 서툴러서 그러니 감독님이 이해해주세요.”한편, 유진은 자기가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도 몰랐다. 주량이 약하다 못해 거의 알코올 쓰레기라고도 불리었기에 벌써 술에 취해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하지만 의식이 꺼지지 않도록 본인을 통제하려고 노력했다.“나…… 나 집에 갈래…….”“그래, 이따가 데려다줄게.”하 감독은 술에 취해 나른해진 그녀를 얼른 끌어안았다.유진은 화려한 미녀는 아니지만 일전에 소민준의 여자친구였다는 것만 생각하면 하 감독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하지만 그때, 하 감독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솔직히 전화를 무시하려고도 했지만, 액정에 뜬 총감독의 이름을 보는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수신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총감독은 그의 큰 형인 데다 그가 감독의 자리를 꿰찬 것도 총감독인 형이 힘을 실어준 덕분이었다.하지만 그가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급기야 호흡마저 가빠졌다.“그…… 그럴 리가 없어. 이, 이 여자…… 이 여자는 환경미화원인 데다 백도 없다고. 전 남자친구인 소민준과도 헤어진 지가 언젠데, 게다가 지금 소민준은 약혼녀까지 있잖아.”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자기 여자친구가 환경미화원으로 길바닥 청소나 하는
“아니.”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강지혁의 뇌리에는 어제의 일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임유진을 침대에 눕힐 때, 유진이 갑자기 자기를 깔아 눕히던 기억.그 순간만 떠올리면 놀랍기만 하다. 자기가 방심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 만약 상대가 지혁의 목숨을 노렸다면 아마 반항도 못 하고 바로 죽었을 거다.언제나 경계심이 많던 지혁이었기에 자신의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때, 그가 다시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유진은 두 손으로 그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대고 눈을 덮고 있던 앞머리를 들어 올리고는 두 눈을 소중하다는 듯 어루만졌다.“혁아, 너 눈 진짜 예뻐…… 마음에 들어…… 좋아…….”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잇따라 귓가에 들려왔다.“좋다고?”이 단어는 그가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들었던 단어라 낯설지 않았다. 여자들은 다 지혁에게 좋아한다 눈이 마음에 든다 등과 같은 말을 해왔었으니까.지혁의 두 눈은 아마 유일하게 어머니를 닮은 부분일 거다.그리고 지혁이 어렸을 때, 지혁의 아버지는 매번 지혁의 눈을 멍하니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리곤 했다.“이런 눈은 다정해 보이지만 제일 매정해. 혁이 넌 앞으로 다정할지 매정할지 모르겠네.” 하고 말이다.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유진의 대답이 들려왔다.“응…… 왜냐하면…… 딸꾹…… 아주 맑고 깨끗해.”‘깨끗하다고?’지혁은 피식 웃었다. 지혁의 눈이 깨끗하다고 말해준 사람은 유진이 처음이다.“마치…… 죄악에 물들지 않은 것처럼…… 엄청 깨끗해.”유진은 술에 취한 모습으로 자기의 얼굴을 지혁의 얼굴에 바싹 붙인 채로 읊조렸다.“혁아, 무서워하지 마…… 내가…… 너 보호해 줄게…….”그리고 말을 채 끝마치지도 않고 지혁의 가슴에 엎드려 잠들어 버렸다.‘날 보호한다고? 자기도 보호하지 못하면서 누가 누굴 보호한다고 그래? 진짜 바본가?’“아무 짓도 안 했어. 그냥 고꾸라져 자던데?”지혁은 어제의 기억을 접어두고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그리고 그 말을 들은 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뭘 자꾸 사과하라는 거야? 공수진이 짠 판에 놀아난 건 나야. 사과받아야 할 사람은 나라고. 이경빈, 너 정말 이번 일이 내 잘못이라고 생각해?”“수작 피우지 마. 오늘 넌 네 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 해!”이경빈의 말에 탁유미가 피식 웃었다.“못 본 새에 꼭두각시가 다 됐구나. 저들이 뭐라고 하면 그저 곧이곧대로 믿는 거야? 이경빈, 공수진이 네 목숨을 살려줬다고 했지? 아니, 공수진은 아무것도 안 했어. 네가 지금 멀쩡히 살아있는 것에 공수진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됐다고!”탁유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공씨 부부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느긋하게 물을 마시고 있던 공수진도 그 말을 듣고는 하마터면 손에 든 물컵을 떨어트릴 뻔했다.‘설마 탁유미 저게 뭘 알고 말하는 건가...?’“경빈 씨... 탁유미 씨 왜 저래요? 나는 지금 탁유미 씨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공수진은 창백한 얼굴로 한껏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이경빈을 바라보았다.이에 이경빈은 공수진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녀를 안심시켰다.“아무것도 아니야. 