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고은채와 함께 나타났을 때 백연신은 일부러 모든 감정을 배제하고 차가운 태도를 유지했다.하지만 그것도 한지영의 얘기를 듣고는 완전히 무너졌다.“하지만 고은채 씨와...”임유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야. 지금 상황으로는 그게 가문을 되찾는 일인 것 같기는 하지만.”“네 말은 백연신 씨가 가문을 돌려받기 위해서 고은채 씨를 선택했다는 거야?”“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임유진은 그 말에 입을 꾹 닫고 생각에 잠겼다.백연신이 정말 가문 때문에 한지영을 포기한 거라고?그러면 한지영에게는 뭐라고 할 생각인 거지?강지혁은 불안해 보이는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병실 안.한지영과 백연신은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무슨 이유 때문인지 한지영은 백연신이 이렇게나 가까이에 있는데도 어쩐지 그가 엄청 멀게만 느껴졌다.백연신을 만난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거리감이었다.“기사 내용... 정말 사실이에요?”한지영은 깨어난 지 벌써 며칠이나 되었지만 말을 할 수 있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하지만 여전히 말을 하는 것이 힘들었다.백연신은 잠깐 침묵하다가 이내 조용히 ‘응.’이라고 대답했다.이에 한지영의 몸이 움찔 떨렸다.“정말... 다른 여자랑... 결혼하기로 했어요...?”한지영은 백연신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백연신은 천천히 한지영의 병상 곁으로 다가오더니 두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턱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한지영은 그런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지영아,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야. 전에는 너랑 함께 하는 것 정도는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결과적으로 너는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어.”백연신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다정하고 또 부드러웠다.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차갑기 그지없었다.“너도 알다시피 나는 백씨 가문의 사생아야. 그래서 어릴 때부터 항상 아주 당연하
한지영은 힘겹게 손을 들더니 백연신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습관이 될 정도로 많이 만졌던 얼굴이다.이미 질리도록 봤음에도 여전히 볼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던 얼굴이다.그런데 그랬던 얼굴이 지금은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한지영은 처음 기사 내용을 봤을 때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백연신의 말을 듣고도 눈물 한 방울 없이 평온한 채로 있었다.백연신이 오기 전에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해뒀던 것일까?“알겠어요. 헤어져... 줄게요.”한지영은 그의 볼을 만지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려 그의 입술을 만졌다.“연신 씨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를... 진심으로... 바랄게요.”한지영은 눈물을 훌쩍이는 이별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미치도록 사랑했던 사람을 원수 보듯 하고 싶지 않았다.아무리 이 관계가 백연신이 일방적으로 끊은 관계라고 해도 그래도 그녀는 평화롭게 헤어지고 싶었다.정말...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첫 번째 남자였으니까.백연신과는 그저 원하는 바가 달랐을 뿐이다.백연신은 그저 그녀가 주는 사랑보다 자신이 얻는 것이 더 소중했던 것뿐이다.한지영의 담담한 말에 백연신의 몸이 굳어버렸다.그녀는 울면서 그를 붙잡지도 않았고 어떻게 나를 배신할 수 있냐며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두어 번의 질문으로 모든 걸 이해했다는 듯 그렇게 그와의 헤어짐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좋아해야 하는 게 맞다.그녀가 별다른 집착 없이 헤어져 줘서 고마워해야 하는 게 맞다.하지만 후련하고 고맙기는커녕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나간 듯 고통스럽기만 했다.한지영은 그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를 진심으로 바라겠다고 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이루어지는 날은 아마 영원히 없을 것이다.고은채를 선택한 순간부터 백연신은 자기 인생이 이대로 영원히 어둠에 갇힐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공수진은 수중에 들린 검사 결과지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내가 임신이라고?!’그녀는 이 상황이 믿
