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 무슨! 내 목소리를 흉내 시켜서 녹음이라도 한 거겠지!”공수진은 마음속으로 그럴 리가 없다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그래, 아무도 모를 거야. 내가 다 손을 써놨는데 어떻게 알겠어. 그냥 해본 소리일 게 분명해!’하지만 공수진의 바람과 달리 임유진은 그저 아무 말이나 뱉은 것이 아니었다.“흉내를 내는 건지 아니면 실제 그쪽 목소리인지는 확인해보면 알게 되겠지. 생각을 좀 해봐. 내가 어떻게 이런 말을 확신을 가지고 내뱉을 수 있는 건지.”임유진은 말을 마친 후 다시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공수진 씨 대신 복수해주니까 좋아요? 언니를 벼랑 끝까지 내몰아보니까 좋냐고요. 당신이 언니한테 지은 죄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겁니다.”임유진은 발걸음을 돌려 강지혁과 함께 병실을 나갔다.그리고 강지혁의 경호원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밖으로 향했다.이경빈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릿속은 온통 강제로 무릎이 꿇린 채 머리를 바닥에 세게 박고 있던 탁유미의 모습뿐이었다.“너를 증오해.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증오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경빈, 네가 그걸 해냈어. 나는 널 절대 용서 안 해. 죽는 순간까지 널 증오할 거야!”탁유미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아직도 머리에서 맴돌았다.만약 그때 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두 번째 목숨을 부여해준 사람이 정말 탁유미라면 그는...이경빈은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었다.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경빈 씨!”그때 공수진이 눈물을 머금은 채 억울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그를 불렀다.“임유진 그 사람은 대체 나한테 왜 그래요? 경빈 씨, 그 여자 말 믿는 거 아니죠?”이경빈은 뻣뻣하게 굳어있던 몸을 움직여 공수진을 바라보았다.공수진은 여전히 한 떨기 꽃처럼 무척이나 가녀리고 또 가여워 보였다.예전이었으면 그런 그녀를 품에 안아주고 위로를 건넸겠지만 지금은...“그때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준 사람 정말 너 맞아? 탁유미가 아니고?”이경빈은 두 눈을 공수진의 얼굴에 고정한 채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공수
만약 임유진이 정말 사실을 얘기한 거라면 그때는 이경빈 스스로도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이경빈이 떠난 후 병실에 남은 공씨 부부는 진이 다 빠진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어떡하지?”한영애가 두 손을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만약 경빈이나 자기한테 골수를 기증해준 게 탁유미 그 여자라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엄마!”그러자 공수진이 큰소리로 그녀에게 외쳤다.“재수 없는 소리 좀 그만 해요. 경빈 씨한테 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은 나예요. 병원 기록에 그렇게 쓰여 있는데 고작 통화 녹음으로 경빈 씨가 넘어갈 것 같아요? 녹음 같은 건 얼마든지 다른 사람 목소리로 흉내 낼 수 있다는 걸 경빈 씨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이 말은 한영애에게 들려주는 말이기도 함과 동시에 자기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말이기도 했다.‘그래. 병원 기록에 내 이름이 쓰여 있는 한 상황을 뒤집기는 어려워. 누가 그깟 통화 녹음으로 내가 아니라 탁유미가 했다고 확신할 수 있겠어. 불안해하지 마, 공수진!’한영애는 딸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맞아. 경빈이한테 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은 너야. 수진이 너야!”한편 공한철의 얼굴은 무척이나 어두웠다.이경빈이 쉽게 임유진의 말을 믿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의 말을 백 프로 믿을 거라는 생각 또한 하지 않으니까.아마 이경빈의 성격대로라면 사람을 풀어 조사를 먼저 할 것이 분명했다.“주원호가 해외로 나갈 거라는 건 확실한 얘기야?”“네, 나한테 그렇게 얘기했어요.”공수진은 주원호 생각만 하면 이가 갈렸다.그날 주원호의 꼬드김에 넘어가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임신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아이를 가진 일을 덮기 위해 이런 쇼도 벌이지 않았을 테니까.“일단은 주원호가 해외로 뜨기 전까지 계속 주시해. 허튼짓하게 내버려 두지 말라고. 알겠어?”주원호는 시한폭탄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기에 하루빨리 해외로 보내야 했다.“네, 알겠어요.”“여보... 우리 수진이랑 경빈