궁지에 몰려서 하는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그때 공한철이 탁유미 쪽으로 다가가더니 그대로 그녀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이게 진짜! 그래도 애 엄마라고 봐줬더니 어디서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지껄여? 너 같은 건 평생 감옥에서 썩었어야 했어!”공한철은 말을 마친 후 고개를 돌려 탁유미를 제압한 두 남성에게 소리를 질렀다.“빨리 무릎 꿇리지 않고 뭐해?!”그 말에 두 남성은 이경빈을 바라보았고 이경빈은 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명의 부하직원은 이경빈의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손에 힘을 가해 그대로 탁유미의 상체를 아래로 찍어눌렀다.다리에 힘을 주어 조금이나마 버티던 탁유미는 이내 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얼마나 세게 꿇었는지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전달해오는 듯했다.탁유미는 무릎이 아플 것이 분명한데도 마음의 고통과
하지만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사과하고 싶지 않다.사과를 하면 공수진을 질투해 나쁜 마음을 먹고 일부러 계단에서 밀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니까.만약 그렇게 되면 윤이 앞에서는 평생 머리를 들지 못하게 된다.이경빈은 탁유미의 고요함에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사실 그녀가 조용해졌으니 이제는 그녀와 닿고 있는 손을 거두어들여야 마땅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머리의 통제를 벗어난 듯 그녀의 조금 차가운 볼에서 떠날 줄을 몰랐고 심지어는 이 감각을 더 느끼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보였다.탁유미는 얼굴이 확연히 말라 있었고 피부도 백옥같았던 예전과는 달리 조금 타 있었으며 촉감도 조금 거칠었다.하지만 청초하고도 수려한 얼굴 윤곽은 여전했으며 예쁘게 내린 눈썹과 작고 앙증맞은 코, 그리고 눈을 감으면 더 훤히 보이는 풍성한 속눈썹도 예전과 하나 다를 것 없었다.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마치 인형처럼 가만히 있는 모습에 이경빈은 한참을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차량이 병원 입구에 다 도착해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손을 거두어들였다.“나는 사과 안 해.”차 문이 열린 순간 탁유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그 말에 이경빈은 강경한 태도로 그녀를 차에서 끌어냈다.“그건 네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탁유미는 결국 이경빈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공수진의 병실에 데려와 졌다.병실 안에는 공수진은 물론이고 그녀의 부모님도 함께 있었다.“경빈 씨... 탁유미 씨는 왜 데리고 온 거예요?”공수진이 병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번 일 이대로 넘길 생각 없다고 했잖아.”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다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또다시 감옥에 들어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지금 당장 사과해!”탁유미는 차가운 눈빛으로 병실 안을 쭉 훑어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난 분명히 말했어. 사과 같은 거 안 한다고.”그 말에 공수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윤이가 너 보러 감옥으로 면회 가기를 바라는 거야? 그래?”잔뜩 분노한 이경빈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공수진을 믿는 이유가 뭐야? 너한테 골수를 기증해줘서? 그것 때문에 네가 살 수 있게 돼서?”탁유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경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그 사실은 이씨 가문과 공씨 가문밖에 모르는 일이다.“만약 널 구한 사람이 공수진이 아니라면 믿을 거야?”“탁유미, 이제는 정말 질린다. 감옥살이 한번 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이경빈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네가 그 일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잘 모르지만 경고하는데 나랑 수진이 사이를 이간질하지 마.”이경빈은 차가운 얼굴로 탁유미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았다.“왜, 이번에는 날 구한 게 수진이가 아니라 너라는 말이라도 하게? 꿈도 꾸지 마. 내가 지켜줘야 할 여자는 수진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수진이야. 너 따위가 들어올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알아 들어?”그 말에 탁유미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하하하하.”그녀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그만해.”이경빈은 그녀의 웃음소리가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하지만 탁유미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고 이제는 눈물까지 보였다.