게다가 근 몇 년간 이경빈은 공수진과 잠자리를 한 적이 없다.3개월 전 이경빈이 술에 잔뜩 취한 채 들어왔을 때 잠자리를 함께할 기회가 있었기만 술에 취한 이경빈이 계속해서 탁유미의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그날은 그렇게 물 건너 가버렸다.하지만 공수진은 이경빈의 술주정을 듣고도 그의 옆에서 잠을 청했다.그때처럼 이경빈에게 술을 먹여 둘이 잠자리를 한다고 해도 아이의 출산 시기와 맞지 않기에 어차피 금방 들통나게 된다.공수진은 뱃속에 자리 잡은 아이보다는 이씨 가문 안주인 자리가 더 중요했다.“그럼 결혼식 올리기 전에 빨리 애 지워버려. 결혼하기 전에 잠시 여행이라도 갔다 오겠다고 하면 별 의심 없이 지나갈 수 있을 거다.”공수진의 아버지인 이한철이 말했다.그 말에 공수진은 생각에 잠겼다.어차피 아이는 무슨 일이 있든 지워야 한다.하지만 그전에 배 속의 아이를 이용하면 탁유미를 향한 이경빈의 마음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있다.“엄마, 아빠,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공수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부모님께 방금 떠오른 기가 막힌 생각을 공유했다....임유진은 병상 위에서 열심히 음식을 먹는 친구를 바라보았다.그날 백연신이 병실에서 나온 후 임유진과 한씨 부부는 한지영이 상처를 받은 게 아닌가 싶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심지어 임유진은 미리 강지혁에게 만약 한지영이 정말 충격으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바로 의사에게 연락하도록 얘기해놓기도 했다.하지만 막상 병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한지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며 얘기했다.“나 조금... 피곤해. 먼저 잘게...”그러고는 정말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그리고 다음 날인 지금, 한지영은 어제와 다를 것 하나 없이 행동했고 치료에도 적극적으로 임했다.하지만 그녀가 밝아 보일수록 임유진은 마음이 불안해졌다.“왜... 그렇게 봐?”한지영이 물었다.이제 그녀는 어느 정도 편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임유진은 잠깐 망설이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 괜찮아?”병실에는
다만 정말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라 헤어짐이 달갑지 않았고 마음도 많이 아팠다.하지만 한지영은 헤어짐으로 인한 고통보다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친구와 가족들이 더 소중했다.그들이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알기에, 그들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해주는지 알기에 한지영은 하루라도 빨리 완치해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유진아, 나는 이제 연신 씨를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버릴 거야... 그리고 천천히 연신 씨와의 모든 추억을 내려놓을 거야. 미움도 분노도 배신도... 다 내려놓을 거야. 우리가 헤어진 건... 그냥 가치관 때문이니까.”임유진은 그 말에 코가 찡하며 눈물이 핑 돌았다.백연신을 저주할 만도 한데 그녀는 그저 내려놓겠다고만 했다.한지영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씩씩하게 이겨내 가고 있었다.오후가 되고 탁유미도 한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그녀는 한지영과 백연신이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가 한지영이 담담하게 이별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랑하는 사람을 내려놓는다는 건, 내려놓아야만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그래서 탁유미는 한지영이 정말 대견해 보였다.한지영은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피곤하다며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지영 씨는 정말 강한 사람인 것 같아요. 엄청 힘들고 속상할 텐데 그걸 이겨내려고 하고 있잖아요.”탁유미가 말했다.“네, 맞아요. 지영이가 평소에는 철없는 애 같아도 맺고 끊는 것에는 언제나 확실한 애였어요. 그런데 솔직히 아직도 조금 걱정이 돼요. 백연신을 내려놓겠다고는 했지만 사랑했던 사람을 내려놓는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임유진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한지영을 바라보았다.그녀도 비슷한 일을 겪어본 적이 있기에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지금은 힘들겠지만 시간이 해결해줄 거예요. 그리고 내려놓아야만 다시 새 인생을 살 수 있으니까요.”탁유미의 말에 임유진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언니는 이제 정말 괜찮은 거예요?”탁유