사실 임유진은 내일쯤 증거들을 가지고 이경빈을 찾아가려고 했었다.강지혁 덕에 드디어 탁유미가 이경빈을 살렸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그런데 예상치도 못하게 바로 오늘 일이 터져버렸다.몇 시간 전, 임유진은 자료를 정리하다가 윤이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얼른 강지혁에게 연락해 탁유미가 끌려간 곳이 어딘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만약 조금만 더 늦게 도착했으면 탁유미는 아마 이경빈과 공씨 일가 사람들에 의해 더 한 수모를 겪었을 것이다.“혁아, 네가 전에 그랬지. 이경빈은 아마 정말 언니를 사랑했을 거라고. 그런데 사랑했던 여자한테 어떻게 이런 짓을 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할 수 있냐고...”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너무 속상해하지 마. 탁유미 씨가 더 이상 이경빈과 공씨 일가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병실 밖에 경호원을 붙여둘게.”“너무 화가 나.”임유진이 강지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어떻게 언니를 벼랑 끝까지 내몰 수가 있어?”이경빈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탁유미를 가엽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런 짓은 못 했을 것이다.“골수 기증을 해준 게 탁유미 씨라는 걸 들었으니 아마 지금쯤 조사를 시작했을 거야.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때는 평생 후회 속에서 살게 되겠지.”“후회?”임유진이 코웃음을 쳤다.“고작 후회로 되겠어? 이경빈은 언니 인생을 망치고 언니한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는데? 심지어 상처뿐만이 아니라 모멸감까지 줬어! 그런데 평생 후회한다고 그게 없던 일이 돼?!”강지혁은 분노에 찬 임유진의 말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어쩐지 날이 선 그녀의 말이 자신에게 향하는 말인 것 같아 심장에 욱신거렸다.“이경빈이 탁유미 씨한테 간 기증을 해주길 바랐잖아. 후회하게 되면 적어도 간 기증을 해주겠다는 얘기는 들을 수 있겠지.”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생각에 잠겼다.탁유미의 혈액형은 흔치 않은 혈액형이라 매칭되는 사람을 찾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그런데 만약 이경빈이
하지만 그 진실을 믿을 용기가 없었다.믿어버리면 그때는 모든 게 다 무너질 것 같았으니까.만약 탁유미가 정말 기증자가 맞다면 그는 그간 정말 못 할 짓을 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탁유미에게 일부러 접근해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었고 또 그녀에게 복수하겠다고 증인을 자처해 그녀를 감방에 보내버렸고 심지어는 그녀가 힘들게 낳은 윤이도 빼앗겠다며 난리를 피웠으니까.이경빈은 그간의 행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날 때마다 심장이 욱신거리며 아파 났다.이경빈은 그 뒤로 몇 시간을 내리 호텔 방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가만히 소파에 앉아있었다.그때 벨이 울리고 그 소리에 이경빈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윽!”같은 자세를 계속 유지했더니 머리가 띵한 것이 조금 어지러웠다.계속해서 울리는 벨 소리에 이경빈은 마른세수를 한번 하더니 터벅터벅 호텔 방 문으로 향했다.문을 열어보니 웬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이경빈 대표님 맞으시죠? 강 대표님 아내분께서 이걸 대신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남자의 말에 이경빈이 되물었다.“강 대표 아내가 누구죠?”“임유진 씨요.”이경빈은 남자의 대답에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강 대표와 결혼을 한 건가? 언제?’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제일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이경빈은 남자의 손에 들린 USB를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그래서 그 USB 안에 뭐가 들었다고 하던가요?”“음성 파일 두 개가 들어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대표님께서 궁금해하실 만할 내용이 들어있다고도 하셨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그가 궁금해할 만할 내용이라는 건... 그거 하나밖에 없었다.이경빈은 조금 떨리는 손으로 USB를 건네받은 다음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그는 불을 켜 방을 밝게 하더니 조금 허겁지겁 자신의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하지만 전원을 켤 때는 몇 초간 머뭇거렸다.그리고 전원을 켜고 USB를 노트북에 연결할 때는 손을 덜덜 떨며 USB를 바닥에 떨구기까지 했다.이경빈은 카펫 위에 떨어진 검은색 US