“그만하라고! 내 말 안 들려?”이경빈은 턱을 잡았던 손으로 이번에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그는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웃음소리가 이상하리만큼 심장을 찔러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그의 손바닥에 닿은 그녀의 입술은 조금 서늘했다.이경빈은 그제야 자신과 닿아있는 그녀의 피부가 차가운 것을 알아챘다.그리고 그녀의 얼굴은 지금 혈색 하나 돌지 않았고 무척이나 창백했다.두 눈이 마주치고 탁유미는 이경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녀의 눈은 냉랭하고 또 차가웠으며 눈가에는 아까 웃어서 생긴 눈물방울이 맺혀있었다.이경빈은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둔기 같은 것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심장이 조여오고 호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탁유미의 두 눈을 보면 꼭 자신 같은 건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서 튕겨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러면 지금 그녀의 마음을 차지 하고 있는 사
윤이가 들으면 안 되는 말이었다!“엄마, 아빠는... 윤이를 싫어하는 거예요?”그때 아이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까만 눈동자가 이경빈을 한번 본 후 다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이경빈은 아이의 눈빛을 받는 순간 자신이 무척 초라하게 느껴졌다.아이의 눈빛에는 더 이상 그를 향한 애정과 사랑은 없었다. 그저 두려움과 상처만이 남아 있었다.이경빈은 그제야 자신이 뭐라고 했는지 깨닫고 뒤에 있던 비서에게 소리쳤다.“윤이를 뒤로 데려가!”그 말에 부하 직원이 다가와 윤이를 번쩍 들었고 윤이는 이에 발버둥 치며 부하 직원의 가슴팍을 두드렸다.“윤이한테 뭐 하려는 거야! 당장 안 내려놔?!”분노한 탁유미가 아이를 빼앗으려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경빈이 팔을 꽉 잡고 있는 바람에 다가갈 수가 없었다.“윤이는 내 아들이야. 윤이를 다치게 하지 않아. 그러니까 핑계 그만 대고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서 수진이한테 사과해!”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그대로 탁유미의 팔을 부여잡고 놀이터 입구로 향했다.그는 차로 향하는 길 부하 직원에게 뒷수습을 맡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두 사람이 소리치며 화를 내는 바람에 이미 많은 이목이 쏠렸으니까.탁유미는 이경빈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휘청거리며 결국 놀이터 밖에 있는 차량 옆으로까지 왔다.그녀는 윤이가 이경빈의 부하 직원의 손에 의해 다른 쪽으로 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경빈, 윤이를 대체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 만약 윤이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는 내 모든 걸 걸고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탁유미는 무력한 자신이 한스러웠고 아이를 다른 곳으로 데려간 이경빈이 원망스러웠다.차에 올라탔는데도 이경빈은 여전히 그녀의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말했지. 윤이를 다치게 하는 일은 없다고. 윤이는 집으로 보내주라고 했어. 너도 윤이한테 사과하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을 거 아니야. 아니면 다시 윤이를 불러올까? 윤이가 네가 한 짓을 낱낱이 알게 돼야 속이 시원하겠어?”이경빈은 기사에게 병원으로
아무리 아빠라고 해도 엄마를 괴롭히는 건 용서할 수가 없다.이경빈은 잔뜩 가라앉은 얼굴로 윤이에게 말했다.“윤이야, 비켜. 엄마는 큰 잘못을 했어. 그래서 지금 당장 사과하러 가야 해.”“싫어요. 엄마는 잘못한 거 없어요! 그런데 왜 사과를 해요.”윤이가 말했다.“엄마는 그저 그 아줌마의 손을 살짝 밀쳤을 뿐이에요. 그랬는데 아줌마가 갑자기 뒤로 넘어가 넘어진 거라고요! 엄마는 그저 그 아줌마가 내 볼을 만지는 걸 막아준 것뿐이에요! 엄마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윤이는 공수진을 좋아하지 않았다.아니, 싫어했다.매번 미소를 지어주고는 있지만 그 눈빛이 묘하게 섬뜩하고 또 무서웠다.윤이는 아직 아이이기는 하지만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과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 정도는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하지만 탁유미의 억울함을 밝히려 한 아이의 말은 되레 이경빈의 심기만 건드리고 말았다.“탁유미, 입을 열 때마다 아이를 위한다고 하더니 이딴 식으로 교육했어? 아이한테까지 거짓말을 하게 했냐고! 너, 그 룸에 CCTV가 있었던 거 모르지? 수진이가 윤이 볼을 어루만지려고 한 걸 네가 밀쳐버린 걸 내가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해? 너는 그저 가볍게 밀친 거겠지만 네 그 행동으로 수진이는 또다시 아이를 잃었어. 너, 수진이가 아이를 낳으면 윤이가 설 자리가 없어질 것 같아서 그런 거지? 그래서 밀쳐버린 거지?”