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공허해진 손아귀에 이경빈의 두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경빈 씨...”그때 공수진의 허약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에 이경빈은 서둘러 공수진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공수진은 차를 뒤집어써 엉망진창이었고 얼굴을 새하얗게 질렸으며 입술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경빈 씨, 나는... 나는 그저 윤이랑 대화를 조금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앞으로는 내 아들이 될 아이니까...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됐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나는 정말...”공수진은 힘겹게 입을 열며 억울하고 또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윽...”그때 공수진이 미간을 세게 찌푸리더니 고통을 호소했다.“나... 나 배가 너무 아파요. 윽... 경빈 씨...”그 모습에 이경빈이 미간을 찌푸렸다.“알았으니까 그만 말해. 지금 당장 병원에 데려다줄 테니까.”하지만 공수진을 안으려 허리를 숙이려는데 공수진의 치마 사이로 피가 흥건하게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오늘 입은 치마가 흰색 치마라 빨간색이 더더욱 눈에 띄었다.공수진의 부모님은 그 피를 보더니 아연실색하며 말했다.“피?! 수진아, 너 대체 어디를 다친 거야?!”탁유미도 피가 흥건한 것을 눈치챘다.‘피가 저 정도로 심하게 흐른다고?’공수진은 그저 넘어진 것뿐이다. 테이블 위의 식기들에 맞았다고 해도 피까지 흘릴 정도는 아니었다.순간 탁유미의 머릿속으로 몇 년 전의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그때도 공수진은 계단에서 넘어진 후 이렇게 치마를 빨갛게 적시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리고 이경빈은 그 모습을 보고 그녀를 안고 바로 병원으로 뛰어갔다.이렇게도 똑같은 광경을 두 번이나 겪는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공수진은 정말 그때와 똑같은 수법으로 그녀를 가해자로 만들려는 걸까?탁유미는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버렸다.이경빈은 공수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더니 얼굴을 굳히고 곧바로 공수진을 안아 들고 밖으로 향했다.룸을 나설 때 분노에 찬 얼굴로 탁유미를 향해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이경빈은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얼른 공수진을 안아 들고 밖으로 나섰다.그리고 공한철과 한영애는 독기 어린 눈으로 탁유미에게 모진 말을 내뱉었다.“이번 일 절대 쉽게 안 넘어갈 거다. 우리 수진이는 너랑 달리 무척이나 소중한 아이니까! 반드시 너한테 책임을 물을 거야!”탁유미는 그들에게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면서 두 손으로는 계속해서 아이를 제 품에 끌어안으며 악의에 가득 찬 인간들을 보지 못하게 했다.윤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탁유미는 진이 다 빠지는 느낌이었다.김수영은 윤이가 무사한 걸 보더니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아이고, 다행이야. 우리 윤이가 다치지 않아 정말 다행이야.”그녀는 집에서 탁유미와 윤이가 무사히 돌아오길 빌고 또 빌었다.탁유미는 그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며 안방 쪽으로 향했다.“엄마, 잠깐 윤이 좀 봐줘요. 나는 일단 옷 좀... 갈아입어야겠어요.”김수영은 탁유미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복부를 꽉 누르고 있는 것을 보며 통증이 또다시 시작됐다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그래그래. 얼른 들어가.”탁유미는 윤이 앞에서 아픈 티를 내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김수영은 얼른 그녀를 방으로 보냈다.탁유미는 방으로 들어간 후 병원에서 받은 진통제를 두 알 복용했다.그러고는 침대 위에 새우 자세로 누워 고통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오늘 일은 이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공씨 집안에서 이렇게까지 공을 들였다는 건 그녀를 완전히 제거해버리겠다는 뜻이니까.하지만 그걸 알고 있다고 해도 지금 이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게다가 한 달 정도 뒤에는 직접 윤이를 이경빈에게 보내줘야만 한다.이씨 가문이 정말 윤이를 지켜줄 수 있을까?공씨 가문 쪽에서 아이를 없애려고 들 텐데 정말 이경빈이 제대로 지켜줄 수 있을까?윤이는 아직 어려서 자기 몸을 지킬 능력이 없다.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어떻게 하면 죽기 전에 아이를 지켜줄 수 있지?엄마로서 제 아들 하나 보호해주지 못한다니... 정말 무능력한