“그러니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후회 같은 거 하지 말고 마지막 순간까지 잘 살고 가려고요. 이번 생에는 지독하게 엮었으니 다음 생에는 서로 만날 일 없겠죠.”탁유미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임유진은 그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녀는 이대로 탁유미를 보낼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탁유미를 살게 할 생각이었다....병원에서 나온 후 임유진은 GH 그룹으로 향했다.경비원과 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임유진이 안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그녀를 알아보았다.그도 그럴 것이 일전 건물 앞에서 강지혁을 만나게 해달라고 장장 몇 시간을 밖에 서 있었으니까.게다가 만나주지 않을 것 같던 강지혁도 결국에는 고이준을 보내 그녀를 대표이사실로 불러들였다.하지만 그때 강지혁을 만났다고 해서 오늘도 강지혁이 허락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임유진은 안에 들어선 후 강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전화를 걸려던 찰나 고이준이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와 얘기를 하는 것이 보였다.“고 비서님!”고이준을 부르자 고이준은 그녀를 발견하고 빠르게 다가왔다.“사모님,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사모님이라는 호칭에 경비원과 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물론이고 고이준 옆에 있던 직원들도 깜짝 놀랐다.“혁이 보러 왔는데 전화한다는 걸 깜빡한 거 있죠.”“대표님은 지금 회의 중이니 제가 대표님 사무실까지 모시겠습니다.”고이준의 태도는 공손하기 그지없었다.임유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고이준은 옆에 있는 직원에게 두어 마디 건네더니 임유진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그러고는 직접 층수까지 눌러주었다.고이준은 그저 일개 비서에 불과하지만 강지혁의 직속 비서이기에 평사원은 물론이고 임원진들도 고이준에게 만큼은 예의를 갖췄다.즉 회사 내부에서 고이준에게 직접적인 명령을 할 수 있는 건 강지혁밖에 없다는 소리였다.그런데 그런 고이준이 부름 한 번에 망설임 없이 뛰어가고 예의를 갖춰 직접 모시기까지 하니 직원들은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 오게 된 지금, 그런 감정 같은 건 전혀 없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다가가 보니 상당히 많은 서류가 이곳저곳 흐트러져있었다.강지혁이 이 책상에서 회사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 멋대로 그려지는 듯했다.그때 흐트러진 서류 속 유난히 눈에 띄는 [진가원]이라고 적혀 있는 서류 봉투가 보였다.진가원은 진씨 가문에서 주관하고 있는 중요한 프로젝트로 듣기로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땅 부지를 사는 데만 천억 원도 넘게 들었다고 하며 근 2년간 대외홍보에도 역시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그런데 그 중요한 서류가 왜 강지혁의 책상 위에 있는 거지?임유진이 의문을 가진 그때 갑자기 사무실 문이 열리고 이에 깜짝 놀란 임유진은 손에 든 서류 봉투를 그만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봉투가 열리고 안에 든 것들이 하나둘 밖으로 튀어나왔다.그리고 임유진은 그것들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봉투 안에서 나온 것들이 전부 진애령의 사진이었기 때문이었다.강지혁의 유일한 약혼녀였던 진애령 말이다.진애령의 사진이 왜 봉투 안에 들어있는 거지? 그것도 엄청 많이?진애령은 강지혁의 약혼녀로 안타깝게도 차 사고로 죽어버렸다. 그리고 그 사고로 임유진은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하나의 교통사고로 두 사람의 운명은 한순간에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으로 흘러가게 되었다.임유진이 멍하니 사진을 구경하고 있을 그때, 강지혁이 다가와 사진을 주웠다.임유진은 허리를 숙인 채 바닥에 떨어진 사진과 서류 봉투를 줍는 그의 모습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어...”그녀는 어쩐지 목이 말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지영이 보러 병원에 갔다가 너 보고 싶어서 왔어.”“한지영은 좀 어때?”강지혁이 물었다.“괜찮아. 힘들어할 줄 알았는데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고 있어.”임유진은 사진들을 아무렇게나 서류 봉투에 넣어버리는 강지혁을 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그 사진들은 뭐야?”“신경 쓰여?”“그거 진애령