이경빈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차갑고 또 날카로웠다.탁유미는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사실 그녀는 이경빈이 오해하든 말든 욕설을 퍼붓든 말든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지만 윤이 앞에서 이런 말을 내뱉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이경빈은 지금 공수진의 일 때문에 이성을 잃어 유산이란 말을 계속해서 들먹이며 그 말을 듣게 될 윤이의 생각 같은 건 조금도 하지 않고 있다.탁유미는 아이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는 걸 원하지 않아 윤이의 인공와우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그걸 떼어내기도 전에 이경빈의 말소리가 들려왔다.“나한테 양육권을 넘기
사진을 한 장 옆으로 넘기자 이번에는 그녀를 포함한 세 사람의 사진이 보였다.윤이는 놀이공원에서 돌아온 뒤로 시간이 날 때마다 탁유미의 휴대폰을 들고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바라보았다.사진을 보는 아이의 얼굴에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그 모습에 탁유미는 사진을 지우려다가도 결국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탁유미는 시선을 내려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세 사람의 사진을 바라보았다.윤이는 활짝 웃고 있었고 그녀는 안전바를 꼭 잡은 채 무언가를 참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으로 보아 당시 통증이 일었던 게 분명해 보였다.그리고 이경빈은 고개를 돌린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아마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그녀를 걱정해서 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실상은 증오해 마지않는 관계인데 말이다.두 사람은 같은 회전목마를 타고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마음의 거리는 하늘과 땅처럼 멀었다.이대로 이경빈과는 죽을 때까지 평생 다시는 보지 않기를 그녀는 진심으로 바랐다.하지만 그 생각을 하자마자 윤이가 큰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아빠!”그 목소리에 탁유미가 고개를 들어보니 윤이가 활짝 웃으며 이경빈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이경빈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탁유미는 이쪽으로 걸어오는 이경빈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이경빈은 윤이가 코앞까지 다가왔는데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계속해서 성큼성큼 걸어왔다.얼음장 같은 그의 얼굴에 탁유미는 순간 불안감이 밀려왔다.아니나 다를까 이경빈은 탁유미의 바로 앞에 서더니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당장 나랑 같이 병원으로 가. 가서 수진이한테 사과해. 수진이가 너 때문에 또 유산을 해버렸어. 3개월 된 아이가 그렇게 또다시 수진이 뱃속에서 사라졌다고!”탁유미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공수진은 또다시 같은 판을 짰다.공수진은 이번에도 또다시 탁유미를 가해자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다음날.오늘은 토요일이라 윤이는 유치원이 아닌 집에 있었다.“엄마, 나 윤이 데리고 놀이터로 가서 놀고 올게요.”탁유미가 김수영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러지 말고 집에서 좀 쉬어.”김수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탁유미는 평소 일 때문에 항상 늦게 잤기에 김수영은 늘 그런 딸을 대신에 오전이면 자신이 윤이를 데리고 나가 놀았다.“괜찮아요. 윤이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요.”탁유미는 지금 1분 1초가 아쉬웠다.이에 감수영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그럼 점심 맛있게 해놓을 테니까 늦지 않게 돌아와. 네가 좋아하는 거로 해둘게.”“네.”탁유미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윤이를 데리고 밖으로 향했다.주말이라 그런지 놀이터에는 아이들 데리고 놀러 나온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다.평소 윤이는 놀이터에 도착하면 항상 또래 아이와 함께 신나게 같이 놀았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친구가 먼저 다가오는데도 고개를 푹 숙인 채 고민이 많은 얼굴로 탁유미의 옆에 앉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윤이 왜 그래? 왜 친구랑 안 놀아?”탁유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엄마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죠?”윤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국에는 그녀를 향해 이 질문을 던졌다.