의사는 공수진에게 전화를 건 목적을 얘기했다.의사의 말이 끝이 난 후 곧바로 너무나도 익숙한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미안한데 나는 기증할 생각 없어요. 그때는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한번 등록해본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 알아봐요.”이건 공수진의 목소리였다.“네...? 저...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정말 간절하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환자입니다. 골수를 기증해준 후 얼마간 휴식을 취하고 몸조리를 잘하게 되면 몸도 금방 회복됩니다. 공수진 씨한테 절대 큰 부담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의사는 재밌을 것 같아서 등록해봤다는 그녀의 말에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그녀를 어떻게든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하지만 공수진은 그런 간절한 부탁에도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기증하기 싫다고요. 애초에 내가 등록을 안 했으면 어차피 그 환자는 죽을 목숨 아니었어요? 그럼 그냥 그게 팔자겠거니 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하세요. 그리고 내 몸에 부담이 되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그걸 어떻게 확신하죠? 후유증이 있을지 없을지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냐고요. 그 사람한테 기증했다가 내 몸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그쪽이 책임질 수 있어요? 기가 막혀서 진짜!”공수진의 단호한 말에 이경빈은 표정을 굳혔다.그녀의 말에는 일말의 정도 없었고 심지어 그녀는 일면식도 없는 환자에게 어차피 죽을 목숨 아니었냐는 막말까지 해댔다.공수진은 그의 생사 같은 건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물론 걱정이 될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거 압니다. 하지만 안전한 수술이고 수술 후 몸에 이상이 생기면 병원 측에서 어떻게든...”“사람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됐고 두 번 다시 전화하지 말아요. 알겠어요? 만약 또다시 나한테 전화하면 그때는 확 경찰에 신고해버릴 거니까!”공수진은 짜증을 내더니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이경빈은 뚜뚜뚜 소리와 함께 재생이 끝난 파일을 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정말 그때의 통화녹음 파일이 여태 남아있다고 해도 공수진의
이경빈은 노트북 화면을 미동도 없이 가만히 들여다보았다.하지만 그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세게 흔들리고 있었고 얼굴은 후회와 두려움, 그리고 고통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이경빈은 지금 마치 거대한 해일에 몸이 잠식된 듯 머리가 울렁거리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증거라고는 고작 두 개의 음성파일뿐이지만 그는 이미 그를 구한 사람이 누군지 확실히 깨달았다.왜... 왜 이제야 이 녹음 파일을 듣게 된 걸까.왜 공수진이 골수를 기증한 게 자신이라고 했을 때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대로 믿어버렸던 걸까.어떻게 그 말의 진위를 조사할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걸까.그때 이경빈의 머릿속으로 탁유미가 차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만약 널 구한 사람이 공수진이 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야?”그 말에 그는 뭐라고 대답했지?이경빈은 그때 자신과 공수진 사이를 이간질 말라고 하며 자신이 지켜야 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은 공수진이고 탁유미가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소리를 질렀다.심지어 그 뒤에는 억지로 탁유미를 병실까지 끌고 가 공씨 집안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머리까지 조아리게 했다.이경빈은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하지만 아무리 세게 내리쳐도 얼굴에서는 아무런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고 대신 심장 쪽이 욱신거리며 아파 왔다.“하하하... 하하...!”이경빈은 갑자기 소리 내 웃어버리더니 이내 뜨거운 눈물을 뚝뚝 흘렸다.대체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한 거지?왜 한 번도 탁유미를 믿어보려고 하지 않았지?탁유미는 아마 당시 차 안에서 마지막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그에게 공수진이 구한 게 아니라는 말을 꺼냈을 것이다.그런데 그는 그녀의 마지막 희망을 짓밟고 그녀의 발버둥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다.만약 그때 그녀의 말을 아주 조금이라도 믿어줬으면 탁유미는 공씨 집안 사람들 앞에서 자존심이 짓밟히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모멸감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탁유미의 말대로 그는 정말 등신이 맞았다.“하하하하...”이경빈은 세