당시 이경빈은 누군가를 배신했다는 죄책감 같은 것이 들어 바로 눈을 옆으로 돌렸다.하지만 곧바로 자신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배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그는 곧 있으면 공수진과 부부가 되고 부부 사이에 잠자리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게다가 그는 이미 탁유미가 감옥으로 들어가기 전에 공수진과 잠자리를 한 적도 있었고 말이다.물론 탁유미가 감옥에 들어간 뒤로는 계속해서 혼자 잠들었다.공수진과는 연인 사이를 넘어 결혼 얘기까지 오가던 상태였는데도 이상하게 공수진과 잠자리를 하려고 하면 이상한 죄책감이 들었다.그조차도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탁유미 때문일까? 말도 안 된다.탁유미의 존재가 이토록 큰 영향을 줄 수 있을 리가 없다.재판장에서 증인으로 나서 증언까지 했는데 아직 그 여자에게 마음이 남아 있을 리 없다.“아이고, 이걸 어째! 우리 수진이가 또다시 아이를...!”한영애는 공수진의 손을 잡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그 빌어먹을 것이 또다시 우리 수진이 아이를 사라지게 했어! 두 아이 모두 탁유미 그것 때문에! 우리 수진이 불쌍해서 어째...!”“엄마... 흡... 그만 해요...”공수진은 가뜩이나 수술을 막 하고 난 뒤라 얼굴이 창백한데 거기에 눈물까지 범벅이 되니 가엽기 그지없어 보였다.“임신이 힘든 몸이 된 후로 찾아온 기적적인 아이를 또다시 탁유미 때문에 잃어버렸는데 내가 어떻게 그만해! 분명히 일부러 그랬을 거야! 네가 아이를 낳으면 자기 아들이 나중에 이씨 가문을 물려받지 못할까 봐, 그래서 미리 수를 쓴 게 분명해!”이경빈은 그 말에 몸을 휘청였다.“탁유미도 알고 있었습니까? 수진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수진이가 윤이한테 이제 곧 있으면 네 동생이 생긴다고 했어. 오늘 수진이가 윤이를 데리고 우리를 만나러 온 것도 앞으로 자기 아들이 될 아이니까 잘 봐달라고 데리고 온 거였어. 그런데 탁유미 그게... 우리 수진이를...!”한영애는 마치 이 자리에 탁유미가 있었다면 씹
다음날.오늘은 토요일이라 윤이는 유치원이 아닌 집에 있었다.“엄마, 나 윤이 데리고 놀이터로 가서 놀고 올게요.”탁유미가 김수영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러지 말고 집에서 좀 쉬어.”김수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탁유미는 평소 일 때문에 항상 늦게 잤기에 김수영은 늘 그런 딸을 대신에 오전이면 자신이 윤이를 데리고 나가 놀았다.“괜찮아요. 윤이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요.”탁유미는 지금 1분 1초가 아쉬웠다.이에 감수영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그럼 점심 맛있게 해놓을 테니까 늦지 않게 돌아와. 네가 좋아하는 거로 해둘게.”“네.”탁유미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윤이를 데리고 밖으로 향했다.주말이라 그런지 놀이터에는 아이들 데리고 놀러 나온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다.평소 윤이는 놀이터에 도착하면 항상 또래 아이와 함께 신나게 같이 놀았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친구가 먼저 다가오는데도 고개를 푹 숙인 채 고민이 많은 얼굴로 탁유미의 옆에 앉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윤이 왜 그래? 왜 친구랑 안 놀아?”탁유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엄마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죠?”윤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국에는 그녀를 향해 이 질문을 던졌다.어제 룸에서 들었던 말로 여태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이제 고작 4살이라고는 하나 나쁜 것과 좋은 것 정도는 윤이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는 꽤 예민한 구석이 있었기에 분위기만 봐도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탁유미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응, 엄마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그녀는 아이의 얼굴을 조목조목 훑어보았다.윤이는 이경빈을 많이 닮았지만 영롱한 두 눈과 웃을 때의 느낌은 그녀 판박이였다.다만 근 몇 년간 탁유미는 먹고 사는데 바빠 좀처럼 웃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윤이만큼은 앞으로 많이 웃기를 바라며 자신 때문에 슬퍼하거나 움츠러들지는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엄마 말 기억해. 엄마는 그 누구도 해한 적이 없어. 엄마
사진을 한 장 옆으로 넘기자 이번에는 그녀를 포함한 세 사람의 사진이 보였다.윤이는 놀이공원에서 돌아온 뒤로 시간이 날 때마다 탁유미의 휴대폰을 들고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바라보았다.사진을 보는 아이의 얼굴에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그 모습에 탁유미는 사진을 지우려다가도 결국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탁유미는 시선을 내려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세 사람의 사진을 바라보았다.윤이는 활짝 웃고 있었고 그녀는 안전바를 꼭 잡은 채 무언가를 참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으로 보아 당시 통증이 일었던 게 분명해 보였다.그리고 이경빈은 고개를 돌린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아마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그녀를 걱정해서 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실상은 증오해 마지않는 관계인데 말이다.두 사람은 같은 회전목마를 타고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마음의 거리는 하늘과 땅처럼 멀었다.