“소민준...”강지혁의 입에서 세글자가 흘러나왔다.“만약 소민준이 그때 너를 배신 안 했으면 지금쯤 소민준과 결혼했을 수도 있었겠네?”“아니.”임유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해?”“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어. 그래서 결혼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잘 몰랐어.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결혼하겠다고 해도 소민준네 집안에서 반대했을 거야.”임유진은 그때 너무 어렸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그리고 소민준도 나를 결혼까지 생각할 만큼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고. 호감 정도의 좋아함은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주변 여자들이랑 다르다는 신선함이 더 컸을 거야. 소민준은 나를 위해 자기 부모님의 반대까지 무릅쓸 사람이 아니야. 그건 이미 진애령 씨 사건으로 증명이 됐고. 나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그렇게 쉽게 버리지 않았겠지.”“만약 소민준이 부모님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널 선택했다면?”임유진은 강지혁이 엄청 신경 쓰인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세상 사람들이 다 너 같은 줄 알아? 세상에 만약에는 없어. 그리고 나도 마치 장기 말 버리듯 날 버린 사람으로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고 싶지 않고.”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꽉 쥐었다.“조금만 기다려. 소씨 가문도 곧 조용히 사라질 테니까. 그렇게도 진세령과 진세령네 집안이 좋다면 그 인간들과 같은 말로를 맞게 해야지.”임유진이 흠칫하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소씨 가문을 없애려고?”“진씨 가문은 조만간 사라질 거야. 소씨 가문은 진씨 가문과 엮여 있으니 자연스럽게 같이 사라지게 되겠지.”강지혁은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로 무서운 얘기를 꺼냈다.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으면 농담이겠거니 할 테지만 강지혁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쉽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아마 별다른 이변이 없으면 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은 정말 머지않아 조용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름이 있는 두 가문인데...’특히 진씨
“나도 혁이 널 지켜줄 거야.”임유진은 강지혁을 꼭 끌어안으며 말하다가 뭔가 생각난 듯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혹시 진씨 가문에서 네가 진가원 프로젝트를 방해하려고 한다는 걸 알게 된 거 아닐까? 한때 약혼녀였던 자기 딸을 생각해서라도 좀 봐달라고.”강지혁은 그 말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진씨 가문에서 진애령의 사진을 보낸 건 봐달라고 부탁하려는 것이 아닌 그때의 일을 잊지 말라고 알려주는 것이다....공항 VIP 라운지.백연신은 라운지 소파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수중에 들린 티켓을 바라보았다.그는 이제 몇 분 뒤면 S 시를 떠나게 된다.이미 확정된 일이지만 머릿속으로 자꾸 그날 흰색 붕대를 감은 채 창백하고도 또 평온한 얼굴로 헤어져 주겠다고, 원하는 것을 이루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했던 한지영의 얼굴이 떠오른다.원하는 것을 이루길 바라겠다라...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만약 한지영이 치료에 전념하고 무사히 퇴원해 앞으로 행복하게만 살아간다면 가능한 일이 될 수도 있다.지금의 백연신이 바라는 건 오직 한지영의 행복뿐이니까.“설마 아직도 전 여자친구 생각해요?”그때 고은채가 다가와 그의 팔짱을 끼며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우리가 했던 약속을 잊은 건 아니죠?”“안 잊었어.”백연신이 차가운 말투로 대꾸했다.“아니면 됐어요. 한지영 씨가 무사히 살 수 있었던 게 다 내 덕이라는 거, 평생 잊어버리면 안 돼요. 연신 씨가 내 옆에 있는 게 그것 때문이라는 것도요.”고은채는 백연신의 얼굴이 어두워져 가는 걸 보면서도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나는 지금도 이해가 안 가요. 여자친구로나 아내로나 한지영 씨보다는 내가 훨씬 낫잖아요. 나랑 결혼하면 연신 씨는 고씨 가문을 등에 업을 수 있고 회사를 더 크게 키울 수 있어요. 나는 그 과정에서 연신 씨랑 권력 다툼도 하지 않을 거고요. 연신 씨가 줄곧 원하던 게 이런 거 아니었어요?