탁유미는 김수영의 말에 그제야 의식을 잃기 전 상황이 떠올랐다.억지로 바닥에 머리가 조아려진 채 수모를 당하던 그때 임유진이 병실로 뛰어 들어와 그녀를 구했다.만약 임유진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아마 더 심한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그런데 유진 씨는 어떻게 병실로 찾아올 수 있었던 거지?”탁유미의 혼잣말에 김수영이 대답해주었다.“윤이가 유진 씨한테 전화를 걸었어. 웬 남자들에게 안겨 집으로 온 뒤에 윤이가 눈물을 흘리며 나한테 유진 이모한테 전화를 걸어 달라고 애원했거든.”탁유미는 그 말에 걱정 가득한 얼굴로 윤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고작 4살밖에 안 된 아이가 어떤 마음으로 임유진에게 전화를 걸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우리 윤이 많이 놀랐지? 엄마 이제 괜찮아. 봐봐. 멀쩡하잖아.”탁유미의 말에 윤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요... 윤이가 엄마를 지켰어야 했는데...”아이는 만약 자신이 어른이었다면 절대 엄마가 그렇게 끌려가게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윤이는 아직 어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엄마를 지키지조차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싫었다.왜 아빠는 엄마를 괴롭히는 거지?왜 아빠는 엄마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믿지 않는 거지?“아니, 엄마는 오늘 윤이 덕에 무사할 수 있었어. 윤이가 이모한테 전화를 걸어줘서 엄마가 이렇게 멀쩡할 수 있었던 거야. 윤이는 정말 최고야.”탁유미의 칭찬에도 윤이의 표정은 여전히 시무룩한 채로 전혀 풀리지 않았다.아이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결심한 얼굴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엄마, 나는 아빠 싫어요. 엄마만 있으면 돼요. 앞으로는 아빠 보고 싶다고 안 할게요. 그리고 앞으로는 윤이가 엄마 지켜줄게요! 빨리 커서 엄마 지켜줄게요!”탁유미는 그 말에 눈물을 글썽였다.할 수만 있다면 아이가 크는 모습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지켜봐 주고 싶었다.“응. 우리 윤이만 있으면 엄마는 무서울 게 없어.”윤이는 긴장이 풀린 것인지 두 눈을 비비적거리며 하품을
“네, 그럴게요.”탁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공수진의 유산 소식은 기사를 타고 빠르게 인터넷에 전파되었고 어느새 인기검색어에도 올라갔다.그리고 그녀의 유산 기사와 함께 누군가가 올린 동영상도 인기검색어에 올랐다.영상 속 공수진은 탁유미의 손에 의해 밀쳐진 후 테이블에 부딪혔고 그 뒤로 곧바로 배를 끌어안으며 고통을 호소했다.동영상을 올린 사람은 도저히 못 봐주겠어서 올리는 거라며 이 사건으로 영상 속 여자는 3개월 된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했다.그러자 몇 분 후 누군가가 영상 속 여자는 공씨 가문의 딸인 공수진이라며 그녀가 이경빈의 약혼녀라는 댓글을 달았다.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공수진을 밀친 사람이 탁유미라는 것을 알아냈고 탁유미가 전과자라는 사실까지 밝혀냈다.여론은 순식간에 공수진 쪽으로 기울었고 네티즌들은 탁유미에게 세상 빛도 보지 못한 아이를 죽인 악독한 살인마라며 갖은 욕을 퍼부었으며 심지어 누군가는 탁유미를 죽여버릴 거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공수진은 병상 위에 누운 채 사람들의 댓글을 지켜보며 비릿하게 웃었다.그녀는 지금 완벽한 피해자였다.가십거리라면 환장을 하는 일부 사람들은 이경빈과 엮인 여자로 인해 공수진이 두 번이나 유산했으니 그녀와 결혼하는 것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며 훈수를 뒀다.심지어 어떤 이들은 이강 그룹 회사 홈페이지로 들어가 얼른 공수진과 결혼하고 탁유미를 감옥에 보내버리라는 댓글까지 달았다.“여론이 우리 편인 이상 골수 기증자가 네가 아니어도 이경빈은 너랑 결혼할 수밖에 없을 거다.”공한철이 확신하며 말했다.“이경빈이 싫다고 해도 그 집 어른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 게다가 탁유미가 널 두 번이나 해하려고 했던 건 모두 사실이니까. 그리고 그중 한번은 이경빈이 직접 증언까지 해줬고 말이야.”“그런데 여보... 정말 이대로 결혼을 시켜도 괜찮을까요? 수진이가 행복할 수 있을까요?”한영애가 조금 걱정되는 얼굴로 물었다.“그럼 이대로 물러서자고? 결혼만 하면 모든 게 해결돼. 당신은 탁유미가 걸리는
그때 강지혁이 다가와 뒤에서 임유진을 감싸며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만약 그 어느 날 내가 너한테 큰 잘못을 저질러서 방금 이경빈이 그랬던 것처럼 울어버리면 너는 어떡할 거야? 용서해줄 거야?”임유진은 그 말에 실소를 터트렸다.“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런 가정을 왜 해. 그리고 네가 나한테 잘못할 질을 할 리가 없잖아.”“그냥 만약에... 만약에 내가 그러면 어떡할 거야?”강지혁은 고개를 살짝 들어 입술로 그녀의 귓불을 간지럽혔다.그는 임유진을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 그녀가 너무나도 무서웠다.임유진은 그의 뜨거운 숨결과 입술 촉감이 그대로 전해져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그녀는 진지한 얘기 중에 은근히 스킨십을 해오는 그가 괘씸한데도 또 그게 너무나도 유혹적이라 괜히 심술이 나 몸을 돌리고 그를 노려보았다.“용서해줄 거야? 아니면 탁유미 씨처럼 더 이상...”강지혁은 ‘더 이상 나와 엮이고 싶어 하지 않아 할 거야?’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아 결국 입을 다물었다.이딴 사소한 것을 신경 쓸 정도로 그는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면 늘 이렇게 겁쟁이가 되고 만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눈빛을 마주 보고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아련해졌다.임신하고 난 뒤 모성애가 폭발하기라도 한 건지 귀가 축 처진 강아지 같은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찡해 나며 당장이라도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못 살아 진짜. 너 이러다 나중에 아주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바로 울겠다? 그래도 아빠가 될 사람인데 그렇게 쉽게 눈물을 보이면 안 되지.”임유진은 두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하지만 만약 네가 정말 이경빈처럼 그렇게 울어버린다면 나는 아마... 매우 속상해할 거야. 어쩌면 그때는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다 용서해주겠다고 할지도 모르지.”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응, 꼭 용서해줘야 해. 약속한 거야.”