이대로 이경빈과는 죽을 때까지 평생 다시는 보지 않기를 그녀는 진심으로 바랐다.하지만 그 생각을 하자마자 윤이가 큰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아빠!”그 목소리에 탁유미가 고개를 들어보니 윤이가 활짝 웃으며 이경빈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이경빈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탁유미는 이쪽으로 걸어오는 이경빈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이경빈은 윤이가 코앞까지 다가왔는데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계속해서 성큼성큼 걸어왔다.얼음장 같은 그의 얼굴에 탁유미는 순간 불안감이 밀려왔다.아니나 다를까 이경빈은 탁유미의 바로 앞에 서더니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당장 나랑 같이 병원으로 가. 가서 수진이한테 사과해. 수진이가 너 때문에 또 유산을 해버렸어. 3개월 된 아이가 그렇게 또다시 수진이 뱃속에서 사라졌다고!”탁유미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공수진은 또다시 같은 판을 짰다.공수진은 이번에도 또다시 탁유미를 가해자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아무리 아빠라고 해도 엄마를 괴롭히는 건 용서할 수가 없다.이경빈은 잔뜩 가라앉은 얼굴로 윤이에게 말했다.“윤이야, 비켜. 엄마는 큰 잘못을 했어. 그래서 지금 당장 사과하러 가야 해.”“싫어요. 엄마는 잘못한 거 없어요! 그런데 왜 사과를 해요.”윤이가 말했다.“엄마는 그저 그 아줌마의 손을 살짝 밀쳤을 뿐이에요. 그랬는데 아줌마가 갑자기 뒤로 넘어가 넘어진 거라고요! 엄마는 그저 그 아줌마가 내 볼을 만지는 걸 막아준 것뿐이에요! 엄마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윤이는 공수진을 좋아하지 않았다.아니, 싫어했다.매번 미소를 지어주고는 있지만 그 눈빛이 묘하게 섬뜩하고 또 무서웠다.윤이는 아직 아이이기는 하지만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과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 정도는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하지만 탁유미의 억울함을 밝히려 한 아이의 말은 되레 이경빈의 심기만 건드리고 말았다.“탁유미, 입을 열 때마다 아이를 위한다고 하더니 이딴 식으로 교육했어? 아이한테까지 거짓말을 하게 했냐고! 너, 그 룸에 CCTV가 있었던 거 모르지? 수진이가 윤이 볼을 어루만지려고 한 걸 네가 밀쳐버린 걸 내가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해? 너는 그저 가볍게 밀친 거겠지만 네 그 행동으로 수진이는 또다시 아이를 잃었어. 너, 수진이가 아이를 낳으면 윤이가 설 자리가 없어질 것 같아서 그런 거지? 그래서 밀쳐버린 거지?”이경빈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차갑고 또 날카로웠다.탁유미는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사실 그녀는 이경빈이 오해하든 말든 욕설을 퍼붓든 말든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지만 윤이 앞에서 이런 말을 내뱉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이경빈은 지금 공수진의 일 때문에 이성을 잃어 유산이란 말을 계속해서 들먹이며 그 말을 듣게 될 윤이의 생각 같은 건 조금도 하지 않고 있다.탁유미는 아이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는 걸 원하지 않아 윤이의 인공와우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그걸 떼어내기도 전에 이경빈의 말소리가 들려왔다.“나한테 양육권을 넘기
윤이가 들으면 안 되는 말이었다!“엄마, 아빠는... 윤이를 싫어하는 거예요?”그때 아이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까만 눈동자가 이경빈을 한번 본 후 다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이경빈은 아이의 눈빛을 받는 순간 자신이 무척 초라하게 느껴졌다.아이의 눈빛에는 더 이상 그를 향한 애정과 사랑은 없었다. 그저 두려움과 상처만이 남아 있었다.이경빈은 그제야 자신이 뭐라고 했는지 깨닫고 뒤에 있던 비서에게 소리쳤다.“윤이를 뒤로 데려가!”그 말에 부하 직원이 다가와 윤이를 번쩍 들었고 윤이는 이에 발버둥 치며 부하 직원의 가슴팍을 두드렸다.“윤이한테 뭐 하려는 거야! 당장 안 내려놔?!”분노한 탁유미가 아이를 빼앗으려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경빈이 팔을 꽉 잡고 있는 바람에 다가갈 수가 없었다.“윤이는 내 아들이야. 윤이를 다치게 하지 않아. 그러니까 핑계 그만 대고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서 수진이한테 사과해!”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그대로 탁유미의 팔을 부여잡고 놀이터 입구로 향했다.그는 차로 향하는 길 부하 직원에게 뒷수습을 맡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두 사람이 소리치며 화를 내는 바람에 이미 많은 이목이 쏠렸으니까.탁유미는 이경빈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휘청거리며 결국 놀이터 밖에 있는 차량 옆으로까지 왔다.그녀는 윤이가 이경빈의 부하 직원의 손에 의해 다른 쪽으로 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경빈, 윤이를 대체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 만약 윤이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는 내 모든 걸 걸고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탁유미는 무력한 자신이 한스러웠고 아이를 다른 곳으로 데려간 이경빈이 원망스러웠다.차에 올라탔는데도 이경빈은 여전히 그녀의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말했지. 윤이를 다치게 하는 일은 없다고. 윤이는 집으로 보내주라고 했어. 너도 윤이한테 사과하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을 거 아니야. 아니면 다시 윤이를 불러올까? 윤이가 네가 한 짓을 낱낱이 알게 돼야 속이 시원하겠어?”이경빈은 기사에게 병원으로