소민아는 그런 그녀의 아부가 싫지 않았기에 이름이 알려진 뒤로 심심풀이용으로 하던 라이브에 문혜진을 포함한 상류층 사람들을 부르며 인기몰이를 했다. 다들 무척이나 협조적이었고 심지어는 새벽에 연락해도 흔쾌히 나와주었다.부자들이 나오는 컨텐츠는 수요가 많았기에 소민아는 라이브로 얻은 인기에 힘입어 자신만의 작은 회사까지 차리며 계속해서 라이브로 수익을 벌어 들었다.하지만 임유진이 돌아온 뒤로 모든 것이 변했다. 매일같이 아부하며 스케줄을 물어보던 친구들은 갑자기 연락이 뚝 끊겼고 라이브에 와주기로 했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다른 스케줄이 있다며 거절을 해왔다.그리고 이제는 제일 만만하고 항상 개처럼 따르던 문혜진조차도 그녀의 초대를 단칼에 거절해버렸다.강씨 가문의 안주인 후보가 아닌 소민아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까.옆에 있던 비서는 소민아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은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그럼 오늘 라이브는 어떻게...”“뭘 어떻게 해요? 지금 당장 스케줄 가능한 연예인 쪽으로 연락 돌리세요. 인기 없는 애들 말고 지금 한창 핫한 애들로요.”소민아가 앙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너희들이 없으면 내가 라이브 못할 줄 알아? 두고봐.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겠어!’“네, 알겠습니다.”비서는 고개를 한번 숙이더니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소민아는 의자 시트에 등을 기댄 채 화를 억누르다 다시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앨범을 한번 훑어보았다.많고 많은 사진 속 유난히 눈에 띄는 사진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한정판 드레스에 예쁜 루비 목걸이를 하고 강지혁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임유진의 사진이었다.해당 사진은 누군가가 SNS에 업데이트한 사진으로 소민아는 사진을 보자마자 바로 자신의 앨범에 저장했다.소민아는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또다시 분노를 터트렸다.“드레스도 내가 먼저 고른 거고 루비 목걸이도 내가 먼저 발견한 건데 왜 다 이 여자한테 가 있는 거야!”임유진이 나타나기 전, 한창 사모님 기분을 내며 쇼핑하던 어
“아주 잠깐 아팠을 뿐인데 뭐하러. 그리고 통증이 시작됐을 때 나는 침실이 아니라 서재에 있었어. 아침에 박 선생한테 연락해봤는데 큰 문제는 아니래. 그리고 일전에 박 선생이 처방해준 약도 아직 있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괜찮아.”임유진은 괜찮다는 그의 말에도 좀처럼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나 정말 괜찮아. 큰 상처도 아니고. 며칠 지나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강지혁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보다... 5년 전에 내 곁을 떠난 이유가 뭔지 정말 기억이 안 나?”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응.”사실이었다.다른 기억은 다 돌아왔지만 하필이면 그때의 기억만 마치 누가 잘라놓기라도 한 듯 아주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사실 기억을 찾고 싶은 건 강지혁뿐만이 아니라 임유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절벽에서 그렇게 떨어진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왜 현이만 곁에 있었는지, 그리고 나머지 한 아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만약 살아있다면 지금쯤 어디에 있는지 등등 궁금한 게 너무도 많았다.임유진은 손을 뻗어 강지혁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어젯밤에... 사실은 많이 아팠던 거지?”강지혁은 아주 잠시만 아팠다고 했지만 그랬다면 이런 깊은 상처들이 생겼을 리가 없다.“지금은 안 아파.”“만약 앞으로 또 통증이 찾아오면 내가 자고 있더라도 깨워. 내가 아무것도 모르게 하지 마.”임유진은 강지혁이 고통스러워하는 순간에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자고 있었다는 게 너무나도 속상했다.“나도 알아. 너 아플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뭐 없다는 거. 하지만 우리는 부부잖아. 그때 혼인신고하고 나올 때 아플 때도 슬플 때도 언제나 함께 있자고 맹세했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뭐든 얘기해줘. 너 혼자 아파하지 마.”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임유진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얼굴이 창백해질 때까지 괴롭게 토를 하던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임유진은 그의 곁을 떠난 게 분명히 그럴
하지만 머리에 손이 닿기도 전에 강지혁이 빠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괜찮아. 이제 안 아파.”“그래.”임유진은 안도한 듯 웃으며 손을 거두어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왜? 뭐 할 말 있어?”강지혁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큰 결심을 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거 말이야. 정말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거 확실해?”“그건 갑자기 왜 물어? 그리고 말했잖아.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일 거라고.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너밖에 없어.”임유진은 당시 절벽에서의 일을 얘기해 주면 강지혁에게 큰 자극으로 다가올까 봐 오늘도 진실을 얘기해 주지 않았다.