이경빈은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하지만 웃고 있다기에는 눈이 너무 슬퍼 보였다.“부럽네. 서로 옆에 딱 붙어 있잖아. 반면에 나랑 유미는...”강지혁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경빈은 잔뜩 취한 눈빛으로 강지혁을 바라보다 다시 임유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임유진 씨는 유미 친구잖아... 그러니까 말해줘. 내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유미가 내 간 기증을 받아들이고 수술을 받게 할 수 있는지...”임유진은 그의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네? 언니가 수술을 안 하겠대요? 아니, 이경빈 씨한테 간 기증을 안 받겠다고 했어요?”이경빈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나한테 뭔가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고 더 이상 나랑은 엮이기 싫다고 했어... 이대로라면 얼마 안가 죽는데도... 그래도 내 간은 싫대.”그는 탁유미가 살기를 원하고 있다. 용서는 둘째치고 일단 그녀가 목숨은 부지하기를 바라고 있다.그 말에 임유진의 얼굴이 한순간에 어두워졌다.탁유미가 살 방법은 현재로서는 간이식 수술밖에 없다. 그런데 거절이라니...임유진은 생각도 못 한 전개에 고민에 빠졌다.“뭐라고 말 좀 해봐. 임유진 씨 똑똑하잖아. 어떻게 하면 유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지 얘기 좀 해보라고!”이경빈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임유진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임유진은 그런 그가 안쓰럽기도 하고 또 그의 꼴이 화가 나기도 했다.“그러게 조금만 더 일찍 언니를 향한 마음을 깨닫지 그랬어요. 아니면 감옥에 보낸 것으로 복수를 끝냈으면 두 번 다시 찾지 말던가 왜 다시 나타나서 또 언니한테 상처를 줘요!”“그래... 내 탓이야...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등신이라 내 마음을 인정하지 않았어...”이경빈은 주먹을 말아쥐더니 이내 자신의 가슴팍을 퍽퍽 두드리기 시작했다.“날 증오한다고 했어... 유미가... 유미가...”이윽고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몇 초도 안 돼 얼굴 전체가 눈물로 뒤덮였다.지
“이경빈 씨가요?”임유진은 깜짝 놀라며 10시가 넘어가는 시계를 바라보았다.이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그것도 술에 취해서?“지금 바로 내려갈게요.”임유진은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잠깐.”그러자 강지혁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내가 만나고 올 테니까 넌 여기 있어.”“아니, 내가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아. 갑자기 찾아온 걸 보면 분명히 언니 일일 테니까.”임유진의 단호함에 강지혁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집사를 향해 말했다.“금방 내려갈 테니까 일단 안으로 들여.”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외투부터 걸쳐. 그리고 슬리퍼도 신고.”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임유진의 다리를 들어 슬리퍼를 신겨주었다.집사는 침실을 떠나기 전 그 모습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이 세상에 강지혁을 무릎 꿇릴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임유진밖에 없을 것이다.예로부터 강씨 집안 사람들은 극도로 비정하거나 극도로 감성적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강문철은 비정하다 못해 한여름에도 녹지 않을 얼음장 같은 사람이었고 그의 아들인 강선우는 지독한 낭만파로 사랑에 목을 맨 사람이었다.그리고 강지혁은 두 사람 중 하필이면 강선우를 닮았고 강선우처럼 한 여자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집사는 강문철이 젊었을 때부터 이 집에서 집사로 일했던 사람이라 강지혁은 강선우의 전철을 따르지 않고 임유진과 깨가 쏟아질 만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임유진은 고개를 숙인 채 슬리퍼를 신겨주는 강지혁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가족이 아닌 강지혁에게서 느끼게 될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다.