어제 룸에서 들었던 말로 여태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이제 고작 4살이라고는 하나 나쁜 것과 좋은 것 정도는 윤이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는 꽤 예민한 구석이 있었기에 분위기만 봐도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탁유미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응, 엄마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그녀는 아이의 얼굴을 조목조목 훑어보았다.윤이는 이경빈을 많이 닮았지만 영롱한 두 눈과 웃을 때의 느낌은 그녀 판박이였다.다만 근 몇 년간 탁유미는 먹고 사는데 바빠 좀처럼 웃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윤이만큼은 앞으로 많이 웃기를 바라며 자신 때문에 슬퍼하거나 움츠러들지는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엄마 말 기억해. 엄마는 그 누구도 해한 적이 없어. 엄마
당시 이경빈은 누군가를 배신했다는 죄책감 같은 것이 들어 바로 눈을 옆으로 돌렸다.하지만 곧바로 자신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배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그는 곧 있으면 공수진과 부부가 되고 부부 사이에 잠자리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게다가 그는 이미 탁유미가 감옥으로 들어가기 전에 공수진과 잠자리를 한 적도 있었고 말이다.물론 탁유미가 감옥에 들어간 뒤로는 계속해서 혼자 잠들었다.공수진과는 연인 사이를 넘어 결혼 얘기까지 오가던 상태였는데도 이상하게 공수진과 잠자리를 하려고 하면 이상한 죄책감이 들었다.그조차도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탁유미 때문일까? 말도 안 된다.탁유미의 존재가 이토록 큰 영향을 줄 수 있을 리가 없다.재판장에서 증인으로 나서 증언까지 했는데 아직 그 여자에게 마음이 남아 있을 리 없다.“아이고, 이걸 어째! 우리 수진이가 또다시 아이를...!”한영애는 공수진의 손을 잡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그 빌어먹을 것이 또다시 우리 수진이 아이를 사라지게 했어! 두 아이 모두 탁유미 그것 때문에! 우리 수진이 불쌍해서 어째...!”“엄마... 흡... 그만 해요...”공수진은 가뜩이나 수술을 막 하고 난 뒤라 얼굴이 창백한데 거기에 눈물까지 범벅이 되니 가엽기 그지없어 보였다.“임신이 힘든 몸이 된 후로 찾아온 기적적인 아이를 또다시 탁유미 때문에 잃어버렸는데 내가 어떻게 그만해! 분명히 일부러 그랬을 거야! 네가 아이를 낳으면 자기 아들이 나중에 이씨 가문을 물려받지 못할까 봐, 그래서 미리 수를 쓴 게 분명해!”이경빈은 그 말에 몸을 휘청였다.“탁유미도 알고 있었습니까? 수진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수진이가 윤이한테 이제 곧 있으면 네 동생이 생긴다고 했어. 오늘 수진이가 윤이를 데리고 우리를 만나러 온 것도 앞으로 자기 아들이 될 아이니까 잘 봐달라고 데리고 온 거였어. 그런데 탁유미 그게... 우리 수진이를...!”한영애는 마치 이 자리에 탁유미가 있었다면 씹
이경빈은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얼른 공수진을 안아 들고 밖으로 나섰다.그리고 공한철과 한영애는 독기 어린 눈으로 탁유미에게 모진 말을 내뱉었다.“이번 일 절대 쉽게 안 넘어갈 거다. 우리 수진이는 너랑 달리 무척이나 소중한 아이니까! 반드시 너한테 책임을 물을 거야!”탁유미는 그들에게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면서 두 손으로는 계속해서 아이를 제 품에 끌어안으며 악의에 가득 찬 인간들을 보지 못하게 했다.윤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탁유미는 진이 다 빠지는 느낌이었다.김수영은 윤이가 무사한 걸 보더니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아이고, 다행이야. 우리 윤이가 다치지 않아 정말 다행이야.”그녀는 집에서 탁유미와 윤이가 무사히 돌아오길 빌고 또 빌었다.탁유미는 그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며 안방 쪽으로 향했다.“엄마, 잠깐 윤이 좀 봐줘요. 나는 일단 옷 좀... 갈아입어야겠어요.”김수영은 탁유미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복부를 꽉 누르고 있는 것을 보며 통증이 또다시 시작됐다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그래그래. 얼른 들어가.”탁유미는 윤이 앞에서 아픈 티를 내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김수영은 얼른 그녀를 방으로 보냈다.탁유미는 방으로 들어간 후 병원에서 받은 진통제를 두 알 복용했다.그러고는 침대 위에 새우 자세로 누워 고통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오늘 일은 이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공씨 집안에서 이렇게까지 공을 들였다는 건 그녀를 완전히 제거해버리겠다는 뜻이니까.하지만 그걸 알고 있다고 해도 지금 이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게다가 한 달 정도 뒤에는 직접 윤이를 이경빈에게 보내줘야만 한다.이씨 가문이 정말 윤이를 지켜줄 수 있을까?공씨 가문 쪽에서 아이를 없애려고 들 텐데 정말 이경빈이 제대로 지켜줄 수 있을까?윤이는 아직 어려서 자기 몸을 지킬 능력이 없다.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어떻게 하면 죽기 전에 아이를 지켜줄 수 있지?엄마로서 제 아들 하나 보호해주지 못한다니... 정말 무능력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