“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너도 알다시피 난 너에 관한 기억이 거의 없잖아.”임유진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그럼 앞으로 내가 틈틈이 우리가 함께했을 때 얘기를 해줄게. 계속 듣다 보면 네 기억도 점점 돌아오게 될 거야.”“너는 내가 기억을 다 찾았으면 좋겠어?”강지혁이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당연하지. 하지만 내 바람이 그렇다고 괜히 조바심낼 필요는 없어. 나는 네 기억이 아주 자연스럽게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돌아왔으면 좋겠으니까.”‘천천히... 하지만 내 기억은 이미...’강지혁은 조금 복잡한 얼굴로 임유진의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손이 풀리자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듯 몸을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막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나려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기울여버렸다.강지혁은 재빠르게 임유진을 받아내고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고마...”임유진은 몸을 바로 세운 후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강지혁의 손등을 보고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게 고운 손에 시퍼런 멍이 한가득했기 때문이다.“너 손이 왜 이래?”임유진이 눈을 크게 뜬 채 묻자 강지혁은 재빠르게 손을 거두어들였다.“
임유진의 상처받은 눈빛과 아프게 내뱉은 모든 말이 그에게는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헉!”어두운 저녁, 강지혁은 악몽에서 깨듯 눈을 번쩍 떴다.한숨 잤는데도 여전히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고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기억이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강지혁은 이를 꽉 깨문채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너무나도 괴로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옆에 누워있는 그녀가 깨기라도 할까 봐 그는 마음껏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임유진은 오늘 많이 피곤했던 건지 평소보다 깊게 잠이 들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였다.강지혁은 휘청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서는 안간힘을 쓰며 옆방과 연결된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다시 닫은 후 그는 힘이 다한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분명히 아픈 건 머리뿐이어야 하는데 이제는 머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다 아픈 느낌이었다.일전 박건태가 말했던 것처럼 강지혁은 쉽게 기억을 떠올리고 빠르게 기억을 찾아가는 일반 사람들과 달리 아주 조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두통을 느끼며 아주 힘겹게 기억을 되찾고 있었다.임유진 때문에 고통이 전보다 더할 거라는 건 이미 인지한 바 있지만 이렇게도 통증이 강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머리가 두 동강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강지혁은 지금 너무나도 힘들고 괴로웠다.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꽉 움켜쥔 채 아주 미약한 흐느낌만 내고 있었다.소리를 키우면 임유진이 깰 수도 있으니 꼭 참고 있었다.강지혁은 자꾸만 새어 나오는 흐느낌에 결국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가 입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이렇게 아픈데도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세글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임유진.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기억의 조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가며 그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그 시각 임유진은 강지혁의 흐느낌 소리도 그가 아파하는 것도 그 무엇하나 느끼지 못한 채 아주 깊게 잠들어 있었다.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천국이
“혁아,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내 말 들려? 눈 좀 떠봐!”다급한 여자의 목소리에 어둠이 천천히 걷혔다.강지혁은 고통의 감정이 서서히 사라짐과 동시에 누군가가 관자놀이 쪽을 부드럽게 마사지 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걱정으로 가득 뒤덮인 임유진의 얼굴이 보였다.“머리가 아픈 거지? 병원으로 갈까? 아니면 집사님한테 전화해서 지난번에 저택으로 왔었던 의사를 부르라고 할까?”강지혁은 임유진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그의 이마는 어느새 땀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과거의 나는 대체 널 얼마나 많이 사랑했던 걸까? 왜 네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살기 싫다는 감정부터 들었을까?’전에는 기억이 떠올라도 어디까지나 제삼자의 관점으로 그저 그 상황을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만 들 뿐이었는데 오늘은 마치 그 일을 그대로 겪은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너무나도 아프고 고통스러워 정신이 다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대체 얼마나 많이 사랑해야 이런 느낌이 들 수가 있는 거지?