“공수진을 믿는 이유가 뭐야? 너한테 골수를 기증해줘서? 그것 때문에 네가 살 수 있게 돼서?”탁유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경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그 사실은 이씨 가문과 공씨 가문밖에 모르는 일이다.“만약 널 구한 사람이 공수진이 아니라면 믿을 거야?”“탁유미, 이제는 정말 질린다. 감옥살이 한번 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이경빈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네가 그 일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잘 모르지만 경고하는데 나랑 수진이 사이를 이간질하지 마.”이경빈은 차가운 얼굴로 탁유미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았다.“왜, 이번에는 날 구한 게 수진이가 아니라 너라는 말이라도 하게? 꿈도 꾸지 마. 내가 지켜줘야 할 여자는 수진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수진이야. 너 따위가 들어올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알아 들어?”그 말에 탁유미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하하하하.”그녀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그만해.”이경빈은 그녀의 웃음소리가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하지만 탁유미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고 이제는 눈물까지 보였다.“그만하라고! 내 말 안 들려?”이경빈은 턱을 잡았던 손으로 이번에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그는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웃음소리가 이상하리만큼 심장을 찔러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그의 손바닥에 닿은 그녀의 입술은 조금 서늘했다.이경빈은 그제야 자신과 닿아있는 그녀의 피부가 차가운 것을 알아챘다.그리고 그녀의 얼굴은 지금 혈색 하나 돌지 않았고 무척이나 창백했다.두 눈이 마주치고 탁유미는 이경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녀의 눈은 냉랭하고 또 차가웠으며 눈가에는 아까 웃어서 생긴 눈물방울이 맺혀있었다.이경빈은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둔기 같은 것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심장이 조여오고 호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탁유미의 두 눈을 보면 꼭 자신 같은 건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서 튕겨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러면 지금 그녀의 마음을 차지 하고 있는 사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
“그럼 어떻게 하면 끝내줄 건데요? 뭐 하룻밤 같이 자 줘요? 아니면 백연신 씨가 만족할 만큼 다시 연애하는 것처럼 연기라도 해줘요?”한지영이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어갔다.“백연신 씨 좋다는 여자들 많잖아요. 그런데 왜 꼭 나여야 해요? 아니, 그건 또 아니었지. 꼭 나여야 하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헤어지자고도 안 했을 테니까.”“너한테 나라는 인간은 대체 뭐야?”백연신이 한지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한지영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답했다.“한때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더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나한테 백연신 씨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에요. 우리 두 사람은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이고 인생관도 너무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은 제일 중요한 게 사업이고 가문이지만 나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고 단란하게 사는 게 더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나는 백연신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약한 사람이라 같은 고통을 두 번은 못 겪어요.”두 사람은 살아온 환경, 그리고 그로 인한 인생을 대하는 태도,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어쩌면 처음부터 이어지지 않을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백연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나더니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달빛 아래의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하고 또 어두웠다.