임유진은 가만히 구경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강지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에 강지혁은 손을 잠깐 멈추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사람을 녹일 것 같은 그의 눈빛과 마주하니 어쩐지 세상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강지혁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이경빈은 혼이 다 빠진 듯한 얼굴로 차에 앉아 탁유미가 유치원에서 윤이를 데리고 나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이경빈이 아주 조금이라도 일찍 자신의 마음을 알아챘으면 어쩌면 지금쯤 탁유미 곁에 나란히 서서 함께 윤이를 데리러 갔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고 그들과 함께 있을 기회를 자기 발로 걷어찼다.이경빈은 두 모자를 이렇게도 시야 안에 꽉 담고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한 걸음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그의 복수는 언뜻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을 잃었으니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다.게다가 건강하게 태어났어야 했을 아이가 장애를 가진 채 태어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이경빈은 과거의 행동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욱신거리며 숨이 가빠왔다.언제쯤이면 이 고통이 나아질 수 있을지 그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어쩌면 이렇게 평생 고통 속에서 살다가 목숨을 거둘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고통이 조금은 줄어들지도 모른다.이경빈은 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께를 꽉 잡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강씨 저택.저녁 식사를 마친 후 강지혁은 임유진에게 족욕을 시켜준 다음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침대로 데려왔다.임유진은 마치 자신을 유리구슬처럼 대하는 그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그렇게까지 조심하지 않아도 돼. 아직 못 걸을 정도로 힘든 건 아니니까. 그리고 요즘 우리 아이들도 엄청 조용하고 말이야.”이제 그녀는 어느덧 5개월을 넘기고 있어 입덧도 가라앉고 잠도 잘 왔다.그리고 참으로 다행히도 정기 검진 결과도 늘 양호한 편이었고 아이들도 아주 얌전히 잘 자라주고 있었다.하지만 강지혁은 마치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특히 그녀의 배가 점점 불러오고 나서는 매일매일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며칠 전 임유진이 화장실이 가고 싶어 새벽에 잠에서 깼을 때 그녀는 강지혁이 자고 있는 줄 알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가 등 뒤에서 어디 가냐는 그의 말이 들려오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깜짝이야! 너 안 자고 있었어?!”강지혁의 목소리는 막 자
“내가... 그렇게도 싫어?”이경빈은 속으로 그녀가 아니라고 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의 귓가에 들려온 말은...“응. 더 이상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만약... 그날 내가 너를 병원으로 끌고 가지 않고 너를 공수진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조아리게 시키지 않았으면 나에게도 기회가 있었을까? 너한테 용서를 빌 기회가 있었을까...?”잔뜩 잠긴 그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하지만 탁유미의 얼굴은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네가 겪은 수모와 고통... 내가 돌려받을게. 내가 다 돌려받을 테니까 한 번만 용서해줘... 아니, 최소한 내 간을 거절하지는 말아줘!”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차가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탁유미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내려다보았다.설마 이경빈이 이렇게도 쉽게 무릎을 꿇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사람들이 언제 지나갈지도 모르는 밖에서 말이다.하지만 이내 그녀를 더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이경빈이 무릎을 꿇은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기 때문이다.한 번, 두 번, 세 번....바닥과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주민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주민들은 두 사람 근처를 지나가다가 이경빈이 머리를 조아린 것을 보고는 발걸음을 멈추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탁유미는 아직도 머리를 조아리는 이경빈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솔직히 놀랍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그도 그럴 것이 이경빈처럼 자존심이 강한 남자가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는 아니니까.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것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얼마나 세게 머리를 박은 건지 처음에는 그저 이마 쪽에 스치듯 껍질이 까지기만 했는데 이제는 슬슬 피가 나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바닥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기까지 했다.탁유미는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이런다고 내 마음이 달라지지는 않아. 나한테 정말 미안하다면