“혁아, 내 말 들려? 나 보여?”아무런 대답도 없자 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조금 심각한 얼굴로 그의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그런데 그때 강지혁이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따뜻한 손이다. 차디찬 유골함 따위가 아닌 매우 따뜻한 손이다.강지혁은 갑자기 몸을 기울여 으스러질 듯이 임유진을 꽉 끌어안았다.“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널 얼마만큼 사랑했는지 한번 얘기해봐.”간절하고도 유약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임유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당황한 것도 잠시 이내 그가 원하는 대로 얘기해주었다.“많이, 아주 많이 사랑했어. 혁이 너는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버릴 수 있었어.”아직 절벽에서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고이준이 해줬던 얘기만으로도 그녀는 강지혁이 당시 어떤 마음이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그녀를 얼마나 사
“그래.”강지혁은 임유진의 허리에 손을 두른 채 발걸음을 돌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는 아주 잠깐 시선을 돌려 백연신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백연신의 얼굴에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아니, 이건 절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분명히 살아있는데도 마치 껍데기만 남아있는 듯했다.강지혁은 그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철렁하며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졌다. 머릿속으로 기억의 파편이 빠르게 스쳐 가는 게 느껴졌다.“혁아, 왜 그래?”임유진이 조금 의아한 얼굴로 갑자기 멈춘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아무것도 아니야.”강지혁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와 함께 파티장을 벗어났다.차에 오른 후, 강지혁은 시트에 등을 기대고는 곧바로 두 눈을 감았다.“많이 피곤해?”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울려 퍼졌다.“조금.”“그럼 잠깐 눈 좀 붙이고 있어. 집에 도착하려면 30분 정도 걸려야 하니까.”임유진이 말했다.강지혁은 편히 쉬기 위해 심호흡을 두어 번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마음이 진정되기는커녕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고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아까 봤던 백연신의 얼굴만 떠올랐다.그 언젠가 자신 역시 그 얼굴과 똑같은 얼굴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다.언제? 아니, 애초에 그렇게까지 절망할 일이 있었나?그때 웬 장면 하나가 빠르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아주 정확하게 보였다.기억의 파편 속 그는 웬 유골함을 껴안은 채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절망이 그대로 담긴 울음소리는 꼭 이대로 목숨마저 포기하려는 사람 같았다.“왜 내가 아닌 건데? 왜 네가...! 너한테 미안해해야 할 사람도 나고 죽어야 할 사람도 난데 왜 네가 죽어버린 거냐고! 아아악!!”그는 주위 시선 따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왜 울고 있는 거지?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이건 임유진이 죽은 뒤에 일어난 일인 건가? 임유진이 죽었다고 생각해 이
“그러고 보니 너 얼마 전에 해외로 다시 간다고 하지 않았어? 새 프로젝트 시작했다며.”이한이 물었다.“당분간은 여기 있으려고.”강현수가 답했다.5년이나 지났음에도 임유진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강지혁밖에 없었지만 그는 그럼에도 떠날 수가 없었다. 방금처럼 그저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기만 해도 좋으니 그저 곁에 있고 싶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이한은 강현수의 대답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뒤돌면 해외로 가 있던 놈이 갑자기 해외 스케줄을 취소했다는 건 물어보나 마나 임유진 때문일 게 분명했다.사실 평소 가벼운 마음으로 이제 그만 임유진을 잊으라고는 했지만 만날 때마다 점점 야위어가는 강현수를 보고 있자니 이한은 이제 진심으로 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임유진이 돌아온 이상 강지혁은 절대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 즉 강현수에게는 영원히 기회가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임유진은 강지혁과 함께 간단하게 디저트로 배를 채운 후 홀로 테라스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보니 마침 백연신이 넋을 잃은 얼굴로 달빛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오늘은 만월이라 평소보다 달빛이 조금 더 강한 듯한 느낌이었다.백연신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인기척 소리에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임유진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왜 혼자예요?”