“네 말이 맞아... 나 좋다는 여자들도 많고 꼭 너여야 하는 것도 아니야.”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입꼬리를 조금씩 위로 올렸다.5년이다. 5년을 숨죽이고 드디어 고씨 가문을 사지까지 내몰았는데 그 시간 동안 한지영은 서서히 그의 존재를 지워가고 있었다.백연신은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한지영은 그가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리며 숨이 가빠왔다.‘아파하지 마. 백연신 때문에 아파하지 마! 잊기로 했잖아. 이제는 다 잊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한지영은 속으로 끊임없이 이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서 두 눈을 떼지 못했고 심장은 계속해서 아파 났다.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끝까
한지영의 목소리를 참 좋아했던 백연신이었지만 오늘은, 지금은,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밉고 잔혹하게 들려와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다.충격이 컸던 건지 백연신의 얼굴은 서서히 하얗게 질려갔다.“날... 안 좋아해?”고작 다섯 글자를 내뱉는 건데도 그는 무척이나 힘이 들어 보였다.“백연신 씨를 계속 사랑하고 있었으면 소개팅 같은 건 나가지도 않았겠죠. 다시 연애할 생각 같은 것도 안 했을 거고요.”한지영이 말했다.“백연신 씨를 좋아했던 건 맞아요. 사랑도 했고요. 하지만 헤어졌잖아요.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에요. 어른이면 어른답게 질척거리지 말고 깔끔하게 끝내요.”“깔끔하게 끝내자고?”백연신이 쓰게 웃었다.‘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네가 다쳤을 때 내가 널 살리겠다고 무슨 짓을 했는지, 네 안전을 위해서 내가 어떤 일까지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내가 틀린 말 했어요?”“날 안 좋아하면 연우진 그놈을 좋아하는 건가?”백연신은 자기가 물어봐 놓고 한지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자기가 다시 확신을 가지며 답했다.“아니. 넌 연우진 안 좋아해. 연우진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었으면 내가 너한테 키스했을 때 내 따귀를 때리고 살점을 물어뜯어서라도 날 멈추게 했을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꼭 맹수에게 쫓기다 궁지에 몰린 아기 고양이 같았다.하지만 심적으로 궁지에 몰린 건 그녀가 아닌 백연신이었다.“한지영, 너는 한순간도 연우진을 좋아해 본 적 없어. 아니야?”백연신은 얼른 그렇다고 말하라는 듯한 눈빛으로 한지영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한지영은 숨을 한번 들이켜더니 곧바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그래서?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 게 뭐? 내가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백연신 씨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요.”한지영은 말을 마친 후 갑자기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백연신은 그녀의 행동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얼굴은 더 하얗게
백연신은 침대 바로 옆에까지 다가오더니 갑자기 몸을 아래로 기울이며 한지영을 가두듯 양손을 그녀의 몸 바로 옆에 올려놓았다.그러고는 타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한지영,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쉬운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고 단 한 번도 너를 멋대로 휘둘러도 되는 여자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누가 감히 자기 목숨을 쉬운 거라고, 언제든지 휘두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한지영은 갑자기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순간 몸이 굳으며 이성을 놓칠 뻔했다가 간신히 다시 정신을 다잡고 뒤로 몸을 움직였다.하지만 얼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금방 벽에 부딪혀버렸다. 그리고 백연신은 벌어진 거리 만큼 다시 앞으로 몸을 움직이며 더 바짝 다가왔다.“하...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아?”낮게 깔린 목소리가 한지영의 귀를 간지럽히며 이내 그녀의 마음마저 뒤흔들려고 했다.그래서 한지영은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그와 눈을 마주하는 것을 피했다. 이대로 계속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어버릴 것 같았으니까.백연신은 한지영의 옆얼굴을 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지난 5년간, 단 하루도 네 생각을 안 했던 날이 없었어.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어. 내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 내가 제대로 해결했으면 우리는 지금쯤 무사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았을 테니까...”한지영은 그 말에 흠칫하더니 곧바로 다시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그만 해요.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지영아, 나는 단 한 번도, 아니, 단 한 순간도 고은채를 사랑한 적이 없어. 좋아한 적도 없어.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한지영 너였어.”백연신은 5년을 꾹 참았던 말을 드디어 입 밖으로 꺼냈다.지난 5년간은 아무리 한지영이 보고 싶어도, 아무리 한지영을 안고 싶어도 그저 마음속으로만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녀를 껴