그 모든 것들이 다 그녀를 향한 사랑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당시의 이경빈은 몰랐다.“유미야, 사랑해.”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는 드디어 줄곧 마음속에 품어왔던 마음을 입 밖으로 꺼냈다.탁유미는 힘껏 반항하다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고는 마치 인형처럼 그의 품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에 이경빈은 더욱더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마치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사랑해. 줄곧 사랑하고 있었어. 이제야 전해서 미안해. 그때 네가 유리 파편을 네 복부에 찔러넣었을 때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어. 피를 흘리는 게 네가 아닌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면서 너무 무서웠어.”사실 그는 그때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어야 했다.“복수 때문에 눈이 멀어서 너를 향한 내 마음이 얼마나 큰지 몰랐어. 앞으로는 잘할게. 내 모든 걸 걸고 너를 지켜줄게! 네 억울함도 풀어주고 내 간도 너한테 줄게! 한 번으로 안 된다면 될 때까지 너한테 간을 기증할게!”이경빈은 탁유미가 더 이상 아프지 않고 멀쩡하게 살 수만 있다면 뭐든 해주고 싶었다.탁유미는 간 얘기에 조금 흠칫했다.‘...다 알고 온 거네.’사실 그녀도 이경빈에게 희망을 걸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쩌면 이라는 기대를 아주 조금은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의 말과 행동으로 그건 잘못된 기대고 잘못된 희망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나 이제 너 안 사랑해.”차가운 목소리가 이경빈의 귓가에 들려왔다.그 말을 듣는 순간 이경빈은 온몸이 굳어지며 심장 고동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경빈, 나 너 안 사랑해.”탁유미는 두 손으로 이경빈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이경빈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은 무서울 정도로 차분했다.“너는 그때 복수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척했어. 그리고 지금은 네 목숨을 구해줬다고 또다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어. 네 기분 하나로 쉽게 바뀔 사랑을 내가 원할 거라고 생각해?”이경빈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했다.“아니야...
탁유미는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경빈의 모습이 그저 우습게만 느껴졌다.모든 걸 망쳐놓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날 때려도 돼. 욕해도 돼. 벌을 줘도 돼. 네가 주는 벌이라면 달갑게 받을게. 과거의 내 행동과 언행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 나한테 그럴 기회를 줘. 그리고 널 곁에서 지켜주줄 수 있는 기회도...”“그만!”탁유미가 이경빈의 말을 끊었다.“이경빈, 네가 인간이면 나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공수진을 밀지 않았다고 내가 몇백 번을 말했는데도 너는 결국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어. 들어주려고 하지도 않았지. 네가 지금 이러는 건 골수를 기증해준 게 공수진이 아닌 나라는 걸 알아서야. 만약 널 구한 게 정말 공수진이었으면 너는 지금도 여전히 나한테 죄가 있다고 생각했을 거잖아. 내 말이 틀려?”이경빈은 그 말에 순간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이경빈, 네가 지금 이러는 건 그저 자기만족일 뿐이야. 나한테 사과라도 해야 네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이러는 거잖아. 내가 모를 것 같아? 난 너 용서 안 해. 네가 날 감옥에 보낸 것도 그 일로 감옥에서 감기에 걸려 어쩔 수 없이 감기약을 먹어 윤이가 청력을 잃은 것도, 나는 용서할 생각이 없어.”탁유미의 말에 이경빈은 휘청이며 옆에 있는 벽을 짚었다.당시 그녀를 감옥에 보낸 건 그에게는 그저 간단한 복수에 불과했지만 그녀에게는 모든 고난의 시작이었다.게다가 그 일 때문에 윤이의 청력이 사라진 거라니...‘대체 나는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보상하겠다고 했지? 아니, 넌 보상 못 해.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네가 하는 사과도 나한테는 그저 역겨울 뿐이야!”탁유미는 말을 마친 후 그를 지나쳐 빠르게 걸어갔다.하지만 얼마 못 가 이경빈에게 팔이 잡혀 그대로 그의 품속에 안기고 말았다.탁유미는 그의 냄새가 코를 확 덮치는 순간 마치 그에게 꽁꽁 둘러싸인 기분이 들었다.“뭐 하는 짓이야! 이거 안 놔?!”놓아