“혁이는 지금 사업 얘기로 한창이라 혼자 왔어요.”임유진이 답했다.“그러는 백연신 씨야말로 왜 혼자예요? 고은채 씨는요?”“일이 있어서 먼저 갔어요.”임유진은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 이내 백연신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지영이는 백연신 씨를 정말 많이 사랑했어요. 둘이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도 늘 백연신 씨와는 가치관이 달라 헤어진 것뿐이지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진 건 아니라고 했어요. 백연신 씨는 그저 사랑과 사업 중에서 사업을 택한 것뿐이라면서.”임유진의 말에 백연신은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저도 모르게 꽉 말아쥐었다.“지영이는 백연신 씨와 헤어지고서 나서 단 한 번도 백연신 씨를 원망하거나 미
정다연은 볼을 감싼 채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정인태를 바라보았다.“아빠, 내가 틀린 말 했어요? 나는...”“입 다물라고 했지! 네가 뭔데 회장님 걱정을 해?! 그리고 네가 뭐라고 사모님이 사생활을 털어놔?!”정인태는 어렵게 일군 사업이 딸 때문에 한순간에 엎어질까 봐 전례 없는 분노를 터트렸다.하지만 이미 일은 엎질러졌고 그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어버렸다.“며칠 전에 얘기했던 계약 건은 아무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네요.”강지혁의 청천벽력같은 말에 정인태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강지혁은 얘기를 다 마쳤다는 듯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았다.“발은 좀 어때? 이제 괜찮아?”“응, 괜찮아졌어.”“배는 안 고파? 저쪽으로 가서 뭐 좀 먹을까?”“응, 그러자.”아침에 눈을 뜨고서부터 줄곧 온 신경을 파티에 쏟아부었던 터라 안 그래도 허기가 느껴졌던 참이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은 채 디저트 코너로 향했다.두 사람이 떠난 후 정인태는 곧바로 또 한 번 딸의 뺨을 내리쳤다.“너 때문에 우리 집안은 망했어! 이런 멍청한 것! 그러게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정다연은 두 뺨이 빨갛게 부은 채로 눈물을 글썽였다. 자신감 넘치던 모습은 몇 분도 안 돼 온데간데없어졌다.상황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볼 장 다 봤다는 듯 하나둘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었다. 5년 만에 돌아온 안주인이라고는 하나 임유진은 여전히 강지혁이 사랑하는 아내라는 것을 말이다.고은채는 가만히 옆에서 소란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리며 백연신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임유진 씨 능력 좋은데요? 5년이나 지났는데도 강지혁 씨의 마음을 꽉 잡고 있고. 정 회장 가문은 조만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되겠네요. 협력해줄 회사가 아무도 없을 테니까.”“고은채, 너는 사랑이 뭔지 몰라.”백연신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생각해요? 만약 내가 사랑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과연 연신 씨한테 5년이라는
정다연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이는 강지혁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숨을 헙 하고 들이켰다.“얘기는 다 끝났어?”임유진이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응.”강지혁은 조금 더 걸어와 임유진의 앞에 섰다.“무슨 소란인 건데?”“다른 건 아니고 여기 정다연 씨가 내가 변호사인 줄도 모르고 나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더라고. 그래서 그러면 안 된다고 차분하게 얘기를 하던 중이었어.”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강지혁은 생각보다 나약하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조금 의외라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사실 늘 파티장에는 자기 분수도 모르고 설치는 부류들이 있기에 만약 그것들이 임유진에게 뭐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호되게 갚아줄 심산이었다.그런데 지금 보니 임유진은 누군가가 괴롭힌다고 해서 쉽게 당해줄 사람도 아니었고 도리어 침착하게 말로 제압하는 당찬 여자였다.정다연은 임유진의 말에 서둘러 해명했다.“회, 회장님, 오해예요. 사모님에 대해 함부로 얘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저는 그저 사모님이 여러모로 오해를 받고 있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지난 5년간 어떻게 사셨는지 얘기해 달라고 한 것뿐이었어요! 다른 뜻은 절대 없었어요!”“오해?”강지혁의 차가운 시선이 정다연의 얼굴에 고정됐다.“그럼 누가 뭘 어떻게 오해했는지 어디 한번 들어볼까?”당연하게도 그의 질문에 나서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저... 저는 정말 아까 사람들이 다 오해하고 궁금해하길래... 그래서 대신 물은 거예요. 저, 정말 악의는 하나도 없었어요. 믿어주세요...”정다연은 지금 식은땀이 다 났다. 아무리 강지혁이 욕심났어도 끝까지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네가 뭔데 사람들을 대변해 내 와이프의 지난 5년간을 묻지? 우리 집 일에 간섭도 다 하고 정씨 가문도 꽤 심심한가 봐?”강지혁은 상대가 어리다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정다연은 다리가 풀리는 느낌에 휘청거리다 간신히 다시 중심을 잡았다.그때 50대 중후반 정도로 돼 보이는 남성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다름 아닌 정다연의