백연신은 앞머리를 전부 깔끔하게 뒤로 넘긴 채 검은색 슈트 셋업을 입고 있었다. 아까 한지영이 인터넷을 검색하며 봤던 기자들 앞에서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었다.그래서일까, 한지영은 백연신이 눈앞에 있는 게 어쩐지 조금 현실감이 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이상한 느낌도 들었다.백연신과 한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러기를 몇 분, 더는 못 참겠던지 한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12시가 넘었어요.”“알아.”그리고 곧이어 백연신의 입에서도 말이 흘러나왔다.‘안다고? 아는 사람이 왜 안 나가고 계속 거기 앉아있어? 아니, 애초에 내 방에는 왜 들어온 거야?’한지영은 이해를 못한 채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이 집은 원래 그의 것이라는 깨닫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늦었는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왔어요?”“너 보러.”백연신은 이 방에 들어온 뒤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한지영을 바라보았다. 그저 자는 얼굴을 바라만 보는 건데도 마음이 녹고 또 행복했다.한지영의 잠버릇은 여전했다. 또 어떤 기이한 꿈을 꾸는지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왔다 갔다 했다가 갑자기 이를 갈고, 또 어느 순간에는 헤벌쭉 웃어댔다.전에 그와 함께 취침했을 때와 다를 거 하나 없었다.그래서 더 좋았다.“잘 자더라.”백연신이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어. 다음에는 킹사이즈 침대로 주문할까 봐. 그러면 쉽게 떨어지지 못하겠지.”한지영은 그의 말에 땀이 삐질 흘렀다.‘고작 나 자는 거 보려고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낮에 고은채 씨 기자회견 봤어요. 이제 다 해결됐으니까 이만 집으로 돌아가도 되죠?”한지영은 화제를 돌렸다. 언제쯤 돌아갈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그렇게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당연한 거 아니에요? 행동을 제한받은 채로 생활하는 걸 즐기는 사람은 없잖아요.”백연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한지영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백연신과 고은채가 진작 헤어진 거라면 한지영은 파렴치한 상간녀도 아니고 염치없는 세컨드도 아니니까.“응, 아마도.”한종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지영아,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봐. 언제쯤 집에 갈 수 있는지.”“근데 여보, 연신이 말이에요. 혹시 우리 지영이한테 아직 마음이 남아있는 거 아닐까요? 지영아, 너 혹시 연신이랑 다시 잘해볼...”“엄마, 전에도 말했잖아요. 백연신 씨와는 두 번 다시 사귈 일 없다고. 그러니까 괜한 생각하지 마세요.”한지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이해영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이해영은 그런 딸의 태도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부터 백연신을 꽤 좋게 보고 있었으니까. 물론 한지영이 아플 때 헤어짐을 고한 건 지금 생각해도 괘씸하지만 근 5년간 딸이 남자와의 만남을 피해온 것도 그렇고 백연신이 얼마 전에 한지영의 손을 사라진 것도 그렇고 어쩌면 두 사람 모두 아직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그래, 그만해. 그놈이 뭐가 좋다고 다시 우리 지영이와 이어주려고 그래? 지영이가 병상 위에 있을 때 헤어지자고 했던 놈이야. 아무리 지금 잘나간다고 해도 나는 그놈한테 우리 지영이 못 줘! 그놈 아니면 우리 딸이 시집 못 간다고 해도 평생 내가 끼고 살고 말지 그놈한테는 안 줘!”한종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그냥 해본 말이에요. 나라고 뭐 우리 지영이 안 소중한 줄 알아요?”한종훈과 이해영 사이에 팽팽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한지영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말렸다.“자자, 그만 해요. 두 분 다 이곳에 오래 갇혀 있어서 지금 많이 예민해진 것 같아요. 아빠 말대로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내가 이따 밖에 있는 경호원한테 언제쯤 나갈 수 있는지 물어볼게요. 내 생각에는 아마 내일쯤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하지만 저녁 식사를 마치고 경호원에게 언제쯤이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냐고 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