지금의 그는 탁유미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받고 싶었지만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를 몰랐다....탁유미는 김수영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후 강지혁이 붙여준 경호원 두 명에게 집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이만 가봐도 된다고 했다.작은 집이라 건장한 남성 두 명까지 들이게 되면 집이 꽉 찰 테니까.경호원 두 명이 떠난 후 김수영은 창밖을 힐끔 바라보았다.“저거 설마...”그녀는 창밖으로 보이는 이경빈의 차량에 미간을 찌푸렸다.“저거 이경빈 차 아니야? 기어이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엄마,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여기서 밤을 새우든 말든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잖아요.”탁유미의 태도는 무척이나 태연했다.“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런데 갑자기 왜 저래? 뭐 잘못 먹기라도 한 거야?”김수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공수진이 유산한 게 네 탓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고 해도 사과하려고 이렇게까지 할 인간은 아니잖아.”공수진 일은 비단 인터넷에서만 뜨거운 일이 아니었기에 가십거리에는 일절 관심이 없는 김수영도 공수진과 주원호 일에 대해 아주 잘 알게 되었다.“그것도 그거지만 아마 몇 년 전에 골수를 기증해준 게 나라는 걸 알게 돼서 저러는 걸 거예요.”“뭐?!”김수영은 그 말에 깜짝 놀라더니 이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이경빈이었어? 네가 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너한테서 받을 건 다 받아놓고 간 기증 좀 해달라니까 딱 잘라 거절한 인간이 쟤라고? 뭐 이런 배은망덕한 인간이 다 있어?!”김수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이경빈에게 따지려는 듯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엄마!”그러자 탁유미가 서둘러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난 괜찮으니까 그러지 마세요. 기증하겠다고 한 건 나예요.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고요. 이경빈이 간 기증을 거절했다고 한들 배신감이 들 이유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간이식 수술을 받는다고 해서 꼭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수술을 받고 또다시 재발해 수명이 오히려 단축된 케이스도 많아요.”탁유
이경빈은 이제야 그날 탁유미가 웃으며 고맙다고 했던 말의 의미가 뭔지 알아챘다.아주 조금의 감정마저 남지 않게 만든 그에게 철저하게 실망하고 그로 인해 그를 완전히 내려놓게 된 게 틀림없었다.정말 그는 너무나도 멍청한 사람이었다!차량이 멈춘 후 기사는 이경빈에게 도착했다고 하려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대표님, 입술에 피가...!”이경빈은 그 말에 천천히 눈을 뜨더니 기사의 시선을 따라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얼마나 세게 깨물었던 건지 입술에 피가 흥건했다.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으로 피를 닦아내더니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입원 병동으로 들어가려는 그때 탁유미와 김수영, 그리고 일전 그녀의 병실을 지켰던 경호원 두 명이 함께 병동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경호원들의 손에 짐이 들려있는 것으로 보아 퇴원하려는 것 같았다.이경빈은 서둘러 그들 앞으로 다가가 탁유미에게 물었다.“퇴원하려고? 벌써?”탁유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경호원들이 빠르게 그를 제지했다.탁유미는 이경빈의 얼굴을 보고는 금방 미간을 찌푸렸다.‘그날 알아듣게 얘기한 것 같은데 왜 또 여기 있는 거야?’“너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비켜.”“하지만 네 몸은 아직 입원해있는 게...!”이경빈은 말을 끝까지 하려다가 멈칫했다.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안색이 갑자기 안 좋아진 것이 이 이상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녀가 아프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며칠 더 입원해있는 게 좋지 않을까? 치료도 안 끝났을 것 같은데.”이경빈은 억지로 말을 끝마쳤다.“필요 없어. 내 몸이 어떤지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탁유미는 싸늘하게 말을 내뱉은 후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잘 안다고? 그런 사람이 이렇게 빨리 퇴원하려고 해? 너 정말 이대로 죽고 싶기라도 한 거야?!”이경빈이 다급하게 그녀의 팔을 잡으려 하자 경호원들이 더 빨리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탁유미는 발걸음을 멈추고 조금 의아한 눈으로 이경빈을 바라보더니 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